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 한쪽 비워둔다면

photostory- 路

20208.15.토. 삼척 준경묘

kyeong~ 2020. 10. 11. 11:14

삼척 준경묘

2020.8.15. 토. 비

왕복 4킬로

약 2시간

준경묘 주차장 주차장

강원 삼척시 미로면 활기리 151-4

 

광복절 정부의 특혜로 하루 더 연장된 광복절 연휴

동해에 계시는 어머니댁으로 가족들이 모였다

비가 추적추적 오는 날 조카들과 준경묘로 향하였다

주차장에서 왕복 4킬로, 가파르게 1킬로쯤 올라가서 둘레길 같은 길로 1킬로를 걸어 들어가면

숲의 품을 안고 누워있는 준경묘가 있다

여러 번 다녀왔지만 가볍게 운동삼아 다녀오기에 좋은 길이다

비가 안 왔으면 좋겠지만 우산을 쓰고 솔향기 물씬 나는 길을 걸어보기로 했다

 

 

초입에 해충퇴치기가 있는데 여름에는 필히 해충기피제를 잘 뿌리고 가야 한다

산골이라 모기 등 날파리가 많아서 비 오는 날인데도 불구하고 손수건으로 털면서 걸었다

 

늘 다니던 길로만 다녔는데 이번에 와보니 주변에 탐방로가 많이 개설이 되어 있고

유로로 운영하는 곳도 생겼지만 우리는 원래의 숲길을 택하여 걷기로 했다

 

수수가 알이 들기 시작하는 한 여름 비가 추적추적 내리지만 조카들은 군말 없이 따라나섰다

이때까지만 해도 날파리 모기가 그렇게 많은 줄 몰랐다

 

계단으로 오르는 데크도 설치되었지만 원래의 길을 따라 쉬엄쉬엄 오르기 시작했다

가파른 경사길을 따라 1킬로쯤 오르면 그때부터는 무난한 길이다

 

경사길을 다 오르면 이렇게 숨을 돌리는 의자가 있고...

 

또다시 소나무 숲길을 따라 1킬로쯤 걸어가야 한다

 

금강송들이 쭉쭉 뻗어 있는 준경묘 가는 길

 

준경묘 준경묘(濬慶墓)

삼척 준경묘·영경묘 사적 제524호

소 재 지; 강원 삼척시 미로면 준경길 산 333-360(활기리 92), 98, 산 149, 하사전리 산 53

 

 

조선왕조의 뿌리,
풍수가에서 강원도 삼척시 미로면 활기리에 터 잡은 준경묘에 가장 많이 붙이는 수식어다.

그도 그럴 것이 이곳에 묻힌 이양무(李陽武: 고려 의종 때 정중부와 함께 무신정권을 수립했던 이의방의 동생인 이인의 아들) 장군은 이한(李翰)을 시조로 한 전주 이 씨(全州李氏)의 17세 손으로 조선을 창건한 태조 이성계의 5대조 할아버지다. 이성계의 가계(家系)를 보면, 목조(穆祖)로 추존된 고조부 안 사(安社), 익조(翼祖)로 추존된 증조부 행리(行里), 도조(度祖)로 추존된 조부 춘(椿), 환조(桓祖)로 추존된 부친 자춘(子春)으로 이어지는데 이들 능들은 모두가 지금은 갈 수도 없는 북한의 함흥 땅에 있다고 전해지고 있어 풍수가에서는 이곳 묘에다 이런 수식어를 붙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전주에 살던 이양무 장군이 이곳 삼척 땅 활기리에 묻히게 된 것은 고려 고종 18년(1231년) 그의 아들 안 사가 지방 관리들과의 불화로 생명에 위협을 느끼자 고령의 부모와 그를 따르던 170여 가구의 식솔들을 거느리고 삼척 땅 활기리(活耆里)로 피신해왔는데, 그 이듬해에 운명하였기 때문에 이곳에 묻혔다고 한다.

