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story-山

2017.4.23.일. 김제/완주 모악산

kyeong~ 2017. 4. 23. 02:16








나무의 짐



꽃이 피고 지는 계절

꽃짐을 등에 지고 사는 일이

아름다운 일인 걸 알까

그저 짐이라고 바람이 부는 데로

꽃잎 흩날리기를 기다릴까


예전에는 길을 나서는 것이 서먹했지만

어디를 가나 전혀 어색하지 않은 지금

이렇게 사는 일이 숙명이라 생각하는 것처럼

꽃짐은 나무의 운명이리라


지난날을 아름답게 꾸미는 시간의 힘

인간의 시간은 갈수록 꽃에 빠져든다

아름다움을 갈구하는 것이다

언젠가는 지고 마는 꽃

지는 꽃, 슬퍼하지 마소서

아름답게 사는 일은 짐을 지고 사는 일이다.


梁該憬

2017.4.23. 일. 모악산을 오르다가




모악산에 길을 가려고 나선 것이 아니라

금산사에 가고 싶어서 길을 나섰다.

김제땅 망해사에 갔다오고 나서 김제권역의 사찰을 보지 못했던 까닭에

반가운 마음으로 길을 나선 것이다.

날씨는 청명하고 진달래는 졌으리라 짐작했지만

듬성듬성 웃으며 인사하는 진달래 덕에 길은 낯설지 않았다

먼곳 처음 보는 땅을 걸으면서도 우리가 낯설지 않은 것은

이산저산에서 보고왔던 꽃이며 나무가 길손을 맞이하는 덕에

그길이 그길같은 편안함을 얻으며 산을 오르는 것이다.

우리나라땅 어딜가도 진달래 안피는 산이 있으랴

이맘때면 연두빛이 와르르르 파도를 타지 않는 산줄기가 있으랴

그래서 산을 많이 오르는 자는 길이 낯설지 아니하며 길이 낯설지 않는 다는 것은

그 누구와도 무한한 흡입력으로 대화를 나눌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모악산 진달래며 겹벚꽃이며 꽃잔치를 하는 날 최대한의 반가움으로 금산사를 맞이했다.




모악산 母岳山                        

       

높이 794m. 노령산맥의 말단부에 솟아 있으며, 주위에 선각산·국사봉 등이 있다.

어머니가 어린 아이를 안고 있는 모양의 바위가 있어서 모악이라고 했다.

능선이 북동-남서 방향으로 뻗어 있으며, 동쪽 사면을 제외한 전사면이 비교적 완만하다.

동쪽 사면에서 발원한 계류는 구이 저수지에 흘러든 뒤 삼천천을 이루어 전주시로 흐른다.

서쪽 사면에서 발원하는 두월천·원평천은 동진강에 흘러들며, 김제 벽골제의 수원이 되기도 한다.


기반암은 중생대 쥐라기의 편마상화강암·석영반암·대보화강암 등으로 되어 있다.

예로부터 이곳에 금이 많이 생산되어 금산이라는 지명이 생겼다고 한다.

지금도 주변에는 사금광산이 몇 군데 있다.

또한 이 일대는 계룡산의 신도안, 풍기의 금계동과 함께 풍수지리설에 의해 명당이라 하여 좋은 피난처로 알려져 있다.

한때 수십 개의 신흥종교 집단이 성행했으며, 미륵신앙의 본거지로서 용화교 등이 일어났다.

자연경관이 빼어나고 한국 거찰의 하나인 금산사를 비롯한 많은 문화유적이 있어 호남 4경의 하나로 꼽힌다.


1971년 12월 이 산과 주변지역 일대를 포함한 총면적 42.22㎢가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서쪽 기슭에 금산사가 있으며,

그 경내에는 금산사미륵전(국보 제62호)·노주(보물 제22호)·석련대(보물 제23호)·혜덕왕사진응탑비(보물 제24호)·5층석탑(보물 제25호)·

석종(보물 제26호)·6각다층석탑(보물 제27호)·당간지주(보물 제28호)·대장전(보물 제827호)·석등(보물 제828호) 등의 문화재가 있다.

또한 금산사의 출입구이기도 한 홍예석문은 임진왜란 때 왜적으로부터 절을 지키기 위해 쌓은 것이다.


귀신사에는 대적광전(보물 제826호)·3층석탑(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62호) 등이 있다. 그밖에 대원사·심원암·수왕사 등도 자리하고 있다.

