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 한쪽 비워둔다면

photostory- 路

2022.6.8.수. 옥천여행(운무대,부소담악,정지용문학관)

kyeong~ 2022. 6. 20. 23:01

엊그제 제주도 우중 여행을 다녀왔는데

또 친구들과 옥천여행을 가려니 눈이 안 떠진다

그래도 약속은 약속이고 우정은 지켜야 하니까

화성 친구 집으로 달렸다

주중 출근 시간대이지만 밀리지 않고 7:30분 정해진 시간까지 도착했다

4명의 친구가 한차에 옮겨 타고 수다와 설렘을 섞어가며 2시간 만에 옥천에 도착했다

 

옥천 용암사

충북 옥천군 옥천읍 삼청리 478

용암사 운무대에서 바라보는 옥천의 들녘이 아름답다 하여 첫 번째로 들렸다

들어가는 길이 협소하여 버스는 불가하고

승용차만 가파른 길을 올라가면

사찰 아래 차량 몇 대 주차할 수 있는 주차장이 있다

 

용암사 대웅전

용암사 龍巖寺


대한불교조계종 제5교구 본사인 법주사(法住寺)의 말사이다.
천축국(天竺國)에 갔다가 귀국한 의신조사(義信祖師)가 552년(진흥왕 13)에 창건하였으며,
법주사의 창건보다 1년이 앞선다.

사찰명은 경내에 용처럼 생긴 바위가 있어서 용암사로 이름 지었으나,
민족 항일기 때 일본인의 손에 용바위는 파괴되어 현재에는 그 흔적만이 남아 있다.
그러나 중창 역사는 거의 전해지지 않고 있다.
다만, 신라 말 마의태자(麻衣太子)가 금강산으로 가던 길에
잠시 머물러 용바위 위에 서서 신라의 서울이 있는 남쪽 하늘을 보며 통곡하였다는 설과,
수많은 당우로 산야를 메웠던 사찰이 임진왜란의 병화로 폐허화되었다는 설만이 전해지고 있다.

그 뒤 이 절은 명맥만을 유지하다가 최근에 대웅전을 비롯한 요사채 3동을 중건하였다.
대웅전 안에는 석가모니불과 5종의 탱화가 봉안되어 있는데,
이 중 화법이 정교한 후불탱화(後佛幀畵)와 1877년(고종 14)에 조성된 신중탱화(神衆幀畵)는 가치가 있는 작품이다.

지정문화재로는 쌍석탑(雙石塔)과 마애불이 있다.
충청북도유형문화재 제3호인 쌍석탑은 2층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올린 것으로 고려시대의 작품이며,
높이는 약 4m이다. 충청북도유형문화재 제17호인 마애불은 높이 3m에 고려 중기의 작품으로 추정되고 있으나,
사찰에서는 마의태자상이라고 한다.
마의태자를 추모하였던 신라의 공장(工匠) 후손이 염불하는 태자의 모습을 그리워하며 미륵불을 조각하였다고 한다.
이 마애불은 영험이 있어 기도하면 이루어지지 않음이 없다고 전하고 있다.

용암사 천불전

누구나 깨달음을 얻으면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천불전

대웅전 뒤 계단을 따라 오르면 천불전과 운무대로 오를 수 있다

 

미국 CNN에서 선정한 한국의 아름다운 곳 50곳이라고 합니다

운해와 일출이 어우러진 풍경이 미국인의 눈에도 아름다웠던 모양이다

 

절집에 오면 언제나 풍경소리에 귀 기울이고

그 풍경소리를 따라

바람의 발자국을 따라 이리저리 마음을 가다듬고 눈을 감아보기도 한다

 

옥천 용암사 마애여래입상 (沃川 龍岩寺 磨崖如來立像)

옥천 용암사 마애여래입상(沃川 龍岩寺 磨崖如來立像)은
충청북도 옥천군 옥천읍 삼청리 용암사에 있는 마애불이다.
1976년 12월 21일 충청북도의 유형문화재 제 17호로지정되었다
신라 진흥왕 13년(552)에 창건한 용암사에 있는 마애불로 방 모양으로 암벽을 파고 그 안에 불상을 도드라지게 새겼는데,
붉은 바위색이 퍽 인상적인 작품이다.

사찰에서는 마의태자상이라고 하는데 마의태자를 추모하였던 신라 도공의 후손이 염불하는 태자의 모습을 그리워하며 미륵불을 조각하였다고 한다.
이 마애불은 영험이 있어 기도하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없다고 전한다.

