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극을 보노라면 : “전하, 종사(宗社)를 보존하옵소서”라는 대사가 자주 나온다
'종사'라 함은 종묘사직(宗廟社稷)을 일컫는 말로서 '종묘'는 왕의 조상을 모시는 곳이고
'사직'은 땅과 곡식의 신인 사직을 못시는 곳이다.
이 두곳은 국운을 좌지우지하는 곳으로 당시 나라가 망하는 것은 곧 종사가 망하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그래서 정도전이 한양을 설계하며 경복궁을 중심으로 서쪽에는 사직을, 동쪽에는 종묘를 만들게 되었다.
종묘의 '묘'는 무덤을 뜻한 한자 '墓'가 아니라 사당을 뜻하는 '廟'를 뜻합니다.
현재 종묘는 세계문화유산으로 잘 보존되어있으며
사직단은 사직공원으로 알려져 별 중요성을 인식시키지 못하고 있는 상태다
그리고 '문묘'라고 들어보았을 것이다. 문묘는 공자를 모시는 곳으로 현재 성균관 대학교 내에 있다.
이러하듯 궁궐을 돌아보고 왕의 발자취를 알아보는데 종묘를 돌아보지 않을 수가 없다.
어느 궁궐답사보아도 더욱 경건한 마음으로 돌아보게 되었다.
2013.6.30.일
세계문화유산 '종묘' 종묘는 조선왕조의 역대 왕과 왕비 그리고 돌아가신 후에 왕과 왕비로 추존된 분들의 신주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곳으로 왕실의 사당이다. 태조는 한양 천도 후 이듬해(1395) 종묘 '정전'을 완공하였으며, 세종3년(1421)에는 모셔야 할 신주가 늘어나자 따로 영년전을 지었다. 정전에는 서쪽 1실에 모신 태조의 신주를 포함하여 총 19실 49위, 영년전에는 중앙의 태조의 위로 4대 조상들의 신주를 포함하여 총 16실 34위의 왕과 왕비의 신주가 모셔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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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문화유산 '종묘제례와 제례악'-중요무형문화재 제1호및 56호.
종묘대제봉행 종묘제례 및 제례악은 2001년 '인류구전 및 무형유산걸작'으로 유네스코 세계무형유산으로 등재, 2008년부터는 인류무형문화유산 대표목록으로 관리되고 있다. 세계문화유산인 종묘에서 개최되는 행사로 유형과 무형의 세계유산을 함께 감상할 수 있는 세계적으로 유례가 드문 문화유산이다.
종묘제례는 왕조의 조상에게 지내는 제사로 조선왕조의 제사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크고 중요한 것이었기 때문에 종묘대제(宗廟大祭)라고 한다. 고대중국에서 비롯되어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부터 고려와 조선조를 거쳐 현재에 이르기까지 유구한 역사를 이어 내려온 소중한 조상전래의 제례의식이다. 조선조에는 춘하추동 사계절과 섣달에 행하였으며 1969년 대동종약원에 의해 복원되어 지금은 매년 5월 첫째주 일요일에 봉행되고 있다. 종묘대제에는 종묘제례가 봉행되며 각 제사의례에 맞추어 경건한 분위기를 고양시키기 위한 음악과 무용으로서 종묘제례악이 따른다. 제례는 신을 맞이하는 영신례(迎神禮), 초헌, 아헌, 종헌례에 이어 음복례가 행해지고, 신을 보내 드리는 송신례(送神禮)를 갖춘 후에 축(祝)과 폐(幣)를 망료(望燎) 위에 불사르는 것으로 끝난다. 종묘제례악은 우리 고유의 음률로 왕조의 창업과 기상을 노래하고 있으며 모든 행사의 순서에 맞추어 춤과 음악이 조화를 이룬다. 엄숙한 제사 의례만큼이나 장엄미가 돋보이는 종합예술로 역사적·예술적 가치가 크며 동양에서도 드물게 남아 있는 고전음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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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대문(外大門) 일원
이번 답사에 도움 주신 한국어 문화재해설사
하마비(下馬碑)
종묘 외대문 앞 동쪽에는 비석이 하나 서 있다.
