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 한쪽 비워둔다면

photostory-寺

2015.11.7. 강화 전등사 (傳燈寺 )

kyeong~ 2015. 11. 7. 04:02

 

 

가을비 예보가 있었다

교동 화개산에 올라 멀리 북녁땅을 바라보며

몇년전 실제 가보았던 북한의 기억을 되살려도 보고

교동 대룡시장의 낡은 건물 사이로  과거의 시간을 걸어보려했었다.

행복하고 환희에 찬 길을 걷는 것도 좋지만

갈 수 없는 곳에 대한 막연한 그리움과

과거의 시간 속을 체험해보는 것도 좋을 것같아

교동땅을 걸어보려 했었다. 

 

그렇게 바라보다....산아래로 내려와

바다를 따라 손잡고 걸으면 좋을 것 같은 갈대밭 길을 

차분히 걸어보려 했었다. 

 

하지만..

비오는 날은 시야가 좋지 않아

 북녁땅을 바라보는 것도

 갈대숲도....

모두가 엉망이 될 것 같아서 고삐를 돌렸다.

 

마침 강화의 지인이 k2방송에서 이색펜션 촬영을 하는데

순무김치와 손두부, 인절미를 만드는데 일손이 필요하단다.

친구들의 협조로 촬영에 인터뷰도 해주고 이것저것 방송을 위한 체험을 했지만

4분정도 방송분량이 생각보다 긴 시간의 촬영이다...

 

그래도 교동이라는 제목으로 길을 나섰는데

어느 한 곳에서라도 만추의 길을 걸어보고 싶었다....

잠시 전등사에라도 다녀와야겠다 싶어

일손을 툭툭 털고 전등사로 향했다.

 

 

 (*비 때문에 사진의 화질이 엉망이지만 이렇게 걸었던 시간이 그리울것 같아 편집해 봅니다)

 

  

전등사 傳燈寺

傳燈寺

대한불교조계종 제1교구 본사인 조계사의 말사이다.

381년 아도화상이 창건한 절로, 창건 당시에는 진종사라고 했으나

1282년 충렬왕의 비인 정화공주가 승려 인기를 중국 송나라에 보내 대장경을 가져오게 하고,

이 대장경과 함께 옥등을 이 절에 헌납한 후로 전등사라 불렀다고 한다.

1605, 1614년에 일어난 화재로 건물들이 완전히 소실되었고,

그 다음해 4월부터 재건하기 시작해 1621년 2월 완성되었다.

1707년 사각을 고쳐 짓고 별관인 취향당을 지었으며, 그뒤 여러 차례에 걸쳐 중수되었다.
경내에는 대웅전(보물 제178호)·약사전(보물 제179호)·명부전·삼성각·향로각·적묵당·범종각 등이 있다.

중요문화재로는 중국 북송시대의 범종(보물 제393호)과 조선시대의 법화경판(1544)이 전해지고 있다.

 

  

 

 


1 대웅전 6 향로전 11 남문 16 정행당 21 고려가궐지
2 강설당 7 극락암 12 종각 17 죽림다원 22 관해암
3 명부전 8 적묵당,종무소 13 양헌수비 18 삼랑성 23 설법전
4 약사전 9 대조루 14 동문 19 부도전 24 요사채
5 삼성각 10 종루 15 화장실 20 정족사고 25 취향당

 

 


 

 

단풍잎이 곱게 반기는 전등사 경내로 들어가 봅니다.

 

3시가 넘어선 전등사 입구

가을비가 제법 내리는 날임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제법 많다

길에는 오색의 단풍이 곱게 떨어져 있고

우산을 쓰고 천천히 전등사로 향했다.

 

 

비에 젖어도 어여쁜 낙엽

계단을 밟고 오르기 민망하다.

 

젖어서 날지 못하고 곱게 곱게 계단아래 숨죽인 단풍들....

 

 

정족산성 밖의 요사채풍경

 

삼랑성 동문

삼랑성(정족산성)에는 본래 동서남북 네 군데에 출입문이 있었다.

