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 한쪽 비워둔다면

photostory-宮

창덕궁(법전편)

kyeong~ 2013. 6. 8. 16:43

 

2013.4.30.화. 맑음

 

 

 

 

 

 

 

1. 돈화문 2. 금천교 3. 진선문 4.숙장문 5. 인정문
6. 인정전 7. 선정전 8. 희정당 9. 대조전 10.경훈각
11. 가정당 12. 어차고 13. 성정각 14. 관물헌 15. 낙선재
16. 취운정 17. 한정당 18. 상량정 19. 만월문

20. 승화루

 


  사적 122호 ※ UNESCO 세계문화유산
  소 재 지 : 서울시 종로구 와룡동 1번지
  창건시기 : 1405년 (태종 5년)
  지정 문화재 현황
  - 국보 : 인정전(225호)
  - 보물 : 돈화문(383호), 인정문(813호), 선정전(814호), 희정당(815호),
      대조전(816호), 구선원전(817호)
  현 면 적 : 135,212.1평(446,983㎡)

 

태종 5년(1405)에 이궁(離宮)으로 짓고 이름을 창덕궁이라 하였다.

임진왜란 때 왜군에 의해 소실된 것을 광해군 2년(1610)에 중건하여 사용하다가,

인조반정(1623)으로 다시 불에 탔고, 인조 25년(1647) 다시 중건이 시작된 이후 크고 작은 화재와 재건축이 이어졌다.

창덕궁은 임진왜란 이후 광해군 때부터 경복궁 재건 전까지 약 270여년간 법궁의 역할을 대신 해 왔다

 

1910년 소위 "한일합방"이 인정전에서 체결되었으며, 1917년 내전 일대에 대화재가 발생하자

일제는 이를 복구한다는 핑계로 경복궁 내전 건물들을 모두 헐어다 이곳으로 옮겨 짓게 된다.

또한 역대 왕의 어진을 모신 선원전을 후미진 곳으로 이전하는 등 일제는 의도적으로 창덕궁의 모습을 왜곡했다.

그후 1926년 순종이 대조전에서 승하하자 전각을 헐어 전시장과

각종 편의시설을 마련하여 일반인에게 관람을 허락하였다.

 

한때 "비원(秘苑)"으로 축소·왜곡되어 불려지기도 했으나,

 1990년대 대대적인 복원을 통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는 조선시대 궁궐의 후원을 엿볼 수 있는 유일한 궁궐로 남아있다.

 

돈화문(敦化門)과 금천교(錦川橋

돈화문(敦化門)

덕궁의 정문으로 태종 12년(1412) 5월에 세워졌다. 돈화문은 정면 5간, 측면 2간의 다포식 중층양식이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2층 문루에 큰 종을 주조하여 돈화문에 걸기도 했다고 한다.

현재의 돈화문은 임진왜란으로 인해 화재로 소실되었던 것을 선조 41년(1608)에 재건되었음이

1976년 돈화문 보수공사 과정에서 발굴된 상량문을 통해서 밝혀지기도 했다.

 

돈화문과 관련해 특이한 점은 돈화문의 지붕양식이다. 1820년대 그려진 <동궐도>에 의하면

돈화문 지붕은 팔작지붕으로 그려져 있으나, 현재는 우진각지붕으로 남아있다.

현재 남아있는 조선시대 궁궐의 정문이 모두 우진각지붕으로 되어 있는 점을 감안할 때 의문점이 아닐 수 없다.

현재 돈화문은 1996년 12월 돈화문 앞 석계 공사를 마무리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보물 383호로 지정되어 있다.

  

 

금천교(錦川橋)

태종 11년(1411) 3월에 진선문 밖에 처음 석교가 세워지니 이것이 곧 현재 금천교(錦川橋)의 건립이다.

따라서 현재 남아 있는 궁궐의 금천교 중 가장 오래된 다리가 창덕궁 금천교이다.

           좌향은 동서 방향이다. . 홍예의 가운데 남북방향으로 귀면을 각각 양각하여 새겨놓았다.

 

한편 금천교는 현재 진선문과 숙장문의 축과 일직선상에 놓여 있지 않다.

하지만 1820년대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는 <동궐도>를 통해보면 일직선상의 축에 놓여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관련해 2001년 현재 금천교 발굴조사를 통해,

원래의 위치에서 일제때 현재의 위치로 왜곡되었을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두 개의 홍예를 틀어 돌 난간을 세우고 다리 윗부분은 장대석으로 삼도를 깔았다.

좌향은 동서 방향이다. 홍예의 가운데 남북방향으로 귀면을 각각 양각하여 새겨놓았다.

 

 

  

금천교의 남쪽과 북쪽 각각 서수들이 위치하고 있다.

북쪽에는 거북모양의 서수가 남쪽에는 개의 모습에 가까운 서수가 놓여 있다.

 

 

 

 

거북모양의 서수

 


개의 모습에 가까운 서수

 

진선문(進善門)과 숙장문(肅章門) 

 

진선문(進善門)

건립연대는 정확치 않으나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태종 9년(1409)년에 처음 진선문과 관련된 기록을 발견할 수 있다.

아마도 창덕궁이 창건무렵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1908년 탁지부 건축사무소에 의해 시행되었던 인정전 개수공사 때 헐렸던 것을 1996년 복원을 착수,

 1999년 완공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진선문에는 태종대와 영조대에 북을 설치하여 억울한 일이 있는 백성들이 와서 치면

왕이 직접 해결해준다는 신문고(申聞鼓)혹은 등문고(登聞鼓)가 있었다고 전한다.
한편 진선문 현판 글씨는 1999년 복원 당시 서예가 정도준씨가 썼다.

 

숙장문(肅章門)

                                                              진선문을 지나면 장방형의 마당을 따라 마주 보이는 것이 숙장문이다.

이 숙장문 역시 성종 6년(1475) 좌찬성 서거정이 문 이름을 지어올린 것을, 성종이 낙점하여 지었다고 한다.

 

 

1820년대 그려진 <동궐도>에 따르면 숙장문과 진선문 사이 남쪽 행각에는

내병조, 호위청, 상서원 등을 볼 수 있다.