이 비(碑)에는 지차,대소인원하마비(至此,大小人員下馬碑)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여기에 이르면, 신분의 높고 낮음에 관계없이 누구든지 말에서 내려라"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하마비이다.
종묘는 신성한 곳이니 들어갈 때부터 말에서 내려 예를 다하라고 말하고 있는 이 석비는
조선의 왕들이 얼마나 정성스럽게 조상을 받들었는지 이야기하고 있다.
태종13년(1413)에 처음으로 종묘 입구에 푯말을 세웠고, 훗날 비석으로 바뀌었다.
현재 종묘 앞에 있는 하마비는 현종4년(1663)에 세운 것이다.
종묘 어정(宗廟 御井)
종묘 정문인 창엽문 앞에 보존되어 있는 우물이며
조선 역대 왕들이 종묘에 왕래할 때 이 물을 마셨다고 하여 '어정'이란 이름이 생겼다고 한다.
어정은 돌을 쌓는 방법 등으로 보아 조선 초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종묘앞 담장
주차표시는 되어 있으나 주차하기 어렵고 대중 교토을 이용하는 것이 좋다
안국역에 내려서 운현궁을 관람한후 10분쯤 걸어가면 종묘를 만날수 있다.
종묘의 자유 관람은 토요일만 허용되며
정해진 시간에 해설사을 따라 움직여야 하며
사진을 찍거나 자세한 답사는 어려운 점이 있다.
해설사의 안내를 받고 관람을 한후
토요일 시간을 내어 꼼꼼히 살펴보아도 될것이다.
외대문(外大門)
종묘의 정문, 창엽문이라도 하며 외대문에는 단청과 현판이 없다.
종묘의 정문인 외대문은 단아하면서도 검소한 느낌을 주며 세 칸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
종묘에는 외대문 이외에 종묘를 출입하는 문으로 북신문(북쪽)과 외서문(서쪽)이 있었습니다.
궁궐의 정문과는 다르게 종묘의 정문은 화려한 장식을 피하고
단청은 최소한의 색을 사용하여 붉은 색을 주로하고 녹색 칠을 하였다 .
소박한 맞배지붕으로 현판도 없이 단층으로 되어있고,
두터운 판문 윗부분에 홍살을 설치하여 종묘가 신성한 곳임을 나타내고 있다.
울퉁 불퉁한 박석으로 깔린 3줄의 길로
높은 가운데는 신이 다니는 '신로',
동쪽은 왕이 다니는 '어로',
서쪽은 세자가 다니는 '세자로'이다.
경건하고 조심스럽게 행동하라고 거친 박석을 깔았다고 한다.
이는 궁궐의 삼도와 형태가 비슷하나 의미와 기능이 다르다.
신향로는 정전 신문을 통해 묘정 월대에 난 신로(神路)에 이어지는데,
신이 다니는 길로 마련되어 신주를 종묘에 모시거나 제사를 위해 향(香), 축(祝), 폐(幣)를 들여 올 때에 이 길을 이용한다.
왕은 동쪽의 어로를,
세자는 서쪽의 세자로를 이용하여 어숙실에 이른다.
그래서 종묘를 방문 할때에는 가운데 길은 밟지 않는 것이 예이다.
망묘루(望廟樓) 일원
우리가 가꾸고 아껴서 대대손손 남겨야 할 종묘
세계문화유산이라는 표지석이 자랑스럽게 서있다.
중지당(中池塘)
종묘 안에는 세 개의 작은 못이 있는데
망묘루 앞에 있는 중지는 네모난 형태의 못 한 가운데에 둥근 모양의 섬이 하나 있는 형태다.
이것은 천원지방(天圓地方)이라 하여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지다고 믿었기에,
둥근 섬은 하늘을 상징하고 네모진 못은 땅을 상징하는 의미로서 표현되어진 것이다.
