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 한쪽 비워둔다면

photostory-寺

2017.11.18. 토. 달마산 미황사

kyeong~ 2017. 11. 18. 01:04

 


미황사(美黃寺)

대한불교조계종 제22교구 본사인 대흥사의 말사이다.

1692년(숙종 18)에 세운 사적비에 의하면 749년(경덕왕 8)에 의조화상(義照和尙)이 창건했다고 한다.

창건설화에 의하면 돌로 된 배가 사자(獅子) 포구에 이르렀는데, 사람들이 다가가면 멀어지고 물러나면 가까이 다가오는 일이 계속되었다.
그러자 의조가 제자들과 함께 목욕재계하고 맞이하니 비로소 배가 포구에 도착했다.

배에 올라보니 금의인(金衣人)이 노를 잡고 있고 큰 상자 안에

경전·비로자나불상·문수보살상·보현보살상·40성중·53선지식(五十三善知識)·16나한·불화 등이 꽉 차 있고,

배 안에 있던 바위를 깨니 검은 황소 1마리가 나왔다.

그날 밤 의조의 꿈에 금의인이 나타나 말하기를, "나는 인도 국왕으로 금강산에 봉안하고자 경전과 불상을 싣고 왔으나

금강산에 절이 가득해 새 절터가 없어 돌아가던 중인데

이곳의 지형이 금강산과 비슷하므로 소 등에 불상과 경전을 싣고 가다가 소가 머무는 곳에 절을 지으라"고 했다.
이에 다음날 소 등에 경전과 불상을 싣고 길을 떠났는데 한 곳에 이르러 소가 한 번 크게 울고 드러눕자

그곳에 통교사라는 절을 짓고, 소가 다시 일어나 가다가 마지막으로 머문 곳에 지은 절이 바로 이 절인데 소의 울음소리가 아름답고
금의인이 황금으로 번쩍거리던 것을 기리기 위해 미황사라고 했다고 한다.

그뒤의 사적은 알 수 없으나 1597년 정유재란 때 약탈과 방화로 큰 피해를 입었다.

1601년(선조 34)에 중창하고, 1660년에 3창했다. 1752년 금고를 만들고, 1754년 대웅전과 나한전을 중건하는 등
대대적인 공사를 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 당우로는 대웅전(보물 제947호)·응진당(보물 제1183호)·오백나한전·명부전·요사채 등이 있으며, 사적비와 여러 점의 부도가 전한다.

[Daum백과]

 

 

 

전각 배치도

 

전남 해남군 송지면 서정리 1

전화-061-533-3521

 

미황사 일주문

새로 지은지 얼마되지 않아서 아직 현판을 달지 못했다

 

달마산 미황사 

종이에 한폭의 그림처럼 붙인 현판

 

달마산을 오르기 위해 늘 스쳐갔던 곳을

이번에는 산을 오르지 않고 미황사와 도솔암을 살펴보려한다

 

 

 

일주문을 들어서는 사천왕문으로 가는 길이 계단으로 되어있다

속세를 버리고 부처의 세계로 오르는 입문 절차처럼 계단이 많다.

 

사천왕문

미황사는 일주문이며 사천왕문을 새로 복원하여

불사를 하는 중이다

사천왕 모시기 위해 시주를 받는 중이다.

 

사천왕문을 들어서니

헉~ 하겠다 왠사람들이 이렇게 많은가 했더니

'달마고도' 명품길을 만들고 오늘이 바라로 그 개통 기념식을 하는 날이라서

해남사람들이 전부 이 절에 모여든듯했다

모르고 왔는데 잔칫날 찾아든것 같아 기분이 좋다.

 

사천왕문에서 바라본 자하문으로 오르는 길이다.

 

 

달마선다원

미황사 전통찻집앞에도 등산객이며 기념축하객이며 빼곡하다

오늘은 찻집이 차 팔기는 힘들겠다

절집 마당에서 마로 만든 따듯한차도 주고 물도 나눠주고 있다.

 

 

사천왕문옆에 기념식을 위한 무대가 설치되었다

단풍이 곱디고운계절 '달마고도'가 문을 연다

해남의 아름다운 산 달마산과 미황사 그리고 그림같이 앉아있는 도솔암을 따라 걷는 길

누가봐도 명품길이다.