봄 벚꽃, 가을 감나무 숲이 운치를 더해주며, 금산사-심원암-산정-수왕사-원기리로 이어지는 등산로가 있어 관광객과 등산객이 많이 찾아온다.

일대에서는 10월에 민속축제인 김제 벽골문화제가 열리며, 여관을 비롯한 숙박시설과 편익시설 등이 갖추어져 있다.

전주와 김제 중심시가지에서 금산사까지 시내 버스가 운행되고 있으며, 동쪽 산록으로 전주시와 완주군을 연결하는 국도가 나 있다.



모악산 관광단지:  전북 완주군 구이면 원기리 1070


2017.4.23.일.날씨 맑음

인천6시50분 출발

산행시간 :오전10시~오후3시 (금산사 사찰탐방으로 혼자서1시간 더 사용함 오후4시 하산완료)

산행코스:모악산관광단지에서출발(10시)-대원사 갈림길-대원사-수왕사입구정자-무제봉-안부-모악상정상-심원암-금산사-금산사주차장



완주군에서 출발해서 큰고개같은 산을 넘어 김제시로 넘어가는 산행이다.

완주군에는 대원사를 품고 있고

김제시에는 거찰 금산사를 품고 있다.

이름처럼 어머니같은 산이라서인지 사찰이 많은 산이기도 하다.



산행초입 산행을 돕기 위한 산행안내판이 거대하게 서있다.

의례히 오늘의 갈길을 기쁘게 올려다 본다.

연두빛이 가득한 길, 맑은 날씨, 산행하기에 무진장 기분좋은 날이다.



이길로 오르면 대원사와 수왕사가 있다

스님과 불자들의 발길이 길을 닦아 놓은 것인지

초입의 길은 둘레길을 걷는것처럼 완만하게 나있다.



왼쪽편으로 계곡이 흐른다 수왕계곡이라고 한다.

물이 그리 많지는 않지만 물길과 연두빛의 합장이 기분을 좋게 한다.



선녀폭포와 사랑바위라...

안내판은 거대한데 폭포인줄은 모르겠다.

봄가뭄중이라 그런건지는 모르지만.. 폭포라고 하기에는 높이가 얼마되지 않는다


이렇게 전설이 많은 나라

모든 인연과 사건이 중시되었던 국민성때문인것 같다.



물길이 그리 거하지 않다보니

작은 다리를 두번째 건넌다.



대원사로 가는 스님일까

등산객이 가득한 길을 스님이 뒷짐지고 그들의 뒤를 따라 오른다

등산화 신은 스님이다.



대원사 갈림길

계단을 오르면 남봉을 거쳐 모악산으로 오르는 길

우리는 대원사와 수왕사를 거쳐 모악산으로 간다.

어디로 가든 산길은 언제나 따봉이다.

오르느라 숨이차고 힘들겠지만

온몸의 에너지를 있는데로 뱉어내고

다시또 충전하는일....온몸의 피를 재생하는 것같이 신선한 일이다.



혹여 헷갈려서 길을 잃을까

중간쯤에 또 있는 안내판

요즘은 산행지도니 안내판이니...어딜가나 잘 정비되어 있어서 고맙기도 하지만

기을 찾아내는 탐험심은 잃어버린지 오래다

하기사 안전산행이 우선이니 안내판 많은 것에 최대한 감사할일이다.



대원사 초입 해우소 건물이지만 그래도 반가운 절집 풍경이다.




산에 오르는 사람이 많다....싶었다

모악산이 이렇게도 명산인가 했다.

그랬더니 대원사에 오는 사람들이 었다.

길목을 빼곡채운 사람들



'악산 1회 화전 축제행사' 산중턱 대원사에서 하나보다

요즘은 산사를 이용해서 음악회니 시낭송이니...이어서 화전축제까지

행사를 산중턱까지 끌어올리고 있다.


이제는 더이상 조용하게 수양만하는 절집이 아닌것이다.



어린 학생들의 판소리다

시간을 갖고 산사의 국악향연에 끼어 앉아 있고 싶지만

빠르게 눈요기만 하고 길을 서두른다.



대원사 대웅전

母岳山-新興宗敎


대원사의 설립연대는 고려시대로 추정되는데 일설에는 일승·심정·대원 등 세 스님이 보덕화상에게 열반종을 배운 뒤 경복사(구이면 광곡리 화원부락)를 떠나

경복사를 바라볼 수 있는 이곳에 대원사를 창건했다고 한다.