둥근 섬 가운데는 소나무를 심는 궁궐과는 달리 향나무를 심어 종묘가 제사를 지내는 장소임을 나타내고 있다
망묘루(望廟樓)
임금이 머물면서 사당을 바라보며 조상님을 추모하고 나라와 백성을 생각한다는 뜻으로 이름 지어진 건물,
임금이 종묘에 도착하면 잠시 머물러 쉬면서 선왕(先王)과 종묘사직을 생각하는 곳이다.
정면 7칸 측면 2칸으로 그중 1칸은 누마루로 되어 사분합문이 달려 있으며 종묘에서 유일하게 팔작지붕 형태를 보인다.
공민왕신당(恭愍王神堂)
이곳에는 고려왕조 31대 공민왕과 그의 왕비 노국대장공주가 함께 있는 영정(影幀)과 말을 그린 준마도(駿馬圖)가 모셔져 있다.
고려공민왕영정봉안지당(高麗恭愍王影幀奉安之堂)이라고도 한다.
조선왕조의 종묘에 고려왕조의 공민왕을 기리는 별도의 건물이 있다는 점이 특이하지만,
아마도 고려왕조의 훌륭한 왕인 공민왕이 이룩한 북방영토의 회복과 홍건적을 섬멸한 것 등의 높은 공을 기리고,
그의 훌륭한 업적을 계승한다는 뜻으로 세웠을 것이라고 추측된다.
(공민왕신당. 종묘홈페이지에서 펌)
준마도(駿馬圖) |
공민왕과 그의 왕비 노국대장공주가 함께 있는 영정(影幀) |
향대청(香大廳)입구
향대청(香大廳)
종묘제례 때 사용되는 향, 축, 폐를 보관하고, 제사에 참석하는 제관들이 제례 준비를 하며 머무르는 곳이다.
남북으로 긴 뜰을 사이에 두고 동쪽과 서쪽에 맞배지붕의 검소한 장방형의 건물이 배치되어 있다.
재궁(齋宮) 일원
담장을 따라 다섯 개의 문이 있어 각각의 문으로 드나드는 사람이 달랐음을 볼 수다
어숙실 정문
어숙실(御肅室)
외대문 안에서 삼도를 따라 나아가면 어숙실에 닿는다.
재궁(齋宮)인 이곳은 왕이 목욕재계하며,
어숙실 뜰을 중심으로 북쪽에 왕이 머무는 어재실(御齋室), 동쪽에는 세자를 위한 세자재실(世子齋室), 서쪽에는 왕이 목욕을 하는 어목욕청(御沐浴聽)이 있다. 담장을 따라 다섯 개의 문이 있어 각각의 문으로 드나드는 사람이 달랐음을 볼 수다 왕이 머무는 어재실(御齋室), 어재실 뜨락에 드므가 있고 지붕에 잡상하나가 있다.
어재실 내부
임금이 제례 준비를 하는 재궁의 내부 공간이다
세자를 위한 세자재실(世子齋室)
왕이 목욕을 하는 어목욕청(御沐浴聽)
가운데의 어재실은 임금이 머무는 곳이고 동쪽에 세자가 머물렀다. (사진:종묘 홈페이지에서 펌) |
정전(正殿) 일원
정전으로 가는 길
재궁은 정전과 영녕전으로 가기전 왕과 세자가 목욕재계를 하며 제사를 준비하기 위한 공간이다.
때문에 재궁에서 정전으로 향하는 삼로에는 신로가 없고
궁궐과 마찬가지로 정전으로 가는길에는 왕이 가운데 길을 걷는다.
판위대(版位臺)
어숙실에서 재계(齋戒)를 한 후,
제례 준비를 마친 왕은 어숙실의 서북쪽 협문(夾門)을 통해 어로를 따라 전하판위(殿下版位)에 이르러
잠시 멈추어 제례를 올릴 예를 갖춘 후,
정전의 동문을 통하여 하월대로 나아가 제사의식을 행하게 된다.
전하판위의 바로 옆 북동쪽에는 세자판위(世子版位)가 있다.
