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story-山

2017.6.3.토. 두타산 베틀릿지

kyeong~ 2017. 6. 8. 02:10

 

가장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산, 두타산

두타산에 신비의 알같은 귀중한 봉우리가 숨어있었다

깊은 골짜기를 지닌 두타산에 보배로운 절경이 숨어있었다니..

걷고 싶다 당장에라도 그 암릉의 위용에 가슴을 내밀어 느끼고 싶다.

속속들이 걸었던 두타산에 아직도 걷지 못했던 길에 대해

시간을 아끼지 않았다

일년전 비오는 날 들어왔다가 돌아서 나가고

잊은듯 지내다가 두타산의 숨겨진 비경을 벗겨내리리기로 했다.

생긴대로 그대로의 풍경! 마치 설악산의 공룡능선 한쪽을 떼어낸것 같은 암릉구간

공룡이 되려다 말았는지...

등산로 표지판은 없었지만 입소문 덕에 길은 이미 걸을수 있을만치 나 있었다.

산을 얼마나 올라야 산에 대해 무덤덤해질까

다리의 힘은 점점 떨어지고 산에 대해 마음은 아직도 하늘아래 당도해 있고

욕심인걸까 끊임없는 도전일까

아니면 무작정에 대해 신뢰를 하고 사는 걸까

무작정의 끝은 언제나 행복이 가득했다.

그래서 작정하지 아니한 길을 떠나서 아무리 힘들어도 끝이 있다는 신뢰를 하는 것이다.

험하다는 베틀릿지!

 집중력과 인내를 벗삼아 그 길을 걸어내렸고 이 후기를 작성해본다.

 

 

2017.6.3.토. 오전11시~오후 4시30분

산행거리 6.4키로

산행코스:두타산 매표소-금란정-배틀릿지-배틀봉-산성터-무릉계곡 학소대-삼화사-무릉반석-주차장(원점회귀)

암릉구간으로 암릉산행등산화 필수

날씨"쾌청, 시원

주차비: 소형차 2000원, 입장료-2000원

 

 

무릉계곡주차장     

공영주차장           

매표소: 입장료 2000원

주차비:2000원

오전 10시 산행시작

 

무릉계곡주차장     

공영주차장           

매표소: 입장료 2000원

주차비:2000원

오전 10시 산행시작

 

 

매표소로 들어와 첫번째 다리건너 죄측 베틀봉 진입로

산악회리번이 빼곡하게 줄지어 달려있다

언뜻봐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관심있어 했는지 알수 있는 곳이다.

 

 

푸른색 엑스표

가지말라는 신호탄 같은것

위험하오니 왠만하면 이곳으로 오지 말고 무릉계곡길을 가라는 뜻이기도 하다.

 

 

가는내내 이정표가 되었던 엑스표

나무에도 길 바닥에도

그리고 바위에도...눈여겨보며 가면 된다.

 

 

첫번째 밧줄타기

다리가 짧은 사람은 첫번째 난관이다.

그래도 줄이 있어서 다행이다.

 

 

 

산행길이는 길지 않으나

여럿이 온다면 줄서기가 오래 걸릴것 같다.

이럴때 나는 좋다 충분히 쉬면서 충분히 주변 풍경을 감상할수 있기 때문이다.

 

 

 

첫번째 조망터.

삼화동 일대가 한눈에 들어온다

무릉계곡 공영주차장도 눈에 들어오고...

 

 

무릉계곡 공영주차장이 훤히 내려다 보인다.

우리차도 보이는 것 같고..

 

 

건너편 삼화사 뒷편 폭포를 이루는 바위가 한눈에 들어온다.

일명 쌍폭이라고도 한다.

 

 

두타산 베틀릿지구간은 암릉구간

이리저리 바위의 풍경을 제대로 감상하는 구간이라 하겠다

카메라셔터에 무리를 가하는 날이기도 하다.

