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축총림 통도사
2부(중노전과 하노전)
통도사는
부처님의 진신사리와 금란가사(金
<사진:통도사 홈페이지 발췌>
통도사 전경
통도사의 가람은 양산천을 따라 동서로 길게 배치되었다.
상노전 (上爐殿) (1)금강계단(金剛戒壇) (2)대웅전(大雄殿) (3)구룡지(九龍池) (4)설법전(說法殿) (5)응진전(應眞殿) (6)명부전(冥府殿) (7)삼성각(三聖閣) (8)산령각(山靈閣) (10)일로향각(一爐香閣) (11)보광선원(寶光禪院) (12)탑광실(塔光室) (13)정변전(正?殿) (14)호혈석(虎血石) (15)템플스테이 수련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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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노전 (中爐殿) (1)대광명전(大光明殿) (2)용화전(龍華殿) (3)봉발탑(通度寺 奉鉢塔) (4)관음전(觀音殿) (5)통도사 석등(通度寺 石燈) (6)개산조당(開山祖堂), 해장보각(海藏寶閣) (7)삼십칠 조도품탑(三十七 助道品塔) (9)장경각(藏經閣) (10)세존비각(世尊碑閣) (13)황화각(皇華閣), 원통방(圓通房), 감로당(甘露堂) (14)판도방(判道房) (15)원주실(院主室) (16)행자교육원(行者敎育院) (17)공양간(供養間 - 밥 짓는 곳) (18)후원(後院 - 식당, 주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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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노전 (下爐殿) (1)영산전(靈山殿) (2)극락보전(極樂寶殿) (3)약사전(藥師殿) (4)삼층석탑 (5)화엄전(華嚴殿 - 기도접수처) (6)만세루(萬歲樓 - 불교용품점) (7)범종각(梵鍾閣) (8)통도사 동종(通度寺 銅鍾) (9)가람각(伽藍閣) (10)천왕문(天王門) (11)일주문(一柱門) (12)명월료(明月寮 - 종무소) (13)금당(金堂), 은당(銀堂) (14)육화당(六和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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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도사 가람 배치도
중로전
중로전의 건물은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51호로 지정된 관음전(觀音殿)·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04호로 지정된 용화전(龍華殿)·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94호로 지정된 대광명전(大光明殿)·세존비각(世尊碑閣)·장경각(藏經閣)·해장보각(海藏寶閣)·황화각(皇華閣)· 감로당(甘露堂)·원통방(圓通房)·화엄전(華嚴殿)·전향각(篆香閣) 등을 들 수 있다. 관음전의 창건은 1725년용암(龍岩)에 의하여 이룩되었으며, 내부에는 독존상으로 관음보살좌상을 봉안하였다. 용화전은 1369년에 창건되었으나 창건주는 미상이며, 1725년청성(淸性)이 중건하였다. 내부에는 역시 약 2m에 달하는 미륵좌상을 봉안하였다.
대광명전은 중로전에서 가장 웅장한 건물로서 정면 5칸, 측면 3칸이며, 내부에는 비로자나불상을 봉안하고 있다. 세존비각은 1706년에 건립된 사바교주 석가여래 영골부도비의 비각으로서 불사리 계단에 대한 내력을 기록하고 있다. 비문은 채팽윤(蔡彭胤)이 지었으며 중국에서 자장율사가 가져온 불사리·가사 등에 관한 내용과 임진왜란 당시 사리 수호에 따르는 수난의 사실들을 기재하였다. 비신의 높이는 약 2.5m, 너비는 약 1m이다. 장경각에 있는 목조 경판은 《능엄경 楞嚴經》·《기신론 起信論》·《금강경》·《법수 法數》·《사집 四集》·《부모은중경》 등 15종이 있다. 개산조당(開山祖堂) 바로 뒤에 있는 해장보각은 창건주 자장율사의 영정이 봉안되어 있고, 주위에는 고려대장경 완질이 봉안되어 있다.
요사(寮舍)의 중심이 되는 감로당은 창건이 1340년(충혜왕 복위 1)이나 현존 건물은 1887년(고종 24)덕명(德溟)이 중건한 것이다. 口자형 건물로서 약 86칸의 대소 방사로 이루어져 있다. 감로당과 가까운 원통방은 1341년에 처음 건립되었으며, 현존 건물은 감로당과 함께 탄해(坦亥)에 의하여 중건되었다. 화엄전은 창건이 1368년이며, 1762년에 중건하였고, 1882년 불타서 없어진 것을 1887년구련(九蓮)이 중건하였고, 1970년 재건하였다.
하로전
하로전의 중요 건물들은 영산전·극락전·약사전(藥師殿)·만세루(萬歲樓)·영각(影閣)·범종각 등이 있다. 이들 건물배치는 전형적인 조선시대 배치 양식을 따른 것으로, 북쪽의 중심 건물과 그 좌우, 그리고 남쪽 전면에 누각을 두었다. 이러한 배치 방식은 하로전 일대의 건물군이 가장 짜임새 있게 배치되었음을 말하는 것이고, 동시에 이곳 일대의 법당들의 중요성을 드러낸 것이다.
그 중심 건물은 영산전이다.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03호로 지정된 영산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집으로, 내외 벽의 벽화가 주목되고 있다. 내부에는 석가모니 불상과 팔상탱화(八相幀畵)를 봉안하였다 팔상탱화는 1775년에 그린 것이며, 본존 후불탱은 1734년의 작으로 알려져 있다. 건물양식이나 구조로 볼 때 대웅전 건물과 함께 가장 주목받는 건물이다.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94호로 지정된 극락전은 1369년 성곡(星谷)이 창건한 정면 4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이다. 건물의 무게를 지탱하기 위하여 추녀의 네 귀는 활주로 받치고 있는 아담한 법당으로, 내부에는 아미타삼존을 봉안하였다.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97호로 지정된 약사전 또한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94호로 지정된 극락전과 동시에 창건한 아담한 맞배건물이며,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93호로 지정된 만세루는 창건이 미상이나 1644년영숙(靈淑)이 중건하였다. 역대 조사(祖師) 및 통도사 고승들의 진영을 봉안한 영각은 1705년 처학(處學)에 의하여 중건되었다. 범종각은 2층 누각 건물로서 정면 상하 3칸, 측면 2칸의 팔작건물이다. 건물의 상하에 법고(法鼓)·운판(雲板)·목어(木魚)·대종(大鐘) 등 사물(四物)을 안치하였다. 이들은 모두 조석 예불시에 사용하는 의식용구이다.
