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 한쪽 비워둔다면

photostory-宮

경희궁 [慶熙宮]&서울역사박물관

kyeong~ 2013. 5. 18. 00:50

 

2013.4.26.금

 

경희궁은 참 다른 궁궐에 비해 규모가 작고 조용하다

관람객이 북적거리지도 않고

관람료도 없다

서울 역사박물관이나 서울시립 미술관에 왔다가 잠시 들러보면 좋을듯하고

지금은 복원공사중이다.

이리저리 흩어져 있는 듯한 궁궐의 건물들

제위치를 찾지 못하고 있음을 알수가 있다.

일본의 만행으로 궁궐이 이리저리 찢기듯 사라지고 흩어졌다는 것을

아는 순간 왠지 내 생살이 찢어지지는 가슴에는 서늘한 바람이 일었다.

 

 

  경희궁                                                                                                                 

 

 

 

 

 

 

 

서궐(西闕)의 전신은 경덕궁(慶德宮)이었다. 경덕궁은 본래 인조의 생부 원종의 사저가 있던 곳으로 이곳에 왕기가 서린다는 말을 듣고

광해군이 왕기를 없앤다는 뜻으로 광해군 9년(1617) 6월에 궁전을 짓기 시작했으나, 인경궁과 함께 공사가 진행된 관계로 재력의 소모가

막대하여 공사가 뜻대로 진행되지 못하였다. 결국 광해군은 궁궐에 들어가보지도 못하고 왕 15년 3월에   계해반정(癸亥反正)으로  폐위

되고 말았는데  그 뒤 경덕궁은  인조가  인목대비를  받들어  일시 이곳에 이어한 일이 있었고 그 뒤 역대 왕들이 수시로 이 궁에 거처한

일이 있었으므로 경덕궁은 왕궁의 하나로 손꼽힐수 있었다.

 

그 후 영조36년(1760)에 경덕의 궁명이 원종의 시호인 경덕(敬德)과 동음이라 하여 이를 피하여 경희궁(宮)이라 고쳤다.  순조 29년

(1829) 10월 경희궁은 화재로 인하여 건물의 일부가 소실되었으나 순조31년(1831)에 다시 중건되었고 철종10년(1859)부터 11년  사이에

보수 공사가 시행되었다. 그 후 고종초년 경복궁을 중건하고 법궁을 이어하자 경희궁은 빈 궁궐로 남게 된다.관청의 필요에 따라 창고나

다른 용도로 쓰이고 있었으나 대부분 이시설은 유지되고 궁궐로서의 외양은 지키고 있었다. 광무 5년인 1901년에서 1904년 사이에 당시

고종이 이어하고 있던 경운궁과  연결하기 위해 운교가  연결되기도 한 것으로보아 경희궁은 광무연간까지 궁궐로서의 가치를 인정 받고

있었다.

 

고종의 강제 퇴위와 일제의 침략이 본격적으로 접어들면서  일제는 일본인들의  거주지역을  경희궁  근처로 잡고 통감부 중하교를 경희궁

터에 세우고 지형도 높은 곳은 깎고 메꿔 버리는 등 만행을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그들의 만행은 1922년 6월에는 경희궁의 동편에 전매국

관사를 지으면서 그 부지로  25,500평을 떼어 냈고  1927년에서  1928년에는 경희궁 남쪽  도로를 확장하면서  일부를 도로로  편입시킨다. 

거기에 건물들은 대부분 매각시켜 버리고 만다. 중학교  교실로 사용되던 숭전전(경희궁정전)은 1926년 3월 일본  불교  종파인  조동종의

조계사에 매각 이건 되었다. 대내 정전인  회상전은 1911년  임시  소학교 교원양성소의 교실과 기숙사로, 그리고 편전인 흥정당은 1915년

소학교 교실로 사용되다 1928년 용산의 광운사로 팔려나갔다. 이렇게 1920년대를 지나면서 경희궁은 건물뜰은 완벽하게 소멸되고 만다.

 

 

 

흥화문(興化門)

경희궁의 정문으로 경희궁의 창건과 함께 광해군 1년에 세워졌다.

이문은 궁(宮)의 동남 우(隅)에 위치하며 (운종가를 바라보며) 동향(東向)을 향하고 있는데

지금의 구세군 빌딩과 마주한 위치쯤에 되며 현재 '서울 역사박물관으로 들어가는 다리(금천교) 앞쪽이 되겠다.

 

 

금천교

경희궁의 정문인 흥화문을 들어서면 궁내의 전각에 들어서기 전에 흐르던 금천에 놓여진 돌다리이다.

