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차이나타운을 실제 둘러보며 사진을 찍어 왔으나
참고 설명은 인터넷에 실려있는 여러가지 내용을 발췌하여 옮겨 온 것이 많음
이해하시고 살펴봐주세요.
2013. 1. 1. 화요일. 맑음
새해 첫날이다
새해 첫날부터 가족을 두고 어디론가 떠나기가 미안스러워
가까운 거리의 차이나 타운을 찾기로 했다
눈이 내려 있고
삼라만상이 꽁꽁 얼어붙은 계절
두툼하게 몸을 단도리 하고 인천역 앞으로 갔다.
인천 차이나타운 은 개항기에 처음 생긴 뒤 빠르게 주민이 늘어
한 때는 수천여명의 화교가 북적대며 살던 곳이다.
그 시절에 비할 수야 없다지만 이곳은 여전히 우리나라의 제1호 중국인 마을이다.
한국속의 '작은 중국'
맛있는 먹을거리가 가득하고, 그다지 넓지 않아 걸어다니며 구경할 수 있다.
맛있는 먹을거리가 가득하고, 그다지 넓지 않아 걸어다니며 구경할 수 있다.
<인천역>
차이나타운은 인천역 맞은편에 위치하고 있다
수도권 1호선 전철을 타고 종착역까지 오면된다.
인천역 밖으로 나오자마자
'한국철도 탄생역 기념탑이 보인다'
우리나라의 최초 철도구간인
인천역-제물포역으로 총 길이는 33.8km이며
종착역이자 시작점인 것이다.
<제1패루 牌樓>
차이나타운 입구에 세워진 제1'패루'牌樓
이패루는 인천중구와 자매결연을 맺고 있는 중국 산둥성 하이웨이시가 기증한 것이다
패루의 지붕에 '중화가中華街'라고 쓰여 있듯이 중국의 거리임을 알 수 있다.
차이나 타운에는 인천역 건너편(1패루:중화가), 한중문화원 입구(2패루:인화문), 자유공원입구(3패루:선린문) 3개의 패루가 세워져 있다.
패루 [牌樓]:중국
<제2패루牌樓 인화문 >
패루중에 크기는 가장 작지만 화려하다
용이 패루기둥을 감고 올란 것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차이나타운은 '용의 천국'이고 '붉음의 물결'이 가득한 곳이다.
<자유공원 입구 3패루 '선린문'>
<한중문화관>
휴관일이라 외부에서 사진만 찍었다
두마리의 용이 문화관앞을 지키고 있다.
<중국 백화점>
중국인들이 많이 살고 있는 곳이라
작고 허름하지만 중국인 백화점이 있다
그러나 실제 고객은 한국 관광객이 대부분이다.
<짜장면 박물관>
짜장면을 가장 먼저 만들기 시작한 '공화춘' 건물을 새로 단장하여
짜장면 박물관을 만들었다
아쉽게도 1월 1일은 모든 박물관이 휴관일이라 밖에서 위치만 확인 하였다
멀지 않은 곳이므로 다시 가봐야 하는 아쉬움을 남기고 돌아섰다.
최초 짜장면집 '공화춘'이 있었다는 상징 간판이 눈에 보인다
<화교협회 건물>
<중구 북성동 주민센터>
차이나타운 중심가에 위치한 탓에
주민센터의 건물을 중국풍으로 지어 조화를 이루었다.
<인천 근대화 박물관>
문은 잠겨져 있고
우체통 위의 눈이 그대로다.
<의선당>
의롭고 착하게 살자는 뜻의 의선당이란 일종의 사찰이요며 사당이다.
중국 영화를 보면 중국사람들이 사찰을 찾아 향을 피우고 절을 하는 것을 보았을 것이다.
차이나타운이니 당연히 이곳에 거주하는 화교들이 찾는 그런 곳이 있으니 바로 이곳이다.
어느라라든 외국 여행을 하게 되면 그나라의 오랜 풍습이나 종교가 담긴 사원을 봐야 그나라
문화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의선당은 바로 그런 곳이니 차이나타운에서 가장 중국적인
특색이 있는 곳이라고 할 수 있다.
<청.일 조계지 경계 계단>
이 지역은 1883년 일본 조계(租界)를 시작으로 1884년 청국 조계(租界)가 설정되는 경계지역으로
만국공원(현 자유공원)으로 연결되어 계단과 조경이 마련된 공간이다.
