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들어서기전의 계절은 조용하다
멀지않아 꽃들의 잔치를 벌이기 위한 심호흡을 하는것처럼
마음이 깊어지는 계절
영동산간의 소나무아래 잔설이 웅크리고 있긴하나
정오의 햇살은 이미 완연한 봄기운을 담고
흐르는 강물 위에 퍼덕인다
밉상스런 꽃샘바람이 불법도 하지만 강가의 버들강아지 털끝하나 건드리지 않고 있다
참 아름다운 햇살이다
봄 꽃 한 송이 없이도 무척이나 아늑한 시간 속에 놓여있으니 좋다.
친정어머니 생신에 다녀오는 날
모처럼의 여유를 맞이하는 시간
이런날 신륵사 강가에 서있으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제존자처럼 강월헌 정자에서 석등처럼 서있고 싶다.
2014. 3.15. 일요일
신륵사 [神勒寺] 경기도 여주군 북내면 천송리 봉미산 기슭에 있는 절.
대한불교조계종 제2교구 본사인 용주사(龍珠寺)의 말사이다. 신라 진평왕(579~631 재위) 때 원효(元曉)가 창건했다고 하나 정확하지 않으며, 신륵사라 부르게 된 유래에 대한 여러 가지 설이 있다.
〈동국여지승람〉 권7 여주목불우조(驪州牧佛宇條)에 의하면 신륵사는 보은사(報恩寺) 또는 벽사(璧寺)라고도 불렀다고 한다. 벽사는 고려시대에 경내의 동쪽 언덕에 벽돌로 된 다층전탑이 세워지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 절이 대찰(大刹)이 된 것은 나옹화상(懶翁和尙:혜근)이 입적할 때 기이한 일이 일어난 뒤부터이다. 1379년(우왕 5) 각신(覺信)·각주(覺珠) 등이 절의 북쪽에 사리를 봉안한 부도와 나옹의 초상화를 모신 선각진당(先覺眞堂)을 세우면서 많은 전각을 신축하고 중수했다. 1382년에는 2층의 대장각(大藏閣) 안에 이색과 나옹의 제자들이 발원해 만든 대장경을 봉안했다.
조선시대에는 억불정책으로 인해 절이 위축되었으나 1469년(예종 1)에 영릉(英陵:세종의 능)의 원찰(願刹)이 되었고, 1472년(성종 3) 절이 확장되고 다음해에 정희왕후가 보은사로 개칭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양란으로 폐허가 되었다가 1671년(현종 12)에는 계헌(戒軒)이, 1702년(숙종 28)에는 위학(偉學)·천심(天心) 등이 중수했다. 1858년(철종 9) 순원왕후(純元王后)가 내탕전(內帑錢)을 희사해 중수했다.
현존 당우로는 금당인 극락보전을 비롯하여 여주 신륵사 조사당(驪州 神勒寺 祖師堂:보물 제180호)· 명부전·심검당·적묵당·노전(爐殿)·칠성각·종각·구룡루(九龍樓)·시왕전 등이 있다. 또한 여주 신륵사 다층석탑(보물 제225호)·여주 신륵사 다층전탑(보물 제226호)· 보제존자석종(驪州 神勒寺 普濟尊者石鐘:보물 제228호)·여주 신륵사 보제존자석종비(보물 제229호)· 여주 신륵사 대장각기비(驪州 神勒寺 大藏閣記碑:보물 제230호)· 여주 신륵사 보제존자석종 앞 석등(보물 제231호) 등과 같은 문화재들이 있다.
조사당(驪州 神勒寺 祖師堂:보물 제180호) 다층석탑(보물 제225호) 보제존자석종(驪州 神勒寺 普濟尊者石鐘:보물 제228호) 보제존자석종비(보물 제229호) 대장각기비(驪州 神勒寺 大藏閣記碑:보물 제230호) 보제존자석종 앞 석등(보물 제23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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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미산 신륵사 일주문
천년고찰에 어울리지 않은 일주문
세운지 오래되지 않아 천년고찰과 어울리지 않는 느낌이다.
편액에는 '봉미산신륵사鳳尾山神勒寺'라고 씌여 있다.
봉황의 꼬리 형세를 하고 있는 산자락에 자리잡고 있는 사찰이라는 뜻이다.
사찰의 일주문과 루사이에는 대부분 금강문이나 천왕문이 있기마련인데 신륵사에는 없다.
