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 한쪽 비워둔다면

photostory-宮

창경궁

kyeong~ 2013. 6. 20. 00:02

 

 

 

 

 

 

<동궐도>보는 창경궁

동궐도는 국보 249호이다.

 

 

 

 

 

■ 궁궐 개요

  사적 123호
  소 재 지 : 서울시 종로구 와룡동 2-1
  창건시기 : 1484년 (성종 15년)
  지정 문화재 현황
  - 국보 : 명정전(226호)
  - 보물 : 홍화문(384호), 명정문과 행각(385호), 옥천교(386호), 통명전(818)호,
풍기대(846호), 관천대(851호)
  현 면 적 : 6만5천평 (222,657.9㎡)

 

 

 

 

홍화문(弘化門) 영역                                                       

 

 

 

 

홍화문(弘化門)보물 384

홍화문은 창경궁의 정문이다.

담장 좌우에 십자각을 두었으며, 다른 궁궐의 정문과는 달리 동향을 하고 있다.

성종 15년(1484)에 건립되었으나 임진왜란 중에 불에 탄 뒤 광해군 8년(1616)에 중건된 것이 현재까지 이르고 있다.

건물의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2칸이며, 다포계 우진각 지붕이다.

 홍화문의 우측에 있는 계단으로 이층의 루(樓)로 올라갈 수 있는데,

영조 25년(1749) 임금이 세자와 함께 홍화문의 루에 올라가 빈민을 구휼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현재 홍화문은 보물 384호로 지정되어 있다.

 

 

옥천교와 명정문 영역                                                   

 

                 옥천교(玉川橋)보물 386

     궁궐을 들어서면 명당수(禁川) 위에 놓인 돌다리를 지나 법전으로 들어 갈 수 있도록 조성되었는데,

     이 돌다리를 일반적으로 금천교(禁川橋)라 한다.

금천교는 궁궐마다 조금씩 이름이 다른데, 창덕궁은 금천교(錦川橋)라 하였고,

창경궁은 옥천교(玉川橋)라 부른다. 옥천교는 창경궁 창건 당시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무지개 모양의 두 개의 홍예, 네 개의 석수(石獸)가 있고,

홍예 사이에 남쪽과 북쪽 양면에 두개의 귀면이 양각되어 있다.

법전으로 향하는 다리 바닥면은 삼도(三道)라고 불리우는 세개의 구획으로 나뉘어져 있다.

가운데를 어도(御道)라 하였는데 이곳은 왕만이 다닐 수 있었고,

좌우의 길보다 폭이 넓고 약간 높게 만들어져 신분사회의 위계를 엿볼 수 있다.

옥천교를 중심으로 남북으로 명당수인 금천이 흐르며, 두 개의 수각(水閣)이 각각 설치되어 있다.

현재 옥천교는 보물 386호로 지정되어 있다.

 

 

 

 

 

 

명정문(明政門)보물 385호

 광해군 8년(1616)에 중건된 것이 현재에 이르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건물의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2칸이며, 건물의 양쪽은 행각(行閣)으로 이어져 있다.

 특이한 점은 명정문의 중심축이 명정전의 동서 중심축선상에 정확히 일치하지 않고,

 남쪽으로 약 1.2미터 벗어나 있다는 것이다. 때문에 명정전을 둘러싼 행각과 조정마당이 정확한 방형을 이루고 있지 않다.

 옥천교에 서서 명정전의 중심축선을 바라보면 이를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중심축을 일치시키지 않은 것은 의도적으로 계산된 것이라 할 수 있으나, 그 이유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명정문과 명정전 사이에 조정을 두고 둘레에 행각을 두르고 있다.

 이 행각은 일제시기에 창경원이 조성되면서 일부가 철거되는 수난을 겪기도 했으나 1986년 다시 복원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행각의 동쪽에는 명정문, 남쪽에는 광정문(光政門),

 북쪽에는 영청문(永淸門)이 설치되어 있으며, 현재 명정문과 둘레의 행각은 보물 385호로 지정되어 있다.

