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 한쪽 비워둔다면

photostory-寺

2017.4.23.일. 김제 금산사

kyeong~ 2017. 4. 23. 12:00




금산사金山寺


063-548-4441


<다음백과발췌>

대한불교조계종 제17교구의 본사이다. 1635년에 기록된 〈금산사사적 金山寺事蹟〉에 의하면 600년(백제 법왕 2)에 창건되었다고 전한다.

1492년에 씌어진 〈금산사5층석탑중창기〉에 의하면 과거불인 가섭불 때의 절터를 중흥한 것이라 하여 오랜 불연(佛緣)이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여러 기록을 종합해 보면 금산사는 신라 경덕왕 때인 762년에서 766년 사이에 진표율사(眞表律師)에 의해 중창되어 대찰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으며

이후로 법상종의 근본도량이 되었다. 진표 이후에 후백제 견훤에 의해 부분적인 보수가 이루어졌다고 하나 확실치 않다.

고려초 1079년에 법상종의 대종사(大宗師)인 혜덕(慧德)왕사가 주지로 부임해 간경·법석(法席)을 주관하는 장소인 광교원(廣敎院)을 설립하는 등

창건 이래 가장 큰 규모의 도량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현존하는 석연대(石蓮臺)·5층석탑·노주 등이 이때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1598년 정유재란 때 왜병의 방화로 모든 암자와 건물 40여 채가 불타버렸으나 1601년(선조 34) 수문대사(守文大師)가 재건을 시작하여 1635년 완공했다.

조선 고종 때 미륵전(彌勒殿)·대장전(大藏殿)·대적광전 등을 보수하고 1934년 대적광전·금강문·미륵전 등을 보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86년 다시 화재로 대적광전이 소실되었으며 현재 복원을 계획하고 있다. 지금 절에 남아 있는 유물·유적은 석조물을 제외하고는 모두 임진왜란 이후의 조형물이다.

문화재로 지정된 중요 석조유물은 노주(보물 제22호)·혜덕왕사진응탑비(慧德王師眞應塔碑 : 보물 제24호)·5층석탑(보물 제25호)·석종(石鐘 : 보물 제26호)·6각다층석탑(보물 제27호)·당간지주(幢竿支柱 : 보물 제28호) 등이 있다. 또한 미륵전(국보 제62호)·대적광전이 있었고, 그밖에 대장전·명부전(冥府殿)·나한전·일주문·금강문·보제루(普濟樓)·종각·중향각·칠성각 등의 건물과 수계(受戒)의식을 행하는 방등계단(方等戒壇)이 자리잡고 있다.




금산사 창건<금산사 홈페이지 발췌>

조선 성종 23년(1492)에 작성된 "금산사 5층석탑 중창기"에 의하면,

금산사는 이미 석가모니 부처님 이전의 가섭불 때에 있었던 옛 절터를 다시 중창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는 금산사의 터전이 오래 전부터 부처님과 인연이 깊었던 것임을 알수 있게 한다.
흔히 통일신라 시기 진표율사에 의하여 창건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엄밀히 따지면 그는 중창자이지 창건주는 아니다.
왜냐하면 "삼국유사"를 비롯한 기록에 의하면, 진표율사는 금산사의 순제법사에게 출가한 것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진표율사 이전에 이미 금산사가 창건되었음을 알게 한다.


남아있는 "금산사사적"의 기록에 의하여 금산사가 백제 법왕 1년인 599년에 창건되었음을 알수 있다.
이후 금산사의 모습이 크게 부각된 것은 통일신라 시기 경덕왕때 진표율사에 의한 중창 때문이다.
금산사에서 숭제법사의 가르침을 받아 수행을 하던 진표율사는 27세 때에 변산 부사의암(不思議庵)에서 철저한 수행에 전념하였다.

17년 간을 몸을 돌보지 않는 망신참의 고행을 통하여 마침내 미륵보살과 지장보살로부터 간자와 계본을 전해 받게 된다.
이후 진표율사는 금산사로 다시 돌아와 금산사의 중창불사를 발원하고, 경덕왕과 왕실의 후원을 받아 6년에 걸쳐 가람을 대규모로 일으켜 세웠다.

이 때가 경덕왕 21년인 762년부터 혜공왕 2년인 766년에 이르는 기간이었다.


금산사의 창건과 관련하여 "금산사사적"의 내용을 근거로 불 때 599년 백제 법왕의 자복사찰로 창건되었으며,

이 후 진표율사에 의한 6년여의 중창으로 사찰다운 모습을 갖추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금산사가 미륵신앙의 성지로 자리 메김 한 것은 진표율사 때부터이다



금산사의 문화재



①국보 제62호: 미륵전



미륵전은 미래의 부처님인 미륵이 그분의 불국토인 용화세계에서 중생을 교화라는 것을 상징화한 법당이다.

즉 미륵신앙의 근본도량을 사찰 속에 응축시킨 것이 미륵전이요,

 먼 미래의 새로운 부처님 세계에서 함께 성불하자는 것을 다짐하는 참회와 발원의 장소이다.


미륵전은 신라 경덕왕 21년(762)부터 혜공왕 2년(766) 사이에 진표율사가 가람을 중창하면서

미륵보살에게 계를 받았던 체험 그대로를 가람에 적용하여 세웠다.

안에는 미륵장륙상을 본존으로 모셨으며

남쪽 벽에 미륵과 지장보살에게서 계를 받는 광경을 벽화로 조성하였다. 그러나 이 건물은 정유재란 때 소실되었다.



②보물 제 22호 :노주


대적광전 오른쪽에는 독특한 형태의 노주(露柱)가 있다.
노주란 ‘노반지주(露盤之柱)’의 줄임말로서

처음에는 전각의 정면 귀퉁이에 세우는 두 개의 장대였다가

나중에 탑의 상륜부를 구성하는 부재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우리는 탑의 일부인 이 노주가 왜 별도의 조성물로서

만들어졌는지는 알 수가 없다.

사중기록에 보면 ‘노주’는 잘못 된 명칭이고,

‘광명대(光明臺)’로서 미륵전 앞에서 미륵불에게 광명을 공양하던 석등이었다고 한다.

이 말이 맞다고 한다면 지금의 모습은 불을 밝히는 곳인 화사석(火舍石)이 없어진 상태가 된다.
고려시대의 조성기법을 간직하고 온전한 모습으로 남아 있어 보물 제22호로 지정되었다.




③보물 제 23호 :석련대


대적광전에서 동남쪽으로 10여m 떨어진 곳에 석련대(石蓮臺)가 있다.

불상의 대좌로서 정확한 이름은 석조연화대인데,

높이 1.67m, 둘레가 10.3m가 넘는 거대한 작품이다.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대형의 연화대좌인데다가

더욱이 하나의 화강석으로 각 면에 조각한 수법이 정교하고 아름답다.


이 석련대의 위치가 지금의 제자리인지 다른 자리에서 옮겨진 것인지 알 수 없다.

규모가 워낙 거대해서 이동하기에는 무리가 있을 것을 감안한다면 제자리일 가능성이 높다.



④보물 제24호  :혜덕왕사진흥탑비



이 부도군의 3번 부도비가 보물 제24호로 지정된 혜덕왕사진응탑비(慧德王師眞應塔碑)이다.

고려 예종 6년(1111년)에 세운 것이다.
현재 탑비는 귀부와 비신만이 남아 있고 비의 머리부분은 결실되었다.

대리석의 비신은 높이 2.78m, 너비 1.5m로서 심하게 손상되어 비문은 판독하기 어렵다.

그러나 다행히 『해동금석원』등에 그 내용이 전한다.

 비문의 글씨는 약 2cm의 크기로 구양순의 해서체인데 활달하고 쾌적한 멋을 지녔다.


비의 앞면에 43행 77자씩으로 스님의 출생과 교화활동, 입적 등을 적었으며

그 둘레는 당초문으로 장엄했다.
서자(書者)와 찬자(纂者)의 이름은 판독할 수 없고 각자(刻者)의 이름은 밝히지 않았다.

『해동금석원』에 의하면 이오가 짓고 정윤(鄭允)이 썼으며

비음(碑陰)은 채추탄(菜推誕)이 쓴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조선금속고』에서는 비음을 채추탄이 쓴 것으로 밝히고 있다.

