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적인 비예보도 있고 더위도 밀려온다
집에서 뒹굴거리는 것 보다야
오대산 깊은 계곡길 동피골을 걸으면 훨씬 시원할 것 같아서
오대산 선재길을 걸어보기로 했다
상원사와 월정사를 잇는 둘레길인데 오대산을 타고 흘러내리는 개울을 따라 이리저리 걷는 길이라
힘들면 물가에 자리펴고 쉴 수도 있고
걷기 싫으면 신작로로 걸어도 된다
서둘러 찾아온 더위지만 더위에 대해 전혀 부담을 느끼지 않는 길
몇 번 걸었던 길이긴 하지만 여름날의 풍경은 어떤 모습일까
새벽 일찍 길을 나서본다
상원사 앞 주차장에는 오대산의 큰 개념도가 거대하게 길손을 반긴다
비 온다는 예보만 없어도 오대산 산줄기를 걷고 싶지만
오대산 산행은 참아보기로 하고... 시원한 숲길 선재길을 걸어볼량이다
상원사 주차장 :강원 평창군 진부면 동산리 산 1
2021.6.26. 토. 오대산 선재길
인천 6:40 출발
상원사 주차장 10시 도착
이동거리 9킬로
이동시간 4시간
인천으로 오후 2시 30분 출발
날씨 흐림
월정사로 들어가는 다리 금강교
그 아래로 흐르는 푸른 물은 금강연
요즈음은 게릴라성 폭우도 자주 찾아오고 일기에 대한 예측을 할 수가 없다
오늘도 비예보가 있어서 인천에서 오대산으로 오는 도중에 비가 오락가락했다
걱정은 되었지만
상원사에 도착하자 다행히 비가 멈추고 오대산 산자락에는 안개가 산봉우리를 덮고 있다
상원사 앞 이정표
9킬로 옛말로 20리가 넘는 길이다
산길도 아닌데 이쯤이야....
가뿐하게 출발해본다
오대산 상원사 입구
예측할 수 없는 우기지만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고 있다
상원사 반대편으로 전나무 숲길이 있지만
그 길은 생략하고 상원사를 거쳐 월정사로 가는 선재길을 바로 선택하기로 했다
잔뜩 흐린 날씨지만 상원사 입구 해맑게 웃고 있는 산딸나무
산딸나무가 이렇게 큰 나무는 처음 보았고
꽃이 주렁주렁 나뭇가지를 가득 체우고 있어서 상원사를 지키는 화신이 서있는 것 같다
오대산 월정사 요약 대한불교조계종 제4교구의 본사로 강원도 중남부에 있는 60여 개의 절을 관리하고 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643년(선덕여왕 12) 자장율사가 당나라에서 문수보살의 감응으로 얻은 석존 사리와 대장경 일부를 가지고 돌아와서 통도사와 함께 이 절을 창건했다고 한다. 〈사적기〉에 의하면 1307년(충렬왕 33)에 큰 불이 일어나 불타버렸으나 중창했고, 1833년(순조 33) 다시 화재로 소실되었던 것을 1844년(헌종 10)에 재건했는데, 1·4후퇴 때 군사작전상의 이유로 아군에 의해 칠불보전을 비롯하여 10여 채의 건물이 전소되었다. 이때 양양군 서면 선림원지에서 출토되어 이 절에서 보관하고 있던 통일신라시대의 선림원지 동종(804)도 함께 불타 녹아버렸다. 그 뒤 1964년에 적광전을 중창한 이래로 계속 중건하여, 현재는 대강당·삼성각·심검당·승가학원·용금루·일주문·요사채 등이 있다. 중요문화재로는 8각9층석탑(국보 제48호), 석조보살좌상(보물 제139호), 오대산상원사중창권선문(보물 제140호) 등이 있다. <다음백과 발췌> |
월정사 중요 문화재<다음백과및 문화재청 발췌> |
|