목조삼세불좌상이 봉안된 대웅전은 1902년(광무 6년)에 세운 건물이다. 대웅전 뒤에는 고려시대에 조성한 오층석탑이 있다.



<문화재청에서 발췌 >

대원사목조삼세불좌상 (大院寺木造三世佛坐像)

전라북도 유형문화제 제215호


대원사 대웅전에 봉안된 이 삼존불은 아미타불·석가불·약사불로 구성되었다.

주존인 석가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약사불과 아미타불이 협시한 삼불의 구성은 조선 후기 사찰의 주전각인 대웅전에서만 봉안되었고,

다른 전각에서는 나타나지 않았던 형식이다.

이러한 삼불 구성은 서방 극락세계의 교주 아미타불-중방 사바세계의 영산교주 석가불-동방 유리광세계의 교주 약사불이라는 공간상의 구분에 따른

불국토를 형상화한 것이다.

삼세불이 과거불·현재불·미래불을 나타내는 시간 개념의 명칭인 반면에 대원사 대웅전에 봉안된 삼존불은 공간 개념의 불상이기에

그 명칭은 삼신불이나 삼존불 또는 삼방불이 적절하다.

세 불상은 각기 수인만 다를 뿐 조각수법과 크기는 물론 상호 등이 서로 유사한 특징을 보여준다.

중앙의 석가모니불은 높이 130cm로서 좌우의 두 불상에 비하여 약 10여cm가량 크지만 거의 비슷한 규모이다.

자세는 고개를 약간 숙였으며 허리를 곧게 세우고 정면을 향하여 당당하게 결가부좌 하였다.


중앙의 석가여래좌상은 변형 편단우견식 대의를 입었으며 약사와 아미타는 양 어깨와 팔을 모두 덮는 통견 형태의 대의를 입었다.

약사불과 아미타불은 오른쪽 팔을 돌아 내려온 대의자락을 복부 중간 부분에서 왼쪽 대의 아래로 끼워 넣었다.

좌우에 봉안된 아미타불과 약사불은 착의법과 수인이 약간 다를 뿐 석가모니불과 거의 유사한 양식이다.

중앙에 위치한 석가여래좌상은 오른손을 무릎 아래로 내려뜨린 항마촉지인을 하고 있다.

약사와 아미타여래는 손의 위치만 반대되며 수인의 모습은 동일하다.

전체적으로 단정한 조형과 유려한 옷 주름 등에서 17세기 중반의 전형적인 목조 불상의 형태를 보여준다.




[모악산 일대 신흥종교 분포]
전라북도 김제시에 있는 모악산(母岳山)은 충청남도에 있는 계룡산(鷄龍山) 버금가는 신흥종교의 발생지요 온상지이다.

이강오의 『한국신흥종교총람(韓國新興宗敎總攬)』에 따르면, 계룡산에 있는 신흥 교단은 한국의 신흥종교를 13계통으로 분류할 때 30여 교단 정도이지만

신계계(晨鷄系)와 외래계(外來系)를 제외한 11계통이 골고루 있다는 특징이 있다.


반면 전라북도 모악산과 김제시 금산면, 정읍군 일부 지역에 있는 교단은 약 40개 교단으로 오히려 계룡산보다 더 많다.

일제의 통계를 보아도 전국 67개 교단 가운데 충청남도에 8개, 전라북도에 11개 교단이 있었다.

이로 미루어 모악산 일대는 한국 신흥종교의 온상이라 할 수 있다.

더구나 모악산 일대는 이곳에서 발생한 증산교계(甑山敎系) 일색이라는 점이 눈길을 끈다.


모악산과 계룡산에 신흥종교가 모여드는 이유는 도참설(圖讖說)과 풍수지리설(風水地理說)의 영향으로 여겨진다.

한국의 도참서인 『정감록비결(鄭鑑錄秘訣)』에 따르면, 앞으로 계룡산에 조선 왕조를 대신할 새로운 정씨(鄭氏) 왕조가 열린다고 하였다.

그런가 하면, 모악산 일대 교단은 음양오행설과 풍수지리설의 영향을 받은 듯하다.

모악산 일대 대부분의 집단이 계룡산을 아버지 산, 모악산을 어머니 산이라 보고, 계룡산과 모악산이 음양력(陰陽力)으로 대응된다는 여긴다.