귀부는 방형의 지대석위에 놓였는데 신체는 장대하나 머리는 작은 편이다.
등에는 육각의 갑문(甲文)을 새기고 등위에 비신을 얹는 삽입부를 마련했다.

역동적인 발과 비늘의 표현이 마치 살아 있는 듯하여 고려시대의 탑비 가운데 우수한 작품임을 알게 한다.




⑤보물 제25호 :오층석탑


미륵전의 북쪽 위 송대에 보물 제25호인 오층석탑이 자리한다.

정사각형 판재를 이용한 이 석탑은 높이가 7.2m로서 소박하고 단순한 구조를 지녔다.

본래 기록에 따르면 9층이라 하였는데 지금 남아있는 옥개석의 형태나

체감율 등에서 6층 이상이 손실되었음을 알 수 있다.

전설에 따르면 후백제의 견훤(甄萱)이 금산사를 창건하면서 이 석탑을 건립하였을 것이라 하나

이는 잘못된 것이고, 고려시대에 조성되었다는 확실한 기록이 전한다.

즉 1971년 11월에 석탑을 해체 수리하는 과정에서 〈모악산금산사오층석탑중창기〉가 발견되었는데,

그 내용 가운데 979년(경종 4)에 시작하여 981년에 완성했다는 사실이 보인다.

한편 탑 속에서는 중창기와 함께 금동관음상을 비롯한 여러 소불상이 발견되었는데,

이 탑의 복장품은 현재 동국대학교 박물관에 소중하게 보관하고 있다.



⑥보물 제26호 : 방등계단


송대(松臺)라고 부르는 미륵전의 북쪽 높은 대지에 방등계단(方等戒壇)이 있다.

또한 이 계단의 중앙에 보물 제26호인 부도가 1기 있어 그 형태에 따라 석종형(石鐘形) 부도라고 부른다.

방등계단의 수계법회(受戒法會)를 거행할 때 수계단을 중앙에 마련하고,

그 주위에 삼사(三師)와 칠증(七證)이 둘러앉아서 계법을 전수하는데 사용했던 일종의 의식법회 장소이다.

이러한 예는 경상남도 양산의 통도사와 개성의 불일사(佛日寺) 등지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한국 불교의 독특한 유산이다.

불교의 정신을 대표하는 계(戒).정(定).혜(慧) 삼학(三學) 가운데 계는 으뜸으로서

계를 지킴은 불교의 기본 토대가 된다.

이 계의 정신이 일체에 평등하게 미친다는 의미에서 방등계단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한편 방등계단의 성격을 도솔천(兜率天)의 세계를 표현한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

즉 미륵신앙의 근본도량인 금산사에는 미륵의 하생처로서 미륵전을 조성하고,

그 위에 도솔천을 구현하여 미륵상생신앙을 나타냈다는 말이다.

결국 금산사는 미륵상생신앙과 하생신앙을 조화롭게 겸비하였다는 신앙적 성격을 지녔다는 뜻이 된다.

조선조 생육신의 한 사람이었던 김시습(金時習, 1435~1493)이 절을 찾아 이곳 방등계단에서 남긴 시가 한 수 전한다.


⑦보물 제27호 : 육각다층석탑


대적광전 오른쪽 앞마당에 위치하며 보물 제27호이다.

탑의 재질이 흑색의 점판암으로 된 특이한 경우인데,

완전한 모습은 아니지만 정교하면서도 우아한 공예적 석탑이다.

 본래의 자리는 봉천원구가 있던 대웅대광명전의 앞마당에 있었다.

봉천원구는 혜덕왕사가 1079년(문종 33)에 절의 주지로 있으면서 창건했으므로

탑도 이 무렵에 조성된 것이라 생각된다.

그 뒤 조선시대에 들어와 정유재란으로 봉천원구가 모두 소실되자 수문대사가 대사구,

곧 지금의 금산사를 중창하면서 지금의 자리로 탑을 옮겨왔다.

이 탑은 신라시대의 일반적 석탑에서 고려시대의 화력하고 장식적 공예탑으로 넘어가는 초기의 작품이다.

완전한 모습은 아니지만 각 층의 체감비례가 적절하고,

옥개석의 조각이 섬세한 점 등이 이후 고려시대의 공예탑이 지니는 초기적 수법을 간직하고 있다.



⑧보물 제28호 : 당간지주




금강문에서 동북쪽으로 50m쯤 떨어진 곳에 보물 제28호로 지정된 당간지주가 있다.

절에 중요한 행사나 법회가 있을 때 깃발을 걸어서 이를 알리는 일종의 안내판이 당간(幢竿)이고,

이를 지탱하는 것이 지주(支柱)이다.
그래서 당간지주는 반드시 절의 입구에 놓이게 마련이다. 장

방형의 계단식 3층 기단과 그 위에 당간을 받치고 있던 간대(竿臺), 지주를 놓던 기단석 등이 잘 남아 있다.

정연한 기단부와 지주의 다양한 조각 등이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당간지주 가운데서 가장 완성된 격식을 갖춘 작품이다.

지주에 세 곳의 홈을 마련한 예는 익산의 미륵사지와 경주 보문리 당간지주에서도 볼 수 있어 같은 조성연대,

곧 8세기의 조성으로 추정된다.

한편 진표율사가 절을 중창한 것이 766년(혜공왕 2)의 일이므로

당간지주의 조성시기를 이 무렵으로 보아도 틀리지 않을 것 같다.





⑨보물 제 29호 :북강삼층석탑


고려시대의 석탑으로 높이 4.65m이며,

전체적으로 신라탑의 전형을 따르고 있으나 옥개석<屋蓋石>이 넓으며

낙수면<落水面>의 경사가 급한 면에서 고려시대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 석탑은 화강암으로 만들어 졌으며 정방형이다.
지대석은 거의 땅에 묻혀 정확한 형태를 알 수 없다.

2층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세우고 처마의 양끝에서의 들림이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고 있다.

상륜부는 노반 1석만 남아 있을 뿐, 다른 부재는 모두 결실되었다.

전체의 형태가 각 부의 체감률이 적은 탓으로 안정감을 잃고 있다.

석재<石材>의 결구<結構>가 규칙성이 없고 각부의 조각이 섬약<纖弱>하다.

심산<深山>에 위치하여 부재가 거의 완전하게 남아있고 시대적 특징을 잘 보여주는 좋은 작품이다.



⑩보물 제 827호: 대장전


미륵전의 정면 서쪽에 앞면과 옆면 각 3칸씩의 다포식 팔작지붕인 대장전(大藏殿)이 자리한다.
대장전은 본래 진표율사가 절을 중창하면서 세워졌다.

미륵전을 짓고 이를 장엄하는 정중목탑(庭中木塔)으로서 가운데에서 우측부분에 위치하였으며

정팔각원당형으로 조성했던 건물이다.


당시의 양식은 탑과 같이 산개형(傘蓋形)의 층옥(層屋)으로서 맨 꼭대기 옥개에는 솥뚜껑 모양의 철개(鐵蓋)를 덮고,

다시 그 위에 불꽃 모양의 석조 보주(寶珠)를 올렸다.

그 뒤 조선시대에 들어와 1635년(인조 13)에 가람을 중창하면서 본래 목탑이었던 것을

지금과 같은 전각의 형태로 변형하면서 대장전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지금의 위치로 이전된 것은 1922의 일이다.

이렇듯 여러 차례 변화가 있었지만 전각 꼭대기에는 복발과 보주 등이 아직 남아

지금도 신라 때의 목탑 양식을 엿볼 수 있게 한다.

삼면의 벽은 모두 10폭의 벽화로 장엄하였는데,

흔히 볼 수 있는 십우도나 극락세계의 장엄 등이 아니라 구체적 인물과 사건이 등장하는 모습이다.

몇 개만 열거하면 ‘오달국사인명창’, ‘저지화상도담’, ‘치계전생담(雉鷄前生譚)’, ‘부설거사도술담(浮雪居士道術譚)’,

‘용파수상행(龍波水上行)’, ‘희운선사행적기(喜運禪師行迹記)’ 등이다.