8각9층석탑(국보 제48-1호) 자장율사가 창건한 월정사 안에 있는 탑으로, 그 앞에는 공양하는 모습의 석조보살좌상이 마주보며 앉아 있다. 탑은 8각 모양의 2단 기단(基壇) 위에 9층 탑신(塔身)을 올린 뒤, 머리장식을 얹어 마무리한 모습이다. 아래층 기단에는 안상(眼象)을 새겨 놓았고, 아래·위층 기단 윗부분에는 받침돌을 마련하여 윗돌을 괴어주도록 하였다. 탑신부는 일반적인 석탑이 위층으로 올라 갈수록 급격히 줄어드는 모습과 달리 2층 탑신부터 거의 같은 높이를 유지하고 있으며, 1층 탑신의 4면에 작은 규모의 감실(龕室:불상을 모셔두는 방)을 마련해 두었다. 지붕돌은 밑면에 계단 모양의 받침을 두지 않고 간략하게 마무리하였고, 가볍게 들려있는 여덟 곳의 귀퉁이마다 풍경을 달아 놓았다. 지붕돌 위로는 머리장식이 완벽하게 남아 있는데, 아랫부분은 돌로, 윗부분은 금동으로 만들어서 화려한 아름다움을 더해주고 있다. 고려시대가 되면 4각형 평면에서 벗어난 다각형의 다층(多層)석탑이 우리나라 북쪽지방에서 주로 유행하게 되는데, 이 탑도 그러한 흐름 속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고려 전기 석탑을 대표하는 작품이다. 당시 불교문화 특유의 화려하고 귀족적인 면모를 잘 보여주고 있으며, 전체적인 비례와 조각수법이 착실하여 다각다층석탑을 대표할 만하다. 또한 청동으로 만들어진 풍경과 금동으로 만들어진 머리장식을 통해 금속공예의 수법을 살필 수 있어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
|
석조보살좌상(국보48-2호) 월정사 석조보살상은 팔각구층석탑의 남쪽 전방에 무릎을 꿇고 앉아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아 탑을 향해 무엇인가 공양을 올리는 자세를 갖추고 있는 점에서, 원래부터 탑과 공양보살상은 한 세트로 만들어진 것으로 이해된다. 이 보살상은 고려 후기민지(閔漬, 1248∼1326)가 찬한『오대산사적(五臺山事蹟)』의 「신효거사친견오류성중사적(信孝居士親見五類聖衆事跡)」에 “탑 앞에 약왕보살의 석상이 손에 향로를 들고 무릎을 괴고 앉아 있는데, 전해오기를 이 석상은 절 남쪽의 금강연에서 솟아나왔다”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지금의 모습과 꼭 일치한다. 이에 따라 이 보살상은 대체로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권6 「약왕보살본사품(藥王菩薩本事品)」에 근거하여 조성된 ‘약왕보살’로 일컫는다. 석조보살상은 전체적으로 양감이 강조된 모습이며, 안정되고 균형 잡힌 자세와 알맞은 비례를 갖추고 있으며, 보관과 귀걸이, 팔찌, 가슴 영락 장식 등 세부표현도 화려하고 섬세하다. 이와 같은 탑전(塔前) 공양보살상은 이전에는 찾기 힘든 고려 전기적 특징인 동시에 다른 나라에서는 볼 수 없는 우리나라만의 독창적인 도상과 구성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가치와 의미를 지닌다. 또한 강원도 지역에 집중적으로 조성되어 고려 불교조각의 지역성 연구에도 중요한 자료라 할 수 있다. |
|
월정사 팔각구층석탑 사리장엄구 (보물 제1375호) 월정사팔각구층석탑(국보 제48호)내 발견 유물일괄은 1970년 기울어졌던 팔각구층석탑을 해체 복원할 때 발견된 것으로 모두 9종 12점이다. 이들 일괄유물은 대체로 10∼11세기 경에 제작된 유물들이어서 석탑이 건립될 때 함께 납입된 것으로 추정된다. 일괄 유물로는 은제도금여래입상과 청동사리외합을 비롯하여 은제내합, 호리병 모양의 수정사리병, 금동제 사각향갑, 청동거울, 전신사리경 두루마리, 수라향갑 주머니, 명주보자기 등이 발견되었다. 월정사팔각구층석탑내 발견 유물일괄은 고려시대 초기의 금속공예사의 현황과 불교사상의 변화 연구하는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으로 평가된다. |