누구나 갈수 있게 정성들여 만들어준 달마고도 명품길을 열어준 분들께 감사한 마음이다.

 

자하루 紫霞樓

미황사 중심영역으로 들어가는 입구의 누각으로 2001년에 새로 지었다

한문학당이나 수련회등 대규모 행사때 사용하고 있는데 근래에는 미술관으로 이용되고 있다

정면7칸 측면2칸 누각형 맞배집으로 어칸을 제외한 벽은 화방벽으로 처리했다

 

자하루 주련과 함께 풍경사진

 

자하루주련 (좌측)

 若人欲識佛境界 (약인욕지불경계)

만약 누가 부처의 경계를 알고자 한다면,

 當淨其意如虛空 (당정기의여허공)

마땅히 그 뜻을 허공과 같이 깨끗이 하라.

 遠離妄想及諸趣 (원리망상급제취)

망상과 모든 집착에서 멀리 벗어나,

 令心所向皆無碍 (영심소향개무애)

 

자하루주련 (우측)

三界猶如汲井輪 (삼계유여급정륜)

계는 우물의 도르래와 같아서

百千萬劫歷微塵 (백천만겁역미진)

백천만겁을 지나도 티끌에 불과하네.

此身不向今生度 (차신불향금생도)

금생에 이 몸을 제도하지 못하면

更待何生度此身 (갱대하생도차신)

또 다시 어느 생을 기다려 이 몸을 제도할까

 

자하루 현판

 

주련

오른쪽 -마음이 향하는 바가 걸림돌이 없게 하라

왼쪽-삼계는 우물의 도르래와 같다

 

자하문 입구에 서있는 달마대사석상

달마산아래 위치한 사찰이라서 그 상징성을 위해서

달마대사 석상을 세운듯하다

 

자하문 안쪽에는 '만세루' 편액이 걸려있다

 

미황사의 사찰에는 이부분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부도며 주춧돌이며 단청에 물고기나 거북, 게가 그려져 있다.

화반에 그려진 게문양

 

자하문을 들어서면 왼쪽으로 범종각이 있다

사방1칸의 사모지붕으로 다포계공포를 짜올렸다

 

범종각 옆의 전각은 '청운각'

 

자하문을 들어서니 별천지에 든것 같다

대부분 법당에 먼저 눈이가기 마련인데 이번에는 미황사 뒤로 펼쳐지는 병풍같은 바위그림때문이다

땅끝마을 해남땅의 모든 바위들이 여기에 모여서

바람을 막고 눈비를 막으며 미황사를 지키고 있는듯하다

 

미황사대웅전 보물947호

미황사에 있는 조선 후기의 목조건물. 보물 제947호. 앞면 3칸, 옆면 3칸 규모이며 단층 팔작지붕 건물이다.

잡석을 쌓은 높직한 기단 위에 둥근 주춧돌을 놓고 배흘림의 둥근 기둥을 세웠다.

그 위에 공포는 내사출목·외삼출목의 다포식으로 결구했다.

제공의 쇠서는 위로 가볍게 올라간 모양으로 18세기 이후의 보편적인 경향을 보여준다.

1982년 중수할 때 1754년(영조 30)에 중건했다는 상량문이 발견되었으며, 상량문이 묵서된 종도리는 해체해 따로 보관하고 있다.

[Daum백과]

 

미황사 대웅보전 측면

원래는 단청이 있었는데 오래되어 퇴색하였다

 

기단은 자연석을 허튼충쌓기로 축조한 단층기단이다

초석은 원형초석을 사용하였으며, 여기에 연화문과 거북, 게등의 특이한 문양으로 장식하였다

기둥은 모두 원주이며 약한 민흘림을 가지고 있다,

창호는 건물 사면에 모두 남아 있으면 건물 내부는 비록 색조는 많이 퇴색하였으느나 오색 단청이 그대로 남아있다

특해 대량과 내출목상벽에 가득 그려진 천분도, 포벽내부에 그려진 나한도,

내부고주에 생강감 넘치게 베풀어진 용문 등은 실래늘 매우 화려하게 장식하고 잇다.

 

초석은 원형초석을 사용하였으며, 여기에 연화문과 거북, 게등의 특이한 문양으로 장식하였다

 

 

귀공포의 1,2,3제공은 암서, 4제공은 수서, 초공은 봉황두로 마감하였다

 

 

대웅보전 뒷편에 있는데 여물통도 아니고 무엇이었을까...