또한 외벽에도 좌우로 벽화가 그려져 있다.

한편 대장전의 내부 출입문 위에는 1974년 건물을 중수할 때 참여한 사람들의

인명과 불상의 개금불사에 시주한 사람들 이름을 적은 현판이 걸려 있다.



⑪보물 제 828호: 석등


대장전 앞에 보물 제828호인 고려시대의 팔각석등이 있다.

지대석에서 보주까지 거의 완전한 모습으로 남아 있고 전체 높이는 3.9m이다.

사각형의 지대석위에 하대석을 얹고

그 위에 간주석(竿柱石), 연화석(蓮華石), 화사석(火舍石), 옥개석, 보개, 보주의 순서로 조성되었다.

            

이 석등은 화창에 시설했던 창문만을 제외하면 현재 거의 완벽한 모습을 남기고 있다.
더욱이 오랜 가람의 변천에도 불구하고 제자리를 잃지 않고 은은한 법등을 밝혀왔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금산사의 귀중한 성보문화재라 하겠다.








금산사 전각 배치도




입장료 3000원

모악산쪽에서 내려오면 입장료는 내지 않는다.


금산사 입구 개화문(開化門)

홍예문 위에는 금산사 회주이신 송월주 슨미이 쓴 개화문(開化門) 현판이 걸려있다.

개화문은 후백제를 세운 견훤이 금산사에 유배되었을 때, 감시하기 위해 석성을 쌓아놓은 그 자리에 성문을 개축,

지금은 금산사로 들어가는 관문역활을 하며. 옆에 자연보호 헌장탑이 세워져 있다.



개화문 뒷모습



겹벚꽃과 어우러진 개화문



모악산 금산사 일주문

금산사에 오르는 산길에서 처음 만나는 건물이 「모악산 금산사」라는 현판이 걸린 일주문이다.

일주문은 기둥이 일직선상의 한 줄로 늘어서 있어 일주문이라 부른다. 이 일주문은 일심(一心)을 상징한다.

신성한 가람에 들어서기 전에 세속의 번뇌로부터 부산히 흩어진 한 마음을 하나로 모아 진리로 향하게 하는 상징적인 의미가 담겨져 있다.
이 일주문은 1975년에 세운 목조의 맞배지붕 양식으로 되어 있다.
현판은 일중(一中) 김충현(金忠顯)의 글씨이다.



일주문 뒷모습



천왕문으로 가는 길의 겹 벚꽃



금산사 텔플스테이 슬로건 "나는 쉬고 싶다"

말하지 않아도 여기에 오면 저절로 쉬고 싶겠다.




금산사로 들어가기전 오른쪽 '산중다원' 꽃이 수두룩하게 피고지는 금산사

저절로 차맛이 나겠다.


산중다원에서 바라본 금강문






속세를 버리듯 다리를 건너 절집으로 들어가는 길





금강문과 뒷편 천왕문

현판 글씨가 금강산처럼 기이하다.


일주문을 지나 100m 쯤 오르면 작은 개울 건너에 자리 잡은 금강문을 보게 된다.
금강문은 대개 천왕문의 대문에 금강역사의 모습을 그려 놓거나,
때로는 천왕문 안에 조각상을 만들어 세우기도 한다.
그리고 금산사와 같이 금강문을 천왕문 앞에 별도로 모시는 경우도 있다.

                  



금강역사는 불교의 수호신이다.
대체로 불탑 또는 사찰의 문 양쪽을 지키는 수문신장(守門神將)의 역할을 담당하며, 인왕역사라고도 한다.


이 신은 여래의 온갖 비밀스런 사적(事蹟)을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5백의 야차신을 거느리고 현겁 천불(千佛)의 법을 수호한다고 한다.

이 건물은 1994년에 새로 지어 안에는 인왕상 2체와 사자를 탄 문수동자, 코끼리를 탄 보현동자를 모셨다.
본래 금산사에는 조선시대부터 내려온 금강문이 따로 있다.
현재의 금강문을 지나 바로 오른쪽에 「모악산 금산사」 현판이 걸린 건물이 그것이다.
1994년에 가람을 일신할 때 절의 입구를 변경하면서 본래의 금강문 왼쪽 앞에다

새롭게 금강문을 세웠던 것이다.
지금은 새로 세운 금강문에 자리를 내주고 전각이름마저도 사라졌지만,

1556년(명조 11)에 인언(仁彦) 경휘(敬輝) 스님이 재건한 뒤 1972년의 중수 때까지 오랜 역사를 지닌 유서 깊은 건물이었다.



금강역사-나라연금강과 보연동자



금강역사-문수동자와 밀적금강



천왕문


금강문과 일직선상에 있다. 천왕문은 불법을 수호하는 외호신인 사천왕을 모신 전각이다.
외호신이란 불국정토의 외곽을 맡아 지키는 신이라는 뜻이며, 동, 서, 남, 북 네 곳을 지키게 된다.
이 곳 천왕문은 1994년에 가람을 중수하면서 새롭게 조성했다.
안에는 사방에서 불법을 외호하는 사천왕상을 봉안하였다.



천왕문의 사천왕#1



천왕문의 사천왕#2



천왕문에서 바라본 보제루


보제루에서 바라본 천왕문



천왕문옆 경비실



당간지주#1



당간지주#2

금강문에서 동북쪽으로 50m쯤 떨어진 곳에 보물 제28호로 지정된 당간지주가 있다.

절에 중요한 행사나 법회가 있을 때 깃발을 걸어서 이를 알리는 일종의 안내판이 당간(幢竿)이고, 이를 지탱하는 것이 지주(支柱)이다.
그래서 당간지주는 반드시 절의 입구에 놓이게 마련이다.

장방형의 계단식 3층 기단과 그 위에 당간을 받치고 있던 간대(竿臺), 지주를 놓던 기단석 등이 잘 남아 있다.

정연한 기단부와 지주의 다양한 조각 등이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당간지주 가운데서 가장 완성된 격식을 갖춘 작품이다.

지주에 세 곳의 홈을 마련한 예는 익산의 미륵사지와 경주 보문리 당간지주에서도 볼 수 있어 같은 조성연대,

곧 8세기의 조성으로 추정된다. 한편 진표율사가 절을 중창한 것이 766년(혜공왕 2)의 일이므로 당간지주의 조성시기를 이 무렵으로 보아도 틀리지 않을 것 같다.



사천왕문을 들어서면 보제루 아래 서편으로 성보박물관이 새로 지어져 있다.
이 곳 성보박물관에는 금산사와 말사의 성보문화재들을 보관 전시할 예정이다.



종무소



보제루#1

천왕문을 지나 가람의 중심에 이르면 누각 건물이 보제루이다.
앞면 7칸, 옆면 3칸의 2층 누각식 건물로서 아래층은 절 앞마당으로 오르는 계단 역할을 한다.
우리나라 사찰에서 누각건물이 본격적으로 자리 잡기 시작한 것은 조선시대에 와서의 일이다.
잦은 외침에 따라 승병이 조직되고 사찰이 의승군의 결집장소가 되면서 군사적 필요에 의해 누각이 번성하였다고 한다.


이후 승병이 사라지면서 누각건물은 법회와 강설, 그리고 대중집회의 장소로 사용되었고,

오늘날에는 이러한 실용적 기능보다는 가람의 한 구성요소로서 자리 잡고 있다.

보제루는 정확한 연혁이 남아 있지 않지만 조선 중기에 만세루(萬歲樓)라는 12칸짜리 누각이 있었으므로 아마도 이를 계승한 건물이라 생각된다.



보제루#2




보제루#3



보제루#4

겹벚꽃과 보제루

이렇게 찬란한 계절에 만난 금산사

더더욱 잊지못할 금산사가 되겠다.


보제루편액




보제루#5

보제루의 뒷모습

대적광전 마당에서 바라본 보제루


뒷편에는 '개산천사백주년기념관'이라고 적혀있다.



미륵전#1

국보 제62호

보제루를 지나 가람의 중심에 이르면 오른쪽으로 국보 제62호인 웅장한 규모의 미륵전이 보인다.

미륵전은 미래의 부처님인 미륵이 그분의 불국토인 용화세계에서 중생을 교화라는 것을 상징화한 법당이다.

