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4.30.-6.10.
서쪽에는 경복궁 동쪽에는 창덕궁
조선 3대 임금 태종이 1405년에 창건하였다.
경복궁이 화재로 소실된후 재건되지 않자 창덕궁은 조선의 정궁으로 역활을 하였으며
마지막 임금 순종때까지 사용된 최후의 궁궐이이다
남북 중심축을 따라 엄격하게 비치된 궁이 경복궁이라면
산자락에 자리잡고 주변 자연 지형에 순응한 궁궐이 창덕궁이며
특히 후원에서 그 자연미를 느껴볼 수 있다.
본래 창덕궁의 후원으로 후원(後苑) 또는 왕의 동산이라는 뜻에서 금원(禁苑)이라고 불렀으며,
비원(秘苑)이라는 명칭은 일제 때 용어이다.
〈태종실록〉에 1406년(태종 6) 4월 창덕궁 동북쪽에 해온정(解溫亭)을 지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정원은 이때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창덕궁 후원은 자연의 지형을 그대로 살리면서 골짜기마다 아름다운 정자를 만들었다
4개의 골짜기에는 각각 애련지 부용지 관람지 옥류천이 있다.
후원의 왕가의 휴식처이지만 시를 짓기도 하고
과거행사를 비롯한 갖가지 야외행사가 이곳에서 열렸다.
조선초기에는 왕이 참관하는 군사 훈련이 자주 실시되기도 하였으며
낚시나 화약을 이용한 불꽃놀이, 여러 잔치가 열리기도 하였다.
또한 왕은 이곳에 곡식을 심어 농사를 체험하고, 왕비는 양잠을 직접 시행하는 친잠행사를 열기도 하였다.
이곳 후원은 인터넷 예약제로 입장할 수 있으며
창덕궁에서 표를 사고 후원입장권은 별도로 사야 입장할 수 있다.
안내원을 따라 타임별로 100명씩 인원제한이 있다.
자~ 지금부터 왕의 걸음으로 후원을 걸어보자
궁궐의 봄은 정말 아름다죠?
부용지와 주합루 일원
부용정(芙蓉亭)
<궁궐지>에 따르면 부용정은 숙종 33년(1707) 건립되었다.
당시의 이름은 택수재(澤水齋)였으나,
정조 16년(1792)에 현재의 부용정으로 이름을 바꾸었다고 한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정조 19년(1795)에 정조임금이
이곳 부용정에 대신들과 그 가족들을 초청해 시를 읊고,
주연을 베풀면서 낚시를 즐겼다는 기록이 보인다.
부용정 내부는 모두 마루로 되어 있으며,
부용지에 두 발을 담고 있는 형상으로 누마루를 뽑았다.
이곳의 마루가 제일 높게 조성되어 있어, 아마도 왕이 여기에 앉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부용정과 부용지 일대는 한국의 전통 정원 가운데 승경이 매우 뛰어난 곳으로, 18세기 이후 궁궐 후원의 백미로 손꼽힌다.
밖에서 볼 때 부용지와 부용정 일대가 한 폭의 그림과도 같지만,
부용정 안에 앉아 창문을 활짝 열면 부용지 일대의 자연풍광이 또한 병풍처럼 펼쳐지며 부용정 안으로 들어오기 때문이다.
정면 3간, 측면 4간되는 "+"자형 평면을 기본으로 하여 이익공 형식에 겹처마이며, 합각을 형성한 팔작 지붕 모양이다.
부용정내부
부용정 내부는 모두 마루로 되어 있으며,
부용지에 두 발을 담고 있는 형상으로 누마루를 뽑았다.
이곳의 마루가 제일 높게 조성되어 있어, 아마도 왕이 여기에 앉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부용지(芙蓉池)
창덕궁 부용지 일대는 조선후기 궁궐 후원의 백미로 꼽힌다.
낙선재에서 중희당 터를 지나 북쪽으로 고개길을 넘어가면 부용지 일곽을 중심으로 드넓은 창덕궁 후원이 펼쳐진다.
현재 부용지 입구는 그 창덕궁 후원의 초입에 해당한다.
이곳에서부터 창덕궁 후원이 시작되며 후원의 곳곳에는 수많은 정자각들이 곳곳에 자리하고 있다.
부용지를 중심으로 바라볼 때 북쪽에는 2층 규모의 웅장한 주합루가 높은 단위에 조성되어 있고,
남쪽에는 아담한 부용정이 부용지에 발을 담고 있다.
또한 서쪽에는 돌기단 위에 영화당이, 그 반대편에는 이곳 부용지의 유래를 말해주는 사정기비각과 서수 모양의 석루조가 보인다.
<동궐도>에 의하면 1820년대 무렵의 부용지 일대의 모습이 잘 묘사되어 있는데 현재의 모습과 거의 흡사함을 알 수 있다.
부용지는 가로 29.4m 세로 34.5m 이며, 네모난 연못 가운데에 둥근 섬이 있다.