이는 인정문 뜰과 조정마당에서 공식적인 궁중의식이 많이 치러졌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한편 숙장문과 진선문을 포함한 일대의 행각은 일제때 헐리어 화단으로 꾸며지는 등 수난을 겪기도 했다.

 

 

 


상서원


동위청

 

 

               정청(政廳)

                                                              창덕궁 정청(政廳)은 이조와 병조에 속한 사무용 건물로

‘정청(政廳)’은 ‘정무를 보는 관청’이란 의미이며

이조(吏曹)나 병조(兵曹)의 전관(銓官)이 도목 정사(都目政事)를 보던 곳이다.

여기에는 사헌부(司憲府)의 대사헌(大司憲), 병조 당상관(堂上官), 병방 승지(吏兵房承旨),

사관(史官) 등이 참예하여

관리의 전형(詮衡) 임면(任免) 출척(黜陟) 등 인사에 관한 일을 의논하고 처리하였다.

동국여지비고에 따르면 동전(東銓: 이조)의 정청(政廳)은 사라진 연영문(延英門) 안에 있었고,

서전(西銓: 병조)의 정청(政廳)은 빈청(賓廳) 서쪽을 빌려 썼다고 되어 있다.

동궐도에는 연영문(延英門) 동쪽 행각과 인정문 서쪽 행각에 각각 정청(政廳)이 조성되어 있다

 

 

인정문과(左) 숙장문(右), 행각

 

 

인정전(仁政殿)

 

 

 

 

인정문(仁政門)보물 813호

             태종 5년(1405) 창덕궁 창건과 더불어 건립되었으나

            오늘날 볼 수 있는 인정문은 영조21년 (1745년) 3월에 중건한 것이다.

일제가 1912년경에 인정전의 행각을 전시장으로 만들면서 벽체와 바닥의 구성이 변형되었으나,

1999년 복원공사를 마치고 오늘날에 이른다.

이곳 인정문에서는 국왕의 즉위도 거행되었는데

효종(1649), 숙종(1674), 영조(1724), 순조(1799), 철종(1849), 고종(1863) 등이

이곳 인정문에서 즉위하였다.

 

임금님의 즉위식은 마음대로 정하는 것이 아니라

앞 임금이 훙서한 빈전에서 옥새를 받고 그 궁궐의 법전 정문에서 하는 것이 관례이다.

따라서 앞 임금님이 창덕궁에서 별세하게 되면

다음 임금은 반드시 인정문에서 인정문에서 즉위식을 하게 되어있다.

즉위 날짜는 성복(상복입는 날)하는 날로 하는데 대게 선왕이 별세하고 닷새뒤에 하는것이 상례이다.

              즉위식은 이렇게 상중에 슬픔과 통곡속에서 간소하게 이루어진다.

 

현판 글씨는 한석봉에 필적하는 조선 중기의 명필 북악 이해룡의 글씨라고 전한다.

현재 인정문은 보물 813호로 지정되어 있다.

 

인정전(仁政殿)국보 225호

               태종 5년(1405) 창덕궁 창건과 더불어 건립되었으나 태종 18년(1418) 박자청에 의해 다시 지어졌고

세종 즉위년(1418년) 9월에 준공되었다.

            이후에 임진왜란으로 소실 된 것을 광해군때 중건하고,

정조 1년(1777) 9월에 조정에 품계석을 설치한다.

몇 차례의 소실과 중건을 반복하다가 1908년 탁지부 건축소에 의해 인정전 내부를 서양식으로 개조한다.

공사는 서양식 실내장식 위주로 개조되었다.

인정전 용마루에 다섯 개의 오얏꽃(李花)문양을 만들어 넣은 것도 이때이다.

그 뒤 일제시기를 거쳐 인정전은 물론, 그 주변과 조정마당까지 심하게 왜곡되어 버려져 왔었다.

그 뒤 현재 인정전의 모습은 1999년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인정전 용마루의 오얏꽃 다섯개

 

            인정전은 창덕궁 외전(外殿)의 중심인 법전이며,

국왕의 즉위식, 외국 사신을 맞이하는 의식, 신하들의 하례 등이 거행되던 공간이다.

 이곳 인정전에서 즉위한 왕으로는 연산군(1494)과 현종(1659)이 있다.

인정전은 두벌의 월대위에 놓여 있다. 인정전의 월대는 경복궁 근정전과 달리 난간석을 두르지 않았다.

또 인정전의 상하 월대에는 화재를 예방하기 위한 주술적 상징물인 '드므'가 설치되어 있다.

이곳 '드므'는 '입이 넓은 큰 그릇'이란 뜻의 순우리말이다.

현판글씨는 조선 후기의 문인이자 명필이었던 죽석 서영보가 썼다고 한다. 현재 국보 225호이다.

 

인정전 내부

            인정전 내부를 들여다 보면 여는 궁궐과 다른 차이점을 쉽게 발견하게 된다.

서양식 커튼과 샹들리에가 설치되어 있다.

               그리고 전돌로 바닥을 깔은 다른 궁궐의 법전과는 달리 이곳은 마루가 깔려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렇듯 양풍으로 인정전이 단장된 것은 대한제국기인 순종대에 이루어 진 것이다.

  인정전 내부를 개조하는 가운데 양풍을 가미했다고 한다.

  왕의 자리인 어좌와 그 뒤에 나무로 만든 곡병이 쳐져있다.

  그리고 이를 두른 '일월오봉병(日月五峰屛)'이 보인다.

  창덕궁의 일월오봉병은 다른 궁궐과는 달리 조금 높게 설치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마치 한 폭의 그림을 감상하는 느낌이 든다.

  이 또한 인정전 내부를 개조하는 가운데 그 형식을 약간 바꾼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인정전은 우리민족에게 있어서 씻을 수 없는 비극의 현장이 되고만다.