약 120년의 역사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본 조계지 경계계단은 중앙에 석조 계단이 형성되어 있고,
양단을 중심으로 급한 경사인 점을 감안하여 계단참을 두고,
조경식재 공간을 마련하여 공간의 이용적 측면과 인천항 경관을 여유롭게 즐길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자유공원의 서남쪽 가파른 언덕에 자리잡고 있는 계단을 중심으로 청국과 일본의 건물들이 확연하게 서로 다른 양식들로 번화하게 들어서 있다.
청·일조계지 경계계단은 계단 자체의 가치는 적으나 역사성 및 장소적 측면의 가치는 높다.
<중국 청도에서 기증한 공자상>
한,중 수교 100주년을 기념하여 건립된 공자상이다
한, 중 양국은 유교사상을 학문을 함께하던 학풍의 영향으로
향교와 서당에는 공자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건물마다 노란색과 붉은 색을 참 좋아한 것 같죠
색깔만 보면 다혈질로 보이지만
실제로 그들은 만만세 기질이라고 합니다.
인천에 북성동에 위치한 차이나 타운은 그리 크지 않은 화교 거리이다
인천에 화교촌이 조성된 것은 제물포항이 개항 될 무렵인 1844년 청나라 영사관이 건립되면서 부터라고 한다.
화교촌은 1940년까지 비단장수 왕서방이 북적되는 최대 상권이었다.
한국인들이 중국인을 일컬어 비속어 '장깨'라고 하는데
이것은 조선 말기에 중국 상인이나 사장을 '장구이'라고 불렀는데
여러사람의 입을 거쳐 내려오면서 '장깨'라고 불리게 되었는데
'장구이'는 중국에서 지금까지 쓰는 단어라고 한다.
<공화춘>
처음에 자리했던 공화춘은 '짜장면 박물관'으로 바뀌고
이곳으로 옮겨와 영업을 하고 있다
수많은 짜장면 집 중에 줄이 가장 긴 집
예전에 한번 먹어봤었지만
줄을 서서 긴 시간을 기다린 만큼 맛이 보장을 하는 것 같지 않아
이번에는 다른 집'자금성'에서 짜장면을 먹었다.
화교인들의 건물
생활이 그리 녹녹치 않은 모양이다
방치된 건물
<삼국지>
<삼국지>
중국 기전체 역사서인 〈이십사사 二十四史〉 가운데 한 권.
위(魏)·촉(蜀)·오(吳)의 3국이 정립한 시기부터 진(晉:220~280)이 중국을 통일한 시기까지의 역사를 기록했다.
서진시대에 진수(陳壽:233~297)가 지었다. 총 65권으로 〈위서 魏書〉·〈촉서 蜀書〉·〈오서 吳書〉의 3서로 구성되어 있다.
위나라를 정통으로 하여 〈위서〉에 기(紀)·전(傳)을 두고, 〈촉서〉·〈오서〉에는 열전(列傳)만 두었으며, 모두 표(表)와 지(志)는 없다. 〈
삼국지〉는 단대사(斷代史)를 나라별로 저술하여 사체(史體)의 새로운 형식을 열었다.
왕침(王沈)의 〈위서〉, 위소(韋昭)의 〈오서〉, 어환(魚豢)의 〈위략 魏略〉을 참고로 하여 편찬했으며,
복잡하고 모순된 3국의 역사를 간결한 문체로 일목요연하게 기록했다.
그러나 너무 간략하게 사실을 기록하여 빠진 부분이 많다.
남조 송나라 때 배송지(裴松之:372~451)가 본서의 간략함을 보충하기 위해 많은 책을 참조하여 상세한 주(注)를 달았는데,
이미 없어진 많은 자료를 인용했기 때문에 삼국시대 연구의 귀중한 문헌으로 평가된다.
청대에도 많은 학자들이 〈삼국지〉에 보주(補注)와 보표(補表)를 달았다.
근대에 기존의 연구성과를 종합하여 노필(盧弼)이 〈삼국지집해 三國志集解〉를 저술했다.
화교증산중학교의 담을 타고 양쪽 벽면에 삼국지 벽화가 그려져 있다.
상점과 인파가 북적거리는 골목을 걷다보면 피곤 할 수도 있는데
삼국지에 관련 된 고사성어와 77편의 벽화를 보노라면 중국역사의 한바퀴에 실렸다 온 느낌이랄까
골목투어의 색다른 재미를 얻을 수 있다.
벽화의 시작은 '유비' 관우' 장비'가 '도원결의'하는 장면부터 시작을 한다
한번쯤 읽어보았을 삼국지를 어른이 되어 하나하나 다시 되새겨보며 걷는 맛
차이나타운만의 색다른 경험일 것이다.