이는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나다'라는 '천원지방(天圓地方)'의 전통적인 우주관을 구현한 것이다.
부용지의 물은 땅에서 솟아오른다. 원래 부용지에는 우물이 있었다고 한다.
세조 때 이곳에서 4개의 우물을 찾았는데 이를 마니, 파리, 유리, 옥정이라 이름지었다는 것이다.
그후 숙종 16년(1690)에 네 우물을 정비하고 이를 기념하여 비를 세우고 사정기비각을 건립했다고 한다.
사정기비각 부근에 석루조를 만들어 물을 끌어오기도 했는데,
오얏꽃 문양을 양각한 것으로 봐서 현재의 석루조는 순종대에 이르러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사정기비각(四井記碑閣)과 서수 모양의 석루조(石漏槽)
부용지의 물은 땅에서 솟아오른다.
원래 부용지에는 우물이 있었다고 한다.
세조 때 이곳에서 4개의 우물을 찾았는데 이를 마니, 파리, 유리, 옥정이라 이름지었다는 것이다.
그후 숙종 16년(1690)에 네 우물을 정비하고 이를 기념하여 비를 세우고 사정기비각을 건립했다고 한다.
사정기비각 부근에 석루조를 만들어 물을 끌어오기도 했는데,
오얏꽃 문양을 양각한 것으로 봐서 현재의 석루조는 순종대에 이르러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석루조:성문
(문화재청자료)
부용정 쪽 장대석에는 물을 박차고 오르는 물고기의 역동적인 모습이 양각되어 있다.
이 물고기를 통해 상징하는 바는 크게 두 가지로 해석된다.
첫째는 '잉어가 폭포를 거슬러 올라가 용이 된다'는 등용문 설화의 상징이다.
이곳 영화당 앞마당에서는 실제 과거시험이 치뤄졌던 만큼,
과거에 급제해 높은 관직에 오르는 것을 잉어가 용이 되는 것에 비유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물고기가 양각되어 있는 장대석 맞은편에 위치한 어수문은 곧 등용문에 비유된다.
어수문 문설주에 투각되어 있는 황룡과 청룡은 잉어가 등용문을 올라 용이 됨을 암시한다고 한다.
궁궐의 문설주에 용을 새겨넣는 장식하는 예가 없음을 볼 때 더욱 그렇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물고기와 물의 관계'로 비유되는 군신관계를 상징한다는 것이다.
이는 곧 물고기가 물을 떠나 살 수 없듯이 신하들 역시 왕의 뜻 안에서 뜻을 펼치고 활약을 하라는 의미이다.
한편 영화당 상량문에서는 "어수(魚水)를 즐김은 명랑(明朗)한 신하를 만나 같은 덕은 구함"라고 쓰여 있다.
어수문 문설주에 투각되어 있는 황룡과 청룡은
잉어가 등용문을 올라 용이 됨을 암시한다고 한다.
부용지의 물은 땅에서 솟아오른다. 원래 부용지에는 우물이 있었다고 한다.
2008년 부용지 바닥정비공사를 하다가 발견되었으며
앞쪽은 조선전기의 우물, 뒷쪽은 조선 중기의 우물로
세조때 신하에게 명하여 우물을 파게 했는데
그후 여러차례 병화를 겪어 현재 4개중 2개만 전해지고 있다.
숙종때 이 고적을 애석히 여겨 남은 두개의 우물이라도 보수하도록 명하고
그 곁에 비(사정기비각)를 세우도록 명하였다 한다.
주합루(宙合樓) 보물 1769호
<궁궐지>에 의하면 규장각은 정조 즉위년(1776)에 이곳에 세워져 처음엔 어진을 봉안했다고 하며,
주합루는 규장각의 위층에 있고 주합루 현판은 정조의 어필이라고 적고 있다.
현재 부용지를 내려다 보며 웅장하게 지어져 있는 2층 건물에는 주합루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따라서 엄밀히 말하면 주합루는 이층 누마루를 가르키는 것이고 1층은 규장각이다.
규장각은 정조가 탕평책을 추진하던 무렵 세운 기구이다.
숙종 때 왕실 족보 등을 보관하는 작은 건물이었으나 정조 때 이르러 그 규모도 커지고 기능과 역할이 확대된 것이다.
즉 규장각은 정조 당시 국내외 도서들을 모아 왕립 도서관의 역할은 물론,
인재를 등용해 국가정책 연구와 왕의 비서실 역할까지를 담당했던 기구로 발전시킨 것이다.
궁궐의 후원은 단지 휴식기능만 갖춘 것이 아니라 국정업무수행을 위한 생산적인 공간으로 활용되기도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일제시기에 이곳은 이토 히로부미가 연회장으로 활용하는 등 왜곡과 수난을 겪기도 했다.
이곳 규장각 소장 도서는 일제시기 경성제국대학으로 이전되었으나,
다행히 일본으로 반출되지 않고 현재 서울대학교 부속기관인 규장각에 보관되어 있다.