그리고 1757년에 건립한 응향각(凝香閣), 도서실인 명월료(明月寮)와 금당(金堂)을 위시하여 종무소 건물들이 즐비하다. 또, 절의 세 문 가운데 일주문은 1305년(충렬왕 31)에 창건되었으며, 현존하는 현판은 대원군의 필적이며, 기둥 좌우의 ‘佛之宗家 國之大刹(불지종가 국지대찰)’은 김규진(金圭鎭)의 글씨이다.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50호로 지정된 천왕문은 사천왕을 봉안한 문으로서 사찰수호 기능을 담당하는 곳으로 목조 사천왕이 각기 특징있는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52호로 지정된 불이문은 1305년에 창건되었으며, 편액 ‘不二門(불이문)’은 송나라 미불(米芾)의 필적이다. 건물은 매우 단조로우며, 중앙에는 대들보 대신 코끼리와 호랑이가 서로 머리를 받쳐 지붕의 무게를 유지하는 건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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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노전 (中爐殿)
세존비각(世尊碑閣) - 조선(1706년)
이 비각(碑閣)은 1706(숙종 32) 계파대사(桂坡大師)가 금강계단(金剛戒壇)을 중수(重修)하고
석가여래의 영골사리비(靈骨舍利碑)를 세우면서 건립(建立)한 것으로 비석(碑石)에는 불사리의 행적을 소상히 밝히고 있다.
곧 자장율사가 중국에서 사리를 모셔온 일과
임진왜란 당시 사명대사(泗溟大師)가 불사리(佛舍利)를 왜적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크고 작은 2개의 함에 봉안하여 보관하였다.
그 후 한 개의 함은 문수대성(文殊大聖)께서 자장스님께 부촉하신 승지(勝地)이므로 통도사 금강계단에 다시 봉안토록 하였고,
또 다른 한 개의 함은 태백산(太白山) 갈반사에 봉안되었음을 석비(石碑) 전면(前面)에 기록(記錄)을 통해 알 수 있다.
세존비각(世尊碑閣)
비문은 수사간(守司諫) 채팽윤(蔡彭胤 1669~1731)이 짓고
글씨는 승정원(承政院) , 도승지(都承旨) 이진휴(李震休)가 썼다.
석비 뒷면의 비음(碑陰)은 성능대사(性能大師)가 짓고 보윤대사(普允大師)가 썼는데,
이곳에서는 석가모니의 행적(行蹟)과 함께 각지(各地)의 시주(施主)내용을 적고 있어 참고된다.
석비의 건립은 숙종(肅宗) 32년(1706)이며 높이는 2.5m, 폭 1m이다.
37조도품탑(助道品塔)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 수행하는 37가지의 방법을 말합니다.
즉 4염처(念處), 4정근(正勤), 4여의족(如意足), 5근(根), 5역(力), 7각지(覺支), 8정도(正道) 등을 모두 합한 것입니다.
37보리도법(菩提道法)이라고도 하는데, 이러한 수행 방법을 통해서 깨달음을 성취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개산조당(開山祖堂)
개산조당은 용화전 옆 서쪽에 위치한다. 통도사의 창건주 자장율사의 영정을 봉안한 아담한 전각이다.
전각 정면에 개산조당이라는 현판이 붙은 솟을문은 해장보각의 조사문으로서
‘솟을삼문’형식이며 해장보궁(海藏寶宮)으로 통하는 문의 3칸 건물인데 중앙 칸이 양 측면 칸보다 높게 솟아 ‘솟을삼문’이라고도 한다.
3칸 모두 두 쪽의 널문을 달아 여닫을 수 있도록 하였으며
건물형식은 조선시대 말기의 수법으로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사당(祠堂)의 솟을삼문과 같다.
개산조당의 대문 오른쪽, 낮은 탑이 37조도품탑(助道品塔)이다
해장보각(海藏寶閣)
개산조당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해장보각이다.
이 건물의 창건은 영조 3년(1727)이고 그 후 고종 4년(1900)에 고산대사(古山大師)가 중수하였다.
자장율사의 영정을 봉안한 해장보각은 정면 3칸, 특면 2칸의 맞배집으로 앞쪽에 툇간을 달은 형식을 취하고 있어
내부 앞쪽에 내진(內陣 : 안두리)기둥이 배치되어 있다.
해장보각
이 집을 해장보각이라고 한 것은 불경의 보관처를 용궁(龍宮)에 두기도 하고
또 대장경(大藏經)진리의 내용이 바다 속의 수많은 보배에 비유되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즉 용궁보각(龍宮寶閣)에서 유래된 것으로 짐작된다.
따라서 자장스님의 영정을 봉안한 전각을 해장보각(海藏寶閣)이라고 한 것은 『삼국유사』에 이미 기록된 바와 같이
자장스님이 중국으로부터 가지고 온 대장경을 통도사에 봉안하였다는 사실에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즉 “정관(貞觀) 17년(643)에는 자장율사가 삼장(三藏 : 經藏, 律藏, 論藏) 400여 상자를 싣고 돌아와서
통도사가 국내 최초의 대장경 봉안하였다.
”(삼국유사(『삼국유사』전후소장사리조)고 한 내용은
이미 삼국시대에 통도사가 국내 최초의 대장경 봉안(奉安) 사찰이 되었음을 뜻하는 것이며,
나아가 이 대장경이 다른 사람 아닌 창건주(創建主) 자장율사에 의하여 봉안되었던 사실을 감안하여
그 영각(影閣)에 들어오는 문을 개산조당이라 하였고, 영각 자체를 해장보각이라고 한 것으로 생각된다.
현재 해장보각 내부에는 자장율사 진영 주변에 고려대장경(高麗大藏經) 1,234권을 봉안해 놓았다.
해장보각 자장율사진영 海藏寶閣慈藏律師眞影)
조선朝鮮1804년 견본채색絹本彩色147.5×96.5
경남유형문화재 제276호
자장율사의 영정은 길이 170㎝에 폭100㎝로서 그 제작은 순조(純祖) 4년(1804)이다.
전체적인 배경은 청록색(靑綠色)에 홍색(紅色) 등받이를 한 의자에 앉은 모습으로 나타냈다.
의자의 형태는 단조롭고 통견(通肩)의 법의(法衣) 속에 가부좌한 것으로 보인다.
의좌에 정좌(正坐)하여 전방을 주시하는 모습이 매우 자애로우면서도 수행자의 독특한 의지를 여실히 나타내는 모습이다.
그림의 상부에는 별도로 목조운각(木造雲閣)을 단조롭게 처리하여 좌우에 청룡(靑龍), 황룡(黃龍)을 조각하였다.
