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8.1.목요일
강화고려궁지 [江華高麗宮址]
사적 제133호.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관청리에 있는 고려의 궁궐터.
강화고려궁지 [江華高麗宮址]
사적 제133호.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관청리에 있는 고려의 궁궐터.
몽고 침략에 대항하기 위해 1232년(고종 19)부터 1270년(원종 11)까지 39년간 사용했다. 고려사절요 高麗史節要〉에 의하면 최우가 1232년 6월 이령군(二領軍)을 동원하여 건립했다고 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1234년 본격적인 궁궐과 백사(百司)의 건립이 이루어졌다.
규모는 작았으나 송도의 궁궐과 비슷하게 만들었고 궁궐의 뒷산도 송악(松岳)이라 했다. 고려궁의 정문은 승평문(昇平門)으로 양쪽에 3층루의 문이 2개 있었고, 궁내에 많은 관아·전각·창고·문이 있었으나 1270년 송도환도 때 모두 허물어졌다.
1631년 행궁(行宮)을 고려 옛 궁터에 건립하면서 장녕전(長寧殿)을 지어 조선 태조와 세조의 영정을 모셨고, 강화유수부 건물들과 규장외각을 건립해 많은 장서와 문서를 보관했다.
그러나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이 책과 서류를 약탈해갔으며 많은 건물이 불탔다. 지금 고려궁지에는 1638년(인조 16) 건립된 현윤관(顯允館)이 남아 있는데 1769년 중수하면서 '명위헌'이란 현판을 붙였다. 1977년 고려궁지를 보수하면서 담을 설치하고 고려궁지 진입로 옆에 있던 강화동종을 옮기고 경역에 보도를 설치해 경내를 조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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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규장각 [
담밖에서 본 모습이다.
이곳은 고려가 몽골에 침략에 줄기차게 항쟁하던 39년간의 궁궐터이다.
승평문昇平門
고려궁지 정문, 목백일홍이 팔월의 뜨거운 여름날의 정오를 맞이합니다.
강화유수부동헌 (江華留守府東軒)-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5호
강화유수부 동헌은 오늘날 군청과 같은 기능을 담당했던 관아 건물.
이 건물은 강화유수부의 동헌으로 오늘날의 군청과 같은 관아 건물이다.
여러차례에 걸친 개조로 원형은 남아있지 않다.
조선 인조 16년(1638)에 유수 김신국이 개수하였고, 영조 45년(1769)에 유수 황경원이 현문관이라 명명 하였다.
현재는 명위헌과 이관당의 현판이 걸려 있는데 당호는 당시의 명필이며 학자였던 백하 윤순(1680∼1741)의 필적이다.
목조건축 정면 8칸, 측면 3칸의 익공계 팔작지붕 | ||
1977년 강화중요국방유적 복원 정화 사업의 일환으로 개수되어 현재에 이른 것이다. |
명위헌
1769년 중수하면서 '명위헌'이란 현판을 붙였다.
유수부(留守府)는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옛도읍지나 행행지 및 군사적인 요충지에 설치되었던 행정기관으로
府 가운데 유수留守(정이품)가 우두머리로 있는 곳을 가르키며 조선시대에는 강화 개성 수원 경기도 광주에 설치되었다.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사또가 있는 그런 관청과는 격이 좀 다르다고 한다.
유수부에는 임금의 행궁이 있고 유수는 한달에 한번 열리는 어전회의에 할 수 있었다.
정2품 벼슬자리도 그렇고 군사적 요지이니 병력을 지휘했다는 것을 미루어 짐작할수 있다.
우리역사의 최대 비극중의 하나인 몽골(몽고는 중국에서 몽골을 비하한 호칭)의 침입
1231년 실리타의 침입으로 시작해 우리역사에 가장 큰 피해와 수모를 당한 곳이다.
세월의 흔적이 묻어있는 마루
강화유수부가 방어하던 경기 일원의 지도
강화유수가 업무를 보던 모습을 재현
유수부 내부
추녀가 물고기 모양?
강화유수부 동헌의 측면
고려가 몽골에 항복함으로서 고려궁지는 몽골의 요청에 따라 성곽과 건물을 모두 파괴하게 되었다.
동헌앞 우물
외규장각 [外奎章閣]
외규장각 [外奎章閣]
조선 후기 정조가 설립한 규장각의 부속으로 영구 보존 가치가 있는 도서를 보관하기 위해 강화도에 설치한 왕실 외곽 서고.
정조 6년인 1782년에 설립하였다.
즉위 직후 설립한 규장각이 왕이 쓴 글과 왕실 관련 도서를 보관하던 왕립 도서관이었다면 외규장각은 부속 도서관이라고 할 수 있다.
