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 한쪽 비워둔다면

photostory-寺

2015.11.29. 밀양 표충사

kyeong~ 2015. 11. 29. 23:48

 

 

 

 

 

 

밀양 표충사表忠寺

경상남도 밀양시 단장면 표충로 1338

 

표충사(表忠寺)는 밀양읍에서 동쪽 방향으로 28km 떨어진 재약산 기슭에 자리 잡은 사찰이며,

사명대사의 호국성지로 널리 알려진 곳이다.

표충사는 654년에 원효대사가 나라의 번영과 삼국통일을 기원하고자 명산을 찾아다니던 중,

 천황산 산정에 올라 남쪽계곡 대나무 숲에서 오색구름이 일고 있는 것을 보고, 이곳에 터를 잡아 절을 세우고

사찰의 이름을 죽림사(竹林寺)라고 했다.

829년(신라 흥덕왕 4) 인도의 고승 황면선사(黃面禪師)가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시고 와서 이곳에 머물 때

당시 흥덕왕의 셋째 왕자가 악성 피부병에 걸려 전국에서 명산과 명의를 찾던 중 이곳 죽림사의 약수를 마시고 병을 치유할 수 있었다.

 이에 흥덕왕이 감탄하여 탑을 세우고 가람을 크게 부흥시켰으며, 왕자가 마셨던 약수를 영험한 우물 약수라는 뜻의 ‘영정약수’라 했고,

이때부터 절 이름을 ‘재약산 영정사(靈井寺)’라 고쳐 부르고 크게 부흥시켰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사찰이 불에 타 소실된 것을 1600년에 혜징화상이 중건했다.

1679년에 실화로 화재가 발생하여 다시 소실되자 1680년에 대규모로 가람을 중건했다.

1839년(헌종 5)에는 임진왜란 때 승병을 일으켜 국난 극복에 앞장선 서산대사, 사명대사, 기허대사를 모신 표충사당

(지금의 대법사 자리인 밀양시 무안면 중산리 영축산 백하암에 있던 사당)을 이곳으로 옮겨오면서 절의 이름을 ‘표충사’로 개명했다.

 표충사는 1983년 사명대사 호국 성지로 성역화되었다.

표충사의 건물 배치는 대광전과 표충서원을 중심으로 두 개의 영역으로 구성되는데 대광전은 불교, 표충서원은 유교 영역이다.

유교 공간이 불교 사찰 경내에 공존하는 특이한 가람 구조이다.

 

 

 

 

표충사 전각배치도

대광전 영정약수 팔상전 응진전 독성전·산령각 관음전 명부전 우화루 범종각 삼층석탑 석등 영각

  칠성각 서래각 표충사당 표충서원 수충루 일주문 유물관 사천왕문 종무소 전시관 설법전

 

표충사 일주문

 

일주문(一柱門)은 사찰로 들어가는 첫 번째 관문이다. 
원래 지붕을 가진 일반적인 건축물이라고 하면 사방에 네 개의 기둥을 두어 지붕의 하중을
지탱해야 하는 것이 상식이다. 하지만 일주문은 한 줄로 나란한 두개의 기둥만으로 지붕을
지탱하며 서 있는 건축물이다. 

일주문이란 명칭은 바로 이런 건축적인 특징에서 붙여지게 된 것이다. 불교에서는 이러한
모습에 비추어 일심(一心)이라는 의미를 부여한다. 즉 신성한 사찰에 들어서기 전에 흐트러진
마음을 하나로 모아 진리의 세계로 향하라는 상징적인 의미가 담겨 있는 것이다.

 

 

일주문에서  수충루로 가는 길

길 오른쪽으로 넓은 주자장이 있고

겨울이라 그런지 각종 농산물을 파는 상인들이 몇명만 길손을 기다리고 있다.

다른 고찰에 비해 노거수들은 없는 편이다.

 

 

 

 

영사각

일주문과 수충루 사이에 있는 비각이다

내부에는 각종 공덕비와 영세불망비가 보존되어 있다.

