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 한쪽 비워둔다면

photostory-寺

대구 동화사(桐華寺)

kyeong~ 2014. 2. 21. 22:52

 

 

2014.1.19.

 

 

 

 

 


이상의 두 가지 창건설 가운데 신라 흥덕왕 7년(832)
심지 대사가 중창한 시기를 사실상 창건으로 보는 게 일반적인 견해이다. 동화사는 창건 뒤 현재의 대가람으로 정비되기까지 여러 차례 중창과 개축이 이루어졌다.

동화사는 신라말인 934년 영조 靈照선사, 고려 명종 20년(1190) 지눌보조 普照국사, 고려 충렬왕 24년(1298)홍진 弘眞국사에 의해 각각 중창 중건되었다.

 

보조국사는 호국불교 이념을 구현하기 위해 동화사 중창에 크게 공헌하여 동화사와 염불암에 영정이 모셔져 있다. 또 고려 말기 대표적인 고승인 홍진 국사는 동화사를 하안소 下安所로 삼고 대규모 중창을 이루었다.

현재 해탈교 건너편에 국사를 기리는 부도가 남아있다. 조선 시대에는 선조 39년 (1606) 유정 惟政사명대사, 숙종 3년(1677) 상숭 尙崇대사, 영조 8년(1732) 관허 冠虛, 운구 雲丘, 낙빈 洛濱, 청월 晴月 대사 등이 각각 중창 중건하였다.

 

대웅전을 비롯하여 천태각, 영산전, 봉서루, 심검당 등 현존하는 당우들은 대부분 조선조 영조 때 중창한 건물들이다. 지난 1992년 통일약사여래석조대불의 낙성을 전후해 동화사의 많은 당우들이 새롭게 지어졌다.

 

지금 부터 동화사의 이모저모를 살펴보고자 한다.

사찰의 규모가 넓은데 시간이 넉넉치 않아 급하게 중요한 곳만 들러 보았다.

 

 

사찰 초입에는

년초에는 누구나 계획을 세우고

그 소원이 이루어지도록 기도를 한다

사찰을 오고가며 자신의 소원을 어루만지도록 등을 달아두었다

 

 

초입에서 바라본 동화사 전경

 

 옹호문(사천왕문)

 

   

사천왕상

 

사찰의 규모가 크다보니  신도수가 많은 것 같다.

소원을 적은 메모지가 사찰의 출입문 '옹호문'에 가득하다.

 

 

 

봉서루(鳳棲樓)

용호문을 들어서자 봉서루 앞마당에는  셀 수 없이 많은 등이 하늘을 가리고 있다.

봉서루 '봉황이 깃든 누각' 이란 뜻으로 동화사를 대표하는 누각이다.
네모난 돌기둥을 세워 누문을 만들고, 그 위에 정면 5칸의 목조 누각을 세운 독특한 건축양식이다.

누각으로 오르는 계단 중간에 널찍한 자연석이 하나 놓여 있다.

이곳이 봉황의 꼬리 부분이며, 누각 오른쪽 귀퉁이에 있는 둥근 돌은 봉황의 알을 상징한다.

봉서루 뒤편에는 대웅전을 향해 '영남치영아문'의 현판이 걸려 있다.
임진왜란 때 사명대사가 영남도총섭으로 동화사에서 승병을 지휘했음을 알려주는 중요한 현판이다.

 

 

嶺南緇營牙門(영남치영아문)

         여기가 임진왜란 때 사명대사께서 영남도총섭으로 승군을 지휘하던 곳임을 알 수 있다. 

     치영(緇營)이란 말은 승군의 군영(軍營)이란 말이다.

 

 

누각으로 오르는 계단 중간에 널찍한 자연석이 하나 놓여 있다.

이곳이 봉황의 꼬리 부분이며,  둥근 돌은 봉황의 알을 상징한다.

 

봉서루에서 옹호문을 바라본 모습

새해소원등이 하늘을 가득 메웠다.

바람이 불지않아 고요하게 하늘에 떠있는 새해소원등이 한폭의 그림이다.

