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 한쪽 비워둔다면

photostory-寺

2016.5.15. 일요일 칠갑산 장곡사

kyeong~ 2016. 5. 15. 02:10

 

 

 

 

장곡사 長谷寺

 

충청남도 청양군 대치면 장곡리칠갑산(七甲山)에 있는 절

 

대한불교조계종 제6교구 본사인 마곡사(麻谷寺)의 말사이다.

850년(문성왕 12)에 보조선사(普照禪師)가 창건하였고,

그 뒤 오랜 세월을 거치는 동안 많은 중건중수를 거쳤으나

자세한 연혁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다만, 1346년(충목왕 2)에

현재 보물 제337호로 지정된 금동약사여래좌상을 봉안하였으며,

1777년(정조1)에 상대웅전을 중수하고「칠갑산장곡사금당중수기를 지었다.

1866년(고종 3)과 1906년(광무 10),

그리고 1960년에 대규모의 중창이 이루어졌다.

1969년 봉향각(奉香閣)을 건립하였고,

1998년에는 범종루의 범종과 운판을 조성하였다.

1999년 염화실을 지어 오늘에 이른다.

 

경사지를 닦아 위아래에 절터를 만들었는데,

아래에는 범종루·대웅전·설선당(說禪堂)·심검당(尋劍堂)·일주문·요사채 등이 있고,

이곳에서 50m 가량 올라간 곳에 다시 대웅전과 응진전(應眞殿)·지장전·삼성각·염화실(拈花室)이 있다.

 

대웅전이 둘 있는 것이 다른 절에서는 볼 수 없는 이 절의 특징이다.

또한, 이들 대웅전은 건축사상으로도 매우 주목되는 건물로서

상대웅전은 보물 제162호로 지정되었고,

하대웅전은 보물 제181호로 지정되어 있다.

 

상·하 대웅전의 방향은 서로 엇갈려 상대웅전은 동남향을,

하대웅전은 서남향을 하고 있다.

상대웅전 안에는

통일신라 때 조성된 국보 제58호의 철조약사여래좌상부석조대좌가 있으며,

바닥에 유문전석(有文塼石)이 깔려 있어

통일신라시대의 유존(遺存)을 읽을 수 있는 중요한 건축물이다.

 

상대웅전 안에는

통일신라시대의 철조약사불좌상부석조대좌(국보 제58호)

철조비로자나불좌상부석조대좌(보물 제174호)가 나란히 봉안되어 있고,  

 

하대웅전 안에는 보물 제337호의 금동약사여래좌상이 봉안되어 있는데,

최근 복장(腹藏)을 통해서 고려 말기에 조성된 것임이 밝혀졌다.

 장곡사 철조약사여래좌상 및 석조대좌 국보58호

 

 

 

 

 

여러해전 칠갑산 장곡사에 왔었다

아무 지식없이 들렀었고

대웅전이 2개이고 상대웅전 바닥이 여느 사찰과 다르다는 기억

그리고 스님이 손수 다도를 가르쳐주시던 뜻있는 시간을 기억한체 바쁜 발걸음을 서울로 옮겼다.

사찰에 대한 중요성과 사찰이 품고 있는 중요한 문화재에 관심이 가면서

장곡사에 대해 다시 알고 싶은 생각이 들었고 갈수 있는 기회가 오기를 기다렸었다

가고 싶었던 사찰...그 사찰 가까이에 오자 발걸음 왜 그리 급한지 빠른 걸음으로 일주문 향하여 걸었다

석탄일 다음날이라 꽃보다 더 큰 연등이 길을 안내하고 있었다.

 

 

일주문一柱門

본래 일주문이라는 말은 기둥이 한 줄로 되어 있는 데서 유래된 것으로,

사주(四柱)를 세우고 그 위에 지붕을 얹는 일반적인 가옥형태와는 달리 일직선상의 두 기둥 위에 지붕을 얹는 독특한 형식으로 되어 있다.

 

사찰에 들어가는 첫번째 문을 독특한 양식으로 세운 것은 일심(一心)을 상징하는 것이다.

신성한 가람에 들어서기 전에 세속의 번뇌를 불법의 청량수로 말끔히 씻고 일심으로 진리의 세계로 향하라는 상징적인 가르침이 담겨 있다

 

 

 

 

일주문은 지나 연둣빛 잎들이 나풀거리는 싱그러운 길을 따라 10여분 오르면 장곡사 경내가 나타난다

 

 

 

 

장곡사 전경

두개의 대웅전이 있는 장곡사는 마곡사의 말사이다.

정면 중앙의 건물은 범종각이다.

 

 

 

 

 

대웅전으로 들어서기 위해서 운학루 계단을 올라가야 한다.