 

 

수충루

표충사의 정문으로써 밀양시 교동에 소재한 "밀양향교의 정문인 풍화루" 밀양시 부북면 후사포리에
소재한 "예림서원의 정문인 독서루"와 더불어 다른 사찰에서는 보기 드문 서원 정문 형태의 누각입니다
이는 表忠祠를 밀양시 무안면에서 옮겨오면서 사명대사의 위패를 모시고 서산대사와 기허대사의
위패를 같이 모신 표충서원이 表忠寺 내에 있기 때문입니다

 

수충루를 들어서면 마주보이는 표충사 전경

뒷편 제약산 사자봉이 그림처럼 둘러쳐있다.

 

왼쪽에는 유교영역인 표충서원과 표충사 유물관, 가람각이 있고

오른쪽은 설법전과 전시관이 있다.

 

 

앞에서 설명했듯이 표충사는 유교영역과 사원영역이 공존하는 가람구조이다.

수충루를 들어서면

왼쪽으로 유교영역인

가람각과 표충사(中)와 표충서원(左), 그리고 유물관(右)이 있다.

 

 

수충루옆 가람각

가람신을 모신 가람각이다.  

가람은 승려들이 사는 사찰 등의 건물을 의미하는데

가람신은 부처와 상관없이 가람을 지켜주는 신으로 토속 신앙에서 보면 가람신이 진짜 절의 주인인 셈이다. 



 

표충서원

표충서원은 임진오ㅒ란 때 승병으로서 나라를 구하는데 큰 공을 세운

서산대사 · 사명대사 · 기허대사 3대사의 ‘충혼’을 기리기 위해 세운 사당이다.

선조 임금이 ‘표충서원’이라고 사액했다.

원래는 사당이었던 것을 1839년 현재의 위치에 있던 영정사 안으로 옮겨 ‘표충서원’이라 이름 지었으며,

사찰의 이름 또한 ‘표충사’로 고쳤다.

1871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없어졌다가, 1883년 지역 유림의 요청으로 복원되었으며

근년에 현재의 위치인 단장면 구천리 영정사 자리로 옮겨지었다.

1927년 절을 다시 지을 때 표충서원 건물도 함께 복원했다.

그러나 일부 승려들이 절 안에는 서원이 있을 수 없으며

부처님과 3대사의 영정이 함께 있는 것은 더욱 안 되는 일이라며 반대했다.

결국 1971년에 표충서원을 절의 서쪽에 위치한 팔상전으로 옮겼다. 서원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목조와가이다.
매년 음력 3월과 9월 초정일에 행하는 제사도 승려가 아닌 관리가 주재하여 올리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표충서원은 1972년 2월 12일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52호로 지정되었다.

 

뒤로 보이는 봉우리는 '필봉'이다

필봉과 서원....궁합이 맞는 어울림이다.

 

 

표충사(表忠祠)

사당 표충사 중앙에 사명대사의 영정이 있고

동쪽에는 그의 스승인 서산대사,

서쪽에는 임진왜란 때 금산싸움에서 전사한 기허대사의 영정을 모시고 있다.

1744년 영조 임금의 어명으로 제향행사가 시작된 이래 밀양시청이 주최하고

 종교계(불교 · 유교)가 주관하는 민관합동 제향으로 매년 음력 3월과 9월의 초정일(初丁日)

즉 첫 정(丁)자가 들어 있는 날에 불교와 유교 의식이 함께하는 호국선현 추모제를 올리고 있다.

밀양 표충사에서 가람을 살필때에는 

표충사(表忠寺)와 표충사(表忠祠)를 구분하여 관람하여야 한다.

 

 

기허대사와 사명대사

 

 

사명대사와 서산대사

 

 

표충사앞 석물들..

 

표충사(정면)와 유물관(右)

 

 

 

 

표충사 유물관에는 국보 75호 "청동은입사향완"이라는 향로가 보존되어 있다.