난간의 돌짐승이나 홍예 사이에 새겨진 도깨비 얼굴은 대궐밖의 나쁜 기운이 궐내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려는

상징성을 띠고 있다.

광해군 11년(1619)에 건립되었던 것을 일제가 매몰 시켰던 것을, 서울시에서는 2001년 발굴을 통하여 발굴된

옛 석조물을 바탕으로 현재와 같이 복원하였다.

 

금천교은 대체로 궐문을 들어서면 바로 나타나기 마련이다.

그런데 경희궁의 궐문인 흥화문과 금천교는 거리를 두고 있어서 자칫 지나치기 쉽다.

현재 서울 역사박물관 앞의 다리가 금천교이다.

흥화문에서 설명했듯이 경희궁은 일제의 만행에 의해 일본인 사찰인 조계사에 팔리면서 이리저리 훼손이 되어 있어서

마음을 가장 아프게 하는 궁궐이아다.

경희궁의 전각인 동국대학교 정각원을 복원하기 위해 옮겨 오기에는 나무와 석재가 노후하여 옮기지 못하였다.

현제 경희궁은 대부분 복원된 것이라고 보면 된다.이름은 하나 몸은 둘인 경희궁인 셈이다.

 

 

2013. 4.26. 현재 복원중인 숭정문

 

복원 공사전 숭정문(퍼옴)

숭정문/행각

계단 일부는 옛 것 그대로이고, 숭정문 좌우로 이어진 행각이 마치 곤룡포 자락처럼 화려하다.

그 행각은 동서쪽 행각과 이어져 있는데 동서행각도 물론 최근에 복원된 것이다.

뒷편 돌산은 인왕산이다.

 

 

                        숭정전(崇政殿)

정전이 있는 영역은 왕이 신하의 조하를 받거나 사신을 맞이하는 등 공식적인 행사를 치루는 곳을 조정이라 한다.

좌우 품계석이 있고 숭정문에서 숭정전까지 삼도형식의 박석이 깔려져 있고 2층구조의 월대와 숭정전 내부 정면에는 어좌가 있다.

조정뜰에 박석을 깔아놓은 이유는 햇빛에 눈이 부시지 않고 비가 올때 미끄러짐을 방지하기 위함이라 한다.

   

 

       

 

 

 

                 숭정전(崇政殿)

                 숭정전은 경희궁의 정전으로 국왕이 신하들과 조회를 하거나, 궁중 연회,

                 사신 접대 등 공식 행사가 행해진 곳이다.

특히 경종, 정조, 헌종 등 세 임금은 이곳에서 즉위식을 거행하였다.

숭전전은 경희궁 창건공사 초기인 1618년(광해군 10)경에 정면 5칸, 측면 4칸의 규모로 건립되었다.

그러나 일제가 경희궁을 훼손하면서 1926년 건물을 일본인 사찰인 조계사에 팔았는데,

현재는 동국대학교 정각원으로 사용하고 있다.

현 위치의 숭정전은 경희궁지 발굴을 통하여 확인된 위치에 발굴된 기단석 등을 이용하여 복원한 것이다.

숭정전 내부 당가에 용상을 설치하였는데, 그 뒤로 곡병과 일월오봉병을 두었다.

우물천정에는 마주보고 있는 두 마리의 용을 새겨두었다.

                            현재 중층 월대 일부는 1985년 발굴조사에서 드러난 옛 것을 그대로 쓰고 있다.

 

 




 봉황무늬의 답도

                           소맷돌 측면의 당초문이 환상적일 만큼 아름답다.

                           계단에 엎드린 해치도 다른 정전의 해치보다 해학성이 뛰어나며, 해치가 Y형 뿔을 달고 있는 것도 이색적이다.

 

답도

답도(踏道)는 글자 그대로 '밟는 길'이란 뜻이다.
이 길은 왕만이 지나다닐 수있으며, 만약 왕 아닌 일반인들이 이길을 지나가면 삼족을 멸했다고도 한다.
답도(踏道)는 계단으로 되어 있지 않고 판석으로 되어있다,
왕은 항상 가마를 타고 다녔으니 계단이 필요없었던 것이다,
답도라고 불리우는 이 사각형의 판석위에는
나라의 문물 제도와 나라를 다스리는 정치적 이상을 나타내는 봉황이 새겨져 있다.
답도옆의 작은 계단은 가마꾼이 다니는 계단이였다고 한다,
참고로 봉황은 수컷인 봉(鳳)과 암컷인 황(凰)의 한 쌍을 가리키는 말로,
예로부터 신령스러운 상상의 동물로 용과 함께 사용되었다.