조계산 선암사에는 주봉인 장군봉이 지켜주고 있어서 불법의 호법신인 천왕왕상을 모시지 않았다고 한다.
이런 연유로 본다면 용의 꼬리에 해당하는 이 신륵사는 아홉마리의 용이 지켜주고 있기 때문일까.
석조기둥에는
三日修心千載寶:삼일수심천재보-짧은 기간의 마음 수양이라도 천년의 보배요
百年貪欲一朝塵:백년탐욕일조진-백년의 탐욕은 하루아침의 티끌이로다.
일주문의 후면
여주 신륵사 앞을 흐르는 남한강에는 용이 살았는데,
나옹화상이 그 용을 굴레를 씌워 제압하였다고 하여 ‘신륵’이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그래서 신륵사에는 용그림이 많다
템플스테이 전경
아침이면 강가에 물안개가 피어오르고
맑은 해가 강을 타고 오르는 이곳에서
종교를 떠나 한번쯤 머물러보는 것도 좋겠다.
보제루(普濟樓)
일주문을 지나 신륵사 경내를 향하여 걷다보면 오른쪽 강가에 있다.
보제루(普濟樓)...널리 중생을 제도한다는 뜻이 있다.
사찰 경내에 들지 않아도
여기쯤에 앉아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는 것만으로 마음속에 찌꺼기들이 씻겨나가는 기분이다.
저 너른 강가를 바라보며 마음을 씻어내는 불자가 되어보고 싶은 순간이다.
천정에 작은 글씨가 적혀있다.
건립연대와 건립한 사람등이 세세하게 기록되어있는 것으로 보인다.
신륵사 전경
강물처럼 낮게 흐르고
낮은 곳에 요란하지 않고 수평으로 앉아 있는 신륵사 전각들
세심정洗心亭
신륵사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맞이하는 전각 '세심정'
8년전 어느분이 사위를 위해 기증했다고 전해지는 곳으로
봉미산 줄기에서 내려오는 물로 몸과 마음을 씻고 부모님께 기도할때 마음과 몸을 정갈하게 하기 위함이라고 한다.
관음전觀音殿
관세음보살을 모신 곳이다.
관음전 내부
명부전 [
지장
전면은 세 칸이다. 조금 특이하다고 볼 수 있는 것이 있는데
맛배지붕의 용마루는 곡선을 이루는데 비해
지붕의 처마선이 곡선이 아닌 일직선이라는 것.
명부란 지하세계를 말한다. 망자들이 가는 곳. 곧 저승이다.
명부전은 망자들의 복을 기원하는 곳으로
이승에서 지은 죄가 있더라도 은덕으로 사해 주시기를
그래서 다시 인간으로 태어나기를 기원하는 곳이다.
명부전의 십왕
봉송각 (奉送閣)
이곳 처년고찰 봉미산 신륵사에 조성된 봉송각과 소대(燒臺:연화대)는
신륵사를 찾아주신 많은분들께서
석탑앞에 놓인 소대에 지극한 정성을 담아 남겨주신 동전을
10여성상 모은것과 두분의 보살님의 시주로 조성된 불사이다.
이곳은 49재, 또는 기타의 재를 모신 후
떠나가시는 영가님들을 극락세계에 태어나시도록 마지막 전송하는 전각이다.
이 불사에 동참하신 모든분들과
참예하시는 모든분들의 공덕이 일체의 중생에 널리 퍼져
극락세계에 환생하고 무량수불에 수기를 받고
불도를 닦아 성불하여지이다....
봉송하는 노래
문밖에 나와서 전송하니 오늘 천도 받은 영가시여 아울러 함께 오신 영가시여 지금까지 식식하고 독경을 하며 일념으로 염불공덕 갖추었으니 집착했던 망념들을 여의었는가? 여의었다면 천당 극락 뜻대로 가고 여의지 못했으면 또 들으시라 사대를 바라보니 꿈속과 같고 육신이며 알음알이 본래 공이라. 부처와 조사의 뜻 알려하는가? 서산에 해가지고 동산에 달이 뜨네... 원왕생 원왕생 연화장세계 태어나서 모두 함께 불도 이루어지이다.... |
조사당祖師堂(보물180호)
신륵사는 봉미산 기슭에 있는 조선시대의 절로, 원래는 신라시대에 지었다고 하나 정확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조사당은 절에서 덕이 높은 승려의 초상화를 모셔놓은 건물로,
신륵사 조사당에는 불단 뒷벽 중앙에 지공을, 그 좌우에는 무학과 나옹대사의 영정을 모시고 있다.