 

 

 

운학루雲鶴樓

 

장곡사의 정식 출입문 역화를 하는 문루건물이다.

누각 1층을 지나면 계단이 나오고 계단을 지나면 하대웅전 영역에 진입할수 있다.

물론 이곳 말고도 오른쪽 경사로를 오르면 왼쪽으로 하대웅전 영역 진입로가 있다.

이누각은 운곡면 사자산에 있던 운곡사에서 옮겨와 지었다고 한다.

 

 

 

석탄일 다음날의 장곡사

하대웅전 마당에는 오색연등이 가득하다

그래서 건물을 상세하게 찍기 어렵다.

 

 

2011년 11월에 방문했던 당시의 사진

지금의 하대웅전의 모습을 비교해볼수 있다.

 

하대웅전보물 제181호.

장곡사 상대웅전 아래에 위치한 조선 중기의 목조건물.

 평면구조는 앞면 3칸, 옆면 2칸이며 맞배지붕의 건물로 높은 축단 위에 세워져 있다.

기둥은 민흘림이며 기둥 사이에 공포를 짜올린 다포계 양식으로 되어 있는데,

건물의 좌우 옆면에도 창방과 평방을 마련하고 공포를 배치한 점이 특이하다.

 

 

 

장곡사 금동약사여래좌상(靑陽 長谷寺 金銅藥師如來坐像)보물 제337호

 

청양 장곡사 금동약사여래좌상(靑陽 長谷寺 金銅藥師如來坐像)은

충청남도 청양의 장곡사에 있는 상·하 2채의 대웅전 가운데 하대웅전에 모신 불상이다. 

머리에는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붙여 놓았으며 정수리 부분에 있는 상투 모양의 넙적한 머리(육계)는 구분이 잘 되지 않는다.

갸름한 타원형의 얼굴은 단정하고 우아하지만 통일신라시대 불상에서 보이던 미소는 사라지고 근엄한 인상을 풍기고 있다.

양 어깨에 걸쳐 입은 옷은 두터워 보이며 어깨는 상대적으로 왜소하게 보인다.

옷자락에는 굵은 주름이 듬성듬성 새겨져 있고, 배에 있는 띠매듭은 율동감있게 표현되어 있다.

 오른손에는 약그릇을 들고 있으며, 왼손은 엄지와 가운데 손가락을 맞대고 있는데 손톱 모양까지 세세하게 표현하고 있다.

 전반적으로 불상의 신체는 늘씬하게 균형이 잡혀 있으며 넓은 무릎으로 인해 안정된 느낌을 주고 있다. 

1959년 불상 밑바닥을 열고 조사하다가 불상을 만들게 된 이유와 연도를 적은 발원문이 발견되어,

고려 충목왕 2년(1346)에 만들었음을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이로써 고려시대 불상임이 확인되었으며 충청도 지역에서 유행하던 고려 후기 불상양식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출처 : 문화재청


장곡사 내부

칠갑산 산행을 해야 하고

스님의 기도정진중이라 합장만 하고 그냥 지나간다

다음에 다시 또 간다면 내부의 조상들의 손떼가 묻은 우리 문화재를 다시 한번 면밀이 살펴 볼 것이다

 

 

 

 

심검당

스님의 요사채

 

 

장곡사 설선당長谷寺 說禪堂

 

장곡사 설선당(靑陽 長谷寺 說禪堂)은 충청남도 청양군 장곡사에 있는 하대웅전 왼쪽에 동향하여 세워진 스님들이 거처하는 건물이다.

1997년 12월 23일 충청남도의 유형문화재 제151호로 지정되었다.

 

 

설선당에 걸려 있는 김종필씨의 글씨

 

 

봉향각

심검강 설선당 심검당은 모두 선방이다.

하얀등은 돌아가신분을  위한 연등이다.

 

 

 

범종각

장곡사 경내에 들어서면 운학루 옆에 범종루가 자리하고 있다

범종루는 종과 북, 운판과 목어 등을 보관하는 곳이다.

 이 범종루에 있는 네가지를 '불전사물'이라고 한다.

이 범종각에 있ㄴ는 불전사물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

 

불전사물은 처음에 법고를 먼저 치고 나서 그 다음에 종을 친다.

그리고 목어와 운판의 순을 진행을 한다.

 

범종은 온 우주의 모든 생명을 깨우치는 대자대비의 소리라고 볼 수 있다.

법고는 온 사바세계에 부처님의 말씀을 전한다는 뜻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이 법고는 소가죽을 등을 이용하기 때문에 축생을 제도한다는 뜻이 강하다

목어는 나무로 물고기 형상을 조각하여 그 속을 파내고 채로 속의 안면을 두두려 소리르 ㄹ낸다

목어는 바다속에 살고 있는 생명들을 제도한다는 뜻이 있다

운판은 청동으로 만든 금속판을 두드려 소리를 낸다

이운판 구름 모양으로 만들어 운판이라고 했으며 이는 대게 모든 것을 배불리 먹이다는 뜻을 함께 갖고 있다.

