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 한쪽 비워둔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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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수궁 [德壽宮] 의 봄

kyeong~ 2013. 5. 7. 22:37

 

(2013. 4.

26.금요일 날씨 맑음, 오전 10시-14시까지)

 

덕수궁 [德壽宮]

이름 경운궁()이다

서울특별시 중구 정동() 있는 궁궐. 본래 행궁()이었으나 1593(선조 26)

임금 의주에서 환도하여 14년간 머물면서 궁궐 삼고 서궁이라 하였다.

조선 말기에는 고종 거처하였다.

지금 조선 말기 건물 중화전(殿), (殿), 석조전(殿) 등이 남아 있다.

정문에는 대한문()이라는 현판 걸려 있다.

 

우리나라 대표 궁궐로 덕수궁, 경희궁, 경복궁, 창경궁, 창원궁을 일컬어 5대궁궐이라고 한다.

덕수궁과 경복궁에서는 수문장교대식이 있으며 시간을 잘 맞추어 가면 수문장교대식을 구경할 수 있다

외국인들에게도 큰 볼거리이며 내가 관람을 했던 날 많은 외국인 관광객들과 함께 수문장교대식을 구경할 수 있었다.

 

  
 
1. 대한문 2. 하마비 3. 금천교 4. 중화문 5. 중화전
6. 석어당 7. 덕홍전 8. 함녕전 9. 정관헌 10. 즉조당
11. 준명당 12. 분수대 13. 앙부일구 14. 석조전 15. 석조전별관
16. 광명문 17. 포덕문 18. 중명전 19. 선원전터

 

대한문 []

서울특별시 중구 정동() 있는 덕수궁() 정문. 원래 덕수궁 정문 남문 인화문()이었으나

1897 고종 황제 즉위하면서 동문이었던 대안() 정문으로 고쳤다.

1904년에 덕수궁 화재 났는데

1907년에 그것 복구하는 과정에서 대안() 수리하고 지금 이름으로 고쳤다.

수문장교대식이 열리고 있는 대한문

지금의 덕수궁자리는 원래 세조의 큰손자 월산대군의 개인 저택이었다고 한다

 


                                          



대한문 앞 풍경

 

 

금천교禁川橋

궁궐의 대문과도 같은 대한문을 들어서면 곧바로 금천교가 나타난다

 

경복궁의 영제교(永濟橋), 창덕궁의 금천교(錦川橋), 창경궁의 옥천교(玉川橋)와 마찬가지로

덕수궁에도 명당수를 끌어들어 금천(禁川)을 파고 돌다리를 설치했다.

덕수궁 또한 명당수를 끌어들여 금천을 파고, 금천교를 설치하였지만 지금은 웅덩이와 같은 모습으로 남아 있다.

이는 일제시기에 잘려나가고, 축소되어버린 덕수궁의 신세 만큼이나 처량한 모습이 아닐 수 없다.


덕수궁의 금천교는 두 개의 홍예(虹霓)를 틀었으며, 금천교 바닥은 삼도(三道)를 두었다.

삼도의 가운데는 좌우면보다 한 단 높고 넓찍한 어도(御道)를 두어 위계를 높였다.

한편 덕수궁 금천교는 대한문이 원래 위치보다 14미터 가량 뒤로 물러남에 따라 지금처럼 대한문과 바로 이어서 붙어있게 되었다.

 

 

 

 

 

 


 

 

 

하마비

대한문을 지나 금천교를 건너기 전 왼편을 보면 하마비(下馬碑)가 서있다.

원래 하마비는 궁궐, 종묘, 서원 등의 입구 앞 일정한 위치에 세워져,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말을 비롯한 탈것에서 모두 내리라'는 뜻을 담고 있는 비석이다.

 

그런 하마비가 애초부터 궁궐 안쪽에 놓였을 까닭이 없음은 물론이다. 아마도 도시계획으로 인해 원래 위치를 잃고 정문 안에 서있게 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덕수궁 하마비는 잔존하는 궁궐의 하마비로 유일한 것이기도 하다.

중화문中和門

중화문은 중화전과 함께 보물제 819호이다.

중화문은 경복궁 근정전을 들어서기 전에 있는 근정문과 같은 역할을 하는 곳입니다.
이곳은 중화전이 왕의 집무가 이루어지는 곳으로 중화전을 가기 전 이 문을 거쳐야 합니다.

경운궁의 정문인 대한문은 동향인데 비해 중화문은 남향이다

애초 중화문은 2층이었으나 광무8년 화재로 소실되어 복구하면서 단층이 되었다고 한다

좌우 화랑은 소실되고 중화문만 어색하게  남아있다

문의 기능은 점차 잃어가고 관람객들은 중화문을 외면한체 주변 터진공간으로 출입한다

 

 

중화전中和殿

중화전은 경운궁의 법전으로 경복궁의 근정전, 창덕궁은 인정전, 창경궁의 명정전에 해당하는 건물이다

외국사신이 왔거나 국가 중요행사가 있을때 사용하던 곳이다.

