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9.27. 선교장, 김시습생가 (강릉 바우길 11구간-신사임당길)
강릉선교장江陵船橋莊
선교장
http://www.knsgj.net / 033-648-5303
관람시간: (동절기) 오전 9시~ 오후5시
(하절기) 오전 9시 ~ 오후 6시
입장료: 성인 3000원 / 청소년(14세~18세) 2000원 / 어린이(6세~13세) 1000원 / 전통문화체험관 이용객 입장료 면제
- 지번:강릉시 운정동 431
강릉선교장江陵船橋莊
강원도 강릉시 운정동에 있는 조선시대 사대부의 주택.
중요민속자료 제5호.
오죽헌으로부터 동쪽으로 1.5㎞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
주위가 시루봉에서 뻗어내린 부드러운 산줄기로 둘러싸여 있고,
가옥 앞으로는 얕은 내가 흐르며, 멀리 안산(案山)과 조산(朝山)이 보이는 명당에 자리잡고 있다.
효령대군의 11대손인 이내번(李乃蕃)이 집터를 잡은 후 사랑채인 열화당(悅話堂:1815)을 비롯하여
활래정(活來亭:1816), 동·서별당 등이 후손들에 의해 지어졌다.
6·25전쟁 이후 일부 건물이 유실되었으나
안채·사랑채·동별당·서별당·가묘·행랑채를 비롯하여 정자까지 갖추고 있어
조선시대 사대부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대표적인 주택이다.
선교장 앞에는
구월이지만 아직도 다 못지고...배롱나무꽃이 몇송이 남아 있다.
강릉선교장江陵船橋莊 의 활래정
어구(於口)에 들어서면 우측(右側)에 연지(蓮池)가 있다.
지중(池中)에 당주(當洲)가 있고 잘생긴 소나무가 서 있고,
그 건너편으로 소나무를 배경으로 지반(池畔)에 세운 정자이다.
활래정(活來亭)은 선교장에 딸린 외별당이다.
선교장내에는 본채에 서별당과 동별당이 있지만 가장 자연에 가까운 휴식처라고 할 수 있는 곳은
안채와 격리된 별당인 옥외공간에 만들어진 건물로
전면 돌출된 누마루 부분이 연못안에 설치된 돌기둥으로 받쳐 놓은 루(樓)형식으로 건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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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서 바라보는 활랭정...
연꽃이 필때면 신선이 따로 없겠다.
열화당을 세운 다음 해인 순조16년(1816)에 이후(1773~1832)가 건립하였는데
현재 건물은 이후의 증손 이근우(李根宇,鏡農)가 고종43년(1906)에 중건하였다.
정자이름은 주자(朱子)의 詩 「관서유감(觀西有感)」중 '爲有頭源活水來’ 중에서 ‘活來’ 글을 따왔다고 한다.
평면의 간살이는 ㄱ자형으로
온돌방과 마루로 만들어진 몸채와 방지 속에 높은 돌기둥을 세우고 연못 쪽으로 돌출시킨 마루공간으로 이루어져 있다.
행랑채 바깥 마당에는 넓은 방지(方池)를 파고,
못가에 정자인 활래정을 세웠다.
방지 가운데에는 삼신선산(三神仙山)을 모방한 가산 (假山)을 만들어 노송을 심었다.
활래정은 연못 속에 돌기둥을 세우고 건물의 일부를 누마루로 만듦으로써
마치 물위에 떠있는 형상으로, 주변의 풍경과 함께 선조들의 뛰어난 조형미와 조원(造園)기법을 엿볼 수 있다
월하문
활래정으로 드나드는 문
선교장의 별당인 활래정을 뒤로 하고...
열화당으로 들어가본다.
행랑채와 문간채와 대문
문간채(門間棟.大門棟)
선교장 안에 들어가기 위해 가장 먼저 지나야 하는 것이 바로 대문이다.
선교장의 대문은 솟을 대문이다.
솟을 대문은 대문 옆에 있는 행랑채 지붕보다 한층 높인 지붕을 덮고 있는 것을 말한다.
조선 시대 양반들이 초헌이라는 외바퀴 수레를 탄 채로 대문을 드나들려면
대문의 지붕을 주변 행랑채보다 한층 높일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따라서 솟을 대문은 조선 시대 상류 주택의 상징이 되었다.
