photostory-宮

경복궁1(광화문, 정전,편전,경회루 영역)

kyeong~ 2013. 5. 20. 20:41

 


 

 

2013.4.26.금

경희궁에서

경복궁까지는 걸어서 20분거리

서울 도심의 풍경을 보며

알맞은 햇살과

느슨한 바람이 노니는 오후

경복까지 걸어서 갔다

언제 서울의 도심을 이렇게 한가로이 걸었던 날이 있었던가

언제 서울의 도심을 이렇게 아름다운 눈으로 바라보았던 날이 있었던가

북적거리는 서울에서 늘 쫓기듯 살아왔다.

광화문 광장의 이순신장군과 세종대왕 동상이 풍경으로 다가오고

삶의 무게를 던지고 걷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광화문광장                                                                                                                   

 

 

 

 

    

경복궁                                                                                                                      

 

 

 

태조 4년(1395)에 창건된 조선왕조의 법궁(法宮)이다.
임진왜란(1592) 당시 왜군에 의해 완전 소실된 뒤 273년간 재건하지 못하였다.
고종 2년(1865) 흥선대원군의 주도하에 재건을 시작해 고종 5년(1868)에 가장 큰 규모로 복원,

다시 법궁의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고종 32년(1895) 경복궁에서 명성황후가 일본 낭인에 의해 시해당하자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파천하면서 마침내 궁궐로써 기능을 마감한다.

그뒤 일제에 의해 총독부 건물이 들어서는 등 조직적으로 훼손되어 현재는 원래 규모의 약 15%만 남게 되었다.
경복궁은 2030년까지 약 70%까지 복원할 예정이며 현재 약 30%정도 복원하였다고 한다.

 

 

 

 

 

 

 

 

 

 

●궁궐개요 

  사적 117호
  소 재 지 : 서울시 종로구 세종로 1-56
  창건시기 : 1395년 (태조 4년)
  지정 문화재 현황
  - 국보 : 근정전(223호), 경회루(224호)

  - 보물 : 자경전(809호), 자경전 십장생굴뚝(810호), 교태전 아미산굴뚝(811호),

              근정문과 행각(812호), 풍기대(847호)

   현 면 적 : 126,337 평 (416,990㎡)

 

 

 

 

 

 

광화문(光化門)

광화문은 경복궁의 남문이며, 궁성의 정문이다.
광화문은 국왕이 드나드는 정문이기도 했지만, 조선의 법궁인 경복궁의 정문이었기 때문에

다른 궁궐의 정문에 비해 그 규모와 격식 면에서도 매우 웅장하고 화려했다.

경복궁 창건 당시에는 특별한 이름이 없이 궁제에 따라 '오문(午門)'으로 부르다가,

 

태조 3년(1395) 정도전에 의해 '정문(正門)'으로 이름을 바꾸지만, 세종 8년(1426)에 경복궁을 수리하면서

집현전에서 '광화문(光化門)'이라 이름을 지어 올리면서 지금의 광화문이란 이름을 얻게 되었다.

 

가운데 문의 천장에 그려져 있는 주작朱雀(남쪽방위신)

박정희 대통령의 친필 현판


 

●임진왜란 때 소실

->고종 2년(1865) 경복궁을 재건

 

●일제시기에 크게 훼손. 광화문 뒤편 흥례문 일대를 없애고, 1926년 조선총독부청사를 완공하게 됨

 

●한국전쟁 당시 폭격으로 석축만 남고 문루가 완파.

 

 

●광화문이 현재의 모습으로 재건된 것은 1968년 박정희 정권시 파괴된 문루를 다시 짓고 광화문을 현재의 자리로 옮겨 옴.

 

 

●새로 재건한 광화문은 철근 콘크리트로 지어졌으며, 재건 당시 광화문의 축을 경복궁의 중심축에 맞춘 것이 아니라 당시 중앙청으로 쓰이던 구 조선총독부청사의 축에 맞추어, 그 결과 3.5도 가량 본래의 축과 어긋나게 틀어지고 말았다

 

 

●현재  고증을 통하여 다시 복원한 상태임

 

 

 

 

 

 

 

 

 

 

 

 

 

 

 

 

 

 

 

 

 

 

 

 

 

 

 

 

 

 

 

 

 

 

 

   

 

 

홍례문 영역                                                                                                                       

흥례문(興禮門)

경복궁 창건 당시 지어졌으나

세종 8년(1426) 10월에 집현전으로 하여금 문의 이름을 짓게하여 처음에는 홍례문(弘禮門)이라 했으나,

고종 때 재건하면서 흥례문(興禮門)으로 문 이름을 고쳐 짓게 되었다.

