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 한쪽 비워둔다면

photostory-골목,오지투어

대구 광역시 중구 골목투어 2코스

kyeong~ 2012. 12. 28. 20:42

 

 

2012.12.22.토.2시간소요

동산 선교원->청라언덕->제일교회(신)->계산오거리->계산성당->이상화고택->서상돈고택->

제일교회(구)->약령시->약령시박물관->대구 현대백화점.
 

 

 

 

<대구 광역시 중구 골목투어 2코스 >

최신 유행을 선도한다는 대구

대구의  한복판에서

좁은 골목을 따라 대구의 문화와 역사의 흔적을 따라

2시간여 걸었다.

낭만 청년이 노래를 불렀던 청라 언덕과

푸른 눈 선교사의 숨소리, 그리고 제일교회의 모습을

작은 눈으로 바라보고 작은 카메라에 가득 담아 봤다.

 

 

 

 

<골목투어 안내도>

 

 

 

 

 

 

 

<동산병원으로 오르는 길>

삼일운동의 벽화와 독립 유공자들의 이름이 나열된 이곳에서

대구의 100년 전을 거슬러 올라가 봅니다.

 

 

 

 

<사과나무 100년>

이 사과나무는 대구 사과나무의 시조의 2세라고 합니다.

1899년 동산병원 초대병원장 존슨이 심은 72그루 중

살아 있는 유일한 나무라고 합니다.

껍질이 얇고 당도가 좋은 서양 사과나무를 100여년전에  들여와

이곳에 심은 후

대구는 사과의 고장이 되었다고 합니다.

 

 

 

 

<동산병원 개원 100주년 기념 종탑>

전국 담장 허물기로 철거한 동산 병원의 정문과 종문을 옮겨놓았다고 합니다.

 

 

<의료 박물관>

현재 의료 박물관으로 쓰이는

스윗즈 선교사의 주택입니다.

 

 

 

 

 

여기가 청라언덕

'푸를 청''담쟁이 라'...청라靑蘿언덕

 

동산병원내에 블레어선교사 사택입니다.

고풍스런 근대 건축물로 마른 담쟁이가 뒤덮은 한겨울의 풍경으로 서있습니다.

(이곳에는 스윗즈, 챔니스 블레어 세채의 선교사 주택이 자리하고 있다)

 

대구의 몽마르트 언덕 청라언덕에는

젊은 청년의 낭만이 있습니다

계성고 선생이었던 박태준 선생청라언덕을 걸어서 등교하다가

늘 만나게 되는 여고생을 보고 첫사랑을 하게 됩니다.

내성적이었던 청년은 세월이 흐른 후

노산 이은상 선생에게 첫사랑 이야기를 들려주게 되고

노산 선생이 작사를 하게 되고

여기에 박태준선생 자신이 곡을 붙여 노래가 탄생하게 됩니다.

학창시절 가장 많이 불렀던 노래 '동무생각'이 떠올라 저절로 흥얼 거리게 됩니다.

 

 

 

 

 

<은혜정원...>

우리나라에서 살다간 선교사와 가족들의 무덤

'나는 그에게 사랑을 실천하러 간다'고 비문이 적혀 있다.

지금 부터 130년 서양 선교사들이 여기에 들어와

계성학교, 신명학교, 제중원, 미국선교원,선교사주택, 병원등을 지으며

기독교 선교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제중원>

 

제중원을 전신으로 한 대구 동산병원의 구관 중앙입구인 이 현판은

2대 동산병원장인 플랫쳐가 1931년 신축했다

대구 최초의 서양의학병원으로 1941년 태평양 전쟁중에는 경찰병원

6.25동란때에는 국립경찰병원 대구 분원으로 사용 되었다.

2010년 대구 도시철도 3호선 공사로 철거되면서 현관을 옮겨 놓은 것이다.

 

 

 

 

근대 건물 숲에 하늘을 찌를 듯한 건물은 제일 교회입니다.

근대에 세워진 제일 교회는 약령시 골목에 있으며

제일 교회는 대구와 경북지구에 최초 설립된 기독교 교회인 남성정교회가 설립된 곳이며

동산 기독병원의 전신인 제중원을 설립하여 대구에서 최초로 서양의학이 소개 된 곳이기도 하다.

