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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령 철종의 잠저 용흥궁(龍興宮)

kyeong~ 2013. 8. 10. 19:31

 

 

 

2013.8.1. 목요일 

아스팔트를 녹일것 같은 더위,땅덩어리 어디쯤인가 폭팔할것 같다.

집에 있어도 덥고 나가도 덥다

무엇인가를 살펴보고 얻는 재미가 솔솔한 답사여행...

답사의 재미에 푹빠지다보면 더위쯤은 잊을 수 있기때문에 인천에서 멀지않은 강화도로 향했다.

 용흥궁의 대문을 밀고 들어서는 순간 사대부집의 아늑한 분위가 전해져 온다.

 

용흥궁龍興宮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관청리 144

강화도령 이원복이 19세까지 살았던 곳,

조선 25대 임금 철종의 잠저이다.

 

 

강화도령 철종의 잠저 용흥궁(龍興宮), 시 유형문화재 제20호

 

용흥궁(龍興宮)을 둘러본다.

이름이 암시하듯 용(龍)이 흥(興)한 곳이다.

 

조선 24대 헌종은 4명의 아내에게서 간신히 딸 하나를 얻었는데 이도 일찍 요절하니 무자식으로 세상을 떠났다.

하루라도 왕좌를 비워놓을 수 없었던 왕실에서는 왕실의 큰어른인 순원왕후(순조의 후비로 안동 김씨)가

헌종의 외가 풍양 조씨가 손을 쓰기 전에 정조의 이복 아우 은언군(恩彦君)의 손자 이원범을 옹립하였다.

 역모와 연루돼 집안이 강화도로 귀양 온 몰락한 종친에서 자라던 강화도령 이원범은 농사나 짓는 시골 무지랭이였다.

그런 그가 일약 조선의 왕이 된 것이었다.

이곳 용흥궁 자리는 강화도령이 살던 집터인데,

강화도령이 왕이 된 4년 후(1853년) 강화유수 정기세가 기와로 집을 짓고 용흥궁이라 하였다.

그러니 실제로 강화도령이 살았던 집은 아니다.

강화도에서는 이곳에 용흥궁공원을 만들고 ‘강화도령 첫사랑길’이라고 이름 지어 걷기 길을 만들었다.

이곳에서 출발해 철종의 외가가 있는 냉정리(冷井里)까지 약 12km의 길이다.

 정말로 강화도령은 이곳에 첫사랑의 추억이 있는 것일까? 기록이 없으니 알 수는 없다.

 

대문에 들어서면 벽에 붙어 있는 안내도가 눈에 들어온다

가정집을 안내하듯 직접그린듯한 안내도가 정겹다.

 

 

용흥궁은 강화시내에 다른 주택과 함께 어울려있다

 

 

주택들이 오밀조밀 모여있는 골목에 위치한 용흥궁

 

용흥궁은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관청리에 있는 조선후기 철종(哲宗. 1831~1863)이 왕위에 오르기 전 19살까지 살던 집이다.

좁은 고샅(시골 마을의 좁은 골목길) 안에 대문을 세우고 행랑채를 두고 있는 이 용흥궁(龍興宮)의 건물은

창덕궁의 연경당, 낙선재와 같이 살림집의 유형에 따라 만들어졌다.

 

 

용흥궁의 대문과 비석

왼쪽의 2기의 비석이 있는데

하나는 원범(元範, 철종의 초명)을 왕으로 모시기위한 봉영대신 정원용(鄭元容)의 것이고

또하나는 이곳에 용흥궁을 지은 강화유수 정기세(鄭基世)의 것으로 두사람은 부자지간이다.

 

 

용흥궁 입구

 

 

대문을 들어서면 사랑채로 가는 길과  안채로 들어가는 작은 문이 있다

안채로 들어가는 문에서 바라본 안채의 모습이다.

 

 안채-정면, 7칸, 맞배지붕

 

 

  주인없는 곳에서 이방인을 맞이하는 뜰의 꽃

 

안채에서는 정기적으로 전통다도예절 강좌를 열고 있다.

 

 

 안채를 마주보고 있는 행랑채

 

 

안채의 뒷편에서 사랑채로 오르는 대문

 

 

대문에 들어서서 사랑채로 오르는 길에 바라본 안채

 

 

대문에서 바로 사랑채로 오는 문과 행랑채

 

사랑채-정면6칸, 팔각지붕

 

 

 

 사랑채 아궁이

 

용흥궁은 내전, 외전, 별전, 각1동씩으로 이루어져있고

안채와 사랑채를 담으로 구분하였으며

지반의 높이도 달리하였으며

전체적인 모습은 소박한 사대부집의 모습이다.