 

 

 

범종루에 있는 기물 두가지

 

범종각의 왼쪽에 찢어진 큰북 하나가 매달려 있다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것으로 보이는 이 큰 북은

오랜 옛날 장곡사에 있던 한 승려가 국난을 극복하고 중생을 계도하는 뜻에서 코끼리 가죽으로 만들어졌다고 전해진다.

이 북은 생긱새가 지금의 북과는 다른 부정형으로 북통이 조형되어 있다.

앞 뒤편의 가죽은 모두 찢어졌으나 북통는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대북의 반대편 바닥에는 통나무 그릇 하나가 보인다.

이 통나무 그릇은 오래전 장곡사 승려들이 받통대신 사용하던 행활도구로 전해오고 있다

길이 7미터, 폭 1미터, 두께 10cm인 이통나무 그릇의 바닥 한 복판에는 물이 나갈수 있는 배수구가 보인다.

당시의 장곡사 스님의 수와 규모를 말해주고 있는듯하다.

 

 

 

대웅전에서 바라본  운학루

 

 

하대웅전의 단청

 

 

 

상대웅전

 

 

 

 

상대웅전에서 내려다본 하대웅전 영역의 풍경

 

 

 

상대웅전앞에 노거수

 

 

 

 

 

상대웅전과 응진전

장곡사 상대웅전(靑陽 長谷寺 上 大雄殿)보물 제162

1963년 1월 21일 대한민국의 보물 제162호로 지정되었다.

이전의 역사는 알 수 없고, 조선 정조 1년(1777) 고쳐 짓고 고종 3년(1866)과 1906년, 1960년에도 고쳐지어 오늘에 이른다.

앞면 3칸·옆면 2칸 크기이고, 지붕은 맞배지붕이며. 건물 안쪽 바닥에는 전돌을 깔았는데,

그중에는 남북국 시대 신라의 것으로 보이는, 잎이 8개인 연꽃무늬를 새긴 것도 있다.

건물 안에 철조약사여래좌상 및 석조대좌(국보 제58호)와 철조비로자나불좌상 및 석조대좌(보물 제174호)가 있다.

 

 

 

상대웅전의 내부

 

 

 

 

 소조 아미타물좌상(左)

사각형의 얼굴에 소라형의 육계이며 비교적 넓어 보이는 어깨에는 우견편단으로 걸치고 있는데

허리는 잘록하고 하체가 빈약, 수인은 아미타정인. 불신의 높이는 61cm

 

 

장곡사철조비로자나불좌상부석조대좌  靑陽長谷寺鐵造毘盧遮那佛坐像및石造臺座 보물 제174호.

이 불상은 높은 석등대석(石燈臺石) 위에 결가부좌로 앉아 있다.

호분(胡粉 : 흰 가루)이 두껍게 칠해져 얼굴 부분의 세부는 불명확하다.

상체가 짤막하면서 얄팍하여 전체적으로 빈약하게 보인다.

이러한 특징은 얼굴에 잘 나타나 있다.

삼각형에 가까운 둥근 얼굴에 긴 눈썹, 작고 좁은 눈, 빈약한 코(後補), 작은 입, 좁은 이마,

양감 없는 얄팍한 윤곽 등 전체적으로 무표정한 인상으로 체구와 걸맞다.

호분을 바르기 전의 모습은 단아한 인상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어쨌든 처음부터 빈약하였을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우견편단(右肩偏袒)한 상체는 짧은 편으로, 사각형의 몸통처럼 보이게 하였다.

가슴과 배는 밋밋하며, 어깨 역시 수평일 뿐만 아니라 허리와 가슴이 일직선으로 굴곡 없이 처리되었다. 그래서 반듯반듯한 사각형적인 특징을 나타내고 있다.

 

 

 

청양 장곡사 철조약사여래좌상 및 석조대좌 국보58호.(右)

장곡사에 있는 나말려초의 철불좌상과 대좌. 전체높이 2.32m, 불신높이 91㎝. 국보58호.

채색된 나무광배를 배경으로 거대한 흰색 석조대좌 위에 앉아 있는 불상은 대좌에 비해 상대적으로 작고 단정한 인간적인 형태를 나타내고 있다

 

불상이 앉아 있는 대좌(臺座)는 원래의 것이 아니라 석등 대좌를 가져다 놓은 것이라 어색한 모습이다.

광배 가장자리에는 불꽃무늬가 채색되어 있는데 바로 옆에 있는 철조약사여래좌상 및 석조대좌의 광배와 같은 양식이다.