주합루 현판은 정조의 어필
주합루는 이층 누마루를 가르키는 것이고 1층은 규장각이다.
어수문(魚水門)
주합루, 규장각에 오르기 위해서는 어수문을 지나야 한다. 어수문은 일주문 형태로 화려한 단청이 돋보인다.
신하들은 어수문 옆 작은 협문을 통해 들어갔으며, 왕은 이곳 어수문을 통해 규장각에 들어갔다.
<동궐도형>을 보면 어수문 양 옆으로 꽃나무 가지를 틀어 만든 '취병(翠屛)'을 아담한 담장 처럼 둘렀으나
지금은 찾아 볼 수 없고 어수문과 협문만 남아 있다.
정면 5간, 측면 4간 모두 기둥 밖으로 난간을 둘렀으며 지붕은 팔작지붕에 겹쳐마 양식이다.
'취병(翠屛)'이라고 하는 한국의 고유의 울타리
'푸른 병풍'을 뜻하는 취병은 살아있는 나무를 이용해 만드는 울타리로
대나무를 엮어 울타리를 두르고 그안에 작은 나무나 넝쿨식물을 올리는 친황경울타리이다
서향각(書香閣)
서향각은 주합루 서쪽에 위치해 있다.
서향각이란 전각의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책을 보관하고 관리하던 규장각의 부속건물로 주로 쓰였다. .
주합루에 봉안된 임금의 초상화나 글 그리고 많은 책들을 매년 정월, 4월, 7월. 10월 보름날에 한 번씩 햇볕에 말리고
서적들의 사고유무를 검사하였다고 합니다.
정면 8간, 측면 3간의 초익공집으로 겹처마이며 팔작지붕이다
<궁궐지>에 한때 임금의 초상인 어진(御眞)을 이곳에 모시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서향각 현판 안쪽에 별도로 '친잠권민(親蠶權民)'이라는 현판이 걸려있어,
이곳에서 '누에치기'가 행해졌음을 알 수 있다.
이 편액은 순종황제의 비인 순정효황후의 친필로 알려져 있으며한때는 궁궐에서 왕비가 누에를 치는 장소로도 활용되었다.
또한 건물 오른쪽 기둥에는 “어친잠실”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는데
이 현판은 현대에 와서 걸어둔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왕실이 친히 누에를 치는 방”이라는 뜻입니다.
희우정(喜雨亭)
희우정은 주합루의 서쪽 언덕 위에 위치해 있다.
<궁궐지>에 의하면 희우정의 옛이름은 취향정(醉香亭)이었으며,
인조 23년(1645) 초당(草堂)으로 처음 건립하였다고 한다.
또 숙종16년(1690) 날씨가 가물어 이곳에서 기우제를 올렸는데,
비가 내리자 숙종이 친히 취향정을 희우정으로 이름을 바꾸고 기와를 올렸다고 한다.
제월광풍관과 마찬가지로 <동궐도>에도 단청을 칠하지 않은 모습으로 나타나 있다.
서쪽면에 다락을 두었으며, 정면 2간 측면 1간의 홑처마에 우진각지붕이다.
서향각을 짓기전에는 희우정에서 부용지의 연꽃을 감상하는 재미가 무척이나 좋았는지
상림10경 중 하나인 희우상련(喜雨相蓮)이 바로 그것입니다
제월광풍관(霽月光風觀)
주합루 동쪽 화계에 위치한 별당이다.
높은 돌계단 위에 위치함으로써 주합루와 주변경관을 한 눈에 내려볼 수 있어 전망이 뛰어나다.
<동궐도>에 그려진 모습 또한 지금처럼 단청을 칠하지 않았다.
제월광풍관의 바로 뒷문으로 나가면 가파른 언덕 바로 밑에 기오헌과 의두각이 있으며,
애련지와 연경당이 건너편에 보인다.
제월광풍이란 “비갠 뒤의 바람과 달”이란 뜻으로
도량이 넓고 시원스런 인품을 표현하는 말로 사용했다 합니다.
이곳은 학자들이 독서를 즐기던 곳으로 알려져 있는데
순조임금의 아들인 효명세자가 학문을 연마하던 곳이기도 합니다.
영화당(暎花堂)
부용지 일대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궁궐지>에 의하면 어느 해에 지어졌는지 알 수 없으나
숙종 18년(1692) 퇴락한 것을 다시 고쳐서 지었다는 기록이 보인다.
이곳은 역대 왕들이 연회를 베풀기도 했지만,
군사훈련을 참관하거나 활쏘기도 행해졌다.
그러나 무엇보다 영화당은 과거시험을 보던 과장으로 유명했다.
현재 영화당 앞 동남쪽 일대는 창경궁과 경계를 나누는 담장이 쳐져있지만 예전에는 탁 트인 넓은 공간이었다.
그 앞에 춘당지(春塘池)가 펼쳐져 있다.
