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공원 내변산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내소사
몇번이나 방문을 하고 나서야 내소사 사찰이야기를 쓰게 되었다
늘상 산행을 하고 산행끝에 후식 먹듯이 스치던 내소사
다녀오긴했어도 느낌과 이야기가 없어서 쓸수가 없었다
이번엔 산행시간을 줄이고 맘먹고 내소사 절집에서 시간을 보내야겠다고 다짐을 했다.
푸른 전나무 숲길끝에 벚나무 사이로 은은한 빛깔로 겨울그림을 그리고 있는 내소사
겨울이지만 싱그러운 전나무길 때문인지 방문객이 많았다
요즘은 절집을 다녀보면 관음기도도량인지 관광지인지 구분이 가지 않는다
그지역 가장 풍광좋은 곳에 아늑히 자리하고 있는 절집
그래서 관광객이 끊이지 않고 들고나나보다
몇번이나 스치듯이 보아온 내소사를 일주문부터서 하나하나 들어서며 본만치 적어내려가고자 한다.
내소사 來蘇寺
전라북도 부안군 진서면 석포리 변산반도 남단에 있는 절.
대한불교조계종 제24교구 본사인 선운사의 말사이다. 원래 이름은 소래사였으며 633년(선덕여왕 2) 신라의 혜구(惠丘)가 창건했다고 전한다.
당나라 장수 소정방(蘇定方)이 석포리에 상륙해 이 절을 찾아와 군중재를 시주한 일을 기념하기 위해 절 이름을 내소사로 바꿨다는 설이 있으나
사료적인 근거는 없다.
이 절에 관한 기록은 〈동국여지승람〉과 최자의 〈보한집 補閑集〉 가운데 정지상이 지은 〈제변산소래사 題邊山蘇來寺〉라는 시가 있고,
이규보의 〈남행일기 南行日記〉가 있는데 모두 '소래사'로 기록되어 있어 언제 '내소사'로 바뀌었는지 분명치 않다.
1633년(인조 11) 청민(靑旻)에 의해 중건되었고 1902년 관해(觀海)에 의해 수축된 뒤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 이 절에 있는 중요문화재로는 고려동종(보물 제277호), 법화경절본사경(보물 제278호),
대웅보전(보물 제291호), 영산회괘불탱(보물 제1268호)가 있고 그밖에 설선당·보종각·연래루·3층석탑 등이 있다.
내소사 중요문화재
내소사대웅보전
내소사에 있는 조선 중기의 목조건물. 보물 제291호. 앞면 3칸, 옆면 3칸의 단층팔작지붕 건물로 다포 계통의 불당이다.
자연석의 초석(礎石)을 배치했으며, 그 위에 나머지는 곧은 원기둥[圓柱]이다. 좌우칸에 분합문을 달았는데 문짝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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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소사 동종
고려시대에 제작된 동종. 1222년 작. 보물 제277호. 높이 103cm, 입지름 67cm. 내소사에 있으나 원래 변산반도에 있던 청림사의 1850년(철종 1) 현위치로 옮겨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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來蘇寺靈山會掛佛幀 내소사영산회괘불탱
천신(天信) 등, 〈부안 내소사 영산회괘불탱〉, 1700, 삼베에 채색, 1050×817㎝, 보물 제1268호, 내소사. 석가가 영취산에서 설법하는 장면을 그린 영산회상도이다. 석가불을 중앙에 화면 가득 그리고 석가 오른쪽에 보현보살, 다보여래를 배치하였다. 상들은 둥근 얼굴에 원만한 체구를 지녔으며 뺨과 눈두덩, 턱밑, 손발에 옅은 분홍색을 써서 화사한 느낌을 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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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화경절본사본(法華經折本寫本) 보물 제278호 법화경의 원래 명칭은 묘법연화경으로, 우리나라 천태종의 근본경전이며, 부처가 되는 길이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는 것을 기본사상으로 하고 있다. 화엄경과 함께 우리나라 불교사상의 확립에 크게 영향을 끼쳤으며, 우리나라에서 유통된 불교경전 가운데 가장 많이 간행된 경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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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소사 일주문 "능가산내소사"
일주문이란
사찰에 들어서는 산문 중 첫 번째 문으로 일심을 상징한다
본래 일주문이라는 말은 기둥이 한 줄로 되어 있는 데서 유래된 것으로, 사주(四柱)를 세우고 그 위에
지붕을 얹는 일반적인 가옥형태와는 달리 일직선상의 두 기둥 위에 지붕을 얹는 독특한 형식으로 되어 있다.