판위대는 정전 동문앞에 있다.
판위대 앞, 종묘대제 안내판
종묘대제에는 종묘제례가 봉행되며 각 제사의례에 맞추어 경건한 분위기를 고양시키기 위한 음악과 무용으로서 종묘제례악이 따른다.
제례는 신을 맞이하는 영신례(迎神禮), 초헌, 아헌, 종헌례에 이어 음복례가 행해지고,
신을 보내 드리는 송신례(送神禮)를 갖춘 후에 축(祝)과 폐(幣)를 망료(望燎) 위에 불사르는 것으로 끝난다.
종묘제례악은 우리 고유의 음률로 왕조의 창업과 기상을 노래하고 있으며
모든 행사의 순서에 맞추어 춤과 음악이 조화를 이룬다.
엄숙한 제사 의례만큼이나 장엄미가 돋보이는 종합예술로 역사적·예술적 가치가 크며 동양에서도 드물게 남아 있는 고전음악이다.
정전에 봉안된 신위
정전 동문 옆에는 수복방과 전사청이 있다
왼쪽이 수복방, 오른쪽이 전사청, 그리고 앞에는 희생대(犧牲臺)와 찬막단(饌幕壇)이 있다.
오른쪽 작은 문으로 들어가면 제사에 쓰이던 정결한 우물 제정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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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복방(守僕房)
정전 동문 옆에 담장에 잇대어 4칸의 수복방이 있는데 종묘를 지키고 청소하고 제사에 관한 일을 하던 사람들이 거처하는 곳으로 매우 소박하게 보이는 건물이다. 1칸은 문을 내어 정전의 안팎으로 쉽게 드나들 수 있게 하였다. |
찬막단(饌幕壇)
전사청 앞에는 '찬막단'과 '희생대'라는 판이 각각 놓여 있다. '찬막단(饌幕壇)'은 제례 때 쓰일 음식을 미리 검사하던 단이다. ' 희생대(犧牲臺)'는 생성대(牲省臺)라고도 부른다. 제례 때 바칠 소, 양, 돼지를 검사하는 곳이다. 제례때는 성칠제(腥七體)라 하여 소, 양, 돼지의 날고기의 일곱 부위를 각각 한 근씩 올렸다. 희생물을 잡을 때 '난도'라는 방울이 달린 큰 칼을 사용하였다. |
전사청(典祀廳)
전사청은 종묘제례에 사용하는 제사 음식을 장만하고, 제사에 필요한 여러 가지 기구들을 보관하던 곳이다.
지금의 부엌과 같은 곳으로 신주(神廚)라고도 한다.
이곳에는 제물, 제기 등을 관리하고 제사에 관한 일을 맡아 처리하던 전사관이 사용하던 방도 있었으며,
성생의식을 거친 희생을 도살하던 공간도 따로 있었다.
희생을 잡을 때는 희생을 도살하는 사람인 재인(宰人)들이 손잡이와 칼 끝에 방울이 5개 달린 난도(鸞刀)라고 하는 의식용 칼을 사용하였다.
마당을 중심으로 그 주위로 건물이 'ㅁ'자형으로 배치되어 있으며,
마당에는 제사 음식을 만들 때 사용하던 돌절구 같은 4개의 큼직한 돌이 남아 있다.
현재의 전사청 건물 규모는 조선 후기에 비해 줄어든 모습이다.
전사청(典祀廳)
수복방 옆에 있는 전사청은 'ㅁ'자형으로 배치된 구조로 종묘대제 때 쓰는 제물, 제기 외에 여러 가지 기구와 운반구를 보관하던 곳이다. |
제정
제사 음식을 준비할 때 필요한 물을 위해 가뭄에도 마르지 않도록 샘이 솟는 곳을 찾아 우물을 만들었다. 원형으로 돌을 다듬어 만든 형태의 우물이다. 드나드는 문도 따로 설치하였으며, 우물 주변을 깨끗이 정리하고 서쪽 담장 밑에 배수구를 마련하여 항상 청결을 유지하였다. |
왕은 대제례를 위해 동문으로 정전에 들어간다
남문은 신문이다
하월대는 동·서월랑 양끝에서부터 남쪽 신문 앞까지 정전 울타리 안을 가득 메운다.