그 중 지금까지 이용되는 것은 동문과 남문이며 전등사 사거리에서 전등사로 진입할 때 가장 먼저 보이는 문이다.

 전등사에는 여느 사찰과는 달리 일주문이나 불이문이 없다.

 그 대신 호국의 상징이었던 삼랑성 동문과 남문이 일주문 구실을 하고 있다.

동문 안쪽에는 양헌수 장군의 승전비가 세워져 있다.

 

 비가 오고

시간이 넉넉치 못하여

정족산성을 한바퀴 돌아보는 것은 생략하고

곧바로 전등사를 향해 걸었다.

프랑스군의 침략시 중요한 역활를 하였던 곳

이 정족산성에 대해서는 다시 한번 찾아와 자료를 찍어볼 요량이다.

 

 

정족산성의 역사적 배경

 

흥선대원군은 1866년 정초부터 천주교 금압령(禁壓令)을 내렸다.
이후 몇 개월 동안 프랑스 선교사 12명 가운데 9명을 비롯하여 남종삼(南鍾三)·정의배(丁義培) 등

한국인 천주교도 8천여 명이 학살되었다.

그해 5월 조선을 탈출한 펠릭스 클레르 리델(Felix Clair Ridel) 신부는,
중국 톈진[天津]에 주둔한 프랑스 인도차이나함대 사령관 피에르 로즈(Pierre Roze) 제독에게

한국에서 일어난 천주교도 학살사건을 알렸다.
보고를 받은 베이징[北京] 주재 프랑스 대리공사는 청국정부에 공한(公翰)을 보내어 한반도로 진격할 결심을 표명하고,
이후 어떠한 사태가 발생하든 청국정부는 이에 간섭할 수 없다고 통고하였다.
청국 총리아문사무(總理衙門事務)의 공한을 통해 프랑스 동태를 알게된 대원군은

천주교도에 대한 탄압과 변경(邊境) 수비를 강화했다.

 

9월 18일 리델 신부와 한국인 신도 3명의 안내로 로즈 제독이 인솔한 프랑스군함 3척은 인천 앞바다를 거쳐

양화진(楊花津)을 통과하여, 서울 근교 서강(西江)에까지 이르렀다. 극도로 긴장한 조정에서는,
어영중군(御營中軍) 이용희(李容熙)에게 표하군(標下軍) ·훈국마보군(訓局馬步軍)을 거느려

경인연안을 엄중 경비하도록 하였다.
그러자 프랑스 함대는 9월 25일 강류(江流) ·연변만 측량하고 중국으로 퇴거하였다.

그러나 10월 로즈 제독은 순양전함(巡洋戰艦) 게리에르를 비롯,
모두 함대 7척과 600명의 해병대를 이끌고 부평부(富平府) 물치도(勿淄島:芍藥島)에 나타났다.
10월 14일 이 중 4척 함정과 해병대가 강화부(江華府) 갑곶진(甲串津) 진해문(鎭海門) 부근의 고지를 점거하였다.
프랑스군은 한강수로의 봉쇄를 선언하고, 16일 전군이 강화성을 공격하여 교전 끝에 이를 점령하고,

무기 ·서적 ·양식 등을 약탈하였다.

조선은 이경하(李景夏) ·신헌(申櫶:申觀浩) ·이기조(李基祖) ·이용희 ·한성근(韓聖根) ·양헌수(梁憲洙) 등 무장들에게
서울을 위시하여 양화진 ·통진(通津) ·문수산성(文殊山城) ·정족산성(鼎足山城) 등을 수비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19일 프랑스측에게 격문(檄文)을 보내 선교사 처단의 합법성과 프랑스함대의 불법 침범을 들어 퇴거할 것을 통고하였다.
로즈는 회답을 통하여 선교사 학살을 극구 비난하고, 그 책임자를 엄벌할 것과, 전권대신을 파견하여

자기와 조약의 초안을 작성하라고 맞섰다.
10월 26일 프랑스군 약 120명은 문수산성을 정찰하려다 미리 잠복, 대기중인 한성근의 소부대에게 27명이 사상되는 등

처음으로 막대한 인명손실을 입었다.
이로부터 민가 ·군영을 가리지 않고 무차별 포격을 가했으며, 이러한 만행은 황해도 연안(延安)에까지 미쳤다.

