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 한쪽 비워둔다면

해외여행-아시아/일본

20260428~3.1 일본 대마도(한국전망대,미우다해변,가네이시성)-1day

kyeong~ 2026. 3. 2. 22:14

 

 

 

 

부산 초량동 국제여객터미널

7시 10분 미팅

니나호 9시 10분 출항

이때까지만 해도  제주도 보다 더 가깝지만 해외여행이라는 설렘에 부풀어 있다

 

부산국제여객터미널에서 본 풍경

부산 남구와 영도구를 잇는 부산항대교가 눈에 들어온다

멀리 조도 아치산이 조그맣게 눈에 들어온다

 

배에서 바라본 영도구의 모습과 봉래산이 눈에 들어온다

 

니나호 내부 모습

부산국제여객선터미널에서 대마도까지 1시간 30분 소요

미리 강풍이 분다는 일기예보 때문에 배가 안뜰줄 알았는데 

9시 10분 어김없이 배는 출발했다

1시간 전에 멀미약을 꼭 먹으라는 가이드의 부탁 때문에 멀미약을 먹은 탓인지

꿈결처럼 잠결처럼 바이킹을 타는 기분으로 졸다 보니 히타카츠항에 도착했다

 

10시 40분 대마도에 도착하여 이른 점심을 먹는다

가이드가 바람이 많이 분다고 산행을 걱정한다

시라다케 산행을 위해 왔고 강행을 할까 고민을 했는데

정상부 바위 능선이 걱정되어 여행을 선택했다

 

 

쓰시마 한국전망대(對馬 韓國展望臺, 일본어:韓国展望所、かんこくてんぼうしょ)

 

한국전망대는 쓰시마섬의 관광명소이다.

맑은 날에는 대한민국 부산광역시의 전 지역과 경상남도 거제시를 한눈에 바라볼 수 있기도 하며,

부근에는 해상자위대 레이다 기지가 보인다

특이하게도 이 관광지는 일본에서,

한국 문화를 쉽게 접할 수 있는 특성을 가지기도 한다.

나가사키현 쓰시마시 최북단에 위치하고 있다.

한국 전망대는 일본나가사키현 쓰시마시 히타카츠항에서 차량으로 약 20분 거리에 위치한

와니우라는 마을의 언덕 위에 자리 잡고 있다

 

전망대의 팔각정은 분명 한국스타일의 건축물이다.

1997년 한국의 전문가를 초빙해서 건축했다고 한다.

한국인들이 많이 찾는 곳이어서 배려한 듯하다.

계단으로 오르는 입구는 현재 장애인도 출입하기 쉽게 경사로인 램프로 바뀌었다고 한다.

실내에는 한국과의 거리가 표시되어 있다. 49.5km

 

 

해상자위대 레이다 기지

 

전망대 앞에는

조선 숙종 때 조선통신사로 이곳에 오다가

풍랑을 만나 침몰하는 바람에

불귀의 객이 된 조선통신사 100명이 넘는 일행을 기리는 위령비가 세워져 있다.

 

 

 

대마도의 조금 높은 산봉우리는 대부분 주변 바다를 살피는 망루역할을 해 왔다.

그중 하나가 한국 쪽 방향을 감시하기 좋은 곳이었던 듯하다.

한국 쪽의 움직임을 주시하기 좋은 곳이었다

지금은 관광객이 재미로 망원경을 들여다보지만

유사시엔 누가 보게 될 것인가 생각해 보니 씁쓸했다.

망루의 역할을 하기 위해 레이더 기지가 들어섰으니

더 고도의 기술로 한국 쪽을 감시할 수 있게 되었으니

한국전망대의 역할이 훨씬 더 분명해졌다고 생각했다.

 

대마도의 봄

 

미우다 해수욕장
Miuda Beach,三宇田海水浴場

 

일본 해안 100선에 선정된 기념비

 

‘일본의 해안 100선’에 선정된 작지만 반짝이는 해수욕장이다.

 

어떤 이가 미우다 해변을 보고는 

처음 봤을 땐 ‘생각보다 작네

두 번째 갔을 땐 ‘아담해서 좋다

세 번째 가니 ‘이렇게 예뻤나?’