|
오대산상원사중창권선문(국보 제292호 ) 조선전기 승려 신미·학열·학조 등이 세조를 위하여 오대산 상원사를 중수할 때 작성한 문서. 중수기·불교문서 국보 제292호. 2첩(帖). 필사본. 세조가 중수의 소식을 듣고 물자를 보내면서 지은 글인 상원사 어첩(御牒)과 함께 첩장(帖裝)으로 월정사에 소장되어 전한다. 이들은 각각 한문 원문과 한글 번역으로 되어 있는데, 전자에는 신미와 학조 등, 후자에는 세조와 왕비, 세자와 세자빈 및 거의 전국 관료들의 수결과 옥새가 찍혀 있다. 한글 번역본은 가장 오랜 필사본으로서 유명하며, 수결은 고문서연구의 귀중한 자료가 된다. 이 자료는 1936년 『조선사(朝鮮史)』에 부분 복제가 되었으나, 근년에 월정사에서 원본 크기로 복제하였다. 그러나 이 복제본은 매우 소홀하게 되어 원본과 차이를 보이는 곳이 있다. 이 권선문은 세조와 상원사 및 신미와의 관계를 살필 수 있는 역사적인 사료이며, 훈민정음을 제정한 이후에 필사한 가장 오래된 자료이므로, 조선 초기의 한글 서체를 살피는 데에 있어서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 |
석경원과 종고루
석경원과 종고루가 있는데
석경원은 아래쪽에 있는 가게를 의미하는 것이고 종고루는 위쪽에 있는 범종루를 의미한다
범종루에는 범종, 목어, 운판, 법고 등이 봉안되어 있고
예불 때 사용해 소리를 통해 부처님의 진리를 중생에게 전하고 해탈성불을 이루게 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ㅇ월정사 팔각구층 석탑과 석조보살좌상
월정사 팔각구층석탑과 석조보살좌상 월정사 적광전 앞에 있는 고려시대의 8각9층석탑 평창 월정사 팔각구층석탑(平昌 月精寺 八角九層石塔)은 강원도 평창군 월정사에 있는 고려시대의 석탑이다 1962년 12월 20일 대한민국의 국보 48포로 지정되었다가 2017년 1월 19일 제 48-1호로 문화재 지정번호가 변경되었다 고려 중기 다층석탑의 대표적인 예로 전체 높이는 15.15m이다. 하성기단의 갑석에는 연화문이 새겨지고 옥개석(屋蓋石)에는 층급 받침 대신 백제식 석탑에서 볼 수 있는 각(角)과 원(圓)의 2단받침을 쓴 것이 특이하다. 탑의 남쪽 면 앞에는 북쪽을 향해 앉은 보살석상 있는데, 이러한 유례는 강릉 신복사지 삼층석탑에에서도 볼 수 있다 자장율사가 창건한 월정사 안에 있는 탑으로, 그 앞에는 공양하는 모습의 석조보살좌상이 마주보며 앉아 있다. 자장율사가 창건한 월정사 안에 있는 탑으로, 그 앞에는 공양하는 모습의 석조보살좌상이 마주보며 앉아 있다. 탑은 8각 모양의 2단 기단(基壇) 위에 9층 탑신(塔身)을 올린 뒤, 머리장식을 얹어 마무리한 모습이다. 아래층 기단에는 안상(眼象)을 새겨 놓았고, 아래·위층 기단 윗부분에는 받침돌을 마련하여 윗돌을 괴어주도록 하였다. 탑신부는 일반적인 석탑이 위층으로 올라 갈수록 급격히 줄어드는 모습과 달리 2층 탑신부터 거의 같은 높이를 유지하고 있으며, 1층 탑신의 4면에 작은 규모의 감실(龕室:불상을 모셔두는 방)을 마련해 두었다. 지붕돌은 밑면에 계단 모양의 받침을 두지 않고 간략하게 마무리하였고, 가볍게 들려있는 여덟 곳의 귀퉁이마다 풍경을 달아 놓았다. 지붕돌 위로는 머리장식이 완벽하게 남아 있는데, 아랫부분은 돌로, 윗부분은 금동으로 만들어서 화려한 아름다움을 더해주고 있다. 