 1910년 한일합방이 이곳에서 강제로 체결됨에 따라 조선왕조는 이곳 인정전에서 마침표를 찍고,

 조선의 백성들은 일제 식민통치 36년의 암흑 속에서 굴종의 삶을 겪어야 했기 때문이다. (1910 년 경술국치)

 

 

서양식 커튼과 샹들리에

 

     

인정전 천정의 봉황

천장을 보면 두 마리의 봉황이 날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봉황이 출현하는' 성군이 존재하고 있음을,

혹은 백성이 평안한 태평성대를 암시하는 것이다.

 

 

인정전 문살

 

답도

인정문을 통해 이어진 어도를 따라 조정 마당을 지나 인정전 월대에 이르면 답도를 통해 오르게 되어 있다.

답도는 화강암으로 되어 있고 여기에 두 마리의 봉황이 양각되어 있다.

봉황은 '성군이 나타나거나, 성군이 다스리고 있음'을 의미한다. 성

정을 베풀겠다는 왕의 의지를 드러낸 상징물이라 하겠다

 

 

인정전옆 우물

 

 

 

인정전 행각 밖에서 인정전을 바라보았다..

 

 

 

선정전(宣政殿) 보물 814   

 

 

선정문을 통하여 선정전으로 들어간다.

 

 

선정문(宣政門)

 

 

 

 

  선정전(宣政殿)보물 814호

선정전은 외전(外殿)에 속하는 편전(便殿)이다.

 편전이란 임금이 신하들과 국가의 정치를 논하던 공식 집무실을 말한다.

그렇지만 대개의 궁궐 전각들이 그러하듯이 딱히 공식 집무실의 용도로만 국한되어 쓰인 것은 아닌 듯 하다.

<조선왕조실록>과 <궁궐지>에 의하면 성종 2년(1417) 가을에 왕비가 선정전에서 양로연을 베풀었다고 한다.

또한 성종 8년(1477) 3월에 왕비가 첫 친잠례를 행한 이후에 선정전에서 내외명부의 하례를 받고 치사했으며,

문신 그리고 성균관 유생들과 학문을 논하기도 했다고 한다.

명종 8년(1533)에는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

세조 7년(1461년)에 조계청(朝啓廳)이었던 것을 선정전(宣政殿)이라 하였고,

후에 임진왜란, 인조반정 등으로 소실과 중건을 반복하다가

 인조 25년(1647년)에 인경궁의 재목을 이용하여 다시 완공한다.

 

 

1820년대에 그려진 <동궐도>에 의하면 선정전 지붕이 초록색으로 그려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청기와로 지붕을 올렸기 때문이다.

현재 궁궐에 남아있는 전각 가운데 유일한 청기와 지붕이다.

정면 3간 측면 3간의 단층 팔작 지붕의 다포구조이다. 현재 보물 814호로 지정되어 있다.

 

 

 

선정전 뒤뜰

 

 

 

선정전의 내부에는 보개천장을 두고 일월오봉병을 둘렀다.

               선정전 앞에는 월대를 두었고, 월대 모서리에는 드므를 설치했다.

   순조 이후에는 희정당이 편전의 역할로 주로 쓰였던 것 같다

 

 

 

 

희정당(熙政堂) 보물 815호

희정당(熙政堂)보물

 연산 2년 (1496년) 12월 숭문당(崇文堂)을 고쳐 희정당(熙政堂)이라 칭하였으며,

          소실과 재건을 반복하다가 1917년 대화재 이후 경복궁의 강녕전(康寧殿)을 이전하여

 1920년 12월에 재건된다.

따라서 현재의 희정당 모습은 원래의 희정당과는 다른 모습으로 되어 있다.

희정당은 왕의 침전(寢殿)으로 사용되었다가, 순조대에 이르러서는 편전(便殿)으로 주로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순조 30년 5월에는 효명세자(후에 익종으로 추존)가 이곳에서 승하했으며, 고종이 경복궁 완공 전까지 머물던 곳이다.

경복궁 희정당의 명칭에 관해서는 <궁궐지>에 의하면 순조가 지은 '희정당명(熙政堂名)'을 소개하면서

              "군주가 밝고 강하면 정사가 잘 다스려지고 덕이 닦이리니,

정사가 잘 다스려지고 덕이 닦이면 당명(堂名)을 생각하리라"고 적고 있다.

              또한 대제학 채유후가 지은 상량문에는 <대학(大學)>과 <서경(書經)>에서 희(熙)의 뜻을 '밝고, 넓다'는

의미를 본딴 것이라며 "...

  정사를 밝혀 백성을 접하니 백성이 충정을 다하고,

  정사를 넓혀 백성을 구제하니 백성이 혜택을 입지 않은 이가 없다는 의미에서 '희정(熙政)'이라 이름하였다"고 한다.

  정면 11간에 측면 5간의 55간 건물이다. 현재 보물 815호로 지정되어 있다.

 

 

 

 

 

행각의 가장 오른쪽 출입문은

자동차 승하차용 현관으로 설계 되었다.

 

 

 희정당의 일본식 현관

                               앞에 지붕을 덮은 현관은 고종이 차를 타거나 내릴때 비를 맞지 않도록 설계된것으로 추정

지금의 희정당은 원래의 창경궁 희정당이 아니다

1917년 창경궁에 화재가 일어나 희정당과 대조전이 소실 되었다.

이때 일본은 재정부족을 이유로 희정당을 다시 짓지 않고 경복궁의 강녕전을 헐어다 지었다.

그 과정에서 총독부가 공사를 진행하다보니 조선식도 아니고 일본식도 아닌 어정쩡한 정문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당시 복원하는 기본 방침이 "조선식을 위주로 하고 나머지는 양식을 따른다"는 원칙을 만들다보니

우리 궁궐 본래의 모습을 잃고 요상한 모양으로 변했다.

 

 

현관문 중앙의 이화꽃이 인상적이다.

 

 

 

 

장초석 위는 복도

대조전과 복도로 연결이 되어 있다.

희정당에 머물던 왕들은 이 복도각을 지나 왕비의 처소인 대조전으로 갔다.

 

 

 1820년대에 그려진 <동궐도> 속에 그려진 희정당의 옛 모습은 1920년 재건되면서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바뀐다.

외관의 남행각에 현관을 만들고, 내부에 카펫과 서양식 가구가 놓이는 등 서양식으로 변형되었다.

