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 한쪽 비워둔다면

photostory-寺

묘적사-생긴대로, 가진 것 그대로 살아가리라.

kyeong~ 2013. 10. 13. 04:06

 

 

 

2013.10.9. 한글날

올해부터 한글날이 공휴일로 지정되었다.

하루 더 늘어난 공휴일이 갑자기 횡재한 느낌이다.

새벽눈이  떨어져 집안일을 대충 마무리하고 나니 오전 여덟시...

 

문득 어느친구가 한번쯤 들러보라고 권했던 묘적사를 가보기로 했다

묘적사에 왜 가느냐고 물으면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다

아무생각없이 거기에 가보면

무엇인가 보이는 것이 있으리라.

 

시월의 하늘이 시리도록 푸르다

시원하게 뚫린 외곽순환도를 달리노라니 노래가 절로 나왔다

라이오를 타고 흐르는 노래를 따라부르며

약 80분만에 묘적사에 도착했다.

 

 

 

묘적사 안내도

 

 

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 월문리 묘적산(妙寂山)에 있는 절.
대한불교조계종 제25교구 본사인 봉선사(奉先寺)의 말사이다.

 

신라 문무왕 때 원효(元曉)가 창건하였다 하나, 그 뒤 조선 초기까지의 역사는 미상이며, 조선 중기에 폐허화되었다.  

김교헌(金敎憲)이 쓴 묘적사 산신각창건기(山神閣創建記)에 의하면,

수백 년 동안 소규모의 사찰로 명맥만 이어오던 것을 1895년 봄 규오(圭旿)가 이 절에 와서 시주를 얻어 산신각을 짓고,

 오랫동안 이 절에 있었던 산왕신상(山王神像)을 봉안하였다 한다.   

 

 1969년 주지 인구(隣九)의 실화로 산신각·큰방 등이 전소되었고,

1971년 주지 자신(慈信)이 대웅전과 요사채를 중건하였다.

현존 당우로는 대웅전과 요사채가 있으며, 

 대웅전 안에는 관세음보살상을 중심으로 후불탱화(後佛幀畫)·산신탱화·칠성탱화 등이 있다.  

 

이 절에는 조성연대 미상의 삼층석탑 1기가 있다.

 

 

 

 

세종의 비밀 경호부대와 묘적사의 진실

 

 세종의 친위부대는 존재했을까.

국왕들은 경호문제를 본능적으로 걱정했다.

 특히 힘의 사회였던 조선 초기의 군주는 안전 문제에 신경을 쓸 수밖에 없다.

조선은 개국 후 왕자들의 권력투쟁이 이어졌다.

 

태종 때에 적자 상속 분위기가 고조되었지만 여전히 구두선에 불과했다. 세종도 셋째 아들이었다.

반역의 깃발은 절대 권력자 주변에서 치솟는 게 역사의 교훈이다.

조선 후기의 정조는 심복 홍국영의 사촌동생의 역모, 외척의 침전 침입, 자객 침투 사건 등이 이어지자

친위부대인 장용영을 설치했다.

임금을 경호하고, 왕실의 권위를 높이고, 개혁정치를 지속적으로 추진할 수 있는 힘을 확보하기 위한 조치였다.

세종의 상황도 정조와 크게 다르지 않다.

아버지 태종이 외척과 양녕대군의 세력을 무력화시켰지만 안심만 할 처지는 아니었다.

또 사병 혁파 등으로 신권이 약화됐지만 결코 만만히 볼 만한 상황도 아니었다.

그래서 임금은 정부조직과는 별도의 친위부대에 관심을 가질 수도 있다.

이런 점에서 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의 묘적사에 내려오는 구전은 음미해 볼만 하다.

 

“신라 문무왕 때 원효대사가 창건한 천년고찰로 세종대왕 때 웅장한 불사를 이룩하였다.

국왕 직속의 비밀기구가 있던 곳이다.

왕실 산하 비밀요원을 훈련시키기 위해 사찰을 짓고 선발된 인원을 승려로 출가시켰다.

승려 교육과 아울러 고도의 군사 훈련을 받게 했다.”

이 절의 안내판에는 위와 같은 이야기가 전해짐이 기록돼 있다.

세종의 후궁인 신빈 김씨와 그 아들인 밀성군에 의해 중창된 묘적사는

임진왜란 때는 유정이 승군을 훈련하는 장소로 사용했다.

이후 승려들이 무과시험을 준비하는 훈련장으로 활용했다.