 

 

어간문을 열고 들어가면 용상과 곡병, 일월오봉도가 정면에 자리하고 있고,

그 위에는 닫집이 있고, 천장에는 근정전의 것을 본뜬 두 마리 황룡이 조각되어 있다.

 

정교한 문살

궁궐마다 다른 문양의 문살

꽃살문이 아니라 잎사귀 문양이 특이하다.

 

자정문(資政門) 자정전의 정문이자 숭정전의 북쪽 문이다.

정조가 지은 「경희궁지(慶熙宮志)」에 “(숭정전에는) 네 개의 문이 있으니,

동쪽을 여춘문(麗春門),서쪽을 의추문(宜秋門) 남쪽을 숭정문(崇政門), 북쪽을 자정문(資政門)이라 한다."고 적혀있다

자정전과 함께 복원되었다. '자정(資政)'은 '정사를 돕는다'는 의미이다.

 

자정전 내부

 

자정전의 기와

             수탉무늬의 수막새

용무늬 암막새

 

 

 

 

 자정전의 행각

             자정전의 행각은 참 아늑하다

 아담하고 포근함마져드는 이 행각에는 찾아드는이가 없어서

 한동안 쉬어 갈 수 있어 좋았다.

 

 


자정전의 드므(두무(豆撫), 길상항 (吉祥缸))

 '넓적하게 생긴 큰독'이라는 순수한 우리말이다.
각 궁전의 월대 모서리와 종묘등의 건물에 물을 두었던것으로 당시 궁궐의 건축물이 대부분 목재로 되어 화재가 잦았기 때문에 이를 예방하고자 놓아둔 벽사(壁邪)시설로서 설치되었다고 한다.

부간주(부견주,부전주)

부간주는 액을 때우기 위해 팥죽을

쑤울 때 사용했다고 전한다.

이 그릇으로 정말 팥죽을 쑤울 수 있었을까 의심이 든다.
그저 사악한 무리들이 궁궐의 침입하지 못하도록 하는 벽사기능의 상징물로 보고싶다.

 

 

태녕전泰寧殿

경희궁은 사람의 시선에서 멀리 떨어진 조용한 궁궐이다

경희궁에서도 태녕전은 가장 한 적한 곳

태녕전으로 향하는 태녕문은 늘 닫혀져 있어서

자정전 옆으로 해서 태녕전을 찾아들수 있다.

 

 

 

 

              영조의 어진

            태령전은 영조의 어진을 보관하던 곳이다. 본래는 특별한 용도가 지정되지는 않았던 건물이었다.

그러나 영조의 어진이 새로 그려지자 1744년(영조 20)에 이 곳을 중수하여 어진을 봉안하였고,

영조가 승하한 후에는 혼전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흔적조차 거의 남아있지 않던 태령전을 서울시에서는 <서궐도안>에 따라 정면 5칸, 측면 2칸의 건물로 복원하였다.

 

 

서암瑞巖

경희궁 터에는 아름다운 자연 풍광을 이용한 시설들도 많이 있었는데,

현재는 서암과 영렬천만이 그 흔적을 말해준다.

서암은 태령전 뒤에 있는 기이한 모양의 바위이다.

바위샘이라는 뜻을 갖는 '암천(巖泉)'으로 불리는 샘이 그 속에 있어 예로부터 경희궁의 명물이었다.

이 바위는 임금님 바위라는 뜻의 '왕암(王巖)'으로 불렸는데, 그 이름으로 인하여 광해군이 이 곳에 경희궁을 지었다는 속설도 있다.

1708년(숙종 34)에 이름을 상서로운 바위라는 뜻의 '서암(瑞巖)'으로 고치고, 숙종이 직접 '서암' 두 글자를 크게 써서 새겨 두게 하였다.

그러나 현재 서암을 새겨두었던 사방석은 전해지지 않고, 다만 바위에 깎아 놓은 물길이 옛 자취를 전해주고 있다.

 

 

 

서울 역사박물관                                                                                                                    

 

경희궁 관람을 마치고

금천교를 찾아가기 위해

경희궁 바로옆 역사 박물관으로 향했다

 

 

금천교에서 바라 본 서울역사박물관

 

신도비

서울역사박물관 옆 경희궁 쪽으로 가는 공간에 비석이 여럿 있다.