 

 

희정당 응접실 벽에는 1920년 가을 순종의 명을 받아 해강 김규진이 그린

'총석정절경도(叢石亭絶景圖)'와 '금강산만물초승경도(金剛山萬物肖勝景圖)'가 동편과 서편에 각각 그려져 있다.

정면 11간에 측면 5간의 55간 건물이다. 현재 보물 815호로 지정되어 있다.

 

 

'총석정절경도(叢石亭絶景圖)'

김규진[총석정절경도(叢石亭絶景圖)]1920

                                                             비단채색/195X880 /창덕궁 희정당 소장

 

'금강산만물초승경도(金剛山萬物肖勝景圖)'

김규진[총석정절경도(叢石亭絶景圖)]1920

비단채색/195X880 /창덕궁 희정당 소장

 

희정당 단청의 '靑'

                                                                                         단청
                                                  단청이란 주로 목조건물에 여러 가지 색으로 무늬를 그려 아름답고 장엄하게

장식하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색을 내는 안료로는 광물질의 무기염류를 사용하였다.

 

(단청이란 말은 일반적으로 집의 벽,기둥,천장 같은 건축등의 가구부재에 여러 가지 빛깔로

그림이나 무늬를 그려 놓은 것 또는

 그 일을 가리키고 있으나, 좀 더 넓은 의미로서는 조각 형상이나 공예품 등에 채화(彩畵)하는 것과

서(書),회(會),화(畵)의 개념을 통틀어 하는 말이다.)

단청을 뜻하는 용어로는 단확(丹확), 단벽(丹碧),단칠(丹칠),단록(丹綠),당채(唐彩)등이 있으며,

순조 때 궁궐의 의궤에서는 ‘단청’과 ‘단확‘이라는 용어를 주로 사용했다.

단청이란 청, 적, 황, 백, 흑의 5가지 색 즉 오방색을 기본으로 하는데 

 채색과 무늬의 사상적 배경은 음양오행사상(陰陽五行思想)과 관련이 깊다.

        색 깔      방위          오행     계절        신수(동물)
청(靑)    동(東)        木        봄           청룡
적(赤)    남(南)         火       여름        주작
백(白)    서(西)        金        가을        백호
흑(黑)    북(北)        水        겨울        현무

황(黃)    중앙(中央)  土     土用-환절기

 


박공부의 낙관처럼 보이는 '囍'를 자세히 보면 검은 부분이 뚫려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단순한 장식이 아닌 통풍기능을 하고 있다.

조상들의 지혜가 작은 곳에서도 묻어남을 알 수 있다.

 

1917년 화재로 소실된 것을 1920년에 복구하면서 경복궁 강녕전을 옮겨서

 서양식으로 꾸며서 원래의 희정당과도 다르고 경복궁 강녕전과도 다른 모습이다.

하지만 '강년'이라는 글자를 새겨둬서 강녕전에서 가져온 것임을 표시해 두었다.

            서쪽에 지붕 측면에는 '녕'자가, 동쪽편엔 '강'자가 새겨져있다.

 

희정당 측면

 

 

 희정당옆 행각과 창고

 

 

대조전大造殿과 경훈각景薰閣  

 

선평문(宣平門)

'선평문(宣平門)'은 대조전의 남쪽에 있는 정문이다, 희정당과 통한다,

높은 계단 위세 세워져 있는데 이는 왕비의 침전인 대조전을 함부로 불수 없게 하려는 의도를 담고있다.

선평은 '화평을 세상에 펼친다'라는 의미이다

 

대조전 (大造殿: 보물 816호)
대청마루를 가운데 두고 왕비의 침전인 서온돌과 임금의 침전인 동온돌로 나뉘어진다.
경복궁의 강녕전, 교태전, 그리고 창경궁의 통명전에서 보여지는 것 처럼

           용마루가 없는 전각들은 대부분 왕 또는 왕비의 침전으로 쓰였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러나 이것이 '용으로 상징되는 왕의 침소에 용마루가 올라갈 수 없기 때문'이라는 설은 전해지는 속설일 뿐

확인할 길이 없다.

 

계단위로 올라가면 흥복헌(興福軒)이 있다

                         복을 일으켜준다’는 뜻의 ‘흥복헌(興福軒)’은 대조전의 동익각(동쪽날개에 해당하는 건물)이며

이곳은 어전회의장소로도 사용되었던 곳이다. 바로 이곳에서 한일합방이 결정되었던 역사적인 장소이기도 하다.

당시 순종의 비인 순종효황후가 병풍 뒤에서 어전회의 이야기를 듣고 옥새를 치마폭에 감추고,

조약을 막고자 궁궐을 뛰쳐나와 도망쳤지만 얼마 가지 못해 잡혔다는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다.

그리고 그 어전회의의 주인공이었던 순종황제가 운명했던 장소이기도 하다.

(참고로.. 성종, 인조, 효종 세 임금께서도 여기서 승하하셨다고 한다...) 

 

 

 

대조전 해시계

  

대조전 내부 가구

 

조선시대 마지막 황후인 순정황후가 사용하던 침대 

 

 

 

 

황후 욕조

 

 

 


황후 세면기

 

 

 

 

대조전과 경훈각 사이에 수라간이 있다

유리문과 흰 타일이 마감한 것으로 근대화의자취를 엿볼수 있다.

수라관은 궁궐의 부엌으로 사용되었는데,

우리가 잘 알고있는 장금이가 활동했던 곳이다.

이건물은 대조전과 복도로 연결되어 있어 있어 비나 눈이 올때는 젖지않고 이동할 수 있었다


새모양의 빗물받이


?

 

 

 

 

 

 

 

 

 

 

 

 

 

 

 

 

 

 

 

 

 

대조전 행각

 

 

경훈각(景薰閣)

대조전 뒷마당의 서쪽에 있는 건물이다.

동쪽에는 집상전(集祥殿)이 있고 서쪽에는 경훈각이 있었는데

               집상전(集祥殿)은 화재로 소실된 후 복구되지 않아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현재는 단층건물로 대조전의 뒤편에 위치하며 대조전과 복도로 이어져 있다.