조선 전기 예종 때 지은 것으로 보이며, 낮은 기단 위에 앞면 1칸·옆면 2칸으로 세웠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의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는 장식구조는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데,
이러한 구조를 다포 양식이라 한다.
앞면은 6짝의 문을 달아 모두 개방할 수 있게 하고, 옆면은 앞 1칸만 문을 달아 출입구를 만들어 놓았다.
조선 전기의 조각 수법을 보이고 있으며 규모는 작지만 균형이 잘 잡힌 아담한 건물이다.
신륵사 조사당에는 불단 뒷벽 중앙에 지공을, 그 좌우에는 무학과 나옹대사의 영정을 모시고 있다.
조사당의 주련 |
禪指西天爲骨髓:선지서천위골수 敎談東土作生簧:교담동토작생황
선지는 서천의 골수가 되었고 교담은 우리나라 생황이 되었도다
선지(禪指): 선지(禪旨)를 말함. 선지(禪旨)란 선의 깊은 요체(要諦)를 말함. 서천(西天): 인도를 말함. 교담(敎談): 진리를 연설함. 교설(敎說)과 같음. 동토(東土): 우리나라를 말함. 생황(笙簧): 아악에 쓰이는 관악기의 한 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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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옹 화상>
고려 말 예주부(지금의 경북 영덕군 창수면 갈천리)에서 출생한 나옹화상.
그는 원나라 유학을 했고 인도의 고승 지공스님의 제자로서,
인도불교를 한국불교로 승화시킨 역사적 인물로서 조선태조의 왕사였던 무학대사의 스승 이었다,
나옹화상 혜근(1320∼1376)은 고려 말의 고승이다.
성은 아(牙)씨였으며. 속명은 원혜이다. 호는 나옹, 또는 강월헌(江月軒)이다.
이곳 신륵사에서 남한강 가에 서 있는 강월헌(원래의 강월헌은 수해로 인해 사라졌다)에 기거하였다.
여주 신륵사 앞을 흐르는 남한강에는 용이 살았는데,
나옹화상이 그 용을 굴레를 씌워 제압하였다고 하여 ‘신륵’이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臺下江流百丈聽. 當年說法句紳聽.(대하강류백장청. 당년설법구신청).
川女朱下方丈實. 龍王惹參蓮花經.(천여주하방장실. 용왕야참연화경).
대 아래 강물은 일백 장으로 맑구나. 당시 설법하면 귀신이 와서 들었다네.
천녀는 낮에 방장에 내려오고 용왕은 밤에 연화법석에 참여하였지.
신륵사에서 나옹화상이 설법을 하면 귀신도 참여를 하였다고, 정두경의 고시 ‘신륵사’에 적고 있다.
그럴 정도로 나옹화상은 뛰어난 법력을 지녔는가 보다.
유명한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네’라는 글도 나옹화상이 지은 것이다.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네
靑山兮要我以無語 (청산혜요아이무어)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蒼空兮要我以無垢 (창공혜요아이무구) 창공은 나를 보고 티없이 살라하네
聊無愛而無憎兮 (료무애이무증혜) 사랑도 벗어놓고 미움도 벗어놓고
如水如風而終我(여수여풍이종아)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靑山兮要我以無語 (청산혜요아이무어)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蒼空兮要我以無垢 (창공혜요아이무구) 창공은 나를 보고 티없이 살라하네
聊無怒而無惜兮(료무노이무석혜) 성냄도 벗어놓고 탐욕도 벗어놓고
如水如風而終我(여수여풍이종아)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신륵사에는 경기도 보호수로 지정된 향나무와 은행나무 두그루 있다
그중에 조사당을 지키는 향나무는 600년 되었다고 한다.
오랜 세월을 살아온 고목에서
천년 사찰의 향기가 전해오는듯 했다
전설에 따르면 나옹선사의 제자였던 무학대사가 심은 것이라고 한다.
나무 높이는 5m, 줄기 둘레는 1.3m인데 줄기가 많이 상해 보형재로 채워져 있다.
그러나 잎을 보면 나무는 아직도 원기왕성하다.
부도
조사당 뒤로 가면 부도를 만나게 된다.
