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 54572 서동공원
한해를 마무리하는 12월
송년회로 분주하지만
즐겨하는 비박산행도 송년회겸 지방으로 떠나게 되었다
이번 송년회는 비박대장 고향인 익산으로 떠났다
익산은 늘상 산이 없는 마을이라고 해서 그런가보다 했는데
용화산과 미륵산이 있다고 한다
산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따라나선다
높은산 낮은산이라는 의미는 없다
하루를 산과 함께 하면서 동서남북으로 뻗어있는 마을 풍경을 보며
이나라 이땅의 아름다움을 또 한폭 얻어온다는 마음이니까 말이다
갔던 산이면 안다고 반갑고
모르는 산이면 궁금함으로 더 가고 싶고 ..
이제 몇년을 더 다닐지는 모르지만 아직도 함께 하자는이 있으니 반가운 마음으로
올 한해를 정리하는 비박 산행을 떠나기로 했다
2019.12.21.토. 날씨 흐림
인천9시출발 익산11시30분도착
오전 11시 산행시작-오후4시 하산
익산 용화산&미륵산
산행코스:서동공원 -절터산-용화산-용리산삼거리-아리랑고개(다듬재)-미륵산성-약수터-미륵산-암릉하산길-약수터-소림사-미륵사지주차장
산행거리:10km
산행시작점
금마저수지 인근 서동공원
넓은 주차장과 화장실이 있다
전북 익산시 금마면 동고도리 534-4
서동공원에 주차를 하고 용화산 둘레길 안내판옆으로 산행은 시작된다
산행시작은 운동화 신고도 오를수 있는 둘레길이다
마을 사람들 누구나 편히 오르고 내리는 곳인가보다
등산복차림은 보이지 않고 전부 운동복차림으로 오가는 사람들이다
익산은 산이 없다더니 정말 야산이구나..생각했다
미륵산을 가기전까지는 이런 생각으로 오르게 된다
공원조성중인가보다
주변은 아직 엉성한 느낌의 풍경을 준다
서동공원내에는 여러가지 볼거리가 있지만
산행으로 바로 접어드는 바람에 서동공원구경을 하지 못했다
서동공원
금마저수지를 끼고 있는 시원한 조각공원인 서동공원은 한여름을 가로지르는 자전거하이킹과 산책을 즐길 수 있으며,
선화공주와 서동왕자의 조각상과 "서동요" 조각을 비롯한 98점의 조각들을 만날 볼 수 있다.
중앙광장에는 무왕 동상이 위치하고 있으며, 십이지신상 조각을 보며 그 의미 또한 새기며 사진을 찍어 볼 수 있어 한층 재미가 있다.
봄에는 철쭉이 환영하며, 여름에는 금마저수지가 물결이 푸르다.
가족소풍이나 단체 소풍 코스로도 좋다. 서동공원내에 있는 궁남지 연못은 신라 선화공주(善花公主)와 결혼한 무왕(武王)의 서동요(薯童謠) 전설이 깃든 곳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백제 무왕 35년(634) 궁의 남쪽에 못을 파고 이십여 리 밖에서 물을 끌어다가 채우고,
주위에 버드나무를 심었으며, 못 가운데 섬을 만들었는데 방장선산(方丈仙山)을 상징한 것」 이라는 기록이 있다.이로 보아 이 연못은 백제 무왕 때 만든 궁의 정원이었음을 알 수 있다. 못 가운데 섬을 만들어 신선사상(神仙思想)을 표현한 궁남자는 우리나라 정원 중에서 가장 이른 시기의 것이다.
백제가 삼국 중에서도 정원을 꾸미는 기술이 뛰어났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삼한시대 마한의 역사와 생활상을 한눈에 살펴볼 수 있도록 꾸며진 마한관이 개관되었다.
전시실은 생활,무덤 공감으로 구분했으며 국립전주박물관 원광대박물관에서 빌려 온 삼한시대 관련 유물 30여점 일반인으로부터
기증받은 70여점 등 110여점이 전시되어 있다.
서동공원앞 금마저수지가 보이는 풍경
금마저수지
또 다른 한반도가 있다, 금마저수지!