고려시대가 되면 4각형 평면에서 벗어난 다각형의 다층(多層)석탑이 우리나라 북쪽지방에서 주로 유행하게 되는데, 이 탑도 그러한 흐름 속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고려 전기 석탑을 대표하는 작품이다. 당시 불교문화 특유의 화려하고 귀족적인 면모를 잘 보여주고 있으며, 전체적인 비례와 조각수법이 착실하여 다각다층석탑을 대표할 만하다. 또한 청동으로 만들어진 풍경과 금동으로 만들어진 머리장식을 통해 금속공예의 수법을 살필 수 있어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다음백과및 문화재청 발췌> |
월정사 석조보살좌상
월정사석조보살좌상 국보 제48-2호. 높이 180cm. 〈월정사사적기〉에 의하면 탑 앞에는 손에 향로를 들고 꿇어앉아 공양하는 약왕보살상(藥王菩薩像)이 있었다고 한다. 또 〈신증동국여지승람〉 강릉일불우(江陵一佛宇)에는 자장의 옛 절에 문수보살이 있어 탑 위로 1,000년 동안 새가 날지 못한다고 하는 고려시대 정추(鄭樞)의 시가 전해지고 있어 이 보살상의 이름은 정확하게 말하기 어렵다. 머리에는 길다란 원통형의 보관을 쓰고 있으며 관 밑으로는 보발(寶髮)이 내려와 양 어깨 위를 덮고 있다. 얼굴은 길고 통통한 편으로 눈·코·입이 조그마하게 표현되었는데, 특히 코와 인중이 짧게 처리되어 있어 이목구비가 얼굴 중심부에 몰려 있으며 턱 밑이 유난히 살쪄 보인다. 신체는 비교적 가늘고 밋밋하게 처리되었으며, 하체에 비해 상반부를 크게 표현하여 전반적으로 다소 불안정한 비례감을 보여준다. 특히 둥근 연화대좌 위에 한 쪽 무릎을 세우고 두 손을 앞으로 모아 무엇인가를 잡고 있는 듯한 공양자세로 앉아 있는 모습은 연산 개태사(開泰寺)에 있는 석조보살좌상(머리부분 파손)을 비롯하여 강릉의 신복사지3층석탑 앞에 있는 석조보살좌상 등 고려시대의 다른 공양보살상에서도 볼 수 있다. 빈약한 가슴 위로 걸친 번잡한 천의는 목걸이·팔찌와 함께 장식적인 효과를 주며, 옷주름선은 굵고 투박하게 표현되어 있다. 또한 비스듬히 기대고 있는 오른팔 밑에는 동자상이 놓여 있는데 뒤에 보수한 것으로 보이며 세부표현이 분명하지 않다. 이 보살상의 통통하고 부은 듯한 얼굴 표현, 높은 원통과 같은 보관, 굵직한 주름으로 나타난 옷 표현 등은 같은 지역인 강릉에서 출토된 한송사지석조보살좌상(국립중앙박물관)이나 신복사지석조보살좌상에서도 볼 수 있다. 특히 높은 관은 통일신라시대의 보살상에서는 보이지 않던 새로운 형태로 고려와 정치적으로 가까웠던 중국 요나라의 보살상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나 확실하지 않다. 따라서 이러한 보살상들은 대체로 강원도 명주지방을 중심으로 고려 초기에 제작되었던 조각작품이 아닌가 생각된다. <다음백과 발췌> |
적광전과 팔각구층석탑
1964년 탄허(呑虛)가 법당인 적광전(寂光殿)을 중창한 뒤 만화(萬和)가 꾸준히 중건하여, 현재 삼성각(三聖閣)·대강당·심검당(尋劍堂)·승가학원(僧伽學院)·범종각·용금루(湧金樓)·일주문·요사채·창고 등이 있다.
이 중 적광전은 남향으로 된 정면 5칸, 측면 4칸의 매우 큰 건물이다. 전내(殿內)에는 석굴암 본존불과 같은 형식의 대불이 봉안되어 있다. 적광전에는 대개 비로자나불을 모시는 것이 통례지만 여기서는 그 통례를 깨고 석굴암 불상의 형태를 그대로 따랐다. 또한, 본존불만 모시고 협시불을 모시지 않은 것도 특이하다.