해장보각(도서관)과 용화전
해장보각 추녀 밑의 제비집
집만 덩그라니 있고
제비는 성지순례 떠났을까....
해장보각 창방위에 자세히 보면 작은 단지가 있는데
이것은 화재예방을 위한 소금단지라고 한다.
장경각
조선(18세기 이후), 문화재자료 제144호
장경각은 절에 내려오는 경전과 목판을 봉안할 목적으로 건립되었다.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의 주심포 맞배지붕 건물로
초창 및 중수연대는 확실치 않으나 주변 건물들과 비교해 18세기 이후의 건물로 생각된다.
장경각은 통도사에 전해지는 혹은 외부에서 유입된 경판(經板)들을 보관하는 곳이다.
현재 박물관으로 이전된 장경각의 목판은
정시한(1625~1707)이 저술한 산중일기에도 등장하는 17세 초반 활동한 대 각수 연희가 발원하여 직접 제작한 목판들로서,
통도사에서 약 10km 떨어진 울산 운흥사(雲興寺)가 조선말기에 폐사될 때 옮겨온 중요한 경판들이 보관되어 있다.
건물 안에는 목판(木版)장경을 봉안하였는데,
이들 목판 대장경을 강원(講院)의 교과과정에 들어 있는 중요 경전들로
『능엄경』,『기신론현수소(起信論賢首疏)』,『금강경오가해(金剛經五家解)』,『법수(法數)』,『사집(四集)』
등 15종의 경판이 있다. 따라서 통도사는 사찰의 교육기관인 강원을 통해 교육에 노력을 기울였음을 알 수 있다.
대광명전(大光明殿) - 조선(1758년), 경남 유형문화재 제94호
대광명전은 중로전(中爐殿)의 중심건물이다.
대웅전(大雄殿) 서북쪽에 위치(位置)하며
건물의 규모나 목재 또는 가구수법(架構手法)이 대웅전 다음가는 우수한 건물이라 하겠다.
대광명전 앞에는 전향각(篆香閣), 장경각(藏經閣), 개산조당(開山祖堂), 세존비각(世尊碑閣) 등이 있고
이들 건물 앞에 5층석탑이 있다.
대광명전
통도사성보박물관에 보관 중인 <대광명전삼성공필후현판(大光明殿三成功畢後懸板)>에 따르면,
1756년 10월 화재로 전소 된 것을 1758년 9월 중건하였다고 한다.
대광명전 삼신불탱화-보물 제1042호 조선(1759년), 마본채색(麻本彩色)
내부에는 대광명전 불상 뒤편에 조성된 삼신불탱은 현재 원본은 박물관으로 이전되었으나,
조선후기 통도사를 기점으로 활동하였던 임한비구에 의해 조성되었으며,
현존하는 삼신탱화 중에서 그 화격이 최고로 높은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한 근본불교는 점차 교리가 발달함에 따라기중생들의 요구에 응하여 다불관사상(多佛觀思想)이 발달하게 된다.
바로 과거·현재·미래의 삼세불(三世佛)이나 법신(法身)·보신(報身)·화신(化身)의 삼신불사상(三身佛思想) 등이 출현하게 되는 것이다.
화엄종(華嚴宗)의 삼신사상(三身思想)에서 유래된 삼신탱은 대적광전(大寂光殿)이나 대광명전(大光明殿)에 모신다.
중앙의 법신 비로자나불을 중심으로 왼쪽에 보신 노사나불, 오른쪽에 화신 석가모니불을 모시는 것이 통례지만,
사찰에 따라서 보신불로 아미타불을 모시거나 비로자나불 좌우에 약사불과 아미타불을 모시는 경우도 있다.
대광명전에서
성스럽게 절을 하는 어느 불자의 모습과 오후 햇살이 드는 문살이 좋아서...한 컷~
대광명전 문살
대웅전 꽃살문처럼 화려한 문양도 좋지만
아무 채색없이 단조로운 옛문살에도 눈이 간다
오래된 가람에 들어서면
문살하나에도 정성을 가득 쏟은 것을 볼 수 있는데
온 정성을 다하여 부처를 가까이하라는 뜻인것도 같다.
용화전(龍華殿) - 조선(1725년), 경남 유형문화재 제204호
용화전은 대광명전과 관음전 사이에 위치하며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집으로 1369년(공민왕 18)에 초창되었으나
당시 창건주는 알 수 없으며 현재의 건물은 1725년(영조 元年)에 청성대사(淸性大師)에 의해 중건되었다고 한다.
건물 안에는 약 2미터 정도의 미륵불좌상을 봉안하였으며,
미륵불은 석가모니 다음에 출현하실 미래불(未來佛)이다.
그 부처님의 탄생하실 곳이 용화수(龍華樹) 아래이고
또 설법회상(說法會上)을 용화회상(龍華會上)이라 하므로 법당의 명칭을 용화전이라 하였다.
석가모니의 설법회상을 영산회상(靈山會上)이라 함에 비하여 이는 미래불의 용화회상을 뜻하는 법당임을 알게 한다.
즉 미륵불로서 출현하기 전까지는 미륵보살이란 칭호를 받는 석가모니의 일생보처(一生補處)로서
석가모니의 출현으로부터 56억 7천만년이란 장구한 세월이 흐르고 나서 이 세상에 출현하실 부처님이다
봉발탑(通度寺 奉鉢塔)보물 제471호
봉발탑은 용화전 앞에 서있는 것으로 무슨 용도인지는 알 수 없으나,
석가세존의 옷과 밥그릇을 미륵보살이 이어받을 것을 상징한 조형물인 것으로 여겨진다.
따라서 명칭을 탑이라고 한 것은 문제가 있어, 유물의 성격상 ‘석조발우(石造鉢盂)’라고 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고 본다.
기본형태는 받침부분 위에 뚜껑 있는 큰 밥그릇을 얹은 듯한 희귀한 모습이다.
받침부분의 돌은 아래ㆍ가운데ㆍ윗부분으로 구성되며 장고를 세워 놓은 듯한 모양이다.
받침돌 위에는 뚜껑과 높은 굽 받침이 있는 그릇 모양의 석조물이 있다.
만들어진 연대는 연꽃조각과 받침부분의 기둥양식으로 보아 고려시대로 추정되지만,
받침부분과 그릇 모양의 조각물과는 품격의 차이가 느껴지므로 동시대의 작품인지 의문을 갖게 한다.
전체 높이는 약 230cm이고, 현재 보물 제471호로 지정되어 있다.
약 2미터 높이의 발우(鉢盂)모양의 석조봉발(石造奉鉢)인데,
이를 봉발탑(보물 제471호)이라고 하며 이는 탑이 아니고 발우이다.