즉 미륵신앙의 근본도량을 사찰 속에 응축시킨 것이 미륵전이요,

먼 미래의 새로운 부처님 세계에서 함께 성불하자는 것을 다짐하는 참회와 발원의 장소이다.
미륵전은 신라 경덕왕 21년(762)부터 혜공왕 2년(766) 사이에 진표율사가 가람을 중창하면서 미륵보살에게 계를 받았던 체험 그대로를 가람에 적용하여 세웠다.


안에는 미륵장륙상을 본존으로 모셨으며 남쪽 벽에 미륵과 지장보살에게서 계를 받는 광경을 벽화로 조성하였다. 그러나 이 건물은 정유재란 때 소실되었다.

지금의 모습은 인조 13년(1635)에 수문대사가 재건하였다.
미륵전은 용화전, 산호전(山呼殿), 장륙전 등의 여러 가지 이름을 지녔다.

지금도 특이하게 1층에는 「대자보전(大慈寶殿)」, 2층에는 「용화지회(龍華之會)」, 3층에는 「미륵전(彌勒殿)」등의 각기 다른 편액이 걸려있다.

이름은 다르지만 모두가 미륵불의 세계를 나타낸다.


이러한 다층의 사찰 건축으로서 미륵전은 법주사의 팔상전과 함께 한국 건축사의 위대한 업적으로 꼽힌다.

일찍이 삼국시대로부터 축적된 기술적, 미학적 아름다움은 국토 곳곳을 불국토의 장엄으로 만들어 나갔던 것이다.
미륵전의 내벽과 외벽에는 사이 사이에 수많은 벽화가 그려져 있다.

보살과 신장 그리고 수도하는 모습 등 다양한 벽화는 건물의 아름다움을 더해주고 있다.
한편 오른쪽 벽에는 1890년(고종 27)에 조성한 제석천룡탱화가 봉안되어 있다.

용준(聳俊), 정선(定善), 오종(午從) 등의 금어(金魚)가 그렸는데, 적색과 녹색이 주조를 이루며 불법을 수호하는 신중의 모습을 잘 표현하였다.



미륵전 내부

미륵불 본존은 높이가 11.82m이고 삼존불 중의 협시는 8.79m에 달하는 거대한 규모이다.

통일신라시대 진표율사가 미륵전을 조성할 당시에는 3년간에 걸쳐 완성한 미륵장륙상 한 분만이 모셔졌었다.

그 뒤 조선시대에 수문대사가 다시 복원 조성하면서 소조 삼존불로 봉안했는데, 1934년에 실화로 일부가 소실되었다.

4년만인 1938년 우리나라 근대 조각의 개척자로 평가받는 김복진(金復鎭, 1901~1940)이 석고에 도금한 불상을 다시 조성해 오늘날의 모습을 지니게 되었다.
미륵본존은 거대한 입상이지만 전체적으로 균형과 조화를 이룬 모습이다.




(미륵전 내부 사진촬영이 금지 되어 있어서 문화재청에서 퍼옴)


지금도 남아 있는 불단 아래의 거대한 청동대좌는 정확한 조성시기를 알 수 없지만 잦은 소실과 복원의 과정에서도

오랜 세월동안 변함없는 그 자리에 있으면서 여러 불상을 받들고 있는 역사의 대변자가 되는 셈이다.
본존불은 오른손을 들어 손바닥을 바깥으로 향하고, 왼손 역시 손가락을 조금 오므렸지만 밖을 보이게 한 시무외인이다.

 대개 미륵불은 다른 불상과 구별되는 별개의 특징을 지니지 않는다.

본존불 양 옆의 협시보살은 왼쪽이 법화림(法花林) 보살이고, 오른쪽이 대묘상(大妙相) 보살이다.

협시보살 좌우에는 언제 봉안하였는지 모르는 또 다른 것이 2구가 있다. 본존의 협시보다 약간 작지만 역시 금을 입힌 소조상이다.



미륵전#3

국보 제62호



미륵전#3

국보 제62호



미륵전 벽화




미륵전#4

국보 제62호


벚꽃은 졌으나 오색등이 환하게 반기는 금산사

고목이 된 벚나무와 미륵전



미륵전#5

국보 제62호


석등과 미륵전


미륵전#1

국보 제62호


미륵전과 석련대 그리고 육각다층석탑



미륵전 자연그대로의 기둥




대적광전과 석등과 미륵전




대적광전#1

미륵전의 서쪽 즉 가람의 중심에 대적광전이 자리한다.
대적광전은 연화장세계의 주인인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을 본존불로 모신 건물이다.

화엄종의 맥을 계승하는 사찰에서는 주로 이 전각을 본전으로 건립하며,

『화엄경』에 근거를 두고 있다고 하여 화엄전, 비로자나불을 봉안한다고 해서 비로전이라고도 부른다.
현재 대적광전 건물은 앞면 7칸, 옆면 4칸의 다포식 팔작지붕으로 조선시대 건물이었으나 1986년에 화재로 전소된 후 1994년에 본래대로 복원하였다.

원래 대웅광명전(大雄光明殿) 또는 대법당이라고도 불렀다.


신라 때 진표율사가 창건하면서 지금의 미륵전을 금당(金堂)이라고 기록한 것을 보면 아마도 이 자리에는 법당이 들어서 있었을 것이다.
대적광전이 지금의 웅장한 규모를 갖게 된 것은 정유재란 때 절이 전소된 후 1635년 수문대사의 중창에 의해서였다.

이후 영조 52년(1776)에 금파대사의 법손인 두월장로가 중수하였고, 1926년과 1938년 미륵전 보수시에 수리되었다.

수문대사가 중창할 때 따로따로 모셨던 비로자나불, 노사나불, 석가모니불, 아미타불, 약사여래불과 여섯 보살을 함께 모심으로써

대적광전 하나로 통합해 창건하였던 것이다.


거대한 규모이면서도 날렵한 느낌을 주는 것은 이러한 한국 전통건축의 기능적, 예술적 지혜 덕택이다.
금산사가 미륵전을 토대로 미륵신앙을 표방하였지만 한국불교의 이러한 통불교적 경향은 고려시대 이후 반영되었을 것이다.

그 뒤 조선시대에 들어와 마침내 대승불교의 대표적 부처와 보살을 모두 수용한 대 전각을 건립하게 되었던 것이다.



대적광전내부

법당에는 마루를 깔고, 측면 제3기둥에 연하여 길쭉한 불단을 만들었다.

임진왜란 때 대웅전, 대광명전, 극락전, 약사전 등이 불타자 수문대사가 1635년(인조 13) 이들을 합쳐서 28칸의 대적광전을 세워 5여래 6보살을 안치하였다.

법당 내부에 2단으로 불단을 쌓고, 그 상단에 5구의 소조여래좌상과 6구의 소조보살입상을 봉안하였다.


불단 서편으로부터 아미타여래·석가모니불·비로자나불·노사나불·약사여래의 순으로 좌상을 배열하고,

보처불로는 아미타여래 좌우에 관음보살·대세지보살을 모셨으며, 비로자나불 좌우에는 문수보살·보현보살을 모셨고,

약사여래 좌우에는 일광보살·월광보살을 모셔 6구의 입상을 배치하였다.

이들 불상 앞에는 각기 다른 형상의 조그마한 목조나한상이 4~5줄로 늘어서 있는데 그 수는 500구에 달한다.


본래 비로자나불과 석가여래의 천장에는 용을 조각한 닫집을 매달았으나, 지금은 석가여래의 정상에만 닫집이 남아 있다.

대들보는 자연목과 거칠게 다듬은 목재를 사용하고 좌우 측면에는 각각 3개씩의 충량(衝樑)을 걸었다.

천장은 대들보 바로 위에는 우물천장을 했으며, 불단 위쪽은 한층 높게 가설하였다.



대적광전 문살

고찰들의 문살은 언제나 예술이다

정교하게 하나하나 새긴 모습을 보노라면 세상에 그냥 태어나는 것이 없다라는 생각이 든다

금산사는 거찰이라 전각이 많고 문살이 각양각이 하지만

절집의 안방이라 할수 있는 대적광전의 문살을 찍어 보았다.