<다음 백과 발췌>
일행이 있어서 월정사 구경은 여러 번 왔으니 이쯤에서 접고
선재길을 나서기로 했다
선재길의 일주문 같은 문을 지나 개울을 따라 숲길을 따라 시원한 하루를 즐겨보기로 한다
오랜만에 왔더니 선재길 진입로도 바뀌었고
데크길을 조성해두었다
요즈음은 산골 둘레길마다 도시의 힘이 지나간 것처럼 길이 정비되어 있다
시골 같은 길
울퉁불퉁한 길
예전 그대로의 길이 남아 있지 않다
비가 자작자작 지나간 길에는 전나무 향이 코끝에 내려앉는다
착 내려앉은 숲길에는 새소리도 들리지 않고
물소리가 걷는 내내 함께 한다
산골 소박한 길을 걷노라면 웃으며 반겨주는 야생화 때문에
길섶에 주저앉아 본다
무심코 걸어도 될 일이지만
낮은 자세로 어여쁘게 웃어주는데 잠시 눈높이를 맞추며 카메라 셔터를 눌러본다
벗처럼 함께하는 반가운 이정표
곱디고운 연등과 함께 선재길을 걸어본다
선재길은 오대산에서 내려오는 큰 개울을 이쪽에서 저쪽으로
저쪽에서 이쪽으로 넘나들며 걷는 길이다
예전에 왔을 때에는 돌다리로 넘어 다녔다
물에 빠지지 않으려고 펄쩍 건너뛰던 재미가 있었는데
다리가 있으니 편하기는 한데 돌다리는 넘었던 날이 더 좋았다
오대산에 발원하여 진부로 흘러가는 개울
오늘 하루 종일 조잘조잘 물소리 벗하며 걸어가야 한다
화전민터에 집은 사라지고 없지만
감자꽃은 밭 한가득 피고 있다
강원도에 와서 감자꽃을 보고 가야 강원도의 느낌이 절로 난다
이감자의 주인이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토실토실 잘 여물어가길...
에게~ 제법 온 것 같은 2킬로 못 걸었다
처음엔 9킬로를 금방 걸을 것 같았으니 한참 걸어도 반도 못 왔다
얼른 기운차게 걸어야겠다
섶다리를 건너고 싶었는데
우회하는 사이 섶다리를 못건너고 말았다 아쉬운 맘이 한가득이다
화전민터 누군가의 밟고 들어갈 것을 걱정했나 보다
요즘 캠핑족들이 난리니 어쩌면 캠핑족 금지를 위한 바리케이드인가 보다
아유 이뻐라...
소소하게 반기는 나의 낭자들...
단풍나무가 터널을 이루는 숲길
또 반대편으로 건너야 합니다
바지 걷고 신발 벗고 양말 벗고 건너던 그곳이다
돌다리도 사라지고 모양좋은 목교만 가득한 동피골 선재길이다
개울이 맑아서 깊이를 가늠할 수 없다
겁 없이 뛰어드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수영의 대가가 아니면 개울물은 조심조심 또 조심이다
'오대 산보메기'란 표지판이 보이는데 이 또한 일제 수탈의 현장이다.
오대천 수량이 적어 벌목한 뗏목을 운송하기 힘들어 물을 가두어
일정량이 되면 한꺼번에 터뜨려 뗏목을 흘러 보내기 위한 시설이란다.
더운 날 발 담그고 쉬다가
돌탑을 쌓아보는 즐거움
어느 가족이 쌓았나 보다 큰 탑 작은 탑... 가족처럼 어우러져 있다
장마에 큰 물 한번 흘러가면 무너지지 않으려나
여름 같은 비가 내리고
여름같은 땀방울이 줄줄 흘러내리는데
상원사의 숲길은 아직 연둣빛이다
검은 숲이 아직은 아니다
그래서 길을 나서길 더욱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물가의 길은 미끄럽다
미끄러질 것 같은 개울길에 안전한 데크가 있으니 다행이다
물이 닿았던 길이라서인지 데크에 물이 흠뻑 젖어 있다
오래가지 못할 것 같은 느낌이다
피나무에 비가 내린다
작은 꽃잎이 겨우 피었는데 비가 자작자작 지나간다
비가 다녀갔던 흔적을 따라
축축하게 젖어 있는 오대산 선재길
이럴 때 소나기 한방 제대로 맞아야 제격인가....
변화무쌍하지 않은 둘레길이다
그저 걷고... 물소리와 함께 쉬고... 단풍나무와 전나무가 많은 숲길
부담 없이 걷기에 딱인 길이다
화전민터 밭 한가운데 돌탑이 서있다
지윤탑? 0윤탑?
산골짜기에 윤택함을 가지게 하는 탑이라...
동피골 오대산장을 지나면
죽은 나무로 만든 작품을 만난다
'그 또한 찰나(刹那)인 것을'..
쓰러진 나무는 그 생명이 다한 것이나
나무를 작가의 혼을 담아 불(佛)의 형태로 재탄생한 작업이다.