봉발탑과 관음전
봉발탑은 용화전과 관음전 사이에 있다.
대웅전과 관음전
관음전(觀音殿)
조선(1725년), 경남 유형문화재 제251호
관음전 내부
관음전 내에는 관세음보살상(觀世音菩薩像)을 봉안하였으며,
본래는 사찰의 중요한 유물이 이곳에 보관 전시되어 있었으나 현재는 모두 박물관으로 옮겨졌다.
관음신앙은 삼국시대부터 크게 유행하여 조선시대에 이르러 중생의 괴로움과 어려움을 구원하기 위하여
시방 모든 국토에 몸을 나투시는 대비보살(大悲菩薩)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일체 존재의 상태를 관찰함에 자유자재한 지혜를 갖추고 고통 속에서 살아가는 중생을 구제하시는 분이 관세음보살이시다.
이러한 관세음보살을 모신 사찰의 전각을 관음전(觀音殿)·원통전(圓通殿)·보타전(補陀殿 또는 寶陀殿) 등으로 부르고 있다.
관세음보살을 모신 전각이 사찰 전체에서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을 때는 관음전이라 하고,
관세음보살을 모신 전각이 사찰의 중심 법당(法堂)이 될 때 원통전, 또는 보타전이라 한다.
원통전은 관세음보살이 모든 곳에 두루하는 원융통(周圓融通)을 갖추고 중생의 고뇌를 씻어주기 때문에
그 권능과 구제의 측면을 강조한 명칭이며, 보타전은 관세음보살의 상주처인 보타락가산(補陀落迦山)에서 비롯된 것이다.
우리나라의 관음신앙은 주로 『화엄경(華嚴經)』 『법화경(法華經)』 『아미타경(阿彌陀經)』 『능엄경(楞嚴經)』을 중심으로 하여 전개되었다.
관음전 앞 이건 뭐지?
공양수를 버리는 곳인가?
통도사 석등(通度寺 石燈) -경남유형문화재 제70호
관음전 전방에는 석등(石燈)이 있는데,
높이는 약 300㎝로서 그 조성수법은 용화전 앞의 석조봉발(石造奉鉢)과 비슷하여 고려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보고 있다.
상부의 옥개(屋蓋)와 보주(寶珠)는 착실하게 고식(古式)을 따르고 있다.
등불을 밝혀두는 화사석(火舍石)을 중심으로, 아래에는 8각의 받침돌을 3단으로 쌓고 위로는 지붕돌과 머리장식을 얹었다.
아래받침돌의 옆면에는 안상(眼象)을 얕게 새겼고, 윗면에는 엎어놓은 연꽃무늬를 조각했으며, 가운데기둥은 중앙에 3줄의 테를 둘렀다.
윗 받침돌에는 위로 솟은 연꽃무늬를 장식하고, 4각의 화사석은 각 면에 네모난 창을 크게 뚫어 불빛이 퍼져 나오게 하였다.
지붕돌은 귀퉁이마다 꽃장식을 달았으며 꼭대기에는 노반(露盤)과 보주(寶珠)를 놓아 머리장식을 하고 있다.
여러 가지 양식뿐만 아니라 화문(花紋)의 조식(彫飾)으로 보아 고려시대의 작품으로 짐작된다.
전체 높이는 약 350cm이고, 현재 경남유형문화재 제70호로 지정되어 있다.
황화각(皇華閣)
황화각(皇華閣)
황화각은 통도사의 스님들이 경(經)을 공부하는 강원건물로 천자각이라고도 한다.
초창은 1317년(충숙왕 4)에 이루어졌으며,
1647년(인조 27) 탄변화상(坦卞和尙)이 중건하고 1906년 성해화상(聖海和尙)이 중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정면 7칸, 측면 2칸 규모의 맞배지붕 건물이며 ㄴ자 평면으로 두 개의 건물을 합친 큰방이다.
이곳은 강원과 학승(學僧)들이 거처하는 기능을 갖고 있는 건물이다.
그리고 이들 건물은 일반 신도와 격리되도록
북쪽과 서쪽에서 출입하게 되어 있어 경학을 공부하는 공간답게 처리하였다.
영각(影閣)
이 건물은 역대(歷代) 주지(住持) 및 큰스님들의 영정 85폭을 봉안한 건물로
정면 8칸 측면 3칸의 긴 장방형(長方形) 평면(平面)으로 된 팔작집이다.
초창연대는 분명치 않으며 현재의 건물은 1704년(숙종 30)에 지었다고 전한다.
처음에는 영자각(影子閣)이라 불리다가 여러 차례 중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석가모니의 설법회상을 영산회상(靈山會上)이라 함에 비하여
이는 미래불의 용화회상을 뜻하는 법당임을 알게 한다.
즉 미륵불로서 출현하기 전까지는 미륵보살이란 칭호를 받는 석가모니의 일생보처(一生補處)로서
석가모니의 출현으로부터 56억 7천만년이란 장구한 세월이 흐르고 나서 이 세상에 출현하실 부처님이다
이 용화전 앞에는 약 2미터 높이의 발우(鉢盂)모양의 석조봉발(石造奉鉢)이 있다.
이를 봉발탑(보물 제471호)이지만, 이는 탑이 아니고 발우이다.
석조 봉발은 “석가모니의 발우(鉢盂)를 미래세(未來世)에 출현하실 미륵불에게 드리기 위해
부처님의 상수제자(上首弟子)인 가섭존자(伽葉尊者)가 발우와 함께 가사(袈裟)를 가지고
인도의 계족산(鷄足山)에서 멸진정(滅盡定)에 들어 기다리고 있다”는 불경의 내용에서 유래된 것으로 본다.
통도사 영각의 편액
偶尋樵者問山名 우심초자문산명 |
우연히 나무꾼에게 산이름 물으니 |
영각
영각앞의 홍매화(지장매)가 개화를 하자
전국의 사진작가들이 모여 들었다
350년 된 한 그루의 홍매화때문에 통도사가 더욱 유명세를 탄 곳이다.
영각앞의 홍매화(지장매)
황화각 앞 음용수
유난히 연꽃문양이 많이 쓰인 통도사다.
불이문(不二門) -
조선(18세기 이후), 경남 유형문화재 제252호
이 문은 대웅전으로 들어가는 경내의 마지막 문으로 일명 해탈문(解脫門)이라고도 한다.
즉 동구(洞口)밖의 산문(山門)과 일주문, 천왕문(天王門)을 거쳐 들어온 마지막 문이다.
이 문은 1305년(충렬왕 31) 처음 지었으나 현재의 건물은 언제 중건되었는지 확실하지 않다.