 

11월 7일 올리비에 대령이 이끄는 프랑스 해병 160명은 정족산성을 공략하려다가
잠복하고 있던 500여명의 조선군 사수들에게 일제히 사격을 받아 큰 손실을 입고 간신히 갑곶으로 패주하였다.
정족산성 전투의 참패는 프랑스군의 사기를 저하시켰고, 결국 로즈 제독은 철수를 결정하였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정족산성 수성장(守城將)인 양헌수가 그해 11월 9일에 “저들은 죽은 자가 6명이고

아군은 죽은 자는 1명입니다”라고 보고하고,
 다시 11월 11일에는 “6명의 적들이 남문 밖에서 죽은 것을 우리 군사들이 목격하였습니다.
어젯밤 촌민(村民)들이 와서는 저놈들이 행군해가면서 또한 죽은 자가 40여 명이나 되었는데
저놈들이 모두 시체를 묶어서 여러 대의 짐바리에 실어갔다고 했습니다.
저놈들이 죽은 수는 50여 명입니다”라고 보고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프랑스 측의 기록에서는 당시 전투에서 3명이 죽고, 35명이 부상을 입었다고 되어 있다.

11월 11일 프랑스군은 1개월 동안 점거한 강화성을 철거하면서,
장녕전(長寧殿) 등 모든 관아에 불을 지르고 앞서 약탈한 은금괴와 대량의 서적 ·무기 ·보물 등을 가지고 중국으로 떠났다.
이로써 세계정세에 어두운 대원군은 그 기세를 돋우어,
척화비(斥和碑)를 만드는 등 쇄국양이(鎖國攘夷) 정책을 더욱 굳히고, 천주교 박해에도 박차를 가하였다.

그러나 구미열강은 이를 계기로 조선을 청국의 종속국가가 아닌 독립한 주권국가로 인식하여,

종래의 한 ·청 관계를 재검토하였다.
프랑스군이 탈취한 많은 서적 ·자료 등은, 뒷날 유럽사람들이 한국 ·동양을 연구하는 데 사용되었다.

 

 

 

정족산성으로 가는 길에는 장군처럼 노송이 버티고 있다.

 

 

산성를 따라 이 아름다운길을 한바퀴 돌아야 하는데 너무 아쉽다..

 

 

노란 애기단풍

 

비가 오는 바람에

사진은 제대로 찍지 못했지만

분위기는 좋다.

빗소리가 가슴깊이 들려온다.

 

 

 

 

 

 

색이 고운 은행잎인데

비가 오는 바람에 사진이 너무 엉망이다.

그렇지만 가을강에 풍덩 빠진듯이 깊이 스며들었던 가을 냄새를 잊울수가 없어서...

그냥 기록에 남기기로 했다.

 

 

윤장대

전등사 윤장대는 보물 제684호를 재현한 것으로

부처님 법이 사방에 널리 퍼지는 가운데 우리나라의 자세를 고르게 하여 난리가 없고

비바람이 순조로워 풍년이 들고 태평성대를 이루어 달라는 염원이 들어 있다.

 

윤장대를 한번 돌리면 경전을 한번 읽은것과 같은 공덕이 쌓인다고 하는데

멈추어있는듯합니다.

비가와서 돌려보지 못하고 그냥 갑니다

모든게 비탓...

 

[

죽림다원

 

이곳에서 만나는 사람이면

누구라도 참 좋은 인연입니다

다원에 앉아 따듯한 찾잔 감싸쥐고 마주보면

누구라도 따듯한 정이 오고 갈것 같아요

 

절간보다 여기저기 떨어져 있는 낙엽에게 더 정이갑니다

불경을 들으며 세월을 보낸 낙엽이라....

 

 

법당으로 오르는 계단

대명루를 통해서 경내로 들어섭니다.

