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 한쪽 비워둔다면

photostory-宮

경복궁2(침전, 함원전, 함경각, 자경전 영역)

kyeong~ 2013. 5. 22. 00:59

 

2013.4.26. 금

 

 

경복궁 침전영역                                                                                                           

 

 

향오문

이곳이 궁궐의 침전영역으로 들어가는 문이다.

경복궁에는 왕과 왕비의 침전영역이 둘로 구분되어 있다.

하나는 왕의 침전인 강녕전(康寧殿)이고, 다른 하나는  왕비의 침전인 교태전(交泰殿)이다.

궁궐에서 침전은 왕과 왕비가 일상생활을 하는 곳이며, 내외 종친을 불러 연회(내진연)를 하는 곳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해서 정사와 관련한 일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는 것은 아니다.

왕이 신하들을 불러 은밀히 정사를 논의하는 곳 또한 침전이다.

 

 

강녕전(康寧殿)

강녕전은 왕의 침전(寢殿)으로, 사정전 바로 뒤 경복궁의 중심축선상에 있다.

향오문(嚮五門)을 통해 강녕전 영역에 이르게 된다.

이곳 영역은 강녕전을 중심으로 부속건물인 연생전과 연길당이 동쪽에 있고,

경성전과 응지당이 서쪽에 자리하고 있다.

 

강녕의 뜻은 <서경> 홍범구주(洪範九疇)의 오복→오복(五福) 수정 중에 셋째인 강녕(康寧)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즉 '일상적으로 거처하는 가운데 늘 덕을 쌓고 황극을 세우면 오복을 누리게 되는데,

오복의 가운데가 바로 강녕이고 이는 오복을 모두 차지하기를 기원'하는 뜻이라고 한다.

강녕전이란 이름은 태조의 명을 받들어 정도전이 지어 올린 것이다.

 

강녕전의 외형적인 특징 중 하나는 강녕전의 지붕이 '용마루가 없는' 무량각 지붕으로 되어 있는 것이다.

 경복궁의 교태전, 창덕궁의 대조전, 창경궁의 통명전에서 보여지는 것처럼 용마루가 없는 전각들은

대부분 왕 또는 왕비의 침전으로 쓰였다는 공통점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강녕전 후면

 

 

 



강녕전내부

강녕전은 남쪽에 월대를 두고 정면 3간은 대청마루로

좌우 3간은 온돌방으로 되었으며 둘레에는 방과 마루로 구성된 퇴간을 두었다.

퇴간에 포함된 방에는 지밀상궁들이 왕을 보필하며 근무를 하던 곳으로 추정된다.

 

강녕전의 부속건물 경성전

 

 

 

 강녕전의 부속건물 연생전

 

 


 

아궁이

 

◀오지창 ;새가 앉는 것을 막기위한 오지창

 

 

               ▼ 강녕전서쪽의 왕의 우물

왕의 안전을 위해 무거운 돌뚜껑 덮었으며,

8면 모서리 구멍은 기둥을 꽂아두었던 자리이다.

 

 

부시[]

날짐승 앉지 못하게 하려고 전각(殿) 처마 싸서 치는 망, 예전에는 금실로 꼬아서 망을 쳤다고 함


 

 

 

 

 

 

 

 

 

 

 

 

 

 

 

 

 

 

 

 

 

 

 

 

 

 

 

 

 

 

 

 

 

 

 

 

 

 

 

강녕전의 남쪽 행각

 

 

 양의문(兩儀門)

교태전 남쪽 행각의 문이다. 1867(고종 4)년, 경복궁을 중건할 때에 만들었다.

‘양의(兩儀)’란 본래 ‘양과 음’을 의미한다. 여기에서 유래해 ‘하늘과 땅’ ‘남자와 여자’의 뜻도 지닌다.

양의문 현판의 ‘양(兩)’자는 속체로 쓴 까닭에 중앙의 세로 획이 생략되어 있다.

 



 

 

 

 

 

 

 

 

 

 

 

 

 

 

 

 

 

 

 

 

 

 

 

 

강녕전의 굴뚝

양의문 양쪽에 붉은 굴뚝으로 된 굴뚝이 있는데 이것은 강녕전의 온돌을 뒤로 빼서 이곳에 붙여 세운 것이다.

강녕전과 교태전 사이 굴뚝을 놓을 공간이 마땅치 않은데다가 온돌과 굴뚝의 거리를 멀게하여 화기를 오래 담아

난방효과를 더 오래 가게했던 선조들의 지혜가 대단하다.

