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 한쪽 비워둔다면

photostory-寺

2015.12.6. 부처의 나라 불국사

kyeong~ 2016. 1. 14. 01:00

 

 

 

세계문화유산

부처의 나라 토함산 불국사

사적 제502호로

 

 

 

 

불국사(佛國寺)

 

 대한민국 경상북도 경주시 동쪽 토함산에 있는 이다.

신라시대경덕왕에서 혜공왕 시대에 걸쳐 대규모로 중창되었다.

신라 이후 고려와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여러 번 수축되었으며,

임진왜란 때에 불타버렸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불국사고금창기에 따르면 불국사는

신라 법흥왕 15년 528년에 왕모 영제 부인의 발원으로 지어졌고,

574년에 진흥왕의 어머니인 지소 부인이 중건하면서

비로자나불과 아미타불을 주조해 봉안하였다고 적고 있다.

 

문무왕 10년 670년에는 무설전을 새로 지어 이곳에서 화엄경을 가르쳤다고 한다.

그러나 현재와 같은 모습, 오늘날 불국사의 상징물로 알려진 석탑(석가탑·다보탑)이나

석교 등의 축조를 포함한 대규모 중창불사가 이루어진 것은

신라의 재상 김대성에 의해서였다.

 

삼국유사 권제5 효선9 대성효이세부모에는 김대성을 신라 신문왕 때,

혹은 경덕왕 때의 사람이라고 기록하였으나

오늘날에는 경덕왕 때의 사람이며 불국사의 창건도 경덕왕 10년의 일로 보고 있다.

삼국유사에는 십이연기 불교의 윤회설에 따라 김대성 자신의 전생의 부모님을 위해

석굴암 석불사를, 현생의 부모를 섬긴다는 뜻에서 불국사를 창건하였으며,

공사를 마치기 전에 죽자 국가에서 나서서 완성시켰다고 한다.

 

 

 

불국사(佛國寺)

 

내용 위키백과 발췌

 

 

 

 

     불국사 문화제    

(내용및 사진:불국사 홈페이지 발췌)

 

 

당간지주/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446호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446호
사찰에서 의식이 있을 때는 당幢이라는 깃발을 단다.

당을 매다는 긴 장대를 당간幢竿이라고 하며, 당간을 지탱하기 위해 양쪽에 세운 두 돌기둥을 당간지주라고 한다.
나란히 서있는 2쌍의 당간지주 중 동쪽 당간지주는 통일신라 때 세워진 것이지만,

서쪽 당간지주는 기둥 크기와 제작 수법에 차이가 있는 것으로 보아

각기 다른 부재를 후대에 조합한 것으로 추정된다.
 

 

 

 

석조(石槽) / 보물 제1523호 

석조(石槽)는 큰 돌을 파서 물을 저장할 수 있도록 만든 용기로,

흔히 큰 절에 설치되었다.

불국사 석조는 일반적인 통일신라 석조의 형태인 직사각형 모양이지만,

다른 석조와는 달리 내부와 외부에 돋을새김 조각이 많고

모서리를 장식적으로 둥글게 한 점이 특징적이다.

 

내부에는 거대한 연꽃모양이 새겨져 있어 석조의 물속에서 연꽃이 피어오르는 듯한 효과를 주며, 외부에는 돌림띠를 돌리고 안상(眼象) 무늬로 장식하였다.

전체적인 모양새가 우아하고,

장식 또한 정교하여 통일신라 석조(石造) 미술의 뛰어난 조형의식을 보여주는 수작(秀作)이다.

 

대웅전 영산회상도 및 사천왕 벽화/보물 제1797호 

 

1769년에 영조의 딸인 화완옹주와 상궁 김씨 등이 시주하여 제작한 불화로,

영산회상 탱화와 2점의 사천왕 벽화로 구성되어 있다.
영산회상도란 인도 영취산(靈鷲山)에서 석가모니 부처님이 '법화경(法華經)'을 설법하는 장면을 묘사한 그림으로, 부처와 보살, 나한, 사천왕 등을 함께 표현한다.

그런데 불국사 대웅전 영산회상도의 경우 석가모니불과 보살,

나한을 한 폭에 배치하고 사천왕은 따로 벽화에 그려 넣어 독특한 구성을 보인다.


이 불화는 18세기 중·후반 통도사와 봉정사 등 경상도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화승들이 함께 제작한 것으로, 화려하면서도 차분한 색감과 안정적인 구도 등 경상도 지역의 화풍을 잘 보여준다.

 

가구식 석축/보물 제1745호

 

불국사 가구식 석축(보물 제1745호)은 불전과 불탑 등을 배치하기 위해서 조성한 구조물로서, 경사진 지형 여건에 따라 대웅전과 극락전 회랑 외곽에 자연석과 가구식 석축을 상·하 2단으로 조화롭게 축조했다.

 

장대석재로 구획한 공간에 여러 형상의 석재를 채워 쌓은 가구식기법과 석난간의 구성 등은 종합예술로 국·내외 유일무이의 구조다.