현재의 춘당지는 물론 오늘날 창경궁 춘당지에 해당하지만,
일제때 왜곡변형되어 옛날의 춘당지 모습과는 사뭇 다름을 <동궐도>를 통해서 짐작할 수 있다.
동궐도의 영화당
<궁궐지>에 의하면 영화당 현판은 정조의 어필이었다고 한다.
또한 선조, 효종, 현종, 숙종의 어필들이 모두 이곳 영화당에 편액으로 걸려있었다고 한다.
영화당은 정면 5간, 측면 3간 이익공 형식에 팔작 기와지붕이다.
영화당 앞 뜰 춘당대
담장은 현재 창경궁과 경계이다.
춘당대는 춘당지와 인접해 지금의 영화당 앞 화장실과 매점이 있는 넓은 마당 일대를 말한다.
이곳 춘당대에서 왕이 직접 참석한 가운데 과거시험이 행해졌던 것이다.
완판본 춘향전(春香傳)에서도 이도령이 장원급제할 때 과제가 '춘당춘색고금동(春塘春色古今同)'으로 제시되고 있어,
영화당 앞 춘당대의 과거시험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지금의 춘당대에 서면 한숨이 절로 나온다.
춘당대의 봄빛은 예나 지금이나 같건만 춘당대는 창경궁을 경계로 담장에 막혀있고,
춘당지의 모습 또한 더 이상 옛 모습이 아니기 때문이다
기오헌(奇傲軒) 일원
금마문(金馬門)
영화당을 뒤로하고 후원으로 조금 더 들어가면 금마문(金馬門)이 나온다.
금마문을 들어서면 단청을 하지 않은 두 채의 작고 소박한 건물들을 볼 수 있다.
기오현과 의두합으로 들어서는 문이 금마문이다.
기오헌(奇傲軒)
금마문을 들어서면 단청을 하지 않은 두 채의 작고 소박한 건물들을 볼 수 있다. 그중 한 채가 기오헌이라는 현판을 걸고 있다.순조 년간인 1820년대 무렵에 제작된 <동궐도>를 보면 현재의 모습과 똑같은 이 두 채의 건물이 서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런데 각각의 명칭이 이안재와 운림거로 표기되어 있다.
<궁궐지>에 의하면 이곳은 순조 27년(1827) 고쳐짓고 의두합(倚斗閤)이라 했다고 한다.
현재는 기오헌이라는 현판을 걸고 있는 이 건물이 순조년간과 헌종년간을 거쳐
이안재에서 의두합으로 이름을 바꿔 왔던 것이다.
현재의 기오헌은 순조의 왕세자 효명세자가 독서를 하던 곳이다.
효명세자는 왕손이면서 유가선비정신에 누구보다 투철했기에 그의 절제된 삶의 모습은 이렇게 상징화 되어 있다.
약관의 나이에 요절하여 오래 머물지는 못하였지만
그의 흔적은 저렇게 화려함속에 감춰진 소박한 모습으로 남아있다.
군더더기 없이 조촐한 의두합은 절집의 칠성각을 연상케하고
두(斗)가 북두칠성의 뜻이라면 더욱 그러하다
불로문과 더불어 다소 도가풍을 연상케 한다.
조촐한 기오헌은 온돌방하나에 대청 누마루로 이루어진 독서와 명상의 공간이다.
바로옆 의두각은 몸조차 누이기 어려운 두평도 채안되는 집이다.
그늘진 북향에다 아무장식없는 백골택(白骨宅)이다.
구중궁궐에 화려한 화계도 없고 주먹돌로 된 뒷축대를 가파르게 쌓아 올렸다.
기오란 뜻은 도연명의 '귀거래사(歸去來辭)'의 한 구절에서 따왔으며,
효명세자가 지은 '의두각십경시(倚斗閣十景詩)'가 전해오고 있다.
기오헌 뒤편 가파른 언덕을 올라 작은 문으로 들어가면 주합루 뒤편 제월광풍관에 이른다.
누마루 한 칸을 뽑은 기오헌의 좌향은 북쪽이며, 정면 4간,측면 3간의 홑처마에 팔작지붕이다
불로문(不老門)
금마문 옆 담장을 지나면 한 장의 돌로 만든 문에 전서체로 불로문(不老門)이라고 새겨져 있다.
이 불로문은 <동궐도>에도 그 모습이 똑같이 나와있지만 주변 풍경은 예전의 모습과 사뭇다르다.
<궁궐지>에 의하면 원래 불로문 앞에는 불로지(不老池)라는 연못이 하나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찾을 수 없다.
불로문은 커다란 판석을 통째로 'ㄷ' 자 모양으로 깍고 다듬어서 세워놓는데
불로문 문짝은 없어졌지만 돌쩌귀를 박았던 흔적이 남아있다.