 

대마도에 간다면 미우다 해수욕장은 꼭 한번 가봐야 할 명소다.

근처에 캠핑장과  피로를 풀 수 있는 온천이 있다고 한다

해수욕장이 개장하는 여름에는 샤워시설 등을 운영하는데

그 외의 계절에는 바다에 들어갈 수는 있어도 씻기가 힘들다

미우다 해수욕장에는 커피를 파는 작은 스낵 카가 있다.

겨울이라면 따뜻한 커피를, 여름이라면 차가운 주스 한 잔을 들고 바다를 바라보는 시간도 좋다.

 

딱 한대 스넥카~

다방커피, 아메리카노.... 한국사람이 좋아하는 음료는 다 있다

 

 

만관교 (Manseki Bridge, 万関橋) 
만제키 다리

북 대마인 히타카즈와 남 대마인 이즈하라를 연결시켜 주는 유일한 다리.
엄격하게 보면, 원래 대마도는 2 섬이 아닌 하나의 섬이었다

한국에 흔히 있을법한 다리를 왜 걸어서 건너하고 할까 의아했지만

역사적 의미를 알고 나면 왜 걷게 했는지를 알 수 있다

 

 

1900년 일본해군이 함대의 통로로 이용하기 위해 만든 해협에 지은 다리로,

세 번에 걸쳐 다시 만들면서 현재 모습이 되었다.

지금의 만관교는 길이 210m, 폭 10m로 처음 다리보다 2배 이상 길어지고 넓어졌다.

높이는 약 30m로 다리 위에서 내려다보면 아찔하다. 고소공포증이 있다면 조금 무서울 수도 있겠다.

 

다리 위에서 바라보는 양쪽의 풍경은 사뭇 다르다.

이즈하라 방면에 만관교 광장이 자리한다.

단체 버스여행자라면 이 광장에 주차를 하고 만관교를 건너볼 수 있다.

광장에는 화장실과 이시야네 돌지붕 모형이 있어 잠시 쉬어 가기도 좋다.

정류장 한쪽 옆에는 식당들과 다코야키 같은 주전부리를 파는 우메야가 있고,

반대편에 만제키 전망대로 올라가는 작은 길이 있다.

전망대에선 만관교와 주변 풍경을 감상할 수 있다는데 

가이드가 알려주지 않아서 감상할 기회를 얻지 못했다

 

대마도의 2 섬 사이를 수에즈 운하나, 파나마 운하처럼 둘로 나누고, 시멘트를 발라 버렸다.
갈라진 두 섬 사이를 건너면서 만관교 위에 잠시 멈추어, 조선의 과거를 생각하게 하는 곳이다

 

만관교는 러일 전쟁 후 조선이 일본에게 복속되는 치욕의 역사적 장소이다.

러일전쟁은 904년 2월 8일에 일본함대가 뤼순군항[旅順軍港]을 기습공격함으로써 시작되었다
1904∼1905년 만주와 한국의 지배권을 두고 러시아와 일본이 벌인 제국주의 전쟁은 
일본군의 전투의 승리로 조선의 지배권을 확립하고,
만주 진출이 가능하게 되어 만주사변과 그 후 중일전쟁발발의 계기가 된다.

일본은, 대현해협,
즉, 대마도( 러시아 지도엔 대마도가 한 섬으로 되어 있음 )를 둘로 가르고 사이에 수로를 설치한 후,
섬 뒷쪽에 주력을 숨겨 놓고 기다렸다가, 반대편에 나타난 러시아의 무적함대(흑해함대)를 전멸시킨다.

청일 전쟁(淸日戰爭)은 청나라와 일본이 조선의 지배권을 놓고 1894년 7월 25일부터 1895년 4월까지 벌인 전쟁이다.
중국에서는 갑오년에 일어났다고 하여 중일갑오전쟁( 中日甲午战争),
일본에서는 닛신센소우(日清戦争), 서양에서는 '제1차 중일전쟁'이라 부른다 
2차 중일전쟁은 1937년 7월부터 일본의 침략으로 중국 전국토에 전개된 전쟁이다.