미륵산 정상에서 남쪽으로 내려다보면 대한민국 지도와 똑 닮은 모양이 나타난다. 다름 아닌 금마저수지로서 그 모양이 대한민국 지도를 닮았다고 해서 지도연못이라고도 불린다. 새벽 물안개 사이로 보이는 한반도 지형은 너무도 아름답고 독특한 재미를 느끼게 한다. 미륵산을 발원지로 안정적으로 용수가 공급되는 금마저수지는 1년 365일 물이 마르지 않으며 주변에 축사나 공장 등 오염원이 없어 1급수의 수질을 자랑한다.
저수지 주변에는 서동공원과 마한관이 있는데 공원에는 백제무왕의 동상과 서동선화공주 조각상 등 많은 조각 작품이 전시되어 있고 마한관에서는 익산의 역사와 문화를 한눈에 볼 수 있다.
탁 트인 푸르른 금마저수지에서 여유로운 한때를 보내보자! 주말에 가족과 함께, 또는 연인과 친구와 함께 나들이를 나오기에 안성맞춤인 곳이다.
참 길이 아늑하다
겨울로 접어들었지만
겨울같지 않은 아늑한 길이다
두런두런 손잡고 이야기하다보면 어느만치 걸어가있을 길
완만한 길이라 수다를 떨고 가도 부담이 되지 않는 산이다
겨울빛깔들...
용화산의 빛깔을 담아보았다
낮은 산이지만 위급시
주변을 알릴수 있는 표지판들
2키로 정도 걸었으나 땀은 나지 않는다
여유로운 산행을 하며 주말을 보낸다는 것도 더러는 생각을 할수 있어서 좋다
미끈한 편백나무숲도 있네요
남쪽으로는 이런 편백나무가 있어서 좋다
피톤치드가 많이 나온다고 하지요
위험한곳은 없지만
등로를 벗어나지 말라고 밧줄로 경계를 해두었다
길이 넓어서 손잡고 걸어도 좋으니 얼마나 좋은가
낮지만 있을건 다 있다
헬기장도 있구요...
언제 올랐는지 모르지만 어느새 정상에 다왔다
출발지에서 2.6키로..
342미터
인천에 계양산쯤 오른 높이지만
계양산보다 훨씬 쉬운 산행이다
오르면서 동네 뒷산같이 편하다는 느낌이외에 수려한 조망이나 기암괴석이 없어
다소 밋밋한 느낌의 산이라 할 수 있다
왕복 2시간이면 넉넉하게 산행할수 있다
용화산에서 아리랑고개(다듬재)까지 내려가서 다시 미륵산으로 오를예정이다
산행거리는 10키로 정도
이제 4분의1정도 오른셈이다
오르는 동안 신작로같이 넓은길이라 돌이라고는 못봤는데
어디서 주워왔는지 돌탑을 쌓았어요
그돌들좀..그냥 두면 안되나..
왜 이렇게 세워놓는지..
돌은 돌데로 굴러가면서 살고
사람은 사람데로 발길 닿는데로 걸어가고...그게 편한거지
용화산에서 아리랑고개쪽으로 하산하는 길...건너편 미륵산이 올려다 보인다
지금 올랐던 용화산보다 훨씬 높아 보이는 산이라 언제 오를까 싶다
중간에 길처럼 보이는 곳이 미륵산성이다
익사에도 군부대가 있었나보다
군사훈련장이라고 한다
산이 별로 없어서 이런 야산 언저리에서 훈련을 하나보다
용화산과 미륵산에 군데군데 철조망이 쳐져 있다
도비탄은 무었일까
도비탄이란 총에서 발사된 탄이 딱딱한 물체에 부딪혀 튕겨난 것을 말한다.
일각에서는 2017년 9월 27일 강원도 철원 이 모 상병 사망 원인이 도비탄이라고 추정했다.
하지만 군사 전문가들은 도비탄으로 살상하기는 불가능하다고 일축했다.
도비탄은 딱딱한 물체에 부딪혀 튕기는 과정에서 에너지를 크게 잃기 때문이다.
철조망이 처져있기는 하지만 등로를 절대로 벗어나면 안될길이다
용화산의 돌들을 전부 집합시켰나보다
많이도 찾아냈다
성을 쌓듯 쌓아둔 돌탑
저속에는 얼마나 많은 기도가 들어있을까
기도는 욕심의 일부이기도 하다
응급 신고
위치 파악 표지판
빨간색이라 눈에 잘 띄어서 좋다
정상에서 아리랑 고개로 가는 중간
용화산 하산은 2.6키로
낙엽이 어디론가 날아가지 않고 그자리에 수두룩하게 쌓여 있다
길이 푹푹 빠질 지경이다
군사용어가 많은 산..