선교장 대문을 들어서면....
선교장의 사랑채 열화당
열화당(悅話堂)은 남자주인이 전용하는 사랑채이다.
이 건물은 1815년(순조15) 이후(李厚, 鰲隱處士)가 건립한 건물이다.
건물이름은 도연명(陶淵明)의「귀거래사(野去來離)」22)의 구절에서 연유하였는데
“삼형제가 늘 열화당에 모여 정담을 나누고 싶다[悅親戚之情話]”는 의도를 담고 있는데,
즉 ‘전주이씨 일가친척이 이곳에서 정담과 기쁨을 함께 나누자’라는 뜻으로 지어진 이름이다.
도연명(脚烈明)의「귀거래사(野去來離)」의
く前略>
世興我而相遺 復駕言兮焉求 悅親戚之情話 樂琴書以消憂
く後略>
세상과 더불어 나를 잊자.
다시 벼슬을 어찌 구할 것인가.
친척들의 정다운 이야기를 즐겨 듣고,
거문고와 책을 즐기며 우수(憂憩)를 쓸어 버리리라.
라는 구절에서 연유했다는 이 건물이름에서
“삼형제가 늘 열화당에 모여 정담을 나누고 싶다”는 오은거사의 뜻을 더듬어 볼 수 있다.
이러한 열화당은 오은 이후로는 이씨가의 사랑채 역할을 하면서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
안채
안채는 1748년 처음 배다리에 전주이씨 가의 삶 터전으로 개기되면서 창축된 건물이다.
우측에 동별당, 서측으로 서별당과 이어져 있는데 집의 규모에 비하여 소박한 건물이다.
안채를 들어가기 위해서는 따로 들어가는 일각문이 있고,
내부로 들어서면 안채 앞쪽으로 안뜰이 있고, 그 뒤로 대청과 방, 우측에 방과 부엌이 있다.
동별당(東別堂)
경농 이근우가 1920년에 건립한 건물로서,
안채와 연결된 별당으로서 주로 건물 주인이 거처하며 생활하던 곳이다.
생활 용도에 있어서는 안채와 연결되어 있다는 데에 큰 의미가 있다하겠는데
가족들간의 단란을 위하여 이 집에 찾아오는 많은 친척이나 외척 등
내객들과 접하는 공간으로 외부와 분리하도록 건축되었다.
즉 전주이씨 가문의 주인으로서 가족들과 함께생활할 수 있는 안채에 접근된 거처이다.
서별당(西別堂)
서별당은 1995년 11월에 건축되었다.
원래의 것은 무경의 증손인 이용구(雲業 李流九)에 의해 건립되었으며,
안채와 열화당사이의 깊숙한 곳에 위치하였는데 선교장에서 가장 높은 지대가 된다.
전주이씨가의 서재와 서고로 사용되었으며 석축위 조금 높직한 기단상부 평탄지에 안채와 같은 높이로 연결되었다.
서고는 누마루형식으로 되어 문을 열면 통풍이 잘되고,
마루는 여름철, 방은 겨울철의 독서실로 이용되었다.
이 건물은 한국전쟁 때 소실되었던 것을 1996년에 복원한 것이다.
안채의 장독대
중사랑채
선교장 손님방이다.
선교장 안내인의 설명을 듣는 관람객
선교장 밖 초가집
김시습 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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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을 오랫동안 알고 지내면서도
김시습기념관이 여기에 있는지 몰랐다.
매월당(梅月堂) 유필(遺筆) 시(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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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습金時習1435년 한성출생~1493년 홍성에서 사망 요약 조선 초기의 문인. 3세에 능히 글을 지을 정도로 천재적인 재질을 타고 났던 그는 21세 때 수양대군이 단종을 몰아내고 대권을 잡았다는 소식을 듣고는 그 길로 중이 되어 방랑의 길을 떠났다고 알려져 있다. 이때 전국을 두루 돌면서 백성들의 삶을 직접 체험했고 그 경험들이 창작의 원료가 되었다. 그는 현실과 이상 사이의 갈등 속에서 어느 곳에도 안주하지 못한 채 기구한 일생을 보냈는데, 그의 사상과 문학은 이러한 고민에서 비롯됐던 것이다. 본관은 강릉. 자는 열경(悅卿), 호는 매월당(梅月堂)·동봉(東峰)·벽산청은(碧山淸隱)·췌세옹(贅世翁) 등이며 법호는 설잠(雪岑)이다. 신라 알지왕의 후예인 원성왕(元聖王)의 동생 주원(周元)의 후손이다. 무반 계통으로 충순위(忠順衛)를 지낸 김일성(金日省)의 아들이다.