이 문을 통과하면 영원히 늙지 않는다는 불노장생의 뜻을 담고 있어 도교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애련지(愛蓮池)와 연경당(演慶堂) 일원
애련지(愛蓮池)와 애련정(愛蓮亭)
불로문을 지나 연경당을 향하다 보면 우측에 커다란 사각형의 연못이 보이고,그곳에 두 발을 담고 있는 아담한 정자가 하나 보인다.
바로 애련지(愛蓮池)와 애련정(愛蓮亭)이다.
<궁궐지>에 의하면 숙종 18년(1692)에 애련정을 지었다고 한다.
애련정은 작지만 매우 간결하고 격식있게 지어졌다.
애련정은 낙양창을 두었는데 애련정의 난간 마루에 걸터앉아 이 낙양창을 액자삼아 애련지와 창덕궁 후원을 바라보면,
마치 화려한 낙양창에 담긴 한 폭의 아름다운 풍경화를 보는 듯 하다.
애련정의 낙양창이 창덕궁 후원의 자연을 끌어들이고 있는 것이다.
또한 애련지 서쪽 연경당에서 물을 끌어오는 입수구도 일품이다.
넓은 판돌을 우묵하게 만들어 낙수물을 떨어뜨리게끔 하여 마치 작은 폭포를 연상케 해 그 정취를 한껏 더하고 있다.
<동궐도>에 의하면 애련정 옆에 어수당이란 건물이 있었으나 지금은 사라지고 빈터만 남아 있다.
애련정과 관련해서는 숙종의 '어제기'와 정조가 지은 '애련정시(愛蓮亭詩)'가 전하고 있다.
애련정은 정면 1간, 측면 1간 이익공 겹처마에 사모지붕으로 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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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고기머리 모양의 애련정 추녀
연경당(演慶堂)
연경당은 순조 28년(1828) 효명세자가 아버지 순조에게 존호를 올리는 의례를 행하기 위해 지어졌다 추정되며,
사대부 삶의 체험을 통해 백성을 더 잘 이해할수 있는 군왕이 될수 있도록 효명세자의 교육을 위해 지어졌다고 전해진다.
<궁궐지>에 의하면 진장각(珍藏閣)의 옛터에 순조 28년(1828) 새로 고쳐지었다고 적고 있는데
당시에는 익종으로 추존된 효명세자의 어진을 모셔두기도 했다고 한다.
연경당은 사랑채의 당호이자 집 전체를 가르키는 이름으로
궁안에 왕의 사랑채, 왕비의 안채, 서재인 선향제, 안팎 행각등 99칸의 사대부집이다.
실제 규모는 108칸 반이다
지금의 연경당은 고종2년(1865)이 새로 지은 것으로 단청이 없어서 화려하지는 않지만
치장하지 않은 모습에 세월까지 담겨 고풍스런 기품이 느껴지는 한옥이다.
1884년 갑신정변때 청나라에 쫓긴 개화파 수뇌들이 고종을 모시고 잠시 피신한 일이 있었고
고종과 순종때 연회공간으로 사용되었으며
1917년 창덕궁 대조전이 화재가 났을때 순종황제와 황후가 피신한 곳이라고 한다.
장락문(長樂門)
헌종연간에 발간된 <궁궐지>에 의하면 연경당의 문은 장락문으로,
진장각(珍藏閣)의 옛터에 순조 28년(1828) 새로 고쳐지었다고 적고 있다.
(사진:한국의 재발견에서 퍼옴)
연경당을 들어가려면 작은 개울을 건너야 한다.
개울을 건너기전 눈에 띄는 것은 괴석을 담고 있는 석분이다.
석분 네 모서리에는 두꺼비 네 마리가 양각되어 있다.
재미있는 것은 두꺼비의 앙증맞은 모습이다.
세 마리는 기어 나오려 하고 한 마리는 기어 들어가려 버둥거리고 있다.
석분의 두꺼비 상징은 연경당이 근심 걱정 없는 월궁(月宮)임을 암시한다.
월궁은 신선이 사는 곳으로 장락궁이 있다는 전설이 전하고 있다.
그런 까닭에 연경당 앞을 흐르는 개울물은 은하수의 상징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그렇다면 개울을 건너는 작은 돌다리는 오작교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돌다리를 건너면 연경당의 정문인 장락문이다.
장락문을 지나 장양문에 들어서면 이곳이 연경당의 마당이다
사랑채
안채
선향재(善香齋)
서책을 보관하거나 문인들을 접대하던 곳인 중국풍의 건물인 선향재(善香齋),
동판을 씌운 지붕에 도르래식 차양을 설치하여 이국적인 모습이다.
서재를 운각(雲閣), 또는 운향각(芸香閣)이라고 하는데
옛사람들은 책을 보관할때 좀을 방지하기 위해 운초(향초)를 넣어두는데서 유래한것이다.
독서하는 기풍을 서풍(서풍)이라고 하는데 '선향'은 '좋은 향기'로 독서를 뜻한다.