아마도 예전에는 군사지역이라 아무도 접근이 어려웠다가
요즘들어 풀어준 산인것 같다 라
군사지역뿐만 아니라 멧돼지까지...흐흐흐...
가장 오르기 좋은 산인데 군사용어에 멧돼지까지 있으니 괜시리 으시시하다
이제 용화산은 무리없이 완수하였고
이제 아리랑고개에서 미륵산으로 익산의 산 2탄으로 건너간다
아리랑 고개(다듬재)
용화산에서 하산해서 아리랑고개를 건너서 미륵산으로 다시 올라간다
요기서부터는 산행이라고 할수 있나보다
용와산에서는 보이지 않던 산행 시그널이 보이기시작한다
앗...표지판이 심상치 않다
미륵사지도 있고 정정렬명창이름도 나오고
익산이 뮤명한 역사의 고장이구나..
미륵사지까지 5키로정도 가야하나보다
정정렬이라는 분이 이고장출신의 뮤명한 명창인가보다
정정렬
7세 때 이미 소리에 소질을 보여 부모의 뜻을 좇아 한집안 사람인 명창 정창업으로부터 소리수업을 받기 시작했다.
그러나 14세 되던 해에 정창업이 죽었기 때문에, 이날치를 찾아가 사사했다.
이날치마저 2년 후 세상을 뜨자 마침내 독공을 시작했다.
40세 무렵까지 익산의 심곡사, 충남 홍산의 무량사, 공주 갑사 등에서 독공을 마친 다음 마산에서 활동했는데,
이미 그때 서울까지 명성을 떨쳤다. 친지들의 권유로 1926년 상경하여, 송만갑·이동백·김창룡 등과 같이 활동했다. 그의 본격적인 활동은 1933년 조선성악연구회가 조직되고, 상무이사를 맡으면서부터이다. 그는 조선성악연구회를 중심으로 판소리의 창극화에 힘썼는데,
1935년 〈춘향전〉·〈심청전〉, 1936년 〈홍부전〉·〈숙영낭자전〉, 1937년 〈별주부전〉, 1938년 〈배비장전〉·〈옹고집전〉 등의 창극을 편극하여 공연했다.
한국의 창극은 이때 전형을 확립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의 소리는 수리성 중에서도 가장 좋지 않다는 떡목이었다.
그는 이러한 성대의 약점을 다양한 리듬의 변화를 주는, 이른바 부침소리를 개발함으로써 극복했다.
그가 40세가 넘어서야 활동을 시작한 것도,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창조의 과정이 길었기 때문이다.
그는 또 판소리에 계면조를 많이 도입했는데 이러한 그의 소리의 특징은 현대 판소리의 방향타가 되었다.
그는 〈춘향가〉·〈심청가〉·〈적벽가〉를 잘했는데, 특히 〈춘향가〉는 신식소리로 대단한 인기를 끌었다.
정정렬이 중심이 된 소리로는 오케레코드판의 〈춘향가〉, 빅타레코드판의 〈춘향가〉, 폴리돌레코드판의 〈적벽가〉, 폴리돌레코드판의 〈심청가〉 등
전집이 전하고 있는데, 이들은 하나같이 당대 최고의 명음반으로 꼽힌다.
그의 더늠은 〈춘향가〉 중 신관사또 도임 대목이다. 김소희·김연수·김여란·박녹주·이기권 등이 그의 소리를 이었으며, 〈
춘향가〉의 경우 김여란으로부터 최승희·박초선이 배워 계승하고 있으나, 그밖의 소리는 전승이 끊어졌다. 근대 5명창에 넣기도 한다.
철조망에 걸린 솔잎
용화산에도 그랬지만
미륵산쪽도 철조망이 많다
넘어진곳도 있는데 군사훈련장이면 잘 정비를 해두었으면 좋겠다
미륵산성 입구의 표지판
미륵사지까지의 거리는
아리랑고개에서나 500미터쯤 올라온 미륵산입구에서 본 거리나 똑같다
누군가 실수를 한듯하다
좀전에는 철조망에 걸린 솔잎
이번에는 나무가지에 걸려서 꼼짝못하는 갈잎
죽어서 저승가는 길도 막혔다
운명은 사람이나 자연이나..팔짜라더라
미륵산성
문화재 지정 | 전라북도 시도기념물 제12호 |
---|---|
건립시기 | 백제시대 |
성격 | 성곽, 산성 |
유형 | 유적 |
소재지 | 전라북도 익산시 금마면 신룡리 124-1 |
둘레 1,822m. 전라북도 기념물 제12호.