정조는 외규장각이 생긴 이후에는 규장각을 내규장각이라고 부르며 둘의 성격을 구분하여 도서를 보관하였다.
외규장각에는 주로 역대 왕의 글과 글씨, 어람용 의궤 및 주요 서적, 왕실 관련 물품을 보관했다.
병인양요 이전까지 외규장각 도서는 1,007종 약 6,000권 정도였는데,
프랑스 함대의 로즈 제독이 수천 권의 책을 불태우고 은궤, 어새(왕실 도장), 지도 등과 함께 외규장각 도서 340여 권을 약탈해갔다.
1975년 프랑스 국립 도서관의 서고에 묻혀 있던 외규장각 도서는 사서로 일하던 박병선 박사에 의해 처음 발견되었고,
2011년 5년 마다 임대를 갱신하는 형식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내부 관람이 가능하여
의궤에 대하여 소상히 살펴 볼수 있다.
프랑스 문화장관에게 외규장각을 비롯한 국내 문화유산의 반환을 요청한바 있지만
프랑스는 2007년 1월 정식으로 거절했다.
2009년 12월 4일 프랑스 파리 행정법원에서 심리를 진행하여
행정법원은 당시 프랑스정부가 외규장각도서를 약탈한 것임을 공식 인정하였다.
이처럼 프랑스 정부가 공식적인 인정을 하였지만
프랑스대변인이 '불행한 약탈'이었으나
합법적으로 프랑스 소유가 되었으므로 반환이 불가하다는 모순된 입장을 취하였다.
프랑스 법원 외규장각 도서거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보관되어 있어서
취득상황이나 조건은 이런 사실에 영향을 줄수 없다고 판결했다고 한다.
외규장각 뒷편 넓은 빈터가 있다
고려궁터에서 역사적 자료가 될만한 유물을 찾기위해 발굴조사중이다.
고려궁터
초지로 변한 고려궁터
강화부종각(江華府鐘閣) 보물 제11호
강화동종은 조선 숙종 37년(1711) 강화유수 윤지완이 주조한 것을
그 후 유수 민진원이 정족산성에서 현재와 같은 형태로 다시 주조한 것으로 현 우리나라 보물 제11호로 지정, 보호되고 있습니다.
원래 고려궁터 종각에 걸려 있으면서 강화의 성문을 여닫는 시간을 알리는 데 사용되던 이 종은
매년 3.1절과 광복절, 제야 등 1년에 세 번 타종되었으며 한때는 통행금지를 알리는데 사용되기도 했었습니다.
그러나 지난 95년 1월, 노후로 종의 훼손상태가 심각해져 타종이 금지되면서
영구보존을 위해 강화역사관 제2전시실에 보관되고 있습니다.
현재 강화부종각에 있는 종은 강화동종과 모양과 크기를 똑같이 주조해 새로 만들어 놓은 신강화동종입니다.
총중량 3,912kg, 높이 198cm, 구경이 138cm에 달하는 강화동종은 조선시대 후기 동종으로는 상당히 큰 편에 속합니다.
종의 몸통 중앙부분에 띠를 돌려 몸체를 위아래로 양분하여 놓은 것이 특이합니다.
상단부에는 꽃무늬로 장식된 네 개의 독립된 유곽이 있고 그 안에는 연꽃 아홉 송이가 섬세하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하단부에는 한 가닥의 꽃무늬 띠를 돌렸으며 주종관계와 개주관계 등이 기록된 장문의 명문이 양각되어 있습니다.
강화동종
성문을 열고 닫는 시간을 알리는데 사용
접근을 막기 위해 저렇게 막아 두어서 살펴볼 수 없이 아쉽다.
강화동종의 진품을 보기 위해서는 강화 역사 박물관으로 가야한다.
강화유수부 이방청은 고려궁터 강화유수부 동헌 앞에 있는 조선시대 관아 건물이다.
이 건물은 조선 중기에 강화 유수부내 육방(六房)중의 하나인 이방청으로
조선 효종 5년(1654) 유수 정세규가 건립하여 관아로 사용하던 것을
정조 7년(1783)에 유수 김노진이 내부를 개수하고 괘홀당이란 당호를 게시하였다.
1945년 해방이후 지방법원(등기소) 사무실로 임시 사용한 적이 있으며,
1977년 강화 중요 국방 유적 복원 사업의 일환으로 개수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방청은 1915년부터 1972년까지 등기소로 사용되다가 1973년에 경기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고,
1995년에는 시도유형문화재로 지정되기도 했다.