농수정(濃繡亭)
선향재 뒷편 높다란 단을 쌓은 곳에 하엽동자로 난간을 두른 농수정(濃繡亭)
濃繡亭: 수목이 울창하게 우거져 비단을 펼친 듯하다라는 의미.
관람정(觀纜亭)과 반도지(半島池)
1827년 무렵 제작된 <동궐도>를 살펴보면 이곳 관람정과 반도지 모습으 찾을수가 없다.
다만 현재의 반도지 일대에 네모난 2개의 연못과 가운데 조그만 섬을 조영한 둥근 연못 1개가 그려져 있을 뿐이다.
물론 관람정과 같은 정자도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1908년 무렵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동궐도형>에는
현재의 모습과 동일한 형태로 되어 있는 관람정과 반도지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이를 통해 볼 때 현재의 관람정과 반도지 일대는 고종연간에 다시 조성되고 건립된 것으로 추측될 따름이다.
관람정의 형태는 매우 특이하다. 부채꼴 모양의 평면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관람정 주변의 반도지 또한 호리병 모양의 곡수지로 형성되어 있어 특이하다.
이는 얼핏 한반도 모양을 뒤집어 놓은 것 같아 반도지라고도 불리운다.
그러나 반도지의 모습을 그저 전통적인 정원양식 중 특이한 예로만 바라보기에는 석연치 않은 부분이 더 많다.
반도지의 모습이 한반도 모양을 하고 있는 것은 일제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하던 조성시기의 정황으로 볼 때,
옛날 고구려 등 광대한 만주일대의 민족사를 한반도에 국한시켜
축소된 인식을 심어주기 위한 일제의 숨의 의도가 있는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우리의 전통적인 정원 양식에 반도지와 같은 곡수지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한반도 모양을 한 곡수지 형태는 처음이라는 점에서 이 부분은 더욱 그렇다.
부채꼴 모양을 한 관람정 또한 일찍이 건축양식에서 찾아볼 수 없는, 현재까지는 유일한 형태다.
때문에 대부분의 건축학자와 조경전문가, 그리고 역사학자들은 일제의 영향력이 증대되던 당시에
이곳 반도지와 관람정이 일제에 의해 의도적으로 조성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관람정과 반도지의 아름다운 풍경 그 이면에는 이처럼 석연치 않은 구석들이 많다는 것이다.
한편 1908년무렵 마지막으로 편찬된 <궁궐지>에 의하면 관람정을 '선자정'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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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람정은 6개의 초석 위에 둥근 기둥을 세웠고 그중 4개의 기둥이 반도지에 발을 담그고 있다. 바닥은 널마루를 깔고 지붕은 홑처마에 우진각 지붕으로 되어 있다.
관람정 현판은 긴 나뭇잎 모양을 하고 있는데 그냥 나뭇잎 모양을 한 것이 아니라 나뭇잎 접혀있는 모양을 형상화하고 있어 감탄을 하게 한다. 관람정 기둥 또한 주위 풍경을 감상하는데 방해가 되지 않도록 얇게 구성되어있다.
관람정 기둥에는 구름문양이 장식되어 있어 구름위 신선이 사는 세상으로 형상화하기도 하며 시각적으로 아름다운 모습이다. |
동궐도 (東闕圖) 1828 동궐도형(東闕圖形)1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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폄우사 폄우사의 건립연대는 분명치 않다. 하지만 이곳 폄우사에서 느끼는 사계절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정조의 '폄우사사영(폄우사四詠)'이 <궁궐지>를 통해 전해지는 것으로 볼 때, 적어도 1800년 이전에 이미 폄우사가 있었음을 추정해 볼 수 있다.
<궁궐지>에 따르면 정조가 죽고 그의 손자이며, 훗날 익종으로 추존된 효명세자가 정조의 '폄우사사영'을 읽고 이에 경의하며 다시 시를 지어 바쳤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1820년대에 제작된 <동궐도>에 보면 지금과 똑같은 모습의 폄우사를 발견할 수 있다
‘폄우(?愚)’는 ‘어리석은 자에게 돌침을 놓아 깨우쳐 경계한다’는 뜻이다. 스스로 마음을 다잡는 말로 쓰인다. ‘폄(?)’은 ‘돌침’인데, ‘돌침을 놓아병을 치료한다’는 뜻을 포함하고 있다.
승재정(勝在亭) 폄우사에서 남쪽으로 올라가면 약간 가파른 언덕에 정자가 있는데 이것이 승재정이 있다.
승재정은 연경당 뒷편 농수정과 꼭같은 모습으로 매우 격식 있게 지어졌다. 이곳에서 내려보면 관람정 일대가 모두 눈에 들어온다. 두벌의 장대석 기단 위에 정면 1간 측면1간의 익공양식에 겹처마이며 사모지붕이다.
