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 한쪽 비워둔다면

photostory-宮

운현궁

kyeong~ 2013. 7. 6. 02:11

 

 

 

2013.6.30. 일요일

5대궁궐 답사를 마치고, 뿌듯함도 있었지만 좀더 많은 조선의 이야기를 알고 싶었다.

그래서 내친김에 궁궐은 아니지만

궁궐 못지않은 힘을 가졌던 운현궁 답사를 하게 되었다.

 

 

 

서울특별시 사적 제257호

 

 

 

서울특별시 사적 제257호로서 서울특별시 종로구 운니동에 위치한 운현궁은

조선조 제26대 임금인 고종의 잠저(潛邸)이며 흥선대원군의 사저이며,

한국근대사의 유적 중에서 대원군의 정치활동의 근거지로서 유서 깊은 곳이다.

흥선군 이하응이 왕실집권을 실현시킨 산실이자 집권이후

대원군의 위치에서 왕도정치로의 개혁의지를 단행한 곳이기도 하다.

운현궁은 대원군이 권력에서 하야한 이후에도 계속해서 정치적 영향력을 내외에 행사한 곳으로서

고종이 즉위하기 전까지 살았던 잠저(潛邸)였기 때문에 역사적 상징성이 더욱 크다.

흥선군의 사저가 운현궁으로 불리게 된 것은 1863년 12월 9일 흥선군을 흥선대원군으로,

부인 민씨를 부대부인으로 작호를 주는 교지가 내려진 때부터였다.

운현궁은 사랑채인 노안당, 명성왕후가 왕비수업을 받았던 노락당, 안채인 이로당, 별당인 아재당,

정자인 영화루, 은신군, 남연군의 사당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언덕위에 있던 사당과 별당, 정자등은

일제가 허물고 양관이라는 현대식 건물을 지었다.

 

 

 

 

 현궁의 인물

 

 
 
 

조선시대 왕족·정치가. 자는 시백(時伯), 호는 석파(石坡). 이름은 하응. 영조의 5대손이며 조선 제26대 왕 고종의 아버지이다. 1843년(헌종 9) 흥선군(興宣君)에 봉해지고 46년 수릉천장도감(綏陵遷葬都監)의 대존관(大尊官)이 된 뒤 종친부의 유사당상, 오위도총부의 도총관 등을 지냈다. 안동 김씨 세도정치 아래 왕족에 대한 감시가 심하자 호신책으로 시정의 무뢰한과 어울리고 구걸도 서슴지 않아 궁도령(宮道令)이라는 비웃음을 사기도 하였다. 왕실의 조대비(趙大妃)와 밀약하여 철종이 후사 없이 죽자 둘째 아들 명복(命福)을 왕위에 세우고 그는 대원군에 봉해졌다. 그 뒤 섭정을 통해 강력한 혁신정치를 추진, 세도정치를 분쇄하고 당색과 문벌을 초월하여 인재를 등용하였으며 당쟁의 기반이 된 서원을 정리하였다. 또 토호들의 토지겸병을 막고 종래 상민에게만 징수하던 군포를 양반에게도 징수하는 호포법(戶布法)을 실시하였으며 환곡제를 사창제(社倉制)로 개혁하였다. 복식을 간소화하고 사치를 금하였으며, 《대전회통(大典會通)》, 《육전조례(六典條例)》, 《양전편고(兩銓便攷)》 등 법전을 편찬하여 법질서 확립에 힘썼다. 반면 경복궁 중건을 위해 원납전(願納錢)을 징수하고 역역(力役)을 부담시켜 백성의 원성을 사기도 하였다.
또한 서구 세력의 차단을 위한 쇄국양이(鎖國攘夷) 정책을 시행하였는데 병인박해를 통해 9명의 프랑스 신부와 8000여 명의 신도를 처형하는 등 가톨릭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을 가하였으며 이를 구실로 침공한 프랑스와, 제너럴셔먼호사건을 계기로 개국을 강요한 미국을 격퇴하였다. 한편 명성황후(明成皇后)와 권력투쟁을 벌여 최익현(崔益鉉) 등 유림의 상소로 실각하였고 82년(고종 19년) 임오군란(壬午軍亂)을 계기로 재집권하였으나 청(淸)나라 개입으로 톈진〔天津〕에 연행되어 3년간 유수생활(幽囚生活)을 하였다. 그 뒤 86년 위안스카이(袁世凱)와 결탁하여 큰 아들 재면(載冕)을 옹립하려다 실패하였고, 95년 일본공사 미우라〔三浦梧樓〕가 일으킨 을미사변(乙未事變)을 통하여 정권을 장악하였다. 그러나 아관파천(俄館播遷)으로 친러정부가 성립되자 은퇴하였다. 1907년(순종 1년) 대원왕(大院王)에 추봉되었다. 시호는 헌의(獻懿).