 

 

사리탑 /보물 제61호 

 

불국사 강당 뒤쪽의 보호각에 보존되어 있는 사리탑으로,

「불국사사적기(佛國寺事蹟記)」에서 말하는 '광학부도(光學浮屠)'가 곧 이 사리탑을 가리킨다는 견해도 있지만 현재로서는 여래의 사리탑인지 승려의 사리탑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겉모습이 석등과 비슷하게 생긴 사리탑으로,

사리를 모시는 탑신(塔身)을 중심으로 아래는 받침이 되는 기단(基壇)을 두고,

 위로는 머리장식을 두었다. 기단은 연꽃잎을 새긴 반원모양의 돌을 위 · 아래에 두고,

그 사이를 북(鼓)모양의 기둥으로 연결하고 있는데 기둥에 새겨진 구름무늬에서 강한 생동감이 묻어난다.

 

탑신(塔身)은 가운데가 불룩한 원통형으로, 네 곳마다 꽃으로 장식된 기둥모양을 새겨두었다. 기둥에 의해 나뉘어진 4면에는 감실(龕室:불상을 모시는 방)을 안쪽으로 움푹 파놓은 후,

그 안에 여래상(如來像)과 보살상(菩薩像)을 돋을새김하여 모셔놓았다.

지붕돌은 추녀끝에서 12각을 이루다가 정상으로 올라가면서 6각으로 줄어든다.

경사면은 완만하며, 꼭대기의 머리장식은 일부만 남아있다.

 

대웅전(大雄殿) / 보물 제1744호 

 

석가모니 부처님을 모신 법당으로, ‘대웅(大雄)’, 즉 ‘큰 영웅’은 석가모니 부처님을 의미한다.

 8세기 중엽 신라 재상이었던 김대성이 불국사를 건립했을 때 처음 세워졌고,

임진왜란 중인 1593년 건물의 석조 기단을 제외하고 모두 불에 탔다.

 

1765년 남아 있던 기단 위에 앞면, 옆면 각 5칸 규모의 팔작지붕 건물로 재건되어,

통일신라 때의 기단과 조선 18세기의 건물이 결합된 독특한 구조를 보인다.

 

금동아미타여래좌상金銅阿彌陀如來坐像/국보 제27호

 

 

극락전의 주불인 아미타 부처님은 국보 제27호로 지정된 금동불이다.
높이 180cm, 머리 높이 48cm이며,
무릎 너비는 125cm로 비로전에 모셔져 있는 금동비로자나불좌상에 비해 3cm 가량 크다.
수인은 아미타 부처님께서 취하는 하품중생인(下品中生印)을 하고 있다.
하품중생인(下品中生印)은 비로자나 부처님의 수인과 반대방향으로 취하는 수인이다.

떡 벌어진 어깨,양감있는 당당한 가슴,잘록한 허리 등에서 이상적이서
세련된 통일신라시대 불상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금동비로자나불좌상金銅毘盧舍那佛坐象/국보 제26호

비로전의 비로자나부처님은 국보 제26호로 지정되었는데,
극락전의 금동아미타불좌상과 국립경주박물관에 있는 백률사 금동약사여래 입상과 함께
통일신라 3대 금동불의 하나로 꼽힌다. 높이 1.77m,머리 높이는 55cm,폭은 1.36m이다.
본래 대웅전에 모셔져 있었지만

 일제강점기에 극락전의 아미타부처님과 함께 극락전으로 옮겨졌고,
그 뒤 현재의 비로전 주존불로 안치되었다.

비로자나불은 법신불法身佛이라고 하여 삼신불三身佛사상의 본존으로 여겨진다.
현재 대좌나 광배는 결실되고 불신만 봉안되어 있다.

 

 

 

청운교(靑雲橋) 및 백운교(白雲橋) / 국보 제23호 

 

대웅전 구역으로 오르는 계단으로, <불국사고금역대기(佛國寺古今歷代記)> 등의 옛기록에 의하면 위쪽이 청운교, 아래쪽이 백운교이다.

계단을 ‘다리(橋)’라고 한 것은 속세로부터 부처님의 세계로 건너감을 상징한 것이다. 청운교는 16단, 백운교는 18단이며, 계단 경사면이 45°의 안정된 각도로 되어 있다.

 

청운교와 백운교가 이어지는 부분의 아래쪽은 무지개 모양의 홍예로 되어 있어,

우리나라 홍예교와 홍예문의 초기 형태를 보여준다.

석축(보물 제1745호), 연화교 및 칠보교(국보 제22호)와 함께 8세기 중엽에 건립되었으며,

완전한 형태로 남아 있는 통일신라의 계단으로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연화교(蓮華橋) 및 칠보교(七寶橋) / 국보 제22호

 극락전 구역으로 오르는 계단으로, 아래쪽의 연화교는 10단, 위쪽의 칠보교는 8단이다.

청운교 및 백운교(국보 제23호)보다 규모는 작으나 형태와 구조가 매우 비슷하다.

계단은 45°각도의 안정된 기울기를 보이며,

연화교와 칠보교가 이어지는 부분은 무지개 모양의 곡선으로 되어 있다.

 

연화교의 층계에는 계단마다 넓은 연꽃잎이 새겨져 있는데,

계단을 밟는 사람이 아미타 부처님의 극락정토에 왕생하기를 기원하는 의미가 담겨 있다.

석축(보물 제1745호), 청운교 및 백운교와 함께 8세기 중엽에 건립되었으며,

완전한 형태로 남아 있는 통일신라의 계단으로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석가탑(釋迦塔) / 국보 제21호

 

석가탑, 다보탑이라는 이름은 인도 영취산에서 석가모니 부처님이 설법하신 진리를 다보 부처님이 증명하였다고 하는 <법화경(法華經)> 「견보탑품(見寶塔品)」의 내용에서 유래한 것이다.

