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 한쪽 비워둔다면

photostory- 路

2021.1.30.토. 강화 정족산성길

kyeong~ 2021. 1. 31. 12:10

겨울 자존심을 같은 한파가 또 찾아왔다

지난번보다 많은 눈은 아니지만 눈 덮인 강산도 보여준다

산벗과 인천에서 가까운 강화 정족 산성길을 걸어보기로 했다

두어 시간이면 족한 산성길

적당히 높낮이가 있어서 등에 땀이 흐르고 종아리 뒷근육이 당기는 구간도 있지만 힘든 곳은 없다

어제 강추위가 찾아온 탓에서 중무장을 하고 따뜻한 물을 필수품으로 챙기고 집을 나섰다

잿빛이던 하늘이 점점 맑아오고 바람이 없어서 산행하기에 최적의 기운이 돌았다

오랜만에 겨울 햇빛을 즐기는 날이다

 

2021.1.30. 토. 날씨 맑음

인천에서 9시 출발

산행시간 10시~12:30

동문주차장- 동문-산성길-정족산-산성길-남문-전등사-동문

성곽 2.3킬로+전등사 관람

동문주차장 주차비 2000

입장료 4000

 

 

전등사 동문주차장 -인천 강화군 길상면 온수리 625-3

겨울이라 그런지 주차장이 한산하다

식당들 사이로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동문이 나온다

동문 입구에서 입장료 4000원을 지불하고 동문에 들어서자마자 오른쪽 산성길을 따라 오르기 시작해야 한다

 

동문

 동문을 들어서자마자 오른쪽으로 산성길을 따라 오름길이 시작된다

 

삼랑성(정족산성)

일명 정족산성이라고도 한다. 성을 쌓은 연대는 확실치 않으나 단군이 세 아들에게 성을 쌓게하고
이름을 삼랑성이라 했다는 기록이 《고려사》에 보인다.

처음에는 흙으로 쌓은 토성이었는데 삼국시대에 이르러 그 위에 막돌을 맞추어가며 쌓았고 
성체 안에는 막돌을 채운 튼튼한 석성으로 축조되었으며, 
고려,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더욱 보강되었다.길이는 2,300m에 달하며 자연활석을 이용하여 축조된 성이다. 

성 내에는 381년(고구려 소수림왕 11년)에 창건된 유서 깊은 전등사가 있으며 
고려 고종 46년(1259)에는 이 성안에 궁궐(이궁)을 지었으나 현재는 무너지고 터만 남아 있다. 
조선 현종 1년에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할 사고를 설치하였는데, 무너진 것을 1998년 강화군에서 복원하였다. 
조선 고종 3년 병인 양요시 양헌수장군이 이 성을 침입하는 프랑스군을 무찌른 전승지 이기도 하다. 
이 성에는 동.서.남.북에 4대문이 있고 남문을 제외한 3개 문에는 문루가 없었다 
하나 영조때에 남문에 문루를 건립하였다 한다. 
남문의 문루(종해루)가 무너져 없어진 것을 1976년 현재와 같은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성곽길만 2.3킬로...

전등사를 둘러싸고 있는 산성길이다

최고점 정족산 정상까지는 오름길이 이어진다

동문에 들어서면 오른쪽으로 가파른 길을 따라 오르게 된다

 

점점 맑아오는 하늘

바람 한 점 없이 상쾌한 겨울이다

 

첫 번째 오르막을 오른 뒤 강화의 들판과 마을을 내려다보았지만 미세먼지 탓에 좀 뿌옇게 보인다

여기가 달맞이 고개라고 하는데 달뜨는 밤에 오면 달빛이 아름다워서 일까

달뜨는 밤 올 수 있는 날이 있을까마는....