절 주위에서는 화살촉이 발굴되어 이곳이 당시 군사 훈련장이었음을 추정하게 한다.

이 절은 세종과 깊은 관계가 있다.

사냥을 통한 군사 훈련인 강무를 할 때 이곳은 길목이 된다.

도성을 떠난 왕은 첫 사냥을 양주 일대에서 시작해 강원도 횡성, 황해도 구월산 등으로 이동한다.

도성에서 대화재가 발생했던 8년(1426년) 2월 15일에도 임금은

묘적사 북쪽 산에서 사냥을 한 뒤 횡성으로 향하던 중이었다.

구전으로 내려오는 왕실소속 비밀요원들의 군사 훈련은 세종과 세조 두 임금과 관련 가능성이 높다.

두 왕은 불교에 우호적이었다. 궁궐에서 반나절 거리인 이곳에 특수요원을 양성할 개연성은 상당하다.

실제로 강무에 특히 신경을 쓴 세종은 묘적사를 수십 차례 거쳐 갔을 것으로 추정된다.

세종과 세조의 신임을 받은 문장가 김수온이 쓴 묘적사 중창기는 이곳이 왕실과 특수한 관계임을 암시하고 있다.

 

 

무영루

 일주문이 없는 묘적사의 주 출입문이다

무영루 출입문 양옆에는 사천왕상이 모셔져 있으며

이층 누각으로서 템풀스테이 활용 공간이기도 하다.

 

묘적사 마당에서 찍은 무영루의 모습

 

무영루 주변 낙엽송이 훤칠하게 자랐다.

불경을 들으며 자란 저 나무..

참 반듯하게 높이 높이 자랐네.

 

 

무영루 편액

 

 무영루 출입문

 

   

무영루에 모셔진 사천왕상

 

 묘적사 다경실(茶經室)

천왕문이 있어야 할 자리에 스님의 처소인 다경실이 먼저 나타난다.

지금껏 보아온 사찰과는 달리 돌과 흙으로 쌓아 올린 건물로

기둥으로 사용된 나무도 다듬지 않은 자연그대로인 모습이 이체롭다

 

 

 대웅전으로 들어가는 문

다경실의 기둥에 흐릿하게 묘적사라고 새겨져 있다

오랜 세월동안 글씨가  마모가 되어 잘 알아 볼 수가 없다.

세월이 흘러간 자국같은 묘적사

 다경실에서 바라본 팔각칠층석탑과 대웅전

 

 다경실 천정의 용문양

 

대웅전에서 바라본 다경실

 

다경실의 기둥..생긴 그대로 자연스러운 모습

 

다경실 측면 모습

 

 

 

대웅전과 팔각칠층석탑(八角七層石塔)

 

 대웅전

 

 

 

◎ 주련

불신보편시방중(佛身普編十方中)

삼세여래일체동(三世如來一體同)

광대원운항부진(廣大願雲恒不盡)

왕양각해묘난궁(汪洋覺海渺難窮)

도량청정무하예(道場淸淨無瑕穢)

삼보천룡강차지(三普天龍降此地)

 

 

부처님의 법신은 시방에 두루 하시니

삼세여래도 모두 한결 같으시네

광대한 서원의 구름 항상 다함이 없으시고

드넓은 깨달음의 바다는 아득하여 헤아리기 어려워라

청정 도량 티끌 한 점 없으니

삼보천룡이 이 땅에 내려오시네

 

팔각칠층석탑(八角七層石塔)

남양주에 위치한 천년고찰 묘적사(妙寂寺)의 대웅전 앞에 있는 팔각칠층석탑(八角七層石塔)은

조선 초기에 세워진 석탑으로,

남양주시의 향토유적 제1호이기도 하다.

이 석탑은 국보 제48호인 월정사(月精寺) 팔각구층석탑과

인근 와부읍 송촌리에 있는 수종사(水鐘寺)의 팔각오층석탑과 그 양식이 동일하며,

우리나라에서는 흔치 않은 팔각다층석탑이라 한다

석탑 3층과 4층 사이의 체감률이 부자연스럽고 묘적사 동쪽에 위치한 활터에 남아있는 탑재 등을 살펴볼때

이탑은 원래 7층이 아니라 11층으로 추정된다.

 

 묘적사 대웅전 석가여래 부처님

대웅전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제법 당당한 규모를 갖추고 있으며 외벽에는 심우도가 그려져 있다.