 

 두 탑 모두 8세기 중엽 신라 재상이었던 김대성이 불국사를 건립했을 때 세워졌다.

석가탑은 2층 기단 위에 3층 탑신을 올린 전통적인 신라 석탑으로, 높이 10.6m이다.

엄격한 조화와 균형의 미를 갖추어 통일신라 석탑을 대표하는 탑으로 꼽힌다.

 

1966년 도굴범에 의해 훼손된 석탑을 복원하는 과정에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 인쇄물인 <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을 비롯한 다수의 사리장엄(국보 제126호)이 발견되었다.
 

 

다보탑(多寶塔) / 국보 제20호

 

석가탑, 다보탑이라는 이름은 인도 영취산에서 석가모니 부처님이 설법하신 진리를 다보 부처님이 증명하였다고 하는 <법화경(法華經)>  「견보탑품(見寶塔品)」의 내용에서 유래한 것이다.

 

 두 탑 모두 8세기 중엽 신라 재상이었던 김대성이 불국사를 건립했을 때 세워졌다.

다보탑은 통일신라의 전형적인 삼층석탑 형식인 석가탑과는 달리 목조 건축의 여러 요소들을 조합한 독창적인 형태의 탑으로, 높이 10.3m이다.

 

기단 위에 놓인 돌사자는 원래 4마리였으나,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없어져 현재 1마리만 남아 있다.

탑 내부에 안치되었던 사리장엄도 1925년의 수리공사 때 없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불국사에는 이렇게 많은 문화재가 있어서 부처의 나라이며

세계의 보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귀중한 문화재를 찬찬히 살피면서 들러보고자 한다.

 

 

 

 

 

전각배치도

 

 

 

 

부처의 나라 "불국사"

빛나는 세계의 유산 "불국사"

 

불국사 일주문

대부분 '00산00사' 이렇게 현판이 적혀 있지만

불국사는 부처의 나라답게 불국사라는 글씨만 적혀 있다.

 

 

본래 일주문이라는 말은 기둥이 한 줄로 되어 있는 데서 유래된 것으로,

사주(四柱)를 세우고 그 위에 지붕을 얹는 일반적인 가옥형태와는 달리

일직선상의 두 기둥 위에 지붕을 얹는 독특한 형식으로 되어 있다.

 

사찰에 들어가는 첫번째 문을 독특한 양식으로 세운 것은 일심(一心)을 상징하는 것이다.

신성한 가람에 들어서기 전에 세속의 번뇌를 불법의 청량수로 말끔히 씻고

 일심으로 진리의 세계로 향하라는 상징적인 가르침이 담겨 있다.

즉, 사찰 금당(金堂)에 안치된 부처의 경지를 향하여 나아가는 수행자는 먼저 지극한 일심으로

부처나 진리를 생각하며 이 문을 통과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일주문을 들어서서 세계의 보물 불국사 경내로 걸어간다.

 

 

일주문과 반야교 사이의 왼쪽에서 자라는 "관음송"

수령은 97년정도 되었다고 한다.

 

 

일주문을 들어서 천왕문 못미쳐

반야교 아래 연못이다.

 

천왕문앞 반야교

 

 

천왕문(天王門)

봉황문이라고도 하며 본래 맑고 깨끗해야 할 부처님의 세계를 지키는 사천왕(四天王)을 모신 문이다.

동쪽의 持國天王(지국천왕),

서쪽의 광목천왕(廣目天王),

남쪽의 증장천왕(增長天王),

북쪽의 다문천왕(多聞天王)깨서 삼보(三寶)를 지키시는 문이다.

나쁜 것을 깨 버리고 올바른 길을 펼치려는 마음을 일깨워 주고 있는데 그 뜻이 있다.

 

지국천왕은 비파(琵琶)를 들고

증장천왕은 보검(寶劒)을 잡았으며

광목천왕은 용관, 여의주(如意珠),

또는 견색(絹索; 새끼줄)을,

다문천왕은 보탑(寶塔)을 받쳐든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 보편적이다.

 

대체로 이들 사천왕은 왼쪽에 동.남천왕, 오른쪽에 서.북천왕이 배치된다.

이 사천왕들은 불교경전에 나타나는 인도 재래의 神(신)인데, 불교의 수호신이 되어서 사방을 지키게 된 것이다.

일정한 모습이 처음부터 규정된 것이 아니어서 인도에서는 귀족의 모습으로 표현되었고

중앙 아시아나 중국, 우리 나라로 전파되는 동안 무인상(無人像)으로 변형되었다.

 

 

 

 

 

동쪽의 持國天王(지국천왕),

서쪽의 광목천왕(廣目天王),

남쪽의 증장천왕(增長天王),

북쪽의 다문천왕(多聞天王)

 

지국천왕은 비파(琵琶)를 들고

증장천왕은 보검(寶劒)을 잡았으며

광목천왕은 용관, 여의주(如意珠), 또는 견색(絹索; 새끼줄)을,

           다문천왕은 보탑(寶塔)

 

 

사천왕문을 들어서서....

 

 

가을이 그대로 남아 있는 겨울초입

불국사 경내 진입전 오른쪽으로 난 오솔길을 담아보았다.

 

 

    불국사풍경  

불국사

불국사는 경상 북도 경주시 동쪽 토함산에 있는 절이다.