(운현궁 홈페이지에서 내용 발췌)

 

 

 
 
 

여흥부대부인 민씨(驪興府大夫人 閔氏, 1818년 ~ 1898년 1월)는 조선의 왕족, 조선 고종의 어머니. 민치구의 딸로, 흥선대원군과 혼인하여 2남 1녀를 두었다. 일찍이 가톨릭을 믿어 일과문(日課文)을 읽었다. 1863년 둘째 아들 재황이 임금이 되자 운현궁(雲峴宮)에서 감사 미사를 올렸다 하며, 1863년 12월 여흥부대부인으로 봉작되었다. 1866년 흥선대원군이 고종비(妃)를 간택할 때는,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고아가 된 자신의 11촌 아저씨인 민치록(閔致祿)의 딸을 천거, 왕비로 책봉하게 하였다. 민치록 역시 일찍 아버지를 여의었고 가까운 친척이 드문 점을 감안하였으나 뒷날 자신의 친동생인 민겸호를 양자로 들이게 되면서 사태는 달라졌다. 천주교 신자인 민씨는 1887년 한불조약으로 천주교 신앙이 허용되자, 1896년 10월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 주교(主敎) 뮈텔로부터 에게 세례를 받았다. 같은 해 12월에 여흥부대부인에 봉작되었다. 고종의 유모이며 같은 교우인 박(朴)마르타와 함께 프랑스인 주교 베르뇌를 통해 프랑스 정부의 도움으로 남진(南進)하려는 러시아 세력을 꺾으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1907년 순목대원비(純穆大院妃)로 추봉되었다.

(운현궁 홈페이지에서 내용 발췌)

 

 

 

 
 

초휘(初諱)는 재황(載晃)이고 아명(兒名)은 명복(命福)이다. 초자(初字)는 명부(明夫)이며 자는 성림(聖臨)이고 호는 주연(珠淵)이다. 영조의 현손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이하응(李昰應)의 둘째 아들로서 비(妃)는 여성부원군(驪城府院君) 치록(致祿)의 딸 민씨(閔氏)이다. 1863년(철종 14) 12월 철종이 후사 없이 승하하자 조대비(趙大妃)의 전교(傳敎)로 12세에 즉위하였다. 새 왕의 나이가 어리므로 예에 따라 조대비가 수렴청정 하였으나, 대정(大政)을 협찬하게 한다는 명분으로 정권은 대원군에게 넘어가 이로부터 대원군의 10년 집정시대가 열렸다. 척신(戚臣) 세도정치의 배제, 붕당문벌(朋黨門閥)의 폐해 타파, 당파를 초월한 인재의 등용, 의정부의 권한 부활에 따른 비변사(備邊司)의 폐지 및 삼군부(三軍府)의 설치, 한강 양화진(楊花津)의 포대(砲臺) 구축에 따른 경도수비(京都守備) 강화, 양반으로부터의 신포징수(身布徵收), 양반 유생의 발호 엄단 등은 고종 초기 10년 동안 대원군이 이룩한 치적이다. 그러나 경복궁 중수(重修)에 따른 국가재정의 파탄, 악화(惡貨)인 당백전(當百錢)의 주조(鑄造)와 민생의 피폐, 과중한 노역(勞役)으로 인한 민심의 이반과 소요, 천주교 탄압에 따른 8,000여 명의 교도 학살, 쇄국정책, 병인양요(丙寅洋擾), 신미양요(辛未洋擾) 등 어두운 정치적 자취를 남기고 1873년(고종 10년) 11월, 민비의 공작에 따라 대원군이 섭정에서 물러나자 고종이 친정(親政)을 선포하게 되었다.


이로부터 정권은 민비와 그 일족인 민승호(閔升鎬) ·민겸호(閔謙鎬) ·민태호(閔台鎬)로 대표되는 민씨 일문의 세도정치가 다시 시작되었다.1875년 운요호사건[雲揚號事件]을 계기로 쇄국정책을 버리고 일본과 병자수호조약을 체결, 근대 자본주의 국가에 대한 개국과 함께 새로운 문물에 접하게 되자, 개화당이 대두, 조정은 개화 ·사대당(事大黨)의 격심한 알력 속에 빠졌다. 1881년 황준헌(黃遵憲)의 《조선책략 朝鮮策略》의 유입, 반포를 계기로 위정척사파는 마침내 신사척사상소운동(辛巳斥邪上訴運動)을 일으켜 민씨정부규탄의 소리가 높아졌다. 이때 안기영(安驥永) 등에 의하여 국왕의 이복형인 대원군의 서장자(庶長子) 이재선(李載先)을 국왕으로 옹립하고자 하는 국왕폐립음모(國王廢立陰謀)가 꾸며졌으나, 고변(告變)에 의하여 사전에 적발되어 안전을 도모할 수 있었다. 민씨정권은 이 사건을 이용하여 척사상소운동을 강력히 탄압하여 정국을 수습하였다. 그리고 1881년 신사유람단(紳士遊覽團)을 일본에 파견하여 새로운 문물을 시찰하게 하고, 군사제도를 개혁, 신식 훈련을 받은 별기군(別技軍)을 창설하였으나 신제도에 대한 반동으로 1882년 임오군란(壬午軍亂)이 일어나 개화 ·수구(守舊) 양파는 피비린내 나는 싸움을 벌이게 되어 1884년 갑신정변(甲申政變)을 겪고 고종은 개화당에 의해 경우궁(景祐宮) ·계동궁(桂洞宮) 등으로 이어(移御)하였다. 이런 중에도 한·미, 한·영 수호조약을 체결하여 서방국가와 외교의 길을 텄지만, 1885년에는 조선에서 청나라의 우월권을 배제하고, 일본도 동등한 세력을 가질 수 있게 하는 청·일 간의 톈진조약[天津條約]이 체결되어 일본이 한반도에 발판을 굳히는 계기가 되었다.