불이문의 현판 글씨는 송(宋)나라 미불(米不 : 號는 元章)의 필이다.
불이(不二)의 뜻은 법계의 실상(實相)이 여여평등(如如平等)하여 피차(彼此)의 차별이 없는 것을 ‘불이(不二)’라 하며
이 법계불이(法界不二)의 진리가 불법의 궤범(軌範)이므로 ‘불이법(不二法)’이라 하고
일체 성인이 모두 이 불이(不二)의 법위 의하여 진리에 취입(趣入)하므로 불이법문이라 한다.
따라서 여기서부터 청정한 불법도량의 중심부가 되며
불이(不二)의 진리로써 세속의 모든 번뇌를 벗어난다는 뜻에서 해탈문 이라고도 한다.
금강문 안의 문수동자는 위엄과 용맹을 나타내는 푸른 사자를 타고 있다그런데 코끼리와 마주보고서 도리를 떠받치는 짐승은
사자가 아니라 호랑이다.
사자 대신 우리 조상 정서와 가까운 호랑이를 조각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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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도사 불이문의 마룻보를 하얀 코끼리가 떠받치고 있다. 절에서 코끼리는 대개 금강문 금강역사 옆에 앉은 보현동자가가 타고 있는 모습으로 만나게 되는데 코끼리는 보현보살 또는 보현동자의 자비와 덕을 상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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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이문 대둘보의 호랑이와 코끼리
불이문의 대들보 위에 얹은 가구재가 다른 건물에 비해 특징적이라 할 수 있다.
내부는 매우 단조롭게 처리되어 종래 수법(手法)과는 달리
중앙의 대들보를 코끼리와 호랑이가 이마로써 받쳐 이고 있는 형태를 취하였다.
이 역시 코끼리와 호랑이가 건물의 하중(荷重)이마에 서로 의지해 있는 것이
바로 불이(不二)의 도리(道理)를 나타내는 것이라 한다.
극락에 갈 수 있을까?
불이문에는 아는 사람들은 한번씩 해보는 것이 있다.
대웅전 큰 법당에서 불공을 드리고 절 밖으로 나가면서 불이문 문고리에 머리를 넣어본다고.....
머리가 들어가면 극락에 갈 수 있다는 속설이 있어 한번씩 넣어보고 간다는데 과연 저 고리속으로 머리가 들어갈까?
어린 아이 머리라면 들어갈 수 있겠는데 어린 아이와 같은 마음을 가지라는 뜻일까?
원통방과 감로당은 화엄전, 황화각과 함께 중로전의 대방(大房)이다.
감로당은 사중 대중스님들의 일상생활에 따른 후원(後院)이고 원통방과 화엄전은 대회시 대중을 수용하는 공간으로 사용되었다.
황화각은 현재 강원으로 이용되는 중요한 건물이다.
원통방과 감로당은 원래 口字형 건물이었으나 2009년 원통방과 공양간 중창으로 지금은 다소 변화되었다. 감로당 동쪽 측면에 위치한다. 초창은 1341년(충혜왕 복위 2)이지만 영조 때에 탄해대사(坦亥大師)가 중건하였고 1886년 감로당과 함께 소실되고 다음해에 매예대사(每藝大師)에 의해 중건되었다. 원 통방의 ‘원통’ 의미는 ‘관음보살 이근원통(耳根圓通)’에서 유래된 것이다.
원통방 나무담벼락에 걸려있는 법구경 구절이다.
절집에 들면 지극히 평범한 구절이 곳곳에 적혀 있기마련이다
사람마다 그 평범한 구절이 마음에 박혀 몇번이나 되새기게 되기도 한다
사람과 사람사이에 엉켜서 살다보면 의도한 쪽으로 가기도 하지만
가끔은 말에 의해 방향을 바꾸게 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의 한귀퉁이를 걸어가자면
짐수레 같은 말을 스스로 줄이고자 노력해야 할 것이다.
하노전 (下爐殿)
하노전 (下爐殿) (1)영산전(靈山殿) (2)극락보전(極樂寶殿) (3)약사전(藥師殿) (4)삼층석탑 (5)화엄전(華嚴殿 - 기도접수처) (6)만세루(萬歲樓 - 불교용품점) (7)범종각(梵鍾閣) (8)통도사 동종(通度寺 銅鍾) (9)가람각(伽藍閣) (10)천왕문(天王門) (11)일주문(一柱門) (12)명월료(明月寮 - 종무소) (13)금당(金堂), 은당(銀堂) (14)육화당(六和堂)
영산전靈山殿
영산전은 하노전(下爐殿)의 중심 건물이다.
남향한 영산전의 전방 좌우에는 극락전과 약사전이 동서에 놓여 있고,
그 중앙 지점에는 신라 말기의 3층석탑 1기가 있다.
이 탑은 현 위치에서 동북쪽 약 1.5m 지점에 경사진 채 있었으나 최근에 현 장소로 이동하여 복원되었다.
영산전靈山殿
영산전의 초창 연대는 미상이나 현 건물은 숙종 30년(1704) 송곡대사(松谷大師)에 의하여 중건 된 것으로 짐작된다.
현재 통도사성보박물관에 보관하고 있는 <영산전천왕문양중창겸단확기(靈山殿天王門兩重創兼丹?記)>에 따르면,
1713년 봄 영산전과 천왕문이 화재로 소실되었고 1714년 청인(淸印), 정안(正眼), 낭일(朗日), 치원(致源) 등 4분의 대선사가 중창하였다고 한다.
건물의 구조는 전면 5칸, 측면 3칸의 다포계 양식의 맞배지붕 양식이며 내외 벽화는 매우 주목되는 작품이다.
외벽의 그림은 풍화(風化)를 받아 많이 훼손되었으나 내벽의 그림은 그런대로 잘 남아있다.
특히 내부 벽화의 다보탑을 비롯하여 양류관음(楊柳觀音), 나한상, 여러 가지 경설(經說)의 내용들이 품격 높은 수작(秀作)으로
국내에서 보기드문 희귀한 작품이다.
영산전의 본존불로는 석가모니불상을 봉안하였다.
영산전내부
건물의 내부 천정에는 우물천정을 조성하여
고식(古式)의 연화문(蓮花紋) 또는 보상화문(寶相華紋)으로 단청하였다.
대들보에 그린 황룡, 청룡의 그림이 매우 화려하게 전개되고 있다.
영산전내부
내부 벽화의 다보탑을 비롯하여 양류관음(楊柳觀音),
나한상, 여러 가지 경설(經說)의 내용들이 품격 높은 수작(秀作)으로 국내에서 보기드문 희귀한 작품이다.