생후 8개월에 글뜻을 알았고 3세에 능히 글을 지을 정도로 천재적인 재질을 타고 났다. 5세에는 세종의 총애를 받았으며, 후일 중용하리란 약속과 함께 비단을 하사받기도 했다. 나아가 당시의 석학인 이계전(李季甸)·김반(金泮)·윤상(尹祥)에게서 수학하여 유교적 소양을 쌓기도 했다. 그의 이름인 시습(時習)도 〈논어 論語〉 학이편(學而篇) 중 '때로 익히면 즐겁지 아니한가'라는 구절에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과거준비로 삼각산 중흥사(三角山 中興士)에서 수학하던 21세 때 수양대군이 단종을 몰아내고 대권을 잡은 소식을 듣자 그 길로 삭발하고 중이 되어 방랑의 길을 떠났다(→ 색인 : 생육신).
그는 관서·관동·삼남지방을 두루 돌아다니면서 백성들의 삶을 직접 체험했는데, 〈매월당시사유록 每月堂詩四遊錄〉에 그때의 시편들이 수록되어 있다. 31세 되던 세조 11년 봄에 경주 남산(南山) 금오산(金鰲山)에서 성리학(性理學)과 불교에 대해서 연구하는 한편, 최초의 한문소설 〈금오신화〉를 지었던 것으로 보인다. 37세에 서울 성동(城東)에서 농사를 직접 짓고 환속하는 한편 결혼도 했다 . 벼슬길로 나아갈 의도를 갖기도 했으나 현실의 모순에 불만을 품고 다시 관동지방으로 은둔, 방랑을 하다가 충청도 홍산(鴻山) 무량사(無量寺)에서 59세를 일기로 일생을 마쳤다.
그는 현실과 이상 사이의 갈등 속에서 어느 곳에도 안주하지 못한 채 기구한 일생을 보냈는데, 그의 사상과 문학은 이러한 고민에서 비롯한 것이다. 전국을 두루 돌아다니면서 얻은 생활체험은 현실을 직시하는 비판력을 갖출 수 있도록 시야를 넓게 했다. 그의 현실의 모순에 대한 비판은 불의한 위정자들에 대한 비판과 맞닿으면서 중민(重民)에 기초한 왕도정치(王道政治)의 이상을 구가하는 사상으로 확립된다.
한편 당시의 사상적 혼란을 올곧게 하기 위한 노력은 유·불·도 삼교(三敎)를 원융적(圓融的) 입장에서 일치시키는 것으로 나타난다. 불교적 미신은 배척하면서도 조동종(漕洞宗)의 인식론에 입각하여, 불교의 종지(宗旨)는 사랑(자비)으로 만물을 이롭게 하고 마음을 밝혀 탐욕을 없애는 것이라고 파악한다. 또 비합리적인 도교의 신선술(神仙術)을 부정하면서도 기(氣)를 다스림으로써 천명(天命)을 따르게 하는 데 가치가 있다고 한다. 즉 음양(陰陽)의 운동성을 중시하는 주기론적(主氣論的) 성리학의 입장에서 불교와 도교를 비판, 흡수하여 그의 철학을 완성시키고 있는데, 이런 철학적 깨달음은 궁극적으로는 현실생활로 나타나야 한다고 강조했다. 유저(遺著)로는 〈금오신화〉·〈매월당집 梅月堂集〉·〈매월당시사유록〉 등이 있다.
(브리태니커백과사전) |
사실 김시습기념관은 공사중이라 내부를 잘 둘러보지못하고
자료를 찾아 편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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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 감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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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시절 사임당 경시대회 이후 참 오랫만의 방문이라서
반갑고...그리운 마음으로 둘러보았다.
2014.9.27.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