1896년 2월 러시아 공사 베베르의 계략으로 고종과 세자가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는 아관파천(俄館播遷)이 있자 김홍집·정병하(鄭秉夏)·어윤중(魚允中) 등 개화파 인사가 살해되고 다시 친러내각이 성립되었다. 이로부터 한동안 한국은 러시아의 보호를 받았지만, 고종은 1897년 2월 25일 러시아와 일본의 협상에 따라 경운궁(慶運宮: 후의 덕수궁)으로 환궁, 8월에는 연호를 광무(光武)라 고치고, 10월에는 국호를 대한, 왕을 황제라 하여 고종은 황제즉위식을 가졌다. 1904년(광무 8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의 요구로 고문정치(顧問政治)를 위한 제1차 한·일 협약을 체결, 이듬해 한성의 경찰치안권을 일본헌병대가 장악하였으며, 이해 11월에는 제2차 한·일 협약인 을사조약이 체결되어 외교권을 일본에 빼앗김으로써 병자호란 이래 국가존망의 위기를 맞았다. 이에 우국지사 민영환(閔泳煥)·조병세(趙秉世) ·홍만식(洪萬植) 등은 자결로써 항의하였지만 일본은 1906년 2월 통감부(統監府)를 설치하여 본격적인 대행정치(代行政治) 체제를 갖추었다. 1907년 제2회 만국평화회의가 네덜란드의 헤이그에서 열리자 고종은 밀사 이준(李儁) 등을 파견하여 국권회복을 기도하였으나 일본의 방해로 실패, 오히려 이 밀사사건 때문에 일본의 협박으로 황태자(순종)에게 양위(讓位)한 후 퇴위, 순종황제로부터 태황제(太皇帝)의 칭호를 받고 덕수궁에서 만년을 보내다가 1919년 1월 21일 일본인에게 독살된 것으로 전해진다. 고종의 재위 44년은 민족의 격동기로서 실질적으로 국운(國運)과 명운을 함께 하여, 양위 3년 후에는 나라를 빼앗기는 비운을 맞았다. 능은 금곡(金谷)의 홍릉(洪陵)이고, 저서에 《주연집(珠淵集)》이 있다.
(운현궁 홈페이지에서 내용 발췌)

 

 

 

 

 
 

여흥(驪興), 여성부원군(驪城府院君) 민치록(閔致錄)의 딸로 태어났다. (1851~1895) 8살에 아버지를 여의고 가정이 빈한하여 고생이 많았으나, 민씨 일가에 재주가 비상한 아이로 알려졌다.
1866년(조선 고종 3년) 외척 세도정치의 세력 기반을 없애기 위하여 고종비의 물색에 골몰하던 차에 흥선대원군의 부인 민씨의 추천으로 16살에 왕비로 책봉되었다. 고종은 궁녀 이씨를 총애하고 명성황후를 돌보지 않았으나 예의범절이 밝아 주변 사람들로부터 칭송을 받았다. 궁녀 이씨가 서자 완화궁(完化宮)을 낳고 흥선대원군 이하응이 대단히 기뻐함을 보자 명성황후는 불만과 질투로 정치적인 수완을 부리기 시작했다.
흥선대원군의 집정으로 명성황후에게는 일반의 관심이 미치지 않았던 것이 기회로, 대원군 반대 세력을 규합하여 자신의 세력을 모으는 한편 1874년(조선 고종 11년)에 왕자 척(拓)을 낳았다. 그러나 명성황후의 척족 일파가 득세하여 집권하려는 낌새를 눈치 챈 흥선대원군은 완화궁을 장자로 하여 태자(太子)로 정하려 하였다. 이에 분개한 명성황후는 드디어 흥선대원군과의 경쟁을 시작, 원로(元老)인 이유원(李裕元)을 북경에 보내어 왕자 척(拓)을 정자(正子)로 승인받고, 흥선대원군의 내치가 백성들에게 환영받지 못하는 점을 이용하여, 민승호(閔升鎬)를 시켜 조대비의 조카 조성하(趙成夏)와 결탁하고, 흥선대원군과 사이가 나쁜 김병국(金炳國)일파와 손을 잡고, 흥선대원군의 장자 이재면과 흥선대원군의 형인 이최응(李最應)은 물론 조두순(趙斗淳)·이유원(李裕元)등과 연결을 맺고 명성후 중심의 세력을 만들어 갔다.