하지만 <동궐도>에 나타난 그림과 <궁궐지>의 기록에 의하면 원래 대조전 뒤편에 위치하며

앞마당에 어정(御井)을 두고, 행각으로 대조전과 이어져 있었다.

경훈각은 세조 7년(1461)에 전각 명칭을 바꿀 때에 누상을 징광루,

누하를 광세전이라 하였으므로 그 이전부터 2층 건물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지붕은 선정전과 더불어 초록색으로 칠해져 있어 '청기와'를 얹고 있던 매우 화려한 모습이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이 경훈각에는 선조(宣祖, 1552~1608년)가 명나라 신종(神宗, 1563~1620년)에게서 받은 망의를 보관하였고

명나라 마지막 황제인 의종(毅宗,1610~1644년)의 어필을 새긴 편액이 걸려 있기도 하였다.

영조 때는 중전이 승하하자 대렴(大殮))을 행한 시신을 이 곳으로 받들어 옮겼다는 기록이 있다.

 

 

당시 징광루에서 내려다 보는 구중궁궐의 풍경 또한 대단했던 것 같다.

순조는 친히 '징광루시(澄光樓詩)'를 지어 다음과 같이 읊고 있다.

"...원근을 조망하니 초목이 새로워 드높은 왕도에 서광이 감돈다....

누각 주렴을 활짝 걷으니 궁전에 햇빛 높아 맑은 향기 흐른다"

 

순조는 또한 '징광루명(澄光樓銘)'을 지어 "...가을 겨울엔 각(閣)에 머물고, 봄 여름엔 누(樓)에 머무니,

사계절 동안 머물기는 이 누각이 제일이다"며 이곳에서의 생활을 예찬했다.

하지만 1917년 대조전 일곽의 대화재로 화려하고 웅장한 경훈각과 징광루는 잿더미가 되고,

경복궁의 만경전(萬慶殿)을 헐어다 지금의 단층으로 재건되고 만다.

현재 경훈각의 서쪽과 북쪽에는 재건이후 원래 궁중 화장실과는 약간 다른

서양식으로 개조된 궁중화장실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정면 9간, 측면 4간의 단층 건물이며 초익공계의 몰익공 양식이다.

 

 

 

 

왕과 왕비의 화장실, 매화틀이 드나들곳이다.

왕과 왕비가 용변을 보고나면 내의원들은 매화를 만져보고, 먹어보며 건강을 검진했다고 한다.

창덕궁 대조전은 1917년 화재로 인하여 1920년에 중수되었다.

중수되면서 신식목욕탕, 세면실 그리고 화장실이 생겼다.

 현재 화장실은 4개가 있다. 대소변을 구별하여 만든 두 칸의 화장실이 변기는 신식이나 수세식이 아니고

매우틀의 형식으로 밑에서 받아내게 되어 있다. 故 金命吉 상궁이 생전 하던 말씀에 의하면,

왕의 매우틀이 편전(선정전)과 안사랑(흥복헌)과 침실(동온돌) 세곳에 하나씩 있었다고 하니,

이 화장실은 아마도 왕비가 낮에만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경훈각의 아궁이

왕의 처소 아궁이에는 숯을 사용하였다고 한다.

 

경훈각 앞 마당에 있는 어정

대조전에 거처하던 왕비가 길어다 먹던 권세 높은 우물

 

 

 

 대조전 후원

대조전 화계굴뚝은 벽돌을 쌓아 만들었으며

            문양을 확대해보면 송학과 송록이 새겨진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송학과 송록은 십장생에서 독립해 나온것으로 장수를 상징 한다고 합니다.

사진상에서는 보이지 않으나 화계 굴뚝에는 송학과 송록 이외에도 쌍봉, 말, 기린 등이 새겨져 있습니다.

봉황과 기린은 나라가 태평하면 나타난다고 하는 상상의 동물로, 

최고의 상서(祥瑞)를 의미한다고 합니다.

  창덕궁에는 대조전 후원, 청향각, 희정당 후원, 낙선재 후원 등에 굴뚝이 있습니다.

  경복궁 교태전 아미산의 굴뚝이 육각형인 것과는 달리 창덕궁에 있는 굴뚝들은사각형입니다.

  또한, 경복궁의 굴뚝이 붉은 벽돌인 것과 달리 창덕궁의 굴뚝들은 회색벽돌로 아올려져 차이를 보이고 있습니다.

 


담 문양


굴뚝 문양

 

 

 

 

 

 

 

 

 

 

 

 

 

 

 

 

 

 

 

 

 

 

           

대조전 후원 있는 괴석 

화계에도 괴석이 놓여있는 등, 사진의 것 외에도 곳곳에서 괴석을 살펴볼 수 있다.

이러한 괴석들은 얼핏 보기에는 길가에 널린 평범한 돌덩이로 보일 수도 있으나, 

선조들은 이 평범한 것에서 특별한 의미를 찾아내었다. 

선조들은 삼라만상 중에서도 가장 불변적이라 하여 암석을 애호하였다

자연계의 꽃과 풀이 생멸을 되풀이하고 있을 때 

바위는 모든 것을 초월해 태초의 견고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벗 삼을 가치가 있다고 믿었다.

정원을 조성할 때 가능하면 바위를 본래 모습대로 정원에 포함시키려 했고 그럴 상황이 못 되면 괴석을 옮겨놓았다.

또한, 돌에 낀 이끼나 돌 위에 떨어진 낙엽에서 계절의 변화를 느끼는 등, 정원의 암석을 통해 대자연의 정취를 즐겼다.

 

 

 

 

청향각(淸香閣)과 굴뚝

            덕궁 청향각(淸香閣)은 대조전 동쪽 뒤편에 있는 건물이다.

1917년 11월 대조전이 화재로 타버리자 1920년에 경복궁의 교태전을 헐어다 복구하였는데,

이때 딸려 온 것으로 추정된다.