크기가 동서 109m 남북이 69m로 단일 월대로는 우리나라에서 제일 크다.
정전(正殿)
정전에 들어서는 순간 감탄이 저절로 난다
단조로운 건축물이 이토록 아름다울 수 있을까
시원하게 뚫려있지만 무언가 장엄함이 가득히 울려퍼지고
이 단조로움이 자연을 한층더 가까이 어우러지게 하는 멋이 느껴지는 부분이다.
이 뜨거운 여름날 한참이나 땡볕에 있어도 발걸이 떨어지지 않는다.
종묘 안에서 가장 중심 되는 곳으로, 현재 종묘 영역은 사적 제125호, 정전은 국보 제227호로 지정되어 있다.
종묘 정전은 신주를 모신 신실 19칸, 그 좌우의 익실 각 2칸,
그리고 익실 양끝에서 직각으로 앞으로 꺾여 나와 마치 신실을 좌우에서 보위하는 듯한 형태를 취하고 있는
동월랑과 서월랑 각 5칸으로 구성되어 있다.
묘돌아가신 왕에게는 서쪽을 높은 위치로 한다는 서상제도(西上制度)에 따라
신실 19칸의 제1실인 서쪽 첫 번째 칸에 태조의 신주를 비롯하여 차례대로
태종, 세종, 세조, 성종, 중종, 선조, 인조, 효종, 현종, 숙종, 영조, 정조, 순조, 문조(추존 왕), 헌종, 철종, 고종, 순종 의 신주 19위와
각 왕의 비(妃)의 신주 30위를 합쳐 모두 49위의 신주가 19신실에 모셔져 있다.
신실 총 19칸
광해군 11칸(약400년전), 영조4칸(약300년전), 헌종4칸(약200년전)을 서쪽에서 동쪽으로 증축했으며
밖에서 보면 여러개의 방으로 이어진 것처럼 보이지만 내부에는 한개의 방으로 이루어져있다.
세월이 흐르면서 증측해 나갔는데 서쪽에 초기에 지은 건물을 보면 기둥이 배흘림기둥이고
동쪽에 조선후기에 지은 것을 보면 민흘림 기둥이라고 한다.
왕이 되었다고 해서 모두 정전에 모시는 것은 아니고
공덕을 따져 정전에 남을 지 영녕전에 옮겨질지를 결정한다고 한다.
연산군과 광해군은 폐위된 군주이기때문에 신주가 정전에 모셔져 있지 않으며
노산군이었던 단종은 숙종때 추존되면서 영녕전에 모셔졌다고 한다.
서월랑
종묘 정전은 신주를 모신 신실 19칸, 그 좌우의 익실 각 2칸,
그리고 익실 양끝에서 직각으로 앞으로 꺾여 나와 마치 신실을 좌우에서 보위하는 듯한 형태를 취하고 있는
동월랑과 서월랑 각 5칸으로 구성되어 있다.
창고로 쓰이는 서월랑은 사방이 벽체로 막혀 있다.
동월랑
제례가 있을 때 제례의 주요 공간이 되는 동월랑은
기둥과 지붕으로만 구성되어 북쪽을 제외한 세방향이 트여 있는
반면 창고로 쓰이는 서월랑은 사방이 벽체로 막혀 있다.
정전 동문에서 제관이 향축·폐와 제물을 가지고 제례를 준비하기 위해 올라가기 위한 계단이 놓여져 있다.
정전의 문을 살펴보면 발을 말아올린 것이 있는 곳이
신주를 모신 곳이며 발이 없는곳은 신주가 없다.
평소 닫혀 있는 정전의 신실 출입문은 제사 때가 되면 열린다.