사찰에 들어가는 첫번째 문을 독특한 양식으로 세운 것은 일심(一心)을 상징하는 것이다. 신성한 가람에
들어서기 전에 세속의 번뇌를 불법의 청량수로 말끔히 씻고 일심으로 진리의 세계로 향하라는 상징적인 가르침이 담겨 있다. 즉, 사찰 금당(金堂)에
안치된 부처의 경지를 향하여 나아가는 수행자는 먼저 지극한 일심으로 부처나 진리를 생각하며 이 문을 통과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건축양식은 주로 다포계(多包系) 맞배지붕을 하고 있는데, 이 문에 많은 현판(懸板)들을 걸어 사찰의 격(格)을 나타내기도 한다
입장료 안내문
늘상 궁금한것이다
사찰입장료인지
문화재구역입장료인지
막바로 산행을 해도 입장료는 똑같다
정부담당행정부서에서 이부분에 대해서 명확한 근거와 안내가 필요하다고 본다.
사찰은 3개의 문을 들어서게 되는데
일주문 천왕문 불이문
내소사에는 불이문의 역활이 '봉래루'이다.
내소사 전나무숲길이 내소사의 명성을 높게 한다
높낮이도 없고 평탄한 길을 따라 걷노라면
마음이 청정하게 된다
말하지 않아도 스스로 몸을 씻고 절집에 들어서게 되는 것이다.
청아한 겨울바람과 전나무숲이 조화를 이루어 스스로 마음을 가다듬게 된다
이길을 따라 내소사 이곳저곳 숨겨진 이야기를 찾아보기로 한다.
전나무 숲길이 지나면 작은 다리 피란교를 건너 벚나무 숲길이 시작된다
봄에 온다면 벚꽃이 흰눈처럼 휘날리리라..
녹색의 세상에서 하얀세상으로 건너가는 또다른 피안의 세상으로 건너가는 다리처럼 느껴진다.
천왕문가기전 왼쪽으로 작은 연못이 있다.
절집을 향하여 수많은 연꽃이 피고지며 법문을 들었으리라
대장금 촬영장소라는 팻말이 붙어 있다.
내소사 부도전(浮屠殿)
연못에서 좀더 위로 올려다보면
부도군이 줄맞춰 가지런히 자리잡고 있다.
능가산내소사사적비(楞伽山 來蘇寺事蹟碑)
해안당대종사행적비(海眼堂大宗師行跡碑),
능가산 아래 내소사를 향하여 한발짝 더 들어서면
벚나무가 사열하는 그 사이로 천왕문이 보인다.
속세를 버리고 극락을 향하여
지금은 꽃이 지고 없지만 나무의 눈에는 꽃을 품고 있을 것이다.
꽃길을 걸어서 부처의 세상으로 들어가보자
천왕문 가기전 왼쪽으로 쉼을 위한 암반인지...
지석묘같지는 않은데 그래도 내소사의 일부라서 옮겨본다.
천왕문
그냥 직역을 해보면
하늘의 왕께 들어가는 문쯤으로 해석이 된다.
천왕문(天王門)은 사찰로 들어가는 두 번째 문으로, 4천왕(天王)을 모신 곳이다.
4천왕은 수미산 중턱의 사방에 있는 4왕천(四王天)의 네 왕으로, 도리천(忉利天)의 우두머리인 제석(帝釋)을 섬기는 신들이다.