 

 

두번째 조망터

 

암릉구간과 조망구간이 많아서 행복하다

오지의 푸른 숲길을 한없이 걷는것도 좋지만

길이 있는듯 없는듯 바위를 타고 넘는 길, 바위에 올라 세상을 돌아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다정하게 이야기를 하는듯도하고

더 멋진 풍경인데 작은 앵글안에 어찌다 담아낼까

 

 

곧은 소나무가 아니라

바위처럼 지멋대로 풍경을 만들어내는 노송들

그 지멋대로가 얼마나 멋진것인지 오늘 제대로 감상하는 날이다.

 

 

 

저기도 올라가야 한다.

멋지게 근육질을 자랑하는 두타의 암릉을 모두 접수하는 날이다.

 

 

너덜길

혹여 길을 일을까 열심히 길을 안내하는 푸른신호등...

난 저 안내표식을 그려준 모르는 그에게 참 많은 감사의 기운을 송출했다.

그분을 몰라도....내가 얻은 감사에 대해 마음의 인사를 보내야하지 않을까.

 

 

길이 아닌것 같지만 길이다.

길들여진 길의 모양이 아니라

길이라고 우기면 길이 되는 것이다.

산악인에게 길의 정의란 없다 열심히 전진한 그곳이 바로 길이 되는 것이다.

 

 

 

천지창조는 이렇게 신비로운 것이다

통로를 내어서 인간에게 길을 주는 것이다.

저 무질서의 세계속에 우리의 길이 존재하는 것이다.

신이 내린 통로를 통해 두타의 절경을 한없이 품고 가는 것이다.

 

 

소나무는 왜 저렇게 홀로를 고집하는 것일까

홀로 살아가는 그 세월이 숙명일까

바위틈에 홀로 바람이부는데로 가지를 뻗어가는 모습

바위와 소나무...또 천년궁합이다.

 

 

아래 바위보다 위에 올라선 바위가 더큰 바위

그러나 무너지지 않고 큰바위 아래서 지키고 있다.

 

 

드디어 베틀릿지의 백미

베틀릿지가 아니라 베틀산성

거대한 성곽같은 암릉구간

우리는 저 바위릿지가 불가하니까 그 아래를 우회하며 충분히 감상을 한다.

바위를 오르고 점령하는자도 위대하지만

이 풍경을 보는 것만으로도 신의 영역이 얼마나 위대한 탄생을 창조하고 있는지....

자꾸만 겸손하기보다는 자꾸만 산을 향한 맹신도가 되어간다.

 

 

이렇게 밖에 안나왔네...

저기서 사진도 많이 찍고 한참이나 머물렀었는데...

 

 

무릉계곡의 깊은 속살

그냥 저모습을 보며 누가 이 산속에 기기묘묘한 암릉이 숨어있을지 생각이나 하겠는가.

 

 

정다운 바위쌍과...그리고 소나무

 

 

문득 하늘을 본다.

이러한 비경을 창조한 하늘에게 고맙다

하늘마져 푸르고 맑으니

나의 운명은 언제나 백점만점에 백점을 사는 것 같다.

덥지도 않은 날씨 하늘마져 푸르고 바람까지 적당하니

신은 언제나 나를 위해 존해하는 것 같다.

 

 

공룡능선같은 베틀릿지 암릉

저 등을 타고 걸어가고 싶다.

 

어떻게 성곽같은 능선이 이속에 존해했을까

두타산의 변신을 본것이다.

댓재에서 두타산과 청옥산...얼마나 재미없었던 코스였던가

산은 몇얼굴을 하고 있는지

그래서 아는 만큼 보이는 것이다.

 

 

좁은 공간

비켜설수 없어서  전 풍경을 찍지못하고

컷트컷트...그래도 자꾸만 찍어서 남기려 애를 쓴다.

 

 

카메라 셔터가 과열되는 것은 아닌지

얼마를 눌러야 그 모습을 잘 찍을수 있을까

아마추어의 손가락은 아프다

아무리찍어도 어찌찍어야할지 모르겠다.

아픈만큼 무언가 얻을게 있을것 같기도 하고

 

 

 

저 능선위를 새처럼 날지 못하고 길아래 우회를 통해서 배틀봉에 올라야한다.

 

 

 

서로 떠받치고

올라앉고 그리고 아무일없이 세월을 지내온 바위

그들의 규칙이 정교한 힘의 계산에서 비롯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센바람에 밀릴것도 같으나 그들은 무너진 흔적이 없다

 

 

서로 기대어 살아가면서도

집에서 인간들이 애완견 키우듯이

바위틈에 소나무를 키우고 있다.