생명이란 결국 윤회를 거듭하는 것..
시간의 흐름 속에서 삶이란 한낱 찰나(刹那)에 불과하고
그 주어진 시간 속에서 의미를 찾고 정각(正覺)-
깨달음 하신 부처의 모습을 현상화한 하종우
작가의 작품이다.
오대산 선재길 동피골을 종일 걷는다.
오대산 선재길은 불교 경전인 '화엄경'에 나오는 동자의 이름으로
선지식을 찾아 돌아다니던 젊은 구도자가 걸었던 길이라는 뜻에서 명명되었다.
선재동자가 이 길에서 깨달음을 얻었듯이,
이곳을 찾는 이들도 자신을 돌아보면 좋을 것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젊은 구도자의 걸음으로 다시 선재길을 내디뎌 본다
자칫 지루할 것 같은 길
들꽃과 돌다리와 물소리를 들으며 구도자의 발걸음을 옮겨본다
신작로 황톳길이다
지금까지 걸었던 둘레길을 벗어나
이곳부터는 신작로를 걸어본다
맨발로 걷고 싶은 충동이 일어나는데 바닥이 젖어 있어서 참아 본다
신작로와 만나는 마지막 둘레길 다리
드디어 상원사 도착이다
상원사까지는 약 2~3백 미터가량 올라갔다가 주차장이 있는 이곳으로 되돌아 내려와야 한다
9킬로 둘레길 치고는 그리 멀지는 않았지만 부지런히 걷기는 했다
상원사로 올라가는 길에 만난 관대 걸이
관대 걸이
상원사는 세조와 관련된 설화가 많은데 그 가운데 하나가 관대 걸이다.
상원사 주차장에서 상원사로 올라가는 길 옆에 서 있는 관대 걸이는 조선 세조대왕이 이곳에 의복을 벗어 걸고 목욕하여 병이 나은 곳이다.
세조가 목욕을 하려고 의관依冠을 벗어 이곳에 걸었다고 하여 '갓걸이' 또는 '관대冠帶걸이'라고 부른다.
상원사 사천왕문 격인 청풍루로 오르지 않고
좀 더 올라가 '번뇌가 살아지는 길'로 올라가 본다
본디 화려하고 우아한 꽃이지만 절집 입구에 심은 꽃이라 조촐하게 피어 있는 작약꽃이 월정사 입구에 반긴다
선재길은 다람쥐 천국이다
작고 앙증맞은 다람쥐가 사람 다니는 길에 자주 포즈를 취해준다
상원사 절집에 핀 작약꽃
이 다람쥐는 누구를 기다릴까
오대산 아래 자리한 상원사
오대산의 광명을 받으시라
다시 청풍루쪽으로 내려가 문수전을 향하여 삼배 합장을 하고...
청풍루 입구에 전시된 전시품... 오색의 실로 만든 작품이라서 한컷
상원사 문수전과 석탑
상원사는 신라 성덕 와 4년(705)에 보천과 효명의 두 왕자가 창건한 진여원(眞如院)이라는 절에서 시작된 사찰로,
조선 세조가 이곳에서 문수동자를 만나 질병을 치료했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이와 같이 상원사는 문수 신앙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절로,
상원사의 문수동자상은 예배의 대상으로서 만들어진 국내 유일의 동자상이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상원사 신라 705년에 성덕왕이 창건하고, 이후 1376년에 영암이 중창했다. 1464년 왕이 이곳에 행차했다가 문수보살을 배알한 후 고양이 덕분에 자객으로부터 목숨을 건졌다고 하는 일화가 전한다. 이로 인해 다음해에 중창하고 전답을 하사했으며, 이것을 영산부원군 김수온에게 기록하도록 했고, 그 기록인〈평창 상원사 중창권선문〉이 월정사에 보관되어 있다. 1469년에 세조의 원찰이 되었고, 1904년에 선원을 개설하고 1907년에 수월화상이 주석하면서 선풍을 떨치게 되었다. 현존 당우로는 선원인 청량선원, 승당인 소림초당, 종각인 동정각, 영산전 등이 있다. 중요문화재로는 상원사동종(국보 제36호) 상원사 목조문수동자좌상(국보 제221호), 상원사 목조문수동자좌상 복장유물 23점(보물 제793호), 등이 있다. <다음백과에서 발췌> |