서쪽 벽면을 거의 다 차지하였으며 탑신에는 석가여래와 다보여래가 분반좌(分半座)하는 『법화경』의 내용을 상징적으로 묘사하였다.
탑의 주변에는 보살상과 제자상이 시립(侍立)해 있고 탑문(塔門)이 열린 내부로 2여래(二如來)가 병좌(竝坐)한 모습이며
탑 둘레는 온통 영락과 풍경장엄 속에서 하늘에는 오색(五色) 구름이 휘날리고 있다.
그림은 애석하게도 아랫부분이 손상되었지만 상태는 좋은 편이다.
그외에도 내부 불벽(佛壁)에는 양류관음(楊柳觀音)이라든지 나한상과 함께 산수화풍의 그림들이 가득 채워져 있다.
벽면의 요소 요소에 적당한 구도를 잡아 여러 가지 경설의 내용을 그림으로 나타내고 있다.
건물의 외부 벽면에 남아 있는 노승(老僧) 공양도(供養圖)의 경우 많이 훼손되었으나 그림은 품격이 높은 수작이다.
영산전 팔상탱(通度寺 靈山殿 八相幀) - 보물 1041호
옆으로 돌아가면서 거대한 팔상영화를 안치하였다.
팔상도라고도 하는 이 그림은 석가여래의 일생을 여덟 가지 중요 사실들로 정리하여 그림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 외에도 영산전에는 『석씨원류응화사적』 벽화는 현재 48점이 그려져 있는데,
이 가운데 석가모니의 행적을 표현한 것이 26점이고, 전법제자의 행적을 표현한 것이 22점이 있어 주목된다.
영산전의 본존불로는 석가모니불상을 봉안하였고,
현존 하는 팔상도중 최고의 수작이라고 평가받는 석가모니의 생애를 다룬 팔상도나,
대광명전 삼신탱을 조성한 임한의 영산회상도가 있었으나,
현재 두 불화는 박물관으로 이전되었다.
팔상도의 조성은 영조 51년(1775)으로 연대뿐만 아니라 당시 불화(佛畵)의 화풍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대형그림이다.
극락보전極樂寶殿
극락보전極樂寶殿
조선(1801년), 경남 유형문화재 제194호
극락전의 초창은 고려 공민왕(恭愍王) 18년(1369) 성곡대사(성곡대사)에 의하였고,
현재의 극락전은 건물 해제 수리시에 발견된 상량문에 의해 순조1년(1801)에 중건하였음이 확인되었다.
건물은 전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양식이다.
극락보전 반야용선접인도(般若龍船接引圖)
외벽(外壁)에는 험한 바다를 건너 극락세계로 향하는 소위 반야용선(般若龍船)을 표현하였다.
배의 모습은 용두(龍頭)와 용미(龍尾)를 나타내었고
그 전후에는 인로왕보살(引路王菩薩)과 지장보살로 보이는 양대(兩大) 보살이 서서 배를 인도하며,
배에는 합장한 사람들이 가득 차 있다.
이 그림은 근세의 제작이나 그 구도나 내용이 보기 드문 우수한 작품으로 주목되고 있다.
극락세계란 이 세계로부터 서쪽으로 10만억 불국토를 지나가면,
이 우주(宇宙)공간에서 가장 즐거운 세계가 있으며 이곳에서는 아무런 고통이 없으며,
편안하고 즐거운 안양국(安養國)또는 극락세계라고 불려지는 세계가 있다고 한다.
그 세계에는 현재 아미타부처님이 설법하시는데 그 세계에서 왕생하는 사람은 연화(蓮花)위에 화생(化生)한다고 말하여 진다.
즉 연화(蓮花)생이다.
모든 것은 생각만 하면 저절로 이룩되고 땅은 유리로 이룩되었으며 .
온갖나무와 꽃과 궁전이 모두 법(法)을 설하여 이곳에 왕생하는 중생은 필경 성불한다고 하였다.
극락보전 법당내부
법당에는 서방정토(西方淨土) 극락세계(極樂世界)의 교주이신 아미타불(阿彌陀佛)과
좌우에 협시보살(脇侍菩薩)로 관음(觀音), 세지(勢至) 보살상을 봉안하였다.
극락세계를 관장하는 아미타불은
과거 인행시(因行時) 법장비구(法藏比丘)로서 48원(願)을 성취하여 성불하였으며
극락세계를 장엄하여 누구든지 일념으로 아미타불을 열 번만 부르면
극락세계에 왕생케 한다는 일념왕생원(一念往生願)의 믿음을 지니는 부처님이다.
즉 아미타불(阿彌陀佛)은 한량없는 빛으로서 ‘무량광(無量光 : Amitabha)'
또는 한량없는 생명(生命)으로서의 ’무량수(無量壽, Amitayus)' 등으로 번역되므로,
토함산 석굴암의 경우 ‘수광전(壽光殿)’이란 현판을 갖게도 되었다.
아무튼 불교신앙의 종교적 이상국토를 상징하는 부처님과 전각(殿閣)이 곧 극락전(極樂殿)이며,
이를 무량수전(無量壽殿)이라고 할 때도 있다.
극락전에서 예를 드리고 신발을 신다가 바닥에 새겨진 연꽃무늬 문양을 보았다
구석구석 연꽃문양이 가득한 통도사이다.
약사전藥師殿-
조선(18세기), 경남 유형문화재 제197호
약사전은 극락전과 함께 공민왕 18년(1369) 성곡대사(星谷大師)가 초창하였으며
이후의 중건에 대하여는 알 수 없으나 18세기초 극락전과 함께 중건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약사여래후불도
조선(1775年), 견본채색(絹本彩色)
287 × 210cm, 경남유형문화재 419호
건물 내부에는 약사여래를 봉안하였으며,
현재 박물관으로 옮겨진 후불탱화(後佛幀畵)는 영조 51년(1775)에 그려진 것으로
약사여래와 함께 일광(日光), 월광(月光)보살을 위시하여 제대보살(諸大菩薩) 및 신장상(神將像)등을 함께 그렸다.
약사여래는 동방정유리세계(東方淨留璃世界)의 교주로서
과거 인행시(因行時)에 십이대원(十二大願)을 발(發)하여
이 세계 중생의 질병을 고치고 목숨을 연장케 하며,
일체의 재화를 소멸하고 의식(衣食)을 구족하게 하여 부처님의 원만행(圓滿行)을 닦아 무상보리(無上菩提)를 증득하게 하는 부처님이다.
과거에 약왕이라는 이름의 보살로 수행하면서 중생의 아픔과 슬픔을 소멸시키는 열두 가지 대원을 성취하였다.