부도라는 것은 스님의 사리나 유골을 넣어두기 위해 만든 탑이다..
뒷부분에 8각형 모양의 부도는 고려말에서 조선초에서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한다...
앞에 있는 부도는 크기가 220㎝ 정도 된다...
두 부도 다 어느 스님을 위해 만든 것인지 알 수 없다고 한다..
보제존자석종(驪州 神勒寺 普濟尊者石鐘:보물 제228호)
보제존자석종비(보물 제229호)
보제존자석종 앞 석등(보물 제231호)
경기도 여주군 여주읍 천송리에 소재한 신륵사.
경기도내의 절 중에서는 많은 문화재를 소유하고 있는 고찰이다.
이곳에는 보제존자의 석등과 석종, 그리고 석종 비가 한 자리에 모여 있다.
보제존자(1320∼1376)는 여주 신륵사에서 입적한 나옹화상을 말한다.
보제존자석종普濟尊者石鐘
고려후기, 우왕5년(1379년), 부도
고려 말 왕사 나옹(懶翁)의 사리를 봉안한 부도로서
신라시대 정형적인 팔각원당형부도(八角圓堂型浮屠)의 범주에서 벗어나 라마탑(喇嘛塔)계에 속하는 특유의 탑이다.경기도 양주 회암사(檜巖寺)에서 경상남도 밀양으로 가던 중 신륵사에서 입적하자,
1379년에 각신(覺信)·각주(覺珠) 등의 주선으로 절을 크게 중창하고 절 뒤 명당자리를 택해 묘역을 마련하였다.
낮은 방형의 넓은 기단 윗면에도 박석을 깐 중앙부에 2단의 받침대를 마련하여 석종형 탑신을 안치하였다.
기단의 정면과 좌우면 중간에 2단의 계단을 마련했으며, 기단 우각에는 간략한 종대(縱帶)의 조각을 남기고 있다.
장중한 석종형의 탑신은 위로 갈수록 완만한 타원형을 이루다가
어깨부분에서는 보주(寶珠)를 묘사하기 위하여 잘라진 포탄형(砲彈形)으로 조각하였다.
탑의 정상부를 장식한 보주는 사면으로 구획하여 모각하였다.
이 부도는 특히 통도사와 금산사와 같이 일종의 계단탑 형식을 그대로 모방한 것으로 조선시대의 석종형부도의 선구적인 양식을 보여준다.
탑의 정상부를 장식한 보주는 사면으로 구획하여 모각하였다.
1379년(우왕 5)에 건립. 전체높이 212㎝, 비신높이 121㎝, 너비 61㎝. 보물 제229호.
지대석과 3단의 장방형 대석 위에 비신을 얹었는데 상단의 대석에는 연꽃무늬를 새겼다.
그 위에 목조건물의 공포와 기왓골을 조각한 옥개석을 얹었다.
신라시대 이래로 귀부와 이수를 갖춘 일반화된 석비형식이 고려 말기에는 대석과 옥개석으로 변형되기 시작하는데,
바로 이 비가 고려 말기의 석비형식을 잘 보여준다.
1376년 새로운 유교세력과의 미묘한 정세로 양주 회암사(檜巖寺) 주지로 있다가
왕명에 따라 밀양 영원사(塋原寺)로 가던 중 신륵사에서 입적하자
그의 문도들이 그의 사리를 안치한 석종과 석종비를 세웠다.
글씨는 자경(字徑) 2㎝ 정도의 해서로 넉넉한 짜임새와 부드러운 필획이면서 흐트러짐이 없다.
보제본자석종비 후면
보제존자석종 앞 석등(보물 제231호)
보제존자석종 앞 석등은 불을 밝혀두는 화사석(火舍石)을 중심으로
아래에는 세부분으로 이루어진 받침을 두고,
위로는 지붕돌과 머리장식을 얹은 모습이다.
석등은 그리 크지 않다.
고려 말에 나옹화상이 입적을 한 후 세웠다고 하니 700년 가까운 새월을 이 자리에 서 있는 것이다.
석등의 받침에는 표면 전체에 꽃무늬를 가득 새겨 장식하고 있다.
화사석은 각 면에 무지개 모양의 창을 낸 후, 나머지 공간에 비천상과 이무기를 조각했다.
석등은 지붕돌은 두꺼우나 여덟 귀퉁이에서의 치켜올림이 경쾌하여 무거운 느낌을 덜어준다.