신실 내부의 신주장(神主欌) 위에 편히 모셔져 있던 왕과 왕비들의 신주는 신주장 조금 앞에 마련되어 있는 신탑(神榻)으로 내어 모셔져,
후손을 만날 준비를 하게 된다.
신탑 바로 앞의 제상 위에는 60여 기의 제기(祭器)에 소, 양, 돼지 등 3가지 육류의 익힌 것과 날 것을 포함하여
곡류, 떡, 과일, 채소절임, 젓갈류 등의 정성스럽게 준비한 제사 음식이 정갈하게 올려진다.
한편 4종류의 술을 바치고, 축과 폐도 함께 올려진다
정전 판문 정전 신실의 판문은 제례가 있을 때만 열리며 판문 앞의 툇간에 제상이 차려진다. 판문을 옆에서 보면 사이가 벌어진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는 혼이 자유롭게 드나들고, 습도를 조절하기 위해 일부러 문을 조금씩 틀어지게 만든 것이다. (종묘 홈페이지 펌) |
신실내부. 대제례모습
정전의 신실에는 큰 업적을 남긴 19위의 왕의 신주가 모셔져 있다. 신실 한 칸에는 한분의 왕과 그 왕비의 신주가 모셔져 있다. 정전은 총 35칸의 긴 일자형(一) 건물로 조선 역대 왕과 왕비 49위(位) 신주를 19실에 봉안하고 있다. (종묘 홈페이지 펌) |
정전 신위봉안도 정전에 모셔진 국가에 큰 업적을 남긴 왕과 왕비 49위의 신위봉안에 대한 안내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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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1시경에 행해지는 제사를 위해 종묘[정전]의 뜰에 많은 횃불을 밝히는 가운데
각실마다 차례로 순서에 따라 엄숙하고 경건하게 제사를 지냈다.
현재는 매년 5월 첫 일요일에 영녕전 제례는 오전에, 정전의 제례는 오후에 지낸다.
각실마다 별도의 제관을 두고 한꺼번에 지내는데, 일반인들도 관람할 수 있다.
정전의 뒷벽은 단일한 면으로 길게 이어지면서 하나로 완결된 끝없는 연속성으로 위엄과 신성함을 보여준다. (종묘홈페이지 펌) |
박석이 깔려 있는 정전의 하월대에는 가운데 신로(神路)를 중심으로
동쪽에는 제사를 지내는 제관들과 종친들,
서쪽에는 춤을 추는 일무원들이 위치하고,
신로 남쪽 끝 좌우로는 헌가(軒架)의 악공들이,
상월대 중심의 좌우에는 등가(登歌)의 악공들이 자리하며,
또한 하월대 밑 뜰에는 동서로 문반(文班)과 무반(武班)의 백관들이 도열하여 제사를 지낼 준비를 한다.
하월대에서 상월대로 오르는 3군데의 계단이 있는데,
가운데 계단은 태계(太階)라고 하여 제례의식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축과 향이 들어있는 축함을 모실 때와, 익힌 고기를 받들어 올리는 천조례와 같은 신(神)을 위한 의식 절차 때 이용하며,
동쪽 계단인 동계[조계(?階)라고도 함]에는 왕을 비롯한 헌관과 제관들이 이용하게 되며,
서쪽 계단인 서계(西階)는 제사에 쓰였던 축과 폐를 태우는 망료례 때 제관들이 이용한다.
그러나 현재의 종묘제례 때 제관들은 동계의 동쪽에 있는 협계(夾階)를 이용하여 오르내리고있다.
남신문
정전 남문은 '남신문'이라고도 하며 신(혼백)이 드나드는 문으로 사람이 출입할 수 없다.
신로가 연결되어 있다.
동문은 헌관인 왕이 출입하는 문이고 서문은 악공이 드나드는 문이다.
동문 앞에 왕과 세자의 판위가 있다.
각 문은 용도에 맞게 크기의 차이를 보인다.
남신문을 자세히 보면 혼백이 드나들수 있도록 상부에 틈을 내었다.
공신당(功臣堂)
임금이 살아계실 때 공로가 큰 신하들의 신위판(神位版)을 모신 곳이다.