 

 

사랑채 측면

 

 

사랑채 후면

 

 

 

사랑채 마당에 핀 비비추

텅빈집에 꽃이라도 있으니 좋다.

 

 

 

사랑채 옆에는

철종이 왕이 되기전 이곳에서 살았던 곳을 알리는 비가 있다.

 

이 비각(碑閣)이 세워진 곳이 원래 이원범(李元範)이 살던 초가(草家)가 있던 곳이다.

강화유수 정기세(鄭基世)는 이 곳에 龍興宮을 건립하면서 草家를 허물고 구기비(舊基碑)를 남겼다.

 

 잠저구기비각(潛邸舊基碑閣)

 

 사랑채와 비각사이에 우물

 

 사랑채 뒷편에서 밖으로 나가는 문

~

 

 

 

 

 

귀양살이하는 농부에서 임금이 되어

 역사의 한폐이지을 쓰고 간 철종의 발자욱을 따라 걸어보자.

 

 

 

반 쯤 소실된 철종의 어진

 

복원된 철종의 어진

哲宗의 어진(보물 제1492호)

 

哲宗의 어진(보물 제1492호)은 오른쪽 1/3이 소실되었지만,

남아있는 왼쪽 상단에  " 了三十一歲 哲宗熙倫正極粹德純聖文顯武成獻仁英孝大王 "이라고 적혀 있어,

이 어진(御眞)이 철종 12년(1861)에 모사(模寫)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당시 1개월여에 걸쳐 강사포본(綱紗袍本)과 군복본(軍服本)을 모사했으나 현재는 군복본만이 현전하고 있다.

 이 철종 어진은 왕이 구군복(具軍服)으로 입고 있는 초상화의 유일한 자료이다.

그리고 군복의 화려한 채색, 세련된 선염, 무늬의 정교한 표현 등에서 가치가 있다.

 

 

 

 

 잠저潛邸

 

왕세자와 같이 정상적인 법통(法統)이 아닌,

다른 방법이나 사정으로 임금으로 추대된 사람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살전 집을 잠저(潛邸)라고 한다.

대개 잠저는 왕위에 오른 뒤에 다시 짓는다.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잠저(潛邸)로는 태조 이성계의 함흥 본궁과 개성의 경덕궁(敬德宮),

인조(仁祖)의 저경궁(儲慶宮)과 어의궁(於義宮),

영조의 창의궁(彰義宮) 등이 있다.

 

 

 

 용흥궁龍興宮

 

 이 곳 용흥궁(龍興宮)은 강화도령 이원범(李元範)이 왕위(哲宗)에 오르기 전에 살던 집이었다.

용흥궁은 원래 초가(草家)이었으나,

1853년(철종 4)에 강화 유수 정기세(鄭基世)가 지금과 같은 집을 짓고 용흥궁이라고 이름지었다.

 " 龍이 태어난 곳 "이라는 의미의 용흥궁..

그 후 1903년에 청안군(淸安君) 이재순(李載純)이 중건하였으며

 세월이 흘러 비바람에 헐어진 것을 1974년에 보수하였다.

 

좁은 고샅 안에 대문을 세우고 행랑채를 둔 이 궁(宮)의 건물은

창덕궁의 연경당(演慶堂), 낙선재(樂善齋)와 같이 살림집의 유형에 따라 만들어 졌다.

현재 남아있는 건물은 잠저구기비각(潛邸舊基碑閣) 1동, 內殿 1동, 外殿 1동, 別殿 1동 등이며 팔작지붕에 홑처마 주심포 집이다. 

내전은 전면 7칸, 측면 5칸이며 건평은 90㎡이다. 별전은 정면 6칸, 측면 2칸인 ㄱ자 집으로 건평이 95㎡이다

 

 

 

 哲宗 영정(보물 제1492호)

 

 哲宗의 어진(보물 제1492호)은 오른쪽 1/3이 소실되었지만,

남아있는 왼쪽 상단에  " 了三十一歲 哲宗熙倫正極粹德純聖文顯武成獻仁英孝大王 "이라고 적혀 있어,

이 어진(御眞)이 철종 12년(1861)에 모사(模寫)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당시 1개월여에 걸쳐 강사포본(綱紗袍本)과 군복본(軍服本)을 모사했으나 현재는 군복본만이 현전하고 있다.