사방으로 창호를 달고 들쇠에 매달수 있도록 하였는데 고종또는 순종때 지어진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승재정 사방기둥에는 주련을 걸고 시를 적어 놓았으며 사방으로 괴석을 놓아 자연의 정취를 더하고 있다
청심정(淸心亭) 청심정은 폄우사 북쪽과 취규정 남쪽 사이 숲 속에 자리하고 있어 일반인들이 좀처럼 쉽게 찾을 수 없는 곳이다. 현재는 취규정 옆으로 난 숲 길을 따라 들어가다 보면 찾을 수 있다. <궁궐지>에 의하면 청심정은 숙종 14년(1688)에 천수정(淺愁亭)의 옛터에 건립되었다고 하다. 현재 청심정의 현판은 걸려 있지 않다.
또한 청심정 바로 앞 뜰에는 빙옥지(氷玉池)라는 못을 팠으며, 남쪽으로 태청문(太淸門)을 두었으며, 동쪽에는 협곡수가 있어 홍예교를 놓아 통로로 삼고 왕래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현재 청심정 주변의 모든 것들은 없어지고 빙옥지의 흔적만 일부 남아 있다. 즉 청심정 앞에는 돌로 만든 수조와 돌거북이 있음을 볼 수 있다.
청심정의 서쪽에는 빙천이 있고, 이곳의 물은 다른 곳의 물과 합수되어 연경당 장락문 앞으로 흐른다고 한다. 외벌대의 장대석 위에 정면 1간 측면 1간의 홑처마에 사모지붕으로 되어 있다.
돌 거북의 등에는 '어필 빙옥지(御筆 氷玉池)'라고 쓰여 있어, 왕의 어필을 돌에 새겨 넣었음을 알 수 있다. 청심정 역시 이곳에서 자연을 완상하고 예찬했던 역대 왕들의 시가 전하는데 숙종, 정조, 순조 등이 그들이다. ‘빙옥(氷玉)’은 ‘얼음과 옥’이라는 뜻인데 여기서는 맑고 깨끗하다는 의미로 쓰였다. 또 ‘빙옥’은 고상하고 정결한 인품을 비유하는 표현이기도 하다. ‘빙자옥질(氷姿玉質)’은 얼음이나 옥같이 맑고 깨끗한 자질, ‘빙기옥골(氷肌玉骨)’은 얼음같이 깨끗한 살결과 옥같은 뼈대라는 뜻으로 미인 또는 매화를 형용한다.
옥류천(玉流川) 일원
취규정(聚奎亭) 존덕정 일대를 지나 후원의 깊숙한 북쪽 옥류천을 향해 가파른 언덕을 올라가다 보면 옥류천으로 내려가는 길가에 취규정이 놓여 있다. <궁궐지>에 의하면 인조 18년(1640)에 건립되었다고 한다. 또한 <동궐도>에도 마찬가지로 지금의 모습과 꼭 같은 취규정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정면 3간 측면1간의 익공양식의 홑처마에 단층 팔작지붕이다.
취한정(翠寒亭)
소요정 뒷편 어정(御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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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류천(玉流川)
<궁궐지>에 의하면 이곳 옥류천은 인조 14년(1636) 가을에 돌을 뚫어 샘물을 끌어들여
바위 둘레를 돌아 정자 앞에 떨어뜨려 폭포로 삼았다고 한다.
현재 옥류천 바위에는 옥류천(玉流川)이란 세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인조의 어필이다.
또 바위에는 오언절구의 시가 적혀 있는데 이는 숙종이 지은 시를 1670년에 새겨 놓은 것이라고 한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폭포수 삼 백 척을 날아 흘러(飛流三百尺)
/ 아득히 구천에서 내려오누나(遙落九天來)
/ 보고 있노라니 문득 흰 무지개가 일어나고(看是白虹起)
/ 일만 골짜기에 우뢰 소리 가득하다(○成萬壑雷)"
동궐도>에도 한 폭의 산수화 같은
옥류천의 아름다운 모습을 그려 넣었다. 재미있는 것은 옥류천 바위에 새겨진 숙종의 시 또한
<동궐도>에 세필(細筆)로 써놓아 그 느낌과 감흥을 기록화 속에서 전달하고 있다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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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의정
옥류천 주변의 정자 중에서 유일하게 초가지붕으로 만들어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이 청의정이다.
<궁궐지>에 의하면 청의정은 인조 14년(1636)에 건립했다고 한다.
또한 정조가 친히 '청의정시'를 지어 청의정에서 느낀 아름다운 정취를 노래했으며, 선조의 어필로 글귀를 써 걸기도 했다고 한다.
청의정 주변에는 서너평 가량의 작은 논을 둘러쳐 있는데, 여기서 벼를 심고 그 볏짚으로 지붕을 이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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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동궐도>를 보면 이보다 조금 큰 규모로 논이 형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청의정 주변을 유심히 살펴보면 특이한 물건을 발견할 수 있는데, 땅에 박혀 있는 팔각형의 작은 석물이다. 팔각형의 석물 가운데는 둥근 홈이 파져 있고 검게 그을려 있어, 이곳에 차(茶)를 끓여 마시기 위해 차 주전자를 올려 놓은 일종의 화로가 아닌가 추정된다. |
태극정(太極亭) | ||||
청의정 맞은 편에 있는 정자가 태극정이다. <궁궐지>에 의하면 인조 14년(1636)에 건립했으며, 옛 이름은 운영정(雲影亭)이었는데 태극정으로 바뀌었다고 적고 있다.