 

 

 

명정문 행각

 

 

 

명정전 영역                                                                

 

명정전(明政殿)국보 226호

명정전은 창경궁의 법전(法殿)으로 궁궐 내에 으뜸 가는 전각이다.

명정전을 중심으로 명정전 앞 조정(朝廷)에서는 즉위식, 조하의식, 과거시험, 각종 궁중연회 등이 베풀어지기도 했으며,

그 광경은 현재까지 남아 전하고 있는 여러 궁중기록화를 통해 알 수 있다. 

이처럼 명정전에서 주로 공식적인 큰 행사가 많이 거행된 것은 궁궐에서 가장 중요한 의식의 공간으로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명정전은 현재 남아 있는 궁궐의 법전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임진왜란 때 왜군에 의해 불타 없어진 것을 광해군 8년(1616)에 중건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1820년대에 그려진 <동궐도>에 나타난 명정전 조정의 모습에는 어도만 있고 품계석이 없는 것을 알 수 있다.

 

명전전앞 월대에서 바라본 명정문

 

명정전은 두 단의 월대 위에 정면 5칸, 측면 3칸 규모의 단층으로 지어졌다.

월대에는 삼도에 맞추어 계단이 놓여져 있으며, 가운데 계단에는 봉황이 새겨져 있는 답도가 설치되어 있다.

월대의 양쪽에는 항상 화재를 경계하는 주술적 상징물로써 '드므'가 놓여져 있다.

 

 

봉황이 새겨져 있는 답도

 

 

박석

미끄러짐을 방지하게 위하 여 면을 거칠게 하였다.

 

 

 명정전 내부 바닥에는 전벽돌이 깔려 있고, '일월오봉병'을 두른 용상 등이 놓여져 있다.

 

 

 

<궁궐지>와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이곳 명정전에서 인종(1544)이 면복을 갖추고 즉위하여 하례를 받았으며,

 명정전이란 전각 명칭은 창건 당시 의정부 좌찬성 서거정이 명을 받들어 지어 올렸다고 한다.

현재 명정전은 국보 226호로 지정되어 있다.

 

 

저 문살을 만드느라 목공의 손은 얼마나 섬세하고 인내했을까.

 

창경궁 명정전은 현재 남아있는

다른 궁궐의 법전 양식과는 달리

창호의 아랫부분을 전벽돌로 쌓아 올린 점이 특이하다.

 

 

 

 

 

문정전 영역                                                                     

 

 

 

 

 

 

 

 

새들로 부터 단청를 보호하기 위해

그물을 씌워 두었다.

 

 

 

 

 

 

 

 

 

문정전(文政殿)

문정전은 창경궁의 편전이다. 편전은 왕의 집무실에 해당하며, 정면 4칸, 측면 3칸의 규모로 되어 있다.

문정전의 전각 명칭은 명정전과 마찬가지로 창건 당시 의정부 좌찬성 서거정이 명을 받들어 지어 올렸다.

임진왜란의 병화를 겪고 광해군 때 중건되었으나, 일제에 의해 창경원으로 조성되면서 헐리는 수난을 겪기도 했다.

 현재의 문정전은 1984년 시작된 창경궁 발굴작업을 토대로 1986년 재건한 것이다.

한편 문정전은 명정전이 동향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명정전을 등지고 남향을 하고 있는 것이 특이하다.

이와 관련해 광해군 당시에도 문정전 중건과 관련하여 명정전과 같이 동향을 하자며 논란이 있었으나

 "문정전을 명정전과 같이 동향으로 병립하면 옳지 않다(광해군일기)"며 현재와 같이 남향으로 짓게 된다.

1820년대에 그려진 <동궐도>에 의하면 문정전 앞으로 복도식 천랑이 이어져 있음도 알 수 있다.

 

'사도세자' 이야기

 

 

 

 

 

 

 

 

 

 

 

 

 

 

 1762년 5월 13일

문정전 앞뜰에서는 역사적인 비극적 사건이 벌어지게 되는데 당시 집권 세력이었던 노론은 어럴적부터 노른을 싫어했던 세자가 대리청정을 시작하자 영조에게 온갖 모략을 고했다고 한다.

