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6.30. 일요일
5대궁궐 답사를 마치고, 뿌듯함도 있었지만 좀더 많은 조선의 이야기를 알고 싶었다.
그래서 내친김에 궁궐은 아니지만
궁궐 못지않은 힘을 가졌던 운현궁 답사를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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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특별시 사적 제25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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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현궁의 인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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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구는 권세가의 상징인 솟을 대문을 통하여 안으로 들어가게 된다.
솟을대문은 문의 종류로 문이 설치되는 행랑채나 벽보다 대문의 높이를 더 높게 한 건축양식이다.
평대문이 아닌 솟을대문을 세운 이유는 지체 높은 왕실집안이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쉽사리 출입하는 곳이 아님을 각인한 뒤 노안당과 마주한다.
운현궁(雲峴宮)은 조선후기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석파 이하응 (李昰應 1820~1898) 즉, 흥선대원군의 저택으로
조선의 임금인 고종(高宗 1852~1919)이 유년시절을 보낸 역사적으로 의미있는 곳이다.
근처의 고개이름 혹은 관현의 이름을 따서 지금까지 운현궁으로 불려지게 되었다고 하며
자연스레 운현궁(雲峴宮)은 역사의 중심무대로 파란만장한 역사가 펼쳐진 곳이다.
입구를 들어서는 순간, 맑은 푸른빛 하늘 아래 고고하게 자리한 운현궁(雲峴宮)이 한눈에 들어오며
전체적으로 고풍적인 왕실의 분위기에 매료된다.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넓은 마당을 만나고 시원한 큰나무를 만난다
왼쪽이 노락당으로 들어가는 대문이다.
대문을 들어서면 정면에 노안당으로 들어가는 문이 보이고
오른쪽은 수직사(守直舍), 왼쪽에는 물품들을 보관하던 긴 행랑채가 있다.
수직사(守直舍)
운현궁 정문 오른쪽에 있는 행각으로, 운현궁의 경비와 관리 업무를 맡은 이들이 거처했던 곳이다.
고종이 왕으로 즉위하면서부터 흥선대원군의 거처인 운현궁의 규모가 상당히 커졌고,
흥선대원군의 권력이 막강해지면서 경호가 필요해지자 궁에서 경비병이 파견되고, 관리인들이 많아졌다고 한다.
현재 수직사의 방 안에 화로·가구·호롱불 등의 생활용품으로 당시의 모습을 재현해 놓았다
건물은 앞면 8칸에 우진각 지붕을 하고 있으며 일반적인 궁궐이나 관청의 행랑 건물을 하고 있다.
옛건물을 보면서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살아있는 나무의 결에 눈이간다
좁든 툇마루에 앉아 잠시 쉬어가는 시간도 좋겠다.
수직사 내부 온돌방 |
수직사 내부 온돌방 |
수직사앞 우물 |
내부마루방 |
흥선대원군이 주로 거처했던 노안당으로 들어가는 대문
노안당 입구 대문, 대문옆 문간방에는 운현궁에 파견된 관리가 대기하던 곳으로 보인다.
노안당 대문앞, 대원군이 말을 탈때 올라섰던 노듯돌
흥선대원군이 주로 거처했던 노안당의 행랑채
대원군의 시중을 들던 사람들로 천희연, 하정일, 장순규, 안필주등이 거처하던 곳이다
이들 4명의 성을 따서 '천하장안(千河張安)'이라고 불렀으며
흥선대원군의 경호와 정보수집등을 도맡아 하던 사람들이다.
분위기에 취해 첫 건물지인 노안당으로 들어선다.
순간적으로 ‘아!’하고 탄성과 함께 그 위용에 저절로 감탄사가 나온다.
저 하늘까지 닿으려는 팔작지붕의 기세가 느껴지는가.
조용하면서도 웅장한 무게감은 표현하기 어려울 만치 강한 힘이 지니고 있었다.
노안(老安)이라는 명칭은 논어에서 인용한 것으로
편안한 노년을 위함과 노인을 편히 모셔야 한다는 치국의 뜻을 담아 노안당이라 명하였다고 한다.
이름 하나도 큰 뜻을 새겨 나라에 대한 열망과 기대를 담아내고자 한 정신에 다시금 놀란다.
노안당의 현판은 당대의 최고의 글씨를 자랑하는 김정희의 추사체를 집자한 것이라고 한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부분은 햇빛을 차단하기 위해 설치한 차양(遮陽)의 존재였다.