<삼국지 요약>
지금으로부터 1800여 년 전, 한 왕조가 쇠락하기 시작하였다. 동탁이 도성을 함락하자 혼란은 더욱 가중되고 여기저기서 민란이 일어났다.
무예 실력이 출중한 여포는 동탁의 양자가 되고 여포 휘하의 서량군은 천하무적이 된다.
조조는 나라의 혼란을 막기 위해 동탁에게 거짓으로 충성을 맹세하고 기회를 틈타 제거하려 하지만 암살 시도는 실패로 돌아가고 만다.
도성을 빠져나온 조조는 원소, 유비, 손견 등 전국 십팔로 제후를 불러모아 회맹을 갖고 함께 동탁을 무찌르기로 한다.
치열한 전투 끝에 동탁은 황제를 납치해 도주하고, 도성은 불탄다.
십팔로 제후 연맹군의 선봉 부대인 손견의 강동군이 도성에 먼저 들어가 중앙 황권을 상징하는 천자의 옥새를 우연히 얻게 되고,
이를 몰래 숨겼다가 결국 목숨을 잃는다.
옥새를 둘러싼 암투는 십팔로 제후의 내분을 불러일으켜 연맹군은 와해되고 이로써 전국은 제후들 간의 전쟁터로 변하고 만다.
천도 후 동탁의 만행은 극에 달한다.
조정 중신 왕윤은 동탁과 그의 양자 여포 간의 갈등을 이용하기로 하고
초선에게 ‘미인계’와 ‘이간계’를 합친 ‘연환계’라는 절묘한 계책을 쓰게 한다.
왕윤의 치밀한 계획과 초선의 헌신으로 연환계는 성공을 거두어 동탁은 마침내 자신의 양자 여포의 창 아래 쓰러진다.
그러나 이때에 이르러 초선은 자신의 사냥감이던 여포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끼고 마는데......
동탁의 죽음은 오히려 중앙에서 지방에 이르는 전국적인 혼란을 가중시켰을 뿐이었지만
각 세력 간의 관계는 서서히 변화하고 있었다.
황하 이북은 원래 군사 동맹 관계였던 원소와 조조가 각자 북방 제후를 정복해 나갔다.
여포 역시 그들의 표적 중 하나였다. 마침내 원소와 조조 간에 대전이 발발하니, 이것이 바로 삼국 시대의 첫 번째 대전인 관도대전이다.
이 전쟁에서 수만 군사가 수십만 대군을 무찌르는 놀라운 전투가 벌어진다. 전쟁 후, 조조는 북방을 통일하고,
그의 아래에는 하후돈, 전위, 조인, 장료 등 영웅들이 운집하여 세력은 점점 커지고 제후 중 최고의 실력자가 된다.
이때 장강 동쪽에서는 손견의 아들 손책과 손권이 각고의 노력 끝에 강동의 패주가 되어
늠름하고 지혜로운 주유를 비롯해 태사자, 감녕 등 용맹한 무사들의 충성을 끌어낸다.
중원에서는 연전연패를 거듭하던 유비, 관우, 장비 삼형제가 입지를 다지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다가 조조 군에게 참패를 당한다.
조조는 평소 그 무예를 흠모하던 관우를 사로잡지만, 그가 신하 되기를 거부하자 매우 실망한다.
결국 관우는 홀로 말을 달려 조조의 장수들을 베어내며 오관을 돌파해 의형제 유비를 찾아 떠난다.
마침내 형주에 모이게 된 유비 삼형제는 잠시 머물 곳을 얻게 된다.
유비는 인의와 덕망으로 전략 요충지인 형주의 제어권을 이양받고
‘삼고초려’ 끝에 당대 최고의 지혜를 가졌다고 일컬어지는 제갈량을 책사로 삼는 데 성공한다.
이때 조조 대군이 기습해오자 형주는 위험에 처한다.
하지만 유비는 다급한 상황에서 홀로 도주하지 않고, 수십 만 백성을 이끌고 하루에 십 리씩 느린 걸음으로 피난하기를 택한다.
이로써 유비는 더욱 큰 명성을 얻게 된다. 그들은 비록 쫓겨가는 처지였지만 장수들의 활약상은 눈부셨다.
장비는 당양교에서 천둥같은 고함으로 적군을 물리치고, 조운은 장판파의 불리한 전투에서 목숨을 걸고 유비의 아들 아두를 구해낸 것이다.
조조의 막강한 세력 앞에 더 이상 도망갈 곳이 없는 유비는 어쩔 수 없이 강동의 손권에 의탁한다.
