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궐도>보는 창경궁
동궐도는 국보 249호이다.
| |||||||||
|
홍화문(弘化門) 영역
홍화문(弘化門)보물 384
홍화문은 창경궁의 정문이다.
담장 좌우에 십자각을 두었으며, 다른 궁궐의 정문과는 달리 동향을 하고 있다.
성종 15년(1484)에 건립되었으나 임진왜란 중에 불에 탄 뒤 광해군 8년(1616)에 중건된 것이 현재까지 이르고 있다.
건물의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2칸이며, 다포계 우진각 지붕이다.
홍화문의 우측에 있는 계단으로 이층의 루(樓)로 올라갈 수 있는데,
영조 25년(1749) 임금이 세자와 함께 홍화문의 루에 올라가 빈민을 구휼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현재 홍화문은 보물 384호로 지정되어 있다.
옥천교와 명정문 영역
옥천교(玉川橋)보물 386
궁궐을 들어서면 명당수(禁川) 위에 놓인 돌다리를 지나 법전으로 들어 갈 수 있도록 조성되었는데,
이 돌다리를 일반적으로 금천교(禁川橋)라 한다.
금천교는 궁궐마다 조금씩 이름이 다른데, 창덕궁은 금천교(錦川橋)라 하였고,
창경궁은 옥천교(玉川橋)라 부른다. 옥천교는 창경궁 창건 당시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무지개 모양의 두 개의 홍예, 네 개의 석수(石獸)가 있고,
홍예 사이에 남쪽과 북쪽 양면에 두개의 귀면이 양각되어 있다.
법전으로 향하는 다리 바닥면은 삼도(三道)라고 불리우는 세개의 구획으로 나뉘어져 있다.
가운데를 어도(御道)라 하였는데 이곳은 왕만이 다닐 수 있었고,
좌우의 길보다 폭이 넓고 약간 높게 만들어져 신분사회의 위계를 엿볼 수 있다.
옥천교를 중심으로 남북으로 명당수인 금천이 흐르며, 두 개의 수각(水閣)이 각각 설치되어 있다.
현재 옥천교는 보물 386호로 지정되어 있다.
명정문(明政門)보물 385호
광해군 8년(1616)에 중건된 것이 현재에 이르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건물의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2칸이며, 건물의 양쪽은 행각(行閣)으로 이어져 있다.
특이한 점은 명정문의 중심축이 명정전의 동서 중심축선상에 정확히 일치하지 않고,
남쪽으로 약 1.2미터 벗어나 있다는 것이다. 때문에 명정전을 둘러싼 행각과 조정마당이 정확한 방형을 이루고 있지 않다.
옥천교에 서서 명정전의 중심축선을 바라보면 이를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중심축을 일치시키지 않은 것은 의도적으로 계산된 것이라 할 수 있으나, 그 이유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명정문과 명정전 사이에 조정을 두고 둘레에 행각을 두르고 있다.
이 행각은 일제시기에 창경원이 조성되면서 일부가 철거되는 수난을 겪기도 했으나 1986년 다시 복원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행각의 동쪽에는 명정문, 남쪽에는 광정문(光政門),
북쪽에는 영청문(永淸門)이 설치되어 있으며, 현재 명정문과 둘레의 행각은 보물 385호로 지정되어 있다.
명정문 행각
명정전 영역
명정전(明政殿)국보 226호
명정전은 창경궁의 법전(法殿)으로 궁궐 내에 으뜸 가는 전각이다.
명정전을 중심으로 명정전 앞 조정(朝廷)에서는 즉위식, 조하의식, 과거시험, 각종 궁중연회 등이 베풀어지기도 했으며,
그 광경은 현재까지 남아 전하고 있는 여러 궁중기록화를 통해 알 수 있다.
이처럼 명정전에서 주로 공식적인 큰 행사가 많이 거행된 것은 궁궐에서 가장 중요한 의식의 공간으로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명정전은 현재 남아 있는 궁궐의 법전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임진왜란 때 왜군에 의해 불타 없어진 것을 광해군 8년(1616)에 중건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1820년대에 그려진 <동궐도>에 나타난 명정전 조정의 모습에는 어도만 있고 품계석이 없는 것을 알 수 있다.
명전전앞 월대에서 바라본 명정문
명정전은 두 단의 월대 위에 정면 5칸, 측면 3칸 규모의 단층으로 지어졌다.
월대에는 삼도에 맞추어 계단이 놓여져 있으며, 가운데 계단에는 봉황이 새겨져 있는 답도가 설치되어 있다.