발을 좌우로 벌리고 연꽃대좌 위에 서 있으며, 가늘고 긴 눈, 작은 입, 가는 코 등이 묘사된 얼굴에는
파격적인 미소에도 불구하고 도식화된 모습이 보인다.

이러한 도식적인 표현은 갖다 붙인 듯한 팔과 V자형의 규칙적인 옷주름, 좌우로 힘없이 표현된 옷자락 등 신체의 세부표현에서도 보이고 있어 세련된 통일신라 조각이 형식화되어 감을 알 수 있다.

결국 이 불상은 통일신라시대의 세련된 조각기법이 형식화되던 시기에 나타난 도식화된 작품으로 보인다.

구름이 춤춘다고 하여 운 무대라고 했다는데

10시가 넘어서는 시간... 운무는 자리를 감추고 말끔하게 옥천의 들녘이 눈에 들어온다

 

운 무대에서 내려다본 풍경

 

용암사동서석탑 沃川龍岩寺東西三層石塔

보물 제1338호.
동탑 높이 4.3m, 서탑 높이 4.1m.
동탑과 서탑은 자연암반 위에 동서로 나란히 자리하는데, 모습이 대체로 같다.
다만 동탑은 원래의 모습 그대로이지만, 서탑은 받침돌 1면과 2~3층 몸돌을 보수하였다.

석탑은 크기가 비교적 작은 편으로, 2층 받침돌 위에 3층의 몸돌과 지붕돌을 올린 모습이다.
1층의 몸돌은 매우 높은데 반해, 1층 지붕돌부터 3층 지붕돌까지는 거의 체감이 없다.
바닥돌과 아래층 받침돌의 면석은 여러 장의 돌로 구성되었고,
아래층 덮개돌은 4장의 널돌로 이루어졌다. 하지만 윗층 받침돌은 1~2장의 돌로 조립되었다.
윗층 받침돌의 덮개돌 위에는 1단의 굄을 테두리 장식으로 표현하였다.

1층 몸돌은 각 면마다 모서리 기둥을 새겼지만, 너무 높아서 전체적으로 조화를 잃은 듯이 보인다.
각 지붕돌의 네 귀퉁이에는 풍경(風磬)을 달았던 구멍이 남아 있고, 상륜부(相輪部)에도 노반(露盤)·복발(覆鉢)·보주(寶珠)만이 남아 있다.

 

석탑 앞의 동자승

용암사 범종각

 

 

용암사를 뒤로하고

부소담악으로 핸들을 틀었다

가는 길에 멋진 찻집 있으면 들리려고 했는데 배도 고프고 하여

도리뱅뱅이 유명하다는 식당으로 이동했다

도리뱅뱅 한 접시와 막걸리... 그리고 시래기를 넣고 잘 지진 민물매운탕을 먹고 나니 식곤증이 밀려온다

여행에 욕심을 가진 친구가 재촉하는 바람에 부소담악으로 향했다

충북 옥천군 군북면 추소리 263-3 

부소담악 입구

성황당 나무

 

마을 입구에서 환하게 반기는 나리꽃

 

추소정

호수 위에 떠 있는 병풍바위, 부소담악 *


충북 옥천군 군북면 부소무늬마을에 가면 부소담악이라는 절경을 만날 수 있다.
부소담악은 물 위로 솟은 기암절벽인데, 길이가 무려 700m에 달한다.
조선시대 학자 송시열이 소금강이라 예찬한 추소팔경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절경이다.

부소담악은 처음부터 물가 절벽이 아니었다.
본래 산이었지만 대청댐이 준공되면서 산 일부가 물에 잠겨 물 위에 바위병풍을 둘러놓은 듯한 풍경이 되었다.
부소담악의 장관을 제대로 바라볼 수 있는 곳이 추소정이다.
정자에 오르면 용이 호수 위를 미끄러지듯 나아가는 형상이 선명하게 보인다.

날카롭게 솟아오른 바위와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호수가 가슴을 서늘하게 하지만
수천 년 세월을 간직한 자연의 신비가 더욱 크게 다가온다.
부소담악의 능선을 따라 산행을 할 수도 있다.
협소한 능선길 아래는 시퍼런 물이 악어처럼 입을 벌리고 있는 아찔한 낭떠러지다.