서쪽의 굴뚝에는'만수무강' 동쪽의 굴뚝에는 '천세만세'라는 글 문양을 넣었다.

 

 

 

 

 

양의문(兩儀門)후면

 

 

  교태전(交泰殿)

교태전은 왕비의 침전(寢殿)으로, 중궁전(中宮殿)이라고도 하며 강녕전 바로 뒤 경복궁의 중심축선상에 놓여 있다.

조선왕조에서 왕비가 갖는 지위와 역할은 내외명부(內外命婦)를 총괄하고 왕실의 각종 공식업무 등을 주관하였기 때문에,

엄밀한 의미에서 교태전은 왕비의 공식 집무실로 봐야 할 것이다.

교태전의 뜻은 주역의 원리를 통해 설명될 수 있다.

즉 태(泰)는 주역의 괘인데 태 괘의 형상은 양을 상징하는 건(乾)이 아래로 가있고,

음을 상징하는 곤(坤)이 위로 가 있는 형상이다.

이는 '하늘로 솟는 양(陽)과 땅으로 가라앉는 음(陰)의 교합으로 생성(生成)한다'는 뜻이다

 음과 양이 화합하고 교통하는 가운데 왕조의 법통을 생산하고 이어주는 공간이 바로 교태전이기 때문이다.

교태전도 용마루가 없는 지붕형식으로 되어 있다.

대체로 왕과 왕비의 침전으로 쓰이는 경우에 용마루가 없는 지붕을 얹게 되는데,

이에 관해서는 정확한 이유 등이 기록으로 남아 있지 않아 그 까닭을 알기 어렵다.

 

 

교태전 내부

 

 

 

                       교태전의 현판

내순당(乃順堂);만물이 형통하여 태평함

보의당(補宜堂):천지의 마땅함을 돕는다.

승순당(承順堂):받들어 순종하다.

체인당(體仁堂):어짐을 체득하다.

만통문(萬通門):만물이 형통하여 태평함

재성문(財成門):계획하여 이루다.

 

*(북궐도형),(궁궐지)등에 의하면 보의당(報宜堂)으로 되어있으며
복원과정 현판을 새롭게 제작하여 붙이는 과저에서 비슷한글자로 착오로 보고 있다고 함..

 

교태전 내부에서 본 아미산

 

 

 

 

 

아미산(峨嵋山) 굴뚝 보물 811호

경복궁 교태전 뒷 동산 아미산(峨嵋山)이다.

층층이 돌계단을 쌓아 화초를 심고 굴뚝을 세워놓은 화계(花階)이다.

궁궐로 들어온,그러나 살아서는 밖으로 나가지 못하는 궁중여인들이다.

평생을 구중궁궐에 살아야만 하는 중전을 위해 만든 화초의 계단 꽃마당이다.

 

            8각형의 모양으로 만들어 굴뚝으로 생각하지 못할 정도로 아름답다.
            아미산의 굴뚝은 보물로 지정이 되어 있고, 

            8각형으로 된 몸체위에 기와로 된 지붕을 올리고, 

         기와 위에는 네모난 작은 집에 구멍이 뚫려있어

            쪽으로 연기가 빠져나가게 만들어져 있다

         각 면에는 제일위에는 인동당초, 중간에는 판으로 된 회그림이 있다.

           거기에 대나무, 소나무, 매화, 복숭아, 모란과 같은 그림을 넣고 

           위와 아래에 박쥐, 학, 불가사리 등을 배치하였다.
           회그림 위 아래에 있는 동물 중 좌우대칭의 불가사리가 보인다

           불가사리는 쇠를 먹고 살며 악몽과 사악한 기운을 쫓아낸다고 한다. 

 

서쪽에 있는 함월지(含月沚)이다.

'달을 머금은 연못'이다.

달과 음(陰)을 상징하는 석조물이다.

결국 이곳은 음과 양이 어우러져 있는 선경(仙景)이다.

 

 

 

 

교태전 후원의 건순각(建順閣)

            건순문을 들어서면 교태전의 부속건물로 건순각이 있다

건순각은 산실청으로 사용했다.

 

흠경각과 함원전                                                                                                               

흠경각(欽敬閣)

강녕전 뒤편에서 경회루 쪽으로 난 작은 문을 통해 들어가면 흠경각이 나온다.

흠경각은 세종 20년(1438) 1월에 건립되었고, 여기에 장영실로 하여금 참여하도록 하였다.