고려 우왕 5년인 1379년에 보제존자석종 및 석비와 함께 세워진 작품으로, 확실한 연대를 알 수 있는 귀중한 유물이며,
고려 후기의 대표적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이무기를 조각한 아름다운 석등
비천상과 함께 화사석에 새긴 이무기. 화사석을 들고 승천이라도 할 기세이다.
비천상들은 오랜 세월이 흐른 탓에 얼굴이 모두 떨어져 나갔다.
하지만 허공을 가르며 날리고 있는 복대를 보고 있자니, 곧 석등을 뛰쳐나와 하늘로 오를 듯한 기세이다.
자세히 살펴보면
상대 위에는 화사석 받침의 표현이 전혀 없이 바로 화사석을 얹어놓았다.
이 화사석은 기타의 부재와 달리 그 재질이 화강암이 아니고, 납석제(蠟石製)인 점이 특이하다.
보
보제존자석종을 지나 대장각기비쪽으로 걸음을 옮기려면
이 나즈막한 솔밭을 지난다
신륵사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오고
강바람과 솔향이 섞여 피곤에 지친 도시인의 몸을 정화시켜주는 곳이다.
잠시 이곳에서 눈을 감고
사찰의 풍경소리와 솔잎 비비는 소리를 음미해보시라.....
대장각기비 大藏閣記碑
신륵사에는 원래 극락보전(極樂寶殿) 서쪽 언덕에 대장각이 있었는데,
그것은 고려말의 이색(李穡)과 승 나옹(懶翁)의 문도들이 발원하여 ≪경률론 經律論≫을 인출(印出), 수장하던 집이었고,
이 비는 대장각의 조성에 따른 여러 가지를 기록한 석비이다.
나옹이 일진당(日眞堂)을 세우고 대장각이 있었음이 나타나 있다.
이숭인(李崇仁)에게 명하여 1380년(우왕 6) 2월부터 만들게 하였다.
비신(碑身)의 보전을 위하여 신부(身部) 양쪽을 돌기둥으로 단단히 지탱하고 있다.
비문은 자경 2㎝의 해서로서, 직제학 권주(權鑄)의 글씨이다.
권주의 글씨에 대하여 ≪서청 書鯖≫에는 ‘太古庵碑字 類虞永興(태고암비자 유우영흥)’이라 하였다.
비음(碑陰 : 비의 뒷면)에는 대장단월(大藏檀越) 사부중(四部衆)으로서
비구·비구니·우바새·우바이를 구분하여 그 성명을 열거하였다.
권주(權鑄 )의 글씨로 새긴 비문은 비몸이 크게 파손되어 전체의 내용을 파악할 수는 없다.
비문의 뒷면에는 불경(경률론)을 만들고 비석을 세우는데 참여한 사람들의 이름을 열거하고 있다.
신륵사다층전탑神勒寺多層塼塔
보물 제226호. 높이 940cm.
한강변에 있는 암벽 위에 건립된 것으로,
지대석 위에 화강석으로 된 7층의 기단이 있고 그 위에 높은 6층의 탑신부가 있다.
기단 위에 탑신부의 받침을 마련한 것은 신라시대의 전탑 양식을 따른 것으로 보인다.
탑신부는 6층 부분만 높이와 너비가 급격히 줄어들었을 뿐 각 층의 체감률이 낮아 전체적으로 고준(高俊)해 보인다.
각 층의 옥개(屋蓋)는 옥신(屋身)에 비해서 극히 간략화되어 있다.
상륜부(相輪部)는 전(塼)으로 된 노반(露盤) 위에 화강석으로 된 복발(覆鉢)·앙화(仰花)·보륜(寶輪)·보개(寶蓋) 등이 얹혀 있다.
탑 북쪽에 있는 이 탑의 수리비에 "崇禎紀元之再丙午仲秋日立"(숭정기원지재병오중추일립)이라고 씌어 있어서
1726년(영조 2)에 중수되었음을 알 수 있다.
현재 유일하게 남아 있는 고려시대의 전탑이다.
삼층석탑(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33호)
강가 암반위에 앉아 있는 석탑
높지도 않고 요란하지도 않다
그저 지나가는 길손처럼 서 있는 저 석탑
저 석탑처럼 서서 한참이나 참한 봄볕을 받으며 유유히 흘러가는 강물을 보았다
어느날 우연히
물안개가 지나는 어느 아침
떠오르는 해를 볼 수 있었으면 참 좋겠다.