 

노론의 세력이었던 처가와 누이 화완옹주등이 이에 합세를 하였고 생모 영빈이씨가 이날 유언비어를 고하였고 결국

영조는 세자에게 자결을 명하였다고 한다.

 

문정전 앞뜰에 놓인 커다란 뒤주속에 갇혀 한여름의 더위와 허기로 신음하던 세자는 28세의 짧은 생을 비참하게

마감하게 된다.

영조는 세자의 죽음후 그를 애도한다는 의미로

'사도'라는 시호를 내렸다고 한다.

 

 

문정전 내부

                        이곳에서 어전회의를 하였다고 합니다.

 

 

빈양문                                                                

빈양문(賓陽門) 

 

 빈양문은 외전과 내전 공간을연결하는 통로에 있는 문이다.

빈양문을 들어서면 왕의 일반 생활 공간이기 때문에

왕의 가족이나 특별한 용무를 제외하고는

출입이 엄하게 통제되었다.

 

현재 빈양문은 일제에 의해 강제 철거되었던 것을

 1984년 발굴을 통해 1986년 복원한 것이다.

 

숭문당 북쪽에 연접되어 있는 이 문은

치조공간(외전)과 연조공간(내전)을 연결하는 통로의

개폐 기능을 갖는 문으로

명정전의 뒷면중앙 어칸 앞으로 설치된 복도를 따라가다

이 문을 나서면 바로 내전으로 들어서게 되며

 북쪽으로 함인정, 경춘전,환경전이 눈에 들어온다.

 이 문은「궁궐지」에 간단한 규모가 기록되어 있다.

 

                                      

 

 

숭문당 영역                                                                                    

 

 

숭문당(崇文堂)

                창경궁 창건 당시에는 숭문당이란 이름을 확인할 수 없지만, 광해군 때 창경궁을 중건하면서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숭문당은 '유학을 숭상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고 전한다.

 이처럼 숭문당은 이름에 걸맞게 왕과 신하가 학문을 논하는 '경연'에 주로 쓰인 건물이다.

뿐만 아니라 신하들과 국사를 논하는 장소이기도 했다.

특히 영조는 숭문당에서 태학 유생을 접견하거나, 시험을 실시하고 합격자를 만나보기도 했다.

현재의 숭문당은 순조 30년(1830)에 창경궁 내전에 큰불로 인해 그때 소실된 것을 순조 34년에 다시 지은 것이다.

 밖에 걸려있는 '숭문당' 현판과 내부에 걸려있는 '일감재자(日監在玆)'란 편액은 영조의 어필이다.

숭문당은 정면 4칸, 측면 3칸의 익공계 양식에 팔작지붕으로 지어졌다.

외전지역 안에 있는 건물임에도 격을 낯추어 서까래만 설치하고

부연을 달지 않은 간결한 홑처마 형식을 취하고 있는 점이 특이하다.

 

   영조의 어필

 

 

 

숭문당 문살

 

숭문당아궁이

 

 

관천대(觀天臺) 영역                                              

 

 

관천대(觀天臺) 보물 851호

관천대는 숙종 14년(1688)에 조성된 것으로, 본래는 창덕궁 금마문 밖에 있었던 것을 일제 시기에 현재 위치로 옮겨 놓은 것이다.

   관천대에는 소간의(小簡儀)를 설치하여 천문을 관측하는데 쓰였다. 현재 보물 851호로 지정되어 있다.

 

 

함인정과 경춘전 화경전 일대                                      

함인정(涵仁亭)

 <궁궐지>에 의하면 현재 함인정 자리에는 성종 때 세운 인양전(仁陽殿)이 있었다고 한다.

이괄의 난 당시에 없어지고 인조 11년(1633) 인경궁의 함인당을 헐어 함인정을 지었으나,

순조 때 큰 불로 다시 없어진 것을 순조 34년에 재건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함인정 내부에는 4개의 편액에 '귀거래사'를 노래했던 시인 도연명의 시가 걸려있다.

5언절구로 되어있는 이시는 사계절의 묘미를 노래한 것으로, 편액 또한 계절별 방향에 맞게 걸려있다.