 

 

멋진 암릉

어떤 형상인지 다른 산꾼들은 이름도 잘 붙이지만

바위에 넋이 뺏겨 나는 아무것도 더붙여 생각할수가 없는 것이다.

 

 

켜켜이 베를 짜듯이 바위를 짜내려간 것일까

왜 하필이면 베틀에 비교하였을까

 

 

웅장한 바위산을 작은 앵글에 담자니

참 미안하다

아무리 기똥찬 사진을 찍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좁은 공간에서 사진을 잘 찍어내기란 힘들것이다.

프레임속에 꽉찬 베틀릿지...후기를 쓰면서도 이런그림보다 더 잘 찍어야 할텐데...라는 아쉬움이 생긴다.

 

 

뾰족뾰족한 기암절벽의 마음을 뺏겼다가 수습을 하고 베틀봉으로 오른다

길은 너덜길 그리고 가파른길

산행길이에 비해 시간이 많이 소모되는 길이다.

 

 

앗....말을 잃겠다

암릉을 끝을 지나 이제 봉우리로 가는가 했는데

촛대바위를 닮은 암봉들이 하늘을 향해 키재기를 한다.

 

 

켜켜이 쌓아올린 바위성 위에 소나무를 비롯한 나무들을 잘 키우고 있는 바위들

그들의 나무키우는 솜씨가 수준급이다.

분재천국 같다.

 

 

베틀릿지의 최대 조망지이다.

설악산에 들지 않더라도

가깝고 짧은 거리에 설악의 맛을 느끼게 하는 암봉들이 하늘을 찌른다.

 

 

작은 고사목 한 그루

온몸이 녹아내리도록 암봉을 바라보고 있다.

살이 타들어가는 모양이다.

꼼짝않고 서있는 죽은 나무 ...

저 나무처럼 한동안 저기에 서 있었다.

 

 

사진을 찾아보니 저 암봉에서 릿지를 많이 하는 모양이다.

엄두도 못내고 할 생각도 못해봤지만

그들의 집중력을 통해서 저 바위맛을 더한층 맛보았으리라.

 

 

이러저리 카메라 똥침을 수없이 놓는다.

가장 황홀한 곳에서 그 황홀함을 어떻게 남겨야 할지몰라 그냥 눌러보고 또 눌러보는 사진

시간이 흐르면서 잊어질지도 모르니까 계속 찍어보는 것이다.

 

 

바위위에 올랐다가 또 찍어보고...뒤돌아서기가 이리도 아쉬운것인지

애꿎은 산진기만 열심히 누른다.

 

 

터억 버티고 있는 고사목을 없애보았다.

훨씬 훌륭한 풍경이 된다.

 

 

베틀릿지의 기기묘묘함....아마도 난 이산에서 내려가면 적어도 열명정도에게는 자랑할 것 같다.

 

 

무채색으로도 변형시켜보고..

 

 

 

아쉽지만...

많이 아쉽지만 ....

아쉬움속에 다시 또 올 것이라는 기대를 하면서 다시 갈길을 재촉해본다.

 

 

길이 제대로 없는 탓에

바닥을 잘 보아야 한다.

너덜길 위에 이렇게 파란색 이동표지를 그려 놓았다

누군지는 모르지만 하늘만큼 감사한 분이시다.

 

 

 

소나무 군락지 능선을 오르면서 뒤돌아본 풍경

건너편 폭포같이 생긴 바위는 삼화사 뒷편 쌍폭...

가물고 가물어서 수량이 없다

그래서 폭포인줄 모르겠다.

 

 

이 돌탑을 만나면 오름구간은 끝이다

여기서 꿀맛같은 점심을 먹었다

풋고추에 된장...호화로운 식사는 아니지만

조용한 산중에서 사람없는 곳에서의 식사...

초라한 식사가 아니라 가장 멋진 성에서 밥을 먹는 느낌이다.

 

 

능선길...소나무 군락지를 지나면 정상이다.

