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 한쪽 비워둔다면

해외여행-유럽/샤모니 몽블랑 핵심 트랙킹

샤모니 몽블랑에 대해서-2

kyeong~ 2020. 1. 11. 12:22

샤모니 시내에 있는 동상에 관하여

샤모니시내는 동계스포츠와 산악장비 가계가 가득하여

사계절 많은 관광객으로 붐비는 곳이다

샤모니시내 정 중앙부 발마광장은 몽블랑을 찾는 사람들에게는 랜드마크이기도하다

2개의 동상이 있는데 몽블랑을 개척한 소쉬르와 발마 그리고 피카르의 동상이 있다

샤모니 몽블랑을 오르기전에 몽블랑을 개척한 사람들에 대한 얽힌 이야기를 먼저 알아둘 필요가 있다



발마(왼쪽)와 근대 등산의 아버지라 불리는 소쉬르(오른쪽)의 동상




미셸 가브리엘 파카르(Michel-Gabriel Paccard)의 동상


피카르와 발마에 얽힌이야기


샤모니의 수정 채취업자 자크 발마와 마을 의사 가브리엘 피카르는 1776년 몽블랑 초등자로서 세계 등반사에 영원히 아로새겨졌다. 

하지만 현상금이 걸려 있었고 희대의 스타가 되었던 일인지라 스캔들 또한 끊이지 않았다. 

최초의 발설자는 다름아닌 자크 발마였다,

그는 명예를 독차지하고 싶었던지 이후 피카르는 피로와 설맹과 동상으로 정상에 서지 못했다고 떠들고 다녔던 것이다,

 

이 가설이 널리 퍼지게 된 데에는 프랑스의 대문호 알렉상드르 뒤마의 역활이 크다. 

1832년 샤모니를 찾아논 뒤마는 당시 이미 전설적인 인물이 되어버린 유명 노 가이드 자크 발마를 만나 그의 영웅담을 경청한 다음 

그 것을 글로 써서 발표하였다. 

대문호에 의해 각색된 몽블랑모험담이 얼마나 커다란 대중적 파급력을 발휘했을지는 불문가지다. 

덕분에 샤모니 광장에 세워진 기념 동상의 주인공은 드 소쉬르와 자크 발마였다. 

가브리엘 피카르의 이름과 역활은 역사에서 깨끗이 지워진 것이다.

 

홋날이나마 이것을 바로잡게 된 것은 다름아닌 드 소쉬르의 미공개 일기였다. 

당시 피카르는 드 소쉬르를 자신의 집으로 초청하여 몽븡랑 초등에 관련된 이야기를 들려준 적이 있는데

소쉬르가 그것을 고스란히 일기에 적어놓은  것이다.

드 소쉬르의 일기에 따르면 피카르도 분명히 정상에 올랐을 뿐아니라

정작 상대방의 도움을 많이 받은 사람은 자크 발마였다고 한다. 

등산이 추구하는 것이 무상의 가치라고 하나 그것도 돈과 명예가걸려 있으면

이런 식의 이전투구가 벌어질  수 밖에 없는 것인가 싶어 씁씁한 웃음을 짓게 하는 일화이다.

몽블랑등정에 거대한 현상금을 걸었던

오라스 베네딕트 소쉬르 (1740-1799)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있어 산은 예로부터 푸근하고 자애로운 대상으로 인식되었다.

모든 산에는 산신(山神)이 있고 그가 산 아래 사는 우리들을 지켜준다고 믿었던 것이다.

지구상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여 세계의 지붕이라고 불리우는 히말라야 자락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그 거대한 산들은 경외의 대상이었고 신성불가침의 지역이었으며 종교의 발상지였다. 

어떤 뜻에서 히말라야는 그 자체를 하나의 종교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불교와 자이나교,  그리고 힌두교 등은 자신들의 성지로 히말라야를 꼽는다.

 

그런데 유독 유럽에서만은  사정은 달랐다.  유럽인들은 중세 이후 아주 오랜 세월동안 알프스에는 악마가  산다고 믿었다. 

이러한 태도가 4000미터 남짓되는 특정한 고도 때문에 형성된 것인지는 분명치 않다. 