가장 규모가 킅 비석이 영선군시도비,

그리고 이문용묘갈, 글씨가 없는 것이 이우신도비, 가장 작은 것이 이종묘갈이다.

 

영선군신도비는 영선군 준(1870-1917)의 묘비이다. 영선군은 흥선대원군의 손자이자 흥친왕 이희(재면)의 아들이다.

신도비는 1948년경에 건립되었다. 처음에 신도비는 1919년 고양군 용강면에 소재한 묘소에 건립되었는데

 1948년 묘소가 남양주시 화도읍으로 이전되었다.

이문용묘갈은 이준용의 동생 이문용(1882-1902)의 묘비이다. 1919년에 건립되었다.

 

이우신도비는 흥선대원군의 증손 우(1912-1945)의 묘비이다. 비석에 아무런 글씨가 없는 이른바 백비이다.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으나 아마도 사망 이후 사회가 혼란하였기 때문에 비문을 새기지 못한 듯하다.

이종묘갈은 이우의 둘째 아들 이종(1940-1966)의 묘비로 1967년에 건립되었다.

이종은 서울대학교 정치학과를 나와서 미국으로 유학 갔다가 폭설로 사망하였다.

 


운현궁 일가의 묘소에 있던 장명등

장명등은 망자의 혼을 밝에 인도하든가 불을 밝힘으로서

사악한 잡귀를 물리치는 벽사의 기능을 한다.

 

 


 

2007.7월 일재의 잔재인 광화문을 철거하면서

해체된 철근 콘크리트의 광화문 일부


콘크리트로 만든 광화문 귀공포의 흔적

 

콘크리트로 만든 광화문 추녀

 

 

 

 

역사박물관 광장에는 김정호의 '수선전도'를 그린 분수가 있다.

 

 

수선전도首善全圖

               1825년(순조 25)경에 김정호(金正浩)가 제작한 것으로 전하는 서울시가도.

목판인쇄본. 크기는 세로 25.4㎝, 가로 22.2㎝이며, 부분채색한 한 장의 지도이다.

이 지도는 남쪽으로 한강을 한계로 하여, 북쪽으로 도봉산,

서쪽으로 마포·성산동, 동쪽으로 안암동·답십리동까지 포함하고 있다.

 수선은 서울의 별칭으로 『한서(漢書)』 유림전에서 유래된 것이다.

 

 

   문인석文人石

                흥선대원군의 손자 이준용의 묘소에 옮겨왔다

문인석은 묘소를 수호하는 석물로 앞쪽의 좌우에 배치된다.

공복(公服)을 입은 상태로 복두를 쓰고 홀(笏)을 들고 있으며,

공복은 임금을 알현 할때나 동지, 설날등의 경사스럽고 즐거운 대사가 있을때 착용하는 관복이다.

복두는 두 단으로 각이진 관모(冠帽)로 사모의 전신이다.

홀은 신하가 임금을 만날때 손에 쥐던 물건으로 상아나 나무로 만들었다.

 

종루 주춧돌

               종로 네거리에 있었던 종루 주춧돌이 일부이다.

1972년 공사도중 발견되어 경복궁에 보관되었다.

2011년 서울 역사박물관으로 이전되었다.

규모로 보아 조선전기의 것으로 추정,종루는 동서 5칸 남북4칸의 규모로 발견된 주춧돌은 11개이다.

종루가 처음세워진것은 1413년 태종태였다.

세종때 동서5칸 남북4칸으로 맞추어졌으며 임진왜란때 불에 타 다시 지어졌으나 규모가 축소되었으며

1895년 보신각이라는 이름이지어졌다.

종루의 종은 도성안에서 시간을 알렸는데  성문이 닫히는 인정(밤10시)에는 28번의 종을 ,

성문이 열리는 파루(새벽4시경) 알려서 한양사람들의 시작과 끝을 알렸다고 볼 수 있다.

 

고려시대 오층석탑

               서울역사박물관 뒷마당에는 단촐한 고려시대의 오층석탑이 1기 있습니다.

높이 2.91m의 석탑은 하층 기단에 새겨진 안상무늬와

옥개석의 받침수가 줄어든 전형적인 고려시대의 전형적인 석탑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결실된 부분을 보완하여 원형을 복원한 모습이다.

.

.

.http://rekor.or.kr/palace/0414.html 한국의 재발견에서 내용 발췌.

.

 

금천교를 찾던 중 만난 서울역사박물관의 외부에 전시된 유물만 관람하고

내부 관람은 생략했다 다음 궁궐답사 예정지 경복궁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