당시 손권 진영 내부에는 주전파와 주화파가 날카롭게 대립하고 있었는데 제갈량이 나서서 조조와 결전을 치르도록 설득시킨다.
당시 손권의 세력이 강하다 할 수 없으나 지리적으로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으며 조조의 북방 군대는 수전에 약했기 때문이었다.
이 즈음 유비는 손상향과 혼인함으로써 동오와 결속을 다진다.
이후 ‘초선차전’의 전략(부족한 화살을 얻기 위해 짚단을 실은 조각배를 띄워 조조의 화살을 받게 한 것),
황개의 고육계, 장간의 반간계 등 일련의 지략 대결이 펼쳐지면서 손권과 유비 양대 세력은 연맹 관계를 맺고 조조에 대적한다.
마침내 주유와 제갈량의 치밀한 작전 끝에, 삼국 시대 두 번째 대전인 적벽대전의 막이 오른다.
제갈량은 동풍의 흐름을 미리 읽고 손권과 유비의 연합군이 화공을 펼치도록 하여
장강 위에 쇠사슬로 묶여 연결되어 있는 조조군의 전투함을 모두 불태워 대승을 거두게 한다.
조조는 참패하여 도주하다가 화용도에서 관우와 맞닥뜨린다.
관우는 옛날 조조가 자신에게 베풀었던 은혜를 갚기 위해 명을 어기고 조조를 놓아주고, 유비와 제갈량에게 벌을 청한다.
유비는 관우를 용서해주고, 제갈량이 의리를 중히 여기는 관우로 하여금 화용도를 지키게 한 것은 바로 조조의 목숨을 구해주기 위해서였음을 알게 된다.
제갈량은 조조가 죽으면 북방은 다시 큰 혼란에 빠지게 될 것이며
조조, 손권, 유비가 ‘삼족 정립’의 균형을 이룰 때 비로소 유비가 천하 통일의 실력을 키울 기회가 생길 수 있음을 잘 알고 있었던 까닭이다.
‘삼족 정립’은 적벽대전 이후 유비가 엄격하게 지킨 지침이었다.
그는 남하하여 서천을 정복하고 중국 서남의 광대한 지역을 차지했으며 그 휘하에는 조운, 황충, 마초, 위연 등 탁월한 장수들이 모여있었다.
이때 북방의 조조, 서남의 유비, 강동의 손권이 이루는 ‘삼족 정립’ 구도가 바로 ‘삼국’이다.
삼국 정립 이후 조조는 적벽대전에서 패배한 원인을 곱씹으며 전쟁의 승패는 근본적으로 한 나라의 전체적인 실력에 의해 좌우됨을 깨닫는다.
그는 농업과 경제를 진흥시키고 정치 제도를 개혁하며 파격적으로 인재를 등용하였고, 이로써 북방은 전에 없던 중흥을 이룬다.
하지만 조조의 궁정 내부에서는 적자 계승을 둘러싼 잔혹한 알력 다툼이 진행되고 있었다.
어리지만 똑똑한 아들 조충이 형제에 의해 독살을 당하고 말았는데, 천하의 영웅 조조도 범인의 정체를 알고 경악을 금치 못한다.
야심가 사마의도 정치 무대에 등장하는데 그는 자격으로 치면 가장 쳐지지만 왕위를 계승할 확률이 가장 높은 조비에게 모든 것을 걸고,
인내하며 때를 기다리는 법을 가르쳐 준다.
또 한 명의 아들 조식은 유명한 문학가이기도 하다. 조비와 조식 형제는 왕위와 함께 아름다운 여인 견비를 둘러싸고 첨예한 대립을 한다.
권력, 사랑, 우애, 욕망, 전쟁, 음모... 이 모든 것이 뒤엉켜 모두가 깊은 나락으로 빠져들고,
여기에서 조식의 <낙신부>, <칠보시>와 같은 중국 문학사의 찬란한 걸작이 탄생한다.
유비와 손권의 동맹 관계도 위태로웠다. 그들은 형주의 귀속 문제를 놓고 팽팽한 대립을 하고 있었는데,
결국 손권의 부대가 형주를 점령하고 ‘전쟁의 신’으로 추앙 받는 용맹한 장수 관우가 전사하였다.
서천은 일시에 거대한 슬픔에 잠기고 유비는 이성을 잃은 채 제갈량의 간곡한 만류에도 불구하고 강동을 토벌하기 위한 전쟁을 일으키니
이는 관우의 원수를 갚기 위함이요, 또한 전략적 요충지 형주를 되찾기 위함이었다.
