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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社稷壇] 토지의 신과 곡식의 신에게 제향을 지내는 곳, 사직단

kyeong~ 2013. 8. 9. 01:08

 

 

 

사극을 보노라면 : “전하, 종사(宗社)를 보존하옵소서”라는 대사가 자주 나온다

'종사'라 함은 종묘사직(宗廟社稷)을 일컫는 말로서 '종묘'는 왕의 조상을 모시는 곳이고

'사직'은 땅과 곡식의 신인 사직을 못시는 곳이다.

이 두곳은 국운을 좌지우지하는 곳으로 당시 나라가 망하는 것은 곧 종사가 망하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

그래서 정도전이 한양을 설계하며 경복궁을 중심으로 서쪽에는 사직을, 동쪽에는 종묘를 만들게 되었다.

 

지난번 종묘 답사에 이어 사직단을 답사후 자료를 정리해보았다.

1913.7.31

 

 

 

 

 

사직단 社稷壇

공식명칭:사직단

종목:사적 121호

지정일 :1963. 01. 21

한자명칭:社稷壇

테마:유적건조물, 종교신아, 제사유적, 제사터

시대:조선시대

주소:서울시 종로구 사직동 1-28

 

조선시대에 토지의 신과 곡식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던 곳이다.

조선 태조는 개국하여 수도를 한양으로 정하고

태조 4년(1395)에 경복궁, 종묘와 더불어 사직단을 건립하여 나라의 정신적인 지주로 삼았다.

‘사직(社稷)’이란 토지의 신인 ‘사(社)’와 곡식의 신인 ‘직(稷)’을 아울러 이르는 말이다.

사직은 풍흉과 나라의 운명을 좌우한다고 믿었기 때문에,

나라를 새로 세우면 가장 먼저 왕가의 선조를 받드는 종묘와 함께 사직단을 지어서 복을 비는 제사를 지냈다.

사직단에서는 1년에 네 차례 대사와 중사를 지냈고,

그밖에 기곡제와 기우제를 지내기도 하였으며, 사직단과 함께 만들어진 사직서가 제사의 수발을 맡았다.

 

 

사직단과 가장 가까운 전철역 경복궁역1번출구로 나오면 경복궁의 광화문이 나온다

여기에서 서쪽으로 5분정도 걸어가면 사직단의 정문을 만날수 있다.

 

 경복궁에서 서쪽으로 5분정도 걸어가면 사직단이 나온다(경복궁역1번출구)

화려함이나 특별함이 없어 그냥지나치기 쉬운곳이고 한때 사직공원으로 이용되었기때문에

문화적가치를 외면당해온 곳이다.

 

 사직단 정문 보물 177호

사직단은 종묘와 더불어 조선왕실의 정신세계를 아우르는 중대한 두개의 축중에 하나이다.

토지의 신과 곡식의 신에게 제사를 올리는 아주 중요한 문화유적지지만 종묘와 달리 이해당사자가 존재하지 않아서

일제에 의해 공원으로 격하 되었던 곳이다.

사직단의 정문은 규모나 크기가 화려함이 없어서 흔히들 그냥 지나치지만 임진왜란후 지은 것으로

보물로 지정된 문화재로서 유교의 격식에 맞게 단정하고 소박한 느낌을 주는 정문이다.

 

 

 

사직단 정문에는 장식이 없고

종묘와 마찬가지로 신이 다니는 문이기때문에 가운데 작은 틈을 내었다.

 

 

   사직단 내부에서 본 정문

사직단 정문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단층문이다.

중앙칸은 좌우칸보다 훨씬 기둥 사이를 넓게 잡았다.

원래 3칸 전부에 널문을 달았으며 측면은 벽을 쳐서 담장과 연결하였다.

문짝 윗면은 기둥머리를 연결하여 홍살로 가로막았다. 공포는 초익공이고 처마는 부연이 없는 홑처마이다.

임진왜란 때 단만 남고 모두 불타버렸다. 뒤에 새로 만들었는데 다시 1720년(숙종 46)에 태풍으로 넘어졌다고 한다

1962년에 도로공사를 이유로 위치를 14m 뒤쪽으로 옮겼다. 보물 제177호로 지정되어 있다.

 

 사직단은 두겹의 담장으로 되어 있다

'주원'은 바깥 담장이며 각 방위의 홍살문은 '신문'이라고 한다.

'유원'은  제단을 보호하는 중요한 담장이며 각방위의 홍살문을 '유문'이라고 한다.

