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 한쪽 비워둔다면

photostory-寺

2013.11.10. 무주 적상산 안국사

kyeong~ 2013. 11. 26. 00:47

                                              

 

 

안국사

전라북도 무주군 적상면 북창리
적상산(赤裳山)에 있는 절.

 대한불교조계종 제17교구 본사인 금산사(金山寺)의 말사이다.

1277년(충렬왕 3)에 월인(月印)이 창건하였다는 설과

 조선 태조 때 무학대사(無學大師)가 복지(卜地)인 적성산에 성을 쌓고 절을 지었다는 설이 있다.

그 뒤 1613년(광해군 5) 3월에 증축하였고, 1864년(고종 1)에 이면광(李冕光)이 중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또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에는 승병의 병사(兵舍)로 사용되었으며

 주변에는 조선실록을 봉안하였던 사고(史庫)의 옛터가 남아 있다.

 지금 절이 자리한 곳은 옛날 호국사(護國寺)가 있던 곳이다.

1989년 적상산에 무주 양수발전소 건립이 결정되자

 안국사가 자리한 지역이 수몰지구로 편입되었으므로 호국사지로 옮겼기 때문이다.

 

1991년에는 일주문·선원·호국당 등을 이전 복원하였고,

 이듬해 극락전·천불전·요사·청하루 등도 이전 복원하였다. 1994년에는 범종각을 지었고, 1996년에는 범종을 조성하였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극락전·천불전·지장전·삼성각·호국당·일주문·요사채가 있으며

극락전 안에는 보물 제1267호인 괘불(掛佛)이 있다.

  괘불은 1728년(영조 4)에 조성하였다.

  높이 10.75m, 너비 7.25m로서 천재지변을 몰아내는 이 고장의 신앙물로 전하여지고 있으며,

 표면은 비단, 뒷면은 마(麻)로 되어 있다.

 이 괘불은 의겸(義謙) 등 비구니 5명의 공동작품으로 기록되어 있다.

 

극락전은 전라북도유형문화재 제42호로 지정되었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건물로서 1613년에 중건하였고,

 1864년에 중수한 건물인데, 1991년에 현재의 자리로 이건 되었다.

 또한, 적성산성에는 전라북도유형문화재 제85호로 지정된 호국사비가 있다.

 

 

 

천년고찰, 무주 적상산 안국사 일주문

한국 백경중의 하나로 꼽히는 적상산은 사면이 층층 절벽으로 둘러싸여

가을 단풍이 물든면 마치 여인의 치마와 같다고 하여 적상(赤裳)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승용차의 경우 꼬불꼬불한 길을 따라 안국사 일주문까지 힘겹게 오를수 있다

안국사 일주문 현판의 글씨는 강암 송성용 선생의 휘호이다.

 

적상산 사고터에서 굽이돌아 오르는 안국사의 초입에는,

정면 1칸 측면 1칸의 목조 맞배건물인 일주문이 있다.

낮은 단층기단 위에 다듬지 않은 2개의 기둥을 일렬로 세운 뒤

창방과 평방을 얹고

그 위에 화려하기 그지없는 다포로 장엄하였다.

일주문에는 1992년 강암(剛菴) 송성용(宋成鏞)이 쓴 ‘적상산 안국사(赤裳山 安國寺)’라는 편액과

1995년 여산(如山) 권갑석(權甲石)이 쓴 ‘국중제일정토도장(國中第一淨土道場)’이라는 2기의 편액이 걸려 있다

 

 일주문 편액

 일주문 편액

특히 권갑석(權甲石)이 쓴 편액 ‘國中第一淨土道場’은

무학대사가 이곳을 ‘국중제일의 길지’라고 한 설화에서

유래한 편액으로,

‘안국(安國)’과 ‘정토(淨土)’를 바라는 안국사의

 

 

 

 

적상산성 [赤裳山城]

사적 제146호

전라북도 무주군 적상면에 있는 조선시대의 산성.

안국사 일주문을 들어서면 먼저 정상산성이 눈에 들어온다.

 

 

 

 적상산성 [赤裳山城]

사적 제146호. 석축으로서 둘레는 약 3㎞에 이른다.

적상산(赤裳山)은 호남에서 영남으로 가는 요충지에 자리잡고 있어 고려말에 최영이 산성축조를 건의했다.