강가의 이풍경은 오래도록 가슴에 담고 있을 것 같다.
강월헌江月軒
신륵사 우측을 감쌓고 있는 능선이 내려와 여강과 접하는 것을 일러
옛 사람들은 봉황이 꼬리를 물에 담근다고 멋드러지게 표현했다.
거대한 암반과 절벽으로 이루어져있는 이곳을 아름다운 여강의 백미라 불러도 뭐랄 사람 없을 것이다.
옛 선조들은 거기에 날아갈 듯한 정자가 앉혀놓았으니 바로 강월헌이다.
강월헌은 나옹선사의 또다른 이름(휘)에서 유래되었다.
강월헌 바위위엔 오랜 세월의 흔적이 서려있는 소박한 3층 석탑이 서있는데
육신을 벗어 던지고 해탈한 나옹선사의 다비장터로서 마치 그의 모습을 보는 듯 하다.
나옹선사는 시대를 뛰어넘는 걸출한 시인이며 문학가였다.
강월헌 누각에 서니 지금도 많은 이들이 애송하고 있는 그의 싯구가 바람에 실려와 귓전을 맴돈다.
청산은 나를 보고
- 나옹선사 (懶翁禪師)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창공은 나를 보고 티없이 살라하네
사랑도 벗어놓고 미움도 벗어놓고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창공은 나를 보고 티없이 살라하네
성냄도 벗어놓고 탐욕도 벗어놓고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수없이 들었던 이 싯구를 신륵사에 문득 만나고 나니
뇌에서 떠나질 않는다.
조사전에서 어필했었지만
다시 강월헌에서 떠올려 보았다.
김병기 공덕비
조선 철종 9년 순원왕후의 발원에 의해 당시 호조판서 김병기가 신륵사를 중수한 뒤 세운 공덕비이다.
보호수, 수령600년 된 은행나무와 김병기 공덕비
범종각梵鐘閣
범종각은 梵鐘(범종), 法鼓(법고), 雲版(운판), 木魚(목어), 즉 불교에서 말하는 四物(사물)을 조성하여 둔 곳이다.
범종은 그 소리로 인하여 일체 중생이 번뇌로부터 벗어나 지혜를 증장하고 깨달음을 얻게 하는데 그 의미가 있으며,
법고는 축생의 무리에게, 목어는 수중의 생명에게,
운판은 하늘을 나는 생명에게 부처님의 진리를 전해 해탈성을 염원하는 의미가 있다.
종각 내에는 법고가 2점 있는데 大鼓(대고)는 매우 두꺼운 원통형의 형태이며, 모두 조선말기의 작품이다.
구룡루九龍樓
신륵사 바깥쪽으로는 '구룡루'라는 편액을 걸어두었다.
신륵사 극락보전 맞은편의 구룡루 안쪽에는 '봉미산신륵사 鳳尾山神勒寺'라는 편액이 걸려있다
희끗한 단청이 오랜 세월에씻긴 흔적을 말해준다.
구룡루 측면
1472년(성종 3) 대규모의 중창불사를 시작하여 면모를 일신하게 되었는데,
극락보전 역시 왕릉 원찰로 지정되면서 창건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현존 건물은 임진왜란 때 불타버린 것을 1800년(정조 24)에 다시 중창한 것이다.
기둥 사이에도 공간포(空間包)를 올린 다포계(多包系) 구조의 화려한 건물이다.
공포(栱包)는 내4출목 외3출목 구성으로 집 규모에 비하여 과도할 정도이고,
쇠서[牛舌] 위에 연꽃봉오리들을 조각하는 등 화려한 모습이다.
길게 뻗어 나온 지붕 네 귀퉁이의 추녀를 받치기 위해 가느다란 활주(活柱)를 시설하였다.
내부에는 목조의 아미타삼존상을 봉안하였는데,
본존의 높이는 1.5m, 협시보살상(脇侍菩薩像)은 2m이며, 1977년에 개금(改金)한 불상들이다.
법당 내부 천장은 우물천장이지만, 불단 상부에는 화려한 닫집을 짜아 내부의 장엄을 더했다.
극락보전 내부에는 건륭 38년(영조 49년, 1773년)의 명문이 새겨진 범종이 있다.