4천왕 가운데 동쪽에 있는 지국천왕(持國天王)은 중생을 두루 보살피면서 국토를 지키고,
남쪽에 있는 증장천왕(增長天王)은 불법(佛法)을 보호하면서 만물을 소생 시키고,
서쪽에 있는 광목천왕(廣目天王)은 눈을 부릅뜨고 그 위엄으로 불법을 보호하고,
북쪽에 있는 다문천왕(多聞天王)은 항상 도량을 지키면서 설법을 듣는다고 한다.
이들은 중생을 보살피고, 불법과 그에 귀의하는 자들을 보호하고, 항상 도량을 지킨다고 하기 때문에 사찰의 입구에 모신다.
천왕문은 대부분 정면 3칸, 측면 2칸에 맞배지붕으로 되어 있다
다음백과
내소사의 사천왕문은 17평의 목조 한와 팔작지붕으로 1986년에 우암 혜산선사가 신축하였다.
편액은 일중 김충현 거사의 글씨이고 주련글귀는 해안선사의 오도송(悟道頌)이다.
사천왕상-
우주의 사방을 지키는 수호신을 형상화한 상(像).
동방 지국천(持國天), 서방 광목천(廣目天), 남방 증장천(增長天), 북방 다문천(多聞天) 등 사방의
천왕을 사천왕이라 하는데 이를 도상화한 것이다. 인도에서는 사천왕상에 대한 규범이 일정하지 않아서 귀족의 형상으로 표현한 경우가 많았으나
서역(西域)을 거쳐 중국에 이르러 갑옷을 입은 무장의 모습으로 확립되었다
통일신라의 사천왕상
우리 나라에서 사천왕상이 만들어진 때는 사천왕 신앙이 수용된 600년경을 전후해서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크게 성행한 것은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던 때부터라고 할 수 있다.
≪삼국유사≫에는 당시의 명장(名匠) 양지(良志)가 영묘사(靈廟寺)에 사천왕상을 조성하였고, 이어 사천왕사도 건립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Daum백과] 사천왕상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내소사 천왕문 사천왕 불사중이라서
그림으로 대신하고 있다.
천왕문에서 바라본 내소사 전경
그림같은 풍경이 풀쳐진다
그림같은 풍경에 일컬어 나는 극락의 세계라 말하고 싶다
눈이라도 내렸으면 천상에 온줄 알텐데....
한발짝 더 들어서며 한컷~
봉래루
내소사 세번째문 불이문에 해당하는 봉래루이다
무색무취가 생각나는 문이다
단청도 없고 그저 오래된 나무냄새만 날것 같은
아니 나무 냄새마져 모두 날아가고 무아지경으로 들어서게 하는 문이다.
내소사 봉래루는 조선 태종 12년(1412)에 건립한 전면 5칸(12.23m), 측면 3칸(6.20m), 2층 누각의 맞배지붕의 건축물이다.
자연석을 주춧돌로 사용하였는데 높낮이가 제각각 틀릴 뿐 아니라, 주춧돌 위에 올려놓은 기둥들도 짧았다 길었다 천연덕스럽기만 하다.
삐뚤고 짧은 나무토막 하나라도 버리지 않고 이렇듯 훌륭하게 재목으로 쓴 옛사람들의 지혜가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봉래루 2층 누각에는 ‘내소사만세루중건기(1856)’, ‘변산내소사사자암중건기(1856)’,
‘변산내소사영세불망기(1875)’ 등의 편액과 고려시대 정지상(鄭知常)의 시문(題邊山蘇來寺)과 그 주위로 정지상의 원운을 차운한 시가 여러 수 있다.
다음은 정지상의 시문 ‘제변산소래사(題邊山蘇來寺)’이다.