지금은 문지(門址)·수구문(水口門)·옹성(壅城)·장대지(將臺址)·건물지 등의 시설이 남아 있다.
일명 기준성(箕準城) 또는 용화산성(龍華山城)이라고도 한다.
이 성은 금마면 북방 3㎞ 지점의 높이 430m를 최고봉으로 하는 미륵산 동사면을 감은 포곡식 산성(包谷式山城)이다.
남변은 566.6m, 북변은 588m, 서변은 386.4m이다. 동서로 긴 장축 길이는 680m, 남북 최대너비는 370m이다.
성벽은 할석을 이용하여 내외협축(內外夾築 : 속을 단단히 다지고 겉을 쌓음)을 한 흔적이 보이는데, 높이는 4m이고 성 안에 회랑도(回廊道)가 있으며,
너비 4m, 높이 1m의 석루를 형성한 곳도 있다.
최고봉과 수구까지의 거리는 210m인데, 수구 남쪽에 있는 동문지는 옹성을 ㄷ자형으로 둘렀고, 성문 안에는 양쪽에 돌출부가 있다.
성문 너비는 4.3m이다. 성곽이 직선을 이루는 곳에는 간간이 치성(雉城 : 성벽에서 돌출시켜 쌓은 성)이 돌출되어 있다.
동변은 양우각과 동문 좌우에 모두 4개의 치성이 있고, 남변에는 4개소, 서변에는 3개소,
북변에도 1개소가 있다. 서남부에 있는 최고봉은 평탄하여 장대가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성내에서는 ‘金馬渚(금마저)’라고 새겨진 백제기왓조각과 백제도질토기조각 등이 발견되었으며, 동문 안 건물지에서는 고려와 조선조의 기와편도 발견되었다.
이 산성은 기자조선의 마지막 왕이라고 전하는 준왕(準王)이 쌓은 성이라 하여 기준성이라는 전설도 있으나,
백제시대에 처음 쌓은 것으로 보이며, 동문지 일대의 치성·옹성 등의 시설은 후대에 수축한 것이다.
일부는 옛것 그대로 있지만
대부분 복원한듯하여 옛날의 느낌은 그다지 없다
산으로 오르는 길
예전의 누군가의 묘지 였나보다
비석같은 동기둥이 유명무실하게 서있다
이미 용화산1개를 넘어서 힘들기는 하지만
미륵산으로 오르는 길은 완만하다
미끄러질까봐 허수룩한 밧줄도 있고
없는것 보다는 낫겠지싶지만
좀더 폼나게 설치하지...
미륵산이 용화산보다 훨씬 조망이 더 좋다
길건너...먼저 올랐던 용화산이 보인다
오를때에는 그다지 높은줄 몰랐는데 올려다보니.
그산도 높아 보인다
340미터짜리 산이지만 멀리서보니 낮아보이지 않는다
미륵산성이 있던 부근이라 길에 돌이 많다
산성이 허물어져 흩어진듯한 돌덩이들
넘어지지 않으려고 조심스레 정상으로 향해본다
산봉우리 이름은 없지만
산마루에 올라서 한숨돌리고 정상부로 다시 발걸음 올려본다
바위가 성곽처럼 정상을 감싸는 모습니다
미륵산 정상부
제법 넓다란 정상부이다
익산시내를 내려다 볼수 있는 넓은데크가 있고
올라오는 길도 여러갈래이다
* 미륵사지를 감싸고 있는 산, 미륵산(익산) *
미륵산은 금마에서 북쪽으로 8리 정도의 거리에 금마면, 감기면, 낭산면에 걸쳐 있는 높이 430m의 산으로
옛날에는 이산의 동쪽에 이어져 있는 높이 350m정도의 낮은 산봉까지를 포함하여 용화산이라 불렀으나
지금은 구분하여 미륵사지가 있는 북쪽은 미륵산이라 하고 나머지 지역은 용화산이라 하고 있다.
미륵이나 용화는 모두 미륵신앙과 관련이 있는 명칭으로써, 원래는 용화산이라 하던 것이 미륵사가 지어지면서 그 주변산만을 미륵산이라 칭한 것이라 보인다.