대적광전#2


대적광전#3


대적광전#4



대적광전#5

방등계단에서 바라본 대적광전



범종각#1

보제루 올라가 가람 중심의 서편에 있다. 대적광전을 중심으로 하여 볼때 오른쪽에 위치하게 된다.
이렇게 범종각이 오른 쪽에 위치하는 이유는 불교의 체용설(體用說)에 입각하여 볼 때 오른쪽은 체(體) 왼쪽은 용(用)에 해당하는데,

 소리는 곧 용에 속하기 때문이다.
범종각에서 울려 나온 소리는 소리는 곧 우리들 일심의 작용이요,

 부첨님의 위대한 작용을 상징화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 소리는 스스로를 밝히고 중생을 교화하는 크나큰 울림인 것이다.




범종각#2


범종각에는
불전 사물인 범종(梵鐘), 법고(法鼓), 목어(木魚), 운판(雲版)을 함께 비치하고 있다.



대장전#1

미륵전의 정면 서쪽에 앞면과 옆면 각 3칸씩의 다포식 팔작지붕인 대장전(大藏殿)이 자리한다.

이 전각은 보물 제827호로 지정되어 있다.

대장전은 본래 진표율사가 절을 중창하면서 세워졌다.

미륵전을 짓고 이를 장엄하는 정중목탑(庭中木塔)으로서 가운데에서 우측부분에 위치하였으며

정팔각원당형으로 조성했던 건물이다.


당시의 양식은 탑과 같이 산개형(傘蓋形)의 층옥(層屋)으로서 맨 꼭대기 옥개에는 솥뚜껑 모양의 철개(鐵蓋)를 덮고,

다시 그 위에 불꽃 모양의 석조 보주(寶珠)를 올렸다.


그 뒤 조선시대에 들어와 1635년(인조 13)에 가람을 중창하면서 본래 목탑이었던 것을 지금과 같은 전각의 형태로 변형하면서 대장전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지금의 위치로 이전된 것은 1922의 일이다. 이렇듯 여러 차례 변화가 있었지만 전각 꼭대기에는 복발과 보주 등이 아직 남아

지금도 신라 때의 목탑 양식을 엿볼 수 있게 한다.

삼면의 벽은 모두 10폭의 벽화로 장엄하였는데, 흔히 볼 수 있는 십우도나 극락세계의 장엄 등이 아니라 구체적 인물과 사건이 등장하는 모습이다.

몇 개만 열거하면 ‘오달국사인명창’, ‘저지화상도담’, ‘치계전생담(雉鷄前生譚)’, ‘부설거사도술담(浮雪居士道術譚)’, ‘용파수상행(龍波水上行)’,

‘희운선사행적기(喜運禪師行迹記)’ 등이다. 또한 외벽에도 좌우로 벽화가 그려져 있다.

한편 대장전의 내부 출입문 위에는 1974년 건물을 중수할 때 참여한 사람들의 인명과 불상의 개금불사에 시주한 사람들 이름을 적은 현판이 걸려 있다.



대장전#2



대장전과 석등


대장전 지붕 맨 꼭대기 옥개에는 솥뚜껑 모양의 철개(鐵蓋)를 덮고,

다시 그 위에 불꽃 모양의 석조 보주(寶珠)를 올렸다.



대장전 지붕위 쇠뚜껑보주를 가까이서...(사진 퍼옴)



대장전 내부


이 건물은 본래 미륵전 앞에 세웠던 팔각원당형 목조탑으로서 장경각(藏經閣)으로 사용했던 것인데,

임진왜란 후에 수문(守文)이 중창할 때 이를 팔작지붕의 건물로 세웠다.

현재는 장경각의 기능은 없어지고 내부에 불상이 안치되어 있다.

건물의 내부에는 중앙 내주(內柱) 사이에 간벽(間壁)을 치고 상부에는 중방을 걸었고,

천장은 중앙 1단을 높여서 우물천장을 가설하였으며 보상화문(寶相華文)으로 단청을 하였다.



명부전#1

대적광전의 좌측으로 대장전과 나란히 명부전이 서 있다.
명부전은 저승의 유명계(幽冥界)를 사찰 속으로 옮겨 놓은 전각이다.
이 전각 안에 지장보살을 봉안하고 있기 때문에 지장전(地藏殿)이라고도 하고, 유명계의 심판관인 시왕(十王)을 봉안하고 있기 때문에 시왕전이라도 한다.
명부전은 앞면과 옆면 각 3칸씩의 맞배지붕 건물이다.안에는 지장삼존,

곧 지장보살을 중심으로 하여 무독귀왕, 도명존자를 봉안했는데, 지장보살은 왼손에 금강보륜을 쥐고 있다.




명부전#2

안에는 지장삼존,

곧 지장보살을 중심으로 하여 무독귀왕, 도명존자를 봉안했는데, 지장보살은 왼손에 금강보륜을 쥐고 있다.




대장전과 명부전은 나란히 있다.



석등#1

보물 제828호

대장전 앞에 보물 제828호인 고려시대의 팔각석등이 있다.
지대석에서 보주까지 거의 완전한 모습으로 남아 있고 전체 높이는 3.9m이다.
사각형의 지대석위에 하대석을 얹고 그 위에 간주석(竿柱石), 연화석(蓮華石), 화사석(火舍石), 옥개석, 보개, 보주의 순서로 조성되었다.

이 석등은 화창에 시설했던 창문만을 제외하면 현재 거의 완벽한 모습을 남기고 있다.
더욱이 오랜 가람의 변천에도 불구하고 제자리를 잃지 않고 은은한 법등을 밝혀왔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금산사의 귀중한 성보문화재라 하겠다



석등#2

보물 제828호



석련대#1

보물 제23호


대적광전에서 동남쪽으로 10여m 떨어진 곳에 보물 제23호 석련대(石蓮臺)가 있다. 불상의 대좌로서 정확한 이름은 석조연화대인데,

높이 1.67m, 둘레가 10.3m가 넘는 거대한 작품이다.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대형의 연화대좌인데다가 더욱이 하나의 화강석으로 각 면에 조각한 수법이 정교하고 아름답다.
이 석련대의 위치가 지금의 제자리인지 다른 자리에서 옮겨진 것인지 알 수 없다.

규모가 워낙 거대해서 이동하기에는 무리가 있을 것을 감안한다면 제자리일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고 한다면 고려시대 이후 언젠가 절을중창하면서 석련대가 놓였던 전각은 사라지고 그 위에 봉안된 불상은

다른 전각이 새로 들어서면서 그곳으로 옮겨갔을 것이다.

한편 이 정도의 대좌가 필요했던 불상이라면 그 규모도 엄청나다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금산사의 역사를 가만히 생각해 보면 역시 이 대좌의 주인공은 미륵장륙상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여기에는 하나의 전제가 뒤따라야 한다.

즉 석련대의 조성 시기가 미륵장륙상을 봉안했던 8세기 후반과 맞아 떨어져야 하지만 이 석련대를 대개는 10세기 초의 작품으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정확한 문헌자료가 없을 때는 작품의 양식을 통해 조성시기를 판단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이 석련대의 경우는 충분한 역사적 정황이 성립될 수 있으므로 통일신라 하대의 작품일 것이라는 가능성도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금산사홈페이지 내용)



석련대#2

보물 제23호

석련대는 석조연화대좌의 준말로 불상을 올려놓는 돌로 만든 받침대이다. 연화대좌는 흔히 볼 수 있는 것이지만 이것은 형태가 희귀하고 크기도 매우 거대하다.

금산사 대적광전에서 동남쪽으로 10m쯤 되는 돌단 밑에 있는데, 이곳이 원래 위치인지는 알 수 없다.
한 돌로 조각한 것이지만 여러 개의 돌을 사용한 것처럼 상·중·하의 구성이 정연하다.

상대는 윗면이 평평하며 중앙에 불상의 양발을 세워 놓았던 것으로 보이는 네모난 구멍이 두 개 있다.

밑면에는 윗면을 떠받치는 연꽃이 에워싸고 있으며, 꽃잎 사이에도 작은 잎들이 틈틈이 새겨져 있어 더욱 화려하다.