題邊山蘇來寺
古逕寂寞縈松根/옛길은 적막하게 솔뿌리 엉켰는데
天近斗牛聊可捫/하늘이 가까워 북두칠성 만질 수 있네
浮雲流水客到寺/구름 따라 물 따라 나그네 절에 왔건만
紅葉蒼苔僧閉門/붉은 단풍 푸른 이끼 아랑곳없이 스님은 문을 닫는구나
秋風微凉吹落日/석양의 가을바람은 싸늘하기만 한데
山月漸白啼靑猿/산마루에는 하얀 달이 밝아오고 어린 잔나비만 우는구나
奇哉厖眉一老衲/기특하도다 수북한 눈썹의 노승이여
長年不夢人間喧/오랜 세월 세상일 꿈꾸지 않는구나
이로 미루어 볼 때 내소사가 19세기에 들어 여러 차례 중창불사를 하였고, 또 봉래루의 원래 이름이 만세루였음을 알 수 있다.
‘만세루’와 ‘봉래루’라는 명칭에 대해서는 1821년에 기록된<내소사 만세루 상량문>,
1823년에 걸어 놓은 <내소사 만세루 중건기> 현판과 최남선의 <심춘순례>의 <변산의 4대사(四大寺)>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부터 전나무 자욱한 측동으로 들어서서 그것이 다하는 곳에 ‘만세루(萬歲樓)’라는 높은 다락이 앞에 나섬은 이미 내소사에 다다른 것이다.
일변에는 ‘봉래루(蓬萊樓)’라는 현판을 달았으니...
이상의 문헌을 통해 1823년에 ‘만세루’란 이름으로 중건하였으며 이후 ‘봉래루’란 명칭의 현판을 달았고,
1926년 이후에야 비로소 ‘봉래루’란 명칭으로 정착되어진 듯하다.
그런데, <사찰지(1990년 전라북도 발행)>, <부안군지(1991년 부안군 발행)> 등의 문헌에는
1412년(태종 12) 내변산 사자동에 있었던 실상사에 세웠다가 옮겨왔다고 하였으나
실상사는 6.25 전까지 분명히 존재했던 사찰인데 하필이면 다른 사찰의 누각을, 그것도 험한 산길을 통해 옮겨왔을 리 없어 보인다.
봉래루에 걸려있는 곶감
대웅보전에서 바라본 봉래루
봉래루와 연등
절집에 들면 풍경이 하도 좋아 하룻밤 묵어가고 싶을 것이다
절에서 묵어가는 "탬플스테이"
언제쯤 이렇게 급한 걸음을 하지않고 넋놓고 하루라도 묵어갈수 있을까
템플스테이 전각 내부에는 '회승당'이라고 현판이 붙어 있다.
절에 모여서 스님의 법문을 배운다는 뜻인가보다
범종각
13평의 팔작 한와지붕으로 1995년 당시 주지였던 철산스님이 대범종, 대법고, 목어, 운판등 4물(四物)을 보관하기 위해 건립하였다.
범종각과 설선당
템플스테이를 하는 회승당과 대웅보전 사이에 있는 전각 '설선당'
설선당은 절집이라기보다
시골집에 와서 양지바른 마루에 앉아서 햇볕을 쪼이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춧돌이며 댓돌이며 마을 사랑방같은 느낌이 전해져 온다.
설선당(說禪堂)
내소사의 대중 요사로서 승려들의 수학 정진과 일상생활을 위한 공간입니다. 건물은 보기드문 □자형을 하고 있으며,
지면의 높이 차를 이용하여 건물의 일부를 2층으로 구성하였습니다.
안마당을 중심으로 넓은 대방과 승방, 부엌 등이 배치되고,
2층의 고루(高樓: 높은 다락집)는 각종 곡물 등을 저장할 수 있도록 벽면에 여러 개의 환기창을 설치하였다.
건물의 지붕선이 뒤쪽에 보이는 산세와 조화를 이루는 이 건물은 1640년(인조 18)에 내소사를 중건할 때 같이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설선당에는 편액에 '내소사'로 씌여 있다.