드디어 1873년(조선 고종 10년) 흥선대원군의 하야로 고종이 친정(親政)을 하매, 고종은 대외 개방주의를 내세워 수호조약을 체결하고, 안으로는 흥선대원군 내치를 시정해 나갔다. 명성황후 중심의 일족들이 궁내의 요직을 차지하여 흥선대원군과의 반목이 날로 심해지더니 1882년 임오년에 군란이 일어나 명성후는 간신히 충주목 민은식(閔應植)의 집에 피신하여 있으매, 흥선대원군은 재집권을 하고 명성황후가 죽은 것으로 오인하여 명성황후의 장례식까지 치렀다. 그러나 청나라의 간섭으로 군란이 진압되고 흥선대원군이 청으로 납치되어 갔다.
1884년 갑신정변 이후 민씨 일족은 개화당 세력을 밀어내며 사대당으로 다시 집권세력이 되었다. 그러나 1894년 일본의 강압으로 이루어졌던 갑오개혁으로 말미암아 명성황후는 세력을 잃게 되자, 삼국간섭으로 일본의 형세가 나빠지매 친로책(親露策)을 써서 일본 세력을 압박하였다. 1895년 9월 이노우에의 뒤를 이어 부임한 일본 공사 미우라는 명성황후의 친로책과 정면충돌을 하였으며, 명성황후의 이러한 친로책은 일본을 자극하였으며, 1895년 10월 8일 친일파와 일본공사가 보낸 20~30명의 자객에 의해 살해되고, 시신마저 비단이불에 싸 석유를 끼얹어 불질러버렸다. 이를 을미사변(乙未事變)이라 한다.
1897년(대한제국 광무 1년) 명성황후로 추책 되어 남청량리에 장사하였다가, 1919년 고종황제가 승하하자 홍릉에 이장하였다. 경복궁 깊숙한 곳 구 민속박물관(한동안 전승공예관으로도 사용)오른편에 명성황후 조난비가 외로이 세월을 보내고 있다.
(운현궁 홈페이지에서 내용 발췌)

 

 
 
 

1대 이하응(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1820∼1898 순조 20년∼고종 35년)
조선시대 왕족·정치가. 자는 시백(時伯), 호는 석파(石坡). 이름은 하응. 영조의 5대손이며 조선 제26대 왕 고종의 아버지이다. 1843년(헌종 9년) 흥선군(興宣君)에 봉해지고 46년 수릉천장도감(綏陵遷葬都監)의 대존관(大尊官)이 된 뒤 종친부의 유사당상, 오위도총부의 도총관 등을 지냈다. 안동 김씨 세도정치 아래 왕족에 대한 감시가 심하자 호신책으로 시정의 무뢰한과 어울리고 구걸도 서슴지 않아 궁도령(宮道令)이라는 비웃음을 사기도 하였다. 왕실의 조대비(趙大妃)와 밀약하여 철종이 후사 없이 죽자 둘째 아들 명복(命福)을 왕위에 세우고 그는 대원군에 봉해졌다. 그 뒤 섭정을 통해 강력한 혁신정치를 추진, 세도정치를 분쇄하고 당색과 문벌을 초월하여 인재를 등용하였으며 당쟁의 기반이 된 서원을 정리하였다. 또 토호들의 토지겸병을 막고 종래 상민에게만 징수하던 군포를 양반에게도 징수하는 호포법(戶布法)을 실시하였으며 환곡제를 사창제(社倉制)로 개혁하였다. 복식을 간소화하고 사치를 금하였으며, 《대전회통(大典會通)》 《육전조례(六典條例)》 《양전편고(兩銓便攷)》 등 법전을 편찬하여 법질서 확립에 힘썼다. 반면 경복궁 중건을 위해 원납전(願納錢)을 징수하고 역역(力役)을 부담시켜 백성의 원성을 사기도 하였다.
또한 서구 세력의 차단을 위한 쇄국양이(鎖國攘夷) 정책을 시행하였는데 병인박해를 통해 9명의 프랑스 신부와 8000여 명의 신도를 처형하는 등 가톨릭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을 가하였으며 이를 구실로 침공한 프랑스와, 제너럴셔먼호사건을 계기로 개국을 강요한 미국을 격퇴하였다. 한편 명성황후(明成皇后)와 권력투쟁을 벌여 최익현(崔益鉉) 등 유림의 상소로 실각하였고 82년(고종 19) 임오군란(壬午軍亂)을 계기로 재집권하였으나 청(淸)나라 개입으로 톈진〔天津〕에 연행되어 3년간 유수생활(幽囚生活)을 하였다. 그 뒤 86년 위안스카이〔袁世凱〕와 결탁하여 큰 아들 재황(載晃)을 옹립하려다 실패하였고, 95년 일본공사 미우라〔三浦梧樓〕가 일으킨 을미사변(乙未事變)을 통하여 정권을 장악하였다. 그러나 아관파천(俄館播遷)으로 친러정부가 성립되자 은퇴하였다. 1907년(순종 1년) 대원왕(大院王)에 추봉되었다. 시호는 헌의(獻懿).


 

2대 이재면(1845~1912)
완흥군 이재면은 흥선대원군의 장자로 동생 명복보다 7살이 위였으나 왕세자로 간택되지 못하였다. 그는 상처하여 57세에 20세인 계실 이씨와 결혼하였다. 그의 아들 이준용보다 13살 아래였다.



