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화당(咸和堂)과 집경당(緝敬堂) 교태전 북쪽인 아미산 너머에는 흥복전 일원이 자리하고 있었는데, 흥복전(興福殿) 등 내전의 전각들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이 일대는 후궁과 궁녀들을 위한 후궁 영역이다. 당시의 함화당과 집경당 모습을 추정해 볼 수 있는 <북궐도형>에 의하면 함화당과 집경당을 잇는 복도 사이에는 샛담을 두어 계명문(啓明門)이란 일문(日門) 은 남쪽 담의 문으로, 영춘문(迎春門)이란 월문(月門)은 북쪽 담의 문으로 쓰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주변에 담장을 두어 여러 채의 부속 건물과 문을 두었음도 알 수 있다. 고종이 향원정 뒤편에 건청궁(乾淸宮)을 만들어 머물 당시에 이곳 함화당과 집경당에서 외국사신을 접견했다고도 한다.
봉양문(鳳陽門) 집경당(緝敬堂) 집경당(緝敬堂) 향명문(嚮明門) 함화당(咸和堂) 함화당과 집경당의 연결통로 계명문 함화당의 겹겹의 행각들 향원정과 건청궁터 일원
향원정과 취향교
향원정(香遠亭)보물 제1761호
침전으로 쓰였던 수많은 전각과 복잡한 행각들은 거의 사라지고, 현재는 함화당과 집경당만이 남아있다.
이나마도 일제가 조선총독부 박물관을 운영하면서 사무실로 쓰기 위해 헐지 않아 남아있는 것이다.
흥복전은 빈궁으로, 중궁전인 교태전과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으되 격을 한단계 낮추어 지었다.
그런데 조대비가 이곳 흥복전에서 승하한 것으로 보아 대비전의 용도로도 쓰였던 것으로 짐작되다.
함화당과 집경당은 복도로 연결되어 있다.
경복궁 북쪽 후원영역에 향원지(香遠池)라는 이름의 네모난 연못이 조성되어 있고,
그 연못의 중앙에 둥그런 섬을 조성하여 육각지붕의 2층 정자를 세웠는데 그것이 바로 향원정이다.
이 섬의 남쪽으로는 취향교(醉香橋)라는 나무다리를 놓았는데 원래는 건청궁(乾淸宮) 방면으로 향하도록 북쪽에 놓여 있었다.
향원(香遠)이란 이름의 뜻은 <태극도설>을 지은 중국 송나라 주돈이의 <애련설(愛蓮說)> 중
'香遠益淸(향기는 멀수록 맑다)'에서 따와 지은 것으로 여겨진다.
향원정 1층에는 불을 때던 작은 아궁이가 서쪽에는 있으며, 2층에는 천장에 주작 등을 그려 넣어 그 화려함을 더했다.
한편 향원정의 물은 향원정 북서쪽 열상진원(洌上眞源)에서 흘러 들어와 남쪽으로 빠져나도록 되어있다.
즉 열상진원에서 솟아난 물이 흘러 향원지로 들어가기 전에 둥근 홈을 만나 한 바퀴를 돌아
서(西)에서 동(東)으로 꺾여 향원지로 안으로 들어가게끔 물길을 조성하였다.
이는 서쪽에서 흘러 동쪽으로 들어가는 명당수(明堂水)의 개념에 따른 것이라고 하며,
기능적인 면에서는 물의 흐름을 부드럽게 하여 수면을 항상 잔잔하게 유지하도록 한다.
열상진원(열上眞源)
향원정은 한국의 전기 발상지이기도 합니다.
우리나라에서 전깃불을 처음 켠 곳은 경복궁입니다.
경복궁의 가로등에 전깃불을 켜기 위해 향원정 연못의 물을 끌어올려 발전기를 돌렸기 때문에
전깃불을 ‘물불’, 또는 불가사의한 묘한 불이라는 뜻으로 ‘묘화’라고 불렀습니다.
건청궁(乾淸宮)대문
건청궁은 고종의 주도하에 이곳에 건립되었는데,이는 고종의 아버지인 흥선대원군으로부터 정국운영의 주도권을 되찾으려는
고종의 친정(親政)의지가 담겨있는 것이다.
고종은 아버지 흥선대원군의 그늘 벗어나기 위해 건청궁을 짓고
아관파천이 단행될때까지 12년간 여기에서 정사를 수행하였다.
고종이 직접 정무업무를 주도하면서 흥선대원군은 정치적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그뒤 건청궁은 1929년 10월 시정 20주년기념 조선박람회를 개최한다는 핑계로 일제에 의해 모두 헐리고 만다.
또한 1939년에는 이곳에 미술관을 짓고, 해방이후에는 민속박물관 등으로 쓰이다가
최근에 헐리고 빈터로 남아 있게 되었다.
한편 이곳은 1895년 10월 건청궁 곤녕합(坤寧閤)에서 발생한
명성황후 살해사건인 을미사변(乙未事變)의 현장이기도 하다.
또한 우리나라 최초로 전기가 들어 온 곳이다.