어쩌면 이것은 이원론적 세계관을 가지고 있는 기독교적 특성 때문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어찌 되었건 그들에게 있어서 알프스란 악마가 살고 있고 龍이 머무는 곳( 용은 서양인인들에게 불길한 상징이다)이며

때때로 벼략과 눈사태를 일으켜 인간을 괴롭히는 존재로 인식되어 왔다. 

한마디로 그곳은 두렵고 추악하며 불편한 존재처럼 받아들여졌던 것이다.

 

근대 등반이 시작되기 위해서는 이처럼 무지몽매한 미신들이 타파되어야 했다. 

알프스 초기 등반사에서 이토록 많은 과학자들의 이름이 거론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종교적 광신과 불합리한 미신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울 수 있었던 그들이 알프스에 오르기 시작하면서 내세운 명분은 학문적 연구였다. 

실제로 그들은 알프스에 오르면서 빙하를 연구하고 지질을 탐색하고 기압을 측정했다. 

근대 등반의 여명을 밝힌 이들 과학자들 중에서도 단연 첫 손가락에 꼽혀야 될 사람이 바로 오라스 베네틱트 드 소쉬르(1740-1799)이다.

 

드 소쉬르는 스위스 제네바의 부유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천재 학자였다. 

그는 14세때 이미 대학에 진학했는데 이후 18세가 될때까지 제네바 근교의 산들을 모두 섭렬할 정도로 왕성한 모험욕을 지닌 청년이었다. 

19세가 되던 해에 대학교수직을 얻을 목적으로 태양열에 관한 물리적 추론 이라는 자연과학 논문을 제출하고 나자 약간의 찜이 생겼다. 

그가 스위스를 벗어나 알프스 저편의 프랑스 샤모니를 방문한 것은 이즈음이다. 

오늘날 알프스 최고의 산간 도시로 손꼽히는 샤모니는 그때까지만 해도 인적이 드문 산골 오지 마을에 불과했다. 

드 소쉬르는 프레방(2,526미터)의 정상에 올랐다가

바로 코 앞에 거대한 성채처럼 우뚝 솟아있는 알프스의 최고봉  몽블랑(4,807미터)을 보고 넋을 잃는다.

몹시도 흥분한 그는 "저 산의 정상에 제일 처음 오르는 사람에게 막대한 상금을 주겠노라"고 공언했다.  1760년의 일이다.

 

하지만 현상금이 걸렸음에도 불구하고 이후 25년 동안 몽븡랑 정상에 도전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 이전에도 알프스 자락을  오르내린 사람들은 많이 있었다. 

대체로 수정 채취업자,  영양 사냥꾼,  약초꾼,군인,  수도승 같은 사람들이다. 

 다시 말해 종교적 ,군사적 목적이나 생활의 방편으로 마지 못해 산에 올라야만 했던 이들이다. 

그런데 다른 이유는 없고 오직 산에 오르기 위하여 산에 오른다니 ,

그것도 대악마가 버티고 있는 몽븡랑에 올라야 한다니 선뜻 지원자가 나섰을 리 없다. 

몽블랑의 초등은 드 소수르가 상금을 내건 지 꼭 26년의 세월이 흐른 다음에야 이루어졌다. 

샤모니의 수정 채취업자 자크 발마와 마을 의사 가브리엘 파카르가 그 주인공들이다.

 

그들이 몽블랑 정상에 올랐다는 것은 당시만 해도 세상을 뒤흔들만한 빅뉴스였다. 

사람들은 산에서 내려온 그들을 둘러싸고 빗발치듯 질문을 던져댔다. " 악마를 만났는가" " 거기 용이 또아리를 틀고 있지는 않던가?"

 발마와 파카르는 기진맥진한 채로 대답했다.

" 아무것도 없소,  저 위엔 눈과 얼음과 바위뿐이요"  " 엄청나게 추워서 동상에 걸렸소""

하지만 경치만은 정말 멋졌소!" 알프스에 대한 중세적 환상이 깨어지는 순간이다. 

드 소쉬르는 물론 약속한대로 그들에게 초등 상금을 지급했다. 

그리고 알프스는 이제 인간이 오를 수 있는 산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그래서 세계 등반사는 몽블랑 초등(1786년)을 근대 등반의 시점으로 보고 드 소쉬르를 과학적 근대 등반의 아버지라고 부른다.