공신당에는 종묘[정전]의 신실에 모셔져 있는 태조의 공신을 비롯하여
제일 마지막 칸에 모셔져 있는 27대 임금인 순종의 공신까지 정전에만 모셔져 있는 역대 왕들의 공신들 위판(位版) 83위를 모시고 있다.
영녕전에 모셔져 있는 역대 왕들의 배향공신들 위판은 모셔져 있지 않다.
공신당은 정전 담장 안 동남쪽 하월대 아래에 있다.
이곳에 모셔져 있는 훌륭한 분들 중에는 잘 알려져 있는 퇴계 이황, 율곡 이이, 우암 송시열 등의 공신들이 포함되어 있다.
죽은 후 생전에 모셨던 왕의 신주가 있는 종묘[정전]의 뜰에 함께 모셔졌기에 이들을 배향공신이라고 한다.
배향공신은 왕이 돌아가신 후 선발되며, 종묘제례 때 이들을 위해 함께 제사를 지낸다.
나라에 많은 공을 세운 신하들의 위패를 모시고 나라에서 제사를 지내던 곳으로 공신이 늘어남에 따라 지금처럼 길게 증축되었다.
조선 왕조 역대 왕들의 공신 83신위를 모시고 있으며 창건 당시에는 담장 밖에 있다가 태종 때 담장 안으로 옮겨졌다.
공신당 신위 봉안도 |
칠사당(七祀堂)
'칠사'란 인간의 삶과 생활에 관여하는 일곱 신을 의미하며
정전을 마주보고 서쪽 끝부분에 자리하고 있는 이곳은
일반 백성들의 신앙의 대상이었던 부뚜막 신을 포함하여 모두 7신(神)의 신위판(神位版)이 모셔져 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종묘제례 때와 음력 6월 정한 날에 둘 또는 하나의 신에게 제사를 지낸다.
인간의 운명, 문의 출입, 음식의 일, 거주하는 곳, 성문의 출입, 죽임과 형벌, 도로의 왕래 등을 관장하는
7신들의 위판(位版)을 모시고 제사를 지냄으로써 나라와 백성들의 평안을 기원하였다.
맞배지붕의 간소한 3칸 건물로 3면은 전돌로 벽을 마감하였다
예감
망예례,종묘 제사의 마지막 절차로
정전의 서쪽 뒷편에 예감이라는 것이 있 는데 이는 축문이나 신에게 바쳤던 비단을 태우는 곳입니다
서문
서문은 악공이 드나드는 문이다.
이문을 나서면 영녕전이 보인다.
정전 악공청(樂工廳)
종묘제례 때 음악을 연주하는 악공들이 연습하고 악기를 준비하며 대기하던 곳이다.
정전과 영녕전의 악공청이 별도로 있었으며 마루와 방이 있던 간소한 건물이었다.
정전과 영녕전의 악공청은 원 상태로의 복원이 되어 있지 않으며, 지금은 기둥만 남아 있어 내부 구조는 자세히 알 수 없다.
종묘는 정전과 영녕전 두 곳에 악공청이 있다
정전의 긴 담자옆 길을 따라 더위가 무색하리 만큼 편안하고 시원한 길이다.
영녕전(永寧殿) 일원
영녕전 동문
동문은 헌관인 왕이 출입하는 문으로 신문인 남문보다 작지만 서문보다는 크다.
정전의 동문과 마찬가지로 앞에 왕과 세자의 판위가 있다.
영녕전(永寧殿) 제821호로
세종 때 정종 임금이 승하하자 정전 신실에 신주를 모실 공간이 모자라,
중국 송(宋)나라에서 별도의 사당[별묘(別廟)]을 마련했던 경우를 좇아서 세워졌다.
당시 정전에 모셔져 있던 목조, 익조, 도조, 환조와 그 왕비의 신주를 모시기 위해
대실 4칸과 좌우 협실 각 1칸의 규모로 세종3년(1421)에 지어졌다.