중화전은 고종이 경운궁으로 이어한 몇년 후 1902년 2층으로 중층되었다

이때 중화전은 경복궁의 근정전, 창덕궁의 인정전과 규모가 비슷하였지만

1904년 화재로 소실 되었다. 그후 1906년 단층으로 중건하였다 현재까지 남아있는 모습이다.

중화전으로 오르는 길은 3갈래로 이루어져 있으며

가운데는 임금님이 행차하는 길, 좌에는 문신(동반), 우에는 무신(서반)의 신하들이 이용하였다고 한다.

 

중화전 뜰의 바닥에는 화강암으로 박석이 깔려져 있으며

표면이 매끄럽지 않고  울퉁불퉁한 것은 비나 눈이 왔을때 미끄러짐을 방지한 것이며

양옆 비석모양의 품계석은 좌우 각 12개씩 24개이며

1품에서 3품까지는 正.從 으로 나뉘어 4-9품까지는 正으로만 이루어져 있다

품계석이 좌우 24개인것은

농경사회의 24절기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한다.

동쪽의 품계석은 문관, 서쪽의 품계석은 무관이라고 한다.

 

 


솥 모양을 닮은 해시계라 하여 '앙부일구'라고 했다.

앙부일구는 1437년 세종 때 장영실이 처음 만들었으며, 시간뿐 아니라 절기(節氣)도 함께 살펴볼 수 있다.

13개의 위선(緯線:씨줄)은 24절기를 나타낸다. 맨 위는 동지(冬至), 맨 아래는 하지(夏至), 가운데는 춘분 또는 추분을 가리킨다.

경선(經線:날줄)은 시간을 나타내며 그 선 밑에는 시간을 말하는 12지상(支象)의 그림이나 글씨가 있다. 가운데 선은 12시 정오(正午)를 나타내는 자오선이다.

영침(影針:그림자로 시간과 절기를 나타내는 바늘)은 북극을 가리키며, 길이는 앙부일구의 반지름과 같다.

덕수궁 앙부일구는 현재 보물 845호로 지정되어 있다.솥 모양을 닮은 해시계라 하여 '앙부일구'라고 했다.

앙부일구는 1437년 세종 때 장영실이 처음 만들었으며, 시간뿐 아니라 절기(節氣)도 함께 살펴볼 수 있다.

13개의 위선(緯線:씨줄)은 24절기를 나타낸다. 맨 위는 동지(冬至), 맨 아래는 하지(夏至), 가운데는 춘분 또는 추분을 가리킨다.

경선(經線:날줄)은 시간을 나타내며 그 선 밑에는 시간을 말하는 12지상(支象)의 그림이나 글씨가 있다. 가운데 선은 12시 정오(正午)를 나타내는 자오선이다.

영침(影針:그림자로 시간과 절기를 나타내는 바늘)은 북극을 가리키며, 길이는 앙부일구의 반지름과 같다.

덕수궁 앙부일구는 현재 보물 845호로 지정되어 있다.

 

품계석(品階石)은 정조때부터 궁내에 군신들간의 질서가 문란한 것을 보고 정조의 명에 의해서 품계석(品階石)이 세워졌다고한다. 그전에는 품계석이 없던 것으로 추측이 된다,

관료 조직의 특성상 외관직과 토관직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조회나 국가 행사에 참석할 수 없었으니 품계석(品階石)에 서는 것은 주로 경관직과 봉조하에 속하는 관원들이었다.

경관직(정1품에서 종6품까지)

봉조하(정3품에서 정9품까지)

외관직(종2품에서 종9품까지)

토관직(정5품에서 종9품까지)

관직은 18등급으로 나누었는데, 문신들은 오른쪽(동쪽)에 섰고, 무신들은 왼쪽(서쪽)에 섰다, 품계석은 정1품부터 정 9품 까지와 종 1품부터 종 3품까지 12개가 서있다


 

중화전 월대 앞의 서수[]

서수는 임금님이 살던 곳의 사악한 기운으로 부터 지키던

상서로운 동물


드므

드므는 순우리말로 '넓적하게 생긴 큰 독' 이라는 뜻인데

궁궐에 놓인 드므는 화재를 막기 위해 비치한 것이다.

드므 속 물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고 도망가 화마로부터 재앙을 피한다는 의미로 설치했단다

 

중화전 내부의 용상과 닷집,  일월오봉도

조선왕의 상징, 일월오봉도(日月五峯圖)

왕이 공식적으로 모습을 드러낸 곳은   어디나 일월오봉도를 그렸다

 

 


중화전 용상위의 천정 용 두마리

경복궁의 근정전 천정의 용은 발가락이 7개인 칠조룡

덕수궁의 중화전의 천정의 용은 발가락이 5개인 오조룡 이다.