이안사의 삼척 피신에 대해서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는 “전주에 살았던 지방호족인 목조에게 사랑하는 관기(官妓)가 있었는데, 안렴사(按廉使)로 부임한 산성 별감(山城別監)이라는 관리가 그 기생을 탐하게 되자 목조와 대판 싸움이 벌어지고, 그때 목조는 지방장관인 지주사(知州事)를 포함한 관헌들을 싸잡아 모욕을 하게 된다.

 

그러자 지주사는 산성 별감과 음모하여, 이안사를 목자 왕 기설(木子王氣說) 등으로 음해(陰害)하려들자 만약 이것이 고려왕실에 알려지면 멸문지화(滅門之禍)를 피할 수가 없다고 느낀 목조가 야반도주를 한다.”라 적고 있다.
오늘날 이양무의 무덤을 준경묘라 부르게 된 것은 고종 36년(1899년)에 그동안 실묘(失墓)하였던 이곳 이양무의 묘와 이곳에서 4km 정도 떨어진 하사전리에서 그의 부인 묘를 찾아 대대적인 묘역 정비공사 후 이양무의 묘를 준경묘(濬慶墓)라 하고, 그의 부인 묘를 영경묘(永慶墓)로 정하면 서다.

준경묘 찾는 길은 태백시나 동해시에서 38번 국도를 타고 삼척시 미로면에 들어서면 도로가에는 ‘준경묘 입구’라는 표지판이 나온다. 표지판을 따라 약 1.5km를 가면 활기리 마을이다. 백호 자락에만 드문드문 몇 채의 집이 들어서있는 작은 마을이다. 마을 입구에는 ‘준경묘 1.8km’라는 표지판을 또 세워 산으로 난 시멘트 포장길을 화살표로 가리키고 있다.
준경묘를 오르기에 앞서 이안사가 이곳에 피신하여 터 잡고 살았다는 집터를 살피기 위해 마을의 중앙을 흐르는 개울에 놓인 다리를 건너는데, 다리의 명칭을 이 마을의 지명을 붙인 활기교(活耆橋)가 아닌 황기교(皇基橋)라 적고 있다. 뭔가 사연이 있을 것 같아 마을 어르신께 여쭈니 활기(活耆)라는 지명은 본래 황제가 나왔다는 황터 곧 황기(皇基)가 변한 것이라 한다. 그 황제가 조선의 왕을 칭하느냐는 필자의 물음에 긍정도 부정도 않는다.

 

황기교를 건너자 말자 이 마을의 청룡 자락에는 안내문이나 그 어떤 표시도 없는 최근에야 세운 듯한 비각(碑閣) 하나가 나타난다. 이안사가 이곳에 피신 와서 살았던 집터를 표시한 비각이란다. 그런데 이 집터를 기준으로 좌우(左右)의 공간과 현재 마을이 들어선 개울 건너 명당을 다 합쳐봐야 스무 가구 정도 들어설만한 협소한 공간이라 그를 따라온 170여 가구의 식솔들은 과연 어디에서 살았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준경묘의 명당

준경묘의 진응수(眞應水를 振興水라 표기하고 있다)

마을 입구에 세워진 표지판이 가리키는 시멘트 포장길을 따라 오르는 준경묘 가는 길은 한참이나 숨이 턱에 찰 정도로 가파른 오르막길이다. 가파른 오르막길이 끝나면 평평한 길 양쪽으로는 그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쭉쭉 곧게 뻗은 소나무들이 자태를 자랑하는 한국에서는 가장 아름답다는 소나무 숲길이 몇 굽이를 이루며 펼쳐진다. 이곳 소나무를 ‘황장목’이라 하며, 경복궁 중수 때는 資材로도 사용하였다고 한다.
이 소나무 숲길을 몇 굽이돌아 준경묘가 그 모습을 살짝 들어 내미는 이곳 묘역 입구에 이르러 길 우측의 청룡 자락을 보면 철책을 두르고 안내판이 있는 소나무가 있어 눈길을 끈다. 안내판에 의하면 이 소나무는 나이가 95살, 키가 32m, 둘레가 2.1m인 암소 나무로, 소나무의 혈통 보존을 위해서 10여 년간 연구와 엄격한 심사를 통해 우리나라에서 가장 형질이 우수하고 아름다운 소나무로 선발되었다는 것이다. 이른바 미스코리아 소나무인 셈이다.