3대 이준용(1870~1917)
영선군 이준용은 이재면의 장자로 노락당 뒤쪽에 송정 사랑채를 지어 그곳에서 기거하다가 운현궁으로 거처를 옮겼다. 1896년 을미사변 직후 일본으로 건너가 신학문을 연마한 후 12년만인 1908년에 귀국하여 운현궁에서 살았다. 그의 부친 이재면이 세상을 떠난 뒤 5년 후인 1917년 47세로 세상을 떠났다. 이준용의 뒤를 이을 혈육이 없이 세상을 떠나자 고종의 다섯째 아들인 의친왕의 아들 이우를 양자로 맞이하였다.
운현궁의 내당 살림살이는 이재면의 부인 이씨(1883~1978)가 맡았어야 하는데 한 세대를 건너 대원군의 손자며느리인 이준용의 계실 광산 김씨(1878~1955)가 내당살림을 맡게 되었다.

4대 이우(1912~1943)
흥영군 이우는 이준용의 양자로 들어갈 때 나이가 5세이었다. 10세에 일본으로 가서 일본 군인으로 복무하게 되었으니 이준용이 일본으로 건너간 것이나 이우가 일본으로 가게 된 것은 모두 일본의 정략적인 음모술책에 기인한 것이다. 일본에서 이우와 결혼한 박찬주(1914~1995)는 박영효의 증손녀딸이다.

5대 이청 (1936~ )
이우의 큰아들 이청은 흥선대원군의 5대손이 되고 고종으로부터는 4대손이 되는데 외모라든가 풍기는 모습이 고종을 닮았고 왕족으로서의 품위를 갖추어 행동하려고 하였다. 일본에서 자란 이청은 어린 시절을 운현궁에서 살지 않았으며 가끔 휴가를 받아 한국에 왔을 때 운현궁에서 지냈을 뿐이다. 이청씨가 운현궁의 소유(관리)로 된 것은 1948년부터이다. 운현궁 관리에 어려움이 있어 1993년 서울시에서 매입하여 서울정도 600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관리 운영하게 되었다.
(운현궁 홈페이지에서 내용 발췌)

 

 

 

 

 입구는 권세가의 상징인 솟을 대문을 통하여 안으로 들어가게 된다.

솟을대문은 문의 종류로 문이 설치되는 행랑채나 벽보다 대문의 높이를 더 높게 한 건축양식이다.

평대문이 아닌 솟을대문을 세운 이유는 지체 높은 왕실집안이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쉽사리 출입하는 곳이 아님을 각인한 뒤 노안당과 마주한다.

 

 

 운현궁(雲峴宮)은 조선후기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석파 이하응 (李昰應 1820~1898) 즉, 흥선대원군의 저택으로

조선의 임금인 고종(高宗 1852~1919)이 유년시절을 보낸 역사적으로 의미있는 곳이다.

근처의 고개이름 혹은 관현의 이름을 따서 지금까지 운현궁으로 불려지게 되었다고 하며

자연스레 운현궁(雲峴宮)은 역사의 중심무대로 파란만장한 역사가 펼쳐진 곳이다.

입구를 들어서는 순간, 맑은 푸른빛 하늘 아래 고고하게 자리한 운현궁(雲峴宮)이 한눈에 들어오며

전체적으로 고풍적인 왕실의 분위기에 매료된다.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넓은 마당을 만나고 시원한 큰나무를 만난다

왼쪽이 노락당으로 들어가는 대문이다.

 

대문을 들어서면 정면에 노안당으로 들어가는 문이 보이고

오른쪽은 수직사(守直舍), 왼쪽에는 물품들을 보관하던 긴 행랑채가 있다.

 

 

 

수직사(守直舍)

운현궁 정문 오른쪽에 있는 행각으로, 운현궁의 경비와 관리 업무를 맡은 이들이 거처했던 곳이다.

고종이 왕으로 즉위하면서부터 흥선대원군의 거처인 운현궁의 규모가 상당히 커졌고,

 흥선대원군의 권력이 막강해지면서 경호가 필요해지자 궁에서 경비병이 파견되고, 관리인들이 많아졌다고 한다.

 현재 수직사의 방 안에 화로·가구·호롱불 등의 생활용품으로 당시의 모습을 재현해 놓았다

 

 건물은 앞면 8칸에 우진각 지붕을 하고 있으며 일반적인 궁궐이나 관청의 행랑 건물을 하고 있다.

 

 옛건물을 보면서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살아있는 나무의 결에 눈이간다

좁든 툇마루에 앉아 잠시 쉬어가는 시간도 좋겠다.

 

 

수직사 내부 온돌방

 

수직사 내부 온돌방

 

수직사앞 우물

 

내부마루방

 

 

흥선대원군이 주로 거처했던 노안당으로 들어가는 대문

 

노안당 입구 대문, 대문옆 문간방에는 운현궁에 파견된 관리가 대기하던 곳으로 보인다.

 

 

노안당 대문앞, 대원군이 말을 탈때 올라섰던 노듯돌

 

 흥선대원군이 주로 거처했던 노안당의 행랑채

대원군의 시중을 들던 사람들로 천희연, 하정일, 장순규, 안필주등이 거처하던 곳이다

이들 4명의 성을 따서 '천하장안(千河張安)'이라고 불렀으며

흥선대원군의 경호와 정보수집등을 도맡아 하던 사람들이다.