1937년 7월7일 노구교(루커우차오)사건 중일전쟁 발발.
8월 일본군 항저우만 상륙. 9월 일본군 타이위안 점령.
10월 일본군 지난 점령. 11월 난징학살. 1938년 5월 일본군 쑤저우 점령.
10월 일본군 광둥성, 샤먼만 상륙 점령 ...등등,

난징 대학살(南京 大虐殺 / 남경 대학살)이란 중일 전쟁 도중, 난징을 점령한 일본군이 중국인을 학살한 사건이다.
이로 인해 약 5~30만 명의 중국인들이 학살되었으며, 이는 곧 중국에 잊을 수 없는 충격을 주었다.
1937년에서 1938년, 1941년에 발생하였다.
 
 

만관교의 치욕적인 역사적 배경을 알고 나니 이 꽃이 슬프게 보인다

 

이시야네 돌지붕(石屋根)

 

일본 내에서 대마도에서만 볼 수 있다는 독특한 건축양식이다.

과거 산림이 80% 이상이었던 대마도는 농작지가 부족해 식량 보존이 무척 중요했다.

바람이 많이 부는 자연환경과 화재도 자주 발생하여

식량 창고의 피해를 막고자 고안한 것이 바로 이 돌지붕 이시야네다.

고구려의 창고인 부경과 모습이 비슷한데, 기둥을 세워 바닥을 지면에서 떨어지게 해 집을 지은 다음

지붕에 돌을 올려 완성했다.

사용된 돌은 대마도에서 구하기 쉬운 평평한 돌. 바람, 화재, 습기에 강한 형태의 창고로

쌀과 같은 식량이나 생활도구 등을 수납하는 곳으로 사용했다.

독특하게도 이시야네는 대마도의 이즈하라 시이네() 마을에서만 볼 수 있는데,

대마도 공항과 만관교 주변 만관교 광장, 대마도 그린파크에 이시야네 돌지붕 모형이 있다.

 

 

히타카츠에서 이즈하라로 넘어와서....

 

 

조선통신사역사관

역사관 앞의 기념비

 

가네이시성터

 

가네이시성(金石城)은

일본 나가사키현 쓰시마시 이즈하라 정에  있는 성으로,

북동쪽에 인접한 산바라 성과 합쳐 이즈하라 성으로도 불리고 있다.

가네이시 성은 임진왜란 때 축성된 시미즈 산성의 기슭에 위치한 평성으로 쓰시마 후추번주 소 가문의 거성이다.

기네이시노야카타(金石屋形)로 불리는 거관이지만, 조선통신사를 맞이하기 위해 근세 성곽으로 개축되었다고 한다.

석벽과 해자가 조성되었지만, 천수는 세우지 않고, 우테 문에 2층의 망루를 세워 천수 대용으로 삼았다.

현재는 다이쇼시대에  해체된  오테 문이 고 사진과 문헌을 토대로 목조로 복원되었고,

1988년 태풍으로 동파된 산바라 성의 우테 문(통칭 고라이문)이 이축 복원되어 있다.

성터는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었으며, 성터에 조성된 정원이 국가 명승지로 지정되어 있다.

 

大手門(오테문. 정문)

2층 누각 구조로 일본 전통서 성곽양식을 따르고 있으며 

문헌을 바탕으로 재건된 것

 

文化入八(一八一 一 )年度 朝鮮通信使幕府接遇地 

분카 8년(1811년) 조선 통신사와 에도막부가 영접한 장소

 

조선통신사가 대마도 방문을 했을 때 머물거나 접대를 받았던 건물이  있던 자리였음을 기념하고 있다

성안의 내부는 대부분 소실되었고 일부 성문과 성곽, 돌담, 그리고 정원이 복원 정비되어 있다.