중대는 육각형으로 꽃무늬를 돋을새김하였다. 하대는 엎어놓은 연꽃모양이 출렁이는 물결무늬처럼 전면을 채우고 있다.
이 작품은 통일신라시대의 양식을 따르고 있으나,

사치스러운 조각 및 장식 등으로 보아 통일신라에서 고려로 넘어가는 시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짐작된다.


금산사 홈페이지내용과 문화재청의 내용을 보면 조성연대의 추정치가 조금씩 상이한점을 알수 있다.


육각다층석탑#1

보물  제27호


금산사 소속의 봉천원(奉天院)에 있던 것을 현재 자리인 대적광전 앞의 왼쪽으로 옮겨 왔다.

우리나라의 탑이 대부분 밝은 회색의 화강암으로 만든 정사각형의 탑인데 비해, 이 탑은 흑백의 점판암으로 만든 육각다층석탑이다.

탑을 받치는 기단(基壇)에는 연꽃조각을 아래위로 장식하였다. 탑신부(塔身部)는 각 층마다 몸돌이 있었으나

지금은 가장 위의 2개 층에만 남아 있다. 몸돌은 각 귀퉁이마다 기둥모양이 새겨져 있고,

각 면에는 원을 그린 후 그 안에 좌불상(坐佛像)을 새겨 놓았다.

지붕돌은 낙수면에서 아주 느린 경사를 보이다가, 아래의 각 귀퉁이에서 우아하게 들려있다. 밑면에는 받침을 두었는데,

그 중심에 용과 풀꽃무늬를 새겨놓았다. 꼭대기의 머리장식은 남은 것이 없었으나, 훗날 보충한 화강암으로 만든 장식이 놓여 있다.

벼루를 만드는데 주로 쓰이는 점판암을 사용하여 이색적인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으며, 각 층의 줄어드는 정도가 온화하고 섬세하다.

몸돌과 지붕돌에 새겨진 조각수법으로 보아 고려 전기에 세워진 탑으로 짐작된다. (문화재청)



육각다층석탑#2

보물  제27호


지금까지 사찰을 다니면서 보아오던 화강암 재질의 키 높은 석탑이 아니라

탑신은 높지 않으나 정교한 느낌의 석탑앞에서 한참이나 발걸음을 멈추었다

내품에 부처가 들어오는 느낌이랄까 거대한 것 보다는 마음속에 들어오는 절집이 좋다.

벼룩을 만드는 점판암 재질로 만들었다고 한다.



육각다층석탑#3

보물  제27호

대적광전과 육각다층석탑




육각다층석탑#4

보물 제27호     

                  
탑의 재질이 흑색의 점판암으로 된 특이한 경우인데, 완전한 모습은 아니지만 정교하면서도 우아한 공예적 석탑이다.
본래의 자리는 봉천원구가 있던 대웅대광명전의 앞마당에 있었다.

봉천원구는 혜덕왕사가 1079년(문종 33)에 절의 주지로 있으면서 창건했으므로 탑도 이 무렵에 조성된 것이라 생각된다.
그 뒤 조선시대에 들어와 정유재란으로 봉천원구가 모두 소실되자 수문대사가 대사구, 곧 지금의 금산사를 중창하면서 지금의 자리로 탑을 옮겨왔다.

이 탑은 신라시대의 일반적 석탑에서 고려시대의 화력하고 장식적 공예탑으로 넘어가는 초기의 작품이다.

 완전한 모습은 아니지만 각 층의 체감비례가 적절하고, 옥개석의 조각이 섬세한 점 등이 이후 고려시대의 공예탑이 지니는 초기적 수법을 간직하고 있다.





노주(露柱)#1

-보물제 22호


대적광전 오른쪽에는 독특한 형태의 노주(露柱)가 있다.
노주란 ‘노반지주(露盤之柱)’의 줄임말로서 처음에는 전각의 정면 귀퉁이에 세우는 두 개의 장대였다가 나중에 탑의 상륜부를 구성하는 부재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우리는 탑의 일부인 이 노주가 왜 별도의 조성물로서 만들어졌는지는 알 수가 없다.
사중기록에 보면 ‘노주’는 잘못 된 명칭이고, ‘광명대(光明臺)’로서 미륵전 앞에서 미륵불에게 광명을 공양하던 석등이었다고 한다.(금산사 홈페이지 내용)



노주(露柱)#2

-보물제 22호


『금산사사적』에 의하면, 금산사는 600년대 창건되어 신라 혜공왕 2년(776)에 진표율사가 다시 고쳐 세우면서 큰 사찰로서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또한 고려 전기인 935년에 후백제의 신검이 아버지인 견훤을 유폐시켰던 장소로도 유명하다.

이 노주는 금산사 대적광전에서 서남쪽에 위치한 대장각으로 가는 길의 중간에 있는데,

그 이름을 노주(露柱)라고는 하였으나 실제로 무엇으로 사용한 것인지 그 용도를 알 수 없는 보기 드문 유물이다.

꼭대기에 놓인 꽃봉오리모양의 조각만 없으면 불상을 얹는 사각형의 대좌(臺座)처럼 보인다.

땅 위에 바닥돌을 놓고, 그 위에 아래·중간·위받침돌을 순서대로 얹어놓았다.

아래받침돌에는 네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 모양을 새겨 면을 둘로 나눈 뒤 안상(眼象)을 조각하였다.

아래받침돌 윗면과 윗받침돌에는 아무런 꾸밈이 없는 중간받침돌을 사이에 두고 대칭되게 연꽃잎을 새겼는데,

아래받침돌의 연꽃잎이 넓고 짧은 반면, 윗받침돌의 연꽃잎은 좁고 길쭉하게 표현하였다.

꼭대기에는 석탑과 같은 머리장식이 남아있는데, 둥근 받침부분과 보주(寶珠:연꽃봉오리모양의 장식)를 가늘고 긴 사잇기둥이 연결하는 형식이다.

절이 창건된 때가 통일신라시대라고는 하지만, 당간지주 외에는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으로 짐작되는 것이 거의 없다.

이 노주도 받침돌에 새겨진 조각의 양식이나 각 부분의 수법으로 보아 고려 전기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문화재청 내용)



노주(露柱)#3

-보물제 22호


대적광전과 노주


대적광전 앞에는 박물관같다

노주와 석등 다층석탑 석련대등이 있어서 금산사를 찾는이들이 쉽게 문화재를 접하고 갈 수 있다.



조사전#1

金山寺 歷代의 스님 진영을 모신 곳이다.

조사전(祖師殿)은 역대 조사나 그 종파의 조사스님, 대덕스님, 사찰의 창건주, 역대 주지스님 등 해당사찰과 관련하여 후세에 존경받는 스님들의 영정이나

 위패를 모신 殿閣이다.

祖師殿을 寺刹에 따라서는 조당, 조사당, 국사전(國師殿), 국사당(國師堂), 영각(影閣) 등으로도 부른다.

선종사찰은 조사에 대한 신앙의식이 강하기 때문에 조사의 舍利塔인 浮屠를 건립하고 祖師殿을 지어 역대조사의 영정을 봉안한다.

선종사찰에서는 보통 인도와 중국의 조사인 마하가섭에서 혜능스님까지 33조사와 함께 우리나라 고려의 普照國師 태우 보우국사 등을 조사전(祖師殿)에 모시는데

 일명 국사당(國師堂)이라고 한다.




조사전#2

대적광전 뒤편에 나한전과 나란히 위치한 조사전은 앞면 3칸, 옆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1998년에 건립되었다.

내부에는 진표율사(眞表律師)를 비롯하여 혜덕왕사, 원명대사, 뇌묵대사 등 역대 조사들의 진영(眞影)을 봉안하고 있다.

내부엔 많은 대사들의 영정이 걸려있어서 역대 대사들을 한번쯤 새겨볼 시간이 되었다..



조사전#3

조사전과 배롱나무


조사전앞에 나이든 배롱나무가 대사들의 역사를 말해주는듯하다

4월에 찾아들어 잎과 꽃이 피지 못햇지만 단단하게 세월을 살아가는 배롱나무가 유독 눈길을 끈다.

절집을 찾아든이들은 그냥 갈 수 없어서 불전을 놓듯이 나무아래에 돌하나씩 얹어 놓고 갔나보다.




