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 한쪽 비워둔다면

photostory- 路

2021.4.24.토. 내포문화숲길(보원사지~개심사)

kyeong~ 2021. 5. 2. 12:52

개심사... 참 여러 번 갔던 곳이다

처음에는 개심사 목조기둥이 다듬지 않은 듯 등 굽은 나무기둥을 그대로 쓴 것과

가장 원시적인 화장실...

사람이 살아가는데 모양새가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듯 자연 그대로를 유지하며

살아가는 절집이라 좋았다

그러다 왕벚꽃과 청벚꽃이 좁은 마당을 채우고 있은 모습이

꽃 아방궁에 든 것처럼 화려함에 반해서 몇 번인가 다시 찾게 되었다

티브이에 알려지면서 유명세를 타서 지금은 주차난까지 겪고 있기도 하다

걷는 것을 좋아하는 나는 벗들과 고풍저수지 인근 주차장에 차를 대고

마애삼존불과 보원사지를 거쳐 가파른 경사길 일락산으로 가는 산길을 걸어서 개심사로 가기로 했다

주먹만 한 왕벚꽃과 청벚꽃의 매력에 붙들려 한동안 집으로 갈 생각을 못하게 하는 곳

 

돌아올 때에는 다시 개심사 뒤편 산등성이를 넘어서 주차장까지 돌아오는 8킬로가량의 산길을 트레킹을 하기로 정했다 올해는 다른 해보다 개화시기가 이르다고 하지만 청벚꽃이 활짝 웃으며 반겨주길 기대하며

아침 도시락을 챙겨 들고 집을 나섰다

 

2021.4.24. 토.

내포문화숲길 3코스

오전 9시 30분 출발-놀며 놀며 사진 찍고 오후 4시 완료

약 10킬로

고풍저수지-주차장-강댕이 미륵불-쥐바위-마애삼존불-보원사지-전망대-개심사(원점회귀)

 

 

용현계곡 주차장

충남 서산시 운산면 용현리 987

 

산행이 목적이라면 좀 더 용현계곡 쪽으로 올라가서

보원사지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보원사지 탑 개심사 방향 일락산행을 할 수 있다

보원사지 주차장-충남 서산시 운산면 용현리 152-2 

오늘 걸어야 할 곳까지 자세한 거리가 초입에 서있다

이주 차장에서 수정봉을 통해서 산 능선을 걸어서 개심사까지 갈 수도 있지만

용현계곡길을 타고 오르다 보면 우리의 귀중한 문화유산이 몇 군데 있어서...

계곡을 거쳐서 개심사까지 가기로 했다

 

 

강댕이 미륵불

이 미륵불은 강댕이로 진입하는 지점에 설치된 강당교에서 북쪽으로 약 100m 지점의 전(前) 군장동 안, 현(現) 고풍저수지안에 있었다. 이곳은 지대가 높아 지금도 섬처럼 되었으며 풀이 자라고 있어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이곳이이 저수지로 수몰되게되어 현재의 위치로 옮긴 것이다. 조성연대는 고려말~조선초로 추정되는데 높이는 216cm, 어깨의 폭은65cm, 두께는 25cm이고 머리에 보관을 쓰고 있으며, 오른팔을 위로 올려 가슴에 붙이고, 왼팔은 구부려 배위에 대어 서산지방의 다른 미륵과 같은 형식이다. 전설에 의하면 서해로 통하는 중국 사신들이 오가는 통로에 세워졌다고 하며 또는 보원사를 수호하는 비보장승 이었다고 한다.

쥐바위 인바위 전설이 있어서 안내판을 세워놓긴 했지만

전설은 전설에 불과할 뿐 귀한 느낌은 없다

길가에 바위 하나 있는 느낌이랄까...