이 철종 어진은 왕이 구군복(具軍服)으로 입고 있는 초상화의 유일한 자료이다.

그리고 군복의 화려한 채색, 세련된 선염, 무늬의 정교한 표현 등에서 가치가 있다.

조선시대 .. 518년 동안 27대를 이어온 조선의 王 가운데 사진이 함께 전하는 고종(高宗)과 순종(純宗)을 제외하고

어진(御眞)이 전해지는 경우는 태조 이성계(李成桂)를 비롯하여 영조(英祖)의 반신상(半身像)과 영조(英祖)의 연잉군(延仍君)시절의 어진

그리고 철종(哲宗)의 어진 등 3명 4점뿐이다. 

 

이렇게 조선 왕들의 어진(御眞)이 4점 외에 현존하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6.25전쟁 때문이다.

당시 이승만정부는 부산으로 피란가면서 어진을 비롯한 많은 문화재를 함께 가져 갔는데,

환도(還都) 결정후 서울로 어진들이 올라가기 이틀 전, 밤중에 어진(御眞)을 보관했던 건물에 화재(火災)가 발생하여 이 때 어진 대부분을 잃었다. 

 

다행히 영조(英祖)의 연잉군(延仍君)시절의 어진과 철종(哲宗)의 어진을 불길에서 구했으나

이미 심하게 훼손된 후이었다.

이렇듯 1950년까지만 해도 남아있던 조선 왕들의 어진이 사진(寫眞)으로도 전하지 않은 이유는

왕의 어진을 함부로 사진을 찍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강화도령

 

철종(哲宗 .. 1831~1863)

이름은 변(변), 어릴 적 이름인 초명(初명)은 원범(元範)이다.

자는 도승(道升), 호는 대용재(大勇齋). 

정조(正祖)의 아우 은언군(恩彦君 .. 李咽)의 손자로 아버지는 전계대원군 (全溪大院君. 이광)이며,

 어머니는 용성대부인(龍城大夫人) 염씨(廉氏)이다.

아버지 전계대원군(全溪大院君)에게는 세 아들이 있었는데,

첫째가 이원경(李元慶), 둘째가 이경응(李慶應) 그리고 셋째 아들이 후일 철종이 되는 이원범(李元範)이다.

 

 

 

민진용의 옥閔晉鏞의 獄

 

순조(純祖) 말기부터 헌종(憲宗) 초기까지 국정을 좌지우지하던 안동김씨(安東金氏)의 세도정치가

그 핵심이었던 김유근(金洧根)과 김홍근(金弘根)이 연이어 죽음으로써 잠시 권력에 틈이 생겼다.

이 기회를 틈타 하급(下級)의 무부(武夫)이었던 민진용(閔晉鏞)이 1844년 이원덕(李元德) 등을 포섭하여

이원범(李元範 ..철종)의 兄인 이원경(李元慶)을 王으로 추대하고자 모의하였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모두 능지처참 당하였다.

이원경도 사사(賜死)되었는데, 뒤에 동생이 철종(哲宗)이되었으므로 회평군(懷平君)으로 추봉된다.

 

강화도 유배

 강화도령 이원범이 13살 때, 위의 민진용(閔晉鏞)의 옥사(獄事)가 발생하고,

              여기에 이원범의 兄 이원경(李元慶)이 관련되어 이원경은 죽음을 당하고,

남은 가족은 모두 교동(喬桐)으로 유배되었다가 곧 강화(江華)로 옮겨졌다. 

강화도에서 이원범(후일 철종)은 아무런 교육도 받지 못하고 농사를 짓거나 나무를 내다 팔아가며 살았다.

그러다 5년 후 헌종이 후사가 없이 죽자 영조(英祖)의 유일한 혈손인 이원범은

순조비(純祖妃)인 순원왕후(純元王后)의 명으로 궁중에 들어가 덕완군(德完君)에 봉해지고 왕위에 올랐다.

 

 

왜?  하필 강화도령인가

순조시절부터 이어진 안동김씨의 세도정치,

그리고 세도정치의 폐해로 인한 탐관오리들의 전횡으로 삼정의 문란(三政의 紊亂)이 극에 달하여

백성들의 생활이 도탄에 허덕이던 시기이었다.

안동김씨의 세도정치가 계속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순조의 妃, 즉 대왕대비인 순원왕후(純元王后)의 영향이 강하게 작용되었다.

