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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이야기

중첩된 음악의 지도/'연주예술 대가들의 전집'에 대한

kyeong~ 2009. 3. 4. 14:30

중첩된 음악의 지도
- '연주예술 대가들의 전집'에 대한 -


1

연주는 정확히 작곡과 동전의 양면을 이룬다. 베토벤이 없었다면
우리는 오늘날 베토벤 음악을 들을 수가 없다. 동시에 수백 년
동안 이어져온 연주의 역사가 없다면 '베토벤 음악'을 들을 수가
없다. 연주를 제외한 음악 혹은 악보란 역사가 없는 시원의 예감
에 불과한 것인지 모른다.

확실히 연주자는 생애 동안 작곡자보다 훨씬 더한 명성과 부를
누린다. 몇몇 예외를 제외하면 작곡자는 사후에야 그 예술성을
인정받고 역사에 남는다. 그러나 연주의 경우 거꾸로 사후 100년
후에도 명성이 이어지는 경우는 극히 예외적이다. 물론 그렇다.
연주자야말로 음악의 해석가이고, 그러므로 평론가이므로 현세의
권위를 누릴 뿐, 불멸의 영광은 작곡자에게 돌려야 한다고 할 수
도 있겠다.

2

그러나 이 '공평의 원칙'은 크게 상업적이고 결국은 작곡과 연주
간의 변증법럭인 관계를 무망한 것으로 만들어버린다.
연주자에 대한 현세적 숭배 또한 작곡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연주예술에서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현상을 야기시킨다.
'빅 3'로 통칭되는 테너예술의 상업화는 그보다 더 예술성이 높은
테너 . 성악가들을 당분간 그늘 속으로 밀어넣을 뿐만이 아니다.
스스로 더욱 대중문화화하고 결국 그 안으로 포괄되면서 고전음악
이라는 '진지한 문화의 보루'를 공백 상태로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몇 십 년 단위로 보자면 옛날 연주를 들을 때 우리는 연주
예술이 계속 상업화해왔다는 점을 절로 깨닫게 된다.
옛날 연주들이 잡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그리움의 감동을 주는
것은 그 때문이다.
진지한 음악의 진지함과 대중음악의 대중성을 구분하고 결함하려
는 노력은 언제든지 가치가 있다. 왜냐면 '진지함'과 '대중성'은
우리가 각각을 '유별남' 그리고 '상업성'과 혼동하지 않는다면, 변
증법적 상호 상승관계를 이루는 까닭이다. 그러나 혼동과 절충은
특히 고전음악에서 치명적이다.
이를테면, 민요는 예술가의 전기한 해석을, 브로드웨이 뮤지컬 리
트곡은 예술가의 상업화 지향을 자극하는 경향이 있다. 파바로티
의 크리스마스 캐럴, 특히 '오 성스러운 밤'(O Holy Night)은 정말
대중적인 선율이 순정한 테너예술의 빛나는 전모를 펼쳐보이는
유리창으로 된다. 그러나 그의, '마이웨이'(My Way)는, 여전히 클
래식 성악 발성이지만, 프행크 시나트라피 대중적 핵석보다 오히려
속되고 또 속되다.
'크로스오버 '는 고전음악이 상업화되고 급기야 (대중화하는 것이
아니라) 대중문화 속으로 함몰하는 해체로(解體路)에 다름 아니다.
그렇게 연주예술을 그냥 현세의 것으로 치부할 때 우리는 고전음악의
'본질적인 절반'을 상실할 뿐만이 아니다.


3

연주에도 예술세계가 있다. 아니 연주의 경우에는 특히, 기량에도
예술세계가 있다. 그것은 '문체는 세계관'이라는 명제와 맞먹는
무게와 진실을 갖고 있다.
몇 개의 소문난 연주를 골라 계속 듣는 것은, 몇몇 작곡가의 대중
적인 곡 몇 개만을 편식하는 육행 못지않게 고전음악문화의 발전
에 해악을 끼칠 것이다. 그리고 연주자의 연주세계에 총체적으로
접근하는 일은 2중의 도움을 음악 감상자에계 또 음악문화 발전
에 주게 될 것이다.
음악사의 세계지도에 연주 생애의 세계지도가 겹치는 광경을 우
리는 그때 보게 된다. 솔로 연주자들은 음악을 죽음의 악보에서
살려낼 뿐만이 아니다. 그는 선율에 자신의 세계관을 투여하고 육
체를 부여한다. 음악이 육체를 갖는 순간을 그는 목격하며 그 육
체를 다시 선율의 생애로 뒤바꾸어낸다.
그때 연주자의 생애는 악기 음색을, 그리고 죽음을 닮는다. 연주
가 끝나도 선율의 생애는 끝나지 않는다. 연주자의 죽음을 품고
세상 속으로 제 길을 펼쳐가는 것이다. 지휘자는 악보의 혼돈을
음악의 질서로 바꾸어낼 뿐만이 아니다. 그 질서가 혼돈보다 더
온전한 것일 뿐 아니라, 더 열린 것이어야 한다.
지휘자는 악기의 생애와 음악의 생애. 그리고 연주자의 생애를 총
괄하면서 음악의 코스모스를 이루고 스스로 음악의 코스모스로
되어기는 존재이다.


4

전설적인 현악기 제작자 스트라디바리는 그래도 몇 개의 명품을
남겼다. 우리는 그 악기들이 내는 소리를 음반으로, 혹은 연주회
장에서 들을 수 있다.
그러나 옛날 연주자들은 이름만을 남겼다. 그 이름은 신비스러운
전설의 안개로 훨싸여 있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연주.미학적인
면에서 크게는 오르페우스 전설 이상의 내용을 갖지 못한다. 음반
문화의 발전은 연구사를 크게 발전시켰다. LP시대의 종언을 선고
한 CD음반은 20세기 초 연주대가들의 녹음 기록을 복각, 전집으로
내고 있다. 전집문화는 그것에 그치지 않는다.
현존하는 대가들이 자신의 연주 생애를 총괄한 '에디션'들을 헌정
받고 있다. 이 음반들을 모조리 들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진지한 예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생애이다.
생애의 총제성을 바탕으로 명작들은 더 감동적인 나이와 '역동의
빛'을 낸다. 생애에 대한 총체적 접근은 고전음악 문화를 이어갈
뿐 아니라 확대 심화하는 과제, 지금과 같은 대중문화 홍수 시대
에는 거의 불다능해 보이는 그 과제에 크게 도움이 될 것이다.
거장 지휘자들은 음악의 지도에 어떤 지울 수 없는 틀을 새겨넣었
는가. 위대한 피아니스트, 바이올리니스트, 첼리스트들은 어떤가.
연주는 작곡에 대한 주제와 변주이며, 음악의 삶과 죽음에 대한
주제와 변주이다. 작곡보다 미세하지만 작곡보다 광활한 그 연주
의 결 속으로 여행을 떠나자.
그때 음악은 감동적인 다중성을 띠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