<궁궐지>에 의하면 함인(涵仁)의 뜻을 '해동(海東)의 만 가지가 인의(仁義)에 흠뻑 젓는다'고 이르고 있다.

 

함인정에서는 크고 작은 접견행사가 있었는데, 영조의 경우 이곳에서 과거 급제자들을 직접 만나보기도 했다고 한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양식을 갖추었으며,

마루는 두 단으로 만들어져 있어 왕이 자리하는 마루는 그 높이를 다르게 하여 위계를 나타내고 있다.

또한 천장도 격식에 따라 왕이 자리하는 곳에는 우물천장을, 그 이외의 곳에는 연등 천장을 사용하고 있다.

 

 

 

 

 

함인정 내부에는 4개의 편액에 '귀거래사'를 노래했던 시인 도연명의 시가 걸려있다. 5언절구로 되어있는 이시는 사계절의 묘미를 노래한 것으로, 편액 또한 계절별 방향에 맞게 걸려있다.

 

春水滿四澤 (東) 봄 물은 못마다 가득히 차고
夏雲多奇峰 (南) 여름 구름 묘한 봉우리 많기도 하다
秋月揚明輝 (西) 가을 달은 높이 떠 밝게 비취고
冬嶺秀孤松 (北) 겨울 고개 솔 한 그루 아름답구나

 

마루는 두 단으로 만들어져 있어 왕이 자리하는 마루는 그 높이를 다르게 하여 위계를 나타내고 있다.

또한 천장도 격식에 따라 왕이 자리하는 곳에는 우물천장을, 그 이외의 곳에는 연등 천장을 사용하고 있다.

 

 

 

 

 

내부에는 도연명의 '사시'가 계절별로 방향에 맞추어 주련으로 걸려있다.

 

 

 

春水滿四澤 (東) 봄 물은 못마다 가득히 차고

 

 

夏雲多奇峰 (南) 여름 구름 묘한 봉우리 많기도 하다

 

 

 

 

秋月揚明輝 (西) 가을 달은 높이 떠 밝게 비취고

 

 

 

冬嶺秀孤松 (北) 겨울 고개 솔 한 그루 아름답구나

 

 함인정앞 고목

 

환경전(歡慶殿)

환경전은 성종 15년(1484)에 건립되었으며,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것을 광해군 8년(1616)에 중건하였으나

인조 2년(1624)에 '이괄의 난' 때 다시 소실되어 곧 중건하였다.

            그 후 순조 30년(1830)의 큰불로 또다시 소실되었던 것을 순조 34(1834)년에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중종(1544)이 이곳 소침에서 승하했고, 철종대에 이르기 까지 주로 빈전 등의 용도로 많이 쓰였다.

 헌종에 의해 훗날 익종으로 추존된 효명세자의 빈궁 역시 이곳 환경전에 차려지기도 했다.

건물의 정면 7칸, 측면 4칸의 규모에 팔작지붕 양식으로, 경춘전과 마찬가지로 내전의 중요한 건물로 쓰였음을 알 수 있다.

 

 

경춘전(景春殿)

경춘전은 성종 14년(1483)에 건립되었으나, 임진왜란 때 불에 타서 광해군 8년에 재건하였는데,

             다시 순조 30년에 불탔다가 순조 34년(1834)년 재건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정면 7칸, 측면 4칸의 규모의 팔작지붕 양식인 경춘전은 왕실의 전형적인 생활공간이었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역대 임금 중 정조(1752)와 헌종(1827)이 이곳에서 탄생하였으며,

 성종의 어머니인 소혜왕후 한씨(1504)와 숙종의 계비인 인현왕후 민씨(1701),

정조의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1815)가 승하한 곳이기도 하다.

그런 까닭에 정조와 그의 아들 순조의 경우 이곳 경춘전에 대한 애정과 공경이 매우 각별했다.

 

 

 

경춘전(景春殿)

<궁궐지>에 의하면 정조는 '탄생전'이란 현판을 경춘전 남문에 직접 써서 걸었다고 하며,

이곳에서 자신을 낳을 때 겪었을 어머니의 고통과 훗날 이곳에서 생을 마감한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추모하는 마음을 담아

'경춘전기' 341자를 써서 바치면서 이를 북문에 걸었다고 한다.