즉 ‘약사십이대원(藥師十二大願)’의 공덕으로 성불하여 중생의 병고를 치료하므로 ‘대의왕불(大醫王佛)’이라고도 한다.
삼층석탑
경남유형문화재 제18호
영산전 앞에 서 있는 이 탑은 2층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올린 모습이다.
기단에는 기둥모양이 표현되고 특히 아래층에는 안상(眼象)이 얕게 조각되어 있다.
탑신은 몸돌과 지붕돌을 교대로 올려 조성하고,
지붕돌 처마의 곡선처리와 귀퉁이에서의 치켜올림이 한눈에 들어온다.
삼층석탑
석탑은 전체 높이가 약 3.5m이고 구성은 4장의 큰 장대석(長臺石)을 다듬어 지대석(地臺石)을 설치하고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석탑양식인 이중 기단을 형성하였다.
상층 기단에는 모서리에 각각 우주(隅柱)를 새겨넣고 그 사이에 탱주(撑柱)를 두었으며,
하층 기단에는 각 면에 안상(眼象)을 3개씩 조각하였다.
이러한 형식은 석탑의 장식적 기능을 강조하던 통일신라시대 말기, 즉 9세기 이후의 특징이다.
각 탑신에는 우주만 새겼을 뿐 별다른 조각은 없으며
옥개석(屋蓋石)은 옥개받침을 4단으로 축소시키고 있어 역시 시대성을 반영한다.
상륜부는 3층 옥개석 위에 2단 받침형의 갑석을 가지는 노반(路盤)을 설치하고
그 위에 복발(覆鉢)과 보개(寶蓋)가 남아 있는데 노반 이상은 원래 이 탑의 부재였는지 의문이다.
이 탑은 1987년 해체 복원시 기단의 맨 윗돌에서 조선시대의 백자가 발견되어
이전에도 탑의 보수가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현재 경남유형문화재 제18호로 지정되어 있다.
삼층탑 앞의 배례석
배례석이란 국왕배례지석(國王拜禮之石)이라는 상징적 조형물로서 신라 사찰에서도 자주 볼 수 있으나
이곳 배례석은 1085년(선종 2)에 조성되었다고 한다.
길이 175㎝, 너비 87㎝의 낮은 판석으로 3절 되었으며, 윗면에는 아름다운 연화문과 운문으로 조각되어 있다.
둘레에는 연화무늬의 돌기둥이 4개가 놓여 있는데 연결하는 둘레석이 없어 무언가 엉성한 느낌이 든다. 원래부터 없었던 것이지 아니면 소실되었는지 모르겠으나, 주변의 모래가 덮히기 쉬워 관리가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왼쪽 윗쪽에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현재의 명문은 ‘太康王一年乙丑二月日造’라고 되어 있으나
이는 ‘太康十一年乙丑二月日造’의 위각(僞刻)이고 또 중간의 판석(길이 35㎝, 너비 87㎝)도 후에 보충된 것임이 최근 판명되었다고 한다 화엄전(華嚴殿) 화엄전(華嚴殿)은 원통방의 동쪽에 위치하고 있는 정면 7칸, 측면 3칸 규모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이 자리는 원래 1368년(공민왕 17)에 초창된 건물이 있었고, 1762년(영조 38)과 1883년(고종 20)에 소실되었다가 다시 1887년에 구련대사(九蓮大師)에 의하여 중건된 건물들이 있었으나 현재의 건물은 1970년 새로 건립된 콘크리트로 된 건물이다. 이곳은 기도접수, 신도등록, 시주확인서 발급 등의 종무를 보는 곳이다. 신도들의 휴식공간으로 이용되고 있다. 만세루와 삼층석탑
만세루萬歲樓 만세루는 영산전의 정면 남쪽에 위치하며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집으로, 현재의 건물은 1746년(영조 22) 영숙대사(靈淑大師)가 중건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나 여러 차례의 보수가 있었다. 규모는 비교적 큰 편이며(162㎡) 전면 기둥에는 주련(柱聯)이 있다, 만세루 어간의 좌우 기둥 상부에는 밖으로 용두(龍頭)가 새겨져 있고 안으로는 물고기 꼬리모양의 용미(龍尾)가 새겨져 있다. 이는 출입구가 되는 정간(正間)을 강조한 것으로 보인다. 만세루 어간 출입문 오른쪽 용이 물고 있는 것은? 출입구 왼쪽의 용은 물고기를 물고 있다. 오른쪽의 용이 물고 있는 것이 예사스럽지 않다. 여의주가 아닌 것은 확실한데 도끼날 같기도 하고 아니면 옛날 벳틀의 북실 같기도 한데 처음 보는 모양이다 과연 무엇이며 어떤 의미일까?