즉 선천(先天) 세계는 양(陽)의 세계이고, 후천(後天) 세계는 음(陰)의 세계인데, 양의 세계는 이미 지났고,

현재는 음의 세계이기 때문에 계룡산의 기운이 지나고 모악산의 기운이 돌아왔다고 보기 때문에 모악산에서 교단을 만드는 것이다.


남학(南學)은 충청남도와 전라북도 경계에서 발생하여 현재 전라북도에 65개, 충청남도에 65개, 서울과 경기도에 90개 교단이 있다.

특히 서울은 76개 교단이 있어 한국에서 신흥종교가 가장 성한 곳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대부분은 다른 지역에서 발생하여 서울에 본부를 설치한 경우이다.

우리나라의 신흥종교는 총 303개이며, 이 가운데 약 40%인 135개가 서울·부산·대구·대전 등 대도시에 집중되어 있다.

이처럼 대도시에 집중되어 있는 원인을 분석해 보면, 서울은 인구가 가장 많고 행정상 으뜸가는 중심지로 포교가 유리하기 때문일 것이다.


대전은 계룡산에 얽힌 도참설이 성한 지역적 특성이 작용했으리라고 여겨진다.

대구는 광복 후 많은 불교 종파가 발생한 곳이며, 특히 중국계인 일관도와 일련정종이 하나의 교단으로서 면모를 갖춘 데 원인이 잇는 듯하다.

부산의 신흥종교는 대부분 봉남계와 일본계로,

일본과 거리가 가깝고 일본 사람들의 왕래가 잦은 지리적 이유 때문에 일본계의 포교가 손쉽게 이루어질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작은 사찰이지만

대웅전과 범종각을 두루 갖추고 있다.




좁은 절집 마당에 빼곡히 모여있는 사람들 숲을 빠져 나와 모악산으로 발길을 옮겼다.



돌계단을 오르는 길도 완만하다

그래도 쉬어서 간다.

연초록이 건네주는 이 상큼한 공기를 여유롭게 느끼고 싶어서이다.

숨이 막힐것 같은 미세먼지의 봄속에 있다가

이 숲속에 있으니 신천지를 만난 느낌이다.



뒷짐지고 오르듯이 양반걸음으로 천천히 오르다 보니 수왕사입구 정자다

먼저 발빠르게 올라간 벗을 생략하여 수왕사는 들르지 못했다.



얼마남지 않은 석탄일때문에 수왕사 진입로에도 연등이 나부낀다.


 수왕사(水王寺)

 수왕사(水王寺)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7교구 본사인 금산사의 말사이다.

고구려 보장왕 때 백제로 망명한 보덕(普德)680(신라 문무왕 20) 수도 도량으로 창건하였다.

본래 물왕이절 또는 무량이절이라고 불렀으나 한자로 옮기면서 현재의 절 이름으로 바뀌었다


진묵영당 옆 바위 틈에서는 예로부터 피부병이나 신경통·위장병에 효험이 있다는 석간수, 수왕사약지(水王寺略誌)에는

이 약수가 옛날 선녀가 마시던 물로 오늘날은 송화백일주(松花百日酒)

송죽오곡주(松竹五穀酒)는 수왕사의 전통주로서 승려들이 고산병과 편식을 막기 위해 즐겨 마셨다고 하며 1

9948월 이 절의 주지 벽암(碧岩)이 민속주 명인 제1호로 지정, 판매하고 있다.



 송화백일주

전북 완주(구이)

조영귀(벽암스님)-12대 전승자

전북무형문화재 6호(향토술담기 부문),대한민국식품명인 제1호

38%(25%,38%,48%)

찹쌀,백미,누룩,산수유,요미자,구기자,솔잎,송화가루​,꿀




송죽 오곡주

오곡과 각종 한약재, 소나무 수액 및 대나무잎을 첨가해 빚어낸 독특한 향기와 자색을 지닌 명주.

송죽 오곡주는 오곡을 비롯하여 산수유, 감초, 구기자, 당귀, 하수오 등 각종 한약재와 소나무액, 대나무잎을 첨가하여 빚어낸 술이다.

독특한 향기와 아름다운 자색을 특징으로 하며 전북 완주군 모악산의 산사에서 전해 내려오는 술이다.

인조 때 명승 진묵대사(1562~1633) 때부터 빚어왔다고 전해진다.

명승인 진묵대사는 1602년경 모악산에 정착하여 정상의 절벽 아래 수암사를 짓고 참선을 하였다. 