 원래 묘적사의 대웅전은 현 위치에서 동쪽을 약 20m 정도 떨어진 지점에 있었는데,

1969년에 화재로 소실되자 1971년에 중건하면서 지금의 위치로 옮겼고,

1976년에 중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법당 내부에는 근래에 금동으로 조성한 석가여래좌상을 모시고,

아미타후불탱을 비롯해 신중탱, 칠성탱 등 3점의 불화를 봉안하였는데,

3점의 불화는 모두 1980년에 조성되었다. 이밖에 법당에는 범종이 1구 있으며,

이는 1974년에 조성된 것이다.

 

묘적사 스님의 천수경소리를 들으며 오랫만에 108배를 하였다.

 

  마하선실(摩訶禪室)

묘적사의 요사체는 모두 5동이 있다.

대웅전 앞의 팔각칠층석탑을 중심으로 좌우와 전면에 각각 1동씩 3동의 건물이 있으며, 연못가에 별채

그리고 템플스테이용1채가 있다.

팔각칠층석탑 앞에서 대웅전을 바라볼 때 우측에 있는 요사는

마하선실(摩訶禪室)로 정면 6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며,

좌측의 요사는 마하선실과 같이 정면 6칸의 팔작지붕 건물이지만 측면은 3칸이다.

또 석탑 전면의 요사는 다경실(茶經室)로 주지스님이 머무르는 공간인데,

벽돌 건물로 기둥만 목재를 사용했다.

한편 이 3동의 건물들은 모두 기둥이 특이한 형태로,

목재를 다듬지 않고 자연스럽게 휘어진 나무의 상태 그대로 세워놓았다.

 

마하선실의 기둥을 가까이서 찍어보았다.

마하(摩何)는 불교에서 크다, 많다.뛰어어나다라는 뜻

선실(禪室):시끄러운 세속을 떠나 조용히 불도를 닦는 곳. ...

 

마하선실 측면모습

 

마하선실 측면 모습

 

 대웅전 오른편 요사체 관음전(觀音澱)

 

묘적사에는 5섯채의 요사체가 있다.

대웅전 앞마당의 다경실, 좌,우 2동의 요사체,

연못가에 한채, 템플스테이용1채

대웅전 마당에 있는 요사체 기둥은 생긴 그대로 울퉁불퉁한 모습이 특이하다.

 

이 평범하고 자연스러운 기둥으로

자꾸만 눈길 간다.

 

 

 

 

묘적사 앞마당을 타고 흐르는 작은 물길

묘적사는 이런 모습이 묘하게 아름답다

요란하지도 않고 조용히 그리고 자연 그대로의 모습으로 불법을 깨우치는 사찰이다.

다경실의 돌과 흙으로 된벽, 옹이가 그대로 드러난 요사체 기둥, 그리고 마당을 따라 소리없이 흐르는 물

가장 편안한 모습으로 겉치레 없이 바라볼 수있는 풍경이다.

 

 

 대웅전에서 올려다 본 산영각

절벽에 석축을 쌓고 아담하게 지어졌다.

 

대웅전 뒷편

산죽이 나열한 작은 오솔길을 따라 오른다

이길 끝 산허리에는

절벽을 딛고 선산영각과 굴법당인 나한전이 있다.

 

산영각 출입문

아담한 이문을 들어서면 산영각과 굴법당인 나한전이 있다.

 

 

김교언이 쓴 '묘적산산신각창건기'

妙寂山山神閣創建記

余於壬辰春 短策輕 東遊楊邑 距京五十里 妙寂山一麓 雄踞魁伏 左右開帳 其間可容十餘里 左文谷 右德峙 前七臺 後三瀑

又有立石數丈 兀立洞口 其爲山也 鍾毓淸淑之氣 凝結磅 之形 幽邃奇傑 八谷一山 挺出峨立 其下古刹 扁曰妙寂寺 四間十楹

築土結茅 己閱百年星霜 而山王神像 儼在壁上 風雨不除 余乃 然 方欲拓半畝 數椽 以爲妥奉之所 而有志未就 遽經數稔矣

幸於今春 適因圭旿法師來懇 鳩財施 萃然告成 又請余曰 記其蹟 表其誠 故不避菲才 敢撥蕪辭 欲使後人君子

 知其某也營某也 之意云爾 大朝鮮開國五百四年乙未端陽月 初吉 記

 

나는 임진년 봄에 짧은 지팡이 가벼운 신발로 동으로 양주 고을에서 놀았는데 서울에서 50리 거리이다.