중화전앞의 '답도' 에도 '용'

다른 궁궐의 월대로 오르는 답도에는

봉황이 그려져 있지만

덕수궁의 답도에는 용두마리가 그려져 있다.


월대에서 중화문을 향하여

잠시 임금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봅니다.

 

 

 


준명당

 


즉조당

 

중화전 서북쪽에는

이어진 행각으로 두채의 전각이 있다

왼쪽의 준명당은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에서 이어한후 지어진 것으로 추정하며

경운궁에서 편전의 역활을 했던 전각이다.

현재의 준명당은 즉조당과 함께 화재로 소실되었던 것을 새로 지은 것이다.

 

오른쪽의 즉조당은 선조가 피난에서 돌아온후 잠시 머물렀던 곳으로

인조가 즉위한 후부터 즉조당으로 불리었다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에서 돌아온 후 법전으로 사용될때에는 태극전, 중화전으로 불리우다가

중화전이 창건된후에는 다시 즉조당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였다.

 

 

 

석어당(昔御堂)

선조는 전쟁이 끝난후 창덕궁을 재건하지 못하고 이곳 석어당에서 승하셨고

인목대비는 이곳에 유폐되어 한많은 세월을 보냈던 곳이다.

 

석어당은 현존하는 궁궐 전각중 유일한 2층 목조건물로

1층에는 방과 대청을 만들고 2층에는 마루를 깐 전각이다.

 

 

 

 정관헌靜觀軒

1900년 러시아 건축가 사바친이 한식과 양식을 절충하여 설계한 근대식 건축물이다

궁궐의 가장 높은 곳 후원에 세워진 정관헌에서

고종은 조용히 궁궐을 내려다보는 휴식용 건물이다. 고종황제가 다과회를 개최하고

음악을 감상하던 곳이며 한때 이곳에 태조(太祖)의 어진(御眞)을 봉안하였다.

규모는 정면 7칸, 측면 5칸으로 내·외진으로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내진 공간 위에는 팔작지붕이 덮여있고 외진공간은 차양칸처럼 된 특이한 형태이다.

내부에 둥근 돌기둥이 세워져 있으며

외진에 두른 철제 난간에는 사슴, 소나무, 당초, 박쥐 등 전통문양을 넣었다.

궁궐에 서양식 전각을 세워진것은 외세의 힘에 기대어 나라를 구해보려는 절전한 몸짓이다

고종황제는 커피 독살미수사건이 전해질 만큼 커피를 좋아하였으며

이곳에서 커피를 마셨다고 한다.

 

 

유현문(有賢門)

정관헌으로 들어가는 문

아치형 벽돌로 쌓은 문

안쪽인 동쪽과 바깥쪽인 서쪽의 전통문양을 눈여겨 볼만하다.

 

 

덕홍전德弘殿과 함녕전咸寧殿

 

 

덕홍전 내부

봉황과 오얏꽃(李花) 문양 등을 화려한 금색으로 장식했음을 볼 수 있다.

이는 대한제국기에 황실의 문장(紋章)으로 쓰인 것이다.

 

 


 

 

오얏꽃과 봉황무늬

 


지붕위의 잡상

궁궐이나 누각등 지붕위에 4귀에 배열하는 여러가지 짐승의 형상으로 귀신을 막아주는 일종의 수호적 군사라고 보면 됨


 

 

덕홍전德弘殿

원래 이곳 덕홍전 자리에는 한때 명성황후의 빈전과 혼전으로 쓰이던 경효전(景孝殿)이 있었다.

1900년에 제작된 덕수궁 평면도를 통해서 현재의 덕홍전 자리에 경효전(景孝殿)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1904년 대화재 이후 경효전을 수옥헌(漱玉軒) 방면으로 옮긴 뒤,

1906년 지금의 덕홍전을 짓고 1911년 개조하였다고 한다.

따라서 덕홍전은 덕수궁에 현존하는 건물중 가장 나중에 지어진 건물인 셈이다.

덕홍전의 용도는 주로 외국사신들이나, 대신들을 만나던 접견실로 쓰였다고 한다.

그런 까닭에 덕홍전의 내부 전체는 넓게 터져 있고, 당시의 모습을 재현한 내부 모양 또한 접견실의 모습 그대로다.

 

 

 

 

 

 

함녕전咸寧殿

함녕전은 광무 1년(1897) 건립되었다. 그 뒤 1904년 4월 대화재로 소실된 것을, 1905년 1월 다시 상량 하였다.