조사전#4

조사전 내부


조사전은 금산사의 중창조인 진표대사부터 혜덕왕사, 원명대사, 뇌묵대사 등 역대 조사 12분의 진영(眞影)을 봉안한 건물로서
1998년에 건립한 건물이다.






나한전#1


대적광전 뒤에 나한전이 있다.
소승불교의 최고의 경지에 오른 나한에 대한 신앙을 하는 전각이다.
나한은 아라한(阿羅漢)의 준말로서 의역하여 살적(殺賊), 응공(應供), 응진(應眞)이라 한다.
살적은 수행의 적인 모든 번뇌를 항복받아 죽였다는 뜻이며, 응공은 인간과 천상의 공양을 받을 만하다는 뜻이며, 응진은 ‘진리에 상응하는 이’라는 의미이다.
일반적으로 나한전에는 석가모니불을 주불(主佛)로 하여 보통 5백인을 모신 오백나 한전과 16나상을 모신 응진전으로 대별된다.

원래 금산사의 나한전은 방등계단과 오층석탑의 동쪽에 자리하고 있었는데, 이곳에서 계단을 참배하였기 때문에 계단예배전(戒壇禮拜殿)이라고도 불렀다.


나한전#2




나한전 편액과 꽃문양 문살

글씨체가 참 멋져보이는데 담헌선생의 필체라고 한다.




나한전 내부


에는 석가여래를 본존으로 하여 문수, 보현보살을 봉안하였다.

또한 석가여래의 여러 제자 가운데 으뜸이라고 하는 아난과 가섭을 모셨고,

16나한상과 2인의 시자상도 목조로 조성하였다.
그리고 전각이름에 걸맞게 소형의 오백나한상을 계단식의 단을 마련하여 가득히 봉안하였다.


방등계단에서 바라본 조사전(좌)과 나한전(우)

그 뒤에서 삼성각이 있다.



나한전옆 삼성각으로 돌아가는 담장옆에 동백꽃이 각혈하듯 꽃잎을 쏟아냈다.

나 이렇게 붉게 살다가노라~



삼성각

방등계단과 5층 석탑의 동쪽으로 적별보궁과 나란히 자리하고 있다.
삼성각은 산신(山神), 칠성(七星), 독성(獨聖)을 함께 봉안하고 있는 전각이다.
산신은 재물, 칠성은 수명, 독성은 복을 관장하는 존재로 알려져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면적은 19.96 평방미터이고 형태를 띠고 있다.




삼성각 내부



나한전에서 바라본 미륵전



방등계단#1

보물제26호


송대(松臺)라고 부르는 미륵전의 북쪽 높은 대지에 방등계단(方等戒壇)이 있다.

또한 이 계단의 중앙에 보물 제26호인 부도가 1기 있어 그 형태에 따라 석종형(石鐘形) 부도라고 부른다.

방등계단의 수계법회(受戒法會)를 거행할 때 수계단을 중앙에 마련하고,

그 주위에 삼사(三師)와 칠증(七證)이 둘러앉아서 계법을 전수하는데 사용했던 일종의 의식법회 장소이다.
이러한 예는 경상남도 양산의 통도사 와 개성의 불일사(佛日寺) 등지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한국 불교의 독특한 유산이다.




방등계단#2

보물제26호


불교의 정신을 대표하는 계(戒).정(定).혜(慧) 삼학(三學) 가운데 계는 으뜸으로서 계를 지킴은 불교의 기본 토대가 된다.

이 계의 정신이 일체에 평등하게 미친다는 의미에서 방등계단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한편 방등계단의 성격을 도솔천(兜率天)의 세계를 표현한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

즉 미륵신앙의 근본도량인 금산사에는 미륵의 하생처로서 미륵전을 조성하고, 그 위에 도솔천을 구현하여 미륵상생신앙을 나타냈다는 말이다.

결국 금산사는 미륵상생신앙과 하생신앙을 조화롭게 겸비하였다는 신앙적 성격을 지녔다는 뜻이 된다.

조선조 생육신의 한 사람이었던 김시습(金時習, 1435~1493)이 절을 찾아 이곳 방등계단에서 남긴 시가 한 수 전한다.


(김시습의 시)










방등계단#4

보물제26호


방등계단#5

보물 제26호


김제 금산사 금강계단 (金堤 金山寺 金剛戒壇) -(문화재청 발췌내용)


모악산에 자리한 금산사는 백제 법왕 2년(600)에 창건된 절로, 통일신라 경덕왕 때 진표가 두 번째로 확장하여 대사찰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금산사 경내의 송대(松臺)에 5층석탑과 나란히 위치한 이 석종은 종 모양의 석탑이다.

매우 넓은 2단의 기단(基壇) 위에 사각형의 돌이 놓이고, 그 위에 탑이 세워졌다.




(사진 문화재청에서 퍼옴)

석종형 탑은 인도의 불탑에서 유래한 것으로 통일신라 후기부터 나타나기 시작한다. 외형이 범종과 비슷해서 석종으로 불리운다.

기단의 각 면에는 불상과 수호신인 사천왕상(四天王像)이 새겨져 있다.

특히 아래 기단 네 면에는 인물상이 새겨진 돌기둥이 남아 돌난간이 있었던 자리임을 추측하게 한다.

난간 네 귀퉁이마다 사천왕상이 세워져 있다. 탑신(塔身)을 받치고 있는 넓적한 돌 네 귀에는 사자머리를 새기고 중앙에는 연꽃무늬를 둘렀다.

판석 위에는 종 모양의 탑신이 서 있다.

꼭대기에는 아홉 마리의 용이 머리를 밖으로 향한 모습으로 조각되어 있고 그 위로 연꽃 모양을 새긴 2매의 돌과 둥근 석재를 올려 장식하였다


조각을 둔 점과 돌난간을 두르고 사천왕상을 배치한 점 등으로 미루어 불사리를 모신 사리계단으로 해석되고 있다.

이 탑은 가장 오래된 석종으로 조형이 단정하고 조각이 화려한 고려 전기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문화재청 발췌내용)



오층석탑-보물 제25호

아쉽게도 해체보수공사중이라 실물을 볼 수 없었다.



김제 금산사 오층석탑 (金堤 金山寺 五層石塔)

보물 제25호 


금산사 안의 북쪽에 송대(松臺)라고 불리는 높은 받침 위에 세워져 있는 탑이다.

바로 뒤에는 석종모양의 사리계단이 있는데, 이렇듯 사리계단 앞에 석탑을 세워놓은 것은 사리를 섬기던 당시 신앙의 한 모습이기도 하다.

상·하 2단의 기단(基壇) 위에 5층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의 탑이다.

기단부는 아래층 기단의 규모가 좁아져 있고, 각 기단의 윗면에 다른 돌을 끼워서 윗돌을 받치도록 하고 있어 주목된다.

탑신부는 2층 이상에서 줄어드는 비율이 제법 부드럽고, 각 층의 몸돌에 새겨진 기둥조각이 넓은 편이다.

지붕돌은 밑면에 3단의 받침을 두었으며, 처마는 완만한 곡선을 그리고 있다.

6번째 층은 다른 층처럼 몸돌의 각 귀퉁이에 기둥이 새겨져 있고, 지붕돌 모양의 것이 덮여 있으나,

이것은 탑의 머리장식을 받치기 위한 노반(露盤)으로 다른 탑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모습이다. 머리 장식은 온전히 유지되어 원형이 잘 남아 있다.
통일신라시대 석탑의 기본 양식을 따르면서도 기단이나 지붕돌의 모습 등에서 색다른 면을 보이고 있어 고려시대 작품으로서의 모습을 잘 나타내고 있다.

(문화재청에서 퍼옴)


김제 금산사 오층석탑 (金堤 金山寺 五層石塔)

보물 제25호

(해체보수중이라 문화재청에서 퍼옴)


오층석탑

보물 제25호


미륵전의 북쪽 위 송대에 보물 제25호인 오층석탑이 자리한다.

정사각형 판재를 이용한 이 석탑은 높이가 7.2m로서 소박하고 단순한 구조를 지녔다. 본래 기록에 따르면 9층이라 하였는데

지금 남아있는 옥개석의 형태나 체감율 등에서 6층 이상이 손실되었음을 알 수 있다.