삼층석탑에서 바라본 설선당
석탑과 함께 내소사를 지키는 소나무
삼층 석탑과 설선당
대웅보전
보물 제291호
내소사대웅보전(조선 중기)다포양식,전북 부안군 진서면 석포리
잡석으로 쌓은 비교적 높은 축대 위에 낮은 기단을 두고 자연석의 초석(礎石)을 배치했으며,
그 위에 기둥을 세웠는데 모서리기둥[隅柱]만 배흘림이고 나머지는 곧은 원기둥[圓柱]이다.
앞면의 기둥 사이에는 중앙칸에 사분합(四分閤)문을, 좌우칸에 분합문을 달았는데 문짝은 초화무늬[草花紋]가 정교하게 투각된 꽃살문이다.
처마를 받친 공포는 다포계로 중앙칸에 3개, 좌우칸에 2개씩 배치되어 모두 11개의 공포로 결구되어 있다.
외3출목·내5출목으로 전통형식에서 벗어나 있으나 쇠서[牛舌]들이 겹겹으로 중첩되어 뻗어나와 있는 공포의 구성은 조선 중기 이후의
다포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다. 처마는 겹처마이며,
건물 내부의 5개 출목에 걸쳐진 살미첨차에는 모두 연봉형을 새겼으며 소위 운궁이라는 장식적 형태로 변모되어 있다.
대들보는 앞뒤 기둥 위의 공포에 걸쳐졌는데 자연 그대로의 굽은 재목을 사용했다.
대들보 위에 동자형(童子形)의 대공(臺工)을 세워 종보[宗樑]를 받치고 우물천장을 가설했다.
대들보에서 건물 측면의 가운데 기둥에 걸치도록 각각 2개씩의 충량을 배치했다.
건물 내부의 뒤쪽에는 두 기둥을 대들보에 고정시켜 세우고 그 사이를 후불벽(後佛壁)으로 만들었다.
불단 위에는 아미타구품인을 한 불좌상과 좌우에 보살좌상을 안치했고 그 위에 닫집을 따로 설치하지는 않았다.
건물은 그다지 큰 편이 아니며, 평면은 중후한 방형을 이루고 있는데 이에 비해 기둥 높이가 낮아 단정한 느낌을 준다
대웅보전 현판은 원교 이광사(조선후기 유명한 서화가)가 쓴 글씨다.
대웅보전과 삼층석탑
삼층석탑
전라북도 시도유형문화재 제124호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24호. 판형(板形)의 지대석을 마련하고 그 위에 2중기단을 세웠다.
낮은 하층 기단은 저석과 중석을 하나의 돌로 하여 새겼는데 4매의 돌을 엮어 구성하였다.
하층 기단의 중석은 2개의 모서리기둥[隅柱]와 1개의 버팀기둥[撑柱]가 새겨져 있다.
하층 기단의 갑석은 2매의 돌을 동서 방향으로 나누어 구성하였는데, 낙수면이 급하고 상층 기단을 받치기 위한 2개의 몰딩(moulding : 테두리장식)이
새겨져 있다
4매의 돌로 조립된 상층기단의 중석은 다소 높은 감을 준다.
1매의 돌로 된 상층 기단의 갑석은 그 하부에 1단의 부연(副椽)이 있고,
상부에는 탑신을 받치기 위해 2단의 호형(弧形)과 각형(角形)의 몰딩이 있다.
탑신은 각 층 모두 같은 모습인데 탑신석과 옥개석을 각기 하나의 돌로 만들었다.
각 층 모두 모서리기둥만을 새기고 탑신의 면석에는 별다른 장식이 없다.
2층의 탑신부터는 체감이 심하다.
파손이 심하여 원형을 잃고 있는 옥개석은 그 하부에 3단의 층급받침이 마련되어 있고 물끊기가 파여 있으며, 반전이나 우동(隅棟)은 나타나지 않고 있다
탑신 위에는 노반(露盤)이 있고, 2개의 보륜(寶輪)이 중첩되어 있다.