 

 

 

설법전

설법전은 해탈교를 지나 동화사의 바깥 마당 오른편에 있다.

설법전이란 고승대덕(高僧大德)이 경전과 선을 설하는 법당이다.
설법전 안에는 대중 스님들의 맡은 바 소임을 적어 놓은 용상방이 붙어 있다.
1990년 통일약사여래석조대불 불사 때 지은 설법전은 각종 법회와 크고 작은 행사가 열리는 곳이다.
지하에는 공양간이 있다.

 

설법전의 주련

補陀山上琉璃界(보타산상유리계)/보타산 위의 유리세계에 머무시는

 正法明王觀自在(정법명왕관자재)/ 정법명왕이신 관자재(관세음) 보살님

影入三途利有情(영입삼도이유정)/그 그림자 삼도에 들어가 유정(중생)을 이롭게 하며

形分六道曾無息(형분육도증무식)/ 그 모습 육도에 나누어 일찍이 쉼이 없으시네

因脩十善三祗滿(인수십선삼지만)/ 삼아승지겁 다하도록 십선 인행(因行) 닦으시어

果備千華百福嚴(과비천화백복엄)/ 온갖 영화의 과보 갖추어 백복으로 장엄하셨네

逈寶山王碧海間(형보산왕벽해간)/ 아득히 보타산왕(관세음보살)은 푸른 바다에서

佩珠瓔珞白衣相(패주영락백의상)/ 주옥과 영락을 차고 있는 흰옷 입은 모습이네

無量光中化佛多(무량광중화불다)/ 한량없는 광명 속에 화신불 많지마는

仰瞻皆是阿彌陀(앙첨개시아미타)/우러러 뵈는 분 모두 아미타부처님이시네

 

설법전의 편액 글씨는 해서체로 단아하며, 주련의 글씨는 행서 기분을 낸 해서체이다.

글씨를 쓴 사람은 묵선자 박지명이다.

 

인악대사나무

설법전 우측에 보이는 고목이 인악대사나무이다.

수령이 500년 된 이 느티나무는 동화사와 인연이 깊은 인악대사를 기리기 위해

'인악대사나무'라고 이름을 지었다.

 

 

육화당;동화사 종무소

봉서루 오른쪽에 위치하고 있다.

 

 

동화사 대웅전 보물 1563호

동화사 대웅전은 팔공산을 대표하는 법당이다.
봉서루 누대 밑을 지나 절 안마당으로 들어서면 정면으로 보이는 건물이 대웅전이다.

대웅전은 여러 차례 중창을 거듭하였는데

현재 건물을 조선 후기 영조 3년(1727)에서 영조 8년(1732) 사이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대웅전 축대 아래 양쪽에는 한 쌍의 괘불대노주가 있고, 법당으로 오르는 층계는 정면에 반원형으로 쌓아 올렸다.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다포계 겹처마 팔작지붕 건물이다.

 

 

대웅전 앞 한쌍의 괘불대와 노주(가운데)

노주(露柱): 법당 앞이나 사찰의 정원에 놓인 석물(石物)을 말하는데, 대게는 당간지주와 함께 서있다.

빗물을 받아 모아서 손을 씻거나 세면을 하던 대야의 일종이라고 하지만 정확한 쓰임새는 분명치 않다.

 

노주(露柱) 상단

 

괘불대

괘불대란 절에 큰 행사가 있을 때 야외에서 괘불을 걸기 위한 목적으로 만든 받침돌입니다.

이 괘불대는 보통 2쌍이다.

 

 

정면의 꽃살문은 '부처님을 공양한다'라는 의미가 담겨져 있다.

기둥은 가공하지 않은 아름드리나무를 사용하여 자연미를 살렸고 또한 안정감이 있다.

 

대불전 내부 불단에는 석가모니부처를 주불로

좌측에는 아미타불, 우측에는 약사여래불을 모셨다.

 

삼존불 뒷편 탱화는 대구 유형문화재 62호 '영산화상도'이다

(사진:동화사 홈페지 펌)

 

 

천장에는 세마리의 용과 여섯마리의 봉황이 화려하게 조각되어 있다.