 

덕혜옹주의 기념비는 안쪽으로 들어가면 작은 비석이 세워져 있다

힘없는 조선은 덕혜옹주를 떠나보내야 했고 

그녀는 13살 어린 나이로 부모의 품을 떠나 일본의 감시와 간섭을 받으며 자랐다

 

 

가네이시성(金石城金石城)은 일본나가사키 쓰시마시 이즈하라정에 있는 성으로,

북동쪽에 인접한 산바라 성과 합쳐 이즈하라 성으로도 불리고 있다.

 

덕혜옹주결혼봉축기념비

대마도의 특징적인 돌비석

덕혜옹주의 기념비는 입구 한쪽켠에 작은 비석이 세워져 있다

대마도에 거주하던 한국인들이 두 사람의 결혼을 축하하는 뜻에서 건립했다

기념비에는 '이왕가종백작가어결혼봉축기념비(李王家宗伯爵家御結婚奉祝記念碑)'라고 적혀있다

 

풀어서 설명하면

이왕가는 조선의 황실을

종백작가는 소 다케유키 가문을 의미한다

기념비는 2001년 11월에 복원되었다

 

 

"힘없는 조선은 덕혜옹주를 떠나보내야 했고 

그녀는 13살 어린 나이로 부모의 품을 떠나 일본의 감시와 간섭을 받으며 자랐다

19살에는 대마도의 귀족 소 다케유키와 정략결혼을 하게 되고 딸(정혜)도 낳았지만 행복하진 않았다

문화적 차이와 외로움, 정신적 속박 속에서 가정불화와 정신적 고통을 당하며 살던 그녀는 정신질환을 앓게 된다"

 

 

슬픈 역사를 지닌 그곳에 꽃은 피고 지고....

 

 

하치만구 신사

 

이즈하라 하치만구 신사:(厳原八幡宮神社いづはらはちまんぐうじんじゃ 이즈하라하치만구우진쟈)는

나가사키현 쓰시마시 이즈하라마치 나카무라에 위치하고 있는 신사이다.

그러나 이 신사의 공식 명칭은 하치만구 신사(八幡宮神社)라고 가리키지만,

단순히 정의하자면 이즈하라 하치만구(厳原八幡宮)라고 표현된다.

 

하치만구 신사에는

하치만신사, 우노도신사, 텐진 신사, 와카미야 신사 이렇게 4개의 신사가 모여 있다

이중 와카미야 신사는 크리스천이었던  '고니시 마리아'와 영주사이에 낳은 '이마미야'를 합사 한 곳이라 한다

 

하치만구 신사는 이즈하라 시내 중심에 위치하고 있다

이즈하라는 대마도의 중심지이고 그 중심지에 하치만구 신사가 있다

신사 입구에 커다란 도리이가 세워져 있는데  이 도리이는 신의 영역과 인간의 영역을 구분해 주는 것이라 한다

도리이를 통해 인간의 영역에서 신의 영역으로 들어간다

 

 

하치만구 신사에는 거대한 녹나무들이  신사 건물로 올라가는 계단을 옹위하듯 버티고 서있다

하치만은 전쟁과 무예를 관장하는 신이다

조선과 바다를 사이에 두고 마주했던 대마도는 마을의 평안을 기원하기 위해 그들을 지켜줄 신사가 필요했다

 

 

신사 건물보다는 계단옆 거대한 녹나무들에게 눈이 갔다 

울퉁불퉁한 몸뚱이를 가진 녹나무들은 지역주민에게 수호신의 나무로 불려진다고 한다

수령이 천년이 넘는 녹나무도 있다고 하는데 녹나무가 나란히 있는 경우는 부부 녹나무로 불린다고 한다

 

 

 

 

이즈하라 시내풍경

나가사키현 쓰시마시의 남부에 있는 쓰시마섬에서 가장 번화한 동네로
한국으로 치면 읍내 정도에 해당된다.
옛날 쓰시마 영주의 저택과 현재 쓰시마 시청이 모두 이곳에 있으며
2004년 행정구역 통합 이전에는 대마도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정으로 1만 5000명의 인구를 자랑했다.
물론 현재에도 다른 쓰시마 일대와 별개의 시정촌이 아닐 뿐 쓰시마 인구의 절반 가량을 차지하고 있다.