 

복원한 곳도 있고 옛 그대로 이곳도 있고

황톳길을 따라 성곽을 걸어보는 날이다

여름에는 그늘이 없어서 걷기 힘들지만

겨울날에는 강화의 이곳저곳을 한눈에 바라보며 느슨하게 걷기 좋은 길이다

 

빠른 걸음이면 1시간이면 돌아볼 수 있는 거리지만

이 아름다운 겨울날 햇빛에서의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기 위해 몇 걸음가다 쉬고

또 몇 걸음 가다가 쉬고.... 소풍 온 것처럼 걸었다

 

바로 앞에 보이는 마을은 온수리 마을

학교 뒷산 너머로 보이는 호수는 길정리 호수

호수 뒤편으로 흐릿하게 펼쳐진 산은 진강산과 덕정산이다

 

 

조금 더 오르다가 바라본 달맞이 고개  그리고 길상면 소재지 모습

 

이 성곽길의 특징은 한쪽은 소나무 숲

성곽 반대편은 갈참나무 잡목들이 가득하다

마치 이 성곽을 지키는 낙락장송과 이 성을 기어오르는 장병들 같은 느낌이다

 

한굽이 오르면 또 한굽이... 그리 먼길은 아니지만 계속 오름길이다

앞에 보이는 곳이 정족산 정상이다

 

아이젠을 신지 않았더니 제법 미끄럽다

조심조심... 이제 정상에 거의 다 왔다

미끄러워도 눈을 밟는 기분은 참 좋다

삭막한 겨울날에 눈이 있어서 쓸쓸함을 달랠 수 있으니 말이다

 

정상부에서 바라본 길정리

진강산과 덕정산은 여전히 뿌옇게 보인다

 

 

걸어왔던 길을 뒤돌아보며...

 

정상부다

눈부신 햇살 덕에 정상에는 바람이 하나도 없다

햇살이 좋아서 자리 펴서 쉬어가고 싶은 날이다

 

225미터 낮은 정족산 정상

낮은 산이라 사람들이 찾지 않을 수도 있지만

전등사와 정족산 사고지가 있어서 사람들이 발길이 잦은 곳이다

 

정족산사고지(鼎足山史庫址)란

정족산사고지(鼎足山史庫址)는 정족산성 안 전등사 서쪽 높이 150m에 위치하며,
사고지의 보호철책 안쪽에는 주춧돌들이 놓여져 있다.
또한, 성내에는 수호사찰(守護寺刹)인 전등사가 사고를 보호해왔으므로
1910년 조선총독부 학무과 분실로 실록과 서적들이 옮겨질 때까지 보존될 수 있었다.

사고 건물이 언제 없어졌는지 자세히 알 수 없으나,
1931년에 간행된 ≪조선 고적 도보 朝鮮古蹟圖譜≫에 정족산사고의 사진이 수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이때를 전후해 없어진 것으로 보인다.
사고 건물에 걸려 있었던 ‘장사각(藏史閣)’과 ‘선원 보각(璿源寶閣)’이라 쓰인 현판이 전등사에 보존되어 있다.

이 사고에 보관되어오던 정족 산사 고본 실록들은 많은 변동은 있었지만,
임진왜란 때에 유일본으로 남은 전주사고본이 묘향산 사고로 피난했다가 마니산사고로 옮겨졌고,
이 마니산사고본의 잔존 실록들을 옮겨서 보관, 관리해 오늘에 전해질 수 있게 된 것이다.
현재 정족 산사 고본 실록은 서울대학교 도서관에서 보존, 관리하고 있다.

 

 

 

앞에 보이는 산줄기는

오른쪽으로 초피산 그 뒤로 유명산 마니산

왼쪽으로는 길상산이 시작하고 있다

그 아래로 강화의 밥맛 좋기로 유명한 강화 화도면 덕포리 평야가 펼쳐져 있다

가을날 해가 뉘엿뉘엿 넘어갈 즈음 황금들녘과 화도면 일몰이 어우러지는 풍경은 일품이다

 

정상에서 서문으로 가는 내리막길

쉬어갈 수밖에 없는 길

소나무가 자꾸 쉬어가라 잡는다

 

정족산 정상부에서 서문 쪽으로 내려오는 길의 산성

옛 모습 그대로이다

일명 정족산성이라고도 한다.
성을 쌓은 연대는 확실치 않으나 단군이 세 아들에게 성을 쌓게 하고 이름을 삼랑성이라 했다는 기록이 《고려사》에 보인다. 