 

대웅전 뒤뜰 이곳에는 금괴 40kg이 묻혀 있다고

새터민이 주장하여 한때 떠들석했던 곳이다.

 

 

 

 

 

 

화엄당(華嚴堂, 강원)

동화사 승가대학 학사(2003년 건립)

대웅전 앞 마당 왼쪽에 있으며 법화당과 마주하고 있다.

 

 

 

 

 

법화당(法華堂)

동화사 대웅전 앞마당 좌측에 있는 건물이다. 주로 승려의 거처로 쓰이지만

마당 쪽 일부분은 동화서점과 불구 판매소로 사용하고 있다.

평면은 정면 7칸으로 좌우에 날개채를 붙여 'ㄷ자'형 평면을 이루고 있다.

장대석 기단 위에 원형초석을 놓고 원형기둥을 세웠다.

 기둥머리는 창방을 결구한 뒤 익공을 짰는데 주간에도 포를 둔 절충식이다.

처마는 겹처마로 구성하고 한식기와를 올려 팔작지붕을 만들었다.

 

법화당의 주련

良由取捨所以不如   양유취사소이불여

 

着意用工總是痴漢     착의용공총시치한

 

本來無物何論一體     본래무물하론일체

 

不愛福田不樂生天     불애복전불락생천

 

饑來喫飯困來卽眠     기래끽반곤래즉면

 

愚人笑我知乃知焉     우인소아지내지언

 

 

 

동화사 통일범종루

법고 목어 범종 운판을 갖추고 있는 범종루이다.

 

 

 

심검당

심검당은 대웅전을 중심으로 왼쪽에 있는 당우이다.
심검당은 사찰에서 '지혜의 칼을 찾는 집' 이라 해서 선실이나 강원으로 사용되는 건물에 주로 붙이는 이름이다.
현재 이곳은 스님들의 생활 주거 공간으로 사용하며, 1978년에 중건하였다.

 

심검당에서 바라본 대웅전 앞마당

 

 

 

산신각(山神閣)

산신각을 산신을 모셔 놓은 당우로 한국 불교안에 토작신앙을 수용한 증거라 할 수있다.

산신각에는 호랑이와 노인의 모습으로 묘사한 산신을 조상하여 봉안하거나

탱화로 모시기도 한다.

대웅전 서편 뒤에 위치해 있다.

 

산신각 탱화

 

 

 

 

 

 

조사전(組師殿)

조사전은 동화사를 거쳐간 역대 고승의 영정을 모셔둔 곳이다.

조사전에느 초창주로 아려진 극달화상과 보조국사, 사명대사, 세장, 두여, 의첨, 지화, 총륜,

조계종 초대 종정을 지낸 석우스님등 영정이 봉안되어있다

대웅전 서편 뒤에 위치해 있으며 18세기 건물이다.

 

조사전 영정

 

조사전에서 바라본 풍경

 

 

 

칠성각(七星閣)

대웅전 서편 뒤 맨 위쪽에 위치해 있는 칠성각은 우리나라 사찰안에서만 볼 수있는 독특한 전각이다.

칠성은 수명장수신으로  가람 수호신의 기능도 가지고 있다.

칠성각 안에는 철종 8년(1857)에 그려진 삼촌 형식의 칠성탱이 있다.

 

 

심지대사의 오동나무

신라 소지왕 15년(493) 극달(極達) 화상이 창건하여 유가사(瑜伽寺)라고 부르다가

흥덕왕 7년(832) 심지대사가 중창할 때 오동나무가 겨울에 상서롭게 꽃을 피웠다하여

동화사(桐華寺)라 이름을 고쳐 지었다고 한다.

 

 

석탑과 동별당

동별당은 강생원에서 영산으로 가는 길 오른쪽에 위치해 있다

현재 주지스님의 처소이다.

 

 

 

영산전(靈山殿)

대웅전 동편 뒤 담장으로 둘러싸인 별채에 위치한 영산전은 나한전, 또는 응진전이라고도 한다.

법당 안에는 영산화상의  모습을 재현하여 석조 석가삼존불을 중심으로 십육나한상이 좌우로 열좌해 있다.