 

대웅보전 오른쪽 뒷편에 위치한 응진전

 

미황사 응진당

보물1183호

응진당은 석가모니와 16나한을 모신 미황사의 불전으로 대웅전의 우측에 한단 높게 쌓은 석축 위에 자리 잡고 있다.

대웅전 옆으로 난 계단을 올라가 새로 쌓은 담장으로 구획된 좁은 마당에 위치하며 이 마당에 올라서서 내려다보면 멀리 서해바다가 한눈에 들어온다.

미황사는 1982년 대웅전 해체 수리 시에 발견된 종도리에 기록된 상량 목의 묵서명문(墨書銘文)에 1754년(영조 30, 건륭19)이라는 축조연대가 나타나 있다.

이때 괘불의 제작연대가 1727년이고 응진당 불상명패의 제작연대는 1722년이며, 석축을 쌓았던 축장기에는 1680년의 기록이 있다.

응진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처마는 부연을 단 겹처마로 되어있다. 내부는 통간(通間)주)1이며 바닥은 우물마루를 깔았다.

기단은 막돌 바른 층 쌓기의 2단 형식으로 중앙의 계단으로 오르게 되어있으며 막돌초석을 사용하였고 이 위에 배흘림이 약한 원기둥을 세웠다.

응진당의 건축적 특징은 전체적으로 안 쏠림과 귀솟음에 소홀하지 않았고 포작의 부재들과 연목, 부연 등을 치목함에 있어 고풍을 따르려고 노력한 점,

이 지방의 고유한 단청과 불화들의 문양과 색상을 잘 보존하고 있는 점 등으로 건축사연구에 귀중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출입할수 없는 스님 선방

꽃보다 이쁜 가을여신 단풍이 선방을 치장하고 있다

 

늦가을이건만...하도 고와서 가장 오래 머물렀던 공간

 

수행중이라 들어갈수 없는 곳

스님들의 수행하는 선방이라 출입금지다

 

 

응진당을 보고 내려오는 길 대웅보전 오른편, 아래쪽에 위치한 세심당, 선방

세삼당에는 '미수'편액과 노완만필이라는 관지가 보인다

노완은 추사 김정희의 또다른 호이다 추사 김정희의 친필이 아니고 모작이라고 한다.

 

 

세심당을 좀더 가까이...

 

 

 

대웅보전 왼쪽 옆 명부전

문화재가이드가 설명을 하느라 관광객들이 몰려 있다.

 

명부전(冥府殿)과 시왕(十王)
저승세계를 상징하는 전각이다. 지장보살을 주존으로 하여 시왕을 봉안하기 때문에 지장전(地藏殿)·시왕전(十王殿)이라고도 한다.
이 곳에는 지장보살을 중심으로 좌우에 도명존자(道明尊者)와 무독귀왕(無毒鬼王)을 봉안하고,

 그 좌우에 명부시왕상(冥府十王像)을,시왕상 앞에는 동자상(童子像)을 안치한다.

지장보살은 석가모니불의 입멸 후 미륵보살이 성불할 때까지, 즉 부처가 없는 시대에 중생을 구제하는 보살이다.

그는 모든 중생이 구원받을 때까지 자신은 부처가 되지 않겠다는 큰 서원을 세운 보살로서,

특히 가장 고통이 심한 지옥의 중생 제도가 지장의 특색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시왕은 저승에 있는 열 명의 심판관이다.

 

명부전 내부

 

명부전 위쪽 계단위에 위치한 삼성각

독성각(獨聖閣)·산신각(山神閣)·칠성각(七星閣)이 있으며, 대개 삼성각에 삼신을 같이 모신다.

독성각은 불교에서 말하는 독각(獨覺)을 모신 곳이다.

 독각은 석가모니처럼 스승 없이 홀로 깨우친 자를 말한다.

대승불교의 교학에서 독각은 타인을 위해 가르침을 설하지 않는 이기적인 자를 뜻하지만, 이 경우에는 좋은 의미의 독각이다.

 산신각은 단군이 산신이 되었다는 전설에서 유래하는 산신을 모신 곳이다.

