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 한쪽 비워둔다면

photostory- 路

2021.4.3.토. 경주여행(대릉원&천마총)

kyeong~ 2021. 4. 21. 01:02

오전 벚꽃의 축제가 열리는 보문단지를 둘러보고

오후 2시부터는 대릉원을 걷기로 했다

왕들의 공동묘지처럼 많은 능이 자리한 대릉원...

경주는 오랜 역사의 고장답게 역사를 지킨 왕이 많았던 탓인지

곳곳에 산 같은 왕릉이 많다

김유신묘 삼릉은 가보았지만 대릉원에 들어가 보는 것은 처음인 것 같다

토함산과 석굴암 그리고 경주불국사를 늘 돌아보고 말았기에 대릉원은 처음으로 입장하는 것 같다

많은 왕릉이 모여있는 곳에 비가 내리니 으스스한 기분은 들었는데 벚꽃이 화려하게 피어 있으니

다행이다 싶다

 

 

대릉원 정문

입장료는 3000원

 

출입문을 들어서면 소나무숲길이 이어진다

노송들이 줄지어 있는 모습이

왕릉을 지키는 신하들의 모습 같다

 

 

솔숲길을 잠시 지나면 가장 먼저 맞이하는 미추왕릉이다

왕릉이라 그런지 대릉원 내에서 또다시 출입문을 통과하여 미추왕릉으로 들어설 수 있다

 

역사만큼이나 오래된 벚나무와 미추왕릉

 

 

미추왕릉(味鄒王陵)

사적 제175호.
원형봉토분 중에서 규모가 큰 왕릉으로서 경주황남동고분군 가운데 하나이며, 대릉원으로 잘 정비되어 있다.
봉분 외에는 다른 표식물이 없었으나 근래에 석상 등 약간의 시설물이 첨가되었다.
미추왕릉은 대릉·죽장릉 등으로도 불렸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다음 왕인 유례 이사금 14년에 이서 고국이 금성을 공격하므로
크게 군사를 들어 막아도 능히 물리치지 못했다.

이때 홀연히 이상한 군사가 오는데 그 수효는 이루 헤아릴 수 없고
그들은 모두 귀에 댓잎을 꽂고 아군과 더불어 함께 적을 쳐 깨뜨렸다.
그 후 그들이 간 곳을 알지 못했는데 누군가 죽장 릉에서 죽엽 수만이 쌓여 있음을 발견했다.
이로 말미암아 사람들은 미추이사금이 음병으로써 싸움을 도와준 것이라 했다고 전해진다.

비 오는 날의 왕릉이라.... 으스스한 기분이 들 줄 알았는데

환하게 핀 벚꽃이 왕릉을 지키고 있어서 금새 마음이 환해졌다

 

 

 

 

 

 

쌍둥이 능 황남대총

 

 

황남대총

 

황남대총皇南大塚

경주 제98호 고분이라고도 불리는데 남북으로 2개의 무덤이 연결되어 있는 쌍무덤[瓢形墳]으로
경주지역에서 최대규모에 속한다. 1973~75년 문화재관리국 문화재연구소 주관으로 발굴·조사되었다.
그 결과 남분을 먼저 만들고 후에 북분을 남분에 잇대어 만들었음이 밝혀졌다.

북분의 피장자는 칼을 차고 있지 않으며 부장 된 은제 허리띠[銀製銙帶]의 띠 끝 꾸미개[帶先金具]에 부인 대라고 새긴 글자가 있어서 여자로 판명되었다.

남분의 피장자는 남성으로서 이들은 부부로 추정되고 있다.
한편 남분과 북분 모두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墳] 구조이며 5세기경에 조성되었다.
무덤의 규모는 남·북분을 포함한 전체 길이(남북방향)가 120m, 남·북분 각각의 동서 길이는 82m로서 같고, 높이는 남분이 22.2m, 북분이 23m 정도이다.

 

천마총 입구

 

천마총 입구에는 코로나 확산 방지 때문에 간격을 두고 입장하느라

비 오는 날이지만 줄지어 기다리고 있다

 

천마총

天馬塚
황남동 제155호분

제155호 고분이었다가 1973년 무덤 안에서 자작나무껍질에
채색으로 천마를 그린 말다래(국보 제207호)가 발견되어 천마총이 되었다.
무덤의 축조 시기는 6세기경으로 추정된다.
거대한 봉토로 덮인 돌무지덧널무덤으로서 바닥지름은 47m, 높이는 12.7m에 달한다.
무덤의 축조방법은 먼저 지면을 고른 뒤 바깥둘레돌을 돌리고 그 안에 점토와 자갈을 다져쌓기해서 올린 후 여기에 덧널을 동서방향으로 설치하고 덧널 주위에 돌무지를 쌓은 뒤 봉토를 씌웠다.
덧널 내부에는 강돌과 잔자갈로 석단을 돌리고 그 위에 유물을 배열했으며 석단 내부에 널을 동서방향으로 안치했다.
석단 바깥쪽에는 널과 직교하여 남북방향으로 껴묻거리 상자를 놓았다.
마구류로 추정되는 금동판·미늘쇠·쇠낫·쇠투겁창을 비롯하여 다수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천마총 내부의 유물 #1

 

천마총 내부의 유물 #2

 

천마총 말다래

 

천마총 말다래

천마도는 실은 인간이 말을 타기 위해 장식하는 각종 도구인 마구(馬具) 중에서도 말다래에 그려진 그림이다.