 

1,300년 역사를 가진 이즈하라는 7세기부터 대마도 국의 관청이 설치된 행정, 문화의 중심지였다.

후추()라고도 불렸고, 메이지유신 이후 이즈하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에도시대에는 막부로부터 대마도 번주 소() 가문이 10만 석의 재력을 가진 번으로 인정받기도 한다.

당시로는 상당히 높은 지위로 과거 대마도의 영향력을 가늠해 볼 수 있다.

대마도 번은 조선시대 외교사절단 ‘조선통신사’가 지금의 도쿄인 에도()로 향하는 긴 여정에 안내와 호위를 맡았다.

당시 대마도는 조선과의 문화, 무역 창구의 역할을 담당했는데 그 중심이 이즈하라다.

 

이즈하라항(국제터미널)에서 도보로 10분이면 후레아이도코로 쓰시마(관광안내소)와

티아라 몰이 있는 이즈하라 중심가에 도착할 수 있다.

이 중심가를 가로지르는 왕복 2차선의 도로(이즈하라 우체국에서 세무서까지)는 예전 조선통신사를 맞이하기 위해

정비했던 바바스지도로(り)로 현재까지 사용되고 있다.

 

조선에서 일본을 향했던 통신사는 임진왜란을 기준으로 전기와 후기로 나뉜다.

통신사 명칭이 처음 나타난 것은 1413년(태종 13)이며, 1428년(세종 10)부터

본격적인 조 · 일 양국 간의 우호교린의 상징으로 파견되기 시작하였다.

조선 전기의 경우 왜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함이 주목적이었으나

후기에는 전쟁 후 강화 교섭과 동포 소환, 국정 탐색 등 정치 · 외교적인 목적이 컸다.

하지만 조선 후기 일본으로부터 일본국왕사의 조선 파견은 금지된다.

 

 

후기의 조선통신사는 1607년부터 1811년까지 12회에 걸쳐 일본을 방문하는데 약 450명 내외의 대규모 사절단이었다.

부산에서 출발, 대마도를 거쳐 지금의 도쿄인 당시 에도까지 왕복 6개월이 걸리는 길고 험난한 여정을 오갔다.

날씨가 흐리고 대한해협의 파도가 높은 날 대마도를 가기 위해 배를 타보면

그 옛날 선조들의 고충을 아주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다.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상당한 에너지가 필요했을 것이다.

 

대마도 이즈하라의 바바스지도로는 현재 왕복 2차선으로 당시에는 상당히 넓은 도로였다.

이 길이 시작되는 지점, 이즈하라 우체국 건물에는 부산 영도 우체국과 자매 우체국이라는 안내문을 찾을 수 있다.

이즈하라 곳곳에서 조선통신사를 비롯해 다양한 교류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티아라 쇼핑센터

 

티아라몰 내부 장식 모빌

 

후레아이도코로 쓰시마(관광안내소)

일본의 전통 가옥 느낌이 많이 난다

 

이즈하라는 마을의 중심에 수로가 있다

이는 과거 성을 방어하는 해자 역할과 동시에 물류 수송의 통로로 사용되었다

4명분의 간소한 식사

김치는 한 접시에 5000원 별도 주문

 

써니하우스

3인 1실 빌라형 민박

좁고 춥고.... 허술하지만

섬지방 읍내라고 생각하니 일본의 특성상 이해해야지 싶은 밤이다

전날 버스로 심야 이동을 하느라 잠을 설친 까닭인지 곤한 잠에 들 수 있어서 다행이다

새벽녘 어찌나 바람이 부는지 귀신우는 소리가 들려서 몇 번 깨기는 했지만 

여행지에서 이만하면 잘 잤다 싶은 날이다 

 

하룻밤을 묵었던  민박집의 간단한 아침 뷔페

허름한 부엌에 차려진 식사라 멈칫했지만 한국인이 운영하는 곳이라

찐 계란과 낫또를 주는 것 외에는 매일 먹는 집밥처럼 느껴졌다

하루 여정을 위해 주는 데로 그릇을 깨끗이 비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