차양은뜨거운 여름날 시원한 그늘이 되며 추운 겨울에는 햇빛이 더욱 깊게 들어와 따스함을 느낄 수 있도록 설계된 것으로,
조선후기건축의 시대적 특징 중 하나라고 한다. 하나의 부재 사용도 과학적이고 치밀하게 계획함으로써
‘한옥은 여름에 덥고 겨울에 춥다’는 편견에 상당한 오류가 있음을 말해준다.
대원군은 평소 난(蘭)을 잘 쳤다고 한다.
그것은 미술사적으로도 가치가 높은 대원군의 묵란도(墨蘭圖)가 여러 작품 남아 있어
그가 추구했던 예술성이 후대까지 전해지고 있다.
차양(遮陽)은 그러한 대원군의 미적 향유에도 큰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운현궁 곳곳에 있는 정원을 통해서도 대원군이 공간에 대한 심미안이 남달랐음을 보여준다.
추사 김정희 글씨로 보이는 '무량수각(無量壽閣)
천량수각으로 읽기 쉬운데 무량수각이라고 한다.
노안당의 안쪽 마루, 영화루(迎和樓) 대원군이 손님을 맞아 대접하던 곳이다.
노안당 외부 글씨문양
봉사식:고종을 왕으로 정하는 교서를 받는 의식 |
등극하기전의 고종의 모습 재현 |
난을 치고 있는 흥선대원군
흥선대원군은 친척인 추사 김정희의 문하에 들어가 글과 그림을 배웠고
묵란(墨蘭)으로 당대에 이름을 떨쳤다
추사는 그의 묵란을 가리켜 '압록강 동쪽에는 이만한 작품이 없다'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노안당앞 정원
노안당 마당의 흙은 마사토이다
마사토는 화강암이 부서진 흙이라고 보면 된다.
여름에 차양으로 직접적인 햇빛을 차단하고
마당의 마사토에 햇빛이 반사되어 반사광을 실내로 유입시켜 더욱 쾌적한 실내를 만드는역활을 하였다.
또한 전면에는 자연 환기기능을 가진 환풍구가 설치되어있다.
툇마루 난간의 문양
노안당 후면
노안당의 후면으로 들어서면 앞으로 보게 될 노안당의 측면과 함께 노락당과 이로당이 하나의 길로 연결된 장관을 볼 수 있다.
건물의 구조와 배치가 정교한 계획에 의하여 앉혀졌음에 감탄하고 잘 구획된 복합적인 구조미에 새삼 놀라워 말을 잃는다.
또한 그 길을 따라 걷다 보면 각 공간에 맞춰진 장식적인 벽체들로 인해 눈이 즐겁기까지 하다.
노안당을 지나 행각을 통해 노락당(老樂堂)으로 향했다.
노안당 후면 행랑채
노락당으로 들어가는 문 노락당을 통하여 이로당까지 이어진다. |
노락당으로 들어가는 솟을 대문
노락당으로 들어갑니다
노락당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오른쪽으로 내부로 들어가는 문이 있다.
노락당은 운현궁의 안채에 해당되는 곳으로 고종과 명성황후의 가례가 행해졌던 곳이다.
노안당과 마찬가지로 조용하고 단정하게 지어진 한옥의 모습이었다.
한옥은 모든 자제를 자연으로부터 얻으며 기단에서 기와까지 하나하나 다듬어 조립한 구조이다.
예로부터 한옥은 못을 사용하지 않았다고 한다.
즉, 모든 부재들이 서로 맞물리도록 이를 맞추고 끼워 넣어 만들어진 하나의 완전한 결정체인 것이다.
노락당(老樂堂) 운현궁에서 가장크고 중심이 되는 건물이다
1866년(고종3년) 고종이 삼간택이 끝난후 명성왕후가 왕비수업을 받던 곳이고
고종과 명성왕후의 가례가 이루어진 곳이다.
현직 임금이 궁궐이 아닌 사저(私邸)에서 혼례를 올렸던 유일한 곳이다.
노락당앞의 행랑채
일반적으로 왕비는 궐밖 출입이 쉽지않았는데
부모님의 생신, 병문안, 상(裳)등의 제한적인 경우에
사가를 방문 할 수있었다.
명성왕후가 부대부인의 생신을 맞이하여 세자를 데리고
운현궁을 방문하여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모습이다.
명성왕후는 당의를 착용하고 부대부인은 평상복인 치마와 마고자를 착용하였다.
세자는 오방방 두루마기 위에 사규삼을 착용하였고
대원군의 손자인 이규삼은 오방장 두루마기위에 전복을 착용하였다.
노락당의 소박한 내부
궁궐이나 오래된 한옥을 방문하면 습관처럼 문살에 눈이 간다.