월대의 양쪽에는 항상 화재를 경계하는 주술적 상징물로써 '드므'가 놓여져 있다.
봉황이 새겨져 있는 답도
박석
미끄러짐을 방지하게 위하 여 면을 거칠게 하였다.
명정전 내부 바닥에는 전벽돌이 깔려 있고, '일월오봉병'을 두른 용상 등이 놓여져 있다.
<궁궐지>와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이곳 명정전에서 인종(1544)이 면복을 갖추고 즉위하여 하례를 받았으며,
명정전이란 전각 명칭은 창건 당시 의정부 좌찬성 서거정이 명을 받들어 지어 올렸다고 한다.
현재 명정전은 국보 226호로 지정되어 있다.
저 문살을 만드느라 목공의 손은 얼마나 섬세하고 인내했을까.
창경궁 명정전은 현재 남아있는 다른 궁궐의 법전 양식과는 달리 창호의 아랫부분을 전벽돌로 쌓아 올린 점이 특이하다.
|
![]() |
문정전 영역
|
새들로 부터 단청를 보호하기 위해 그물을 씌워 두었다.
|
문정전(文政殿)
문정전은 창경궁의 편전이다. 편전은 왕의 집무실에 해당하며, 정면 4칸, 측면 3칸의 규모로 되어 있다.
문정전의 전각 명칭은 명정전과 마찬가지로 창건 당시 의정부 좌찬성 서거정이 명을 받들어 지어 올렸다.
임진왜란의 병화를 겪고 광해군 때 중건되었으나, 일제에 의해 창경원으로 조성되면서 헐리는 수난을 겪기도 했다.
현재의 문정전은 1984년 시작된 창경궁 발굴작업을 토대로 1986년 재건한 것이다.
한편 문정전은 명정전이 동향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명정전을 등지고 남향을 하고 있는 것이 특이하다.
이와 관련해 광해군 당시에도 문정전 중건과 관련하여 명정전과 같이 동향을 하자며 논란이 있었으나
"문정전을 명정전과 같이 동향으로 병립하면 옳지 않다(광해군일기)"며 현재와 같이 남향으로 짓게 된다.
1820년대에 그려진 <동궐도>에 의하면 문정전 앞으로 복도식 천랑이 이어져 있음도 알 수 있다.
'사도세자' 이야기
|
1762년 5월 13일 문정전 앞뜰에서는 역사적인 비극적 사건이 벌어지게 되는데 당시 집권 세력이었던 노론은 어럴적부터 노른을 싫어했던 세자가 대리청정을 시작하자 영조에게 온갖 모략을 고했다고 한다.
노론의 세력이었던 처가와 누이 화완옹주등이 이에 합세를 하였고 생모 영빈이씨가 이날 유언비어를 고하였고 결국 영조는 세자에게 자결을 명하였다고 한다.
문정전 앞뜰에 놓인 커다란 뒤주속에 갇혀 한여름의 더위와 허기로 신음하던 세자는 28세의 짧은 생을 비참하게 마감하게 된다. 영조는 세자의 죽음후 그를 애도한다는 의미로 '사도'라는 시호를 내렸다고 한다. |
문정전 내부
이곳에서 어전회의를 하였다고 합니다.
빈양문
빈양문(賓陽門)
![]() |
빈양문은 외전과 내전 공간을연결하는 통로에 있는 문이다. 빈양문을 들어서면 왕의 일반 생활 공간이기 때문에 왕의 가족이나 특별한 용무를 제외하고는 출입이 엄하게 통제되었다.
현재 빈양문은 일제에 의해 강제 철거되었던 것을 1984년 발굴을 통해 1986년 복원한 것이다.
숭문당 북쪽에 연접되어 있는 이 문은 치조공간(외전)과 연조공간(내전)을 연결하는 통로의 개폐 기능을 갖는 문으로 명정전의 뒷면중앙 어칸 앞으로 설치된 복도를 따라가다 이 문을 나서면 바로 내전으로 들어서게 되며 북쪽으로 함인정, 경춘전,환경전이 눈에 들어온다. 이 문은「궁궐지」에 간단한 규모가 기록되어 있다.
|
숭문당 영역
숭문당(崇文堂)
창경궁 창건 당시에는 숭문당이란 이름을 확인할 수 없지만, 광해군 때 창경궁을 중건하면서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숭문당은 '유학을 숭상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고 전한다.
이처럼 숭문당은 이름에 걸맞게 왕과 신하가 학문을 논하는 '경연'에 주로 쓰인 건물이다.
뿐만 아니라 신하들과 국사를 논하는 장소이기도 했다.