고려 시대에 만든 역사책《삼국유사》에 따르면 이 절은 신라 경덕왕 때인 751년에 김대성이 세웠다.

 그러나 불국사의 내력을 적은 《불국사 역대 고금 창기》에 따르면 이 절은 528년에 세웠다고 전한다.

또, 574년에 진흥왕의 어머니인 지소 부인이 절의 규모를 크게 늘렸고,

문무왕 때인 670년에 무설전을 새로 지었으며,

751년에 낡고 규모가 작았던 이 절을 당시의 재상 김대성이 크게 다시 지었다고 전한다.

이러한 자료를 참고로 할 때, 불국사는 처음에 작은 규모로 세워졌던 것을 김대성이 크게 늘려 지은 것으로 짐작된다.

 

 

 

 

 

 

 

 

 

불국사 가구식 석축

 

경주 불국사 가구식 석축(慶州 佛國寺 架構式 石築)

경상북도 경주시, 불국사에 있는 통일신라의 석축으로 20111230일 대한민국의 보물 제1745호로 지정되었다.

석축이라 함은 건축물이나 석탑 등을 배치하기 위하여 조성한 구조물을 말하는 것이고,

가구식 석축이라 함은 돌을 단순히 쌓는 것이 아니라 목조 건축물을 만들듯이 돌을 짜서 맞추는 방식을 말한다.

불국사 가구식 석축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잘 모르고 그냥 지나치고 있지만

불국사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의 한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며

토목이나 건축전공 외국인에게 불국사의 다른 건축물보다 찬사를 많이 받는 곳이다. 

최근의 신축 건물처럼 네모 반듯하게 지은 것이 아니라

경사진 자연지형에 맞추어 아름답게 돌을 쌓아올린 친환경 석축이기 때문일 것이다. 

 

 

불국사 정면의 칠보교 연화교 백운교 청운교는 문화재 보호를 위해 출입이 금지 되어 있다

그래서 불국사  좌.우로 난 문을 이용하여 경내로 출입한다.

 

 

 

첫번째 문을 들어서면 대웅전 외곽의 회랑이 있고

맞은편에 대웅전으로 오르는 계단과 오른쪽에 극락전이 있다.

 

 

극락전

정면3칸, 측면 3칸의 건물.

대웅전의 서쪽 한단 낮은 곳에 세워져 있으며

 국보 제22호인 연화교(蓮華橋)·칠보교(七寶橋)를 거쳐 안양문(安養門)을 들어서면 마주 보이는 위치에 있다.

 

임진왜란 때에 소실된 것을 1750년(영조 26)에 오환(悟還)·무숙(武淑) 등이 중창한 것이지만,

기단(基壇)과 초석·계단 등은 신라시대의 것으로 생각된다.

건물 안에는 내고주(內高柱) 4개를 세웠는데,

뒤쪽의 고주 사이에는 후불벽(後佛壁)을 세워

그 앞에 통일신라시대의 금동아미타여래좌상(金銅阿彌陀如來坐像, 국보 제27호)을 봉안하고 있다.

 

 

기둥은 민흘림으로, 변주(邊柱 : 변두리기둥)의 상부에는 창방(昌枋)과 평방(平枋)을 얹고

다포작(多包作)의 공포(栱包)를 짰는데, 공포는 내외2출목(內外二出目)으로 외부로 뻗어나온 쇠서[牛舌] 위에

연봉[蓮蕾:연꽃 봉오리]을 조각하고 그 위에는 봉두(鳳頭:봉황머리)를 조각하여 조선 후기적인 수법을 보여주고 있다.

 

극락전앞에 복돼지는 모형이고

실제로 극락전현판뒤에 복돼지가 있다고 한다.

 

 

극락전 편액 뒤의 복돼지

불국사 극락전의 편액 뒷쪽 공포 위에는 한 마리의 돼지상이 있다.

사람들은 이 돼지를 복을 가져다주는 '황금돼지' 또는 '복돼지'라 부른다.

이 돼지는 길이 50cm 가량의 나무로 다듬어져 있으며 황금빛을 띠고 있으나

뾰족한 입, 나라로운 눈매 뾰족한 송곳니가 산돼지를 연상하게 한다.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으로 불국사가 전소되었을때 이 극락전도 함께 불탔고

중건된 것은 조선 영조때인 1750년이까 아마 이 돼지상도 중건당시에 만들어졌을 것이다.

편액 뒤에곡곡 쑴어 있다가 257년 만에 불국사를 찾은 한 관람객에 의해 세상 밖으로 나온 것이다.

극락전은 1750년 이후에도 몇번의 보수룰 거쳤는데 어떻게 발견이 되지 않았을까...

돼지상이 발견된 것은 황금돼지의 해로 떠들석했던 2007년 2월이었다.

 

 

 

극락전 내부

금동아미타여래좌상(金銅阿彌陀如來坐像, 국보 제27호)

건물 안에는 내고주(內高柱) 4개를 세웠는데,

뒤쪽의 고주 사이에는 후불벽(後佛壁)을 세워

그 앞에 통일신라시대의 금동아미타여래좌상(金銅阿彌陀如來坐像, 국보 제27호)을 봉안하고 있다.

 

 

 

 

극락전을 둘러보고 이 계단을 올라 회랑을 통과하면  불국사 대웅전이다.

 

 

 

궁궐을 들어가는 것 같이 엄숙한 기분이 들게 하는 전각이다.