단지 이 길을 걸었으니 이정표를 만나듯 사진을 남겨본다

 

 

주차장에서 약 700미터쯤 아스팔트를 따라 걷다 보면

마애삼존불 이정표를 만난다

왼쪽 다리를 건너서 돌계단을 타고 위로 올라가야 한다

 

 

마애삼존불로 올라가는 계단 제법 가파른 길이다

평소에 운동이 부족한 사람들은 올라가는데 숨꽤나 찰 듯싶다

그래도 인자한 백제의 미소를 닮은 마애삼존불을 보는 즐거움에 한달음에 올라갔다

 

 

마애삼존불 관리사무실

가장 아름다운 빛을 가진 연두의 계절

산자락에 연둣빛으로 감싸인 체 앉아 있는 관리사무소가 아늑하게 이쁘다

 

 

불이문

사찰로 들어가는 3문(三門) 중 절의 본전에 이르는 마지막 문을 지칭하는 용어. 

‘불이’는 진리 그 자체를 달리 표현한 말로, 본래 진리는 둘이 아님을 뜻한다. 유마거사의 불이법문(不二法門)이 유명하다. 
일체에 두루 평등한 불교의 진리가 이 불이문을 통하여 재조명되며, 이 문을 통해야만 진리의 세계인 불국토(佛國土)가 전개됨을 의미한다.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瑞山龍賢里磨崖如來三尊像

국보 제84호. 높이 2.8m. 서산시 운산면은 중국의 불교 문화가 태안반도를 거쳐 부여로 가던 행로상에 있다. 
즉 태안반도에서 서산마애불이 있는 가야산 계곡을 따라 계속 전진하면 부여로 가는 지름길이 이어지는데, 
이 길은 예로부터 중국과 교통하던 길이었다. 
이 옛길의 어귀가 되는 지점에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이 있는데, 
이곳은 산세가 유수하고 천하의 경승지여서 600년 당시 중국 불교 문화의 자극을 받아 찬란한 불교 문화를 꽃피웠던 것이다.

내용

묵중하고 중후한 체구의 입상인 본존(本尊)은 머리에는 보주형(寶珠形) 두광(頭光)이 있으며, 소발(素髮)의 머리에 육계(肉髻)는 작다. 살이 많이 오른 얼굴에는 미소가 있고 눈은 행 인형(杏仁形)으로 뜨고 있다. 목에는 삼도(三道)가 없고 법의(法衣)는 두꺼워서 거의 몸이 나타나 있지 않다. 옷 주름은 앞에서 U자형이 되고 옷자락에는 Ω형의 주름이 나 있다. 수인(手印)은 시무외(施無畏)·여원인(與願印)으로 왼손의 끝 두 손가락을 꼬부리고 있다. 발밑에는 큼직한 복련 연화좌(覆蓮蓮華座)가 있고, 광배 중심에는 연꽃이, 둘레에는 화염문이 양각되었다.

이에 대하여 우협 시보 살(右脇侍菩薩)은 머리에 높은 관을 쓰고 상호(相好)는 본존과 같이 살이 올라 있으며, 눈과 입을 통하여 만면에 미소를 풍기고 있다. 목에는 짧은 목걸이가 있고 두 손은 가슴 앞에서 보주(寶珠)를 잡고 있다. 천의는 두 팔을 거쳐 앞에서 U자형으로 늘어졌으나 교차되지는 않았다. 상체는 나형(裸形)이고 하체의 법의는 발등까지 내려와 있다. 발밑에는 복련 연화좌가 있다. 머리 뒤에는 보주형 광배가 있는데, 중심에 연꽃이 있을 뿐 화염문은 없다.

좌협 시보 살은 통식(通式)에서 벗어나 반가사유상(半跏思惟像)을 배치하였다. 이 보살상은 두 팔에 크게 손상을 입었으나 전체의 형태는 충분히 볼 수 있다. 머리에는 관을 썼고 상호는 다른 상들과 같이 원만형(圓滿形)으로 만면에 미소를 띠고 있다. 상체는 나형이고 목에는 짧은 목걸이를 걸쳤다. 허리 밑으로 내려온 옷자락에는 고식의 옷 주름이 나 있다. 발밑에는 큰 꽃잎으로 나타낸 복련 대좌(覆蓮臺座)가 있다. 머리 뒤에는 큰 보주형 광배가 있는데, 그 형식은 우협 시보 살의 광배 형식과 같다.