 

 

 

 

표충사청동함은향완(表忠寺靑銅含銀香완) (완=土+完)

[국보 제75호]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고려향로로서 1957년에 처음 발견되었는데

국내외를 통틀어 7좌밖에 없는 동제(銅製) 향로 가운데 하나이다.

향로에 도문(圖文)을 음각하고

그 음각한 홈속에 은사(銀絲)를 메꾸어 넣어서 장식하는

소위 은상감(銀象嵌)의 기법을 사용하였는데

 완형의 몸체와 동근 받침을 가진 대좌가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무엇보다도 이 향로의 몸체 둘레 이면에는 다음과 같은 명문이 있어서

 이 향로의 시대와 유래를 알수 있게 된 것이 매우 귀중하다.

 

 

 

사명대사의 금란가사와 장삼(錦欄袈娑 長衫)[중요민속자료 29호]

이것은 자통홍제존자 사명당 유정이 착용하던 가사(袈娑)와 장삼(長衫)이다.

가사와 장삼은 승려의 법복이다.

 승려는 저고리, 바지 위에 장삼을 입고 속대를 매며, 장삼 위에 가사를 왼쪽어깨에서 오른쪽 겨드랑 밑으로 걸쳐 입는다.

이 가사는 금란가사(錦欄袈娑)이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금색은 퇴색되었고 많이 훼손되었다.

장삼은 원래 웃옷인 편삼(偏衫)과 아랫매기인 군자를 위아래로 합쳐 꿰맨 것인데,

 다소 훼손된 곳도 있으나 그런대로 잘 보존되어 있다.

색은 자색(紫色)이었던 것으로 보이나 흰색으로 퇴색되어 있다.

 


 

(유물관 외부 전시물)

 

 

 

 


목재용기(비사리구시)

나무의 원래 모습을 그대로 살린 채 속을 파내어 만든 용기이다

사찰에서 큰 제사를 지내거나 행사가 있을 때 많은 사람들이 먹을 밥을 담는 용도나 물을 담아 두었다고 한다

 

각종 석상과..철제용기

 

 

 

 

 

설법전

 

 

설법전의 안쪽마당에서 바라본  모습

수충루를 들어서서 오른쪽에 위치한 설법전은

사명대사의 호국사상을 기리기 위한 법회를 열어 그 정신을 전승하는 도량으로서

바깥쪽 설법전이라는 편액외에 안쪽에서 무설전, 의중당, 대흥불법도량이라는 편액이 함께 걸려 있다.

내부에는 금동관음보살좌상이 1구 봉안되어 있다.

 

 

 

설법전 마당의 모습

합천 해인사의 해인도를 밝혔던것처럼

이 금줄을 따라 연등을 밝혔으리라 짐작된다.

 

 

유교영역 표충사(表忠祠)에서 불교영역 표충사(表忠寺)로 통하는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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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문을 지나 수충문을 들어서면 유교영역인 표충사(表忠祠)와 표충서원 유물관등의 가람을 만나고

다시 계단을 올라서 불교영역으로 들어가게 된다.

 

 

 

사천왕문

유교영역을 벗어나 사원의 영역으로 들어서는 곳이다.

 

 

 

 

사대천왕이 무서운 얼굴로 사원으로 들어서는 사람들을 살피고 있다.

 

 

대광전(左), 관음전(中),명부전(中), 우화루(右)

사원영역의 설명은

 안쪽에서 밖으로 나오면서 부터 편집을 해보고자 한다

 

 

 

 대광전

정면 5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건물.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31호.

 신라시대에 창건하였다고 하나 병화(兵火)와 실화(失火)로 소실되고,

현재의 건물들은 1929년에 재건한 것으로 외3출목(外三出目), 내4출목(內四出目)의 다포식 건물이다.

전면 돌계단 소맷돌의 조각, 다듬은 돌초석, 용마루 중앙과 추녀마루의 장식들이 눈길을 끈다.

 

 이 대광전(大光殿)은 표충사(表忠寺)의 주불전(主佛殿)으로 중앙에 석가여래좌상(釋迦如來坐像),

동쪽에 약사여래좌상(藥師如來坐像), 서쪽에 아미타여래좌상(阿彌陀如來坐像)등 삼존불(三尊佛)을 봉안 하고 있다.