더욱 재미있는 사실은 2001년 5월 8일 산림청장의 주례로 충북 보은군 내속리산 상판리에 있는 천연기념물 제103호인 정이품송(正二品松)을 신랑으로 맞아 준경묘역에서 세계 최초의 소나무 전통혼례식을 가졌다는 것이다. 보은군수가 신랑(삼산초등학교 6학년 이상훈 대역)의 혼주가 되고, 삼척시장이 신부(삼척초등학교 6학년 노신영 대역)의 혼주가 되어 많은 하객이 참석한 가운데 결혼식이 거행되어 한국 기네스북에까지 올랐다고 한다. 정 2품 송과 혼례를 치렀으니 이젠 이 소나무는 정부인송(貞夫人松)이라 불러야 옳을 것 같다.
정부인송이 서 있는 길 좌측 아래는 계곡으로 이 곳 내명당의 물이 빠져나가는 수구(水口)다. 일반적으로 수구는 불능 통주(不能通舟) 해야 한다는 표현처럼 조각배 하나 지날 수 없이 그 간격이 좁아야 하고, 또한 명당의 물 흐름이나 수구를 빠져나가는 물은 지현자(之玄字)로 구불구불 흘러야 좋다고 한다. 명당과 수구의 물 흐름에 대해서는 풍수 最古의 경전인 <<청오경(靑烏經)>>에도 “산들이 모이고 물이 구불구불 감돌아들면 자손은 번창할 것이나, 산이 달아나고 물이 똑바로 흘러나가면 종이 되어 기식할 것이다(山頓水曲/子孫千億/山走水直/從人寄食).”라고 기술하여 그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곳 수구의 물 흐름은 경전의 표현 산 돈수 곡(山頓水曲) 그대로다. 지현자로 구불구불할 뿐만 아니라 한문(捍門)이 용호 자락의 수구처에 떡하니 몇 개나 버티고 섰다. 청룡 자락보다는 백호 자락에 있는 것이 훨씬 크다. 한문이란 수구를 사이에 두고 청룡 끝 능선과 백호 끝 능선에 붙은 바위를 말한다. 수구가 집의 출입문이라면 한문은 양쪽 문기둥 즉 문설주와 같은 것이다. 그래서 수구처에 한문이 있으면 청룡과 백호가 잘 감싸준 보국(保局)이 존재한다는 것을 뜻하고, 보국 안에는 물이 빠르게 밖으로 나가지 못하므로 생기가 응축되어 대혈이 있다는 증거로도 삼는다. 그러나 이곳 한문은 바위들이 깨끗하지 못하고 조금은 험하고 거친 것이 굳이 흠을 잡자면 흠이다.
수구에서 몇 걸음만 옮겨 명당(明堂) 안에 들어서면 준경 묘의 전경(全景)이다. 이 높은 산 정상 가까운 곳에 이런 분지(盆地)가 있을 거라고 감히 상상도 못 했는데, 국세(局勢)가 시원스럽게 펼쳐진 명당은 넓고 평탄원만 하며 아늑하여 마치 평지에 있는 느낌을 준다. 이와 같이 높은 산 정상 부근에 혈을 맺는 것을 하늘의 천궁(天宮)과 같다는 뜻에서 천교혈(天巧穴)이라 한다. 천교혈은 그 역량이 대단히 커서 상격룡(上格龍)은 군왕지지(君王之地), 중격룡은 장 상지지(將相之地)가 된다고 한다. 하지만 주변 산들이 성곽처럼 나성(羅城)을 이루어 감싸주고 혈 앞에는 천지수(天池水)가 있어야 제대로 된 천교혈이 된다. 이곳에는 그 조건을 모두 갖추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