말다래란 한자어로는 장니(障泥)라고 하는 데서 짐작하듯이 말이 달릴 때 발굽에서 진흙(泥)이 사람에게 튀어 오르는 것을 방지(障)하고자 안장 아래, 다시 말해 말의 배 아래로 늘어뜨려 진흙 튀김을 막아주는 역할을 한다.

말다래는 이뿐만 아니라 말에 탄 사람의 안전사고를 예방하는가 하면 발걸이인 등자로부터 말을 보호하는 역할도 한다.

 

나아가 말다래는 장식성, 혹은 선전성이 있어 중요한 행사나 행렬 같은 데서는 장엄함을 높여주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한데 대체로 4~6세기 무렵 신라인, 특히 왕을 비롯한 특권층에서는 죽은 사람을 매장할 적에 말다래를 포함하는 마구류를 껴묻거리로 함께 묻어주기도 했다.

천마총에서는 말 안장 3점이 나왔다.

안장이 3점이라는 뜻은 관련 마구류를 온전하게 갖춘다고 가정할 때 말다래는 총 6점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말다래는 말의 배 양쪽에 한 쌍을 달기 때문이다. 실제 천마총을 발굴한 조사단에서는 이곳에서 총 3세트 6점의 말다래가 출토됐다고 보고했다.

 

천마총 발굴보고서를 보면 나중에 국보 207호로 지정되는 천마도가 출현한 시점을 1873년 8월 22일로 적고 있다.

이 날짜 발굴일지를 보면 "맑음. 백화수피제 천마문 장이 발견"이라고 적었다.

천마도를 그린 말다래는 세트여야 하니, 실제 세트로 확인됐다.

두 말다래는 각각 아래위로 포갠 상태로 껴묻거리를 묻어두는 나무 상자 안에서 발견됐다. 그래서 지금은 흔히 두 말다래를 각각 상하로 구분한다. 위에 있던 것을 상(上), 아래 있던 것을 하(下)로 구분하는 것이다.

 

 

 

 

천마총에서 출토된 금제관. 국보 제188호.
높이 32.5cm. 국립경주박물관 소장. 널 내부의 피장자가 착용하고 있던 것이다. 너비 4.5cm가량의 금판을 관테[臺輪]로 삼고 그 위에 출자형솟은장식[出字形立飾] 3개와 사슴뿔장식[鹿角形立飾] 2개를 금못으로 박아 고정시켰다.

관테의 상하단에 점열무늬[點列紋]를 타출하여 평행 선대를 만들고 이 내부에 파상선 무늬[波狀線紋]와 원 무늬[圓紋]를 배치했다. 그 위에 다시 금제 원형 달개 [金製圓形瓔珞]와 비취 곱은옥[翡翠曲玉]을 금실[金絲]로 매달았다.

출자형솟은장식은 곧게 솟은 주간의 좌우 측면에 각기 4개씩의 가지[橫枝]가 직각을 이루며 올라가고, 사슴뿔장식은 곡선을 그리는 주간에 좌우 2개씩의 가지가 교차되어 있다. 모두 주간과 가지의 끝부분은 보주형을 이루며 주연을 따라 2줄의 점열무늬를 돌리고 금제 원형 달 개과 비취 곱은옥을 금실로 매달았다.

 

모과나무꽃

산행을 하려다 수학여행온것처럼

왕릉을 걸었다

의외로 젊은커플들이 많은 걸 보니 우리나라 유적을 찾는 층이 다양함을 느꼈다

경주는 까도까도 다 알수 없는 양파껍질 같은 도시다

곳곳에 산재해 있는 천년의 역사를 양파껍질까듯 하나씩 까내는느낌이다

다음에 또 이곳에 온다면 또 못가본 곳을 향해 발걸음 할것이다

 

 

왕릉 무덤가를 한바퀴 돌아서 흙으로 돌아가는 꽃잎...

밟을수가 없어서 건너뛰었지만 비속에서 삶을 마감하는 꽃잎이 왠지 슬픈 느낌이다

꽃이여서 더 슬픈 느낌이다

 

 

대릉원 주변에는 경주의 대표 빵 황남빵과  찰보리빵 집이 여럿 있다

경주에 왔으니 뭐라도 팔아줘야지 싶어서 빵 두보 따리를 샀다

인터넷 주문하나 현지에서 사나 가격은 똑같지만 현지에서 사 오는 기분이라는 게 있어서

선물 보따리 들고 집으로 가는 기분이 좋은 것이다

대한민국 국보 제188호 천마총 금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