표충사 대광전 刹竿臺(찰간대)

 

표충사  대광전  지붕  위에는  찰간대가  있다.

보통  찰간대라  함은  탑의  꼭대기에  있는  장대를  말한다.

나무나  쇠로  깃대  모양을  만들고  꼭대기에  寶珠焰形을  만들어  금속으로  장식하여  불당  앞에  세운다.

이것으로  인하여  절을  金刹,  梵刹,  寺刹이라고  부른다.

이상은  불교사전에  적힌  것이다.

 

그런데  그런  찰간대가  표충사에서는  탑  위에  있지  않고  대광전  지붕  위에  있는  것이다.

찰간대는  불교의  장례의식인  다비의례에  염습,  입감,  기감,  입탑  등이  있는데  입탑의례에

" 사리를  거두어  사거리에  탑을  세우고  사당을  지어  찰간대로  표시하고  비단번을  달며

꽃과  향을  올리는  예배한다"라고  되어  있다.

표충사  대광전  지붕  위에  찰간대를  세운  것은  대광전을  곧  사당으로  삼은  것이고

이  곳에  유명한  큰  스님이  많이  배출되었다는  표식인  것이다.

 

사찰에서  의식을  올릴  때  당간지주에  당간을  세우고  불화를  거는데  불화를  은색  비단천으로

둘러쳐  장식을  달며  그  오색  비단천이  찰간대에  묶여져  아래로  내려  오면서  불화를  아름답게  장식하는 

것이다.

찰간대는  그런  용도로도  쓰인다는  것이다.

 

표충사 스님께서 표충사를 찾은 불자들에게 표충사에 대해 열심히 설명을 하고 있다.

스님의 귀한 설명을 잘 얻고 갔으면 하는 바램이다.

 

대광전으로 오르는 계단

구름문양...불전으로 오르는 길은 하늘로 가는 길

 

 

 

대광전 내부

 

대광전(大光殿)은 표충사의 주전으로

불단 중앙에는 석가여래좌상,

좌우에 아미타여래좌상과

 약사여래좌상등 삼존불(三尊佛)을 봉안하고 있다.

 

 

석가여래좌상

 

 

표충사 부처님 진신사리 귀환
임진왜란 피해 진주로 이운(移運), 420여 년 만에 귀환 재봉안

임진왜란 때 큰 공을 세운 밀양출신 사명대사의 충혼을 기리기 위하여 국가에서 명명한 천년고찰인 표충사(주지 정산 도훈)에

임진왜란을 피해 옮겨졌던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420여 년 만에 돌아와 재봉안 되었다.(2015.7.3.

지난 3일 사명대사 호국성지 표충사에서는 진주시 월아산 두방사(주지 대정 스님)에서 봉안하고 있는

부처님 진신사리 23과 중 6과를 환수 받아 대광전에 임시로 모시는 봉안 불교의식을 봉행했다.

 

많은 신도들이 진신사리를 보기위해 줄을 서서 부처님전에 들고 있다.


부처님의 진신사리 6과가 모셔져 있는 탓인지

삼존불앞에 빈 좌대가 놓여져 있다.

 

 

 

팔상전과 대광전

 

 수충루에서 사천왕문 그리고 대광전에서 다시 명부전으로 오르는 계단

계단에 구름문양을 새긴것은

이렇게 불전으로 오르는 일이 하늘로 오르는 것과 같다는 생각을 표현한 것이라고 한다.

 

대광전에서  이 계단을 오르면 관음전과 명부전이 위치한다.

 

 

 관음전(左)과 명부전(右)

 

 

명부전(冥府殿)

표충사(表忠寺) 경내 남쪽편에 관음전(觀音殿)과 나란히 있는 명부전(冥府殿)은

저승의 유명계(幽冥界)를 사찰속으로 옮겨놓은 법당이다.