 칠성각은 북두칠성에 축원하는 도교의 신앙을 받아들여 북두칠성을 불교의 여래로 조화하여 모신 곳이다.

따라서 삼성각은 불교가 수용되는 과정에서 토착신앙 또는 민간신앙과 융합하여 빚어진 변용이다.

 

 

 

명부전 뒷편 스님 선방

 

궁금해서 돌아가보니 들어갈수 없는 스님 선방같다

 

향적당

템플스테이를 위한 선방이다

검색을 하다보니 향적당 주련 풀이글이 있어서 가지고 왔다

 

해남 달마산(達磨山) 미황사(美黃寺) 향적당 주련

 面上無嗔供養具 (면상무진공양구)

성 안 내는 그 얼굴이 참다운 공양구요

 口裏無嗔吐妙香 (구리무진토묘향)

부드러운 말 한마디 미묘한 향이로다

心裏無垢是眞實 (심리무구시진실)

깨끗해 티가 없는 진실한 그 마음이

無垢無染是眞常 (무구무염시진상)

언제나 한결같은 부처님 마음일세.

入定頭陀千劫靜 (입정두타천겁정)

선정에 든 가섭존자 천겁토록 고요한데

多聞尊者一生忙 (다문존자일생망)

많이 아는 아난존자 평생토록 바빴도다.

 

 

고요히 참선하는 곳에 촬영을 위해 들어가는 것은 예의가 아니라는 생각에

조심히 보이는 곳 들어갈수 있는 곳만 얌전히 몇장찍고 돌아서 나왔다.

향적당에서 바라본 세심당

 

 

절집마당에 늦가을색을 본다

퇴색하여가는 잎이여도 곱다

 

 

절집 마당한켠의 종무소 이심당

 

 

주마간산격으로 절집을 돌아서 나온다

이곳에 머물며 누군가에 편지를 써보고 싶다

우체통이 있는 절집 그곳에 꼭 머물고 싶다

 

도솔암으로 향하기 위해서 다시 길을 재촉하여 나선다.

 

절집을 나와서 오른쪽으로 난 아스팔트길을 따라 도솔암을 향한다

 

도솔암으로 가는 길에서 달마산방향으로 조금만 더 올라가면 미황사 부도군을 만난다

미황사에 오면 이 부도군을 꼭 가봐야 한다

 

 

부도군 옆 달마선원

 

 

병풍같은 달마산아래 달마선원과 부도군

 

나홀로 부도탑

 

달마선원입구

 

내부에도 비석이 있는 선방

 

석축에 기대어 있는 부도전 안내판과 부도군

 

스님의 사리를 모신 부도전이다.

 

부도와 탑비

크기와 높이가 스님의 업적을 비교하는 것인지 궁금하지만 물어볼 곳이 없다

우연히라도 스님을 만난다면 꼭 물어보고 싶다

석종형부도4기 팔각원당형부도 2기

 

탑비에는 스님의 공적을 새겨져 있다.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는 탑비이다

부도에 잠자고 있는 스님의 행적이나 공적이 적혀있는 탑비이다

 

 

게와 가재가 그려졌는 부도

 

물고기도 그려져 있고

이 특별한 부도는 미황사만이 존재하는 것 같다.

 

 

별의 별것이 다 그려져 있는 미황사 부도

동화작가가 새긴 것 같은 부도다

 

 

오롯이 뜨락에 나와 있는 부도

 

부도의 기초가 되는 방형의 기단부는 지()를 상징하며,

그 위에 올려진 원형의 몸돌은 수()를,

그리고 몸돌을 덮은 삼각형의 지붕돌은 화()를,

그 위에 올려진 반월형의 앙화는 풍()을 상징하며,

맨 꼭대기에 있는 단형의 연봉오리는 공()을 의미한다.

 따라서 난형 부도는 오대를 형상화한 것이라 할 수 있다.

 

     
     
八角원당형                             석종형
 
 
 
 

부도[浮屠]

 

승려의 사리나 유골을 안치한 묘탑().

부두()·포도()·불도() 등 여러 가지로 표기되는데, 원

래는 불타()와 같이 붓다(Buddha)를 번역한 것이라 하고 또는 솔도파(, stupa), 즉 탑파()의 전음()이라고도 한다.