또한 정조는 '자신을 낳기 전날밤 꿈에 용이 이곳 경춘전에 들어왔다' 하여

이를 기념해 직접 용을 그려 경춘전 동쪽 벽에 붙이기도 했다.

훗날 이에 더욱 감동한 순조 역시 '경춘전기'를 또다시 써서 바치며 공경해마지 않았다고 한다.

말하자면 경춘전은 정조와 순조대에 걸쳐 효와 공경의 공간으로 자리잡았던 것이다.

경춘전이란 전각 명칭은 창건당시 의정부 좌찬성 서거정에 의해 지어졌으며, 현재 경춘전 현판의 글씨는 순조의 어필이다.

 

 

경춘전이란 전각 명칭은 창건당시

의정부 좌찬성 서거정에 의해 지어졌으며,

현재 경춘전 현판의 글씨는 순조의 어필이다.

 

 

 

 

 

 

 

 

 

 

 

 

 

 

 

 

 

통명전과 양화당 영역                                                   

 

통명전(通明殿) 보물 818호

통명전은 왕과 왕비가 생활하던 창경궁 침전의 대표적인 중심 건물이다.

창경궁 창건과 더불어 건립되었으며 통명전의 전각명칭 역시 성종의 명을 받든 좌찬성 서거정에 의해 지어졌다.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재건이 되고, 다시 '이괄의 난'과 정조 때 소실되기도 했다.

지금의 건물은 순조 34년(1834)에 재건된 것이다.

이처럼 창경궁의 다른 전각과 마찬가지로 소실과 재건이 거듭되었지만 통명전은

 '내전의 법전'으로 인식될 만큼 중요한 의식과 생활의 공간이었다.

선조 8년(1575) 정월에 명종의 비인 인순왕후 심씨가 이곳 통명전에서 승하했고,

영조가 정순왕후를 맞이할 당시 연회가 베풀어지기도 했다.

남쪽 정면에는 월대를 만들었고 청동제 드므를 놓았다.

이 월대에서는 정월에 왕비에게 하례를 드리는 의식이 거행되었고,

다른 궁궐과 마찬가지로 왕비의 침전으로 쓰이던 통명전 역시 지붕에 용마루가 없는 것이 특징이다.

건물의 규모는 정면 7칸, 측면 4칸이며, 현재 보물 818호로 지정되어 있다.

 

 

 

통명전은 장희빈의 이야기를 지나칠수 없다.

일개의 궁녀였던 장옥정이 숙종의 눈에 들어 후궁이 되었고

왕자를 출산하여 희빈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숙종은 장희빈이 낳은 아들을 세자로 책봉하는과정에서 인현왕후 민비를 폐위시킨다.

이같이 참담한 일은 실은 서인과 남인의 당파싸움이고 서인을 내치기 위하여 민비까지 폐위시켰다.

이에 서인들은 합심하여 남인들을 제거한다.

남인들을 등에 업었던 장희빈은 왕비까지 되었으나.서인들의 책략으로 다시 희빈으로 강등된다.

장희빈은 인현황후를 저주하기 위해 바늘을 꽂은 인현왕후꼭두각시와 동물의 시체를 인현왕후 침전인 통명전 주위에 묻는다

결국 장희빈의 간악한 행동이 발각되어 궁궐밖으로 내쳐지고 사약을 받는다

장희빈의 나이 43였다.

 

             여성들의 생활공간답게 건물 주위 역시 화계와 지당(池塘) 등을 설치하여 화려하게 꾸며 놓았다.

 

 

 

 

통명전 내부현판은 이건물을 중건한 순조가 직접쓴 글씨라고 한다.

 

통명전 내부

 

통명전의 문살 

 

통명전 후원의 연못

 

   
 

 

 

통명전 뒤편에 솟아나는 샘물을 돌로 수로를 만들어 끌어들여 돌난간을 두른 지당에 폭포처럼 떨어지게 만들어 놓았다.