전설에 따르면 후백제의 견훤(甄萱)이 금산사를 창건하면서 이 석탑을 건립하였을 것이라 하나 이는 잘못된 것이고,

고려시대에 조성되었다는 확실한 기록이 전한다.

즉 1971년 11월에 석탑을 해체 수리하는 과정에서 〈모악산금산사오층석탑중창기〉가 발견되었는데,

그 내용 가운데 979년(경종 4)에 시작하여 981년에 완성했다는 사실이 보인다.

한편 탑 속에서는 중창기와 함께 금동관음상을 비롯한 여러 소불상이 발견되었는데, 이 탑의 복장품은 현재 동국대학교 박물관에 소중하게 보관하고 있다

(금산사 홈페이지내용)



오층석탑 표지석과 석종형부도(금강계단)



방등계단에서 내려다본 금산사 풍경

보제루와 범종각 그리고 대장전이 눈에 들어온다.



적멸보궁#1

방등계단 옆의 옛 나한전 자리에 세워진 예배각(禮拜閣)으로 유리벽을 통하여 방등계단에 있는 사리탑에 경배하며 예불을 드리는 곳이다.
불전 내부에는 따로 불단을 차려 불상을 봉안하지 않았는데, 이러한 예는 통도사 대웅전과 같은 경우이다.     


         

적멸보궁#2



적멸보궁에서 본 방등계단



적멸보궁 내부

불전 내부에는 따로 불단을 차려 불상을 봉안하지 않았는데, 이러한 예는 통도사 대웅전과 같은 경우이다.   



원통전

미륵전 옆 보제루 우측으로 원통전이 있는데 관세음보살을 모신 전각이다.
관세음보살은 대자대비하여 모든 곳에 두루하는 원융통을 갖추고 중생의 고뇌를 씻어주기 때문에 그 권능과 구제의 측면을 강조하여 원통전이라 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관음전, 대비전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원통전 내부

금산사 원통전의 관세음보살상

전형적인 천수관음이다.


관세음보살은 자유로이 그 몸을 바꿀 수 있어 그 형상에 따라 6관음, 7관음, 33관음 등이 성립 되었는데

가장 일반적인 관음은 성관음이다.

천수관음은 천개의 손으로 중생을 보듬고 어루만진다는 대자대비보살의 화신으로 무한한 자비력으로 이해 대비보살이라고도 한다.

실제로 천개의 손을 표현하기는 어려우므로 대게 좌우 20개씩 40개의 손으로 표현하는 경우가 일반적인데 금산사 천수관음도 40개의 손이 표현되어 있다.

40개의 손은 보륜, 보주, 금강저, 삼지창, 석장등 제각기 다른 지물을 쥐고 있다.





미륵전 뒷편의 요사채들


적묵당

적묵당은 주지스님을 비롯한 삼직 스님의 거주처이자 후원 요사의 중심건물이다.
일반 요사와는 달리 공양하고 예법을 갖추는 대중방(큰방)이 있는 수행 전용 건물이다.
근년에 후원 요사 일곽을 전체적으로 개보수 등을 하면서 건물 위치를 옮기고 집의 칸수와 기단, 장대석, 지붕 모양 등을 대폭 변형시켰고

새로운 목재를 사용하면서 건물 외양에 현대적 수법을 많이 가미해서 개조(改造)하였다.     


                  


보현당



설법전



설법전의 홍도화



설법전 현판



대찰, 천년거찰, 마음이 한층 넓어진 느낌이다.

하루에 부처의 세계를 어찌 알 수 있을까마는

이렇게라도 둘러보고 길을 나선다

절집이며 부처며 내소유란 어디 있을까

마음만 가지고 금산사에 왔다가 내마음 그대로 가지고 절집을 나선다.

금산사의 그많은것을 두고서....




금산사 뒷편 풍경

어떻게 둘러봤는지 모르겠다

그저 좋아서 이리저리 바쁘게 움직이여 둘러보았다.

이렇게 둘러보고자함이 욕심일지는 모르나 그래도 얻고 가고 싶다.


금산사에서 나와

금산사 뒷편 부도군으로 향한다.



모악산에는 사찰이 많다

금산사에서 심원암으로 오르는 길

금산사에서는 순례길이라 이름하였다.



이름이 참 많다

순례길

모악산 마실길

이름이 많으면 어떠리

그냥 그길 걸으면 되는 길

언제부터 누가 이 길을 내었는지 모르지만

걷는 길에 꽃도 피고 절집도 있고 물도 흐르고.....행운이다.




금산사 부도군

푸른색 지붕이 안에 있는 부도는 혜덕왕사진흥비



김제 금산사 혜덕왕사탑비

보물 제24호.


비신의 높이 277㎝, 너비 149㎝, 두께 17㎝, 글자 크기 약 2㎝. 1111년(예종 6)에 세워졌다.

현재 비수(碑首)는 유실되었고 비문의 마멸이 심하여 판독이 거의 불가능하다.

서자(書者)와 찬자(纂者)의 이름은 판독할 수 없고 각자(刻者)의 이름은 밝히지 않았다.


『해동금석원(海東金石苑)』에 의하면 이오가 짓고 정윤(鄭允)이 썼으며 비음(碑陰)은 채추탄(蔡推誕)이 쓴 것으로 추정하고 있고,

『조선금석고』에는 채추탄이 쓴 것으로 밝히고 있다. 혜덕(慧德)과 탑호인 진응(眞應)은 시호이며, 속성은 이씨이고 경원인이다.

비문에는 왕사의 생애·행적, 그리고 덕을 기리는 내용이 실려 있고

글씨는 구양순법(歐陽詢法)의 해서로 썼는데 구양순 글씨보다 더욱 활달하여 쾌적한 맛이 있으며, 필력도 주경하며 결구의 묘를 다하고 있다.

신라나 조선시대에 비하여 고려의 글씨가 훨씬 뛰어남을 보여주는 명품이다.




(사진( 문화재청 퍼옴)


금산사 혜덕왕사탑비 (金堤 金山寺 慧德王師塔碑)

보물 제 24호

금산사 안에 서있는 탑비로, 혜덕왕사를 기리기 위하여 세운 것이다.

혜덕은 고려 중기의 승려로서, 정종 4년(1038)에 태어나 11세에 불교의 교리를 배우기 시작하였고,

그 이듬해에 승려가 되었다. 1079년 금산사의 주지가 되었으며

숙종이 불법(佛法)에 귀의하여 그를 법주(法主)로 삼자 왕에게 불교의 교리에 대한 강의를 하기도 하였다. 59세에 입적하였으며,

왕은 그를 국사로 대우하여 시호를 ‘혜덕’, 탑이름을 ‘진응’이라 내리었다.

현재 비의 머릿돌은 없어졌으며, 비문은 심하게 닳아 읽기가 매우 힘든 상태이다.

비의 받침돌에는 머리가 작고 몸통이 크게 표현된 거북을 조각하였고, 비문이 새겨진 몸돌은 받침돌에 비해 커보이는 듯하며,

주위에 덩굴무늬를 새겨 장식하였다.

비문에는 혜덕의 생애·행적, 그리고 덕을 기리는 내용이 담겨 있다. 글씨는 구양순법(歐陽詢法)의 해서체로 썼는데,

구양순의 글씨보다 더욱 활달하여 명쾌한 맛이 있다. 신라나 조선에 비하여 고려시대의 글씨가 훨씬 뛰어남을 보여주는 부분이기도 하다.

비문에 의하면 비를 세운 것은 예종 6년(1111)으로 혜덕이 입적한 지 15년이 지난 후의 일이다. (문화재청 내용 발췌)



부도비




금산사 부도군#1



금산사 부도군#2



700고지가 넘는 모악산을 넘어서 금산사에 왔다

근 거찰, 마침 석탄일이 가까워와서 연등이 꽃물결처럼 일렁인다

모악산보다 더 높에 느껴지는 금산사

보물이 많아서 보물찾기에 여념이 없어서 합장할 시간조차 없음을 느꼈다

이길을 지나는 길

언젠가는 그 앞에 앉아 모든 것을 내려놓고 오장육부까지 비워내는 기도를 하리라.

2017.4.23.일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