노락당 건물 양쪽에 부엌처럼 보이은데 한쪽은 창고의 역활을 한 것 같다.
햇빛을 차단하기 위해 설치한 차양(遮陽)의 존재였다.
차양은뜨거운 여름날 시원한 그늘이 되며 추운 겨울에는 햇빛이 더욱 깊게 들어와 따스함을 느낄 수 있도록 설계된 것으로,
조선후기건축의 시대적 특징 중 하나라고 한다.
하나의 부재 사용도 과학적이고 치밀하게 계획함으로써
‘한옥은 여름에 덥고 겨울에 춥다’는 편견에 상당한 오류가 있음을 말해준다.
노락당 뒷편 툇마루와 굴뚝
잘 발라진 창호지의 문과 문살이 정갈하게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모든 구성은 정성과 성의가 담겨서 만들어졌다.
조선 왕실가문의 품위와 궁으로서의 고매한 면모를 여실히 갖추고 있는 운현궁.
높은 권위를 상징했던 웅장하고도 과학적인 구조에서도 한옥이 갖는 소박함과 섬세함도 잃지 않았다.
이처럼 아름다운 우리 목조건축. 그 정점에 서있는 운현궁!
노락당 후원에서도 그 품위는 단아하고 아름다운 면모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자...!!
이제 이 작은 문을 통해서 이로당으로 들어가 보자.
노락당에서 이로당으로 하인들이 드나들던 작은 문
이로당은 운현궁에서 가장 안쪽에 위치한 건물로 안채에 해당하는 건물이다 원래는 노락당이 안채였으나 노락당에서 고종의 가례의식을 치루어 안채로 사용할 수 없어 고종등극이후 새로 지은 건물이라 할 수있다. 건물은 남자들이 쉽게 들어 올 수없도록 중정이 있는 ㅁ字형의 구조의 건물배치를 하고있다. 명성왕후가 왕비수업을 받았던 노락당과는 복도로 연결되어 있으며 마루와 문창살, 건물간 통로등이 구한말에 지어진 건물의 특색을 잘 나타내고 있는 건물이다.
이로당은 입구자형 평면의 건물로서 당초에는 정면 7칸, 측면 7칸이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서측면 전체에 덧달아낸 부분으로 인해 정면이 8칸으로 되어 있었다. 방 배치는, 남측채는 서측 온돌방, 중앙 3칸 대청, 동측 온돌방, 그리고 동쪽 끝으로 통로로 사용되는 퇴칸이 있는데 여기에서 남측으로 이어지는 복도각을 통해 노락당 북행각을 거쳐 노락당으로 연결된다.
남측으로 이어지는 복도각을 통해 노락당 북행각을 거쳐 노락당으로 연결된다. 이로당은 고종이 즉위한 이후 지은 건물이라 궁궐건물처럼 축대를 상당히 높히 쌓고 그 위에 건물을 올려 놓았다.
이로당의 편액과 주련 운현궁의 모든 편액은 추사의 글씨체를 집자한 것이라 한다.
뒷마당에서 본 복도각 이로당에서 시선을 끌었던 것은 노락당과 연결되는 행각이 있는데 그 사이에 문의 형태이다. 구조적으로 문이 설치된 행각의 높낮이를 달리 지은 것이다. 기존의 한옥의 배치가 대칭을 선호했다면 이러한 운현궁의 비대칭적인 구조는 원칙을 지키되, 발상의 자유로움을 추구한 고도의 건축미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건축미와 더불에 문에 새겨진 당초문 조각은 가히 예술적인 한 폭의 조각작품을 보는 듯 하다. 자칫 딱딱할 수 있는 목조조각이 정갈한 한옥 안에서 충분히 큰 빛으로 작용할 수 있음을 여지없이 보여주고 있었다. 그 문을 통과하면 후원으로 들어선다. 앞서 말했던 노안당 후면으로부터 연결된 그 길의 끝에 해당되는 곳이다.
금남구역이었던 이로당 대원군이 자신만이 다닐수 있게 겪을 높인 문으로 사람을 우대할때 이문으로 나가게 했다고 한다. 이때 중문을 '등용문'이라고 불렀다고 했다.
뒷마당에서 이로당 안쪽 마당으로 들어가는 문 당초문 조각이 아름답다.
실내는 한옥의 탁월한 통풍의 비법으로 설명되는 잘 발라진 창호지의 문과 창이 정갈하게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모든 구성은 정성과 성의가 담겨서 만들어졌으며 특히 잘 짜여진 불발기창은 한옥의 담담한 맛과 멋스러움을 한껏 살려내고 있었다
'운하연지' 내부
운하연지(雲下硯池)라고 쓰여 있는 못 '구름아래 벼루물을 담아 둔 연못이라는 뜻이다 건물자체가 높기 때문에 건물안에서도 볼수 있게끔 기존의 것보다 높게 만들어졌다 화재시 방화수 역활을 하였다.