 

드 소쉬르는 다만 상금을 내걸었을 뿐인 학자에 머물렀던 것은 아니다, 그는 이듬해인 1787년 몸소 몽블랑 정상에 오른다.몽블랑 재등기록이다.  드 소쉬르는 정상에서 기압계를 이용하여 고도를 새로 측정했다.  그리고 3년 동안 제네바로 돌아가지 않고 계속 알프스 지역을 여행하거나 산에 올랐다.  이미 알프스에 너무 깊숙히 빠져버린 그는 어렵게 얻은 교수직마저 미련 없이 내팽개치고는 곧 "알프스 여행기(1796년)라는 4권 짜리 대 저작의 집필에 몰두했다.  집필에만 무려 17년을 쏟아 부은 이 책은 18세기 알프스 지역에 관한 최고의 자료로 손꼽히며 특히 자연 경관에 대한 묘사들이 아름다운 것으로 유명하다.

 

드 소쉬르의 전공은 찰학과 물리학과 광물학이었다.  그의 유명한 초상화를 보면 오른손에는 망치를 쥐고 있고, 

왼편에는 기압계 혹은 망원경으로 보이는 물건이 놓여 있다. 

편안하게 다리를 꼬고 앉아 있지만 눈길은 저 편 어딘가 높이 솟은 산봉우리를 향하고 있으며 앙다문 입술과 강건한 턱이 몹시도 인상적이다., 

그는 행동하는 학자였으며 공부하는 산악인이었다, 

그의 학문과 등반은 중세적 미몽을 타파하여 있는그대로의 산을 우리에게 선사해주었다. 

오늘날 아무런 의심이나 두려움 없이 즐겁게 산에 오르는 모든 사람들은 이 위대한 근대 등잔의 아버지에게 한 번쯤은 경의를 표해야 한다.



<국립스키등산학교(ENSA, Ecole Nationale de Ski et Alpinisme)>

200년이 넘는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이 등산학교는 5년 정도 스키와 등산에 관한 이론과 실기를 익힌 다음,

국가자격시험에 합격한 사람만이 스키 인스트럭터나 등산 가이드 자격이 부여되는 세계최고수준의 가이드 양성 학교로 정평이 나있다.

샤모니의 시장(市長)이 되려면 이 학교를 나와야 할 정도로 ENSA의 지명도와 역사는 유구하고 절대적이다.


몽블랑 등정을 시도하며 근대 스포츠로서의 등산이 시작됐다는 점에서 알피니즘의 발상지로도 불린다.

샤모니는 1924년 제1회 동계 올림픽을 계기로 전세계에 알려졌고, 수많은 각종 국제경기가 이곳에서 개최됐다.

따라서 알프스 등산의 출발점이기도 하며 국립 스키학교와 등산학교가 있어,

전세계 알피니스트들의 선망이 대상이 되는 곳이기도 하다.

또한 스키, 스케이트 등 동계 스포츠 시설이 잘 돼 있는 곳으로도 유명하다.


<프랑스 산악회 샤모니 지부(CAF, Club Apine Francais-Association de Chamonix)>

몽블랑 지역의 회원관리와 몽블랑 산군을 등반하러 오는 산악인과 여행자들에게 등반정보와 편의를 제공할 뿐 아니라,

프랑스산악회 회원과 일반여행자들, 그리고 외국인에게도 일정액의 회비만 납부하면 회원으로 인정하여

알프스에서 산장이나 대피소 이용시 할인 등 다양한 혜택을 받을 수 있다.




<로컬 산악가이드>

프로페셔널 산악가이드와 구조대, 국가대표 스키 선수 및 강사를 배출하는 ENSA(Ecole de Nationale de Ski et d' Alpinisim)로 부터

가이드 자격증을 획득한 산악가이드들로 트레커들의 안전산행과 트레킹을 자세히 안내를 해줍니다.

프랑스에서 산악가이드가 되기 위해서는 프랑스국립등산스키학교(ENSA, L’ecole nationale de ski et d’alpinisme)의 입학시험을 치러야 한다.

ENSA(엔사)는 스키와 등산 분야의 전문가 양성 외에도

산악환경에서의 안전에 대한 연구와 정상급의 운동가를 훈련시키는 업무를 담당하는 국가 기관이다.

ENSA의 교육은 크게 스키등산으로 나뉜다.