 

 

대명루옆의 단풍나무에 마음을 한번주고....

 

 

대명루로 오르는 계단에서 바라본 범종루

 

 

전등사 대웅보전 보물 제178

 

보물 제178호로 지정된 대웅보전은 규모는 작지만

단정한 결구에 정교한 조각 장식으로 꾸며져서 조선중기 건축물로서는 으뜸으로 손꼽힌다.

특히, 건물 내부 불단위에 꾸며진 닫집의 화려하고 정치한 아름다움은 건축공예의 극치를 이루고 있다.

보마다 용틀임으로 장식되면서 용두가 네 귀퉁이에서 돌출해 나오며 천장 주변으로는 연, 모란, 당초가 화려하게 양각되고

중앙 우물 반자 안에는 보상화문이 가득 채워져 있다.

더욱 희귀한 것은 물고기를 천장에 양각해 놓아 마치 용궁인 듯한 착각을 일으키게 한다.

닫집 왼쪽 천장에는 양쪽에 용두장식을 하고

몸체에 용틀임을 한 작은 용가(龍架)의 배 부분에 아홉 개의 방울을 달아 놓고 끈을 달아 불단까지 늘여놓아

이를 잡아 흔들면 아홉 개의 방울이 동시에 울어 구룡토음의 장관을 이루게 했던 적도 있었다.


내부에 있는 유물로는 석가여래 삼존과 1880년에 그린 후불탱화,

1544년 정수사에서 개판한<법화경>목판 104매가 보관되어 있다.

현재의 건물은 1621년(광해군 13)에 지은 정면 3칸, 측면 3칸 형식의 목조 건물이다.

정면 3칸은 기둥과 기둥 사이를 같은 길이로 나누어 빗살문을 단 형식이다.

좌우 옆면은 벽이나 앞 1칸에만 외짝으로 문이 있다. 기둥은 대체로 굵은 편이며 모퉁이 기둥은 높이를 약간 높여서 처마 끝이 들리도록 했다.
대웅보전의 외관상 특징은 우선 비슷한 시기의 다른 건물에 비해 약간의 변화를 보여 주고 있다는 점이다.

곡선이 심한 지붕과 화려한 장식(나부상, 동물 조각, 연꽃 조각 등)이 그런 특징을 잘 보여 준다.

 

 

대웅보전 내부

건물 내부 불단위에 꾸며진 닫집의 화려하고 정치한 아름다움은 건축공예의 극치를 이루고 있다.

보마다 용틀임으로 장식되면서 용두가 네 귀퉁이에서 돌출해 나오며 천장 주변으로는 연, 모란, 당초가 화려하게 양각되고

중앙 우물 반자 안에는 보상화문이 가득 채워져 있다.

더욱 희귀한 것은 물고기를 천장에 양각해 놓아 마치 용궁인 듯한 착각을 일으키게 한다.

닫집 왼쪽 천장에는 양쪽에 용두장식을 하고

몸체에 용틀임을 한 작은 용가(龍架)의 배 부분에 아홉 개의 방울을 달아 놓고 끈을 달아 불단까지 늘여놓아

이를 잡아 흔들면 아홉 개의 방울이 동시에 울어 구룡토음의 장관을 이루게 했던 적도 있었다.


내부에 있는 유물로는 석가여래 삼존과 1880년에 그린 후불탱화,

1544년 정수사에서 개판한<법화경>목판 104매가 보관되어 있다.

흑~ 오늘의 사진은 모두 이모양인지...

대웅보전 지붕밑의 나부상

 

네모서리 기둥 윗부분에는 벌거벗은 여인상을 조각하였다.

전설에 의하면 이것은 절을 짓던 목수의 사랑을 배반하고 도망친 여인을 조각한것으로

나쁜짓을 경고하고 죄를 씻게 하기위해 추녀를 받치게 하였다고 한다.