처음에는 흙으로 쌓은 토성이었는데 삼국시대에 이르러 그 위에 막돌을 맞추어가며 쌓았고 성체 안에는 막돌을 채운 튼튼한 석성으로 축조되었으며, 고려,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더욱 보강되었다.

.

서문 쪽 성벽

 

전등사에서 서문 쪽으로 이어지는 길이 있는 부근

여기서 남문을 향해 다시 오름길 계단이 시작된다

동문에서 정상 그리고 내리막길까지는 성곽에 여장이 없었으니

여기서부터는 성곽에 여장이 있고

높낮이를 달리 한 포문이 있다

 

남문으로 오르는 오름길에서 올려단 정족산 정상

 

오늘의 오름길은 끝났다

잔디를 심어놓은 편평한 길이다

오늘의 마지막 휴식처..

소풍 온 것처럼 쉬면서 걸었던 흡족한 날이다

마치 햇볕과의 대화라도 나누듯이 말이다

 

서문에서 돌계단을 따라 성곽을 오르면

정족산 정상이 한눈에 바라보이고

아래로는 전등사 전각이 세밀히 바라보인다

 

이곳에 앉아 따뜻한 물을 마시며 전등사를 내려다보았다

전등사 경내가 한눈에 다 들어온다. 전등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최고의 자리다.

겨울이지만 따듯한 물을 마시며 전등사를 내려보고 있노라니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고

편안해져 자리를 털고 일어나기가 싫다.

그대로 낙락장송이 되어 전등사를 지키며 살아갈까


초지대교 방향의 풍경

 

남문으로 가는 길은 송림이 울창하다

 

남문으로 내려가는 길은 여장 옆으로 큰 돌들로 계단을 쌓았는데,

삼랑성 구간 중 경사가 가장 급한 곳이다.

눈이 내려서 내려가기 상당히 어려웠다

길지 않은 구간이 아이젠을 생략 하 내려오느라 쩔쩔매고 무사히 내려왔다

돌계단이 만들어진 후 잘못 내려가면 무릎이 충격을 받을 수 있으니 조심조심 걸어야 한다.

전등사를 찾는 분들에게 삼랑성 걷기를 권하고 싶다.

정족산성 남문 종해루

종해루는 전등사 삼랑성의 남문에 위치하고 있다. 
전등사 삼랑성 남문인 종해루는 영조 15년(1739)에 유수 권교가 수축하고 종해루라는 현판을 걸었으며, 
영조 40년(1764)에 중수하고 정조 7년(1783)에 유수 김노진이 기문을 지었다고 한다. 

1976년 남문을 중수하고 문루도 건립하였다. 
고려사지리지에 의하면 전등산을 삼랑성이라고 부르며, 
단군이 세 아들인 부여(夫餘)·부우(夫虞)·부소(夫蘇)을 시켜 쌓았다고 전해온다. 
고려 고종46년(1259) 이 성내에 궁궐을 지었으며,
 조선 현종 원년(1660)에는 조선왕조 실록을 보관할 사고를 설치했다. 

고종3년(1866) 병인양요때에는 양헌수 장군이 이 성을 침입하는 프랑스 군을 격멸한 전승지이기도 하다. 
성내에는 양헌수 장군의 전승비가 있다. 
이성에는 원래 동,서,남,북에 성문이 있었으나 문루가 없었던 것을 영조 15년(1739)에 남문에 무루를 건립하였다. 
그간에 성곽과 문루가 무너졌던 것을 1976년에 다시 복원하였다.