이 탑은 전체적으로 보아 규모가 적고, 가늘고 길어 보이는 세장형으로, 신라의 전형탑을 충실히 따른 고려시대 탑의 전형적인 모습이라고 하겠다
[Daum백과]
문수보살 석가모니 보현보살
대웅보전 내부
대웅보전 안에는 석가 불좌상을 중심으로, 좌우에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봉안되어 있고,
불화로는 영산후불탱화, 지장탱화 및 후불벽화로 '백의관음보살좌상'이 그려져 있는데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후불벽화로는 가장 규모가 큰 것이다. 관음조가 그렸다고 하는데, 인간의 솜씨를 넘은 성스러운 모습이다.
불단의 기둥을 뒤로 물려 넓은 내부공간을 이루며 상부의 포작들은 연꽃봉오리모양으로 조각되어있고,
천장에도 가득히 장식을 했다. 안팎모두 장식으로 충만해 있지만 적절히 절제되고 통일되어 있어서 번잡한 인상은 주지는 않는다.
'백의관음보살좌상'
내부의 후불벽은 측면의 기둥열에서 약간 뒤로 물러나면서 내부공간을 확보하고 후불벽을 형성하였고
후불벽 뒷부분에는 유명한 '백의관음보살좌상'이 있는데,
이 그림은 바위에 앉아있는 백의를 입은 관음을 묘사한 것으로 조선말기의 작품으로 추정할 수 있다.
백색의 天衣는 중생의 소원을 들어주는 관세음보살의 특징을 잘 잡아낸 것으로 보이는데,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후불벽화로는 가장 규모가 큰 것이다.
대웅보전 꽃살문
정면창호는 2짝-4짝-2짝 구성으로 보다 더 안정감이 있으며
창호에는 정교하게 해바라기꽃, 연꽃, 국화꽃 등의 꽃무늬가 새겨져 있는데
그 새긴 모양이 문마다 다르고 섬세하고 아름다워 전설속의 목수가 얼마나 많은 공을 들였는지 엿볼 수 있다.
수백년의 세월속에 채색은 다 지워지고 나무결 무늬만 남아있지만 만져보면 감촉이 참 좋다.
대웅보전 꽃살문
해바라기 꽃살문
관심당(觀心堂)
대웅보전을 중심으로 동편에 있으며, 1911년 관해선사가 선실로 건립하였으며,
현재 신축하여 주지실로 사용하고 있다.
대웅보전 왼쪽으로
무설당, 지장전, 조사전
지장전과 조사전
조사전
6평의 목조한와 맞배지붕으로 된 건물로 내소사에 주석하셨던 조사 스님들을 봉안한 전각.
조사전 내부
지장전
21평의 목조한와 맞배지붕으로 된 건물로 지장보살과 명부10왕을 봉안한 전각.
2010년 건립하였다.
지장전 내부
지장전에서 바라본 내소사 풍경
삼성각
1941년 능파스님이 건립하였다.
독성(獨聖), 칠성(七星), 산신(山神)을 봉안하기 위하여 6평의 목조 맞배지붕으로 86년과 93년 2차에 걸쳐 우암혜산선사가 보수, 해체 복원하였다.
원래는 법당을 바라보고 동향(東向)으로 건립되었으나 법당과 같은 방향인 남향(南向)으로 바꾸어 세웠다 삼성각의 현판은 구당의 글씨이다.
진화사 (眞華舍)
정면 3칸, 측면2칸의 17평 목조 팔작 한와건물로서 그 사료는 찾을 수 없으나 1988년 옛터에 우암 혜산선사가 건립하여 한주실 (閑主室)로 사용하고 있다.
무설당 (無說堂)#1
정면 7칸, 측면4칸의 45평의 팔작지붕 한와지붕에 ㄱ자형의 목조 건축물로 해안선사의 “능가산의 유래”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고 만허화상의 구전에 의하면 지금으로부터 50년 전까지 당시 서편에 지금의 동승당(東僧堂, 說禪堂)과 동일한 건물이 있었는데 동민의 부주의로 인해 실화소각을 당할 때에 사적까지 소실되었는데.....