흥례문은 1912년 조선총독부 청사 건립이 본격화되면서 주변행각과 영제교 등이 철거되기 시작하여,

1915년 일제에 의해 경복궁에서 개최된 시정5주년기념 조선물산 공진회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상당부분 철거되고,

 이듬해 조선총독부청사를 흥례문 자리에 짓기 시작하면서 완전히 철거된다.

한편 흥례문을 철거하고 들어선 조선총독부 청사는 1926년 완공되어 해방이후 정부종합청사,

국립중앙박물관 등으로 쓰이다가

1995년 8월 15일 광복 50주년을 기념해서 철거되기 시작한다.

이후 흥례문 복원계획에 따라 1996년부터 복원을 추진하여

2001년 10월 흥례문과 주변행각, 영제교, 유화문, 기별청 등이 복원된다.

흥례문이 일제에 의해 완전 철거된지 85년만의 일이었다.

흥례문 현판 글씨는 2001년 10월 새로 지으면서 서예가 정도준 선생이 쓴 것이다.

 

 

영제교(永濟橋)

궁궐에는 배산임수의 입지조건을 갖추는 명당수의 의미로 금천(禁川)을 파고,

왕의 공간과 외부공간을 구분짓는 상징적인 돌다리를 두었다.

경복궁의 이러한 상징적인 돌다리가 바로 영제교에 해당한다.

지금의 영제교라는 명칭을 얻게 된 것은 세종 8년(1426)에 와서다.

왕명을 받들어 집현전에서 영제교라는 이름을 지어 올리면서 공식 명칭을 얻게 되었기 때문이다.

 

서수

몸에 비늘로 덮혀 있고 외뿔이 달린 이 돌짐승을 영조 때 지은 <경복궁유관기>에 '천록(天祿, 天鹿)'이라 적고 있다.

천록은 <후한서(後漢書)> '영제기'에 나오는 상상의 짐승인데, 사악한 것을 물리치는 벽사의 능력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물길을 타고 잠입하는 사악한 것들을 물리쳐 궁궐을 수호하려는' 뜻이 영제교의 돌짐승에 담겨져 있는 것이다.

1926년 일제에 의해 완전히 철거된 것을 2001년 10월 현재의 원위치로 재건하였다.

 

 

근정문(勤政門)

근정문은 근정문 일대 행각과 더불어 보물 812호

근정문은 3문으로 되어있는데, 흥례문과 마찬가지로 답도가 있고 큰 가운데 문으로는 왕만이 드나들었다.

근정문 양 옆 동서로 난 문으로는 문관과 무관의 전용 출입문이었는데, 동쪽의 일화문(日華門)으로는 문관(文官)이,

서쪽의 월화문(月華門)으로는 무관(武官)이 드나들었다.

근정전과 마찬가지로 근정문에서도 왕위 즉위식 등 중요한 행사가 치러졌다.

왕이 승하하면 왕세자는 근정문에서 즉위식을 거행한 후에 근정전 옥좌에 앉는 절차를 밟았다.

이곳 근정문에서 왕위에 오른 역대 국왕으로는 단종(1452년), 성종(1469년), 선조(1567년)가 있다.

근정문은 궁궐의 법전(정전) 정문 가운데 유일하게 중층으로 된 건물이다.

근정전과 마찬가지로 고종 4년(1867)에 재건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유화문(維和門)과 궐내각사(闕內各司)

영제교를 지나면 근정문에 이르기 전에 왼편으로 기별청(奇別廳)과 유화문(維和門)이 보인다.

기별청은 승정원에서 처리한 일을 아침에 기별지(奇別紙)에 적어서 알리는 일을 맡아보았다.

기별청 옆 유화문을 열고 나가면 경복궁의 남서쪽 공간에 위치했던 궐내각사 영역으로 통한다.

궐내각사는 왕을 측근에서 보필하며 국정의 전반을 논하고 행정업무를 처리하던 관원들의 활동공간이다.

말하자면 궁궐에 들어와 있는 관서가 바로 궐내각사였으며, 관원들은 경복궁의 서문인 영추문을 통해 이곳으로 출퇴근을 했다.

 

 

유화문의 후면

 

 

 

 

정전영역                                                                                                                        

 

정전(勤政殿)국보 223호

근정전은 경복궁의 으뜸 전각인 법전(法殿, 正殿)이다.

태조 3년(1394)에 창건하였으나, 임진왜란 때 불타서, 고종 4년(1867)에 재건하였다

"근정전"이라는 이름은 태조 3년(1395) 10월 경복궁 창건 당시 정도전이 지어 올린 것으로,

"임금의 부지런한 자세가 정치의 으뜸"이라는 뜻이다.

