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 한쪽 비워둔다면

photo-流浪,이미 중독된 상태

2014.9.27.강릉 바우길-허균 허날설헌생가

kyeong~ 2014. 10. 4. 16:26

 

 

 

 

9월의 바우길에는 벼가 익어가고

밤이 여물어 가고 있다.

골짜기 닮은 논

 생긴대로 구불구불한 논에는 누런 벼가 익어가고 있었다

강원도의 들에는 옥수수와 감자만 여물어가는 줄알았는데

골짜기를 타고 벼가 익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야산에는 여기저기 밤이 떨어져 입을 벌리고 있었다.

그뿐인가

담장밖으로 얼굴을 내밀고 있는 감의 모습은 다른 시골과 다르지 않았다

 

밤을 줍고

논길을 걷고

오랫만에 오죽헌에 들러 검은 대나무숲도 보고...

이렇게 두런두런 걷다보니

고요한 솔숲

허난설헌의 글귀가 여기저기 들려올것같은

초당마을 허난설헌희 생가에 도착했다.

 

 

 

 

허난설헌의 생가 근처의 경포생태숲

 

줄배를 타고 작은 호수를 건너서...

 

 

 

 

 

경포호를 터덜터덜 걸어서

 

 

홍길동을 표현한 난설헌교

이 다리를 건너면 허난설헌의 생가로 가게 된다.

 

난설현교에

왜 난설헌을 세우지 않고

허균의 대표작에 등장하는 홍길동을 세웠는지...

허균의 죽음이 명예롭지 못해서

난설헌교라 이름짓고

같은 곳에서 태어난 허균의 대표작 홍길동을 세웠는지도 모르겠다...

 

초당의 솔밭

이 깊숲한 솔밭에서

허난설헌과 허균은 무궁무진한 글을 상상하고 생각했으리라.

 

 

 

 

허난설헌생가터

강원도 문화재 자료 59호

 

솔밭을 걷다보니

그 안에 허난설헌의 생가터가 있고 다시 생가를 복원했다..

흙담으로 둘러쳐진 생가...

 

강원 강릉시 난설헌로193번길 1-29

(지번) 강릉시 초당동 477-8

 

 

 

지근거리에 오죽헌이 있고

근처에 선비의 대표적인 고택 선교장이 있는 이곳에

경포대 해수욕장이 개발되면서

역사의 숨결이 묻혀버렸지만

경포호 근처의 문화재를 둘러본다면 뜻깊은 걸음이 될 것이다.

 

여기가 초당동인 이유는 허균의 부친이 "초당 허엽"인데서 비롯되었다.

 

 

허난설헌은 1563년(명종18년)

경상감사를 지내고 동인의 영수(領袖)이던 허엽(許曄)의 둘째딸로 강릉의 명문가에서 태어났다.

 허난설헌의 본명은 초희(許楚姬). 별호는 경번(景樊).

그녀의 큰 오빠 허성은 이조와 병조 판서를, 둘째 오빠 허봉 역시 홍문관 전한을 지냈다.

홍길동전의 저자로 우리에게 알려진 허균은 형조와 예조 판서를 지냈으며 그녀의 동생이다.

난설헌이 일곱 살 때 지은 광한전백옥루상량문(廣寒殿白玉樓上樑文)

그녀의 천재성을 유감없이 발휘한 대 문장이었다.

 일곱 살밖에 안된 어린 소녀가 선녀가 살고 있다는 상상속의 세계에 궁전이라는 광한전을 생각하고

상상속의 하늘의 황재가 살고 있다는 백옥루를 연상하며

그 궁전을 건축하는 상량문을 지었다는 것은 그 당시 문인 재사들을 뒤집어지게 하는 사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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깔끔한 행랑채사이로 솟을 대문이 있어서 그안으로 들어가보았다.

 

 

허초희가 뛰어 놀았던 마당과 사랑채

허균의 영정이 있다.

 

 

 

 

 

 

 

 

허균許筠

 

 

1569(선조 2)~ 1618(광해군 10).
조선 중기의 학자·문인·정치가.

 

자는 단보(端甫), 호는 교산(蛟山)·성수(惺叟).

그의 가문은 대대로 학문에 뛰어난 집안이어서 아버지 엽(曄), 두 형인 성(筬)과 봉(篈),

그리고 누이인 난설헌(蘭雪軒) 등이 모두 시문으로 이름을 날렸다.

21세에 생원시에 급제하고 26세에 정시(庭試)에 합격하여 승문원 사관(史官)으로 벼슬길에 오른 후

삼척부사·공주목사 등 관직을 제수받았으나 반대자의 탄핵을 받아 파면되거나 유배를 당했다.

 

그후 중국 사신의 일행으로 뽑혀 중국에 가서 문명을 날리는 한편 새로운 문물을 접할 기회를 갖게 되었다.