집상전이 1667(현종 8)년에 효종 비 인선왕후(仁宣王后)를 위하여

경덕궁(慶德宮)의 집희전(集禧殿)을 헐어다 만든 것이고

대조전 일대가 모두 왕후나 대비를 모시는 건물이므로

청향각은 집상전 혹은 대조전에 필요한 각종 물품을 보관하던 용도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청향(淸香)’은 ‘맑은 향기’또는 ‘맑고 향기롭다’는 의미이다.

 

청향각 굴뚝의 문양을 자세히 살펴보면 네 면을 돌아가며 '龍', '鳳', '皇', '貞' 등의 문자와 

토끼, 화조(花鳥), 괴석, 국화 등 다양한 그림 문양이 새겨져 있다.

문자는 회(回) 문양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동식물 문양은 네 모서리에 박쥐가 포함된 당초(덩굴무늬) 문양으로 둘러싸여 있다.

 

이 굴뚝 장식에서 흥미로운 것은 용과 봉황을 이미지가 아닌 글자로 표현해 놓았다는 점이다.

대개 용 또는 봉황은 직접 그림으로 그리는 것이 상례로, 청향각 굴뚝처럼 문자로 표현한 경우는 드물다.

'皇'은 '煌'의 옛 글자로, 불꽃이 타오르는 문양을 나타낸 것이다. 

이는 타오르는 등불처럼 임금이나 천자가 만물을 주재한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한다.

또한 '貞'자는 곧고 바름, 스스로 중시하는 원칙 또는 정조를 뜻한다.

토끼는 선계를 상징한다.

또한, 화조는 음양의 조화, 남녀 화합 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어 생활 장식 문양으로 널리 애호되었다

 

 

가정당(嘉靖堂)  


 (한국의 재발견에서 펌)


경훈각 화계 뒤편 언덕 위에

호젓하게 위치하며,

대조전을 내려보며 가정당이 서있다.

<동궐도>와 <궁궐지>, <동궐도형>에도

모두 나와있지 않아 1920년대 무렵에

덕수궁의 가정당을 이곳 대조전 후원으로

이전했을 것이라는 추정을 낳고 있다.

 

이곳 대조전 뒤편 언덕에 놓여 있음으로 인해

궁궐의 별당격이며,

'산실청(産室廳)'으로도 쓰였다고 한다.

정면 5간 측면 2간의 각기둥을 사용한

5량 겹처마 팔작지붕 형식이다.

현재는 일반인 관람이 제한되어 있어 들어가 볼 수 없다.

 

 

 어차고(御車庫) 또는 '빈청(賓廳)'

 

 

 

 

 

 

 

 

 

 

 

이곳은 현재

커피숍으로 전락해 자칫 궁궐의 일부라는 것을 모르고

지나칠수 있다.

세계문화유산이라는 자랑거리 궁궐안에

커피숍이라니....

 

,,,,,,,,,,,,,,,,,,,,,,,,,,,,,,,,,,,,,,,,,,,,,,,,,,,,,,,,,,,,,,,,,,,,,,,,,,,

 

 

현재 전시되고 있는 차량은

순종 황제와 황후가 탔던 어차(御車)인

'캐딜락(미국 G.M 社·1918년식)'과

'다임러(영국 DAIMLER 社·1914년식)'를

현대자동차 주식회사의 협조로

2001년 11월 수리·복원한 것이다.

 

현존하는 세계 유일의 모델로 알려져 있다.

(한국의 재발견에서 펌)


현재 어차고로 쓰이고 있는 이곳은

원래 빈청(賓廳)이었다.

빈청이란 대신과 비변사 당상관 등

고위관료들이 왕을 만나기 전에

잠시 머무르면서 국사를 논하던 곳이며,

 때로는 외국사신이 국왕을 접견하기 전에 대기하던 곳을 말한다.

 

<궁궐지>에 의하면 이곳은

선정전 남쪽 연영문 밖

 '비궁당(匪躬堂)'으로 표기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비궁의 뜻은 '제몸을 돌보지 않고

국가에 충성을 다한다'는 뜻으로

<주역>에서 취한 단어라고 한다.

 

이곳에 빈청이 철거되고, 차고로 둔갑된 것은

1910년 한일합방 직후로 추정된다

.....................................

 

   성정각(誠正閣)  

 

 

영현문(迎賢門)

성정각을 드러서기 위해선 영현문을 지나야 한다.

'영현'이란 '어진 이를 맞이한다'는 뜻이다. 문 이름만 보아도 세자가 공부하던 처소임을 알 수 있다

 

성정각(誠正閣)과 보춘정(報春亭)

건립연대는 확실치 않다.

다만 <조선왕조실록>을 통해 숙종 31년(1705) 성정각에 대한 기록을 처음 엿볼 수 있으나,

연구자들에 의하면 이곳 성정각이 건립된 것을 정조 연간으로 추정하고 있다.  

 <궁궐지>에 따르면 원래 이곳은 세자가 학문을 연마하며 '서연(書筵) '을 열던 곳으로 기록되어 있다.

 <동궐도>에는 현재의 모습과 유사하게 그려져 있는 것도 볼 수 있다.

 성정각의 이름과 관련해서는 순조가 지은 '성정각명(誠正閣銘)'에

 "천하의 만사는 성(誠)에서 벗어남이 없나니, 힘쓰고 힘쓰며 쉬지 않고 노력해야 한다..."고 이르고 있다.

동편은 '보춘정', '희우루' 등의 누마루로 구성되어 있다.

사진에서 보시는 바와 같이 보춘정은 성정각에 딸린 누각이다.

'보춘'은 '봄이 오는 것을 알린다'는 의미입니다. 봄은 오방 중 동쪽에 해당하며,

사계절의 시작이자 약동, 분발의 의미를 가지고 있어 동궁전에 쓰임에 적합하다고 할 수 있다.

참고로 세자가 거처하는 곳을 동궁전 또는 동궁이라 하는데 이는 해가 동쪽에서 떠오르듯이

세자는 이제 떠오르는 태양으로서 장차 왕업을 이을 존재이기에 세자의 거처를 동쪽에 위치시켰기 때문이다.

또는 봄 춘 자를 사용하여 춘궁으로도 불린다.

 

 

 

 

희우루(喜雨樓)

보춘정 건물 동면에 희우루라 쓴 편액이 걸려 있는데, 정조대왕의 글씨입니다.