지장보살(地藏菩薩)을 위수(爲首)로 봉안 하고 있기 때문에 지장전(地藏殿)이라고 하기도 하고,

유명계의 심판관(審判官)인 시왕(十王)을 봉안하고 있기 때문에 시왕전(十王殿)이라고도 한다.

최초의 창건연대는 확실하지 않지만 임진왜란으로 회진(灰塵)되기 이전에 이미 명부전이 있었던 것 같다.

광해군 2년(1610년)부터 금당(金堂)을 비롯한 크고 작은 전각(殿閣)과 함께 복구가 이루어졌으나

숙종 5년(1679년)에 큰 화재를 만나 다시 소실(燒失)되었다.

 

 숙종 7년(1681년)에 주지 도한(道閑)을 비롯한 신일(信日), 계화(戒和)등 승려들이 합심하여 새로 지었는데,

 정조 24년(1829년)경에 절의 수호 관리가 어려워 건물이 퇴락하였다.

헌종 5년(1839년)경에는 표충사 중흥주(中興主) 월파선사(月坡禪師)에 의해서

명부전 자리가 서산(西山), 송운(松雲), 기허(騎虛)등 3대사(大師)의 영정을 모신 영당(影堂)으로 바뀌어졌다가,

철종 8년(1857년) 7월에 현재의 위치에 재건되었다.

1926년에 또 큰 화재로 소실되었던 것을 1929년에 복원하였으며, 현재의 건물은 1989년 개축한 것이다

 

 

 

 명부전 내부

 

 

 표충사 관음전

 

 

 관음전 내부

관음전(원통전)은 천 개의 손과 천 개의 눈
으로 중생을 보살피는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이 봉안되어 있으며 세상의
소리(世音)을 살펴서(觀) 모든 중생을 구제해 주는 모습이 마치 갓난 자식
을 구하는 어머니의 마음과 같아서 어머니의 모습을 하고 있는 자비의 화신
이다. 표충사 관음전에는 천개의 손과 천개의 눈을 상징하는 42수 관세음보
살을 봉안했다.

 

관음전에서 바라본 대광전

 

 

 

 

물을 부을때는 흙이 패이지 않게....

 

 

 

행사때 깃밧을 꽂는 곳

 

 

 

 

 

 

명부전옆 요사채

출입금지구역....

 

 

우화루와 범종각

 

범종각

 

 

우화루

모처럼의 시간을 내어 절집에 왔는데

마음편히 쉬어 갈 곳이 있어서 좋다.

마루에 앉아 불경소리며 바람소리며 그저 들리는데로 듣고

마음가는데로 그리다 올 수 있는 곳...

 

 

 

전국 사찰에 있는 사명대사의 초상화 우화루에 모아두었다.

 

 

 

 팔상전

경남문화재자료 제141호


표충사 대광전 바로 옆에 나란히 자리 잡고 있는 팔상전은
비록 그 규모는 작지만, 고취가 물씬 풍기는 건물이다.

팔상전(八相殿)은 석가모니의 생애를 묘사한 팔상도(八相圖)를 모신 법당이다.

팔상도는

도솔래의상(兜率來儀相), 비람강생상(毘藍降生相),

사문유관상(四門遊觀相), 유성출가상(踰城出家相),

설산수도상(雪山修道相), 수하항마상(樹下降魔相),

녹야전법상(鹿野轉法相), 쌍림열반상(雙林涅槃相)으로 되어 있다.

지금의 팔상전이 언제 세워졌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철종 5년(1854년) 당시 주지였던 환월선사(幻月禪師)가 지장전 옛터에 팔상전을 세웠다는 기록이 있고,

표충사에 의하면 1926년에 화재로 소실된 것을 1929년에 중창하였다고 한다

 

 

 

 소조 석가여래좌상

팔상전은
대광전과 마찬가지로 잘 다듬어진 장대석의 기단 위에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주심포식 팔작지붕 건물.

건물 내에는 팔상도와 후불탱화와 함께 석가여래좌상이 모셔져 있다.

