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 한쪽 비워둔다면

photostory-宮

을사늑약이 체결된 비운의 장소 중명전

kyeong~ 2013. 5. 10. 23:45

 

 

 

 2013.4.26. 금. 오후

덕수궁관람을 마치고 

두번째 궁궐답사 경희궁으로 가는 길

경희궁은 덕수궁 돌담길을 따라 십여분 걸어가면 된다.

 

정동극장에서 난타를 본 후

참으로 오랫만에 걸어보는 덕수궁 돌담길

덕수궁 돌담길을 따라 봄이 오는 속도로 걸었다.

봄 속으로 파고드는 햇살이 정겹고

아낌없이 나누어 주는 햇살을 받아 이쁜 꽃들이 아기자기 피어나고 있었다

돌담을 따라 어느화가의 화폭이 오랫만에 찾아온 이방인의 눈을 즐겁게 해주었다.

 

 

 

 

 

 

 

덕수궁과 경희궁 중간쯤에는 중명전(重明殿)이 있다.

뜻하지 않게 만난 중명전에서 다시 한번 우리 험난했던 역사를 살펴보게 되었다.

덕수궁에서 벗어나 있지만

한때 덕수궁(경운궁)의 일부였고 고종이 거쳐했던 곳이므로

이번 궁궐답사 여정에 기록을 남기기로로 했다.

 

 

 중명전(重明殿)

중명전(重明殿), 광명이 계속 이어져 그치지 않는 전각’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건물의 격도 왕이나 왕에 버금가는 인물과 관련한 건물에만 붙이는 ‘전(殿)’이다

 

1987년경 황실 도서관으로 러시아 건축가 사바찐에 의해 설계된 서양식 전각이다.

원래의 이름은 수옥헌(漱玉軒)이었으나,

1904년 경운궁(현 덕수궁) 화재 이후 고종이 이곳으로 거처를 옮기게 되면서 중명전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1905년 11월 18일 새벽, 중명전에서 〈을사늑약〉이 체결되었다.

1904년 경운궁 대화재 이후 중명전으로 거처를 옮긴 고종 황제의 편전으로 사용되었다.

1905년 11월 〈을사늑약〉이 이곳에서 불법적으로 체결되었으며,

이후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국제 사회에 알리고자 1907년 4월 20일 헤이그 특사이준 등을 파견한 곳도 중명전이다.

일제는 헤이그 특사 파견을 빌미로 고종 황제를 강제 퇴위시켰다.

 

 

복원하기 전의 중명전(위키백과에서 발췌)

 

중명전 현판

 

 

 중명전 1층 내부에는 을사늑약의 비운의역사에 대해

자료를 전시해 놓았다

 

 

 

 을사늑약, 비운의 순간들

 

 

 을사조약(乙巳條約) 또는 을사 보호 조약(乙巳保護條約)은

1905년 11월 17일 대한제국 정부의 외부대신 박제순과 일본 제국 정부의 주한공사 하야시 곤스케에 의해 체결된 불평등 조약이다.

한국의 일부 사학자들은 일본에 의해 강제로 맺은 조약이라 해서 을사늑약(乙巳勒約)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한규설, 모건, 잘데른

대한제국 참정대신 한규설은 을사늑약 체결을 반대하다가 유인당하여 갇히고 말았으며

당시 모건 미국공사와 잘데른 주한 독일 변리공사는 중명전의 강압적인 분위기를 소상하게 전하고 있다.

 

 

 

 

 덕수궁이 화재가 나자 고종은 거처를 중명전으로 옮겼고 고종황제의 편전으로 사용됩니다.
그러나 이 곳에서 비극이 일어났다.

 

1905년 11월 일제는 무장군인을 앞마당에 배치한 후 을사늑약을 쓸 것을 독촉하였다.

살벌한 분위기를 매일 같이 연출했지만

고종은 끝끝내 그 독촉을 거부하였지만 이미 대한제국은 망국으로 치닫고 그 역사의 흐름을 고종 혼자 막아설 수 없었다. 

결국 고종은 이토우 히로부미의 강압과

을사5적이라는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 5인방에 의해서 옥새도 없이 을사늑약은 체결되었다. 

 

문제는 이 을사5적의 후손들이 잘 살아가고 있고

친일세력이 보수의 옷을 입고 여전히 한국의 이너서클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이토우 히로부미는 안중근 의사에게 저격 당해서 죽게 된다.

안중근 의사가 위대한 이유는 이 이토우라는 인간에 대한 거룩한 심판을 내렸기 때문이다. 

 

 고종의 옥새

이 어새는 고종이 비밀리에 보내는 문서나 편지 사용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고종의 친서도 보관 되어 있다

영국 튜리분지의 스토리기자에게 전달한 친서로서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알리는 내용이다.

처음부터 인허하지도 않았고

서명도 하지 않았으며

일본이 반포하는 것도 반대했으며

황제권을 다른나라에 양여하지 않았다는 내용

 

저 사라진 외침에 대하여..................!!

 

 고종은 1907년 네델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이준, 이상설, 이위종을 특사로 파견해

을사조약의 부당함과 일본의 침략을 알리고 국제사회에 도움을 요청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일본의 방해로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일본은 고종에게 책임을 추궁하고 퇴위를 강요하여 물러나게 되었다.

 

참 머나먼 여정이다

 

 

 만국평화회의보

 

 헤이그 특사 위임장

 

 

 

중명전의 바닥 러시아풍의 문양

러시아 건축가 사바찐의 설계에 의한 것이므로 러시아 영향을 그대로 전해진것 같다.

 

 

러시아풍의 벽난로도 있고...

 

 

그윽하고 고풍스런 덕수궁을 나와

중명전을 들러보는 사이

역사책속에서 보던 역사적 사건들이

가슴을 저리게 했다.

험난한 소용돌이 역사를 딛고선 우리

역사에 대해서

국가에 대해서

내 아이들은 과연 얼마나 많이 알고 살아가고 있을지 걱정이 된다

 

'독도는 우리땅'이라고 외치기 이전에

목숨을 걸고 나라를 지켜온 위대한 인물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이나라가 살아있다는 것을

한번쯤 뒤돌아 볼 일이다.

 

그래서 이 중명전 관람객은 나이가 지긋한 사람이 많은듯하다

 

 

.http://rekor.or.kr/palace/0414.html 한국의 재발견에서 내용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