부소담악을 이루고 있는 대청호 물길

 

추소정에서 건너다 보이는 부소무늬 마을

 

정자에 앉았으니 신선놀음이다

바람도 좋고 하늘도 좋고

힘들었던 모든 시간들을 버리고 추소정으로 넘나드는 바람과 벗하리

 

부소담악의 맨 끝

약 700미터의 칼 벼랑길을 걸어서 끝까지 왔다가 돌아서는 길

오늘따라 뭉게구름이 가을처럼 이쁘다

앉아서 바라보는 곳마다 구름 때문에 풍경이 빛나는 하루다

 

외부인이 왔다가 나무를 오르락내리락 짖어대는 까마귀들

 

다시 돌아서 나가는 길

세 번째 방문인데 길정비를 많이 해두어서 좀 더 안전한 트레킹이 되었다

 

부소무늬 마을

 

몇 안 되는 장승을 세워놓고 장승공원이라고 한다

소박한 공원

 

부소담악길은 윗길과 아랫길이 있는데

갈 때에는 윗길로 갔고  돌아서 나올 때는 아랫길로 나왔다

앞에 보이는 산이 고리산(환산)인데 산에 오르면 부소담악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와서 산으로 오르는 사람들이 많다

 

꽃은 다 이쁘고 다 향기로운 것 아니다

밤꽃이 피는 계절은 정말 산에 오르기 싫을 정도다

 

외래종 보리수인 것 같다

유난히 붉고 이뻐서 한컷~

 

 

 

정지용 문학관으로 이동~

도로명 주소 충북

충북 옥천군 옥천읍 하계리는 우리에게 '향수'로 잘 알려진 시인 정지용이 나고 자란 고향이다.
정지용 생가 옆에는 정지용의 삶과 문학을 이해하고 대표적인 작품을 다양한 방법으로 감상하며 체험할 수 있는 공간인 정지용문학관이 이웃해 있다.

문학전시실은 테마별로 정지용의 문학을 접할 수 있도록 지용연보, 지용의 삶과 문학, 지용문학지도, 시·산문집 초간본 전시 등 다양한 공간을 마련하고 있다.
정지용 문학관을 들어서면 안내데스크가 정면에 있고
우측으로 정지용의 밀랍인형이 벤취에 앉아 있는데 양옆에 빈자리가 마련되어 있어서
방문객이 인형과 함께 기념촬영을 할 수 있도록 마련된 소품이다.


문학전시실은 테마별로 정지용의 문학을 접할 수 있도록 지용연보, 지용의 삶과 문학,
지용문학지도, 시ㆍ산문집 초간본 전시 등 다양한 공간을 마련하고 있다.
다음으로 흥미성과 오락성을 갖춘 문학체험 공간이 마련되어 있는데
다양한 멀티미디어 기법을 활용하여 관람객이 즉석에서 문학을 체험 할 수 있다.

그 외에 정지용 시인의 삶과 문학, 인간미 등을 서정적으로 회화적으로 그린 다큐멘타리 형식의 영상이 상영되는 '영상실'과 강좌, 시 토론, 세미나, 문학 동아리 활동 공간이며
단체관람객을 위한 오리엔테이션을 진행 할 수 있는 열린 문학공간인 '문학교실'이 마련되어 있다.

 

개울 건너편에 넓은 주차장이 있다

지금은 정비가 되어서 제법 큰 개울이지만

정지용 시인이 어렸을 적에는 실개천이 었나 보다

다리에 유명한 '향수' 시가 가장 먼저 맞이하고 있다

 

향수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회돌아 나가고

얼룩빼기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뷔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조름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 베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아란 하늘빛이 그립어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려

풀숲 이슬에 함추름 휘적시든 곳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傳說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아무 러치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 벗은 안 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줍던 곳.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하늘에 석근 별

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 까마귀 우지 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집웅,

흐릿한 불빛에 돌아 앉아 도란도란거리는 곳,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개설

1927년 3월『조선지광(朝鮮之光)』 65호에 발표되었고, 작자의 제1시집 『정지용시집(鄭芝溶詩集)』(1935)에 수록되었다.
이 작품은 주권과 국토는 물론, 민족과 그 혼의 상징으로서의 국어마저 핍박받고 억압을 당한 일제강점기의 고통스러운 상황 속에서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고향 상실의 비애감을 시로 표현한 정지용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이다.