 

 

불국사대웅전佛國寺大雄殿

보물 제1744호 (2011년 12월 30일)

 

 불국사에 있는 조선시대의 건축물이다.

2011년 12월 30일 대한민국보물 제1744호로 지정되었다.

석가여래 부처님을 모시는 법당으로, 불국사 경 내 중심이 되는 건물이다.

 

또 첨차의 쇠서[牛舌] 위는 연꽃봉오리와 봉황머리를 조각하여 화려한 장식으로 꾸미고 있는데,

이는 조선 후기 불전건축에서 일반화되어 있는 특징이다.

건물 내부는 바닥에 마루를 깔고, 천장은 우물반자로 마감하였으며, 금모루단청을 칠하였다.

 

한편, 이 건물은 1765년(영조 41)에 중창(重創)된 것인데, 중문(中門)인 자하문과 함께 당시 불국사의 건축을 대표하고 있다.

이 건물의 앞에는 국보로 지정되어 있는 다보탑과 석가탑이 좌우로 놓여 있고,

둘레에는 1973년에 복원된 회랑(回廊)이 둘러져 있어서 부처를 모신 영역을 분명하게 구분해 놓고 있다.

2011년 12월 30일 보물 제1744호로 지정되었다.

 

 

기둥은 단면을 원형으로 만들고 민흘림으로 처리하였으며,

바깥두리기둥의 윗몸에 창방(昌枋)과 평방(平枋)을 두르고

바깥쪽은 3출목(三出目) 7포작(七包作), 안쪽은 4출목 9포작의 다포계 공포(栱包)를 짜올렸다.

중앙 어간(御間 : 중앙간) 기둥머리에는 용머리를 돌출시켜놓았다.

 

또 첨차의 쇠서[牛舌] 위는 연꽃봉오리와 봉황머리를 조각하여 화려한 장식으로 꾸미고 있는데,

이는 조선 후기 불전건축에서 일반화되어 있는 특징이다.

 

 

자하문에서 바라본 대웅전

 

 

 

 

대웅전 내부

대웅전 영산회상도 및 사천왕 벽화/보물 제1797호 

 

내부는 안두리기둥[內陣柱]과 바깥두리기둥[外陣柱]을 세웠으며,

 안두리기둥은 모두 고주(高柱)로 하고

뒷면 고주 사이에 후불벽(後佛壁)을 설치하였으며,

이 앞에 불단(佛壇)을 마련하고 불상을 모셔놓았다.

 

건물 내부는 바닥에 마루를 깔고,

천장은 우물반자로 마감하였으며, 금모루단청을 칠하였다.

 

 

 

석가탑(釋迦塔) / 국보 제21호

 

석가탑, 다보탑이라는 이름은 인도 영취산에서 석가모니 부처님이 설법하신 진리를 다보 부처님이 증명하였다고 하는

<법화경(法華經)> 「견보탑품(見寶塔品)」의 내용에서 유래한 것이다.

 

 두 탑 모두 8세기 중엽 신라 재상이었던 김대성이 불국사를 건립했을 때 세워졌다.

석가탑은 2층 기단 위에 3층 탑신을 올린 전통적인 신라 석탑으로, 높이 10.6m이다.

엄격한 조화와 균형의 미를 갖추어 통일신라 석탑을 대표하는 탑으로 꼽힌다.

 

1966년 도굴범에 의해 훼손된 석탑을 복원하는 과정에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 인쇄물인 <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을 비롯한 다수의 사리장엄(국보 제126호)이 발견되었다.

 

우리가 방문했을때에는

아쉽게도 석가탑이 아쉽게도 긴시간동안 보수에 들어갔다

유리벽건물에 갇혀 있어서 꼼꼼히 살펴볼 수 있는 기회를 가지지 못했다

이것은 먼 훗날 다시 도 찾으라는 부처님의 뜻이리라.

 

 

 

대웅전과 다보탑

 

 

다보탑(多寶塔) / 국보 제20호

 

석가탑, 다보탑이라는 이름은

인도 영취산에서 석가모니 부처님이 설법하신 진리를 다보 부처님이 증명하였다고 하는

<법화경(法華經)>  「견보탑품(見寶塔品)」의 내용에서 유래한 것이다.

 

 두 탑 모두 8세기 중엽 신라 재상이었던 김대성이 불국사를 건립했을 때 세워졌다.

다보탑은 통일신라의 전형적인 삼층석탑 형식인 석가탑과는 달리

목조 건축의 여러 요소들을 조합한 독창적인 형태의 탑으로, 높이 10.3m이다.

 

기단 위에 놓인 돌사자는 원래 4마리였으나,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없어져 현재 1마리만 남아 있다.

탑 내부에 안치되었던 사리장엄도 1925년의 수리공사 때 없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기단 위에 놓인 돌사자는 원래 4마리였으나,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없어져 현재 1마리만 남아 있다.

탑 내부에 안치되었던 사리장엄도 1925년의 수리공사 때 없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불국사무설전[佛國寺無說殿]

 

대웅전의 바로 뒤에 있는 전각으로

불국사고금창기’에 따르면 신라 문무왕 10년(670)에 이곳에서 ‘화엄경’을 강의했다는 내용이 있다.
불국사의 창건연대(751)보다 무려 80년 전으로 무설전은 불국사에서 가장 먼저 세워진 건물이었다.