 

 

 

 

 

 

제일교회 건물 옆쪽에는 '현제명 나무'가 자라고 있다.

그가 다니던 계성학교 하교 길목 언덕에 있던 나무로

수령 200년 정도인 이 이팝나무 아래서

대구 출신 음악가인 현제명이 악상을 가다듬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고향생각>~해는 져서 어두운데 찾아 오는 사람없고~♬

<그 집앞>~오가며 그집앞을 지나노라면~~♬

 

 

 

 

<3.1 운동길>

벽에는 3.1운동 당시의 모습을 사진으로 열거해 두었다.

사진을 찍는 묘미는 이런데 있다

세월이 흘러 다시 볼 수 있다는 매력이 있기때문이다.

여기 사진에는 순종황제 국장일에 서문시장의 모습을 담아둔 사진도 있다.

 

 

<3.1운동 계단>

그리 넓지 않은 계단을 따라 오를때 심심하지 않게 사진을 붙여 둔 것이다.

바닥에는 역사를 의미하는 듯한 년도가 새겨져 있다.

그리 넓지 않은 계단을 따라 오를때 심심하지 않게 사진을 붙여 둔 것이랍니다.

바닥에는 역사를 의미하는 듯한 년도가 새겨져 있습니다.

 

 

3.1운동계단에서 계산 성당으로 건너가는 계산 오거리에는

이런 재밌는 이정표가 바닥에 새겨져 있다.

 

 

 

 

<대구 계산성당>

계산성당은 영호남 천주교의 뿌리이며

100년이 넘은 고딕식 성당

남북한을 통틀어 세번째 지어진 성당이라고 한다.

 

한국 천주교회의 시작은 흔히 1784년

이승훈이 중국 베이징에서 세례를 받고 돌아왔을때부터 시작한다.

한국에 교구가 생긴건 1831년

로마 교황청이 조선 교구청을 설립해

초대교구장으로 '브뤼기에르' 주교를 임명한 것이 한국 천주교의 시작이다.

1911년 서울교구와 대구교구로 분리되고

1962년 대구교구가 대구대교구로 승격된다.

대구대교구의 중심이며 주교좌 성당인 계산 성당을 소개하고자 한다

1902년에 지어진 고딕양식의 지어진 성당이다.

 

 

 

 

 

 

 

<이상화 고택>

이상화 시인의 아호는 무량, 상화, 백아

1901년 대구 서문로에서 출생하여 1943년 계산동 고택에서 운명을 달리했다

작품에는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역천' '나의 침실로'

이 고택은 대구 시민이 지켜낸 고택이라고 한다.

 

 

 

 

여기저기 이상화의 흔적이 묻어 있다

녹슨 펌프가 흘러간 세월을 말하며 방문객을 맞이한다.

 

 

 

장독대 옆에 그의 마음을 댈래주던 감나무가 아직 살아 있고

마당을 '이상화'를 그리는 시비가 세개 한겨울에도

이방인에게 시를 읽게 한다.

친구들과 제자들을 맞이하던 사랑방이 그대로 있다..그는 가고 없어도.




<서상돈 고택>

이상돈 고택과 마주하고 있어 찾기가 쉽다.

서상돈 선생은 1850년 경북 김천에서 독실한 천주교 집안에서 태어나

보부상으로 출발하여 대구의 경제권을 좌우할 정도의 큰 재산을 모았다.

천주교의 영향으로 일찍이 신사고와 근대의식을 가져 독립협회가 창설되자 여기에 적극 참여하였다.

독립협회의 재무담당 간부로 활동하는 한편,

1898년 만민공동회에 참여하여 외세의 내정간섭을 규탄하며 국권수호와 민권신장에 힘썼다.

 하지만 수구파의 탄압으로 독립협회가 해산되자 대구로 내려와 김광제 선생과 함께 광문사를 세워 부사장이 되었다.

광문사는 외국의 선진 학문을 소개하고 실학 서적을 번역 편찬하여 근대사상을 전파하고,

 자주자강의식을 고취하는 계몽운동을 펼쳤다.