푸른 하늘과 맞닿아 있는 암석과 녹음으로 가득한 계절

언제 또 이곳을 올까 싶지만 올 때마다 반가운 마음으로 삼배를 하고 뒤돌아 선다

 

 

여기서 약 1.5킬로가량 아스팔트를 따라 걸어가면 보원사지를 만난다

보현사 지를 향하여 즐거운 발걸음을 옮겨본다

싱그러운 녹음만으로도 오늘 길을 나선 충분한 대가를 받는 느낌이다

 

 

보원사지普願寺址

사적 제316호. 
절에 대한 역사는 전혀 전하지 않으며 현재 넓은 절터만이 있다. 
북위 양식을 띤 6세기 중엽경의 금동불입상과 8세기 후반으로 추정되는 금동불입상이 출토되었다. 
현재 절터에는 5층석탑(보물 제104호)·
당간지주(보물 제103호)·
석조(보물 제102호)·
법인국사보승탑(法印國師寶乘塔:보물 제105호)·
법인국사보승탑비(法印國師寶乘塔碑:보물 제106호)가 남아 있다.

보원사지

앗... 이맘때 오면 저만치 보이는 산에 산벚꽃이 유유히 흐를 줄 알았는데

계절을 놓쳤나 보다

꽃 대신 연둣빛으로 온천지를 감싸고 있다

초록빛 평원에 연분홍 산벚꽃이 휘감고 돌아가는 산줄기

12폭 병풍보다 아름다운 풍경이라서 기대에 찬 마음으로 이 길을 택했는데

꽃이 지고 없다

다행히 초록빛으로 익어가는 평지가 마음을 시원하게 뚫어놓는다

 

 

보원사지석조

보물 제102호

높이 90㎝. 통일신라시대 석조(石槽)의 통식(通式)을 따른 장방형 석조로서 하나의 암석을 장방형으로 다듬고
그 속을 역시 장방형으로 파내었다.

현재는 두 곳에 길이로 균열이 나 있다. 표면에 선조(線條) 등 아무 장식이 없어 오히려 장중해 보인다.
내부의 각 면에도 조식이 없으며 밑바닥면은 평평하고 한쪽에 배수공(排水孔)이 있을 뿐이다.

이 석조는 길이가 3.5m에 달하는 거대한 규모인데 이렇게 큰 석조는 드문 일이다.
이 절터에서는 백제시대의 금동여래입상이 발견된 일이 있으나 이 석조를 이때의 것으로 볼 수는 없다.

이곳 보원사지에는 법인국사 보승탑(法印國師寶乘塔, 보물 제105호)과 탑비(塔碑, 보물 제106호)·오층 석탑(五層石塔, 보물 제104호)·당간지주(幢竿支柱, 보물 제103호)·방형 불대좌(方形佛臺座)·석불좌상(石佛坐像) 등이 남아 있는데 법인국사 보승탑과 탑비의 건립연대가 고려 경종 3년(978)이며 이 밖에 다른 석조물들도 모두 이 시대를 전후한 시기의 조성물로 추정되고 있다. 따라서 이 석조의 조성시기 역시 고려전기로 추정된다.

 

보원사지 당간지주로 가는 길

 

이 고목은 나이도 안 먹네

똑같은 모습으로 나를 반기네

 

보원사지당간지주
瑞山普願寺址幢竿支柱

보물 제103호.
높이 4.2m. 두 지주는 원래 위치에 원래 모양 그대로 동서로 마주 보며 서 있다.
안쪽면에는 아무런 조각이 없지만, 바깥쪽면에는 가장자리를 따라 넓은 세로띠가 돋을새김 되었으며,
그 가운데에 다시 활 모양의 세로띠를 새겼다. 옆면에도 가장자리에 세로띠를 돋을새김 하고,
그 가운데에 원조(圓條)의 세로띠를 조각하여 장식적인 면을 보이고 있다.
두 지주의 정상 부분은 안쪽면 윗부분에서 바깥쪽면으로 내려오면서 활처럼 둥글게 깎았기 때문에 유려한 4 분원(四分圓)을 형성하고 있다.
이러한 모습은 통일신라시대에 건립된 당간지주에서 흔히 볼 수 있다.