영녕전은 ‘조종과 자손이 함께 길이 편안하다’는 의미로 붙여진 이름 이다.
영녕전도 계속 늘려 지어져 지금은 중앙 4칸, 좌우 협실 각 6칸, 전체 16칸의 건물이 되었다.
중앙 4칸은 좌우의 협실보다 지붕을 높게 처리한 것이 특징이며,
정전의 경우와 같이 신실 본 건물 양 끝에서 직각으로 덧붙인 동월랑과 서월랑이 각 5칸으로 구성되어 있다.
중앙 4칸은 좌우의 협실보다 지붕을 높게 처리한 것이 특징이며,
이는 정전의 지붕과 높이을 같이 한 것이다
중앙 4칸에는 서상제도(西上制度)에 따라 서쪽부터 목조, 익조, 도조, 환조와 그 왕비들의 신주를 모셨다.
목조,익조,도조,환조는 태조의 선대이다.
하월대에서 상월대로 오르는 정면 돌계단으로 정전과 마찬가지로 3개의 계단이 있는데
가운데 신로와 이어진 계단이 태계이다.
태계의 소맷돌에는 태극 문양을 조각하였다.
서협실(西狹室) 6칸에는 정종, 문종, 단종, 덕종(추존 왕), 예종, 인종과 그 왕비들 신주를,
동협실(東狹室) 6칸에는 명종, 원종(추존 왕), 경종, 진종(추존 왕), 장조(추존 왕)와 그 왕비들의 신주를 모셨다.
비어 있던 제일 마지막 칸에 조선왕조의 마지막 황태자였던 영왕과 그 비(妃)를 모셔,
모두 34위의 신주를 16칸의 신실에 모시고 있다.
결국 영녕전에는 종묘의 정전에서 불천위로 지정되어 종묘[정전]에 계속 남아 있는 왕들의 신주를 제외하고
4대가 지나서 조천 되어진 왕과 왕비의 신주가 모셔지게 되었다.
영녕전은 보물 제821호로 지정되어 있다.
제례 의복인 면복(冕服)을 갖추는 등의 제례를 행할 준비를 하는 곳이다.
영녕전 신위봉안도 태조의 선대 4조를 비롯하여 정전에서 조천되어진 신위 등 34위의 신위봉안에 대한 안내도이다. |
초석 위에 놓인 원형 기둥이 끝도 없이 길게 늘어서 있고 그 반대쪽으로 툇간이 열을 지은 공간을 한참 바라보노라면 엄숙함이 절로 생긴다. |
영녕전은 정전과 더불어 종묘의 중심 영역을 이룬다. 세종 때 종묘의 신실이 부족하게 되어 정전 서쪽에 새로 지은 것이다.
영녕전 남문을 지나 영녕전 안으로 들어서면 넓게 박석이 깔린 상·하월대가 있고 그 중앙에 놓인 신로와 태계가 있다.
영녕전 남문은 '신문'이라고도 하며 신(혼백)이 드나드는 문으로 사람이 출입할 수 없다.
신로가 연결되어 있다. 각 문은 용도에 맞게 크기의 차이를 보인다.
정전의 남신문과 같이 문에 혼백이 드나들수 있도록 틈을 내었다.
남신문의 아름다운 태극문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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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녕전 악공청
음악을 연주하는 악공들이 대기하며 연습하던 곳으로 영녕전의 서문이 바로 보이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
현재는 기둥만 남아 있어서 원래의 구조는 알 수 없다.
영녕전의 악공청은 정전의 악공청과 같은 구조이지만 규모가 작아 정면 3칸 측면 1칸의 단출한 크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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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궐여행, 궁궐답사....
막연히 찾았고
아무것도 모른체 들러보다가 점점 궁금함게 더해져서 종묘까지 들러 보았다
시작이 반이고 그 반이 완성을 이루고 있다
이제 사직단으로 발걸음을 옮기지만
다음에 이곳에 올때에는 내가 아는 만큼 설명을 해 줄 수있는 동행의 손을 잡고 찾아 오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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