( 네 모서리의 나부상 모습또한 모양이 다 다르다 )

 

전등사 

 

      - 고 은

 

강화 전등사는

거기 잘 있사옵니다

옛날 도편수께서

딴 사내와 달아난

온수리 술집 애인을 새겨

냅다 대웅전 추녀 끝에 새겨 놓고

네 이년 세세생생

이렇게 벌 받으라고 한

그 저주가

어느덧 하이얀 사랑으로 바뀌어

흐드러진 갈대꽃 바람 가운데

까르르

까르르

서로 웃어대는 사랑으로 바뀌어

거기 잘 있사옵니다

 

시인 고은 선생은 효봉스님의 제자로 출가를 하였고 해인사에서 4.19를 거쳐

속리산 법주사 주지로 임명을 받고 법주사를 전등사 주지와 교환하여 전등사 주지를 역임(1967년)하셨다 한다.

 

추녀밑의 나부상을 형상화한듯한 ...목각상

 

 

절집에 들면

잠시 눈을 감고 풍경소리를 꼭 듣고 가시라

바람이 없는 날에는

풍경소리가 없는 날에는

고요를 느끼고 가시라

가는 바람에도 소리를 내는 저 풍경소리

눈을 감고 잠시 극락으로 들어가 봅니다.

 

대웅보전 옆으로  보이는 강설당

 

강설당은 스님들이 경전을 공부하던 건물이다.

한때 강설당은 전등사 승가대학 건물로 쓰였으나 지금은 복원되어 불교대학과정 건물로 사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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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웅전에서 바라본 범종각과 고목

 

 

 

범종각을 빗사이로 좀더 당겨서 찍어보았지만 흐리다.

 

범종각

전등사에는 보물 제393호로 지정된 전등사 범종과 근래에 만들어진 범종 등 두 개의 종이 있다.

 이 두 범종을 보관하기 위해 종각과 종루로 이름을 달리하여 두 개의 범종각을 세웠다.

현재 대조루 옆의 종루에는 보물로 지정된 범종이 있었으나

 2004년에 명부전 앞의 종각으로 옮기고

지금은 일반 범종이 보관돼 있으며 조석 예불 때 사용된다.

 

 

명부전(左), 약사전(中)과 향로전(右)

 

향로전은

법당을 관리하던 사람들이 살던 곳으로 조선 시대에는 상궁이나 나인들이 기도하던 곳으로 쓰이기도 했다.

지금은 상임법사실로 쓰고 있다.

 

 

 

보물 제179호로 지정된 약사전은

대웅보전 서쪽에 위치하는 건물로 대웅보전과 거의 같은 양식의 건물이다.
조선 중기 다포계열의 정면 3칸, 측면 3칸 단층 팔작지붕 건물이다.

장대석 기단 위에 막돌 초석을 놓고 약한 배흘림이 있는 기둥을 설치하였으며,

정면 각 기둥 위에는 공포를 배열하고, 기둥과 기둥 사이에는 공간포(기둥과 기둥 사이에 위치하고 있는 공포)를 설치하였다.
내부 천장은 중앙 부분에 우물천장을 두고 주위에는 빗천장을 만들었으며,

 거기에 돌아가면서 화려한 연화당초문을 그려 놓았다.

 대웅보전과 함께 지붕을 수리했다는 기록 말고는 다른 기록이 없어 정확한 창건 연대는 알 수 없다.

건물의 겉모습이나 내부 장식도 대웅보전과 비슷하다.

고려 말기나 조선 초기에 석조로 조성한 약사여래상을 모시고 있다. 이 약사여래불은 최근 금박으로 개금되어 있다.

 

 

 

 

 

 

 

명부전

명부전에는 부처님 원력으로 극락왕생을 기원하며, 제사의 공덕으로 극락을 가라는 정성어린 마음이 담겨 있다.

 

 

 

명부전 내부

명부전에는 지장보살상을 비롯해, 시왕·귀왕 등 모두 29존상이 모셔져 있다.

대개 명부전은 지장전으로 부르기도 하는데 죽은 이를 재판하는 시왕이 있는 곳은 명부전,

지장보살을 모셨을 경우에는 지장전이라고 부른다.