당간을 고정시키는 간(杆)은 위아래 2군데에 간구(杆溝)를 마련하여 장치하였다.
윗부분에는 안쪽면의 꼭대기에 네모난 간구를 파서 간을 설치하였고,
아랫부분에는 지면에서 위로 1m쯤 되는 안쪽면의 마주 보는 곳에 역시 네모난 간공(杆孔)을 뚫어 간을 끼우도록 하였다.

당간을 받는 간대(杆臺)는 하나의 돌로 조성하였는데, 전체가 완전하게 남아 있는 상태이다.
네모난 높은 2층 받침대 위에 둥근 원좌(圓座)를 조각하였는데,
둥근 원좌는 얕은 2단으로 주위에는 아무런 조각이 없고, 윗면 가운데에 둥근 구멍만 하나 있다.

보원사지 오층석탑으로 다시 걸어가요...

 

보원사지오층석탑
瑞山普願寺址五層石塔

보물 제104호.
서산 보원사는 백제 때의 절로, 사찰에 대한 역사는 알려진 바가 없으나 절터에는 5층 석탑 외에,
법인국사 탑과 탑비, 당간지주, 석조 등이 남아있어 사찰의 규모가 매우 컸음을 알 수 있다.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에서 2006년부터 12년 계획으로, 서산 보원사지 오층 석탑 일대를 비롯한 주변 지역에 대한 조사를 진행하고 있다. 아직까지 서산 보원사지의 초창기 건축이나 석탑의 건립 배경을 추정할 수 있는 직접적인 자료는 확인되지 않았다. 탑의 규모 및 형태로 보았을 때 서산 보원사지 오층 석탑은 사찰의 주 탑일 가능성이 매우 높기 때문에, 서산 보원사지의 창건 연대와 탑의 건립 시기는 동일할 것으로 추정된다.

서산 보원사지 오층석탑은 1968년과 2003년에 각각 한 번씩 모두 두 번의 해체·보수 작업이 진행되었다. 1968년 해체 복원 당시 사리 내갑(內匣)·외갑·사리병·납석 소탑(蠟石小塔) 등이 출토되어 국립 부여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보원사지 유적 발굴지

 

보원사지 전경

 

법인국사탑비와  법인국사탑

 

 

보원사지 법인국사탑비와 보원사지 법인국사탑 안내문

 

 

서산 보원사지 국사탑비 瑞山普願寺址法印國師塔碑

보물 제106호.
978년(경종 3) 건립. 전체 높이 450㎝, 비신 높이 240㎝, 너비 116.5㎝, 두께 29㎝. 장중한 느낌을 주는 거비로
이수와 귀부의 조각은 대체로 장쾌한 수법이다.

이수의 상부에 용연(龍淵)을 파고 용이 사방에서 모이도록 한 조각이 매우 특이하다.
법인국사 탄문(坦文)은 신라 말·고려초의 명승으로 고씨(高氏)이며, 968년(광종 19)에 왕사, 974년에 국사가 되었고
이듬해 보원사에서 입적하였다.

978년 왕은 ‘법인(法印)’이라 추시(追諡 : 죽은 뒤에 시호를 추증함)하고 ‘보승(寶乘)’이라는 탑명을 내렸다.

비문은 김정언(金廷彦)이 짓고 한윤(韓允)이 썼으며, 김승렴(金承廉)의 각(刻)으로 세워졌다.
글씨는 2㎝ 정도의 구양순류(歐陽詢流) 해서로 필력과 짜임새가 구양순을 재현시킨 듯하다.
고려 초기에는 구양순체를 쓴 대가가 많았으나 그중에서도 백미에 속한다.



 

서산 보원사지 법인국사탑
瑞山普願寺址法印國師塔


충청남도 서산시 운산면 보원사터에 있는 고려시대 승려 탄문의 유골을 모신 불탑. 승탑. 
보물 제105호. 
높이 470㎝. 8각 원당형의 부도로 기단부가 좁고 높아 전체적으로 세 장 한 구성을 보여준다.