정지용의 시에서 가장 지속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향수라 할 수 있다.
향수란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지만, 그 밑바탕에는 상실된 낙원을 회복하고자 하는 소망을 간직하고 있다.
이것은 비관적인 현실인식에서 비롯되며, 따라서 그리움과 함께 비애의 정조를 띠게 된다.

내용

이 작품의 배경은 평범한 한 농촌으로 실개천이 흐르고 얼룩배기(현 표준어: 얼룩빼기) 황소가 울음을 우는 풍경으로서의
한국적인 농촌 모습이 구체적으로 제시되어 있다.
여기에 다시 가족사적인 그리움이 결합된다.
겨울밤에 늙으신 아버지가 짚베개를 돋우어 괴시는 정겨운 모습이 다가오는 것이다.

아울러 ‘질화로, 재, 뷔인 밭, 밤바람 소리’ 등의 소재가 유년의 회상을 강하게 환기시켜주는 촉매가 된다.
이제는 돌아갈 수 없는 시절로서의 소년시절이 아프게 떠오른다.
이 소년시절이란 흙과 하늘의 대조 속에서 ‘화살을 쏘는’ 상징적인 행위로 요약된다.
그것은 꿈 많던 시절 끊임없이 솟구쳐 오르기만 하던 비상의지의 발현이며, 이상을 향한 몸부림을 반영한다.

여기에 다시 가족사적인 풍정이 연결된다. ‘누이’와 ‘안해’에 대한 그리움이 그것이다.
누이와 아내는 둘 다 그리움의 표상이자 모성적인 따뜻함과 편안함을 일깨워주는 대상이 된다.

그렇지만 이 모든 것들은 현재와 연속되는 것으로 받아들여지지는 않는다.
마지막 연에서 드러나는 ‘석근 별, 모래성, 서리 까마귀, 초라한 집웅, 흐릿한 불빛’ 등의 대응 속에는
이제 추억 속에서만 살아 있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함께 비애감이 담겨져 있다.

 

 

인물 삽화는 옛 그림

꽃장식은 왜 튤립이었을까

 

피리 불고 황소 등에 타고 놀던 정지용

 

정지용 생가

1902년 시인 정지용이 태어나게 되었던 집으로 정지용은 지금의 옥천군 옥천읍 하계리에서 약상(藥商)인 아버지 정태국과 어머니 정미하의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그의 어머니가 태몽에서 용이 승천하는 꿈을 꾸면서 지용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고 17세 때 서울로 상경할 때까지 옥천의 생가에서 지냈고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였을 때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하면서 집필활동을 하던 중 납북되었으며 평양에서 사망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후 대한민국 정부에서 그를 월북 작가로 낙인하여 그의 시작(詩作)이 전부 금서목록으로 지정되어서 불온 인물로 올랐고 박정희 정부 때인 1974년에 원래 생가가 허물어지고 다른 가옥이 들어서 생가지로 남았으나 1988년 노태우 정부가 출범하고 민주화가 되면서 그 해 정지용 시인에 대한 행적이 납북으로 인정되고 시 작품도 해금되면서 옥천에서 지용회가 결성되고 1996년 지금의 옥천읍 하계리에 그의 생가를 복원하게 되었다.

옥천읍에 소재한 전형적인 초가집으로 두 채가 한 울타리에 있으며 정지용은 이 곳에서 17세까지 지내고 서울로 상경하여 교사 생활과 집필 활동을 하였다.
원래 생가는 1974년에 허물어졌으나 1988년 정지용 시인의 납북이 정부로부터 인정받고 작품들이 해금되면서 옥천에서 결성된 지용회를 통해서 생가 복원이 논의되었으며 1996년에 생가지에 초가집 두 채를 복원하였으며 바로 옆에 정지용 시인의 문학세계를 전시하는 정지용문학관이, 근처에 옥천군립 지용문학공원이 신설되었다.
매주 월요일, 새해 첫 날, 명절은 휴관한다

운전 잘해주는 친구 덕에

운무대, 부소담악, 정지용 문학관을 편하게 둘러보았다

찻집에 앉아서 두런두런 이야기도 나누고

하늘만 봐도 마음이 부픈 계절 풍선처럼 둥둥 떠다니는 마음으로 옥천여행을 했다

오랜만에 만나도 어제 만난 듯 마음을 통하는 고향 친구들...

다음에는 백령도를 같이 가기로 했다

 

 

2022.06.08. 수. by gyeo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