이후 잡초가 무성하여 옛자취를 찾을 수 없고 1990년에 우암 혜산선사가 옛 고지에 현 무설당을 복원 건립하여 주지실과 승방으로 사용하고 있다.
무설당#2
보종각
보물 제 277호인 고려동종을 달아 놓은 종각을 말한다.
이 건물은 현 위치에 있기까지 몇곳을 거쳤다. 정확한 건립연대를 알수 없으나 전하는 바에 의하면 본래 이 건물은 1880년경 태인에 세워졌으나
어떤 연유에서인지 부안군 상서면 김상기씨의 누각으로 사용하다가 다시 만화동의 구병서씨가 사용하였는데,
1965년 내소사 주지 원경스님께서 이곳으로 옮겨 지었다고 한다.
전에는 법당 앞마당 서남향에 설치되었는데 현 내소사 회주 우암혜산선사가 주지 재임시 현위치로 이건(移建) 하였다.
대웅보전 꽃살문에도 해바라기가 있고
동종에도 해바라기 그림이 있다.
노거수와 대웅보전
느티나무:보호수
내소사 천왕문 앞에 있는 느티나무는, 1982년 7월 부안군에서 보호수로 지정한 나무로
높이 약 20m, 둘레 약 7.5m의 규모로 수령은 약 1,000여 년에 이른다 합니다.
나무에 무성한 이끼가 덮여 있어 오랜 세월의 흐름과 정취를 느낄 수 있는 이 나무는 본래 입암마을의 할아버지 당산으로 숭상되어 온 나무로,
가지가 사방으로 뻗어 있습니다.
매년 음력 정월 보름에는 이 나무 앞에서 내소사의 스님들과 입암 마을 주민들이 함께 모여,
인줄을 치고 당산제를 지낸다고 합니다. 초봄에 부안군에 있는 내소사를 찾아 인고의 세월을 견뎌낸 고목의 아름다움을 담아봤습니다.
내소사를 찾는이에게 옥계수를 주는 수각
내소사를 두루두루 살펴보고 들어왔던 길을 되돌아 나가는 시간
요번에는 의미있게 돌아본것 같아서 후회는 하지 않겠다.
내소사를 돌아보고 돌아서 나가는 길
벚꽃나무의 훼손을 보았다.
바람이, 눈이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저 몸둥이로 봄이면 꽃을 피우려고 온갖 힘을 다할것 같다.
사천왕문옆 불교용품점 '화래원'
춘추벚꽃
내소사를 몇번이나 왔었지만
겨울초입까지 피어있는 벚꽃을 처음 알았다.
봄에도 피었었고
늦가을에도 피는데 12월 9일의 방문임에도 꽃은 아직도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내소사 춘추벚꽃
봉래루에서 바라본 사천왕문
관음봉에서 내려다본 내소사
다시 돌아서 나가는 전나무 숲길
이길을 걷는 것만으로도 마음의 묵은 때를 씻는기분이다
절집에 오는이유는 마음을 가벼이 하고
욕심으로 인한 무거운 것들을 내려놓기 위함이다
청정의 빛깔로 겨울 바람이 지나는 이길을 걷는 것만으로
무거운 마음을 잊고 가벼워지는 느낌이다.
절집은 인연이 닿아야 둘러보게 된다
절집마당을 밟기만 하여도 그절을 안다고 말할수도 있지만
곳곳을 세밀하게 둘러보지 않으면 절집에 대한 흥미를 느낄수가 없다
이번에 처음 알게 된 내소사의 이야기는
일년에 두번 피는 춘추벚꽃과
대웅전 후불벽의 '백의관음보살좌상' 또한 우리나라 가장 큰 백의보살이다.
여러번 들락이다보니 시간을 얻는 날이 있고 이렇게 구석구석 부처의 그림자를 느끼게 되었다.
다음에 또 온다면 오늘 못다 얻은 그 무엇을 다시 얻을수 있으리라
2017.12.9, 토 by gye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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