이사진은 서쪽 신문에서 바라본 모습이다.

 

北神門

北神門은 가장 위계가 높아 三門으로 되어 있다.

의식을 행할때 향香 축祝 폐幣가 들어오는 北神門

 

북유문에 바라본 북신문과 版位

 

사직단은 문이 닫혀있어서 내부로 들어갈수 없지만

관리인에게 부탁하여 내부로 들어가 자세히 살필수 있었다.

北神門을 들어서면 신(香, 祝,幣)가 들어오는 神路와 초헌관인 왕이 이동하는 御路가 나타난다

건너편 오른쪽의 신실神室에서 神位行路를 따라 神版이 南神路쪽으로 들어온다.

 

제사때 왕이 제계하는 판위版位와 왕이 西神門에서 版位로 이르는 길인 어로御路

 

제단을 보호하는 유원과 유문, 북유문 쪽에서 바라본 모습이다.

단의 주위에는 ‘유’라는 울타리가 사방에 둘러진다.

높이는 사람키에 불과하지만, 속계(俗界)와 성계(聖界)를 구분한다는 큰 뜻을 지닌다.

 

사직단과 신실, 西神門에서 版位로 이르는 어로御路

kbs 제작팀에서 우리의 문화유산을 찍고 있는 모습이 앵글에 담겼다.

 

 

토지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국사단은 동쪽에, 곡식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국직단은 서쪽에  배치하였으며, 신좌는 각각 북쪽에 모셔졌다.

사직단의 형태는 네모이다.

 

고대 중국에서 방형은 땅을 상징하고 원형은 하늘을 상징하였는데 땅의 신을 위한 시설인 사직단은 그에 걸맞게 방형으로 만들었다.

단은 네모반듯하며 세벌장대석을 높이 3자가 되게 하고 한 변이 2장 5척의 크기로 평면을 설정하였다.

단의 4면에는 3층의 돌계단을 설치하였으며 단상 네 귀퉁이에는 구멍난 돌이 박혀 있고 큰 쇠고리가 꽂혔는데,

이는 기둥을 세우고 차일을 치도록 설비하였던 것이다.

사직단에서는 1년에 네 차례의 대사(大祀)와 선농, 선잠, 우단을 제사지내는 중사(中祀), 그밖에 기곡제(祈穀祭)와 기우제(祈雨祭)를 드리기도 하였다.

이 사직단의 설치와 함께 사직서가 생겨 제사의 수발을 맡았다.

 

 제단은 天圓地方(하늘은 둥글고 땅은 모나다)사상에 따라 네모나게 만들었으며

天地人사상에 따라 3단으로 만들었다.

 

사직단은 사단(社壇)과 직단(稷壇)의 동서양단(東西兩壇)을 설치하였는데 동단에는 국사(國社. 정위토신.正位土神),

서단에는 국직(國稷. 정위곡신.正位穀神)을 모셨으며,

단에는 주척(周尺)으로 높이 2.5자, 너비 1자의 석주(石柱)를 각기 세워 후토씨(后土氏)와 후직씨(后稷氏)를 배향하였다.

 

사직단이 세워지자 일정한 때에 맞추어 제향이 치러졌으며 때때로 기우제를 지내기도 했는데

태종 5년(1405)가뭄이 계속되었을 때에는 태종이 직접 사직단에서 비를 내려 달라고 빌기도 하였다.

 

오방색(동쪽은 청색, 서쪽은 백색, 남쪽은 적색, 북쪽은 흑색, 중앙은 황색)을 각방위에 넣고 국토를 상징하는 황토로 덮었다.

 

 

석주(돌신주)는 성종때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매개물이라고 유추해석하고 있다.

석주는 동쪽 국사단에 있다.

 

 

뚜겅을 닫은 예감

 

뚜껑을 연 예감

재물로 바칠 소, 양, 돼지등의 피와 털등을 쑥과 버무려 예감에 넣으면

神이 그 냄새를 맡고 제단으로 올라오게 하는 역활을 한다고 한다.

 

 

 

 

남신문

악공과 일무원은 南神門을 통해 사직단으로 들어온다. 

 

 

   

            남신문쪽의 주원의 모습

 

 

   

東神門

정문을 들어서면 바로 보이는  東神門

사직단은 바깥담장 주원에는 각방위마다 4개의 신문이 있다.