당시 흠경각에는 자동물시계인 옥루(玉漏)와 별자리의 위치를 표시한

천상열차분야지도(天象列次分野地圖)를 설치하여 시간과 천체의 운행을 살피도록 하였다.

           하지만 이미 세종 16년(1434) 7월 자격루를 설치한 보루각(報漏閣)을 만들었으며,

그이전에 경회루 북쪽에는 천체의 운행을 살피는 간의대(簡儀臺) 등을 설치하였다.

경회루와 내전 지역에 이처럼 천체의 운행과 기상의 변화 등을 살피는 과학기구를 가까이 두었다는 것은

농정(農政)에 대한 깊은 관심과 연구가 진행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또한 세종의 왕권이 보다 공고해지고 궁궐의 기능이 확장되었음을 의미한다.

 

 

함원전(含元殿)

함원전은 경회루와 교태전 사이에 있다.

함원전의 굴뚝이 놓인 뒤편 화계(花階)와 교태전의 아미산 화계가 담 하나 사이로 연결되어 있기도 하다.

세종때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곳 함원전에 관한 기록은 무척 이채롭다.

1452년 문종이 승하한 뒤 당시 왕세자인 노산군(단종)이 잠시 이곳에 거처를 정했다는 기록도 엿보이지만,

경복궁의 내전 깊숙이 위치해 '불사(佛事)'를 주로 행하던 공간으로 쓰였기 때문이다.

세조 9년(1463)에는 내수소(內需所)에서 불상 4구를 만들어 이곳에서 점안하기도 했다.

한편 당시 현판 글씨는 신정왕후 조대비의 조카인 혜인 조영하가 썼는데,

조영하는 최익현과 함께 흥선대원군을 몰아내는 데 앞장선 인물로 이조판서와 병조판서, 예조판서를 두루 거친 당대의 실력자였다.

 

자경전 영역                                                                                                                    

 

             

   자경의 정문 만세문(萬歲門)

정문의 이름은 만세문이다. 이 또한 장수를 기원하는 의미이다.

또한 교태전과 마찬가지로 여인이 기거하는 곳의 정문이므로 육중한 대문을 만들지 않고

힘들지 않게 열 수 있도록 설계하여 문을 달았다.

 

 

 

자경전(慈慶殿) 보물 809호

자경전은 경복궁 영역 중 동북쪽에 위치한 생활공간으로 왕실의 웃어른이 거처한 여성공간이었다.

자경이라는 뜻이 어머니가 복을 누른다는 뜻으로

5대궁궐중에 경복궁 자경전이 단 하나밖에 남지 않은 대비전이 되었다

 

자경전을 말할 때 빼 놓을 수 없는 인물이 바로 경복궁 재건 당시

  대왕대비이자 추존된 익종(효명세자)의 왕비인 신정왕후 조대비이다.

  자경전은 고종을 양아들로 삼아 왕위에 오르도록 했던 조대비가 머물렀던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고종이 왕위에 즉위하는 과정에서 조대비의 역할은 실로 막강했고,

  고종 즉위후 흥선대원군과 고종에게 상당한 영향력을 끼친 인물이다.

  고종이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것도 고종의 친아버지인 흥선대원군과 정치적으로 결탁된 조대비의

  적극적인 후원이 없었다면 결국 불가능했을 것이고,

  그런 흥선대원군의 입지를 강화시켜준 경복궁 재건사업 역시

조대비의 명을 받드는 형식으로 실시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자경전의 청연루(淸讌樓)

           다락집인 청연루(淸讌樓)를 두어 여름을 시원하게 보낼 수 있도록 하였다

 

 

 

 

자경전 부속건물 협경당(協慶堂)

 

자경전의 외부에서 본 모습

 

자경전 십장생(十長生) 굴뚝 보물 810호

            굴뚝은 네모 형태로, 가운데는 동식물 무늬인 십장생을 새겨 넣었다.

십장생 무늬는 가장 한국적인 무늬로 알려졌는데.

이것은 조대비의 만수무강을 기원하여 제작한 것으로 보인다.

굴뚝은 벽돌을 쌓아 만들었고 그 위에 기와지붕을 얹었으며 지붕 위에는 연기를 빠지게 하는 시설을 해 놓았다.

굴뚝이면서 장식적인 기능르 충실히 하고 그 조형미 역시 세련되어

조선시대 궁궐에 있는 굴뚝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작품으로 평가 받고 있다.

          

 


 

거북무늬 담장


 

꽃무늬 담장

 




자경전 내부

 

 

.http://rekor.or.kr/palace/0414.html 한국의 재발견에서 내용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