그런데 도난을 염려해서인지 팔상도와 후불탱화는 실제 그림 대신에 사진으로 대체되어 있다.  

 

팔상전의 뒷모습

 

산신각

 

팔상전 산영각(山靈閣)과 독성전(獨聖殿)을 겸하고 있는 산신각

팔상전 뒷편에 위치하고 있다.

 

 

산신각내부

 

산신각(山靈閣)은

독성각에는 나반존자상과 후불탱화로 독성탱화를 안치하는데, 사찰에 따라 탱화만을 배치하기도 한다.
나반존자는 남인도 천태산에서 홀로 선정을 닦아 나도 이롭게 하고

남도 이롭게 하는 능력을 갖추고 스스로 중생들의 복을 이루는 복밭이 되어,

미륵불이 출현하는 용화세계가 올 때까지 이 세상에 머물러 계시리라 하였다.

그래서 인지 특별히 복을 희구하는 신도들의 경배대상이 되고 있다.

 

산령각 산신은 백발노인으로 묘사되고, 호랑이는 산신의 지시에 따르는 영물로 산신 옆에 배치된다. 
삼신산을 배경으로 손에는 부채나 불로초 등을 들고 대머리에 수염과 긴 눈썹이 휘날리는 모습을 그린 산신탱화를 산신각에 안치한다.

 

 

 

 

표충사 삼층석탑(表忠寺三層石塔) [보물 467호]
표충사 석등(表忠寺 石燈) [지방유형문화재 제14호]

 

표충사 삼층석탑(表忠寺三層石塔) [보물 467호]

 이 탑은 표충사(表忠寺)경내에서 사천왕문(四天王門)을 들어서면 만일루(萬日樓) 앞 마당에 있는데,

기본적인 양식이 신라통일시기의 석탑 유래를 따르고 있는 단층(單層) 기단(基壇)의 3층석탑(삼층석탑)이다.

조선조 숙종 3년(1677년)에 작성된 (영정사고적기(靈井寺古蹟記))에 의하면

현재의 표충사가 신라 흥덕왕 4년(829년)에 인도의 황면선사(黃面禪師)가 창건 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탑의 조성연대도 이 시기로 추정하고 있다.



기단(基壇)의 형식은 단층(單層)이나 7매(枚)의 두꺼운 판석(板石)으로 된 지대석(地臺石) 위에

24CM 정도의 제법 높은 2단의 각형 받침이 마련되고

그 위에 기단부(基壇部)를 형성하므로써 상하층 기단의 효과를 살리고 있으며

탑신부(塔身部)는 옥신(屋身)과 옥개석(屋蓋石)이 각각 한 개씩의 돌로 되어 있다.

 

옥신(屋身)은 대체로 높은 형태를 보이고 옥개석(屋蓋石)은 첫층부터 차례로 체감되었으며

 추녀밑은 수평(水平)을 이루고 낙수면(落水面)은 우아한 경사를 이루었다.

옥개석(屋蓋石)의 머리에는 풍경(風磬)을 달아 운치를 살렸고, 상륜부(相輪部)에는 1M 남짓한 찰주(刹柱)가 아직도 남아있고

노반(露盤), 복발(覆鉢), 앙화(仰花), 보륜(寶輪), 보개(寶蓋), 수연(水煙)등이 있으나

그 가운데는 뒤에 보수(補修)된 흔적도 남아 있다.

이 탑(塔) 옆에는 석등(石燈)도 1기(基)가 서 있으나 본래부터 있었던 것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영각(左)과 응진전(右)

 

영각

대광전 북서쪽 만일루 옆에 위치한 영각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내부에는 근래에 조성된 아미타후불탱과 함께 표충사를 빛낸 역대 조사스님들과 중창주들의   영정이 봉안되어 있다.

이들 영정은 모두 22점으로 표충사(表忠祠)에 봉안되어 있는 사명대사ㆍ서산대사ㆍ기허대사의 영정과 

모두 경상남도유형문화재 제268호로 지정되어 있다.