신륵사의 대웅전을 의미하는 극락보전에는
불자들의 소원등이 이쁘게 켜져 있다
늘 바라는 것이지만 저들의 작은 소원들이 이루어져
봄날처럼 곱고 따스한 마음이 되기를 빌어본다.
신륵사 다층석탑 (보물 제 225호)
우리나라에 있는 대부분의 석탑이 화강암으로 만들어진데 비하여
이 탑은 특이하게도 파고다 공원의 원각사지 13층 석탑처럼
흰색의 대리석으로 조성된 8층석탑이다.
높이는 3m에 이른다.
이 탑은 기단에서 몸돌에 이르기까지 각각 하나의 돌로 조립되었다.
사각형의 지대석 위에 2층 기단을 놓았는데, 기대석에는 부처님이 아닌 용이 새겨져 있어서
성종 3년(1472) 대대적인 증축을 할 때 세종대왕을 위해 세워진 탑이라는 추측을 낳게 한다.
기대석에 그려진 용
신륵사에는 용문양을 탑에서도 볼 수있다.
심검당 神勒寺 尋劍堂
심검당이라는 이름은 "칼을 찾는 집"이라는 의미이다. 여기서 칼은 무명을 끊는 지혜의 칼을 의미하니
심검(칼을 찾다)이라는 말은 위앙종의 영운 지근(靈雲 志勤) 선사의 오도송에서 유래하였다.
영운지근선사는 위산(潙山)에서 복숭아꽃이 피는 것을 보고 깨달았는 데, 그 때 남긴 오도송은,
三十年來尋劍客 (삼십년래심검객) 삼십년 동안 칼을 찾던 나그네
幾迴落葉幾抽枝 (기회락엽기추지) 잎 지고 가지 트기가 그 몇 번이던가?
自從一見桃花後 (자종일견도화후) 복사꽃을 한 번 본 그 이후로부터,
直至如今更不疑 (직지여금경불의) 지금에 이르기까지 다시 더 의심하지 않았네.
삼성각三聖閣
독성각(獨聖閣)·산신각(山神閣)·칠성각(七星閣)이 있으며, 대개 삼성각에 삼신을 같이 모신다.
독성각은 불교에서 말하는 독각(獨覺)을 모신 곳이다.
독각은 석가모니처럼 스승 없이 홀로 깨우친 자를 말한다.
대승불교의 교학에서 독각은 타인을 위해 가르침을 설하지 않는 이기적인 자를 뜻하지만,
산신각은 단군이 산신이 되었다는 전설에서 유래하는 산신을 모신 곳이다.
칠성각은 북두칠성에 축원하는 도교의 신앙을 받아들여 북두칠성을 불교의 여래로 조화하여 모신 곳이다.
따라서 삼성각은 불교가 수용되는 과정에서 토착신앙 또는 민간신앙과 융합하여 빚어진 변용이다.
이런 식의 변용은 중국이나 일본에서도 흔히 목격되는데,
이질적인 신앙을 불교로 포용하여 보다 높은 차원으로 유도한다는 데에 의의가 있으나,
자칫 기복 위주의 주술적 신앙으로 불교의 본질을 왜곡시킬 우려와 폐단도 있다.
봉향각
극락보전의 분수승(焚修僧)이 거처하는 3칸의 사채이다.
적묵당,신륵사 종무소
신륵사 비석군과 중수비.
비석으로 흰색 대리석을 쓴 게 특징이다.
일주문을 지나 신륵사로 는 길 왼편에 있다.
일주문을 지나 신륵사로 가는 길에 새로 건립중인 문
찻집의 문이 이뻐서...
신륵사에서 보내는 시간들이
감로수와 같이 달고 시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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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정하고 그 곳에 가자는 약속하는 것도 좋지만
함께 있어서 좋은 그대와
풍경 좋은 곳을 만나 차를 마시거나
부처의 그림자 곁에서
함께 마음을 나누는 것도 아름다운 추억이 되리라
산골자기에 아늑히 들어있는 사찰만 보다가
강가에 수평으로 자리잡은 신륵사를 걷고보니
다시 시간을 내어
강월헌 정자에서 달뜨는 것을 보거나
아니면 물안개 피어나는 강가에서 승천하는 태양을 보고싶다.
그리고 가까이 세종대왕능과 명성왕후 생가를 들러보고 싶다.
2014.3.16.일요일. 여주신륵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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