천왕문에서 바라본 하노전 풍경 만세루는 본래 법회(法會)나 법요식(法要式)을 거행할 때 사용하던 누각(樓閣)이다. 이 건물의 창건연대는 알 수 없지만, 1644년(인조 22)에 영숙화상(靈淑和尙)이 중건하였다고 전한다. 범종루는 2층 누각이므로 '루'자를 붙이는데 만세루는 누각이 아닌 단층건물이면서도 '루'라고 한다 아마 초창기 이 건물이 만들어졌을 때는 누각의 형태였으나 중건을 거치면서 단층형태로 변하였는지, 아니면 이 건물이 원래 벽이 없고 기둥만 있었던 것으로 보여져 단층으로 지으면서 루(樓)라고 이름을 붙였는지 확실하지 않다. 이 건물은 돌기단 위에 세워져 있는 단층건물이다. 이렇게 낮게 만든 이유는 건물을 편리하게 이용하고자 한 데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보통 산지에 위치한 절의 누각은 산지 경사로 인해 입구에서 보면 2층 누각이지만 본전의 마당에서 보면 단층으로 보이고, 마당에서 바로 법회장인 2층으로 갈 수 있게 설계되어 있어 불편함이 없으나 통도사는 평지에 세워진 절이기 때문에, 이곳이 2층 누각이라면 많은 승려나 신도가 의식을 거행할 때 오르내리기에 크게 불편하였을 것이다. 그래서 처음부터 단층으로 지었는지도 모른다. 목조수통 조선시대 것으로 추정되는 목조수통이다 할일을 잃은체 만세루 가람 옆에 누워 있다. 가람각伽藍閣 가람각은 천왕문의 남동쪽에 근접해 있는 가장 작은 4면(四面) 단칸의 법당으로 도량의 수호를 위해 가람신(伽藍神)을 안치하고 있다. 초창은 1706년(숙종 32)이며 외벽에는 적마(赤馬)의 그림이 그려져 있었으나 없어지고, 현재의 건물은 원명((圓明)스님에 의해 신축되었다. 가람신은 가람(절집)을 지켜주는 신이다. 가람각의 내부 위쪽 모서리에 갈색의 도자기가 얹혀져 있다. 소금이 들어있는 항아리(염불화방지병)로서 화재를 막기위한 벽사의 의미로 올려놓은 것이며 전각의 바깥쪽에도 있다. 벽면 가운데 가득하게 신중탱화가 있고 예전에는 탱화 앞에 나무로 만든 신상(神像)이 놓여있었는데 지금은 목신상(木神像) 대신 불명패가 자리하고 있다 가람각은 건물 담 안쪽에 있기는 하지만 천왕문보다는 바깥에 위치한다. 이것은 사찰안에 수용은 하고 있지만 진정한 사찰부분은 아니기 때문에 바깥으로 내놓은 것이다. 범종각梵鐘閣
범종각은 천왕문(天王門)을 들어서서 바로 남쪽에 위치한다. 이 건물은 2층 누각형식의 건물이다. 건물의 초창은 숙종 12년(1686) 수오대사(守梧大師)에 의해 이루어졌으나 현재의 건물은 원래의 건물이 아닌 중수된 건물이다. 건물은 전면 3칸, 측면 2칸의 규모로 기둥을 층단주(層斷柱)로 구성하여 하층은 사방을 터서 계단을 마련하여 상층으로 오를 수 있게 하였으며, 상층주변에는 계자난간을 둘러 장식하고 활주(活柱)는 상층 마루에 얹도록 하였다. 지붕은 팔작누각형(八作樓閣形)이며 내부 상하층에는 범종(梵鐘), 홍고(弘鼓), 목어(木魚), 운판(雲板) 등 사물(四物)을 비치하고 있다. 불가의 종을 범종이라고 하는데 ‘범(梵)은 범어(梵語) ’브라흐마(Brahma)'를 음역(音譯)하여 범(梵)이라 한 것이다. 즉 ‘청정하다’ 또는 숙정(淑淨)하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범종이란 “청정한 불사(佛寺)에서 쓰이는 맑은 소리의 종”이란 의미를 지닌다. 하겠다.
불전사물은 조석 예불(禮佛)의식에 사용되는 불구인데 이들은 모두 소리를 내는 도구(道具)이다. 범종을 치는 것은 지옥중생을 위하여, 홍고(弘鼓)는 축생의 무리를 위하여, 목어는 수중(水中)중생을 위하여, 그리고 운판은 허공의 날짐승을 위하여 사용된다. 물론 목어의 유래는 고기는 잠잘 때도 눈을 감지 않으므로 수행자로 하여금 경책하게 하는 뜻도 지니고 있으나 이들 사물(四物)은 태(胎), 난(卵), 습(濕), 화(化), 4생(四生)의 중생들을 위하여 치는 것으로 돼 있다. 범종각의 대종(大鍾)은 본래 이 건물 초창 당시 함께 조성되었으나 근래의 신종(新鍾)을 주조(鑄造)하여 함께 두었고 홍고(弘鼓) 역시 최근에 새롭게 만들었다. 통도사 동종
통도사 동종 보물 제11-6호 그의 독창성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높이는 170㎝,지름이 100㎝이며, 2004년 화재로 귀중한 낙산사 동종(보물 479호)이 소실된 것을 계기로, 현재 성보박물관으로 이전 되었으며, 원래 자리에는 문화재청에서 동종과 똑같이 재현한 종이 자리하고 있다. 일주문 조선(1770) 일주문은 절에 들어오는 첫 번째 문으로 기둥의 배열이 한 줄로 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일주문의 초창은 고려 충렬왕 31년(1305)이며 현 건물은 영조 46년(1770) 두섬대사(斗暹大師)가 중건한 것이다. 본래의 의미는 『법화경(法華經)』신앙에서 유래되는 것으로 짐작된다. 즉 『법화경』의 대의가 ‘회삼귀일(會三歸一)’, 다시 말하면 부처가 될 수 있는 방편인 성문행(聲聞行- 불법을 열심히 공부하는 것)· 독각행(獨覺行- 열심히 참선수행하는 것)· 보살행(菩薩行)를 통해 일승(一乘)의 경지 즉 부처가 되는 궁극적인 방법을 상징한다. 따라서 반드시 일주문은 ‘일주삼칸(一柱三間)’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그러므로 통도사의 일주문(一柱門) 역시 전면 3칸뿐이며 측면은 없다. “영축산통도사(靈鷲山通度寺)”란 편액은 흥선대원군의 필적으로 유명하다. 주련(柱聯)에는 ‘국지대찰(國之大刹), 불지종가(佛之宗家)’란 해강(海岡) 김규진(金圭鎭)의 글씨가 있다. ' ' ' ' ' 2015.2.14일에 통도사를 방문한후 상노전, 중노전, 하노전으로 나누어 사찰기행문을 작성해 나갔다 이글을 3.15일에 대략적인 마무리를 한다 구석구석 보물같은 볼거리를 돌아보고 일주문을 나서는 느낌은 극락세계를 일주 한 것 같이 내가 살았던 세상은 어디였을까 전생으로 돌아오는 것 같은 느낌으로 소나무 숲길을 천천히 걸어나왔다. 다음에 또 시간을 내어 통도사 인근 18암자를 순례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 . . . . 이어서 3부에서는 당일 짜투리 시간을 내어 주변 암자 두어곳을 더 소개하고자 한다.
이 건물은 본래 법회나 법요식을 거행할 때 사용하던 누각으로 창건 연대를 알 수 없으나
통도사 범종각에 봉안되어 있는 동종(銅鍾)으로 1686년(숙종 12) 경기도와 경상도 지역에서 활동한 조선후기의 대표적인 승려 출신 주종장인 사인(思印)스님에 의해서 만들어진 조선시대 종이다. 사인스님은 18세기 뛰어난 승려이자 장인으로 전통적인 신라 종의 제조기법에 독창성을 합친 종을 만들었다고 한다. 현재 그의 작품 8구가 서로 다른 특징을 보이며 전해지고 있는데, 이 범종은 유일하게 8괘(八卦) 문양을 새긴 것이 특징이다. 특히 큰 종으로 형태미가 뛰어날 뿐 아니라, 종 몸통에 있는 사각형의 유곽 안에 9개의 돌기를 새기는 것이 일반적이나, 이 종은 중앙에 단 한 개의 돌기만 새겨 둔 것으로
일주문의 ‘일주(一柱)’란 이러한 기둥 배열의 뜻도 있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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