 그러나 조선 세종 때 최윤덕이 그 입지조건을 살펴본 후 중지시켰다.

1639년(인조 17) 박황의 건의로 수축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성벽의 둘레는 1만 6,920척, 높이 7척으로 기록되어 있다.

당시 성 안에는 4개의 못과 23개의 우물이 있었다.

이곳에는 1612년(광해군 4) 실록전(實錄殿), 1614년 사각(史閣), 1641년 선원각(璿源閣)·군기고(軍器庫)·대별관(大別館),

1643년 호국사(護國寺) 등이 건립되었다.

이러한 건물은 성 안에 거주하는 별장·참봉·승려들에 의해 보호·관리되었다.

 

 

 

적상산성에 올려다 본 안국사

산성안에 있어서인지 왠지 더 편안해 보이는 안국사

 

안국사로 오르는 계단위에 청하루가 있다.

 

 

 가을날 단풍빛에 푹 적어있는 안국사에

또다른 분위기...사진 전시회를 하고 있었다.

 

 계단 아래에서 바라본 범종각

 

 

안국사극락전 (安國寺極樂殿.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42호. 전북 무주군 적상면 괴목리 산184-1)

적상산 분지에 있는 안국사는 고려 충렬왕 3년(1277)에 월인화상이 지었다고 전한다.

원래는 적상산성을 지키던 승병들의 숙소로 지었다고 하며, 조선 광해군 5년(1613)과 고종 1년(1864)에 수리하였다.

 아미타불을 모신 극락전은 앞면 3칸·옆면 3칸의 규모이며, 지붕 옆면이 사람 인(人)자 모양인 간결한 맞배지붕집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면서 장식을 겸하는 공포는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배치된 다포식 건물이다.

내부에는 이 지역의 신앙물로 천재지변을 몰아 낸다고 전하는 괘불이 있다.

절의 주변에는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던 사고(史庫)의 옛터가 남아있다. (문화재청 자료)

 

안국사목조아미타삼존불상(安國寺木造阿彌陀三尊佛像.전북 유형문화재 제201호.전북 무주군 적상면 괴목리 산184)

 

안국사 극락전내에 아미타여래좌상을 중심으로 관음보살세지보살이 협시하고 있는 상태이다.

 

아미타여래좌상은 목이 짧고 움츠린 듯한 어깨에 허리가 약간 구부정한 자세를 취하고 있으며,

턱이 짧아지고 각이 져 딱딱해 보이는 얼굴은 눈을 가늘게 뜨고 입꼬리를 살짝 치켜올려 엷은 미소가 번져나는 듯 하다.

오똑한 코에 목에는 삼도가 뚜렷하며 법의는 통견의로서 왼쪽 팔로부터 흘러내린 소매자락은 대퇴부 쪽에서 발가락을 덮고 있다.

자연스러운 옷주름과 사실적 표현의 손으로 인하여 전체적인 분위기는 원만하며

높이 67cm, 무릎폭 43.5cm, 어깨폭 30cm 내외이다. 좌협시인 관음보살상은 옷주름이 본존불에서와 마찬가지로 자연스럽게 처리되었으며,

 손 역시 사실감이 돋보인다.

머리는 관을 쓸 수 있도록 턱을 두어 짧은 상투처럼 머리를 묶어 올렸으며,

보관 아래쪽으로만 머리칼을 표현하였는데 귓바퀴를 한 번 감아내려 어깨 위로 흘러 내리게 하였다.

 높이 63cm, 무릎폭 35.5cm, 어깨폭 26cm 내외이다.

 

우협시인 세지보살상은 손모양이 관음보살상과 대칭적이고 불의형(佛衣形) 법의를 착용하였으며,

턱이 보다 납작해지고 허리가 좀 더 구부정한 것만 다를 뿐

얼굴 형태 및 표정, 사실적인 손, 자연스러운 옷주름 등 조각 양식의 세부 특징이 관음보살상과 거의 유사함을 알 수 있다.

높이 61cm, 무릎폭 36.5cm, 어깨폭 24cm 정도이다. 불상조성기가 발견되지 않아 정확한 조성연대는 알 수 없지만

약간 구부정한 자세에 굵고 짧아진 목, 납작해진 턱과 각진 얼굴, 오뚝한 코와

근엄하면서도 엷은 미소를 보이는 얼굴표정, 자연스럽게 처리된 옷주름, 사실적 표현의 손 등 17세기 불상양식을 보이고 있다.