한때 당대의 실력자였던 이이첨과 결탁하여 폐모론을 주장하면서 왕의 신임을 받아 예조참의·좌찬성 등을 역임했으나,

국가의 변란을 기도했다는 죄목으로 참수형을 당했다.

 

역적으로 형을 당한 까닭에 그의 저작들은 모두 불태워지고 〈성수시화 惺叟詩話〉·〈학산초담 鶴山樵談〉·〈성소부부고 惺所覆藁〉 등

일부만이 남아 전한다.

그는 학론(學論)·정론(政論)·유재론(遺才論)·호민론(豪民論)의 논설을 통해 당시 정부와 사회의 모순을 비판하고 개혁방안을 제시했다.

문인으로서 그는 소설작품·한시·문학비평 등에 걸쳐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문집에 실려 있는 그의 한시는 많지는 않지만 국내외로부터 품격이 높고 시어가 정교하다는 평을 받는다.

시화(詩話)에 실려 있는 그의 문학비평은 당대에는 물론 현재에도 문학에 대한 안목을 인정받고 있다.

 

그의 작품으로 전하는 〈홍길동전〉은 그의 비판정신과 개혁사상을 반영하는 것으로서,

적서차별로 인한 신분적 차별을 비판하면서 탐관오리에 대한 징벌, 가난한 서민들에 대한 구제, 새로운 세계의 건설 등을 제안했다.

〈엄처사전〉·〈손곡산인전〉·〈장산인전〉·〈장생전〉·〈남궁선생전〉 등은 그가 지은 한문소설인데,

 여기서는 주로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으면서도 의미 있게 살아간 사람들을 주인공으로 하여

그들의 남다른 삶의 모습과 사상을 기술했다.

 

 

최초의 한글소설로 유명한 허균의 영정이다.

이곳이 허난설헌과 허균의 생가이지만

허난설헌의 생가로 명한것은

아마도 허균이  참수형을 당한 자이기때문이라...생각해본다.

 

그리고 이마을 이름이 초당인것은 허난설헌과 허균의 아버지 허엽의 호인'초당'에서 따온 것이다.

 

사랑채 앞에 서있는 향나무가 멋드러져 보인다.

 

 

 

행랑채

 

ㅁ자구조를 가진 안채

 

 

 

우리나라 규방문학의 금자탑 허난설헌의 규원가(閨怨歌)다.

그녀의 작품 규원가는 우리 국문학사(史)에 길이 남을 위대한 작품이며

가사문학의 정수이고 규방문학의 진수이며 우리 문학의 금자탑이다.

규원가(閨怨歌)

엊그제 저멋더니 하마 어이 다 늘거니/

소년행락 생각하니 일러도 속절없다/

늘거야 서른 말씀 하자니 목이 멘다/

부생모육 신고하야 이내 몸 길러 낼 제/

공후배필은 못 바라도 군자 호구 원하더니/

삼생의 원업이오 월하의 연분으로/

 장안 유협 경박자를 꿈가치 만나잇서/

당시의 용심하기 살얼음 디듸듯/

삼오이팔 겨오지나 천연여질 절로이니/

이 얼골 이 태도로 백년기약 하얏더니/

연광이 훌훌하고 조물이 다 시하야/

봄바람 가을 믈이뵈 오리 북 지나듯 /

설빈화안 어디두고 면목가증 되거고나/

 내 얼골 내 보거니 어느 님이 날 괼소냐/

스스로 참괴하니 누구를 원망하리

 

 

 

허난설헌

 

(許蘭雪軒, 1563년 ~ 1589년 3월 19일)은 조선 중기의 시인, 작가, 화가,이다.

본명은 초희(楚姬)[1]로, 다른 이름은 옥혜(玉惠)이다. 호는 난설헌(蘭雪軒), 난설재(蘭雪齋)이고,

자는 경번(景樊)이다. 본관은 양천(陽川)이다.

 

이달(李達)에게 시와 학문을 배워 천재적인 시재(詩才)를 발휘하였다.

1577년(선조 10년) 김성립(金誠立)과 결혼했으나 결혼 생활은 원만하지 못했다고 한다.

자신의 불행한 자신의 처지를 시작으로 달래어 섬세한 필치와 독특한 감상을 노래했으며,

애상적 시풍의 특유의 시 세계를 이룩하였다.[2]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여류 문인의 한사람이며, 300여 수의 시와 기타 산문, 수필 등을 남겼으며 213수 정도가 현재 전한다.

서예와 그림도 잘 그렸다. 남편 김성립과 시댁과의 불화와 자녀의 죽음과 유산 등 연이은 불행을 겪으면서도 많은 작품을 남겼다.

1608년(선조 41년) 남동생 허균(許筠)이 문집을 명나라에서 출간함으로써 알려졌다.