9세기 중엽의 일반적인 비로자나불 양식과는 현저한 차이를 보여주며, 괴산 각연사 석조비로자나불좌상(보물 제433호)과 같은 유형의 작품으로 보인다.

.

 

 

 

 

바닥에 유문전석(有文塼石)이 깔려 있어

통일신라시대의 유존(遺存)을 읽을 수 있는 중요한 건축물이다.

 

 

응진전(應眞殿)

응진전(應眞殿), 나한전(羅漢殿)이라고 함 부처님의 제자인 16나한(羅漢)을 모신 전각을 응진전이라고 한다.

그리고 500나한, 즉 부처님의 500제자를 모신 전각은 나한전(羅漢殿)이라 부른다.

 나한전(羅漢殿) 나한전은 석가모니 부처님의 제자인 나한을 모신 건물이다.

부처님에게는 열여섯의 뛰어난 제자들이 있었다. 나한은 아라한(阿羅漢, Arhan)의 약칭으로 그 뜻은 성자(聖者)를 의미한다.

아라한은 응공(應供). 응진(應眞)의 자격을 갖춘 분들이다

 

 

바쁜걸음으로 장곡사 이곳저곳을 살펴본후

산행을 위해 삼성각쪽로 향한다

 

 

장곡사에서 칠갑산 가는 산줄기를 '사찰로'라고 한다.

 

장곡사 삼성각

(산신과 독성과 칠성 )

우리는 예로부터 산악 숭배 관념이 지대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고

그래서 일찍부터 신성한 곳으로 믿어지는 산에 제사를 드리고, 산에는 산신(山神)이 있다고 생각해 왔다.

신라 때는 국가적으로 중요한 다섯 산, 곧 동 토함산, 남 지리산, 서 계룡산, 북 태백산, 중 팔공산을 오악(五岳)으로 지정하여

국가가 주재하는 제사를 올렸으며 이는 고려나 조선시대까지 지속되었다.

이런 전통신앙의 산악 숭배가 사원 내부에 자리잡은 것이 산신각이다.

 

 

장곡사 삼성각 내부

 

규모가 그리 크지 않아 짧은 시간안에 이곳 저곳을 둘러 볼수 있었다.

문화재의 보고라고 할 수 있는 장곡사는

시간을 여유롭게 할애하여 천천히 살펴볼 필요가 있는 곳이다.

이번에도 그리 긴 시간을 갖지 못해 대충 둘러보고 가는것이 많이 아쉽다..

원래 좋은 곳은 쉽게 길을 열어주지 않는다고 했다

발걸음을 품을 판 만큼 보이는 것이고

보이는 만큼 얻는 것이다

내어찌 한번에 그 많은 것을 얻으려 하는지.....

 

 

 

장곡사는 왜 대웅전이 두 개일까?  

보통 대웅전은 절에 하나이며 중앙에 석가모니 부처님을 모십니다.

약사여래를 모시면 약사전이라고 하며, 비로자나부처님을 모신 곳을 대적광전이라고 명칭합니다.

상대웅전은 고려말이나 조선초기 건축양식을 보이고 하대웅전은 조선중기의 건축양식을 보이고 있습니다.

따라서 건축된 시대가 상당히 다르다는 것을 알수 있는데, 여기에는 두가지 가설이 있습니다.

 

한가지는 본래 두개의 사찰이 따로 있었을 가능성입니다.

또 한가지는 임진왜란등 전란을 거치면서 사찰이 파괴되면서

새로 건물을 짓고 기존의 건물은 나중에 보수하면서 두개의 대웅전이 생겼을 가능성입니다.

그렇다면 왜 약사전이나 대적광전이 아닌 그냥 대웅전이라고 현판을 붙여 놓았는가에 대한 의문이 생길것입니다.

이것은 조선시대에 억불정책때문에 불교문화가 상당히 쇠퇴하면서 생긴 현상입니다.

 

특히 임진왜란, 정묘호란등 전쟁을 거치면서 백성들이 살기 어려워지고 질병이 많이 생기면서 약사여래 신앙이 성행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심지어 석가모니불상에 약사발을 올려놓고 약사여래로 모시는 일도 생기게 됩니다.

정말 소박한 민중들의 신앙으로 변모하게 되는 것이죠.

그러다보니 불교문화에 대한 엄격함도 퇴색해 버리게 되어

대웅전에 석가모니부처님이 아닌 약사여래나 비로자나불도 모시게 된것입니다.

그 반대로 약사여래나 비로자나불이 있는 곳을 그냥 대웅전이라고 붙였을 수도 있습니다.

 아무튼 여러 전란을 거치며 불교문화가 쇠퇴하며 문화적 오류에서 생긴 현상이 지금까지 전해져 오는 것으로 보시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