현재의 건물은 1973년 중창 불사 때 다시 지은 것이다.
‘설(說)’을 위해 만들어진 강당이면서도 ‘설이 없다’는 이름을 가졌다.
말로 표현되는 진리는 존재할 수 없으며 말이나 글은 진리의 그림자일 뿐이라는 의미다.

 

 

 

지장보살 김교각스님

무설전 내부 

 

 

 

무설전에서 바라본 대웅전의 뒷모습

뉘엿뉘엿 저물어가는 석양과의 어울림이다.

 

 

 

다시 돌아보게 하는 대웅전

 

 

무설전의 오른쪽 뒸편으로 난 물을 통하여 

관음전과 비로전영역으로 들어가게 된다.

 

 

 

관음전으로 오르는 계단 낙가교

불교 경내에 이렇게 계단이 많은 것은

한계단 한계단 오르는 일이 하늘에 닿는 일

즉 극락으로 가는 의미라고 한다.

 

 

무설전에서 낙가교를 통하여 오르는 문

이문을 통하여 관음전 영역에 들어서게 된다.

 

 

관음전

관음전은 불국사 무설전 뒤편에 낙가교 위에 있다.

 낙가교는 계단이 가파르다.

 관음보살이 살던산이 높은 낙가산이므로 이것을 형상화 한것이기도하고

스님들 수행 하기가 힘들 다는 뜻도 있다.

 

 

 관음전은 자비를 베푸는 천수천안보살님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

 천수천안보살이란 천개의 눈과 천개의 손으로 세상을 살펴보고 천개의 손으로 일을 한다는 뜻이다
관세음보살은 외우는것은 아무런 괴로움없이 편안하고 행복하게 살게 해달라고 비는 것이다.

 

 

관음전에서 내려다 본 비로전의 모습

 

 

비로전

비로자나불을 모신 법당이며,

법당 안에는 국보 제26호인 금동 비로자나불 좌상이 모셔져 있다.

751년에 건립하였으며,

이 비로전도 다른 전각과 마찬가지로 몇 차례의 중수, 중건을 거쳐 왔으며,

현재의 건물은 1973년 창건 당시의 기단과 초석위에다 다시 중건을 하였고, 건축 양식은 조선후기에 속한다고 한다.

 

 

금동비로자나불좌상金銅毘盧遮那佛坐像

국보 제26호.

불국사금동비로자나불좌상(통일신라), 국보 제26호, 높이 177cm

두 손은 가슴 쪽으로 올려 지권인(智拳印)을 취하고, 우견편단으로 법의를 입고 결가부좌의 자세를 하고 있다.

 

지권인은 본래 밀교에서 금강계만다라의 주존인 대일여래, 즉 마하비로자나가 취하는 수인으로

이때 대일여래는 머리카락을 늘어뜨리고 영락으로 장식한 보살의 형태로 표현되는데,

 이 불상처럼 나발이 있는 육계에 부처의 형상으로 지권인을 한 경우는 다른 나라에서는 유례가 없는 것으로 주목할 만하다.

그리고 일반적인 지권인과 달리 오른손은 아래로, 왼손은 위로 올라가 극락전의 아미타상처럼 두 손의 위치가 바뀐 것도 특이한 점이다.

 

얼굴의 표정 자체도 근엄하지만 넓은 어깨에 허리를 곧게 세워 배가 약간 나온 자세는 더욱 위압감을 준다.

두 무릎의 폭이 넓어 안정된 느낌을 주지만 허리가 길어지고 얼굴과 드러난 오른쪽 어깨의 살은 약간 탄력감을 잃은 듯하다.

왼쪽 어깨에서 흘러내린 옷은 불신에 밀착되어 허리와 배를 둥글게 감싸고 있는데 도드라진 옷주름의 표현은 도식화된 편이다.

 

전체적으로 장중한 느낌을 주는 이 상의 제작연대는 그 양식에 의해 8세기말로 보는 견해와

〈불국사사적기〉 가운데 최치원이 쓴 〈비로자나문수보현상찬 毘盧舍那文殊普賢像讚〉에 근거해 9세기말로 보는 견해가 있다.

원래 대웅전에 있던 것을 일제강점기에 중수할 때 극락전으로 옮겼다가 1973년 복원공사 후 다시 비로전으로 옮긴 것이다.

 

 

불국사사리탑佛國寺 舍利塔

보물 제61호

 불국사에 있는 석등형의 사리탑이다. 

 1905년 일본으로 반출되었다가 다시 돌아왔는데, 자세한 유래는 알 수 없다.

현재의 위치는 본래 위치가 아닌데, 원래 위치 또한 알 수 없다.

 

비로전 옆에 자리하고 있다.

 

 

탑은 받침돌 위에 몸돌과 지붕돌을 올려 놓은 모습이다.

받침돌은 아래받침돌, 가운데받침돌, 윗받침돌로 이루어졌다.

네모난 바닥돌 위에 놓인 아래받침돌은 단면이 8각으로, 위아래 2단으로 구성되었다.

 아랫단의 각 면에는 위아래로 테두리가 둘러졌으며, 그 사이에 안상(眼象)이 1구씩 조각되었는데,

 안상의 가운데 아래부분에는 위로 솟은 꽃 무늬가 돋을새김되어 있다.

 

윗단은 아랫단과 비슷한 높이인데,

1장의 꽃잎이 아래로 향한 복련(覆蓮)의 연꽃 무늬 8개가 큼지막하지만 소박하게 돋을새김되었다.