참선 도중 고산병을 예방하고 수도생활을 통한 편식에서 일어날 수 있는 신체 손상을 보완하기 위해

모악산에서 채취할 수 있는 각종 약초와 이곳의 약수인 석간수를 이용해서 송죽 오곡주를 개발했다고 한다.  




정상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가까워오니 날씨가 더워서인지 슬슬 힘이든다.

힘듬을 자처하여 왔으나 힘듬을 고스란히 느끼겠다.



계단으로 오르는 길과  흙길...

계단으로 오르면 너무 평범해서 모르고 지나가는 무제봉이다

나는 진달래가 오시는 님을 반기는 흙길로 걸었다.



어딜가나 봄이면 만나는 진다래꽃

저 꽃때문에 이 낯선길이 아는길처럼 편하다.



요즘은 어느산을 가나 목재계단 있다

험한 길 편하게 가라고 만들어준 계단이 왜 이렇게 힘이 드는지....


거칠어도 계단 없는 길을 가고 싶다.


정상부근 계단앞에서 뒤돌아 작은 암릉위로 오른다. 길바위라는 곳이다.

작은 암릉에 올라 모악호수마을을 바라본다.


구이저수지가 푸르게 푸르게 보이고 건너편 경각산이 바라보이는 풍경이다.




구이저수지에서 왼쪽으로 시선을 돌리면 전주시가 한눈에 들어온다

올라오는내내 사찰이 없었으면 풍광은 심심할뻔했다.

모아두었다가 한눈에 내어주려고 그랬나보다

이곳저곳 완주시군쪽으로 풍경을 잠시 담아 보았다.



정상이 얼마남지 않았다.

큰 철탑이 산정상을 점령하고 있다.

중요한 기능을 하고 있는 산인가보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kbs송신탑이란다.


사정상에 저렇게 철탑을 세워야 할까

늘 저런 시설물이 눈에 거슬린다

나라를 위한 일이니 어쩌겠냐만은...




모악산 정상 바로 아래 부분 데크 전망대에서 길바위에서 보았던 풍경을 다시  바라본다.

구이저수지 경각산 모악호수마을......



정상에 오르기전 올랐던 길바위가 눈에 들어온다.

뒤돌아볼일이 많다는 것은  아는곳이 많다는 뜻이다.

돌아볼일이 없는 사람은  추억에 배고픔이 있다.

힘들어도 부지런히 떠나고 걸어서 추억을 넘치게 저장해야겠다

지난 일, 돌아보는 시간, 연속적인 아름다움만 따라왔으면 좋겠다



구이호수를 가운데 두고 경각산과 모악산을 바라보는 모악호수 마을 사람들은 꽃멀미를 했겠다.




진달래 꽃송이를 들고 반겨주는 모악산 정상



데크에서 모악산 둘레를 한바퀴 도는 느낌으로 정상을 찾아간다.




kbs 송신탑이다

중요 시설물이라서 개방시간을 정해두었다.

여기까지 출근하는 송신소 관리직원들 참 힘들겠다.




송신탑에서 바라보는 금산사쪽 풍경

정상은 시설물이 있어서 많은 인파에 비해 장소가 협소하다

인증샷만 찍고 얼른 자리를 비켜주어야 한다.

그래서 송신소아래 쉴곳을 만들어 둔모양이다.



하늘아래 늠름하게 서있는  정상 표지판

하늘을 나는 새같이 서있다.

여기에 서면 누구라도 날고 싶은 것이다.



약 3키로 가 넘는 길을 걸어서 793.5m의 높이를 향하여 걸었다.

오른다, 만난다. 바라본다

툭터지는 고지의 풍경을 향하여 힘들게 올라왔다.

올라오기를 잘했다

뭉쳐진 에너지를 쏟아냈다.

내속에서 순환하지 못하고 발효되고 있던 에너지를 털어냈다

에너지마져도 털어내는 일이 몸과 마음을 가볍고 상쾌하는 길이다.

오늘도 땀을 버리고 또다른 나를 향하여 조금씩 찾아가는 중이다.





모악산 kbs송신시설을과 모악산 풍경을 추억으로 돌리는 찰라다

뒤돌아 내려가면 기약도 없다

자연과는 약속을 하지 않는다

운명이다 어느날 갑자기 만나고

무조건 헤어진다.

헤어져야 수없는 길을 만난다.