 

 

 

분위기에 취해 첫 건물지인 노안당으로 들어선다.

순간적으로 ‘아!’하고 탄성과 함께 그 위용에 저절로 감탄사가 나온다.

저 하늘까지 닿으려는 팔작지붕의 기세가 느껴지는가.

조용하면서도 웅장한 무게감은 표현하기 어려울 만치 강한 힘이 지니고 있었다.

노안(老安)이라는 명칭은 논어에서 인용한 것으로

편안한 노년을 위함과 노인을 편히 모셔야 한다는 치국의 뜻을 담아 노안당이라 명하였다고 한다.

이름 하나도 큰 뜻을 새겨 나라에 대한 열망과 기대를 담아내고자 한 정신에 다시금 놀란다.

노안당의 현판은 당대의 최고의 글씨를 자랑하는 김정희의 추사체를 집자한 것이라고 한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부분은 햇빛을 차단하기 위해 설치한 차양(遮陽)의 존재였다.

차양은뜨거운 여름날 시원한 그늘이 되며 추운 겨울에는 햇빛이 더욱 깊게 들어와 따스함을 느낄 수 있도록 설계된 것으로,

조선후기건축의 시대적 특징 중 하나라고 한다. 하나의 부재 사용도 과학적이고 치밀하게 계획함으로써

 ‘한옥은 여름에 덥고 겨울에 춥다’는 편견에 상당한 오류가 있음을 말해준다.

 

 대원군은 평소 난(蘭)을 잘 쳤다고 한다.

그것은 미술사적으로도 가치가 높은 대원군의 묵란도(墨蘭圖)가 여러 작품 남아 있어

그가 추구했던 예술성이 후대까지 전해지고 있다.

차양(遮陽)은 그러한 대원군의 미적 향유에도 큰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운현궁 곳곳에 있는 정원을 통해서도 대원군이 공간에 대한 심미안이 남달랐음을 보여준다.

 

 

추사 김정희 글씨로 보이는 '무량수각(無量壽閣)

천량수각으로 읽기 쉬운데 무량수각이라고 한다.

 

 

 

노안당의 안쪽 마루, 영화루(迎和樓) 대원군이 손님을 맞아 대접하던 곳이다.

  

 

   

 노안당 외부 글씨문양

 

 

봉사식:고종을 왕으로 정하는 교서를 받는 의식

 

 등극하기전의 고종의 모습 재현

 

  

 난을 치고 있는 흥선대원군

흥선대원군은 친척인 추사 김정희의 문하에 들어가 글과 그림을 배웠고

묵란(墨蘭)으로 당대에 이름을 떨쳤다

추사는 그의 묵란을 가리켜 '압록강 동쪽에는 이만한 작품이 없다'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노안당앞 정원

노안당 마당의 흙은 마사토이다

마사토는 화강암이 부서진 흙이라고 보면 된다.

여름에 차양으로 직접적인 햇빛을 차단하고

마당의 마사토에 햇빛이 반사되어 반사광을 실내로 유입시켜 더욱 쾌적한 실내를 만드는역활을 하였다.

또한 전면에는 자연 환기기능을 가진 환풍구가 설치되어있다.


 

 

 

 

툇마루 난간의 문양

 

 노안당 후면

 노안당의 후면으로 들어서면 앞으로 보게 될 노안당의 측면과 함께 노락당과 이로당이 하나의 길로 연결된 장관을 볼 수 있다.

 건물의 구조와 배치가 정교한 계획에 의하여 앉혀졌음에 감탄하고 잘 구획된 복합적인 구조미에 새삼 놀라워 말을 잃는다.

또한 그 길을 따라 걷다 보면 각 공간에 맞춰진 장식적인 벽체들로 인해 눈이 즐겁기까지 하다.

노안당을 지나 행각을 통해 노락당(老樂堂)으로 향했다.

 

   

노안당 후면 행랑채

 

 

 

 노락당으로 들어가는 문

노락당을 통하여 이로당까지 이어진다.

 노락당으로 들어가는 솟을 대문

 

 노락당으로 들어갑니다

 

 노락당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오른쪽으로 내부로 들어가는 문이 있다.

 

노락당은 운현궁의 안채에 해당되는 곳으로 고종과 명성황후의 가례가 행해졌던 곳이다.

노안당과 마찬가지로 조용하고 단정하게 지어진 한옥의 모습이었다.

한옥은 모든 자제를 자연으로부터 얻으며 기단에서 기와까지 하나하나 다듬어 조립한 구조이다.

예로부터 한옥은 못을 사용하지 않았다고 한다.

즉, 모든 부재들이 서로 맞물리도록 이를 맞추고 끼워 넣어 만들어진 하나의 완전한 결정체인 것이다.

 


 

 

 

노락당(老樂堂) 운현궁에서 가장크고 중심이 되는 건물이다

1866년(고종3년) 고종이 삼간택이 끝난후 명성왕후가 왕비수업을 받던 곳이고

고종과 명성왕후의 가례가 이루어진 곳이다.

현직 임금이 궁궐이 아닌 사저(私邸)에서 혼례를 올렸던 유일한 곳이다.