가운데받침돌은 높이가 제법 높은 북 모양으로, 겉면에는 구름 무늬가 깊게 새겨져 있다.

 

윗받침돌은 아래부분에 1장의 꽃잎이 위로 솟은 앙련(仰蓮)의 연꽃 무늬 9개가 돌려 조각되었는데,

 연꽃의 가운데에는 꽃 무늬 모양의 원좌(圓座)가 얕게 돋을새김되어 있다.

 윗면에는 몸돌을 받치고 있는 낮은 굄 주변에 연꽃의 열매인 연자(蓮子)가 오목새김되었다.

 

좁은 틈트로 사리탑의 전신을 찍으려 했지만

하단이 잘려서 아쉽다.

 

 

몸돌은 여느 승탑이나 석등과 달리 가운데부분이 볼록한 원통 모양으로,

위아래에 연꽃과 보상화(寶相花)를 새긴 기둥을 조각하여 4면으로 나누었다.

각 면에는 얕게 오목새김한 불감(佛龕)을 두고,

그 안에 여래좌상(如來坐像) 2구와 함께 보살입상(菩薩立像) 2구를 돋을새김하였으며,

감실의 윗부분에는 장막을 드리워 새겨 놓았다.

몸돌 윗부분의 가운데에는 지름 5㎝의 둥근 구멍이 뚫려 있다.

이 구멍은 지붕돌까지 이어져 있는데, 중심 기둥인 찰주(擦柱)를 세웠던 구멍으로 추정된다.

한편 윗받침돌 가운데에도 홈이 패여 있는데, 이것은 사리를 안치하였던 구멍으로 보인다.

이 사리탑은 신라 승탑의 전형적인 양식인 8각원당형(圓堂形)에서 벗어나 특이한 모습을 보여 주는 것으로,

전체적인 조형과 조각 수법으로 보아, 신라의 양식을 계승하여 고려 초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나한전

불국사 나한전입니다 부처님 제자16분이 모셔져 있는 16나한전이다

 비로자나불이 모셔져있는 비로전 옆에 위치 하고 있다
나한전 안내문 나한이란 아라한의 다른 말이다

아라한은 깨닮은 사람을 뜻한다 원래는 부처와 동격 이였으나

언제부터인가 부처님 제자로 격이 낮아졌다

 지금은 부처님 제자로 수행을 많이하여서 도를 깨우친 사람으로

다른 사람들 에게도 깨닮은을 얻도록 가르키는 나한이다

 

나한전 내부

16나한의 모습

 

 

나한전에는 여기저기 돌탑이 많다

담위에도 문틀위에도..

그리고 나무 옆에도

 

 

나한전을 나오며 다시 한번 찍어보고....

나한전에 여기저 쌓인 돌탑들

불자들이 유독 나한전에서 이루고 싶은 소원이 많았을까.

 

 

나한전과 극락전 사이에

아직도 복원이 되지 않은 불전인

'법화전지'

이곳은 경전을 보관하던 서적보관소의 역할을 했다고 한다. 지금은 발굴 당시의 주춧돌이 잘 정비 되어있다.


 

 

법화전지와 대웅전 회랑

 

 

들어설때 가장먼저 만났던 극락전...

불국사경내를 나서며 다시 한번 바라보게 되는 극락전

 

 

 

 

극락전을 빠져 나와

석양이 비친 가구식 석축을 다시 한번 담아본다.

 

 

가구식 석축의 입지 현황 및 역사문화환경

경주 불국사는 신라의 동악(東岳)인 토함산(土含山)서측 기슭에 위치하며,

남향으로 배치되어 있다. 불국사의 지형은 북측이 높고 남측이 낮은 북고남저(北高南低)와

 동측이 높고 서측이 낮은 동고서저(東高西低)으로 지형에 따라 석축을 가구식으로 조화롭게 쌓았으며,

 동측 사역에는 자하문, 대웅전, 무설전을 남북 축선에 배치하면서 회랑을 둘러 공간을 구성하고 있다.

 

대웅전의 동·서측면에는 익랑(翼廊)이 놓여 동·서 회랑과 연결되고 남회랑의 동측 모서리에는 좌경루(左經樓)가 있고,

 서측 모서리에는 범영루(泛影樓)가 배치되어 있다.

자하문 남측에는 청운교와 백운교의 석계가 있어 대웅전으로 진·출입할 수 있도록 꾸며졌다.

 

대웅전 서편에 한 단 낮은 사역에는 회랑을 둘러 별도로 구획한 공간의 중심에 극락전이 배치되어 있고,

남측에 있는 연화·칠보교와 안양문을 통하여 출입할 수 있도록 꾸며졌으며,

극락전 동북측에 있는 석축에는 아미타불의 48원(願)을 상징하는 16계단 3열로 조영되어 있는 석계를 통하여 대웅전과 연결된다.

 

 

종무소

 

 

종각

 

 

 

안양루와 범영루 그리고 자하문, 맨끝에 좌경루

 

 

 

안양문과 연화교및 칠보교

 

 

연화교(蓮華橋) 및 칠보교(七寶橋) / 국보 제22호

 극락전 구역으로 오르는 계단으로, 아래쪽의 연화교는 10단, 위쪽의 칠보교는 8단이다.

청운교 및 백운교(국보 제23호)보다 규모는 작으나 형태와 구조가 매우 비슷하다.