헬기장에서 맛있는 비빔밥 파티를 했다

각자의 양식이 모여서 훌륭한 파티를 하는 것이다

소박한 음식같지만 지나가는 이에게 밥을 나누어 주었으니 분명 잔치인것이다.



헬기장에서 식사를 하고

아쉬운 마음으로 정상을 바라보고 나를 오고 싶게 했던 금산사를 향해서 발길이 급하다.

이제사 금산사가 급히 손짓을 한다.




금산사 가는 길



모악산에는 구급함이 많다

정말 의약품이 있을까.



심원암으로 가는 이정표

다른곳은 목재 알림표인데

이곳만은 철제 안내판이다

의리의리한 안내판으로 다가서는 기분이다.



전라도쪽으로 올수록 대숲이 많다.

오늘도 어기없이 대숲사이로 걸었다.

바람부는 날 조릿대 노래하는 소리를 들어보았는가

오늘은 노래를 멈추었다

그래도 들려올것만 같은 조릿들의 합창



심원암이다

울타리도 없고

탑도 없고 ..

먼길을 오는 이에게 해우소가 개방이다.



심원암은

신라 제36대 해공왕 당시 진표율사가 금산사를 중건하면서 선객들의 수도도량으로 건립한 산내암자로

많은 선객들이 도를 이룬 호남 유일의 선도량이었으나 임진왜란 당시 소실이 되어

인조 13년에 수문선사가 복원하였으나 철종 원년에 남쪽 250m 아래인 지금의 위치로 옮겼다고 하며 현재의 전각은 근래에 지어진 것이라고 한다.

닫혀진 절집 문을 향하여 마음으로 합장을 하고

마당에 핀 민들레 갓털에 반하여 큰절하듯 엎드려 사진 한장 찍고 다시 길을 재촉한다



여기서부터는 평탄한 길이다

산행 스틱을 접었다.

명상하는 기분으로  눈감고 걸어도 좋다

산우들을 계곡에 남겨두고 나만 서둘러 길을 내려왔다

잠시 이 침엽수림앞에서 눈을 감았다

싸한 공기가 밀려오는 것 같다

얼마뒤면 산기슭에서 송화향기 밀려내려오는 길이 되겠다.



곧장 가는 길 재미없지요

이러저리 돌아서가는 마음..

저절로 여유가 생기기도 한다.

그래서 이길을 금산사에서 순례길이라 명했다.




좀전에 지나왔던 심원암 안내판이다.

절밑에 한참 내려오니 금산사에서 올라오는 이들을 위해 심원암에 들렀다 가라고

갈림길에 세워 두었다

금산사에 올라오면 오른쪽으로 오르면 모악정

왼쪽으로 오르면 심원암을 거쳐서 모악산 정상으로 향하게 된다.

이왕이면 심원암을 들렀다 가라고 이렇게 큰 안내판을 세워 두었나보다.



심원암에서 내려오는 길은 이렇게 왼쪽으로 계곡을 끼고 내려간다

산행에서 열이 오른 몸을 식혀갈수 있는 개울이다.

산우들이 개울에서 열을 식히는 동안 금산사를 향하여 발걸음을 옮긴다.



현호색을 닮았다

그러나 자주 괘불주머니다.

길에도 들판에도 자주괘불주머니가 가득하다.



드디어 금산사다

산중 다원이 길손을 먼저 반긴다.

같이 온 벗이 있다면 저기에서 차한잔으로 마음을 채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혼자 들기도 그렇고 금산사 마당으로 곧장 들어갔다.



금산사 요사채 옆으로 홍도화가 찬란하다

꽃들이 금산사에 다 모여 있었나보다

홍도와와 겹벚꽃이 절집보다 더 눈길을 끌게 한다

계절을 잘만나 황홀지경의 홍도화 앞에서 발길을 옮기지 못하겠다.



금산사


대한불교조계종 제17교구본사.


『금산사사적(金山寺事蹟)』에 의하면 600년(무왕 1)에 창건되었으며, 백제법왕이 그의 즉위년(599)에 칙령으로 살생을 금하고,

그 이듬해에 금산사에서 38인의 승려를 득도시킨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이 때는 그 규모나 사격(寺格:절의 품격)으로 볼 때 별로 큰 사찰이 아니었으며,

1492년(성종 23)에 쓴 「금산사오층석탑 중창기」에 의하면 과거불(過去佛)인 가섭불(迦葉佛) 때의 옛터를 중흥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는 금산사의 터전에 오랜 불연(佛緣)이 있음을 강조한 것이다.