 

이 전각은 죽은 사람들이 49일이 지나 재판을 받을 때까지 그들의 넋을 위해 치성을 드리는 곳이다.
지장보살은 모든 중생이 극락을 가기 전까지는 결코 성불하지 않겠노라는 원을 세운 보살이다.

그래서 지장보살은 녹색의 머리를 깎고 주장자를 짚은 채 지옥 문 앞에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다.
이처럼 명부전에는 부처님 원력으로 극락왕생을 기원하며, 제사의 공덕으로 극락을 가라는 정성어린 마음이 담겨 있다.

 

 

삼성각으로 가는 길에 수문장처럼 노송이 허리굽혀 우중길손을 맞이한다.

 

삼성각

삼성각은 산신, 독성(나반존자), 칠성 등 삼성(三聖)을 모신 건물이다.

본래 삼성은 중국의 도가 사상과 관련이 있는 성인들이지만 이 땅에 불교가 전래하면서 불교 사상과 융합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삼성각내부

 

 

삼성각에서 삼배를 하고 걸어나와

정족사고로 가는 길

 

 

사찰뒷길이라 호젓하다

일행과 떨어져 혼자 걸어가는 길

나무에 걸어둔 법구경이 눈에 들어온다.

 

 

정족사고

사고란 고려 및 조선시대에 나라의 역사 기록과 중요한 서적 및 문서를 보관한 전각을 일컫는 말이다.
옛 선조들은 특히 사고 안에 따로 역대 왕조실록을 보관한 곳을 사각(史閣)이라 해서 그 보존에 힘을 썼다.

실록이 처음으로 사찰에 보관되었던 것은 고려 때인 1227년(고종 14)의 일이다.

이때 고려 왕실에서는 합천 해인사에 사고를 마련하여 실록을 보관하였다.

조선시대에는 궁궐의 춘추관과 충청도 충주, 경상도 성주, 전라도 전주에 사고를 설치했다.

이것으로 춘추관 외에 이들 충주·성주·전주의 사고를 3대 사고라 해서 여기에 역대 실록을 분산 보관하였다.

그러나 임진왜란으로 춘추관과 충주 및 성주의 사고가 소실된 반면

 전주의 사고만 유일하게 보존되어 그곳의 실록 등을 한때 내장산으로 옮겼다.


1606년(선조 39), 명종까지의 실록이 여러 벌 복원되자 묘향산에 사고를 설치하여 전주 사고본을 옮겼다.

 또한 오대산, 태백산, 적상산에도 사고를 마련하여 새로 간행한 실록을 보관하였다.

1628년(인조 6), 조정에서는 강화 마니산에 새로 사고를 설치하여 묘향산 사고에 보관했던 전주본을 옮겼다가,

1660년(현종 1) 강화 정족산에 사고를 마련하여 마니산 사고에 있던 전주본을 이곳에 비장하였다.


이처럼 실록 등 국가의 귀중한 사서는 소실 등의 피해를 막기 위해 중앙과 지방에 분산하여 보관했다.

그러다 구한말인 1908년, 정족·태백·오대·적상산 등 4대 사고의 장서들은 규장각의 관할 하에 두었다.
이렇게 보면 세계문화유산인 조선왕조실록도 수난을 많이 겪은 셈이다.

 

그러나 역사의 기록과 교훈을 생명처럼 여겼던 우리 선조들의 지혜와 정성은

오늘날까지 한민족의 문화적 역량을 한껏 보여주고 있다.
본래의 정족산 사고는 1931년 무렵 주춧돌과 계단석만 남긴 채 없어졌다.

다만 사고에 걸려 있던 ‘장사각’과 ‘선원보각’이라는 현판만 전등사에 보존되어 있어 당시의 실상을 알려주고 있다.

폐허가 되었던 장사각 건물은 1999년 복원되어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조선왕조실록은 한 왕조의 역사적 기록으로는 가장 긴 시간에 걸쳐서 작성되었고,

가장 풍부하면서도 엄밀한 기록을 담고 있다.