순조의 妃인 순원왕후는 손자인 헌종(憲宗)이 후사없이 죽자

조대비(趙大妃, 헌종의 妃)의 척족(戚族)인 풍양조씨(豊陽趙氏)일파가 왕위를 세울 것을 염려하여 재빨리 손을 써야 했다.

그럴수 밖에 없는 것이 헌종의 6촌 이내에 드는 왕족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7촌 이상의 왕족은 몇명이 있었다.

 

 

왕위의 계승

후대의 왕은 적장자(嫡長子) 등 정상적인 법통(法統)이 없다면

본래 항렬로 따져 동생이나 조카벌이 되는 자로 왕통을 잇게 하는 것이 원칙이다.

왜냐하면 종묘(宗廟)에서 선왕(先王)에게 제사를 올릴 때,

항렬이 높인 이가 항렬이 낮은 이에게 제사를 올리게 해서는 안 된다는 법도때문이었다.

그러나 안동김씨의 척족들은 자심들의 권력을 유지하고,

지위를 더욱 공고히 하기 위하여 헌종의 7촌 아저씨뻘이 되는 강화도령 이원범(李元範)이 가장 적당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렇듯 안동김씨는 권력을 유지하기 위하여 왕가(王家)의 법도(法道)를 철저히 무시하는 전횡을 저지른다.

 

安東金氏의 계속된 집권

이렇게 순원왕후의 명으로 왕위에 오르게 된 이원범 즉 철종,

이 때 그의 나이 19세이었으며 학문과는 거리가 먼 농부이었다.

 나이가 어리고 학문이 없다는 이유로 대왕대비인 순원왕후가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한다. 

그리고 철종이 21세 되던 1851년에는 대왕대비 순원왕후의 근친 김문근(金汶根)의 딸을 철종의 왕비로 맞게 한다.

그 뒤 金汶根은 영은부원군(永恩府院君)이 되어 국정을 좌우하니, 純祖代부터 시작한 안동김씨들의 세도정치는 계속되는 것이었다.

 

 

사도세자의 증손자

강화도령이라는이름으로 비하되는 조선의 제25대 임금 철종이다.

철종은 왕이 되기 전 원범(元範)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애초부터 원범은 왕이 되고자 했던 마음도 없었고,

또 왕이 될 만한 재목도 아니었다.

 

 

사도세자의 증손자이었던 원범은 할아버지인 은언군(恩彦君)마저 역적으로 몰려 죽는 바람에

강화도로 쫓겨와 나무꾼 생활로 생계를 꾸려가고 있었다.

하지만 1849년 헌종(憲宗)이 후사도 없이 갑자기 죽게 되자,

당시 풍양조씨 가문에 눌려 지내던 안동김씨 세력이 이때를 틈타 자신들이 권력을 장악하기 위하여 적당한 인물을 고르던 중

원범이 그들의 레이더망에 걸려 들었던 것이다.

 

 

원범은 글도 모르고  정치와는 더더욱 거리가 먼 인물로

안동김씨 세력이 볼 때에는 그야말로 떡 주무르듯 할 수있는 최적의 허수아비 왕으로 판단되었던 것이다.

19세 나이에 왕의 자리에 오른 철종은 배운 것이 없다는 이유로

23대 왕, 순조(純祖)의 妃,  순원왕후(純元王后) 김씨가 수렴청정을 하게 되었다.

또한 안동김씨 가문의 좌장 격인 김문근의 딸을 철종의 비로 맞아들임으로써 안동김씨의 세도가 절정에 이르게 되었다.

정치적 배후가 없던 철종은 재위 내내 안동김씨 일문의 데릴사위로 살아야만 했던 것이다. 

 

 

그러나 철종은 온화한 농부의 천성을 타고 나 검소했지만 바보는 아니었다.

철종은 빈민 구제나이재민 구휼에 남다른 열정을 가지는 등 영민한 자질을 엿보였다.  

하지만 짧은 학식과 경륜에다 태생적인 자격지심까지 겹쳐 세도정치를 혁파할 방도를 찾지 못하고,

결국 중도에 주저앉고 말았다.

점차 국사를 등한시 하게 된 철종은 33세에 단명하기도 했지만, 정치적으로도 조로(早老)하였다.

 

 

골치 아픈 정치를 내려놓고 권력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하여 점차 여색에 빠져 들었다.

' 바보 철종 '은 안동김씨의 강고한세도정치 앞에서 살아남기 위한 정치적 선택이었던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