계단은 45°각도의 안정된 기울기를 보이며,

연화교와 칠보교가 이어지는 부분은 무지개 모양의 곡선으로 되어 있다.

 

연화교의 층계에는 계단마다 넓은 연꽃잎이 새겨져 있는데,

계단을 밟는 사람이 아미타 부처님의 극락정토에 왕생하기를 기원하는 의미가 담겨 있다.

석축(보물 제1745호), 청운교 및 백운교와 함께 8세기 중엽에 건립되었으며,

완전한 형태로 남아 있는 통일신라의 계단으로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연화교(위)와 칠보교(아래)을 올라 안양문을 들어서면 극락전이다.

안양은 극락의 뜻이 있다.

 

 

범영루

 

범영루

'불국사고금역대기'에 의하면 이 자리에 있던 원래의 건물은 '우경루'로

좌경루와 함께 경전을 보관하였던 곳으로 보인다.

현재의 건물은 1969년에서 1973년 불국사 복원공사때 다시 세운 것으로, 내부에 법과 놓여 있다.

범여루 건물을 받치고 있는 수미산 형태의 돌기둥은 8세기 중엽 불국사가 건립되었을대 세워진 원래의 건물을 받치고 있던 기둥으로,

돌을 목조 건축 부재인 첨차 모양으로 다듬어 차곡차곡 쌓아 올린 것이다.

 

 

자하문과 백운교 청운교

청운교(靑雲橋) 및 백운교(白雲橋) / 국보 제23호 

 

대웅전 구역으로 오르는 계단으로,

<불국사고금역대기(佛國寺古今歷代記)> 등의 옛기록에 의하면 위쪽이 청운교, 아래쪽이 백운교이다.

계단을 ‘다리(橋)’라고 한 것은 속세로부터 부처님의 세계로 건너감을 상징한 것이다.

청운교는 16단, 백운교는 18단이며, 계단 경사면이 45°의 안정된 각도로 되어 있다.

 

청운교와 백운교가 이어지는 부분의 아래쪽은 무지개 모양의 홍예로 되어 있어,

우리나라 홍예교와 홍예문의 초기 형태를 보여준다.

석축(보물 제1745호), 연화교 및 칠보교(국보 제22호)와 함께 8세기 중엽에 건립되었으며,

완전한 형태로 남아 있는 통일신라의 계단으로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청운교와 백운교가 이어지는 부분의 아래쪽은 무지개 모양의 홍예로 되어 있어,

우리나라 홍예교와 홍예문의 초기 형태를 보여준다.

석축(보물 제1745호), 연화교 및 칠보교(국보 제22호)와 함께 8세기 중엽에 건립되었으며,

완전한 형태로 남아 있는 통일신라의 계단으로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자하문 위에서 내려다 본 청운교과 백운교

 

 

당간지주/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446호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446호
사찰에서 의식이 있을 때는 당幢이라는 깃발을 단다.

당을 매다는 긴 장대를 당간幢竿이라고 하며, 당간을 지탱하기 위해 양쪽에 세운 두 돌기둥을 당간지주라고 한다.
나란히 서있는 2쌍의 당간지주 중 동쪽 당간지주는 통일신라 때 세워진 것이지만,

서쪽 당간지주는 기둥 크기와 제작 수법에 차이가 있는 것으로 보아

각기 다른 부재를 후대에 조합한 것으로 추정된다.


 

 

석조(石槽) / 보물 제1523호 

석조(石槽)는 큰 돌을 파서 물을 저장할 수 있도록 만든 용기로,

흔히 큰 절에 설치되었다.

불국사 석조는 일반적인 통일신라 석조의 형태인 직사각형 모양이지만,

다른 석조와는 달리 내부와 외부에 돋을새김 조각이 많고

모서리를 장식적으로 둥글게 한 점이 특징적이다.

 

내부에는 거대한 연꽃모양이 새겨져 있어 석조의 물속에서 연꽃이 피어오르는 듯한 효과를 주며,

 외부에는 돌림띠를 돌리고 안상(眼象) 무늬로 장식하였다.

전체적인 모양새가 우아하고,

장식 또한 정교하여 통일신라 석조(石造) 미술의 뛰어난 조형의식을 보여주는 수작(秀作)이다.

 

 

철제 가드레일일 둘러쳐진 소나무라 중요한 소나무인가 싶었는데

자료를 찾아보니 아무것도 아니다..

그래도...자료에 남기며..

.

.

.

원래 목적은 경주 남산의 유적지 답사 트래킹이었지만

서울에서 경주가 어디 가까운 거리라야 말이지

온김에 욕심을 내어 불국사답사까지 강행을 했다

세계적 보물인 만큼 꼼꼼하게 살펴보고 편집해야 하지만

트래킹에 목적을 두다보니 사찰편집은 늘 번갯불에 콩구어 먹는 형식이다

집에 돌아와 사진을 보며 여기저기 자료를 찾아서

끼어 맞추는 형식을 취하다보니 긴 편집을 끝내고 늘 뭔가 아쉬운 느낌이 가득하다.

이렇게 조금씩 사찰을 드나들다보면 언젠가는 적극적으로 연구하고 편집하는 날이 있지 않을까..싶다.

그래도 절집에 다녀왔다는 것으로 행복해하며

꾸준히 답사를 할 예정이다.

 

다음에 혹시 경주에 간다면 토함산에도 다시 오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