묘적산의 산줄기가 웅장하게 웅크리고 크게 기복(起伏)하여 좌우로 장작을 펼쳐

그 사이에 10여 리는 족히 포옹하고 있었는데 왼쪽은 문곡(文谷) 오른쪽은 뚝 동구에 서 있었다.

그 산은 청숙한 기운이 어리고 억센 형체로 뭉쳐 깊숙하고 기특한데 여덟 골짜기와 한 덩이 산이 특출하고 높이 솟았다.

그 아래의 고찰은 이름이 묘적사인데 4칸 10영으로 터를 다지고

지붕을 엎은 지 이미 백년이란 성상이 지났으나 산왕(山王)의 신상은 엄연히 벽 위에 그대로 있었다.

그러나 풍우를 가리지 못하여 나는 이를 추연하게 여겨 좁은 터를 개척하고

몇 칸의 집을 지어 봉안하는 처소로 삼으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몇 해를 넘기고 말았다.

다행히 금년 봄에 규오(圭旿)법사가 찾아와 간청하여 갑작스럽게 낙성을 고하게 되었는데

법사는 또 나에게 그 사적을 기록하고 그 정성을 표하라 하였다.

그리하여 비재(菲才)임에도 불구하고 감히 하찮은 말을 엮어 후인 군자로 하여금

누가 경영하고 누가 지었다는 것을 알게 하는 바이다.

대조선 개국 504년(1895) 을미 단양월 초길(初吉)에 기록하다.

상사 김교헌(庠士 金敎憲)이 기록하다.

 

산영각(山靈閣)

산영각은 산신각. 삼성각과 함께 우리나라 고유민속신앙을 포용한 불교문화다.

보통 절의 뒷쪽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하고 있다.

이 산영각은 영험하다고 하여 기도객들이 많이 찾는다고 한다.

수락산 내원암과 함께 수도권에서 기운이 가장 좋은 곳으로 이곳을 꼽는다고 한다.

이 산영각은 최근에 새로 지은 것이다.

 

참 가깝게 느껴지는 산

앞산 뒷산이 팔을 뻗치면 닿을 것 같다.

침엽수의 향긋한 냄새가 실바람을 타고 전해져 왔다.

기도를 하지 않아도

이 청정한 기운을 받고 있으면 마음이 정화되리라.

 

 

 

석굴암(나한전)의 외부모습

 

 

묘적사  석굴암 불단

본존과 감실의 16나한상

 

 석굴암에서 바라본 묘적사 풍경

 

 

 유명 연예인과 함께 했던 템플스테이 ...기념사진이 벽에 걸려있다.

 

 

 크지 않은 절

이곳 저곳 살펴보고

자연스러운 멋과 상쾌한 묘적산 바람을 안고

저 바위에 앉아 잠시 쉬어가도 좋겠다.

 

 산영각 아래 별채 요사체가 있고 그 뒷편 작은 연못 영지(影池)로 발걸음을 옮겼다.

 

 별채 요사체

그리고

작은 연못 영지

그리고

작은 불상...

그리고

아무것도 없이 텅빈 내마음.

 

 청명한 하늘이 그대로 비쳤다

내얼굴도 비쳐볼걸 그랬나..

저기 저 부처처럼.

 

물에 비친 그대는 부처의 마음을 닮았는가?

 

 대웅전 마당의 꽃

 

묘적사 경내 주의사항과 묘적사 연혁 안내문이 적혀 있는 문

문을 통과하면 두개의 석상이 손님을 맞이하고 있다.

키도 다르고 하나는 이끼가 살짝 끼어 있고

하나는 깨끗하다

만들어진 년대가 좀 다른 듯하다

 

 

 

 

 묘적사 중수비

묘적사 중수를 위해 시주한 신도들의 이름이 빼곡히 적혀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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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렇게 해서 묘적사를 한바퀴 주욱 둘러보고 내려왔다.

묘적사라는 이름 하나만으로

찾아간 묘적사

사찰이 아니라 산골 펜션처럼 느껴지는 아늑한 곳이다

묘적사라는 이름처럼 묘하게 고요함이 감도는 절이다.

 

덤으로 얻은 것 같은 휴일날

그리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묘적사을 거닐고 돌아오는 길

생긴데로

가진것 그대로

살아가는 것이 가장 아름다운 삶이 아닐까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