기단부의 하대석은 8각이며 안상 안에 다양한 자세의 사자상이 양각되어 있다.
중대석의 받침은 원형으로 구름에 싸여 있는 용이 조각되어 있는데 도식적인 표현이 보인다.
중대석은 장식이 없는 8 각기둥이며, 상대석에는 아연이 양각되어 있다. 8각의 탑신석은 중대석처럼 좁고 높으며,
사천왕상·문비·인물상이 돌아가며 얕은 부조로 양각되어 있다.

옥개석은 큰 편으로 귀꽃이 장식되어 있다.
탄문은 900년(효공왕 4)에 출생하고 975년(광종 26)에 입적한 화엄종 계통의 승려이다.
부도는 탑비(보물 제106호)의 건립이 978년인 것으로 보아 법인국사가 입적한 975~978년 사이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비슷한 시기에 조성된 경기도 여주 고달사지 원종대사 혜진탑(977)에 비해 전체적인 조형이 섬약하다.




보원사지 관리소

 

보원사지를 여유롭게 살펴보고

개심사를 향해 발길을 옮겼다

일락산과 가야산으로 가는 이 길은 가파르지만

발길이 뜸한 길이라서 신록과 벗하며 선하게 걸어볼 수 있는 길이다

 

사람뿐만 아니라 나비와 꽃이 춤추는 계절

지저귀는 새소리에 발걸음이 춤을 춘다

덥지도 춥지도 않은 지절에 이곳을 걸으니 아니 이쁜 것이 없다

 

길가에 핀 붓꽃

꽃만큼 허리를 낮추고 꽃 빛깔에 눈을 가까이 맞추어보았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보랏빛

 

일락산 방향으로 급한 경사길을 오르다가 완만한 길을 걷다 보면

개심사와 백암 사지 갈림길을 만난다

마음 같아서는 일락산까지 갔다가 하산길에 개심사로 향하고 싶지만

일행들이 힘들어해서 개심사로 그냥 내려가기로 했다

 

여기서 1킬로 정도 내려가서 개심사 청벚꽃을 만난 다음 다시 왔던 길을 그대로 돌아서 올 예정이다

 

 

절은 없지만 절터였다고 하는데

무너진 담장인 듯 돌만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개심사 뒤편 길...

 

 

 

개심사 안양루

개심사開心寺

남도 서산시 운산면 상왕산(象王山)에 있는 삼국시대 백제의 승려 혜감이 창건한 사찰. 

대한불교 조계종 제7교구 본사인 수덕사의 말사이다. 〈사적기 事蹟記〉에 의하면 654년(무열왕 1) 혜 감국 사가 창건할 당시에는 개원사라 했는데, 1350년(충정왕 2) 처능대사가 중건하면서 개심사라 했다고 한다. 1484년(성종 15)에 대웅전을 중창했으며 1740년 중수하고 1955년 전면 보수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전체적으로 구릉형을 따르면서도 산지형으로 변천한 일탑형 가람배치를 보인다. 평탄한 지역에서 북으로 자연 계단을 오르면 3단가량으로 조성된 평탄한 사지가 보인다. 2단에 안양루가 남면 하여 서 있고 중정으로의 입구는 안양루와 무량수전 사이의 협소한 가설 문으로 되어 있다. 대웅전을 중심으로 좌우에 심검당과 무량수전이 있고 정면에 안양루가 있는 표준형이다. 이외에도 명부전과 팔상전 등의 당우가 남아 있다.

개심사 범종각

 

등 굽은 나무를 기둥으로 사용한 범종각

한국 기와집의 곡선미와 어울리는 등 굽은 기둥

제멋대로 휘어져 있으니 자연스러움의 참다운 모습을 찾은 것처럼 반갑다

 

개심사대웅전

보물 제143호.
1941년 대웅전 수리 때 발견된 묵서명에 의해 1484년(성종 15)에 세워져 1644년(인조 22)과 1710년(숙종 36)에 중수되었음을 알 수 있다. 평면은 앞면 3칸, 옆면 3칸으로 지대석과 판석을 놓고 다시 장대석의 갑석으로 마무리한 기단 위에 약간의 흘림이 있는 기둥과 민흘림기둥을 세웠다.