이 산은 천호산의 줄기가 동서로 가로질러 이룬 산으로 북으로는 황산벌이 보이고 남으로는 멀리 호남평야를 바라보는 평지에 우뚝 솟아 있으며,
이산에서 발원하는 도천, 부상천, 궁평천, 등은 만경강의 상류를 이루며, 서해안으로 흘러 들어간다.
이 산의 최고봉을 운제봉이라 하고 조금 낮은 앞 산봉을 장군봉이라 하는데,
장군봉에는 마치 장군이 투구를 쓴 것 같은 모양으로 생긴 까닭에 투구 바위라고 부르고 있는 바위가 있다.
‘여지승람’ 익산군 산천조에서는 “장군봉은 용화산에 있는데,
남쪽에 있는 바위에는 두어말의 기름을 녹일 수 있는 구멍이 파져 있어 이 바위를 등잔암이라 한다”고 하는 기록이 보이는데,
여기서 말하는 등잔암은 지금의 장군봉 산정에 있는 투구바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산의 남록에 있는 거북바위를 지칭한 것으로 보인다.
거북바위에는 가로 70cm 세로50cm 정도의 구멍이 파여져 있다.
* 미륵산에 있는 다양한 역사 체험 *
미륵산 안에는 미륵사지를 비롯하여 사자암, 죽사(지금은 없다. 사자암 서쪽으로 백보거리에 있었음),
수백암(지금은 없음, 사자암남쪽으로 이백보 거리에 있었음), 영혈사( 지금은 없음. 수백암 북쪽으로 1리의 거리에 있었음),
명적암(지금은 없음, 사자암 동쪽으로 이백보 거리에 있었음), 천장암(지금은 없음), 명적암 (사자암 동쪽으로 2리 거리에 있었음),
심곡사(현존), 석불사, 태봉사, 장안사지 등 절터가 많이 남아 있는데,
이를 통해서 볼 때 이 산은 백제, 신라, 고려 대를 이어 이 지역의 불교문호의 중심지가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산위에는 기준성이라 불리우는 미륵산성터가 있으며,
중턱에는 백제의 도요지가 여러 곳에 있어 삼족토기 등 백제 토기를 이곳에서 구워냈음을 알 수 있다.
미륵산 정상부에 있는 삼각점 안내판
삼각점이란
지구 표면상의 원거리에 있는 점의 상호 위치와 이들의 각 점을 연결하는 선의 길이 및 그 방향을 정밀하게 측정하는 삼각측량에 의해
지구상의 수평위치가 결정된 점이다. 삼각점에는 표석이 매설되어 있고, 측량의 구분에 따라 등급이 나누어진다.
미륵산 정상부에 살고 있는 고양이
산에 오는 사람들이 먹이를 주니까 사람을 좋아하는 고양이
살이 토실토실하다
익산을 아우루듯 두루두루 돌아볼수 있는 넓은 정상
올라오는 길도 다양하여
용화산보다는 미륵산에 좀더 많은 사람들이 찾는 것 같다
겨울로 들어섰지만 그다지 춥지 않은 겨울
잿빛하늘과 잿빛나무숲...그렇지만 싸늘하지않아서 좋다
정상부에서 올라온길 반대방향으로 내려간다
익산의 대표 유적지 미륵사지로 내려갈 것이다
내려가는 길에도 복원한 미륵산성길이 함께 한다
새로 짜맞춘 산성이라 옛느낌은 안들지만 산정상부에 이많은 돌들을 옮겨서 복원하려고 애쓴 흔적이 보인다
용화산쪽에서 올라오는 길은 유순했지만
미륵사지로 내려가는 길은 제법 앙칼지다
큰 바위들이 많이 등장하는 내리막길이다
잡고 내려갈수 있는 철제 휀스가 설치되어 있는 내리막길..
이길은 사자사지쪽으로 내려가는 편한길
편한길을 두고
미륵사지로 가는 가파르고 험한길로 갈 것 이다
올라앉아있어도 될 만큼 펑퍼짐한 바위도 있고
구렁이처럼 기어가는듯한 나무뿌리들이 솟구쳐 올라있다
미륵사지로 가는 길...잠시 능선이지만
요런길은 아주 짧고요
금마면 가양리 방면의 풍경
길이 다사다난하다
돌도 많고 미끄러지기 쉬운 바위들
철제 휀스를 잡고 천천히 내려가야 하는 길
이쪽길을 택하는 사람은 우리일행밖에 없다
다들 좀더 편한길로 하산을 하나보다
용화산-미륵산 산행중 미륵사지로 하산하는 길은 가장 난코스에 해당하는 구간이다
바위구간길에서 긴장을 하며 한참을 내려왔더니
대나무가 가득한 약수터가 나온다
시원한 대숲소리 들으며 약수한사발...온몸에 대나무 푸른 물이 드는 느낌이다
냉정약수터
유난히 찬물이 나와서 지어진 이름인가...