(문화재청 자료)

 

 

안국사 극락전 단청설화

안국사의 주 법당으로 극락전을 지은 스님이 단청불사를 어떻게 해야 할지 고심하고 있던 어느 날이었다.

하얀 도포를 입은 한 노인이 나타나

 “제가 지금부터 100일 동안 단청을 할 테니 극락전에 하얀 막을 치고 물 한 그릇만 넣어 주되 절대로 그 안을 들여다보지 마시오” 라고 말하였다.

스님은 범상치 않은 노인을 말을 깊이 새기며 궁금증을 억누른 채 노인에게 단청불사를 맡긴 채 무사히 끝나기를 부처님께 기도하는 나날을 보냈다.

 그렇게 하루하루가 지나 구름이 걷히고 단풍이 떨어질 무렵의 어느 날,

스님은 천막 속의 단청불사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궁금함을 억누를 길이 없었다.

그리하여 단청이 시작된 지 99일째 되던 날 그 호기심은 극에 달하여, 하루를 참지 못하고 가만히 안을 들여다보고 말았다.

그런데 놀랍게도 천막 안에 노인은 온데간데없고,

붓을 입에 문 흰 학이 단청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순간 스님이 지켜보는 것을 눈치 챈 학은 완성하지 못한 단청 일을 남겨 놓은 채 하늘로 날아가 버렸다.

 그래서인지 안국사 극락전의 뒤편 한쪽에는 딱 하루거리에 해당하는 분량의 목재가 단청이 되지 않은 채 그대로 나뭇결을 드러내고 있다.

또한 예전에는‘온통 학이 노닐었다’고 할 만큼 극락전에 학 그림이 많이 그려져 있었다고 한다.

지금도 천장을 빙 둘러 날고 있는 학문양이 적지 않으니,

 옛 이야기를 잊지 않고 소중하게 간직해가고 있는 사찰 측의 노력이 한결 운치있게 다가온다.

 

 

 

 

 

 

극락전 앞 괘불대 : 옹정(雍正:청나라 연호 8년;1730년)이란 연호가 새져진 특이한 괘불걸이다.

 

 

 

안국사영산회괘불탱 (安國寺靈山會掛佛幀)

보물  제1267호

석가가 설법하는 장면을 그린 영산회괘불인데,

괘불이란 절에서 큰 법회나 의식을 행하기 위해 법당 앞 뜰에 걸어놓고 예배를 드리는 대형 불교그림이다.

길이 10.75m, 폭 7.2m 크기의 이 영산회상도는 석가불을 중심으로 오른쪽에 다보여래, 문수, 보현보살이 있고,

왼쪽에는 아미타불, 관음, 대세지보살이 서 있다.

화면을 가득 채운 석가모니는 화면 중앙에 서 있는데 이목구비는 큼직큼직하며

건장하고 각진어깨, 노출된 가슴, 유난히 길게 늘어진 팔, 짧아 보이는 하체를 지녔으며

이렇게 크고 건장한 신체는 보는 이를 압도하는 듯하다.

 

녹색과 주황색을 주로 사용하였고 회색, 분홍 등 중간색을 넣어 은은한 분위기를 나타내며

구름, 연꽃, 단청문양 등으로 화려하고 환상적인 느낌을 연출하고 있다.

의겸 등 여러 승려 화가들이 그린 이 그림은 본존불을 강조하여 시선을 집중시키는 효과를 의도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조선 정조 16년(1792), 순조 9년(1809)에 뒷벽을 새단장한 기록이 있어

승려화가인 의겸이 활약한 영조 6년(1730)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천불전

 

 

 

 삼성각

 지장전

 

안국사 돌두꺼비

 

범종각

 

 

 

 

 

 

 

 

 

함께 온 일행이 주차를 하지 못하여 그냥 내려가는 바람에

꼼꼼하게 살펴보지 못했다.

미련이 남는 다는 것은

다시 올 수 있는 기회를 가지는 셈이다.

다시 찾을 수 있다는 기대 또한 신이 내려 준 축복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이름조차 생소했던 안국사를 안내해준 친구에게

어떻게 감사함을 전해야 할지...

이사진을 볼때마다

안내를 해준 친구

언제나 가까이서 그를 생각할 것임이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