 

 

정상석을 얻지 못해

누군가 앙증맞은 표지석을 만들어 두었다.

크고 멋진 정상석보다 정성을 더 많이 느낄수 있는 표지석...

이쁘다..

 

눈에 잘 띄게 누군가 노란 표지판도 걸어 두었다.

오름은 끝났고 내리막길을 걸어야한다.

 

 

두타산 정상으로도 갈 수있고

쉰움산으로도 갈 수 있고

이제 하산을 할수 있는 무릉계곡으로도 걸어 갈 수있다.

비가 올듯 앞산에 구름이 걸쳐내려온다.

생각할것도 없이 하산이다

무릉게곡쪽으로 대략 2시간이면 하산을 할수 있다. 오르는데는 3시간...내려가는데는 두어시간

역시 인생의 내리막길이 더 쉬운지도 모르겠다.

 

 

 

여기서부터는 표지판이 없다

자기들끼리 길안내 인식표를 달아두었다.

산행리번을 따라 내려가다보면 희미하게나마 길이 있다.

 

 

두타산성터인것 같다.

이승휴의 이야기가 전해져 오는 두타산성터...산성터의 규모가 제법 되어서 곳곳이 그 흔적이 남아 있다.

 

 

소나무들이 위로 쭉쭉 뻗은 것이 아리라 분재처럼

절제하며 자라는 두타산의 소나무들이다.

 

 

건너편 갈미봉쪽으로 먹구름이 내려온다

낮에 비가 조금 뿌릴것이라고 일기예보가 있었으나

다행히 오르는 내내 날씨도 좋고 바람도 좋고

사람은 거의 없고 나를 위한 특별한 성에 들어온 느낌라고나 할까.

 

 

무릉계곡의 관음암 둘레길이 건너다 보인다.

저길을 걸어본지도 시일이 꽤나 흘렀다.

 

 

 

두타산 산성터에서 보라보는 병풍같은 바위다.

 

 

움푹움푹 기포층이었는지...저 작은 곳에 물이 마르지 않고 있다

새들이 물먹기 좋겠다.

 

 

바위옆으로 미로처럼 길을 찾아간다

리번이나 사람이 지난듯한 길을 따라서...

 

 

두타산은 고사목이 거의 없다.

어쩌다 만난 고사목....두타산의 세월처럼 느껴져서 앵글을 맞춰보고

 

 

아무것도 아닌 바위같지만

다음에 온다면 혹여 이정표가 될까 해서 왠만한것은 모두 기록에 남긴다.

 

 

장군같이 우뚝 솟은 바위라서 장군바위라 이름도 붙여본다

원래 예전부터 우리나라는 생각나는데로 사람에게도 이름을 붙이는 문화이다

별명도 많고요...

 

 

산성터까지 내려오는 길이 완젼히 너덜길이다.

여기서도 베틀봉과 두타산 갈림길이 된다.

 

 

여기서부터는 정식 두타산 산행로이다보니 급경사 구간에 밧줄이 있다.

 

두타산성에 있는 표지판

 

 

두타산성에 자연산성을 이루며 병풍처럼 바위가 둘러쳐져 있다.

 

 

별별 바위들이 있고

사람들이 별별 돌멩이를 쌓아서 작은 성을 만들었다.

 

 

산성에서 아래를 내려다 보기도 하고

어디를 보나 트리플 에이 같은 산행이다.

 

 

저기 깊은 무릉계곡을 따라 올라가면 용추폭포와 신성봉 쌍폭포등이 있다.

 

 

둥글둥글한 산성터의 암릉

 

 

건너다보이는 바위

 

 

이소나무가 두타산을 찾게했던 소나무다

이 멋진 소나무가 좋아서

무릉계곡 산책길에서 급경사를 타고 올라와보는 풍경이다.