상원사 문화재<다음백과및 문화재청 발췌> | |
상원사 목조문수동자좌상(국보 제221호), 1466년 작. 국보 제221호. 높이 98cm. 이 동자상에서 발견된 복장유물(보물 제793호)에 의하면 세조의 딸인 의숙공주(懿淑公主)와 그의 남편인 정현조가 득남을 빌기 위하여 오대산 문수사에 문수보살상 등 8구의 보살상과 나한상 등을 조성하여 봉안했다고 되어 있어 어느 때인가 상원사로 옮겨진 것으로 보인다. 이 동자상은 양쪽으로 묶은 동자머리를 제외하고는 자세, 옷을 입은 방식 등에서는 보살상의 형식을 따르고 있는 특이한 상이다. 천진스런 미소를 띤 얼굴은 약간 숙이고 있으며, 굴곡이 안정되게 표현된 신체에 왼쪽 어깨에서 오른쪽 겨드랑이로 비스듬히 묶여져 있는 천의 자락이 1번 둥글게 말려 있으며, 상의가 가슴 전체적인 옷주름은 인체의 흐름에 따라 부드러운 곡선으로 표현되어 있으며 목걸이 이외에는 장식이 거의 없다. 오른손은 들어 엄지와 중지를 맞대고 있고, 왼손은 내려 엄지와 약지를 맞댈 듯이 표현되어 있다. 자세에서 왼쪽 다리는 안으로 접고 오른쪽 다리는 밖으로 둔 우서상(右舒相)을 취하고 있다. 이 동자상에서 얼굴을 앞으로 약간 숙인 모습, 불룩한 가슴과 젖꼭지의 표현, 가슴 아래까지 올려 입은 상의가 신체를 마치 반으로 가르는 것처럼 수평으로 처리된 점 등은 1459~93년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금동석가불좌상(수종사팔각5층석탑에서 발견)과 유사하다. 이 문수동자상은 나무의 질감을 최대한 살려 조각한 것으로 조각기술의 극치를 보여주며 제작연대가 정확한 왕실발원으로 조성된 것으로 불교조각사 연구의 귀중한 자료이다. |
|
상원사 목조문수동자좌상 복장유물 23점(보물 제793호) 1984년 10월 15일 보물 제793호로 지정되었다. 강원도 평창군 오대산 상원사에 있는 목조문수동자좌상(국보 제221호)에서 1984년 7월 불상의 유래를 밝힐 수 있는 2개의 발원문(發願文)과 조선 전기의 복식, 전적류 등 23점의 복장유물이 발견된 유물이다. 전적류는 모두 13종으로 백지묵서제진언, 대방광불화엄경, 오대진언, 묘법연화경 5종, 원각경 2종, 육경합부 3종이 발견되었다. |
'보물 제793호. 평창 상원사 목조문수동자좌상 복장유물 |
여행한 김에 내용을 찾아보고
목조 문수동자 좌상 복장유물 23점(보물 제793호)
내요을 다시 상세하게 나열해본다 <다음 백과 및 검색에서 발췌>
지정번호 및 유물 이름 | 유물 설명 |
보물 제793-1호. 의숙공주발원문 | 조성발원문. 1466년(세조 12) 세조의 둘째 딸 의숙공주(1442~1477)와 그 남편 정현조(1440~1504)가 왕실의 안녕을 기원하기 위하여 오대산 문수사에 여러 불상과 보살상을 만들어 모셨다는 내용. |
보물 제793-2호. 중수발원문 | 1599년(선조 32) 2구의 문수상과 16구의 나한상 등을 새롭게 금칠하고 수리하였다는 내용. |
보물 제793-3호. 백지묵서제진언 | 1463년 선종선사 내호가 다라니 진언 66가지를 범어로 쓴 두루마리. |
보물 제793-4호. 대방광불화엄경 권 28 | 12~13세기 간행된 것으로 추정되는 화엄경 진본(晉本) 60권 中 권28의 목판본. |
보물 제793-5호. 오대진언 | 성종의 어머니인 인수대비의 명으로 당나라에서 원본을 구하여 한글로 음역하고 1485년(성종 16) 간행한 책.다라니 진언 5가지를 범어, 한글, 한자 순으로 적은 활자본. |
보물 제793-6호. 소자본 묘법연화경 1-7 | 1399년(정종 1) 정천익과 이양의 시주로 간행된 목판본 |
보물 제793-7호. 세소자본 묘법연화경 1-7 | 1404년(태종 4)에 간행된 목판본. |