우리나라전기는 멕케이라는 미국인 기술자에 의해 1887년에 들어왔다
전기가 발명된것이 1879년이니 8년만에 우리나라에 전기가 들어왔고
일본이나 중국에 비해 2년이나 빨랐다고 하니 당시로는 획기적인 일이었다.
장안당(長安堂)
건천궁의 사랑채 장안당은 초양문을 지나야 나온다'오랫동안 편안하다'는 뜻의 장안당은 'ㅏ'형의 건물로 누마루, 대청마루, 온돌방으로 이루어져 있다.
'추수부용루'라는 누마루에 오르면 바로 앞 향원정 일대가 눈앞에 들어온다.
아마도 고종이 어느 가을날 향원정 연못에 핀 연꽃에 취하여 이름을 지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장안당 앞에는 감나무가 심어져 있는데 이것은 건청궁 복원당시 경남 산청군에서 기증한 것이다
평소 고종과 명성황후가 산청 곶감을 즐겨먹었다고 하여 가져다 둔것인데
때문에 '고종시(高宗枾)'라는 이름을 붙였다한다.
장안당 편액 글씨는 현재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는
(어필현판첩)에 수록된 고종 어필의 탁본을 통해 복원해 놓은 것이다.
추수부용루와 장안당
'추수부용루'라는 누마루에 오르면 바로 앞 향원정 일대가 눈앞에 들어온다.
아마도 고종이 어느 가을날 향원정 연못에 핀 연꽃에 취하여 이름을 지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장안당 내부
곤녕합과 옥호루
곤녕합은 건천궁의 안채 '명성황후'의 침전이다
오른편 옥호루에서 일본인 자객에 의해 명성황후가 시해 되었다.
일제시대때 경복궁의 건물이 차례로 파괴되면서 건천궁은 1909년 철거되어
이자리에 조선총독부미술관이 지어졌으며 한동안 국립현대미술관으로 사용되다가
1998년에 철거되었다.
문화재청은 원래의 모습대로 복원하여 2007년 10월부터 일반에게 공해하였다.
장안당과 내전인 옥호루로 연결되던 행랑
궁안에서 임금이 이동할때에는 행랑으로 다녔다.
곤녕합(坤寧閤)의 사시향루
'곤녕(坤寧)'은 땅이 편안하다는 뜻으로 왕비의 덕성을 드러내었다.
침방의 이름은 정시합(正始閤)이며 남쪽루의 명칭은 옥호루(玉壺樓), 동쪽은 사시향루(四時香樓)이다.
명성황후 시해와 관련된 이 건물은 동쪽 북쪽 서쪽이 베란다 형태의 난간이 설치되어있다.
곤녕합 대청에 자리하는 명성황후가 사용하던 의자
복수당, 관문각터
복수당은 별채에 해당하는 건물이다정확하게 어떤 용도로 쓰였던 건물인지는 모르나
기록에 따르면 왕세자(훗날 순종)의 유모상궁이 거처했다고 하기도 하고
수라간에 인접해 있어 단순한 궁인들의 처소였다는 말도 있다.
곤녕합 서행랑과 이어져 있으며 행랑이지만
녹금당이라는 이름을 따로 지어내린 것으로 보아 중요 건물로 보기도 한다.
복수당(福綬堂)과 녹금당(錄琴堂)
복수당은 민가의 별당채에 해당하는 이름이다
복수당 서행각은 왕세자인 '척(拓) (후에 순종)을 보필하기 위한 상궁이나 나인들의 처소로 추정된다.
복수당 서행각을 녹금당이라고 하는데 '녹색의 거문고'라는 뜻으로 푸른숲이 내는 아름다운 소리를 비유한다.
건천궁 굴뚝
건천궁 외부의 모습
자선당(資善堂)과 비현각(丕顯閣)
자선당(資善堂) 기단석 유구(퍼옴)
명성황후 시해터 옆에는 보기에도 흉칙한 검게 그을린 기단석이 놓여 있다.
이 기단석은 원래 경복궁 동궁 자선당의 기단석이었다.
1915년 일제에 의해 경복궁에서 조선물산공진회를 개최하면서 수많은 전각들이
'박람회를 개최하는 데 궁전의 전각들이 거추장스럽다'며 1914년경 뜯겨져 나갔는데,
자선당도 이때 헐리는 비극적 운명을 맞이했다.
당시 데라우치 조선총독과 밀착되어 있던 오쿠라 기하치로(大倉喜八郞)는 경복궁 철거에 앞장섰으며
수많은 궁궐의 건물을 빼돌리는데 앞장을 선 인물이다.
'누구나 살고 싶어 욕심이 절로 난다'는 자선당은 오쿠라가 직접 동경으로 빼돌려
'조선관(朝鮮館)'이라는 현판을 새로 달아 미술관으로 사용해왔었다. 그 뒤 1923년 관동 대지진으로
자선당 목조건물은 소실되고 기단석만 남자 오쿠라 호텔 경내에 버려져 있었다.
그런 자선당 기단석의 존재가 다시 세상에 부각된 것은
1993년 여름 목원대학교 김정동(金晶東) 교수의 일본 현지조사를 통해 자선당 기단석임을 확인한 뒤였다.