 

 

 

 

 

 

 노락당앞의 행랑채

 

 

 

 

 

 

   

일반적으로 왕비는 궐밖 출입이 쉽지않았는데

부모님의 생신, 병문안, 상(裳)등의 제한적인 경우에

사가를 방문 할 수있었다.

명성왕후가 부대부인의 생신을 맞이하여 세자를 데리고

운현궁을 방문하여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모습이다.

 

명성왕후는 당의를 착용하고 부대부인은 평상복인 치마와 마고자를 착용하였다.

세자는 오방방 두루마기 위에 사규삼을 착용하였고

대원군의 손자인 이규삼은 오방장 두루마기위에 전복을 착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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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락당의 소박한 내부

 

   

궁궐이나 오래된 한옥을 방문하면 습관처럼 문살에 눈이 간다.

 

 

   

 

   

노락당 건물 양쪽에 부엌처럼 보이은데 한쪽은 창고의 역활을 한 것 같다.

 

 햇빛을 차단하기 위해 설치한 차양(遮陽)의 존재였다.

차양은뜨거운 여름날 시원한 그늘이 되며 추운 겨울에는 햇빛이 더욱 깊게 들어와 따스함을 느낄 수 있도록 설계된 것으로,

조선후기건축의 시대적 특징 중 하나라고 한다.

하나의 부재 사용도 과학적이고 치밀하게 계획함으로써

‘한옥은 여름에 덥고 겨울에 춥다’는 편견에 상당한 오류가 있음을 말해준다.

 

 

노락당 뒷편 툇마루와 굴뚝 

 

 잘 발라진 창호지의 문과 문살이 정갈하게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모든 구성은 정성과 성의가 담겨서 만들어졌다.

 

 조선 왕실가문의 품위와 궁으로서의 고매한 면모를 여실히 갖추고 있는 운현궁.

높은 권위를 상징했던 웅장하고도 과학적인 구조에서도 한옥이 갖는 소박함과 섬세함도 잃지 않았다.

이처럼 아름다운 우리 목조건축. 그 정점에 서있는 운현궁!

노락당 후원에서도 그 품위는 단아하고 아름다운 면모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자...!!

이제 이 작은 문을 통해서 이로당으로 들어가 보자.

 

 

 

노락당에서 이로당으로  하인들이 드나들던 작은 문

 

이로당은 운현궁에서 가장 안쪽에 위치한 건물로 안채에 해당하는 건물이다

원래는 노락당이 안채였으나 노락당에서 고종의 가례의식을 치루어 안채로 사용할 수 없어

고종등극이후  새로 지은 건물이라 할 수있다.

건물은 남자들이 쉽게 들어 올 수없도록 중정이 있는 ㅁ字형의 구조의 건물배치를 하고있다.

명성왕후가 왕비수업을 받았던 노락당과는 복도로 연결되어 있으며

마루와 문창살, 건물간 통로등이 구한말에 지어진 건물의 특색을 잘 나타내고 있는 건물이다.

 

이로당은 입구자형 평면의 건물로서 당초에는 정면 7칸, 측면 7칸이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서측면 전체에 덧달아낸 부분으로 인해 정면이 8칸으로 되어 있었다.

 방 배치는, 남측채는 서측 온돌방, 중앙 3칸 대청, 동측 온돌방,

그리고 동쪽 끝으로 통로로 사용되는 퇴칸이 있는데

여기에서 남측으로 이어지는 복도각을 통해 노락당 북행각을 거쳐 노락당으로 연결된다.

 

 

남측으로 이어지는 복도각을 통해 노락당 북행각을 거쳐 노락당으로 연결된다.

이로당은 고종이 즉위한 이후 지은 건물이라 궁궐건물처럼 축대를 상당히 높히 쌓고

그 위에 건물을 올려 놓았다.

 

이로당의 편액과 주련

운현궁의 모든 편액은 추사의 글씨체를 집자한 것이라 한다.

 

뒷마당에서 본 복도각

이로당에서 시선을 끌었던 것은 노락당과 연결되는 행각이 있는데

그 사이에 문의 형태이다. 구조적으로 문이 설치된 행각의 높낮이를 달리 지은 것이다.

기존의 한옥의 배치가 대칭을 선호했다면 이러한 운현궁의 비대칭적인 구조는 원칙을 지키되, 발상의 자유로움을 추구한 고도의 건축미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건축미와 더불에 문에 새겨진 당초문 조각은

가히 예술적인 한 폭의 조각작품을 보는 듯 하다.

자칫 딱딱할 수 있는 목조조각이 정갈한 한옥 안에서 충분히 큰 빛으로 작용할 수 있음을 여지없이 보여주고 있었다.

그 문을 통과하면 후원으로 들어선다.

앞서 말했던 노안당 후면으로부터 연결된 그 길의 끝에 해당되는 곳이다.

 

금남구역이었던 이로당

대원군이 자신만이 다닐수 있게 겪을 높인 문으로

사람을 우대할때 이문으로 나가게 했다고 한다.

이때 중문을 '등용문'이라고 불렀다고  했다.

 

뒷마당에서 이로당 안쪽 마당으로 들어가는 문

당초문 조각이 아름답다.