금산사가 대찰의 면모를 갖추게 된 시기는 진표(眞表)가 중창을 이룩한 경덕왕대 이후로 보고 있다.

중창주 진표는 12세에 금산사의 순제(順濟)에게 가서 중이 되었고,

그 뒤 금산사를 떠나 선계산 부사의암(不思議庵)에서 참회법(懺悔法)을 닦아 미륵보살과 지장보살로부터

계법(戒法:계율을 엄수하는 수행법)을 전해받은 뒤 금산사로 돌아와서 중창을 시작하였다.

762년(경덕왕 21)에 시작하여 766년(혜공왕 2)에 중창을 끝낸 진표는 미륵장륙상(彌勒丈六像)을 조성하여

주불(主佛:법당의 중심이 되는 부처)로 모셨고, 금당(金堂:법당)의 남쪽 벽에는 미륵보살이 도솔천(兜率天)에서 내려와서 그에게 계법을 주던 모습을 그렸다.


이 절은 미륵장륙상을 주불로 모심으로써 법상종(法相宗)의 근본 도량이 되었으며,

고려시대에도 법상종에 속해 있으면서 『법화현찬(法華玄贊)』·『유식술기(唯識述記)』 등의 법상종 관계 장소(章疏)들을 간행하였다.

진표의 중창 이후 후백제견훤의 보호를 받아 부분적인 보수가 있었으며,

법상종의 대종사이자 왕사인 혜덕(慧德)이 1079년(문종 33)금산사 주지로 부임하여, 퇴락한 절을 보수하고 새로운 법당을 증축하여 대찰의 면모를 갖추었다.

 현존하는 금산사의 중요 석물인 석련대(石蓮臺)·오층석탑·노주(露柱) 등은 모두 이때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또 절의 남쪽에 광교원(廣敎院)을 설립하여 간경(看經:경전을 읽음)·법석(法席:법회) 등을 주관하는 장소로 사용하였다.

그의 노력으로 금산사는 규모가 큰 도량이 되었다.


그러나 1598년(선조 31) 임진왜란 때 왜병의 방화로 모든 건물과 산내의 40여 개 암자가 완전히 소실되었다.

1601년 수문(守文)은 복원공사를 시작하여 1635년(인조 13) 낙성을 보았다.

그 당시 수문을 도와서 역사에 참석했던 승려는 지훈(智訓)·덕행(德行)·석준(釋俊)·천정(天淨)·응원(應元)·학련(學蓮)·태전(太顚)·운근(雲根) 등이었다.

1725년(영조 1) 금산사에서 남악(南岳)이 화엄대법회를 열었다. 고종 때에는 총섭(摠攝:주지)으로 취임한 용명(龍溟)이 가람을 일신하여,

미륵전·대장전(大藏殿)·대적광전(大寂光殿) 등을 보수하였고,

1934년 성렬(成烈)이 다시 대적광전과 금강문(金剛門)·미륵전 등을 보수하였으며, 1998년 방등계단 앞에 적멸보궁을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절에 머물렀던 고승으로는 진표와 혜덕을 비롯하여 문종의 여섯째 아들로서 중이 된 승통(僧統) 도생(導生),

원나라 왕실로부터 깊은 존경을 받았던 유식학(唯識學)의 대가 해원(海圓) 등이 있다.

조선시대에는 이 절을 중심으로 임진왜란 때 승병 1,000여 명을 이끌고 전투에 참가하여

혁혁한 전공을 세운 처영(處英)과 서산의 선지(禪旨)를 이어받았던 태능(太能), 편양파(鞭羊派)의 후계자인 남악·태우(泰宇) 등이 머물렀다.


또한 포광(包光)이 지은 『금산사지』에 의하면, 금산사에서 처음 주지라는 칭호를 사용한 것이 신라 문성왕 때부터라고 하였으며,

그 이전까지는 화상(和尙) 또는 사주(寺主)라고 불렀고, 1592년에는 총섭, 1902년에는 섭리(攝理)라고 불렀다고 한다.

유물·유적 중 일부 석조물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임진왜란 후의 조형들이다.

임진왜란 이전에는 거대한 사역에 대사(大寺)·봉천원(奉天院)·광교원의 3곳으로 나뉘어 있었다.

총 86채의 당우가 임진왜란의 참화로 없어진 뒤 40년 만에 대사지역의 건물만 재건되었고, 나머지 사지(寺址)는 절의 동북쪽 넓은 지역에 유지만 전해지고 있다.