보물 제793-8호. 을해자본 묘법연화경 6-7 | 세조연간(1455~1468) 을해자로 찍은 책. |
보물 제793-9호. 화암사판 묘법연화경 1-3 | 세조연간(1455~1468)에 간행한 목판본 |
보물 제793-10호. 희방사판 묘법연화경 | 1561년(명종 16) 풍기의 짓방사(현재의 희방사)에서 간행한 목판본. |
보물 제793-11호. 을유자본 원각경언해 | 1465년(세조 11) 을유자로 찍은 목판활자본. |
보물 제793-12호. 신흥사판 원각경 | 강희안이 옮겨 적고 간행했던 간경도감판본을 1564년(명종 19)에 신흥사에서 다시 새겨 찍은 복각판본. |
보물 제793-13호. 영제암판 육경합부 | 1440년(세종 22) 가평 영제암에서 새긴 목판본을 바탕으로 1472년(성종 3) 인수대비의 명으로 찍어낸 책. |
보물 제793-14호. 화암사판 육경합부 | 1488년 고산 화암사에서 새긴 목판본을 저본으로 복각한 판본 |
보물 제793-15호. 중대사판 육경합부 | 세조에서 명종 연간에 진안 중대사에서 간행한 것으로 보이는 목판본 |
보물 제793-16호. 명주 저고리 | 조선 초기 적삼.※명주: 견직물. 비단. |
보물 제793-17호. 무문사 저고리 | 조선 초기 생명주 적삼. 범어로 된 천수다라니판이 6개 찍혀 있음. 안섶 안쪽에 '魯氏夫人(노씨부인)'이라 적혀 있음.※생명주: 명주의 한 종류로 정련을 하지 않은 것. ※정련 : 누에고치 섬유를 구성하는 단백질인 세리신을 제거하는 과정.: 누에고치 섬유는 2가닥의 피브로인이 3층의 세리신으로 덮여 있습니다. 세리신은 동물성 보호막이에요. : 정련 과정을 거친 누에고치 섬유는 단백질 섬유질인 피브로인만 남으며 좀 더 부드럽고 따뜻해 겨울, 봄, 가을 소재로 사용합니다. : 정련 과정을 적게 거친 누에고치 섬유는 세리신이 남아 모시와 같이 깔깔하고 시원한 촉감을 주기에 여름 소재로 쓰입니다. |
보물 제793-18호. 황초폭자 | 황색 보자기 |
보물 제793-19호. 백색수정보병 |
보물 제793-20호. 무공수정주 | 구멍이 없는 수정 구슬 |
보물 제793-21호. 사리 | 3개 |
보물 제793-22호. 복장화주 | 3개 |
보물 제793-23호. 후령원통 |
상원사 종무소
상원사 동정각과 국보 비석
상원사 동종에 관해서 따로 정리했기 때문에 누각만 찍어본다
밤에 피는 달맞이꽃이 아니라 낮에 피는 달맞이꽃
상원사 누각 근처에서 곱게 단장하고 낮달을 기다리나 보다
물고기와 대화하는 동자승
땀 뻘뻘 흘리지 않고 구경할 것 많은 선재길을 오랜만에 걸었다
비로봉에 올랐으면 아마도 땀을 말로 쏟았겠지만 비를 핑계로 선재길을 터덜터덜 걸었다
무심히 걸었던 길이지만 정리를 해보니 본 것도 많은 길이 었다
무심함 속에서 깨달음이 얻게 되고 깨달음이 다시 무심함의 길로 가게 하는 것 같다
물가의 수달래가 지천으로 피는 봄날 이곳을 다시 한번 걷고 싶다
2021.6.26 토. 선재길에서 by gyeong~
'photostory- 路'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21.9.20. 포천 아트벨리 (0) | 2021.11.24 |
---|---|
2021.11.6.토.. 천안 독립기념관 단풍나무숲길 (0) | 2021.11.12 |
2021.5.5. 인천대공원~관모산 (0) | 2021.05.24 |
2021.4.24.토. 내포문화숲길(보원사지~개심사) (0) | 2021.05.02 |
2021.4.3.토. 경주여행(대릉원&천마총) (0) | 2021.04.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