 

 

 

 

실내는 한옥의 탁월한 통풍의 비법으로 설명되는

잘 발라진 창호지의 문과 창이 정갈하게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모든 구성은 정성과 성의가 담겨서 만들어졌으며

특히 잘 짜여진 불발기창은 한옥의 담담한 맛과 멋스러움을 한껏 살려내고 있었다

 

'운하연지' 내부

 

운하연지(雲下硯池)라고 쓰여 있는 못

'구름아래 벼루물을 담아 둔 연못이라는 뜻이다

건물자체가 높기 때문에 건물안에서도 볼수 있게끔 기존의 것보다 높게 만들어졌다

화재시 방화수 역활을 하였다.

 

 이노당 북쪽의 뒷모습

 

 이노당 북쪽 뒷편

문에 쇠고리가 달려있다.

아마도 문을 열었을때 고정시키는데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이로당 아궁이

 이로당 동쪽 끝에 있는 퇴칸에서 남쪽으로 이어지는 복도각를 통하면 노락당 북행각을 거쳐 노락당으로 이어진다.

 대원군이 난을 좋아해서 난을 올려놓았던 '무승대(茂承臺)'이다

낮에는 대청마루에, 밤에는 이곳에 올려놓았다고 한다.

무승대 옆 작은 문은 석빙고 입구이다.

 

 

 이 경송비(慶松碑)는 고종이 어릴때 오르내리며 놀던 소나무를 기리는 비이다.

왕이되어 창덕궁에 들어간 후 소나무가 그리워 정이품(正二品) 금관자(金貫子)를 달아주고

대부송(大夫松)이라 불렀다고 한다.

소나무는 일제강점기에 죽은 것으로 추측이 되고 비만 이곳으로 옮겨놓았다고 한다.

 

 

동쪽 뒷마당 담장무늬

원속에 원을 넣어 연결한 모양인 연환문(連環紋)과 아(亞)문양을 끊이지 않게 새겨 넣어

영원히 뻗어나가라는 뜻으로 장수(장수)를 뜻한다.

 

 이로당 동쪽 뒷마당의 우물

 

  이노당 후원 마당에서 본 건물의 모습과 화단

 

이노당 동쪽 뒷마당에서 본 건물

난간이 있는 누마루 형태로 만들어 놓았다.

 

 

 

 

 현궁 유물전시관

 

 

 

 

유물전시관 입구

 

 

 

유물전시관 내부

 

흥선대원군의 영정

 

 

흥선대원군과 부대부인 민씨 재현

 

 

운현궁에서 명성왕후와 고종 재현

 

 

 2점의 화조도와 노락당 상량문

 

운현궁에 소속된 둔토의 소재, 등급, 면적, 소유주등을 기록한 양안

 

 이하응의 낙관 '석파'

 

 

 

대원군이 사용하던 연적과 붓

 

당백전

 

                                             

주칠한 나전칠기함과 그외 생활용품

 

 

 

대원군이 집권하던 시기는 근대화로 가는 과도기였다.

안으로는 개혁정지, 밖으로는 쇄국양이 정책을 폈다

 

'개항과 외세의 침략' 

대원군의 실각이후 1876년 고종은 개항을 하였다.

일본은 1875년 운요호등 군함을 동래 앞바다에 침공하여 무력 시위를 하였다.

그 이후 제물포조약, 수호조규속약, 갑신정변, 후의 한성조약등 불평등 조약을 거듭 체결하였다.

조선은 일본뿐만 아니라 청국, 서구제국주의에게도 문호를 개방하지 않을 수 없다고 적어 놓았다.  

 

 

1866년 천주교 박해에 대한 보복으로

프랑스 군대가 침입하는 병인양요와 제너럴셔먼호 사건이 일어났으며

1871년에는 미국 아시아 함대가 강화도에 침입하는 신미양요가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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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세에 대항하기 위하여 사용했던 무기들

 

대원군은 두번의 외세 침입과 남연군묘 도굴 사건으로 척화비를 세우게 되고

통상거부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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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당시 머리에 쓰던 것들

떠구지 머리는 조선시대 궁중에서 예복을 입을때 머리에 쓰던 장식용 머리로 보기만 하여도 대단함이 느껴진다.

 

 

흥선대원군의 교의

혼백을 모셔 놓은 틀,

혼백은 원래 사람이 살았을때 입던 옷자락으로 만들었으나

요즘은 삼메나 흰종이로 접어 만들며, 거기에 죽은 사람의 혼이 깃들어 있다고 믿었다. 

 

 

 

사랑채 재현

 

 

 

수납채례(受納采禮)복식을 하고 있는 민비

수납채례란 청혼을 받아들이는 의식

 

 

노락당과 이로당의 외부 담장

이담장 끝에 유물 전시관이 있다

 

 

유물전시관 앞 우물

 

노락당 외부 담장 문양

 

 

 

5대 궁궐을 답사를 마치고

고종과 흥선대원군의 발자취를 더욱 따라가고싶어 운현궁을 둘러보았다.

 

 한때 궁궐보다 더 큰 힘을 가졌던 운현궁이었지만

세월이 흘러 지금,

운현궁의 여름은 조용하기 만했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섬세하고 단아한 건축미에 마음을 모두 빼앗기는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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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종묘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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