이 누각을 짓기 시작할 때 비가 내리고,

누각이 완성될 당시에도 흡족한 비가 내려 이를 기뻐하여 정조대왕께서 붙인 이름입니다.

 

 

 

 

 

 

              성정각 마당에는 돌절구 모양의 석물과

남쪽 맞은 편에는 '조화어약(調和御藥)', '보호성궁(保護聖躬)'이란 현판을 건 작은 전각 등이 남아 있다.

  1920년 창덕궁을 재건하면서 원래 인정전 서편에 있던 내의원(전의사로 개칭)을

이곳으로 옮겨 내의원 용도로 사용했다.

이곳이 내의원으로 사용된것은 일제강점기 순조가 거처하던 시기였다.

 

 

 관물헌(觀物軒)

   성정각 뒷편에 있는 관물헌 역시 정확한 건립연대는 알 수 없다.

성정각과 비슷한 정조 년간에 창덕궁을 수리하면서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관물헌은 희정당, 선정각과 함께 왕의 일상 집무를 보던 공간으로 쓰였다고 한다.

              <궁궐지>에 의하면 익종으로 추존된 효명세자가 관물헌의 사계와 그 아름다움을 시(詩)로써 노래하기도 했다.

관물헌은 흥선대원군이 실질적인 권한을 행사할 시기에 이용한 듯 하며,

1884년 갑신정변 당시 개화파의 주요거점으로 '3일 천하'의 무대 되기도 한다.

정면 6간에 측면 3간이며, 초익공계의 몰익공 양식으로 겹처마의 팔작지붕이다.

 

 

 

 

 

 

 

 

 

 

집희(緝熙)

             관물헌(觀物軒) 현판 '집희(緝熙)'는 고종황제가 1864년(고종 즉위년)에 적은 어필

15세때 쓴 글씨라고 하며 '집희(緝熙)'라는 말은 '계속하여 밝게 빛난다'라는 뜻을 의미한다고 한다.

 또 이곳 관물헌(觀物軒)에서 고종과 명성황후(明成皇后, 閔妃)의 둘째아들 순종이 탄생하였다.

 

 

 

궐내각사(闕內各司)

 

 

왕실과 직접 관련이 있는 여러 관청들이 궁궐 안에 설치 되었고 이를 궐내각사 부른다.

그가운데 정치를 보좌하는 홍문관(弘文館), 건강을 보살피는 내의원(內醫院), 정신문화를 담당하는 규장각(奎章閣, 內閣),

왕의 칙령과 교서를 보관하던 예문관(藝文館)등이 중심 시설이었다.

 대부분의 건물이 일제강점기를 거침녀서 소멸되었다가 2005년 복원 되었다.

가운데로 흐르는 금천을 겨예와 경관요소로 삼았고, 여러 관청들이 밀집되면서 미로와 같이 복잡하게 구성되었다.

 

 

 

 

 

궐내각사로 가는 창덕궁 서쪽편 길

 

 

 

 

규장각 출입문 '내각'이라는 현판이 적혀 있다.

 

 

 

 

규장각奎章閣(내각)

창덕궁 궐내각사중 가장 핵심건물이다

숙종때 왕의 어제와 어필을 보관하기 위한 건물이었는데 정조대에 기존 역활외에 국내외 도서를 수집,보관하고

서적을 편찬하는 정부기관으로서 역활이 바뀌었다. 정조는 규장각을 확충하면서 창덕궁 후원에 주합루를 세우면서

그곳에 별도 규장각 현판을 달았다는 것으로 볼때 이곳은 기존 규장각 역활을 계속 했던것으로 보인다.

 

 

 검서청으로 들어가는 길

 

 

대유재 (검서청 檢書廳)

             규장각에서 서책을 교정하거나 원본과 똑같이 베끼는 일을 맡아보던 검서관들이 사무를 보는 곳

검서청은 다른 건물과는 달리 금천옆 일반 사대부들의 사랑채나 정자처럼 지어진 건물이다.

실제로 규장각 관원들이 이곳의 행각에서 근무했던 것으로 보인다.

창덕궁에 내에서도 상당히 경치가 좋은 곳에 자리하고 있다.

                        이는 집현전이 자리하고 있전 경복궁 경회루앞 수정전처럼 학자를 우대했던 당시 분위기를 말해준다.

 

 

 

책고冊庫
책을 보관하던 곳

 

 

약방(내의원)

 

 

 억석루 憶昔樓

내의원 부속건물

               억석(億昔)이라는 글자는 영조가 신농씨의 위판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도록 내의원에 명하면서  써준 현판이라고 한다.

   신농씨는  온갖풀들을 직접 먹어보고 약초 등을  개발 각종 질병등을 치료 하였고

나무로 많은 농기구를 만들어 농사를 가르치며 의약과 농업의 창시자로 알려져 있다.

'억석'은 옛날을 생각한다는 뜻이다.

신농씨의 마음을 생각하면서 질병을 치료하는 약을 잘 만들라는 의도가 담긴 이름이다

 

 

선원전(璿源殿)

 

선원전(璿源殿)(보물 제 817호)

선원전은 역대 왕들의 초상화인 어진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신성한 곳이다.
1656년(효종 7)에 경덕궁(현 경희궁)의 경화당을 옮겨 지어 창덕궁 선원전으로 삼았으나,

 1921년에 신 선원전을 후원 깊숙한 곳에 건립하여 어진을 옮겨가면서 이 일대는 폐허가 되었다.
선원전은 지금까지 남아있으나 부속건물들은 이때 없어졌다가 2005년에 복원되었다.
선원전은 9칸 규모이며, 앞면 좌우로 진설청과 내찰당을 덧붙여서 제사 의례에 사용했다.
동쪽의 양지당은 왕이 제사 전날 머무르던 어재실이다
. 

 

 

       

                                 진설청                                                    내찰당

 

 

봉모당
봉모당은 규장각의 역대 선왕의 유품을 보관하던 전각이

 

 

 보춘문(報春門)

            구선원전 앞마당의 동쪽에 나 있는 문이다.