용화산에서 내려와 아리랑고개에서 미륵산을 거쳐 미륵사지로 하산하는 길을 화살표포 표시해보았다
전라도에는 키큰 대숲이 많아서 청량함이 감돈다
약수터를 지나 편한 길을 따라 내려오니 작은 암자 미륵암이 있다
미륵암 근처에 주차공간과 화장실 시설이 있어서 그동안 참았던 볼일을 볼수 있다
미륵암근처 공중화장실
겨울이지만 아~ 정말 시원한 느낌이 든다
갑자기 산행하느라 쌓인 피로가 다 사라지는 느낌이다
언제쩍 표지판인지
오래된 느낌이 좋아서 표지판 풍경을 남겨보고..
미륵사지
시대 | 고대/삼국 |
---|---|
문화재 지정 | 사적 제150호 |
건립시기 | 601년(백제 무왕 2) |
성격 | 사찰터 |
유형 | 유적 |
면적 | 1338만 4699㎡ |
소재지 | 전라북도 익산시 금마면 기양리 32-2 |
사적 제150호. 미륵사지는 마한(馬韓)의 옛 도읍지로 추정되기도 하는 금마면 용화산(龍華山) 남쪽 기슭에 자리 잡은, 한국 최대의 사찰지이다.
601년(백제 무왕 2) 창건되었다고 전해지며, 무왕(武王)과 선화공주(善花公主)의 설화로 유명한 사찰이다.
국보 제11호인 동양 최대 석탑인 미륵사지 서석탑과 보물 제236호인 미륵사지 당간지주가 있으며,
1974년 8월 원광대학교에서 실시한 발굴조사 때 동탑지(東塔址)도 발견되었다. 건물지(建物址)는 백제와 고구려의 유구(遺構)가 복합되어 있다.
역사적 변천
미륵사는 백제 제30대 무왕 때 창건된 것으로 보이는 백제 최대의 사찰로, 언제 없어지게 된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조선시대에 들어 17세기경에 폐사(廢寺)된 뒤 서탑(西塔) 및 당간지주(幢竿支柱) 등의 일부 석물만 남았으며,
사역(寺域)은 경작지와 민가로 변하여 오늘날까지 내려왔다.
1910년대 일본 학자가 조사한 가람배치(伽藍配置)에 의하면,
미륵사지는 탑과 금당(金堂)이 마련된 일탑식(一塔式) 가람이 ‘品’자 모양으로 3개가 합쳐져 만들어진 사찰로 추정되어 왔다.
그 뒤 1974년과 1975년 두 차례에 걸쳐 원광대학교(圓光大學校)가 동탑지(東塔址)를 조사하기도 하였으나,
전체적인 성격을 파악하기에는 미흡하였다.
이에 정부에서 중서부고도문화권개발사업(中西部古都文化圈開發事業)의 하나로 미륵사지의 발굴조사를 통하여
사찰의 정확한 규모와 아울러 가람배치의 성격과 구조를 밝혀내고, 발굴 결과 얻어진 자료를 통하여 유적을 정비·보존할 목적으로
1980년부터 1995년까지 본격적인 발굴조사를 실시하였다.
발굴조사를 통해 이전까지 알려졌던 ‘品’자 모양의 가람배치설은 맞지 않는다는 것이 확인되는 것과 동시에
사지의 전체적인 규모도 밝혀지고 2만여 점의 유물도 수습되었다.
한편, 미륵사지석탑(국보 11호)은 2001년 10월부터 해체·보수작업 및 보구정비에 착수하였고,
2017년 12월 석재 조립 공정이 완료되었으며, 2018년 6월 복원된 석탑이 일반에 공개되었다.
문화재청 산하 국립문화재연구소가 2009년 1월 14일, 이탑의 탑신 1층 심주(중앙기둥)를 해체·조사하는 과정에서
미륵사지의 창건년대와 창건주를 기록한 사리봉안 기록판과 금제 사리 항아리 등 유물 500여 점을 발굴했다.