현재의 모습은 1977년 강화 중요국방유적 복원사업때 고려궁지와 함께 정비된 것이다.
이방청의 뒷 문
육방(六房): 이방·예방·호방·병방·형방·공방
이방청 뒷편의 모습
이방청 뒷편의 모습
한식 목조 단층집으로 ㄷ자형에 80평쯤 된다. 특히 햇볕이 매우 잘 드는 집이다.
팔작지붕에 민도리 홑처마집인데, 온돌방이 8칸, 우물마루로 된 대청이 12칸, 부엌이 1칸으로 공간이 꽤 넓다.
이방청이란 이방·예방·호방·병방·형방·공방의 육방 중 하나인 이방,법전과 군무를 제외한 여러 가지 사무를 보던 곳이었다.
12칸 대청은 이방청의 집무실이었을 것이다.
다만 조선시대 지방관아 중 하나인 이방청을 살펴보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전시되어 있어 눈길을 끈다.
끝
철종의 잠저 용흥궁의 답사를 위해 왔다가
용흥궁 근처의 고려궁지를 덤으로 답사를 하게 되었다.
답사를 하다보면 습득하게 되는 지식이 많아지고
여행을 하면서 새로이 알게 되는 명승고적을 만나게 된다.
이래서 길에서 있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끊임없이 떠날수 있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佛대통령,신물난다 말해"…외규장각 반환협상 비화>-(연합뉴스에서 발췌)한국과 프랑스 정부가 외규장각 도서 반환 문제 해법을 찾지 못하던 2000년 10월 서울에서 열린 양국 정상회담에서 자크 시라크 당시 프랑스 대통령은 대뜸 '지긋지긋하다'는 말부터 꺼냈다. 프랑스 군대가 1866년 약탈해 간 외규장각 도서 반환 문제를 두고 양국 정부가 얼마나 오랫동안 고민을 거듭했는지 보여주는 대목이다.
당시 정상회담 통역을 맡았고, 외규장각 도서 반환 실무협상 중 15년 동안 협상에 참여한 유복렬 미국 애틀랜타 부총영사는 14일 발간된 '돌아온 외규장각 의궤와 외교관 이야기'라는 책에서 지난했던 19년간의 협상 일화를 공개했다.
1991년 시작된 협상이 돌파구를 찾지 못하자 양국 정부는 1998년 민간전문가 협상이라는 새 카드를 꺼내 들었지만 초반 협상에는 역사적 책임 공방만 계속했다. 2001년 민간전문가간 4번째 공식 협상에서 합의된 '의궤 맞교환' 해법도 "인질로 잡힌 장남을 구하려고 차남을 대신 내주는 꼴"이라는 거센 국내 비판으로 없던 일이 됐다. 또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오랜 공백기를 맞았던 협상은 2009년 박흥신 당시 주프랑스대사 부임을 계기로 불씨를 살렸다. 박 대사는 2010년 5월 프랑스측과의 면담에서 "한국 국민은 문화재 맞교환 자체를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며 "그러니 대가를 받을 생각을 말고 그냥 의궤를 돌려주고 대신 한국 국민의 영원한 사의(謝意)를 선물로 받으라"고 설득했다.
수없이 많은 실무협상 끝에 양측은 '대여' 형식으로 가닥을 잡았지만 정부는 약탈 문화재를 대여받는 데 부정적인 국내 여론 탓에 계속 망설였다. 우리의 이러한 태도에 프랑스 측은 "대여는 포장일 뿐이고 사실상 반환이라는 점을 사르코지 대통령이 이번 정상회담 때 분명히 이야기하겠다는 데도 믿지 못한다는 거냐"고 불쾌감을 드러냈다.
정부는 양국 정상이 같은해 11월 '5년 단위 갱신되는 대여' 형식에 합의한 이후에도 프랑스국립도서관과 국립중앙박물관간 마지막 협상 타결까지 노심초사했다. 악명 높았던 '마담 상송' 사무장을 비롯해 끝까지 도서 양도에 반발했던 프랑스국립도서관 직원들은 결국 이관 약정 서명식에서 눈물을 보이기도 했다.
유 부총영사는 대여 형식에 대한 비판에 대해 "프랑스가 단지 외규장각 의궤를 돌려주기 위해 자기네 국내법을 개정할리 만무한 상황에서 우리 군대가 무력으로 빼앗지 않는 한 외규장각 의궤 반환은 불가능했다"고 말했다. 유 부총영사는 프랑스대사관에 두차례 근무하면서 1991년부터 시작해 2010년까지 계속된 19년간의 외규장각 도서반환 협상 중 15년간 협상 실무를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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