마침내 자선당 기단석은 각고의 노력끝에 1996년 2월 삼성문화재단의 도움으로
부산을 통해 한국 땅에 반환되어 지금의 위치에 놓이게 되었다.
불에 그을려 푸석푸석한 자선장 기단석은 자선당 복원시 사용할수 없어서
일제 당시 헐려나가고 팔려나간 수많은 궁궐 전각들의 비극적인 역사와 현실태를 우리에게 말없이 들려주고 있는 셈이다.
자선당(資善堂)
사정전 동쪽편에 위치한 자선당은 동궁으로서 왕세자와 왕세자빈의 생활공간이다.
일제강점기에 철거된것을 1999에 복원한 것으로 동궁 전체를 복원한 것이 아니라
자선당과 비현각만 복원되었다.
동궁은 국왕이 아닌 까닭에 '전'이 아닌 '당'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
자선당은 앞면 7칸의 건물로 서쪽에 세자와 세자빈의 침실인 2칸의 방이 있고
동쪽에는 가구들과 물건을 보관하던 곳으로 보이는 방 2칸이 있다.
동궁은 규모가 크지 않고 소박한 분위기를 하고 있으며 자선당 추녀마루에 잡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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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현각(丕顯閣)
비현각은 세자가 스승을 모시고 학문을 연마하던 편전에 해당한다. 비현(丕顯)이란 뜻은 "크게 드러나다"라는 뜻이다.
일제강점기인 1915년 시정5주년기념 조선물산공진회를 앞두고 '박람회를 개최한다'는 핑계로
1914년 동궁 일대를 완전히 철거하고 만다. 이때 비현각은 다른 건물들과 마찬가지로 일제에 의해 팔려나가게 된다.
팔려나간 비현각의 행방에 대해서는 두 가지 이야기가 전한다.
첫번째는 서울 장충동의 일본인 별장인 남산장(南山莊)으로 팔려나갔다는 이야기다.
두번째는 일본인 건축가 나카무라 요시헤이(中村與資平)가 1912년
남대문 정거장 뒤 봉래동 자신의 집으로 뜯어가 설계사무소로 쓰다가 누전에 의해 불타버렸다는 이야기다.
한편 현재의 비현각은 1999년 12월 복원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으며,
정면 6간 측면 2간 겹처마에 팔작지붕으로 되어 있다.
자선당 현판 글씨는 중요무형문화재 제106호 각자장(刻字匠) 기능보유자인 철재 오옥진 선생이 썼다.
비현각 내부
비현각 측간
집옥재(集玉齋)
집옥재(集玉齋)
향원정 뒤편 건청궁터 옆 비공개 지역 안에는 중국풍의 낯선 건물이 들어서 있다.
이것이 바로 건청궁을 지을 당시인 고종 10년(1873)년 무렵 건청궁과 함께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집옥재이다.
집옥재는 서쪽으로 팔우정(八隅亭)과 복도로 연결되어 있으며, 동쪽으로는 협길당과 연결되어 있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고종 28년(1891)에서 고종30년(1893) 사이에 현재의 위치로 옮겨와 을미사변 이후
아관파천 이전까지 고종의 서재와 외국사신의 접견 등의 목적으로 쓰여졌다고 한다.
집옥재의 후면과 측면이 벽돌로 마감되어 있는 것도 그중 특색있는 양식중 하나이다.
또한 후면에는 가운데 만월창문을 두고, 양쪽에 각각 두 개의 아치형의 반월창문을 두었다.
지붕의 장식 역시 용마루 끝을 중국식 건물에서나 볼 수 있는 용 모양의 이물(異物)을 얹어 놓은 것이 특이하다.
그러나 무엇보다 집옥재의 또 하나 특이한 점은 밖에서 보면 단층 건물로 보이나
내부는 다락같은 것을 두어 통로로 연결한 이층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장고영역
장고(醬庫)
경복궁 안에서 연회나 제례에 사용하던 장(醬)을 저장하던 창고인 장고(醬庫)
궁성과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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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기대(風旗臺) 보물 847호
풍기대(風旗臺) 보물 847호
자경전을 지나 향원정으로 향하다 보면 당초문양이 새겨진 돌기둥 같은 것을 하나 볼 수 있다.
이것이 바로 풍기대다.
지금은 깃발을 단 깃대가 뽑혀져 돌기둥처럼 보이지만,
돌기둥의 맨 위에 파여진 홈에 깃발을 단 길다란 깃대를 꽂아 바람의 세기와 방향을 측정했던 것이다.
말하자면 풍기대는 해시계, 측우기 등과 더불어 기상관측을 목적으로 궁궐에 설치되었던 과학기구인 셈이다.
농업생산력을 국가의 물적 토대로 삼았던 조선왕조로서는
날씨와 기상상태의 변화를 매우 민감하게 관찰하고 살폈던 것이다.
현재 풍기대는 보물 847호로 지정되어 있다.
.http://rekor.or.kr/palace/0414.html 한국의 재발견에서 내용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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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대궁궐중에 가장 방대한 규모를 가진 경복궁
자료들을 찾는 동안
우리역사에 대한 애정이 생기고
문화재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경복궁 답사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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