등산은 다시 임시가이드격인 아스피리앙가이드(Aspirant-guide) 과정과 고산가이드(Guide de haute montagne) 과정,

암벽등반 지도자(Instructor) 과정, 트레킹 가이드 과정으로 나뉘며,

스키는 스키지도자 과정과 스키패트롤(Ski-Patroller) 과정으로 나뉜다.

아스피리앙가이드 과정을 이수하기 위해서는 우선 ENSA에 정식으로 입학해야 한다.

트레킹 가이드는 겨울철 산악스키시험은 치르지 않지만 여름철에 워킹, 달리기, 독도법, 필기시험 등을 치른다.

입학시험을 통과하면 3년 동안 산악 스포츠과정기본교육과 기초교육과정, 산악스키연수와 등산연수, 협곡연수 등을 받는다.

각 과정을 이수할 때마다 평가가 이뤄지는데 이를 통과해야만 다음과정으로 넘어갈 수 있고

최종 시험 통과시에 비로소 아스피리앙가이드 자격을 획득한다.

트레킹 가이드는 ENSA 교육 2년 과정을 수료하고 졸업시험을 통과한 후에 비로소 가이드로 활동할 수 있다.


<비올레 공동묘지(Cimetière de Biollay)>

이 묘지는 ‘산악인의 판테온(Pantheon des alpinistes)’ 또는 ‘국제공동묘’라고도 불리고,

1913년 조성된 이래 이 지역출신과 몽블랑을 등반하다 죽은 사람을 포함하여 2,300여개의 무덤이 있다.

여기엔 마터호른 초등자 에드워드 윔퍼(Edward Whymper)와 가스통 레뷰파(Gaston Rebuffat), 리오넬 테레이(Lionnel Terray),

루이 나슈날(Louis Lachenal) 같은 알피니즘의 역사와 함께 했던 전설적인 등산가과 이름 모를 수많은 알피니스트들이 잠들어 있다.

국인으로서 이 몽블랑 산군에서 활발한 등반 활동을 하다가

1977년 에귀 누아르 드 페트레헤(Aiguilles Noire de Peuterey, 3773m)등반 중

사망한 故유재원도 이곳에 잠들어 있다.


유재원은 KCC(Korean Climbers Club)와 한국산악회 회원으로 활동했으며,
1972년 한국산악회 알프스 운련대원으로 파견되었다가 귀국하지 않고
현지에 남아 1977년 7월 23일 에귀 노아르 드 퓨트리 북벽(Face Nord Aiguille Noire de Peutherey) 등반중
조난사할때까지 1977년 몽블랑 뒤 따귈 '코리안 필라'코스를 초등반하는 등 5년간 23회의 공식등반기록을 비롯해 수많은 빛나는 등반활동을 했다.

특히 에귀베르트 윔퍼 쿨르와르, 레 쿠르트 부동벽, 그랑샤르모즈, 그레퐁 등 험난한 코스 대부분을 단독등반했으며,

1977년 6.17일 에귀 뒤 따귈 코리안 필라를 초등해 알프스 지역에서 최초로 '코리아'라는 이름이 붙은 루트를 개척하기도 했다.​


<에귀디미디 전망대(Aiguille du Midi, 3842m)>

프랑스 샤모니에서 가장 각광받는 전망대 에귀디미디 전망대, 유럽 3대미봉중의 한 곳인 몽블랑 정상을 조망할 수 있다

몽블랑과 에귀디미디전망대 그리고 그랑드조라스

에귀 뒤 미디는 알프스 최고봉 몽블랑과 그를 둘러싸고 있는 천 여개의 크고 작은 산봉우리들의 전망을 즐길 수 있도록

험준한 에귀 뒤 미디 산봉우리(해발 3,842m)의 꼭대기에 1955년 6월 24일에 완공한 관광 전망대이다.

완공되기 전까지는 융프라우요흐의 스핑스 전망대(3571m)가 세계 최고(最高)였으나

에귀 디 미디가 준공됨으로 세계 최고로 등극하였다.

그 후 24년간 알프스 최고의 타이틀을 유지하다가

1979년 체르마트에 마터호른 전망대 (마터호른 글라시아 파라다이스, 3883m )가 세워짐으로서

 알프스에서 두 번째 높은 전망대로 급을 낮췄다.)