이노당 북쪽의 뒷모습
이노당 북쪽 뒷편 문에 쇠고리가 달려있다. 아마도 문을 열었을때 고정시키는데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이로당 아궁이 이로당 동쪽 끝에 있는 퇴칸에서 남쪽으로 이어지는 복도각를 통하면 노락당 북행각을 거쳐 노락당으로 이어진다. 대원군이 난을 좋아해서 난을 올려놓았던 '무승대(茂承臺)'이다 낮에는 대청마루에, 밤에는 이곳에 올려놓았다고 한다. 무승대 옆 작은 문은 석빙고 입구이다.
이 경송비(慶松碑)는 고종이 어릴때 오르내리며 놀던 소나무를 기리는 비이다. 왕이되어 창덕궁에 들어간 후 소나무가 그리워 정이품(正二品) 금관자(金貫子)를 달아주고 대부송(大夫松)이라 불렀다고 한다. 소나무는 일제강점기에 죽은 것으로 추측이 되고 비만 이곳으로 옮겨놓았다고 한다.
동쪽 뒷마당 담장무늬 원속에 원을 넣어 연결한 모양인 연환문(連環紋)과 아(亞)문양을 끊이지 않게 새겨 넣어 영원히 뻗어나가라는 뜻으로 장수(장수)를 뜻한다.
이로당 동쪽 뒷마당의 우물 이노당 후원 마당에서 본 건물의 모습과 화단
이노당 동쪽 뒷마당에서 본 건물 난간이 있는 누마루 형태로 만들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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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현궁 유물전시관 |
유물전시관 입구
유물전시관 내부
흥선대원군의 영정
흥선대원군과 부대부인 민씨 재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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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현궁에서 명성왕후와 고종 재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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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점의 화조도와 노락당 상량문
운현궁에 소속된 둔토의 소재, 등급, 면적, 소유주등을 기록한 양안
이하응의 낙관 '석파'
대원군이 사용하던 연적과 붓 |
당백전 |
주칠한 나전칠기함과 그외 생활용품
대원군이 집권하던 시기는 근대화로 가는 과도기였다.
안으로는 개혁정지, 밖으로는 쇄국양이 정책을 폈다
'개항과 외세의 침략'
대원군의 실각이후 1876년 고종은 개항을 하였다.
일본은 1875년 운요호등 군함을 동래 앞바다에 침공하여 무력 시위를 하였다.
그 이후 제물포조약, 수호조규속약, 갑신정변, 후의 한성조약등 불평등 조약을 거듭 체결하였다.
조선은 일본뿐만 아니라 청국, 서구제국주의에게도 문호를 개방하지 않을 수 없다고 적어 놓았다.
1866년 천주교 박해에 대한 보복으로
프랑스 군대가 침입하는 병인양요와 제너럴셔먼호 사건이 일어났으며
1871년에는 미국 아시아 함대가 강화도에 침입하는 신미양요가 일어났다.
외세에 대항하기 위하여 사용했던 무기들
대원군은 두번의 외세 침입과 남연군묘 도굴 사건으로 척화비를 세우게 되고
통상거부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하게 된다.
그당시 머리에 쓰던 것들
떠구지 머리는 조선시대 궁중에서 예복을 입을때 머리에 쓰던 장식용 머리로 보기만 하여도 대단함이 느껴진다.
흥선대원군의 교의
혼백을 모셔 놓은 틀,
혼백은 원래 사람이 살았을때 입던 옷자락으로 만들었으나
요즘은 삼메나 흰종이로 접어 만들며, 거기에 죽은 사람의 혼이 깃들어 있다고 믿었다.
사랑채 재현 |
수납채례(受納采禮)복식을 하고 있는 민비 수납채례란 청혼을 받아들이는 의식 |
노락당과 이로당의 외부 담장
이담장 끝에 유물 전시관이 있다
유물전시관 앞 우물 |
노락당 외부 담장 문양 |
5대 궁궐을 답사를 마치고
고종과 흥선대원군의 발자취를 더욱 따라가고싶어 운현궁을 둘러보았다.
한때 궁궐보다 더 큰 힘을 가졌던 운현궁이었지만
세월이 흘러 지금,
운현궁의 여름은 조용하기 만했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섬세하고 단아한 건축미에 마음을 모두 빼앗기는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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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종묘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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