지당 안에는 석분과 괴석을 심어 놓아 화려하게 장식하였으며, 지당의 가운데는 작은 돌다리도 놓았다.

이외에도 통명전 바로 뒤편에는 '열천'이 있어 항시 맑은 샘물이 솟아나도록 하였지만, 현재는 쓰고 있지 않다.

순조년간인 1820년대에 그려진 <동궐도>에는 지당과 열천의 모습은 오늘날과 비슷하나

통명전의 모습은 규모만 같을뿐 빈터와 초석만 남아 순조 34년에 재건되기 전의 모습만 보여주고 있다.

 

 

 

 

 

양화당(養和堂)

            창경궁 창건과 함께 세워졌고, 전각의 명칭 역시 성종의 명을 받들어 좌찬성 서거정이 지어올렸다.

양화당 역시 임진왜란과 '이괄의 난', 순조 30년의 대화재를 거쳐 순조 34년(1834)에 재건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궁궐지>에 의하면 명종 20년(1565) 임금이 양화당에 임어하여 독서당 문신을 친히 시험보기도 했다고 한다.

고종 15년(1878)에는 철종 비인 철인왕후 김씨가 이곳에서 승하하기도 했다.

1883년에 중건한 양화당은 대비의 침전이었지만 인조가 거처하기도 하였다.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으로 파천하였던 인조가 환궁하면서 이 곳 양화당에 처음 거처한 일로 인해

양화당은 지금도 '인조의 한숨소리'가 들리는 듯 하다.

건물의 규모는 정면 6칸 측면 4칸이며, 겹처마에 팔작지붕이다

 

양화당은 툇마루가 있어 문을 열고 밖을 내다볼수 있게 설계되어있다.

 

 

 

 

 

 

양화당앞의 우물                                                                           통명전앞 우물

 

왼쪽이 통명전 오른쪽이 양화당이다

창경궁 뒷편 후원으로 들어가는 언덕아래

국왕의 침전인 통명전과 대비의 처소인 양화당이 나란히 통명전과 양화당이 나란히 세워져 있다.

지금은 주변에 행각이나 건물들이 없지만 원래 이곳에는 후궁의 처솟를 비롯하여 많은 전각들이 들어서있던 곳이다.

 

 

영춘헌(迎春軒)과 집복헌(集福軒)                             

 

 

 

 

 

 

영춘헌(迎春軒)과 집복헌(集福軒)

            영춘헌은 창경궁 내전 건물이며 집복헌(集福軒)은 영춘헌의 서행각이다.

건립 연대는 아직 알 수 없으나, <궁궐지>에 의하면 순조30년(1830) 환경전, 경춘전과 함께 소실된 것을

순조 34년(1834) 현재 낙선재 뒤편 언덕에 있던 장남궁을 헐어다 그 재목으로 영춘헌을 재건했다고 한다.

집복헌에서는 영조 11년(1735) 사도세자가 탄생했고,

정조 14년(1790) 6월에는 순조가 이곳 집복헌에서 탄생하기도 했다.

또한 영춘헌에서는 정조가 이곳에서 거처하다가 재위 24년(1800) 6월 승하하였다.

 

1983년 동물사 본관에 있던 창경원 관리 사무소가 동물사의 철거로 인하여 이곳으로 옮겨 임시 관리 사무소로 사용되다가,

1986년 중건 공사 때 창경궁 관리 사무소를 신축 이전하였다. 이 건물은 2000년 변형된 부분을 해체 복원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영춘헌(迎春軒)

창경원 일대에 있었던 후궁들의 처소중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것이 영춘헌과 집복현이다.

그중 영춘헌은 정조가 거처했던 곳이다.

그중 영춘헌은 정조의 효심이 잘 나타나있는 곳으로 사도세자가 태어난 건물(집복현)앞에 별도의 거처를 마련하여 

만천하에 사도세자에 대한 효심을 들어내고 명예를 회복하고자 하는 의지를 들어내고자 했던 곳이다. 

 

 

 

 

 

자경전(慈慶殿)터

<궁궐지>에 의하면 자경전은정조 원년(1777)에 정조의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를 위해 건립된다.