 

문화사업을 통한 광문사의 애국계몽운동의 중심에는 사장인 김광제 선생과 부사장인 서상돈 선생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외세의 간섭으로 인한 국망의 위기가 과다한 국가의 빚,

즉 국채로 인한 것으로 인식하고 국채보상운동의 뜻을 갖게 되었다.

1907년 1월 광문사 특별회의를 마친 뒤 서상돈 선생의 발의와 김광제 선생의 적극 찬동으로

국채보상운동의 횃불을 올렸다.

금주·단연으로 의연금을 모아 국채 1,300만원을 상환함으로써

자주독립국가를 이루자는 국채보상운동의 물결은 이후 전국 각지로 파급되어 거족적인 민족운동으로 발전하였다.

 이 같은 국채보상운동은 대구에 조직된 국채보상연합회의소가 주도하였고,

그 중심에는 이 운동을 발의하여 주도한 김광제 선생과 서상돈 선생이 있었던 것이다.
서상돈 선생은 일제의 탄압으로 국채보상운동이 좌절되자

사업 활동에 전념하여 실업진흥을 통한 민족실력양성에 애쓰다, 1913년 6월 30일 65세를 일기로 서거하였다.

 

 

 

 

 

 

 

대구 골목투어를 하며 잠시 이쁜 것들을 담았다

청라언덕의 마른 담쟁이

크리마스즈음에 곱게 피어 있는 남천열매..

  

 

  

 

 

 

 

 

<대구 제일교회>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30호

경북지방에 처음 생긴 기독교회로, 선교사들이 이 지방을 개화시키기 위해 근대적 의료 및 교육을 전개했던 곳이다.

 

고종 32(1895) 부산에 있었던 북장로교 선교본부가 대구로 옮겨지고,

광무 2년(1898)에 기와집 4동을 교회당으로 사용하였다.

계속해서 신도가 늘어 1908년에 재래양식과 서구 건축양식을 합작시킨 새로운 교회당을 지었다.

1933년 신도들의 헌금과 중앙교회의 성금으로 교회당을 새로 짓고 제일교회로 이름을 바꾸었다.

그 후 1937년에 이주열 권사가 높이 33m의 종탑을 세웠고, 1969년에 내부공사를 하고 1981년에 건물 뒤에 156평의 성전을 늘렸다.

 

현재 이 건물의 전체적인 양상은 평면이 남북으로 긴 직사각형이고,

앞면 중앙에 현관을 두고 오른쪽에는 종탑을 세운 간결한 고딕 건물이다.

1층은 사무실·유치원·청소년 예배실로 사용하고, 2층은 전체를 예배실로 사용하고 있다.

 

대구 제일교회는 대구의 수 많은 교회 건물 중 가장 오랜 역사를 가졌고,

기독교가 근대화에 기여한 상징물로서 근대 건축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교회에 사람이 모여들고

교회앞 목공소

그당시 흥했던 목공소로 보인다.

 

 

 

 

대구 약령시(大邱藥令市)는 

조선 후기 1658년에 개시되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대구의 한약재 시장이다.

조선 후기 경상감영 내 객사 주변에서 열렸고,

대구읍성이 철거된 후 1908년에 약전골목(남성로)으로 이전하였다.

발생 때부터 8.15광복후 얼마 동안까지 봄, 가을에 연 계절시장이었고,

현대에 이르러 상설시장으로 변모하였다.

매년 5월 대구광역시청이 주관하는 대구 약령시 축제가 있다.

 

 





 

 

 

 

 

 

 

 

 

 

 

도심을 벗어나 자연을 찾는 여행을 해왔지만

길이 거미줄처럼 연결되어 있는 대도시의 한복판에

이렇게 볼거리가 많은 여행을 하게 될줄을 몰랐다.

여기저기 살피며 사진을 찍느라 해가 지는 줄도 몰랐습니다

약령시를 빠져 나오니

어느 길을 어떻게 가야할지 모르는 밤입니다.

대구의 년말을 장식하는 불빛이 빛나는 건물을 찍어 보았습니다.

 

 

 

대구 골목안 투어 끝...........See You Aga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