이를 통해 미륵사는 무왕 재위 40년인 서기 639년에 백제인 왕후의 발원으로 건립된 사실이 확인되었다.
금판 앞뒷면에 194자로 된 사리 봉안 기록판에는 시주자의 신분이 무왕의 왕후로,
좌평(백제의 최고 관직)인 사택적덕의 딸이라는 사실이 새겨져 있다.
이는 백제 서동 왕자(무왕)가 향가 ‘서동요’를 신라에 퍼뜨려 신라 진평왕의 딸 선화 공주와 결혼했으며,
그 뒤 선화 공주가 미륵사를 건립했다는 『삼국유사』의 내용과는 다른 것이어서 논란이 되고 있다.
의의와 평가
미륵사지는 우리나라에서는 유일하게 삼탑삼금당이 배치된 사찰이라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아울러 백제 무왕이 세운 곳으로서 최근 발굴된 사리기를 통해 창건연대가 정확히 밝혀져, 백제사와 불교미술 연구에 있어 중요한 자료이다.
바위투성이 산을 내려오니 넓은 평전을 차지한 미륵사지가 반겨준다
평소 이런 절터가 있다는 것도 모르고 살았는데
생각지도 못한 넓은 절터를 만나니 예전에 궁궐터처럼 웅장함을 느끼겠다
절터를 벗어나며 올려다본 미륵산
이렇게 해서 생각지도 못했던 미륵산과 미륵사지를 걷고 나니
보물단지를 하나 얻은 느낌이다
산은 나의 보물단지 같은 것
하나씩 얻을때마다 마음이 부자가 된다
미륵사지 석탑(국보11호)과 당간지주
앞에는 연못도 있구요
미륵사지석탑과 미륵산
백제의 찬란한 불교문화를 장식했던 미륵사지
넓은터에 복원해야할 문화재가 많다
다 복원하지 않아도 그 터만 보아도 얼마나 흥했던 불교문화였는지 가히 짐작이 되는 곳이다
국보급 절터를 만나니 발길이 떨어지 않는다
보살이 되어 이 넓은 평전을 걷고 싶다
늘상 여행이든 산행이든 시간에 쫓기다보니 귀한 이터를 두고 가는 것이 아쉽고 또 아쉽다
다음날.....
위봉폭포에서 시작하는 고종마실길 안내도
고종시 감이 나는 동네라서 고종시마실길이라 이름지었다
위봉폭포
전라북도 완주군 소양면 대흥리
위봉산성의 동문쪽에 있는 위봉폭포는 높이가 60m이며, 2단으로 쏟아지는 물줄기는 옛부터 완산 8경에 드는 절경으로 유명하다.
폭포 주변의 기암괴석과 울창한 숲이 빼어난 경관을 이루며, 가까운 곳에는
임진왜란 당시 왜군을 맞아 치열한 전투를 벌인 것을 기념하는 웅치전적지(전라북도기념물 제25호)와
종남산기슭에 송광사가 있고 하류에는 동상저수지, 대아저수지, 화심온천이 있다.
하룻밤을 자고
다시 위봉폭포가 있는 고종마실길에 잠시 들렀다
위봉카페 전망대에서 길카페를 운영한다
폭포때문에 차를 세우는 사람들을 상대로 커피와 몇가지 농산물 파는 상인들과
원래 아는 사람처럼 허물없는 수다를 떨었다
커피는 역시 길카페의 커피가 가장 맛있고 따듯하다
부글부글 끓는 물을 부어서 스윽슥 저어주는 믹스커피맛이 세상에서 가장 맛있지 싶다
입담좋게 이야기를 나누는 아저씨
힘들이지 않고 앉아서 장작을 쪼개는 모습이 장작패기 달인처럼 인상적이었고
맘씨고운 아주머니 커피맛도 좋은 곳이다
청국장한봉지 사들고 돌아서는데 이곳 인심을 사오는듯 따듯한 정이 느껴진다
미륵산과 용화산 산행을 하고 다음날 짜투리 시간을 이용해서
둘러본 완주군 의 위봉폭포...
이곳이 완주 기차산 장군봉으로 가는 입구이기도 하다
나중에 산으로 가는것이 힘들어질때 둘레길을 따라 이길을 완주할수 있으리라는 기대감도 가져본다
익산과 완주군을 돌아보는 1박2일 여정
알차게 이곳저곳을 돌아보는 날이었다
2019.12.29. 일요일 by gye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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