 

 

남문에서 전등사로 향했다

여러 번 왔던 곳이지만 시간도 넉넉하고

겨울 절집의 풍경도 보고 싶었다

 

 전등사傳燈寺
대한불교조계종 제1교구 본사인 조계사의 말사이다.
381년 아도화상이 창건한 절로, 창건 당시에는 진종사라고 했으나
1282년 충렬왕의 비인 정화공주가 승려 인기를 중국 송나라에 보내 대장경을 가져오게 하고,
이 대장경과 함께 옥등을 이 절에 헌납한 후로 전등사라 불렀다고 한다.
1605, 1614년에 일어난 화재로 건물들이 완전히 소실되었고, 그 다음해 4월부터 재건하기 시작해 1621년 2월 완성되었다. 1707년 사각을 고쳐 짓고 별관인 취향당을 지었으며, 그뒤 여러 차례에 걸쳐 중수되었다.
경내에는 대웅전(보물 제178호)·약사전(보물 제179호)·명부전·삼성각·향로각·적묵당·범종각 등이 있다.
중요문화재로는 중국 북송시대의 범종(보물 제393호)과 조선시대의 법화경판(1544)이 전해지고 있다.

기둥의 네 귀퉁이 위에는 추녀를 받들고 있는 인물상이 조각되어 있는 점이 특이한데 

이 상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설화가 전해오고 있다. 

즉 광해군 때 이 법당을 지었던 도편수(都片手)에게는 사랑하는 여인이 있었으나 

그가 불사에만 전념하는 사이 다른 남자와 눈이 맞아 도망을 가버리자 

도편수는 식음을 전폐하고 일을 하지 않다가 마음을 고쳐먹고 법당을 다시 짓기 시작했는데, 

기둥 위에 여인의 나체상을 조각하여 수치심을 느끼게 하고, 

또 머리 위에는 무거운 지붕을 얹어 고통을 줌으로써 자신을 배반한 여인에게 복수했다는 내용이다.

 

전등사에서 동문으로 나가는 길

 

양헌수 승전비

동문 바로 앞에 양헌수 승전비가 있다

강화는 외침이 잦았던 곳이다

양헌수 승전비
인천광역시 기념물 제36호.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 온수리에 있다.

화강암으로 건립된 비의 총높이는 181cm, 비신(碑身)의 높이는 163cm, 폭은 60cm, 두께는 27cm이며 단층 1칸의 비각 내에 안치되어 있다. 비 앞면에는 ‘순무 천총 양 공헌 수승 전비(巡撫千摠梁公憲洙勝戰碑)’라고 음각되어 있고, 비 뒷면에는 병인양요 양헌수 장군의 공적이 수록되어 있다.

양헌수는 1848년(헌종 14) 무과에 급제하였으며, 1865년 제주목사를 거쳤다. 1866년 프랑스군대가 강화도를 침공 점거하자, 경초 군(京硝軍)과 포수 총 549명을 거느리고 통진에서 강화도에 잠입하여 정족산을 점거하고, 11월 9일 산성을 공격하는 프랑스군 160명과 격전을 벌였다.

전투에서 프랑스군은 6명이 사살된 것을 포함하여 60∼7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이로 인해 프랑스군은 다음날인 11월 10일 강화도를 철수하였다. 정족산성 전투에서 양헌수의 군대는 전사 1명, 부상 4명의 경미한 피해를 입었다. 화력이 열세임에도 불구하고 이 같은 전과를 올린 것은 양헌수의 뛰어난 전략 때문이다.

정족산성 동문

 

정족산성은 동문에서 산행을 시작하여 두 시간여 만에 그자에 다시 왔다

아침에 하루를 시작하고 어김없이 저녁이 찾아들고

아침에 왔던 길에 저녁처럼 다시 찾아들었다

정족산성의 시계는 참 따사롭고 아름다운 풍경을 가진 곳이다

코로나 때문에 자꾸 갇혀있다는 답답함이 들지만

전망 좋고 탁 트인 능선을 따라 걷노라니 묵은 때가 벗겨지는 듯 산뜻하다

어디로 떠날지 예측할 수 없는 시간이 흐르고 있지만 희망이 있으니까 기다려 볼만하다

 

2021.1.30. 토. by gyeo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