함녕전은 왕의 침전으로 쓰였는데, 1907년 순종이 즉위 한 뒤 잠시 이곳에 머물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함녕전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사건은 바로 1904년 4월의 덕수궁 대화재다.

 현재의 덕수궁 일대를 잿더미로 만들고, 오늘날 덕수궁 건물의 모습으로 남게 된 계기가 바로 함녕전에서 발화된 대화재 때문이다.

 

 

 

광명문光明門 

광명문은 함녕전의 정문으로 1897년 건립되었으나,

 1904년 불에 타 함녕전과 더불어 같은 해에 다시 지었다.

그 뒤 현 석조전 별관을 이왕가(李王家)미술관을 건립하면서,

함녕전 행각 앞쪽에 세워져 있던 것을 1938년 현재의 위치인 중화문 남서쪽으로 옮겨놓게 되었다.


자격루(自擊漏)

자동으로 시간을 알리는 시보장치(時報裝置)가 울리는 물시계로 1434년(세종 16년) 장영실, 이천, 김조 등이

처음으로 만들었다.

현재 국보 229호로 지정

 


흥천사(興天寺) 동종(銅鐘)

흥천사 동종은 세조 7년(1461) 주조된 후 동대문을 거쳐, 종루(종각)에 걸려 시각을 알려주다가 다시 광화문에 걸리기도 한다. 그러나 광화문이 일제에 의해 이전되면서 창경궁으로 다시 옮겨진 뒤 해방이후 이곳 덕수궁 광명문의 지붕 밑으로 오게 되었다.

흥천사는 현종 10년(1669) 신흥사로 개칭하였고 현재 성북구 돈암동에 자리잡게 된다

흥천사 동종은 고려시대 범종 양식을 계승한 조선전기의 대표적인 범종으로 꼽을 수 있다.



신기전기화차(神機箭機火車)

신기전기화차는 신기전(神機箭)이라는 로켓 100발을 장전하여

차례로 발사할 수 있는 틀(신기전기:神機箭機)을 화차(火車)에

탑재(搭載)하여 화차 수레의 발사각도를 조절한 뒤 동시에

위층에서부터 아래층까지 차례로 100발을 발사했다.

신기전은 고려말 최무선 제조한 주화(走火)를 세종30년(1448년)

개량하여 만든 조선시대 로켓병기이다.

신기전은 발사 후 목표지점에서 폭발하는 대신기전(大神機箭)과

산화신기전(散火神機箭), 폭발장치가 없는

중·소신기전(中·小神機箭)이 있다.

특히 임진왜란 3대 대첩 가운데 하나인 행주대첩에서

신기전기화차의 가공할 위력이 발휘되기도 했다.

 

 

석조전(石造殿)

석조전은 1900년(광무 9년)에 착공하여, 1909년(융희 3년)에 준공한 반지하에 2층 화강암 석조건물이다.

이 건물은 고종의 환심을 사기 위해 대한제국 재정고문으로 있던 영국인 브라운(J.M.Brown)의 발의에 의해 시작되었다.

애초 석조전은 경희궁에 짓기로 한 것을 브라운의 주장을 따라 이곳 덕수궁에 짓게되었다고 한다.

석조전의 건축양식은 18세기말에서 19세기초 프랑스, 독일, 영국에서 유행한 콜로니얼(Colonial) 양식의 일종으로

미국에서 유행하였던 신고전주의 양식을 따른 것이다.

반지하층은 시종(侍從)의 대기실, 1층은 접견실(接見室) , 2층은 침실과 거실 등을 배치하였다고 한다.



정면 중앙 현관의 상부 박공 면에 대한제국의 문장인 오얏꽃(李花) 문양을 새겼으며, 기둥 위 주두(柱頭)는 이오니아 양식으로 하였다. 실내는 우아하고 셈세한 로코코(Rococo)풍 장식을 하였다.

석조전(石造殿) 별관

석조전 서측 별관은 1937년 11월 준공된 지하 1층 지상 3층 화강암 석조 건물이다.

1910년 일제 강점기 이후 석조전은 왕실의 전각이 아니라, 일본의 근대미술품들을 전시하는 미술관으로 전락되었다.

 

그러던 중 석조전과는 다르게 '조선의 고미술품을 전시할 수 있는 공간을 덕수궁에 또 하나 세우자'는 의견에 따라

 나카무라 요시헤이(中村與資平)의 설계로 이왕가(李王家)미술관으로 처음 세워지게 되었다.

당시 창경원 이왕가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던 삼국시대 이래 조각공예품, 도자기, 회화 등을 옮겨와 전시하였다고 한다.

현재 국립현대미술관 별관으로 쓰이고 있다.

 

.http://rekor.or.kr/palace/0414.html 한국의 재발견에서 내용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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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외 덕수궁(경운궁)의 아름다운 시간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