영산전 현편 글씨는 해사 김성근의 글씨이다.

맛배지붕에 겹처마 형식의 건축으로 1920년 중건 하였다.

오른쪽 요사는 조실채로 사용하고 있다.

 

 

 

 

원음각(圓音閣)

원음각은 절에서 의식이나 행사, 법회를 행할때 사용하는 범종, 법고, 운판, 목어, 사물을 보관하는 전각이다.

범종은 지옥 중생을 비롯하여 일체 중생의 해탈을 위해, 법고는 축생의 고통을 쉬게하기 위해 사용하는 법구이다.

목어는 수중 중생을 위해, 구름 모양을 새긴 운판은 허공 세계에 사는 중생인 날짐승의 해탈을 염하면서 친다.

원음각의 목어는 부릅뜬 눈과 굳게 다문 입에서 돌출된 날카로운 이빨을 가진 잉어의 모습을 하고 있으며

법고는 높이가 두어길 되는 큰 북으로 영남 승군을 호령하던 승군 본영이 동화사였음 알려준다.

 

 

 

동화사 경내를 바쁘게 돌아보고

통일대전으로 발길을 옮겼다

좋은 인연을 만나게 해달라는 소원을 빌면서

연등으로 장식된 빛터널 내려갔다.

 

 

계단을 내려오니 해탈교를 건너기전 여의주를 문 용의 석상이 눈에 들어왔다.

 

해탈교(解脫僑)

성과 속을 가르는 물을 건너는 다리로서 이 다리를 건너면 해탈의 경지에 들어선다는 의미이리라.

이제부터의 공간은 부처님의 공간이므로 범속한 인간은 이 다리를 건너면서 정화를 이루어 내라는 의미이기도 할 것이고,

공부하러 절에 들어온 스님에게는 이 다리를 건널 때마다 공부의 목적을 잊지 마라는 의미이기도 할 것이다.

이 다리를 건너서 뒤로 보이는 계단을 올라가면 옹호문이 나타난다.

 

 

통일 대전으로 가는 길

당간지주 옆 길 건너 언덕에 작은 석탑이 있다

아무런 설명이 없는 것으로 보아 큰 의미는 없는 것으로 보여지지만

사찰경내에 석탑이라 한컷 찍어 보았다.

 

 

 

  동화사 당간지주 보물 제 254호와 부도전

당간지주란

당(幢 : 불화를 그린 旗)을 걸었던 장대, 즉 당간을 지탱하기 위하여 당간의 좌·우에 세우는 기둥을 말한다.

불교의식이나 행사가 있을 때나 사찰의 영역을 표시할 때 당을 걸어 놓았다고 한다..

 

높이 3.1m, 너비 0.76×0.34m. 보물 제254호. 두개의 화강암석주가 0.66m의 간격을 두고 동서로 마주보고 있다.

지주의 안쪽에는 아무런 새김장식이 없으며 바깥면에는 모를 깎고 중심에 세로로 능선을 조각하였다.

 앞뒷면은 역시 모를 죽였을 뿐 아무 새김장식이 없고 꼭대기는 위로는 뾰족하고 앞뒤로는 둥그스름하게 다듬었다.

 

지주의 중심부는 안쪽만을 남겨놓고 나머지 부분에 1m 정도를 살짝 음각하였는데,
이러한 수법은 통일신라시대에 자주 보이는 장식수법이다.

 

지주의 위와 아래에는 두개의 구멍이 뚫려 있는데 위의 것은 네모꼴이고 지면 가까이에는 둥근모양으로 되어 있다.

지금 댓돌은 없지만 전체적으로 견실하고 장중한 느낌을 준다.

 

그러나 둔중함이 엿보이고 있어 제작시기는 신라 말기로 추정되고 있다.

동화사의 창건시기가 832년(흥덕왕 7) 왕사(王師) 심지(心地)에 의한 것임을 참작하면 이 당간지주의 조성연대도 이때와 부합된다고 하겠다."