 

 


두타산성
頭陀山城

              
강원 동해시 삼화동에 있는 조선시대의 산성. 1414년(태종 14)에 축성된 것이며,

천연적인 산의 험준함을 이용하여 부분 성 쌓기를 한 것으로, 현재 두타산 중턱에 부분적으로 성벽이 남아 있다

현재 두타산 중턱에 부분적으로 성벽이 남아 있다. 1414년(태종 14)에 축성된 것으로,

천연적인 산의 험준함을 이용하여 부분적으로 성 쌓기를 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고려 충렬왕 때 이승휴(李承休)가 전중시어(殿中侍御)로서 왕의 뜻을 거스른 죄로 파직되어

이 곳에 은거하면서 스스로를 동안거사(動安居士)·두타산거사(頭陀山居士)라 부르며 『제왕운기(帝王韻紀)』를 저술하였다고 한다.
이 성은 부분적으로는 자연지세를 그대로 이용하였고, 부분적으로는 석축하였기 때문에, 성을 한 바퀴 도는 데 약 7일 정도 걸리는 매우 큰 성이다.

석재는 산돌을 그대로 이용하거나 약간 다듬어 사용하였기 때문에 성벽이 그리 견고하지는 않으나 천연의 요새지이다
임진왜란 때에는 이곳에서, 함경도 안변에서 남쪽으로 후퇴하는 왜병의 주력부대와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는데, 3일간의 혈전 끝에 함락되고 말았다
전하는 이야기로는 빨래하던 할머니가 적병에게 비밀을 누설하였기 때문이라고 하며,

주변에는 ‘피수구비’·‘바굴다리’·‘대구리’ 등 동네 이름과 다리 이름에 격전의 흔적이 남아 있다

 

[Daum백과] 두타산성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내용 발췌

 

자연석의 두타산성

저기 들어가 숨어있기 좋겠다.

들어가서 숨어 있어볼걸 그랬나.....ㅎ

 

 

베틀봉에서 90분가량 내려오니 무릉계곡이다.

위쪽으로 올라가면 쌍폭포와 용추폭포의 절경이 있겠지만 수량이 적어서 장관을 이루어내지 못할것 같아 그냥 돌아서 가기로 했다.

 

 

지금부터는 그 유명한 무릉계곡의 반석을 보는 구간

산성에서 내려와 일부구간이기는 하지만

아무리 다녀봐도 널찍하고 바위가 많은 시원한 계곡 이보다 더 좋은 곳은 아직까지 만나지 못했다.

 

 

학소대

이곳을 지나던 학이 둥지를 틀고 살았다하여 학소대라고 하였다.

수량이 풍부할때에는 이곳의 폭포가 장관을 이룬다.

 

 

관음암쪽으로 올르는 길

삼화사에서 올라오면 바로 갈라지는 길이다.

이곳에 갈때에는 쌀이나 물등을 가는 길에 옮겨주는 보시를 하면 좋겠다.

 

 

삼화사 천왕문

 

 


 삼화사 三和寺

 


대한불교조계종 제4교구 본사인 월정사(月精寺)의 말사이다.

옛날에는 삼공사(三公寺) 또는 흑련대(黑蓮臺)라고도 하였다
석식영암(釋息影庵)의 기록에 의하면, 신라 말에 세 사람의 신인(神人)이 있었는데,

그들은 각각 많은 무리들을 거느리고 지금의 삼화사 자리에서 모의(謀議)를 하였다
그들이 가버리자 그 지방 사람들은 그곳을 ‘삼공(三公)’이라 하였으며, 얼마 뒤 사굴산(闍堀山)의 품일(品日)이 이곳에다 절을 짓고

삼공사(三公寺)라 하였다는 것이다
오랜 세월이 지난 뒤 1393년(태조 2) 조선의 태조가 칙령을 내려 이 절의 이름을 문안(文案)에 기록하고 후사(後嗣)에 전하게 하면서,

신인(神人)이 절터를 알려준 것이니 신기한 일이라고 하였다
그 옛날 삼국을 통일한 것은 부처님 영험의 덕택이었으므로, 이 사실을 기리기 위하여 절 이름을
삼화사(三和寺:삼국이 화합하여 통일이 되었다는 뜻)로 고쳤다고 한다
한편, 읍지(邑誌)에 의하면, 옛 사적(史蹟)에 이르기를 자장(慈藏)이 당나라에서 돌아와 오대산을 돌면서

성적(聖蹟)을 두루 거쳐 돌아다니다가 두타산에 와서 흑련대를 창건하였는데 이것이 지금의 삼화사라고 하였다.