특히 영조는 숭문당에서 태학 유생을 접견하거나, 시험을 실시하고 합격자를 만나보기도 했다.
현재의 숭문당은 순조 30년(1830)에 창경궁 내전에 큰불로 인해 그때 소실된 것을 순조 34년에 다시 지은 것이다.
밖에 걸려있는 '숭문당' 현판과 내부에 걸려있는 '일감재자(日監在玆)'란 편액은 영조의 어필이다.
숭문당은 정면 4칸, 측면 3칸의 익공계 양식에 팔작지붕으로 지어졌다.
외전지역 안에 있는 건물임에도 격을 낯추어 서까래만 설치하고
부연을 달지 않은 간결한 홑처마 형식을 취하고 있는 점이 특이하다.
|
영조의 어필 |
숭문당 문살 |
숭문당아궁이 |
관천대(觀天臺) 영역
관천대(觀天臺) 보물 851호
관천대는 숙종 14년(1688)에 조성된 것으로,
본래는 창덕궁 금마문 밖에 있었던 것을 일제 시기에 현재 위치로 옮겨 놓은 것이다.관천대에는 소간의(小簡儀)를 설치하여 천문을 관측하는데 쓰였다. 현재 보물 851호로 지정되어 있다.
함인정과 경춘전 화경전 일대
함인정(涵仁亭)
<궁궐지>에 의하면 현재 함인정 자리에는 성종 때 세운 인양전(仁陽殿)이 있었다고 한다.
이괄의 난 당시에 없어지고 인조 11년(1633) 인경궁의 함인당을 헐어 함인정을 지었으나,
순조 때 큰 불로 다시 없어진 것을 순조 34년에 재건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함인정 내부에는 4개의 편액에 '귀거래사'를 노래했던 시인 도연명의 시가 걸려있다.
5언절구로 되어있는 이시는 사계절의 묘미를 노래한 것으로, 편액 또한 계절별 방향에 맞게 걸려있다.
<궁궐지>에 의하면 함인(涵仁)의 뜻을 '해동(海東)의 만 가지가 인의(仁義)에 흠뻑 젓는다'고 이르고 있다.
함인정에서는 크고 작은 접견행사가 있었는데, 영조의 경우 이곳에서 과거 급제자들을 직접 만나보기도 했다고 한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양식을 갖추었으며,
마루는 두 단으로 만들어져 있어 왕이 자리하는 마루는 그 높이를 다르게 하여 위계를 나타내고 있다.
또한 천장도 격식에 따라 왕이 자리하는 곳에는 우물천장을, 그 이외의 곳에는 연등 천장을 사용하고 있다.
|
함인정 내부에는 4개의 편액에 '귀거래사'를 노래했던 시인 도연명의 시가 걸려있다. 5언절구로 되어있는 이시는 사계절의 묘미를 노래한 것으로, 편액 또한 계절별 방향에 맞게 걸려있다.
春水滿四澤 (東) 봄 물은 못마다 가득히 차고
마루는 두 단으로 만들어져 있어 왕이 자리하는 마루는 그 높이를 다르게 하여 위계를 나타내고 있다. 또한 천장도 격식에 따라 왕이 자리하는 곳에는 우물천장을, 그 이외의 곳에는 연등 천장을 사용하고 있다.
|
내부에는 도연명의 '사시'가 계절별로 방향에 맞추어 주련으로 걸려있다.
春水滿四澤 (東) 봄 물은 못마다 가득히 차고 |
夏雲多奇峰 (南) 여름 구름 묘한 봉우리 많기도 하다 |
秋月揚明輝 (西) 가을 달은 높이 떠 밝게 비취고 |
冬嶺秀孤松 (北) 겨울 고개 솔 한 그루 아름답구나 |
함인정앞 고목
환경전(歡慶殿)
환경전은 성종 15년(1484)에 건립되었으며,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것을 광해군 8년(1616)에 중건하였으나
인조 2년(1624)에 '이괄의 난' 때 다시 소실되어 곧 중건하였다.
그 후 순조 30년(1830)의 큰불로 또다시 소실되었던 것을 순조 34(1834)년에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중종(1544)이 이곳 소침에서 승하했고, 철종대에 이르기 까지 주로 빈전 등의 용도로 많이 쓰였다.
헌종에 의해 훗날 익종으로 추존된 효명세자의 빈궁 역시 이곳 환경전에 차려지기도 했다.
건물의 정면 7칸, 측면 4칸의 규모에 팔작지붕 양식으로, 경춘전과 마찬가지로 내전의 중요한 건물로 쓰였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