 

금당선원 초입에 세워진 당간지주와 부도전은 보았지만

금당선원은 스님의 수행공간이라 출입이 통제되는 곳이다.

내부 관람을 할 수 없어 아쉽지만

속세의 때묻은 중생이  스님의 수행을 방해할수는 없는 일....

 

 

 

부도전(左)과 인악당(右)

통일대전에서 해탈교에 이르기전 당간지주옆에는

부도전과 인악당이 있다.

 

인악대사비는 당간지주옆 인악당(仁岳堂)이라는 허름한 비각안에 있다.

비각안에 봉안 되어 있는 인악대사비에는 인악대사의 전기가 기록 되어 있다.

인악대사비의 귀부를 거북으로 하지 않고

봉황으로 조각한 점은 다른 비석과 구별되는 특징이다

이런 형태는 널리 알려진대로 동화사의 지세가 봉황의 알을 품은 형세(鳳凰抱卵形)라고 말하는 것과 깊은 연관이 있다.

 

 

석탑 아래쪽에 있는 구조물이다.

복취무량(복을 끝없이 모으고),

천장비석(하늘의 비밀스런 돌)

이라고 적힌 비석 뒤로 동굴의 문처럼 생긴 평편한 면에다가 빽빽히 글씨를 새겨 놓았다.

그 위로 쌍용이 호위하는 모습이고....

이 구조물에도 별다른 설명이 없어 무엇을 의미하는 구조물인지 알 길이 없다.

천년고찰의 오랜 시간 속에서 한 사연을 안고 있는 것이려니 생각한다.

 

 

 

 동화사(桐華寺): 통일대전(統一大殿)

동화사 대웅전 영역 아래에 근래 새로 조성한 공간의 불전이다.

여기에는 약사여래불 입상을 중심으로 그 앞에 삼층석탑 2기를 좌우로 두고 전면에 지상 3층 규모의 전각인 통일대전을 지었다.

통일대전은 상층 불전을 가리키는 이름이며, 하층은 성보전시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통일대전 내부는 전면 마당의 약사여래불을 예불할 수 있도록 전면을 창호로 꾸몄으며 이로 인해 금강계단으로 불리고 있다.

통일대전은 정면 7칸, 측면 4칸으로 연건평 1,200평에 이르는 대규모 전각이다.

내부에는 전면에 4단의 불단을 조성하여 다수의 관음상을 봉안하였다.

그리고 성보전시관에는 동화사의 주요 전각과 암자에 봉안되어 있던 대부분의 불화를 수장하여

각 전각에는 사진 복사본으로 기존 불화를 대신하고 있다.

 

 

 통일대전의 편액은 노태우 대통령이 쓴 것이라고 한다.

 

 통일대전의 옆모습

 

 통일약사여래대불(統一藥師如來大佛)
1992년 11월에 완공된 통일대불은
약사여래불로 높이 약 33m 둘레 16.5m 이다.
석불의 몸체안에는 미얀마 정부가 기증한
부처님 진신사리 2과를 모셨고,대불 앞에는 국내 최대 규모인
17m의 석탑 2기와 7.6m의 석등 2기를 세웠고
대불 앞에는 통일대전을 건립하여 남북으로 분단된
민족의 통일을 염원하는 불자들의 간절한 발원을 모았다.

 

 

 

 통일대불과 석탑

 

 통일대불 주변 석벽불

 

대나무관을 통해 약수물 흘러 내린다.

 

팔공산 동화사 일주문"봉황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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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해서 처음으로 찾은 동화사 관람을 마치고 일주문을 나서는데 많은 미련이 남는다

예정에 없었던 관람이라서 동화사에 대한 지식이 없어서 무엇을 어떻게 관람해야할지 몰라

중구난방으로 돌아보았다

사진정리를 하면서 주변의 비로암이나 마애불입상등을 살펴보지 못해 아쉽다.

여행은 언제나 아는 만큼 보고 오는 법

이제 조금이나마 동화사에 대한 지식이 생겼으므로

다음에 혹시 동화사에 간다면 좀더 많은 부처님의 뜻을 살피고 오리라....

 

2014.1.19. 대구 동화사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