신라 제27대 선덕여왕 11년(642)의 일로 적혀 있다


또, 고적(古蹟)에 의하면, 약사삼불(藥師三佛)인 백(伯)·중(仲)·계(季) 삼형제가 처음 서역에서 동해로 돌배[石舟]를 타고 유력하였다고 한다
우리 나라에 와서 맏형은 흑련(黑蓮)을 가지고 흑련대(黑蓮臺)에, 둘째는 청련(靑蓮)을 손에 가지고
청련대(靑蓮臺)에, 막내는 금련(金蓮)을 가지고 금련대(金蓮臺)에 각각 머물렀다고 하며, 이곳이 지금의 삼화사·지상사·영은사라고 전한다
또, 약사삼불은 용을 타고 왔는데 그 용이 변하여 바위로 되었으며,

바위 뒤쪽에는 약사삼불이 앉았던 자리가 완연한 형태로 남아 있다고 하며,

약사삼불의 손은 외적(外賊)이 잘라 땅 속에 묻었다고도 한다


이 절은 조선 후기에 여러 차례 중수되었다. 1747년(영조 23) 홍수와 사태로 인하여 무너지자
옛터에서 조금 위로 옮겨 지었고, 1820년(순조 20) 화재가 나서 1824년에 중건하였으며, 1829년 다시 불타자
정원용(鄭元容)·이기연(李紀淵)·이광도(李廣度)·윤청(尹晴) 등이 서로 협력하여 중건하였다
1869년(고종 6) 화운(華雲)덕추(德秋)가 단청을 하였고, 1873년(고종 10) 선당(禪堂)을 세웠으며,

1896년학송(鶴松)·창명(彰明) 등이 승당(僧堂)을 지었다.
이처럼 수차례의 화재와 중건을 거쳐오다가 1907년에는 의병(義兵)이 숙박하였다는 이유로 왜병(倭兵)들이 방화하여 대웅전·선당 등 200여 칸이 소실되었다.

그 이듬해 이 중 일부를 건축하였으며, 1979년 8월에 무릉계반(武陵溪盤) 위쪽으로 절을 옮겨 중건하였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전·약사전(藥師殿)·요사채·삼성각·육화료(六和寮)·큰방·천왕문·일주문 등이 있으며,

문화재로는 삼층석탑 1기를 비롯하여 운암당상준대사부도(雲巖堂尙俊大師浮屠)와 원곡당대선사부도(元谷堂大禪師浮屠) 및 비(碑)가 있다
이 가운데 대웅전 안에 안치된 철불은 창건설화와 관련된 약사삼불 가운데 맏형의 불상이라고 전해지며,
삼층석탑은 높이 4.95m로서 전체적으로 안정감이 있는 고려시대의 탑이다


한편 삼성각 안에는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된 철불(鐵佛) 한 구가 있었는데, 1997년 이 철불 뒷면에서
조성 당시에 새겨진 명문(銘文) 150여 자가 발견되었다. 명문의 판독 결과 이 철불이 9세기 중엽에 조성된 노사나불(盧舍那佛)임이 밝혀졌다
명문 가운데는 이두(吏讀)가 포함되어 있으며, 불상 조성에 관계되었던 결언(決言) 등의 승려와
시주자들의 이름이 적혀져 있는 등, 당시의 사회·문화를 연구하는 데 있어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이 불상은 1998년 12월 보물 제1277호로 지정되었으며, 절에서는 대적광전을 지어서 이 철불을 봉안하고 있다
특히, 고려 말의 이승휴(李承休)는 이 절 가까이에 객안당(客安堂)을 짓고 이곳에서 『제왕운기(帝王韻紀)』를 저술하였으며,

10여 년 동안 불경을 독파하다가 객안당을 삼화사에 희사하고 간장암(看藏庵)이라 하였다고 한다
이 밖에도 이 절의 주변에는 대승암(大乘庵)·성도암(成道庵)·은선암(隱仙庵) 등이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전설이 깃들어 있는 명승지인 두타산성(頭陀山城)·오십정(五十井)·용추폭포·학소대(鶴沼臺) 등이 유명하다

 

[Daum백과] 삼화사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내용 발췌

 

 

무릉 반석

이바위에 앉아 있으면 정말 무릉도원을 느끼게 한다.