또한 국왕에서부터 서민에 이르기까지 조선인들의 일상적인 생활상을 자세히 보여 주며,

세계에서 유일하게 활자로 인쇄되었고,

보관과 관리에도 만전을 기했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에 따라 조선왕조실록은 1973년 12월 31일에 국보 제151호로 지정되었고,

1997년 10월 1일에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록되었다.

 

 

한때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했었던 정족사고로 들어가본다.

 

 

장사각과 선원보각

본래의 정족산 사고는 1931년 무렵 주춧돌과 계단석만 남긴 채 없어졌다.

다만 사고에 걸려 있던 ‘장사각’과 ‘선원보각’이라는 현판만 전등사에 보존되어 있어 당시의 실상을 알려주고 있다.

폐허가 되었던 장사각 건물은 1999년 복원되어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복원된 선원보각

 

 

 

조선역사의 기록이 잠시 숨을 쉬었던 정족사고...

몰랐던 이야기를 알고나니 떠나기 싫다

귀중한 숨결이 머물다 간 곳

비가 오지 않았다면 이자리에서 좀더 앉았다가 왔을것이다.

 

 

적각들 사이로 이리저리 나있는 길들 찾아 발걸음 옮겨본다

어디를 가더라도 바닥에는 낙엽의 느낌이 극치의 분위기를 전해준다.

 

 

단풍나무사이로 자욱한 안개비

그속에 내가 있음이 이리 좋을 줄이야

 

 

돌아가신 분의 명복을 비는 일을 하는 곳인가보다

백련등이 걸려 있고 굴뚝에  불보살이 조각되어있다.

 

 

가을에 취해

비에 취해

오색의 단풍에 취해

내가 흔들렸나보다...

사진이 뿌옇다.

 

 

극락전

명부전과 종각 사이의 계단을 오르면 아담한 전각이 세워져 있다.

비교적 근래에 세워진 극락암 건물은 전등사 조실이었던 서운 큰스님과 상묵 큰스님이 열반할 때까지 머무신 곳이다.

 

내부를 살피지 못했다

친구들과 떨어져 살피다보니

갑자기 그들이 어딨는지게 급해져서 그만 내부를 살피는 일을 잊어버렸다.

 

 

극락전앞의 석상

 

종각

보물 제393호로 지정된 전등사 범종이 보관된 전각이다.

본래 이 범종은 대조루 옆 종루에 보관된 것이었으나 2004년에 적묵당 옆 종각으로 옮겼다.

 

 

 

 

 

종각앞 고목나무

세월이 흘러거 고목이 되었다

누군가 어설픈 조각을 해두었다..

그냥.. 고목인체로 두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적묵당은 스님들이 참선하던 선원이었다.

지금은 스님들의 숙소와 종무소로 사용되고 있다.

 

 

스님들이 참선하는 선원, 

 

이리저리 좁은 길을 따라 비를 따라 걷다보니

다시 대웅전 앞마당의 노거수 앞으로 왔다.

 

보호수로 지정된 이 느티나무는 수령이 200년 훨씬 넘었다.

둘레가 무려 3.7m    수고는21m이다.

 

 

전등사 전경

 

 

느티나무와 대웅보전

 

전등사와 향로전

 

 

 

 

 

비오는 날 이색펜션의 출연촬영을 찍다말고

번갯불에 콩궈먹듯이 둘러본 전등사

몇번을 와보아도 고찰이란 곳은  

사람을  편안하게 하고 오래 머물고 싶게하는 마력이 있다.

 

빗속에서도 붉디 붉게 물들고 있는 만추의 풍경

돌아와 정리를 하면서도 그날의 느낌을 잊을수가 없다.

저 붉음이 가슴이 팔딱거리게 하지 않고

빗속에서  마음을 가라앉히며 다가서는 것은 처음이었다.

 

어쩌면 이나이가 되고나니

붉음이 곧 이별이라는 숙명을 알고 있어서

마음은 비오듯 젖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사진이 엉망이고

답사도 대충 스치듯하여 미진한 마음으로 편집을 하지만

그래도 스치듯 지나친 그날이 아쉬워 다시 찾지 않을까 싶다.

2015.11.7.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