이곳은 신하들의 조하(朝賀)를 받거나, 왕위 즉위식이나 외국사신 접견 등 국가의 중요 행사를 치르던 곳이다.

역대 국왕 가운데 정종(1398년), 세종(1418년), 세조(1455년), 명종(1545년)이 근정전에서 즉위하였다.

 

 

근정전은 조선시대 궁궐의 법전 가운데 유일하게 상월대와 하월대에 난간을 두르고 돌짐승들을 조각해 놓았는데,

이는 경복궁이 법궁으로서 갖는 위상을 근정전의 격식을 통해 잘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상월대의 난간에는 방위신에 해당하는

사방신(四方神)을 동서남북의 방향에 맞게 조각해 놓다


상월대와 하월대의 난간 곳곳에는 십이지신(十二支神)과 상서로운 동물(瑞獸)들을 조각해 근정전을 화려하게 장식했다.

 

 

 

 

 

 

 

 

 

 

 

 

 

 

 

 

일월오봉병(日月五烽屛)으로 둘러쳐진 어좌가 높은 대 위에 있고 통간으로 높은 천장을 형성하였다.

천장 중앙에는 7개의 발톱을 갖고 있는 쌍룡을 나무로 조각해 매달았다.

 

근정전 봉황무늬 답도


천장 중앙, 7개의 발톱을 갖고 있는 쌍룡


 

 

 

 

 

 

 

 

 

 

 

 

 

 

 

근정전 마당의 차일고리

 

 

편전영역                                                                                                                     

사정전(思政殿)보물 제1759호

근정전의 바로 뒤 일직선상에 위치하며, 왕이 공식집무를 보던 편전(便殿)으로 쓰였다.

사정전에서는 문신들과 함께 경전을 강론하거나 종친, 대신들에게 주연을 베풀기도 했다.

'사정전'이란 이름은 태조 3년(1495) 10월 경복궁 창건당시 정도전이 지어 올린 것으로,

'사정(思政)'의 뜻은 '임금이 깊게 생각해서 옳고 그름을 가려 백성을 굽어살필 수 있도록 취해야 할 마음가짐'을 의미한다.

그 뒤 사정전은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던 것을 고종 4년(1867) 재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사정전은 왕의 편전이면서, 크고 작은 행사가 열렸던 상징적인 중심 건물이었던 것이다.

사정전 바닥은 온돌이 깔려있지 않다. 따라서 연중내내 이곳에서 공식적인 집무를 보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사정전 내부

사정전 내부에는 두 마리의 용이 구름 속에서 꿈틀대는 '운룡도(雲龍圖)'가 벽화에 그려져 있었으나,

2001년 초 보존처리를 위해 떼어내 별도 보관하고 있어 지금은 찾아 볼 수 없다.

 정면 5간, 측면 3간의 다포계, 겹처마 팔작지붕 건물이다.

 


사정전내부 집기들기들

사정전 내부의 '운룡도(雲龍圖)'와 천정

고종4년 재건하여 현존

 

 

 

 

 

 

 

천추전과 만춘전의 굴뚝

 

 

 

 

 

 

 

 

 

 

 

 

 

 

 

 

 

 

 

 

 

 

 

 

 

 

 

 

 

 

 

 

 

만춘전萬春殿

사정전 바닥은 온돌이 깔려있지 않다. 따라서 동절기에는 만춘전과 천추전에서 왕의 일상적인 지무를 보았다고 한다.

용마루에 회벽을 두르지 않은 검소한 전각으로 만들었다. 월대로 오르는 계단도 간단하게 하나만 두었다.

사정전의 동서쪽에 위치한 만춘전, 천추전 등에

온돌을 깔고 사정전과 더불어 왕의 일상적인 집무실로 함께 쓰였다 

 

천추전千秋殿

 

천자고 지자고.....월자고~

사정전의 앞(남쪽)에 위치하는 행각 건물이다
행각에는 기둥과 기둥사이의 칸수에 따라 방을 구획하여
방마다 천자문의 글자 순서에 따라 건물명을 붙였다.
건물명은 서쪽에서 동쪽으로, 즉 사정전에서 바라보면 오른쪽에서 왼쪽 순으로
천자문의 글자순서대로 천자고, 지자고 ~ 월자고까지 이름지어졌다.
건물의 명칭인 천자고(天字庫)에서 알 수 있듯이
내전에서 사용하던 궁중 물품들을 보관하던 창고로 사용하던 건물이다.

 

수정전(修政殿)

수정전은 국왕이 일상적으로 기거하는 곳, 혹은 편전 등의 용도로 쓰였던 건물이다.