시원하게 넓게 퍼져있는 바위마당에 어디든 걸터 앉아서 계곡에서 내려오는 산바람을 맞이하면

세상사 근심이 어디 있겠는가

 

 

무릉반석위에 새겨진 한자들

그냥 앉아 쉬기에 무료하였던가

제법 읽기 쉽게 새겨두었다.

예전 문인들은 놀면서도 글을 써내려갔었다.

 

1000여 명은 앉을 수 있는 무릉반석

무릉반석에는 양사언이 남겼다는 ‘무릉선원 중원천석 두타동천’이라는 글씨 등 수많은 시인 묵객의 명필을 볼 수 있다.

 

 

두타산 삼화사 일주문을 빠져나오면 이제 산행은 끝마무리다.

삼화사 사찰소개도 해야하는데 자료가 부족하여 삼화사를 위한 방문을 다시 해야겠다.

 

 

금란정

보이는 것마다 풍경인 곳에

이렇게 정자를 지어놓으니 쉬어가기 참 좋다.

이곳에 앉아서 무릉계곡의 풍경만 보아도 마음이 한껏 청량해지겠다.

 

이곳은 일본의 국권침탈 당시 지역의 유림들이 조직한 금란계라는 모임을 기리기 위한 것이다.

 

 

금란정 안내판

 

 

금강사군첩

‘금강사군첩(金剛四郡帖)’이라는 명칭은 널리 알려진 조희룡(趙熙龍)의 『호산외사(壺山外史)』에 나오는 ‘명사금강사군산수(命寫金剛四郡山水)’라는
구절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이 화첩이 포함하는 지역은 4개 군(郡)뿐만 아니라 남으로 평해(平海) 월송정(越松亭)에서 북으로 안변(安邊)
가학정(駕鶴亭), 그리고 금강산 접경지역을 모두 포괄하고 있다. 따라서 ‘사군첩(四郡帖)’이라는 명칭보다는 ‘김홍도필 금강산화첩(金弘道筆
金剛山畵帖)’이라고 부르는 것이 옳다. 조선시대에는 ‘해산첩(海山帖)’이라고도 불렀다.

 

 

 

 

아...뭐라고 쓴것인지...

글씨가 예술처럼 느껴지는 암각화

인터넷을 통해 검색을 해본 내용이다.

 

무릉반석위에 써있는 암각화가 자꾸 지워져 가고 있다고 해서 옮겨놓은 글씨이다.

 

이 한문서체는

‘武陵仙源 中臺泉石 頭陀洞天’이 주제이고

그 하단에

‘玉壺居士, 辛未春’이 부제로 음각 되어 있고

무릉반석의 남동쪽이 되고 금란정의 북측에 쓰여져 있으며 행서체의 12자이다.

 

오늘날 이 웅장하고 천하명필인 이 글씨의 필자를 모르고 또 여러가지 설이 있으나 고증이 명확지 않다.

그러나 근간에 와서는 두가지 견해로 정립이 돼있다.

하나는 봉래(蓬萊) 양사언(楊士彦)」이고 또 다른 하나는 옥호자(玉壺子) 정하언(鄭夏彦)이라는 설이다.

 

 

길은 험했으나

절경에 취해 힘든줄 모르고 걸었던 길

눈에 익어서 반가웠던 두타산성과 무릉계곡

여름초입 올한해 가장 기억에 남을 산행을 했던 것 같다.

가까운 시일내에 아무래도 또 와야겠다.

이 절경을 나혼자 마음에 두고 있을 내가 아니다

누구라도 또다시 오게 해야겠다.

좋은곳은 나누어 간직해야 복을 받지 않을까...

복받으려고 하는 것은 아니지만 내가 가진 풍경을 자꾸만 나누어 주고 싶다.

행복했다 참으로 행복했다.

그래서 걷는 것조차 행복했다.

세상에 태어나길 참 잘했다

이런 길에서 사진을 찍고 마음에 담아 길이길이 두고 볼 후기를 써본다.

2017.  6.3.토. by gyeo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