양지당으로 통하게되어 있다. 보춘(報春)은 봄을 알린다는 뜻이다

정도준이 글씨를 쓰고 오옥진이 새겼다.



 양지당(養志堂)

             왕들이 선원전에 제사를 드리러 갈때 머물렀던 곳이기도 하고

왕들의 어진인 초상화를 보관했던 곳이기도 하다.

 

 

 양지당 행각

 

 

 만복문(萬福門)
양지당의 남문에 해당하며 남쪽 행각에 나 있다.

‘만복(萬福)’은 ‘만 가지 복’, 즉 온갖 복이라는 의미이다.

정도준이 글씨를 쓰고 오옥진이 새겼다.

 

 

 낙선재(樂善齋) 

 

 헌종은 명헌왕후에게서 후사가 없자 1847년 김재청의 딸을 경빈(慶嬪)으로 맞이하여            

중화당 동쪽에 낙선재(樂善齋),석복헌(錫福軒)수강재(壽康齋)등을 지었다.

낙선재는 헌종의 서재겸 사랑채였고 석복현은 경빈의 처소 였으며 

수강재는 수렴청정이 끝난 순원왕후를 모신 곳이었다,

헌종의 뜻에 따라 낙선재는 단청을 하지 않는 소박한 외형을 지녔으며,또한 외국 문물에대한

왕의 기호를 반영하듯 낙선재 창살무늬와 상량정의 건축 양상등에서 청나라양식을 볼수 있다,

            낙선재 현판은 청나라의 대가 섭지선의 글씨이며,

                                     대청마루 앞 주변에는 추사김정희의 스승 옹변강의 글씨가 있다

 

  장락문(長樂門)

  낙선재의 정문은 장락문(長樂門)으로 장락이란 '오래도록 즐거움이 있다'는 뜻이라 한다.

  장락문 앞에 서서 낙선재 영역을 들여다보면 한 폭의 그림이 액자에 담겨 있는 듯 하다.

  한편 장락은 신선이 살던 월궁(月宮)을 뜻하기도 하니 이는 곧 선계에 들어섬을 의미한다.

              장락문 현판은 '대원군장(大院君章)'의 낙관이 찍혀있는 것으로 보아 흥선대원군이 썼음을 알 수 있다.

 

           

   낙선재(樂善齋)

    원래는 창경궁 영역에 속해 있었으나 현재는 창덕궁 영역에 속해있다.

    낙선재는 <승정원일기>와 낙선재 상량문을 통해 헌종 13년(1847)에 건립되었음이 확인되었다.

원래 낙선재는 국상을 당한 왕후나 후궁들을 위해 지어진 전각이다.

현재 낙선재 구역은 낙선재와 석복헌, 수강재와 그 부속건물로 이루어졌다.

1997년 낙선재에 지었던 왜식 건물을 없애고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1917년 대조전 일곽의 대화재로 인해 순종이 잠시 낙선재에 머물기도 했으며,

1926년 대조전에서 순종이 승하하자 순종의 비인 순정효황후 윤비(尹妃)가 여생을 보내기도 했다.

또한 1963년 영왕(英王), 영왕비 이방자 여사, 고종과 엄비의 소생인 덕혜옹주가 함께 귀국하여

이곳 낙선재에서 말년을 보내기도 했다.

 특히 영왕은 의식불명상태에서 귀국한 후 7년여 병원생활을 하다가

1970년 임종직전 이곳 낙선재로 옮겨와 타계하고 만다.

그뒤 1989년에는 덕혜옹주와 이방자 여사 역시 모두 이곳 낙선재에서 같은 해에 차례로 타계하고 만다.

 

대청마루와 온돌방 앞에는 툇마루가 있어서 걸터 앉아 있을수 있도록 하였다.

툇마루는 복도역활을 하며 행랑채와 안채인 석복헌과 연결되어 있다

기주에 쓴 주련의 글씨는 추사김정희 스승인 청나라 명필가 옹방강이 쓴 글씨라고 한다.

 

낙선재 온돌방


낙선재 문살

낙선재 대청

 


낙선재 툇마루

 

낙선재 우물

 

          

 낙선재 편액은 당시 중국의 뛰어난 명필가 섭지선이 썼다.

 

 

         

 낙선재에서 석복헌으로 들어가는 중문

 

  

 석복헌(錫福軒)

                 낙선재가 사랑채에 해당한다면 석복헌은 안채인 셈이다. 살림살이에 요긴한 시설이 마련되었다.

마치 여염집 같은 분위기 이다.

헌종이 사랑한 김씨는 조촐한 성격이었나 보다 궁정의 호사스러운 생활보다

오히려 여염집을 닮은 이런 질박한 집에 살기를 염원해던 듯이 느껴진다.

           마지막 왕손인 이구씨가 결혼하였던 외국인 여인이 한동안 이집에 살았다.

편의 따라 유리창 문이 등장하였고 처마 끝에 양철의 보첨이 설치되기도 하였다. 지금은 없어졌다.

 

 

 

 석복헌 마루 난간의 조롱박 조각은 다산을 상징한다.

           

 

낙선재와 석복헌 사이의 담장, 거북무늬는 다산과 장수를 의미

 

  

  수강재(壽康齋)

                          대왕대비 처소로 마련된곳으로  왕비의 처소 석복헌과 마루로 연결 되어 있다.

              수강재는 가운데 2칸 대청마루와 양쪽에 온돌마루를 두고 있는 구조이다.

 

 

 

 수강재 대청마루와 툇마루

 

 

  낙선재 후원 만월문

 

 

   낙선재 후원

 

 

낙선재 후원의 굴뚝

 

 

 

 

 상량정(上凉亭)

1908년경 융희년간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동궐도형>에 보면 평원루(平遠樓)라는 이름의

육각정으로 그려져 있으나,

현재는 상량정으로 이름이 바뀌어 있다.


 


낙선재에서 종묘로 향하는 길에 작은 정자가 있다

뒷담 너머로 율곡로가 있고 종묘로 통하는 길이 있다

.

.

.

.

.

이어서

창덕궁 2편

'창덕궁의 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