세종 때는 집현전(集賢殿)을 설치하여 세종 28년(1446) 9월 이곳에서 훈민정음(訓民正音)이 창제되기도 한다.

세조 때는 예문관(藝文館)으로도 쓰였으나 임진왜란으로 소실되고

고종 4년(1867) 재건된 후 군국기무소(軍國機務所) 및 내각(內閣) 청사로 쓰이기도 했다.

현재 수정전은 수정전 건물과 월대만 남아 있지만, 1908년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북궐도형>에 의하면 수정전 주변이 행각으로 둘러 쌓여 있었고,

수정전 건물의 좌우측으로 다시 복도를 내어 수정전 주변 행각과 바로 연결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일제시기에 들어와 일제는 수정전 주위의 행각을 모두 철거하고 만다.

현재는 수정전 건물 좌우측에는 당시에 복도를 연결했던 흔적만 남아 있다.

한편 수정전은 건물의 간수(間數)로 따졌을 때, 현존하는 경복궁 내 전각 중 규모가 큰 건물에 해당한다.

 

늦은 밤까지 책을 읽으며 연구를 하던 신하, 신숙주가 차가운 집현전 건물에서 잠이 들자 세종대왕이 친히 왕림하시어

세종대왕이 입고 있던 옷을 벗어 신숙주에게 덮어주었다는 일화가 서려있는 곳이다.

 

 

보루각터

수정전 앞 마당 보루각터는

장영실이 자격루를 만들었떤 건물 보루각이 있던 자리를 나타내는 표지석

보루각은 조선의 새로운 표준시계를 관장하던 관청

 

 

경회루                                                                                                                          

 

 

 

경회루(慶會樓)

태조 때 경복궁 서북쪽에 작은 누각을 지었으나,

태종 12년(1412) 4월 보다 큰 규모로 새롭게 누각을 짓고, 같은 해 5월 하륜에게 명하여 이름을 '경회루'라고 했다.

태종 당시 원래 이곳은 사신의 접대 등을 목적으로 지어졌다.

하지만 그 외에도 과거시험이나 활쏘기 등을 열거나, 공신들에게 연회를 베푸는 등 다양한 용도로 활용되어 왔다.

또한 가뭄이 들면 이곳에서 기우제를 지내기도 했다고 한다.

경회(慶會)의 뜻은 하륜이 태종의 명을 받들어 올린 기(記)에

"올바른 정사를 펴는 임금은 올바른 사람을 얻는 것으로 근본을 삼았으니,

올바른 사람을 얻어야만 '경회(慶會)'라고 할 수 있다"고 밝히며

이는 곧 "임금과 신하가 덕으로써 서로 만나는 것을 말한다"고 적고 있다.

 

경회루의 현판 글씨는 건립 무렵 세자였던 양녕대군이 썼으나,

지금의 현판은 '조일강화조약(1876)'을 맺을 때 접견대신을 지냈던 신헌(申櫶)의 글씨다.

 

한편 경회루는 단일 누각으로 국내 최대규모의 웅장함을 자랑하지만,

그 건축적 특성면에서 심오한 우주의 원리를 담고 있다.

정학순은 <경회루전도>를 통해 경회루의 원리를 밝히는 가운데

경회루는 불을 억제하기 위해 지어졌다고 밝히면서 그 속에 깃든 뜻풀이를 시도했다.

동으로 만든 용 두 마리를 연못 북쪽에 넣어 두었는데 이는 불을 막기 위해서라고 적고 있다.

실제로 1997년 11월 경회루 연못의 물을 빼고 청소를 하던 도중에 북쪽 못 바닥에서 동으로 만든 용이 출토되기도 했다.

 


경회루의 바깥 돌기둥이 네모지고

안쪽 기둥이 둥근 것은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지다'는

천원지방(天圓地方)의 우주관을 드러내 준다고 한다.  


경회루의 상층은 3중으로 되어 있는데

정중앙의 1중 3간은 천지인(天地人) 삼재를 의미하며,

이 3간의 기둥을 이루고 있는 8개의 기둥은 8괘를

 의미한다고 한다.

 

 

 

 

 

 

 

 

 

 

 

 

 

 

 

 

경회루의 출입문은 3개, 첫번째문은 임금의 출입문, 두번째는 왕족, 세번째는 신하들이 출입했다고 한다.

경회루로 건너가는 3개의 다리는 해, 달, 별의 삼광(三光)을 뜻하고,

다리를 건너 경회루 기단 양끝에 있는 2개의 문은 음양(陰陽)을 뜻한다고 한다.

 

 

.http://rekor.or.kr/palace/0414.html 한국의 재발견에서 내용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