내부는 고주가 없이 통간으로 되어 있고, 종도리를 받고 있는 대공은 화려하게 초각된 파련 대공을 사용했다. 종도리와 중도리 사이에는 솟을 합장재를 두었다. 연등천장으로 상부에 가구가 노출되어 있다. 공포는 내삼출목·외이출목으로 초제 공과 이제 공의 외부 살미 형태가 아래로 강직하게 내려 뻗은 초기 형태인 수서[垂舌]의 모습을 하고 있다. 지붕은 맞배지붕으로서 다포계 형식의 건물에서는 흔치 않은 것으로 주심포 형식에서 다포계 형식으로 옮겨가는 절충적인 양식을 보여주는 건물이다.

개심사 명부전

 

개심사 경지 : 鏡池

경지라는 표석은 마음을 비추고 닦으라는 의미일 것이다

개심사가 위치한 상왕산은 코끼리를 뜻하고 코끼리의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연못을 팠다고 한다

하지만 연못을 보니 개심사의 뜻처럼 절집을 들어설 때에는 저 외나무다리를 건너며

마음을 씻고 건너야 한다는 묵언수행 같은 생각이 들었다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고 했지만

요즘은 친한 사람끼리 외나무다리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개심사 해우소

지금은 현대식 해우소를 새로 지었지만

옛 건물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근심과 걱정을 모두 비우는 곳이 해우소이다.

해우소 한편엔 '재'나 '낙엽'이 쌓여 있다. 모든 것을 비운 후,

그 위에 재나 낙엽을 흩뿌려 그 흔적을 지우면 된다.

그것이 삭아 또 다른 생명을 알차게 만드는 바탕이 된다.

자연은 순환구조이다.

어느 하나도 가치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 없다.

오직 사람만이 편과 존재를 가르고 있다

 

개심사를 찾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청벚꽃과 왕벚꽃 때문일 것이다

주먹만 한 꽃송이가 수양버들처럼 늘어져 있고

색깔이 연둣빛이 도는 오묘함이 있어서 4월 말쯤이면 발 디딜 틈 없이 사람들이 절집 마당을 가득 메운다

오랜만에 왔더니 음료수를 파는 사람도 있고 점점 상업화가 되어가는 느낌이다

 

여기서부터 청벚꽃과 왕벚꽃을 보이는 데로 수없이 찍고 또 찍어서

정리를 하면서 버리고 또 버리고도 남기고 싶어서 여러 장 올려본다

 

청벚꽃

 

왕벚꽃

일락산 갈림길에서

개심사 왼쪽 길을 내려왔고

되돌아 갈 때에는 개심사 오른쪽 길 산신각이 있는 길을 향하여 오르기로 했다

 

절집에 다녀가면서 마음의 기도 하나 얹어 놓고...

다시 이 아름다운 절집 앞에 서 있게 해 달라는 마음의 기도를 얹어 놓고...

송이송이 아름다운 꽃일지라도 다 내려놓고 다시 길을 떠난다

 

다시 되돌아 가기 위해 왔던 길을 되돌아 산등성이를 넘어갈 때

갑자기 발목이 아파온다

잠시 쉬는 동안 수줍게 피고 있는 철쭉이 눈에 들어온다

어디에 앉아도 꽃이 보이는 이 계절이 길을 나설 수 있다는 것이 참 축복이다

 

벚들과 밥 한 줌 도시락을 싸들고 인천에서 90여분 거리 이 길을 걸었다

꿈이라는 것

욕심이라는 것

행복이라는 것

오늘 다 누리고 집으로 간다

 

 

오늘처럼 길게 걷지 않고 일주문에서 대략 700미터만 올라오면 개심사를 만날 수 있다

서산의 많은 문화재를 접하고 싶은 사람은 일주문에서 20여분이면 오를 수 있는 길을 택해도 된다

 

개심사 주차장

서산시 운산면 신창리 18-4

2021.4.24. 토. by gyeo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