어원으로 본다면 불타가 곧 부도이므로 외형적으로 나타난 불상이나 불탑이 바로 부도이며, 더 나아가 승려들까지도 부도라 부르기도 한다.

우리 나라에서 묘탑, 즉 부도라는 용어로 승려의 사리탑을 가리키는 실례는 신라 하대부터 보이고 있다.

872년(경문왕 12)에 건립된 대안사적인선사조륜청정탑비()의 비문 중에

“기석부도지지()”라는 구절은 승려의 묘탑이 곧 부도라고 일컬어지고 있었음을 말해 준다.

 

묘탑, 즉 부도를 세우는 것은 불교식 장례법에서 생겨난 것이지만 불교가 전래된 때부터 묘탑의 건립이 시작된 것은 아니다.

우리 나라에 불교가 전래된 시기는 4세기 후반이지만 연대가 그때까지 올라가는 묘탑은 문헌상으로도 볼 수 없다.

다만 627∼649년경에 원광법사()의 부도를 세웠다는 ≪삼국유사≫의 기록으로 이 시기를 부도 건립의 시초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당시의 실물은 전하지 않고 844년(문성왕 6)에 조성된 전흥법사염거화상탑(, 국보 제104호)이

가장 오래된 부도로 추정되고 있다.

본래 부도의 건립은 법제문도()들이 선사(:돌아가신 스승)를 섬기는 극진한 마음에서

스승이 입적()한 뒤 온 정성을 다하여 세우는 것으로서,

우리 나라에서는 9세기에 이르러 당나라에서 선종()이 들어온 이후 부도의 건립이 크게 유행하였다.

 

즉 9산()의 각 선문()에서는 각기 사자상승( : 스승으로부터 제자에게 학예를 이어 전함.)함으로써

선풍()을 크게 일으켰으며, 각 선문에는 그 법문()의 개산조()와 개산인()의 순서로 뚜렷하게 하종파의 계보가 이루어졌다.

따라서 각 선문의 제자들은 각기 소속 종파가 확정되면서 그들의 조사()를 숭앙하여 평시에 그가 설법한 내용이나 교훈 등을

어록()으로서 남기고, 입적 뒤에 선사를 추앙하기 위하여 당연히 후세에 길이 보존될 조형적인 장골처()를 남기려고 하였다. 그러므로 이러한 시기에 등장하게 된 것이 바로 부도라고 볼 수 있다.

우리 나라 부도의 기점을 이루고 있는 전흥법사염거화상탑은 8각형을 기본으로 하여

상대석()·중대석()·하대석() 등의 기단부는 물론이고

그 위에 놓이는 탑신굄대·탑신부()·옥개석()·상륜부()까지 모두 8각으로 조성되어 있어 전체적인 평면이 8각이다.

이러한 형식의 부도를 이른바 팔각원당형(八形)이라 일컫고 있으며,

이후 신라시대에 건립된 부도는 모두 이러한 형태를 기본으로 삼고 있다.

 

그러나 고려시대 이후에는 법천사지광국사현묘탑(, 국보 제59호)과 같이 평면이 4각으로 변하여

일반 석탑과 같은 형태의 부도가 나타나기도 하고, 범종 모양과 비슷한 형태의 석종형부도(石屠)가 나타나 8각원당형과 함께 발전되었다.

현존하는 부도의 대표적인 예로는 통일신라시대의 쌍봉사철감선사탑(, 국보 제57호)·전흥법사염거화상탑,

고려시대의 흥법사진공대사탑(, 보물 제365호)·정토사홍법국사실상탑(, 국보 제102호)·

법천사지광국사현묘탑, 조선시대의 청룡사보각국사정혜원융탑(, 국보 제197호)

·회암사지부도(, 보물 제388호)·법주사복천암수암화상탑(

연곡사서부도(西, 보물 제154호) 등을 들 수 있다.

 

부도에는 다른 석조물과 달리 탑비()가 따로 세워져 있어 부도의 주인공과 그의 생애 및 행적 등을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당시의 사회상·문화상 등을 알 수 있어 주목된다.

이와 아울러 각 부의 정교한 불교 조각과 화려한 장식문양도 조각의 극치를 보이고 있으며,

형태도 전체적으로 균형된 조형으로 조화미를 보이고 있어 우리 나라 석조미술의 백미로 꼽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