정조가 '태극정시(太極亭詩)'를 남겨 태극정의 정취를 노래했으며, 선조의 어필로 된 글귀를 걸었다고 한다. 현재는 평지 위에 세벌의 장대석 기단을 쌓고 다시 안쪽으로 외벌의 기단을 쌓아 이곳에 태극정을 지었만, <동궐도>에 보면 태극정 옆에 연못이 조성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지금의 주변 모습과는 조금 달랐던 것이다. 연경당의 농수정, 승재정과 유사한 형태의 정자형태로 되어 있지만 초석이나, 기둥, 난간 등이 낮아 상대적으로 안정감이 느껴진다.
정면 1간 측면 1간의 익공형식에 겹처마 사모지붕이다.
농산정(籠山亭) 농산정은 옥류천 주변의 정자들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크고 구성도 특이하다. 평면도를 보면 방 2칸, 마루 2칸, 부엌 1칸의 5칸 건물로 행랑채와 비슷한 형태로 되어 있다. 이는 왕이 신하들과 옥류천에 들러 주연을 베풀 때 다과와 음식 등을 마련하던 용도로 쓰인 것이 아닌가 추정케 한다.
낮은 외별대 기단 위에 정면 5간 측면 1간의 맞배지붕이며 전면과 후면에 각각 툇마루를 달았다.
이번 창덕궁 후원 탐방에서 능허정을 관람하지 못하여 사진을 빌려왔다.
능허정(凌虛亭) 능허정은 후원에서 가장 높은 언덕에 지어진 정자다. 청심정과 마찬가지로 일반인들이 쉽게 찾을 수 없는 신선원전으로 가는 길가의 숲 속 깊이 자리하고 있다. <궁궐지>에 의하면 숙종 17년(1691)에 건립되었다고 한다.
숙종은 능허정을 짓고 시를 읊기도 했으며, 그밖에 능허정과 관련된 몇 편의 시를 남기기도 했다. 정조, 순조, 효명세자가 이곳에 올라 능허정에서 바라본 경치를 노래했다.
전돌을 깔은 두 벌의 장대석 위에 정면 1간 측면 1간의 사모지붕으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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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원의 풍경들을 감상하고 돌아오는 길...
이렇게 창덕궁 후원의 수많은 정자와 연못의 풍경을 감상했다.
사계절 어느계절에 가더라도 왕의 걸음으로 후원을 걸어볼수 있으리라....
시간이 촉박하여 수박 겉핥기식으로 본것 같아 아쉽다
다음에는 여유로운 시간을 준비하여 느긋한 걸음으로 걸어가고 싶다.
창덕궁 향나무 천년기념물 194호
향나무는 은은한 향이 나기 때문에 궁궐과 절에 많이 심었고, 왕실 제사에 사용할 향을 만들기도 했다.
역대 왕의 초상화를 모신 선원전 뒤에 있는 이 향나무는 수령이 700년으로 추정된다.
한양이 수도로 정해지기 이전부터 그 향을 내고 있었을 것이다.
향나무는 우리나라 중부 이남을 비롯해 울릉도와 일본 등에 분포하고 있으며, 상나무·노송나무로도 불린다.
이 나무는 강한 향기를 지니고 있어 제사 때 향을 피우는 재료로도 쓰이며 정원수·공원수로 많이 심는다.
창덕궁의 향나무는 나이가 약 700살 정도로 추정되며, 높이 12m, 뿌리부분 둘레 5.9m이다.
가지는 동서남북으로 1개씩 뻗어나갔는데 남쪽 가지는 잘라졌고, 북쪽 가지는 죽었으며,
동쪽 가지는 꼬불꼬불한 기형으로 자랐다.
나무의 모양은 마치 용(龍)이 하늘을 오르는 모습처럼 생겼다.
창덕궁은 조선 태종 4년(1404)에 왕실의 별궁으로 지었는데,
별궁을 지은 다음 어느 정도 자란 커다란 나무를 심었을 것이라고 생각해서 나무나이를 700년이라 추정한 것이다.
창덕궁의 향나무는 오랜 세월동안 조상들의 관심과 보살핌 가운데 살아온 나무로
문화적 자료로서의 가치가 높아 천연기념물로 지정·보호하고 있다.
창덕궁 후원에 읊은 임금님의 詩
■ 숙종 희우범주운시(肅宗喜雨泛舟韻詩)
■ 숙종 능허정시(肅宗 凌虛亭詩)
■ 정조 청심제월시(正祖 淸心霽月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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