에귀 뒤 미디 전망대는 알프스 최고봉인 몽블랑(Mont Blanc, 4810m), 마터호른과 아이거와 함께 알프스 3대 북벽 중 하나인 그랑드 죠라스(Grandes Jorasses, 4208m), 그리고 주변 4,000m급 알프스 고봉의 환상적인 파노라마를 감상할 수 있고 좋은 날씨엔 체르마트의 마터호른까지 조망이 가능하다고 한다.



에귀디미디 전망대를 가기 위한 필수 티켓


①샤모니 출발지
②에귀디미디 케이블 승강장(Cable car arrival-departure station)
③다리(Sky Bridge)
④빙하 출입구
⑤헬브러너(Pointe Helbronner) 곤돌라 승강장
⑥전망 테리스(Mont Blanc Gallery)
⑦전망 테리스(Mont Blanc Gallery)
⑧엘레베이터
⑨유리 전망대(Step into the void)
⑩마운틴 탑 테리스(Mountain Top Terrace)
⑪휴게실(Rest Area)
⑫전망 테라스(Mont Blanc Terrace)
⑬알파인 박물관(Vertical Area)
⑭전망 테라스(Mont Blanc Terrace)
⑮전망 테라스(Mont Blanc Terrace)


에귀디미디 전망대(Aiguille du Midi)의 스카이 브릿지와 아이스 트레일을 즐기는 트레커들


에귀디미디전망대는 고산병(mountain sickness) 증세가 올수 있으므로

고소적응을 할 수 있는 복장과 고소 예방약을 사전에 준비하는 것이 좋다

샤모니 시내는 1000m  고지 이고 에귀디미디 전망대는 3842m 높이이다

케이블카 탑승하기전 타이레놀 2알과 따뜻한 방한복을 입고 케이블카 탑승을 했더니 고소증과 추위는 견딜만 했다


TMB트레킹 후기를 마치면서 ....



세계로 나아가면 그제서야 한국이 보인다고 한다

산악인으로서  유럽 첫 트랙킹을 샤모니에서  하게 되었다

한국과 지구반대편의 땅 샤모니에서 보고 배운점중에 가장 인상 깊에 남았던것은

버스 나 케이블카를 타면 배낭은 가장 낮은곳에 내려놓았다가

정차한후 내릴때 배낭을 안고 내린후 차량밖에서 배낭을 메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그동안 전철안에서 배낭을 맨체로 서있었던 내모습이 떠올랐다

가장 쉬운일인데 모르고 살아왔던 생활습관이었다

샤모니의 산악열차에는 배낭을 입구 배낭보관선반에 두고 몸만 의자로 갔닥가 내릴때  역시 배낭을 안고 내렸다


트렉커들을 만날때마다 '봉쥬르 봉쥬르~" 습관처럼 인사를 나누었다

즐거운 마음이 가득한 인성을 볼 수 있었다

운행하는 자동차들이 시속 20~30키로 정도의 속도로 보행자 우선으로 양보하는 운전습관은 본받아야 할 모습이다

분해가 잘 되지않는 물티슈는 사용을 하지 않으며 물과 휴지를 철저하게 아끼는 마음이 가득했다

트랙킹중에  잠시 쉬는 시간 산악가이드가  알려주었는데

샤모니의 사람들은 넓은 공터가 있어도 채소나 곡식을 경작하지 않는다고 했다

샤모니는 관광수입만으로도 주민 복지가 잘 되어있으므로 농업을 위주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해

텃밭을 일구지 않는 배려의 마음이 있다고 했다

나만 잘살면 된다는 마음을 갖고 살아온 나에게는 일침을 가하는 교훈이었다


마을마다 가마솥모양의 큰 분리수거함에 버린 재활용품들은

지하터널을 통해 중앙으로 모이는 집하장치가 되어있어서

어디를 가나 깨끗한 거리를 만날수 있었다

아쉬웠던 점은 빙하가 녹아내린 물이 흐르는 시냇물은 전부 탁한 색깔이라서

우리나라 시골 어디를 가더라도 맑은 물이 흐르는 모습과는 대조적이었다

숙소가 다인실이라서 산행후 조용한 휴식시간을 가지지 못한점이 가장 큰 피로감을 느끼게했다



다시 꼭 오고 싶은 알프스 티엠비트랙킹

마음은 굴뚝같아도  또 갈수 있을지는 미지수지만

내생에 가장 값진 여행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