 

사후 남편 김성립 이조참판추증되면서 그 역시 정부인(貞夫人)으로 추증된다.

사후, 작품 일부를 동생 허균명나라시인 주지번(朱之蕃)에게 주어 중국에서 시집 <<난설헌집>>이 간행되어 격찬을 받았고,

1711년 분다이야 지로(文台屋次郎)에 의해 일본에서도 간행, 애송되어 당대의 세계적인 여류 시인으로써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

 1612년에는 취사원창이란 이름으로 미간행 시집이 발간되기도 했다.

 당대에는 고부갈등과 남편과의 불화 등으로 부정적인 평가를 받았으나,

사후 조선 후기에 이르러 그녀의 시들의 작품성과 예술성을 인정받게 되었다.

 

초당 허엽의 딸로 허봉의 여동생이자 교산 허균의 친누나이며, 허성의 이복 여동생이다.

어의 허준은 그의 11촌 숙부뻘이었다. 손곡 이달(李達)의 문인이다. 강원도 출신.

 

 

 

안채의 뜰에 핀 국화가 인사합니다.

 

 

안채와 어우러진  가을 국화

 

 

나즈막한 나무, 나즈막한 굴뚝

그리고 마당에 누어서 피듯하는 국화가  참 이쁘다.

 

 

 

장독대와 어우러진 다알리아.

 

 

고택답게 장작도 있네요

 

허균, 허난설헌의 유명세 답게 고택의 규모가 크다

 

생가 밖에서 바라본 모습

맨드라미꽃과 어우러진 모습이 참 곱다.

 

 

고택밖의 허난설헌의 동상

 

허난설헌은 죽기 직전, 자신의 작품들을 모두 소각시켰다.

친정집에 있는 그의 시와 작품들까지도 모두 태워버리라 일렀으나

누이의 재능을 아깝게 여긴 동생 허균은 유지를 따르지 않고 그녀의 작품을 보관했다.

누이가 세상을 떠나자 동생은 다음과 같이 울었다.

“옥(玉)이 깨지고 별이 떨어지니 그대의 한 평생 불행하였다.

하늘이 줄 때에는 재색을 넘치게 하였으면서도, 어찌 그토록 가혹하게 벌주고, 속히 빼앗아 가는가?”

 

 

그녀의 시의 세계를 아깝게 여기던 그녀의 동생 허균이

전국 곳곳에 흩어져있던 시편들을 모아 목판본으로 시집을 출간하였으나

형조 판서로 있던 동생 허균이 이이첨의 사주를 받은 애((愛)제자 기준격(奇峻格)의 배신으로 반역죄의 누명을 쓰고

광해군 10년 8월 24일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자 덩달아 그녀의 시집도 탄압받게 되어 불태워졌다.

하지만 중국 사신으로 조선을 방문한 주지번(朱之番)에게 전달된 허난설헌의 시집은

중국 명나라에서 출판되어 낙양의 지가(紙價)를 올리며 대륙을 흔들었고

그 출판본이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열도(日本列島)를 뒤흔들었으며

일본에서 출판된 허난설헌의 시편들이 조선으로 역수입(逆輸入)되어 경상도 동래(東來) 땅에서 첫 출판되었다.

참으로 서글픈 일이다.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자신의 나라에서는 홀대를 받고 제3국에서 평가를 받았으니 말이다.

이리하여 허난설헌 그녀는 동양 3국에서 우뚝 선 여류 시인으로 추앙받게 되었다.

그때가 그녀가 죽은 지 103년이나 흐른 1692년이었다.

시대의 모순에 순응하지 않고 시대를 앞서 나가며 살아야 했기에 비난을 감수해야 했으며

평탄하지 못한 삶을 살아야했던 허난설헌.

죽은 이후에도 남성 사회의 본류 조선(朝鮮) 선비들로부터 폄하와 비판을 받은 그녀의 작품은 위작과 표절로 매도되었다.

416년이 지난 현재에도 그녀의 작품과 인간 허난설헌은 완전한 명예회복을 이루지 못하고 있어 안타깝다. (펌)

 

 

 

생가밖에는 허난설헌 기념관이 있고

내가 방문했을무렵에는 봉숭아 열매가 여울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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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을 내가 얼마나 알고 있는지 의문이 갔다.

초당두부와 경포대...경포호..

무수히 왔었고 손바닥보듯이 안다고 생각했는데

이곳은 몰랐다.

강릉은 역사와 휴양지의 두가지의 모습을 보여주는 도시이다.

 

 

뉘엿뉘엿한 저녁해를 등지고

집으로 가기위해 돌아서는 길

다른때 보다 참 뿌듯하다

강원인으로서 고향을 알고가는 느낌이다.

2014.9.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