이는 자경전과 마주 보이는 곳인 현재의 서울대학병원 자리에 사도세자의 묘궁(廟宮)인 '경모궁(景慕宮)'이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순조 21년 3월 정조 비인 효의왕후가 이곳에서 승하하기도 한다.

하지만 자경전은 지금은 사라지고 없으며 빈터만 덩그라니 남아있다.

 

언제 소실되었는지는 아직 정확히 확인된 바는 없지만, 이 자경전터에 일제에 의해 창경원으로 왜곡되던 무렵에

왜식풍의 창덕궁박물관이 세워지고 나중에 이왕가박물관(李王家博物館)으로 바뀌어 쓰이기도 했다.

해방이후 장서각, 궁중유물전시관 등으로 바뀌어 쓰이다가 1992년말 철거되어 현재 이르고 있다.

 현재 장서각을 철거할 때 남은 벽돌은 창경궁 집춘문 북쪽에 모아 놓고 각종 보수작업에 쓰이고 있기도 하다.

 

춘당지(春塘池)                                                          

풍기대(風旗臺)보물 846호

             영조 8년(1732)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풍기대는 화강암으로 만들어졌으며,

 몸체의 맨 위 부분 풍기대 구멍에 깃대를 꽂고 그 깃대에 기를 달아 '바람의 방향과 속도'를 가늠했던 기상관측기구이다.

말하자면 풍기대는 해시계, 측우기 등과 더불어 기상관측을 목적으로 궁궐에 설치되었던 과학기구인 셈이다.

농업생산력을 국가의 물적 토대로 삼았던 조선왕조로서는 날씨와 기상상태의 변화를 매우 민감하게 관찰하고 살폈던 것이다.

돌기둥에는 당초문(唐草紋)이 양각되어 있다. 현재 보물 846호로 지정되어 있다.

 

 

앙부일구

 

성종태실비(成宗胎室碑)

궁궐에서 왕손이 태어나면 그 태를 깨끗이 닦은 뒤, 태항아리에 담아 지세가 좋은 곳에 태실을 조성하였다.

태실을 조성한 봉우리를 태봉이라 하며, 종종 유사한 지명이 눈에 띄는 것도 그와 같은 이유에서다.

성종태실은 원래 경기도 광주시 경안면에 있었다.

그러나 1930년 5월 일제에 의해 전국 각지에 흩어져 있는 역대 임금의 태실을 통합 관리한다는 명목으로

지금의 서삼릉(西三陵)에 으로 옮기면서 이곳 창경궁으로 옮겨졌다.

성종은 조선 9대 왕으로 1469년 13살의 어린 나이에 즉위하여 25년 동안 재위하면서

<경국대전(經國大典)>의 반포, <동국여지승람>의 간행 등 조선시대 제도정비와 문물을 장려했다.

또한 성종의 주요업적으로 창경궁을 창건한 것을 꼽을 수가 있는데,

일제시기에 성종 태실을 이곳에 옮겨놓은 것도 그런 연관성 때문인 듯 한다.

성종은 세자궁에서 태어나, 경복궁에서 즉위하고 창덕궁에서 승하하였으며, 능은 서울시 강남구에 위치한 선능이다.

 

 

 

내전 터(內殿 址)

앞에 보이는 숲 일대에는 궁궐여성들의 처소로 가득했던 생활구역이었다.

그 가운데 요화당과 취요헌은 효종이 공주들을 위해 지었던 건물이며

통화전은 편전으로 사용되었다.

그 사이사이에 궁녀들의 작은 처소들이 많았고 어린왕자들과 관련된 건물도 섞여 있었으나

                       1830년에 일어난 화재와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이일대의 모든 내전들이사라졌다.

 

느티나무

느릅과의 낙엽교목으로 그늘이 넓어 예로부터 정자목으로 많이 사용되었으며

한자로는 괴목(槐木)이라 한다.

창경궁에서 가장 오래된 나무인데 벼락에 의해 피해를 받은바 있고 수령은 500년정도이다.

 

 

 

 

 

 

 

춘당지(春塘池)

춘당지는 원래 왕이 친히 농사(農政)의 시범을 보이며 농정을 살피던 내농포(內農圃)가 있던 곳이다.