홍도화도 사무치게 화려했지만

겹벚꽃은 새신부처럼 설레이게 한다.

보제루앞에 핀 겹벚꽃 이대찰에 드는 이들

이 꽃앞에서 멈추지 않는 사람이 없다.

오늘 이 절집에 들었던 사람은 마음에 꽃한송이 심고 갈 것이다

마음에 꽃을 둔 그대 이미 부처가 아닐까 한다.





큰 대찰 금산사는 별도편집하기로 하고

금산사 일주문을 빠져 나와 금산사 버스주자창으로 걸어나갔다.

금산사에서 시간을 많이 쓰는 동안 산우들은 주차장에서 한잔하고 있는 중

금산사에서 한시간이나 더 지체를 하고 서둘러 금산사를 빠져나갔다.


.......금산사 별도 편집...........................




우리나라 사찰중에 가장 많은 문화재를 보유한 사찰

문화재 보존을 하기 위해 입장료를 받는다고 한다.-3000원

그런데 모악산에서 내려오니 입장료를 내지 않는다

3000원...큰돈을 벌었다는 즐거움이 든다.




석탄일이 가까워온다

이렇게 아름다운 계절에 태어났으니 부처의 마음이 우리에게 그리도 잘 전해지나보다.



금산사 바깥길에도 겹벚꽃이 환장하게 아름답다.

갈곳이 마땅치 않을때 이 화려한 꽃들을 안고 있는 금산사에 오면 참 좋겠다



개화문(開化門)

홍예문 위에는 금산사 회주이신 송월주 슨미이 쓴 개화문(開化門) 현판이 걸려있다.

개화문은 후백제를 세운 견훤이 금산사에 유배되었을 때, 감시하기 위해 석성을 쌓아놓은 그 자리에 성문을 개축,

지금은 금산사로 들어가는 관문역활을 하며. 옆에 자연보호 헌장탑이 세워져 있다.





금산사가 대찰이다보 금산사 입구에 기념품상가와 식당이 모여있다.

놀러오는 이에게는 출출한 뱃속을 채우기에 좋겠다



금산사 버스주차장에 핀 영산홍



버스주차장에서 올려다본 모악산 정상



산이란 처음에는 쉽게 올라도 오르다보면 힘이 들다

너무도 평범한 일이 올때마다 느끼는 일이다

그렇게 힘들게 오르고도 오르는 길이 더 좋다

정상에서 다시 뒤돌아 집으로 간다.

갈곳이 있어서 행복하다는 이도 있지만

오르는 길이 좀더 길었으면 좋겠다

먼길을 달려와 얼마안되는 시간을 햇빛아래 놓였다가 돌아간다.

짧은 산행시간처럼 우리의 삶도 자꾸 짧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자꾸 더 길게 걸었으면 좋겠다는 억지를 쓰는지도 모르겠다.

계룡산과 더불어 풍수지리에 연연하여 수많은 신생종교가 자리잡았었고

계룡산이 아버지의 산, 모악산이 어머니의 산...

그냥 이루어지는 인연이 없듯이 이름하나하나..신의 오묘함을 불어넣어 성지화 하였다.

그만큼 자연은 위대하고 존중받아야할 일이다.

그 위대한 품에 안겼다가 돌아온 지금....참 행복하다.

2017.4.23.일  by gyeong~



모악산의 야생화              

봄산행은 들꽃이 많아서

산행후 만찬을 만나는 기분이다

주식보다 디저트가 더 기분좋은 식사라고 할까

산행후 이 아름다운 아가씨를 보는 기분

늦은 밤 편집을 하면서 마시는 꽃차같은 기분이다.


개별꽃#1



개별꽃#2



금창초



자주괘불주머니#1


자주괘불주머니#2


자주괘불주머니#3

금산사 가는 길은 자주 괘불주머니가 대세다




미나리 냉이#1


미나리 냉이#2


심원암 앞뜰 민들레







덩굴꽃마리



영산홍





죽단화(겹황매화)#1



죽단화(겹황매화)#2



황매화



살갈퀴



애기똥풀



홍도화

전라도 금산쪽에는  홍도화길이 많다.



호랑가시나무꽃



겹벚꽃#1



겹벚꽃#2


겹벚꽃#3


종지꽃(미국제비꽃)#1



종지꽃(미국제비꽃)#2



조팝나무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