 

서유문에서 바라본 사직단과 동유문, 동신문

 

西神門과 御路

 

북신문에서 바라본 남유문과 남신문

그리고 사직단을 보호하는 담장 '유원' 신위를 모시는 '신실'이 한눈에 보인다.

 

神室

신위를 모시던 신실로 문이 잠겨져 있어 내부는 볼 수 없었다.

 

 신실에 모셔진 신위가 이동하는 신로

 

 신실에 모셔진 신위가 이동하는 신로를 신실 앞에서  본 모습이다

 

잠겨져 있는 신실

신이 드나들수 있도록 사진단의 문은 모두 문살이 약간 틈이 나있다.

내부를 들여다보니 신위는 푸른 보자기로 가려져 있었다.

 

 

 

 

내부를 자세히 돌아보고 주원 밖 서신문에서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좀더 지대가 높은 서신문쪽으로 올라가 전체 모습을 다시 담아 보았다.

 

 

 

 무심코 지나치던 무궁화

사직단에서 더욱 친근하게 와 닿는다.

 

 사직단 바깥담장 주원의 모습

 

사직단의 상세 설명 

 

사직단 社稷壇

사적 제121호. 이곳에 단을 쌓고 제사를 지냈으므로 사직단이라고 한다.

보통 도성의 서쪽에 위치한다.

사단(社壇)은 동쪽, 직단(稷壇)을 서쪽에 설치한다.

국토와 오곡은 국가와 민생의 근본이 되므로 고대에는 국가와 민생의 안정을 기원하고 보호해주는 데 대한 보답의 의미에서 사직을 설치하고 제사를 지냈다.

 따라서 사직은 왕실의 조상들을 제사 지내는 종묘와 함께 국가적 차원에서 중요시되어, 국가를 가리키는 뜻으로도 사용되었다.

 

우리나라에서 사직단이 설치된 것은 삼국시대부터인 것으로 기록에서 확인되고 있다.

고려 시대에도 991년(성종 10)에 사직을 세웠는데, 1014년에 강감찬의 건의에 따라 수축되었다.

조선 왕조가 들어선 1393년(태조 2)에는 한양 천도와 관련된 종묘·사직의 지형도를 만들었다. 그

 이듬해에 사직의 터를 잡았는데, 경복궁 서쪽의 인달방(仁達坊)으로 정했다.

1395년 사직단의 축조공사가 시작되어 단의 설치가 완성된 이후 담장을 둘렀으며, 담장 안에는 신실(神室)과 신문(神門)을 세웠다.

 

1474년에 간행된 〈국조오례의〉에 의하면 사직단은 정4각형의 평면으로서 한 변의 길이는 2장 5척 즉 25척, 높이는 3척으로 기록되어 있다.

또 단의 사방 중앙에는 3층의 섬돌이 설치되어 있으며, 사단과 직단 사이의 간격은 5척으로 되어 있다.

사직단에서는 중춘(仲春)·중추(仲秋)·납일(臘日:동지 뒤의 셋째 成日)이 되면 국가와 민생의 안전을 기원하는 대향사(大享祀)를 지냈으며,

정월에는 기곡제(祈穀祭)를, 가뭄 때에는 기우제(祈雨祭)를 각각 행했다.

이러한 각종의 제례와 관리를 위해 1426년(세종 8)에는 사직서(社稷署)를 담장 밖 북쪽에 설치했다.

그리하여 1908년 칙령에 의해서 폐지될 때까지 사직단에서 국가제사가 계속되었다.

 

그런데 임진왜란의 병화로 인하여 사직단은 담만 남고 나머지 부속물은 거의 파괴되어 사직과 종묘의 신주를 함께 옮기기도 했다.

병자호란 때는 강화도로 옮겨진 바 있다.

1897년 10월 조선왕조는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고치고 원구단(圜丘壇)에서 천지제를 행한 후

황제위(皇帝位)로 나아간 고종은 사직단의 지위도 올려 태사(太祀)·태직(太稷)으로 고쳤다.

그러나 사직단은 대한제국이 일제에 의하여 강점됨에 따라 그 기능을 상실해버리고 말았다.

대신 일제는 사직단 일원을 공원으로 만들었는데, 그와 관련된 부속건물들을 철거했을 뿐 아니라 일부는 학교부지로도 분할되었다.

1960년대에는 도시계획사업으로 인하여 그 부지의 축소를 가져왔을 뿐 아니라 1970년대에는 도서관·수영장·동사무소·파출소 등이 건립되었다.

<브리태리커백과사전>

1913.7.31. 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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