궁궐의 후원 깊숙한 곳에 이처럼 논을 만들어 놓고 왕이 직접 농정을 살폈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조선왕조가 국가경제의 근본을 농업에 두었고 농업의 발달을 기원하면서 그 수고로움을 백성들과 함께 나눈다는 의미를 나타낸다.

연산군 시절, 춘당지 부근에 서총대(瑞蔥臺)를 짓고 놀이터로 만들려고 하였다

.그러나 중종반정으로 서총대는 철거되고 원래 모습으로 되돌려 진 후 내농포로 사용되었다.

순조대( 1820년대)에 그려진 <동궐도>에 의하면 이 일대에 1개의 연못과 11개의 논이 조성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1907년 헤이그밀사 사건을 빌미로 일제는 고종을 물러나게 한 뒤, 순종이 즉위와 더불어 창덕궁에 거처하게 된다.
그러자 일제는 순종을 '위로한다'는 핑계로 창덕궁과 이웃한 창경궁의 주요 전각을 헐고

'동물원과 식물원' 등을 조성하여 공원으로 조성하고 만다.

궁궐인 창경궁이 ‘창경원’으로 이름이 바뀌고 공원으로 사용되면서

춘당지 앞에 있던 내농포를 파내어 춘당지와 함께 큰 연못으로 만들었다.

 이곳에서 보트를 타고 놀이를 즐기던 유원지로 왜곡되어 쓰이다가,

아직 복원이 안된 채 너른 연못으로 남아 현재에 이르고 있다.


 

 

 

 순조대( 1820년대)에 그려진 <동궐도>에 의하면

이 일대에 1개의 연못과 11개의 논이 조성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창경궁 춘당지옆 장식용 탑으로 '팔각칠층석탑'

일제강점기에 만주에서 일제가 구입하여 이곳에 옮겨놓았다.

 

 

 

 

춘당지의 봄

 

 

 

 

 

 

 

식물원(植物園)

우리나라 최초의 양식 온실인 창경궁 온실은 과거 창경궁의 아픔과 수난을 말없이 들려주고 있다.

    1907년 일제가 창경궁을 창경원으로 왜곡 조성하면서

춘당지와 그 일대를 변형시키는 가운데 식물원이 세워졌기 때문이다.

설계는 일본인 후꾸바이츠토(福羽逸人)가 하고 프랑스회사에서 시공하였다.

처음에는 대온실과 돔형의 둥근지붕의 온실 두개를 세웠는데,

이는 1851년 팩스톤(J. Paxton)이 설계하였던 수정궁을 따르고 있다.

식물원은 한국전쟁 당시 반파되었으나 고쳐 사용되다가, 돔형의 온실은 철거하고 현재의 대온실만 남아있다.

현재는 남부지방 자생식물이 주로 전시되고 있다.

 

 관덕정(觀德亭)

춘당지 동북쪽 야산 기슭에 있으며 임금이 활을 쏘던 사정(射亭)이다.

인조 20년(1642)에 취미정(翠微亭)이란 이름으로 창건되었으나,

현종 5년(1664)에 지금의 이름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관덕정의 명칭 유래는 「예기(禮記)」에 "활 쏘는 것으로 덕(德)을 본다.

쏘아서 정곡을 맞추지 못하면 남을 원망치 않고 제 몸을 반성한다."라는 것에서 이름이 붙여진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서 활을 쏘았던 것으로 보여진다.

 

 

회화나무

선인문앞의 이회화나무는 <동궐도>에도 보이는 나무이다.

문정전에서 뒤주에 갇힌후 이회화나무 앞으로 옮겨진 사도세자

그 비극적인 역사를 같이 했던 나무이다.

 

 

 궐내각사터에 전각은 사라지고 까치한마리 한가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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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대궁궐 답사를 마치면서

역사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새롭게 알것 된것으로 뿌듯하다

계절이 바뀌고 여유로운 시간을 다시 마련하여

궁궐 문살 문양이나 단청무늬에 대해 다시한번 공부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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