 

응진전

부처에게는 16명의 뛰어난 제자들이 있어 이들을 16나한이라 한다.

부처님의 제자인 나한을 모신 법당이다.

나한은 아라한(阿羅漢)의 약칭으로 그 뜻은 성자(聖者)이다.

아라한은 공양을 받을 자격[應供]을 갖추고 진리로 사람들을 충분히 이끌 수 있는 능력[應眞]을 갖춘 사람들.

나한전을 응진전이라고도 한다.

 

 

 

 응진전옆에 위치한  영정낙수

표충사의 옛이름 영정사에서 비롯되어 이름을 새긴 공양수라 생각된다.

 

 

 

만일루와 영각

 

표충사 만일루(表忠寺 萬日樓)[지방문화재 제142호]

 

 

표충사 만일루(表忠寺 萬日樓)[지방문화재 제142호]

 표충사(表忠寺)경내 서북편에 있는 만일루(萬日樓)는

 H자형의 독특한 구조의 건축물로서 철종 11년(1860년)에 이 절의 방장(方丈)인 월암상인(月庵上人)이

그의 조실(祖室)인 혜원법사(慧遠法師)의 유풍을 떨치고자 발심(發心)하여

만일(萬日)의 기도 끝에 이룩한 건물인데,

불교의 48원(願)을 표증(表證)하는 48칸의 선실(禪室)을 108번뇌(煩惱)를 상징하는108평(坪)의 부지에 지어

처음에는 동림고사(東林古社))라고 이름하였다.



이 전각(殿閣)은 아미타불(阿彌陀佛)을 봉안하고 중생(衆生)을 구제하고자 사부대중이 만일회(萬日會)를 결성하여 정진하기도 하였던 곳으로,

정화 이후에는 무량수각(無量壽閣) 또는 서래각(西來閣)이란 이름으로 편액(扁額)되어 선방(禪房)으로 사용되었다.

이 건물의 중건을 계기로 경내 칠성전(七星殿) 뒷편의 요사(寮舍)와 고방(庫房)을 비롯한 부속 설비를 일제히 정비하고

 사찰의 면모를 일신하여 "영남제일선원(嶺南第一禪院)"이란 현판을 새로 걸게 되었다.

1926년 큰 화재로 인하여 소실(燒失) 되었다가,

1929년에 중건되었으며 대한불교 조계종(曺溪宗) 통합종단의 초대 종정(宗正)을 역임하고

 수행과 자비 교화로서 일생을 보낸 효봉대종사(曉峰大宗師)께서 말년을 보내시다가

1963년 열반(涅槃)하신 곳이기도 하다. 현재의 건물은 1992년에 보수된 것이다.

 

 

 

 

 

(만일루 맞은 편의 요사채 풍경)

많은 사람들이 들고 날고....

수행을 하기에는 많은 인내가 필요하리라.

사람들의 출입을 삼가하는 스님의 처소들

들어가지는 못하지만 스님의 그림자만 느껴져도 불자는 막연히 궁금하고 그립다.

 

 

 

사천왕문 옆 종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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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충사를 찾아온 사람들의 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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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하지 않게 갑작스런 방문으로

머나먼 남쪽 밀양의 표충사에서 불전을 돌아보았다.

사찰의 이곳저곳 자료를 찍기 위해 바쁘게 돌아다니다보니

정갈하게 앉아서 기도다운 기도를 하지못하고 일주문을 나선다.

언제나 쫓기듯 바쁘게 돌아보는 사찰기행

사찰의 자료를 여기저기서 퍼다가 사진과 끼워 맞추면서

이것이 진정 불자의 모습인가...싶다.

마음이 부처님을 얻지 못하고

겉으로 보이는 모습을 얻기위해 욕심을 내고 분주했던 내모습이 조금은 우스꽝스럽기도 하다.

언젠가...이많은 자료를 찾았던 사찰들을 다시금 돌아보며

차분히 부처님의 문간에 기대어 앉으리라.

 

 

2015.11.29.표충사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