유비의 대군이 쳐들어왔을 때 손권 진영도 극도로 부실해져 적을 맞아 싸울 장수마저 부족한 실정이었다.
손권은 모든 이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연륜도 없는 젊은 육손에게 군사 지휘권을 넘긴다.
육손은 자신에 대한 회의와 멸시를 느끼며 중압감 속에 유비와 8개월간 대치하면서 한여름이 되기를 조용히 기다리는데......
마침내 삼국 시대의 세 번째 대전 이릉대전의 막이 오른다.
육손은 산속 800리에 걸쳐 자리잡은 유비의 군영에 맹렬히 화공을 퍼부어 잿더미로 만든다.
유비는 패배하여 도망치다가 백제성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 윤손은 이 전투로 천재적인 군사 재능을 천하에 알렸다.
유비가 죽고 그의 아들 유선이 왕위를 계승했지만 서천의 실질적인 주인은 제갈량이었다.
그는 신중한 자세로 국가를 경영하는 한편, 여섯 번에 걸쳐 북벌에 나서는 등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지만
자신의 충심을 몰라주는 유선 등 황실 인물들의 시기를 감내해야 했다.
비슷한 상황이 조조 사후의 북방 궁정에서도 벌어지고 있었다.
이미 조비가 왕위를 계승했지만 사마의는 왕위 찬탈의 야심을 품고 있었고
두 사람은 음으로 양으로 첨예하게 대립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충성스러운 제갈량과 야심만만한 사마의라는 판이하게 다른 두 사람은 몹시 유사한 상황에 처하면서 동병상련의 벗이 된다.
제갈량은 사마의의 처지를 깊이 이해했기에 기발한 공성계를 과감하게 운용,
사마의를 무찌르고 이로써 상대의 목숨을 보전해주면서 자신은 한숨 돌릴 여유를 갖게 된다.
백여 년에 걸친 삼국 시대는 제갈량과 사마의라는 양대 지략가의 대결 속에 저물어가고......
서기 280년, 강동의 사마 가가 손씨 정권을 평정함으로써 중국은 다시 통일을 이룬다.
군웅이 활약한 파란만장한 대서사시는 이렇게 끝났다. 하지만 일세 영웅들의 이야기,
그들의 지혜와 기개는 세월이 흘러 지금까지 전해져 내려오고 있으며 전 세계인을 감동시키고 있다.
< 화교 증산학교의 정문>
<차이나타운 거리의 바닥에 그려진 문양>
< 중국의 장식품들>
12지 인형과 호랑이가 눈에 많이 들어온다.
<차이나타운의 먹거리>
물론 짜장면이 대표되는 먹거리이지만
길거리에서 파는 먹거리 또한 일반상점에서는 볼 수없는 것들이다
하나씩 사서 먹어보는 재미도 솔솔하다.
<달고나>
실제로 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준다
오랫만에 유년으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화덕구이 만두 십리향>
줄이 길죠?
차이나타운의 명물 '화덕구이 만두'를 먹기위해
추운 날씨인데도 줄이 길게 늘어져 있다.
30분은 기다려야 살 수 있을 것 같아 사진만 찍고 맛은 못 보았다.
<공갈빵>
3개 천원
잘못 툭 치면 부서진다
부서진 빵을 손에 들고 다니며 한조각씨 먹는 기분
달작지근하고 고소한 맛이 돈다
긴 골목투어에 요기거리로 참 좋았다.
꿀타래 만드는 모습은 비디오로 찍었어야 하는데
손놀림이 하도 빨라 사진을 찍고 보니 제대로 나온 것이 없네요
꿀타래는 궁중에서 임금님이 먹던 과자라고 한다
비누모양의 꿀덩어리를 가운데 구멍을 뚫고 길게 늘이기 시작하여
한번 늘일때마다 두가닥, 네가닥, 여덟가닥....2배씩 늘어나는데
1만 6000여가닥이 된 꿀실을 5cm씩 잘라서 견과류 고명을 넣어서 돌돌 말아서 포장을 한다
중국에서는 '용수당'이라고 한다.
8개들이 한상자 1만원
<전병>
1개 천원
여러가지 맛이 있다
각기 다른 맛을 사서 반쪽씩 나누어 먹어도 좋다.
난 앞서 다른 것을 먹어서
배가 불러 사먹진 못했다.
<포춘쿠키)
과자를 반으로 쪼개면
행운의 메세지가 나와요
한개씩만 사보는 재미
한 개 500원
한마디로 너무 비싸요
인천골목투어 1부-차이나타운 이야기 끝
2부는 자유공원에서 월미도까지 이어짐
'photostory-골목,오지투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원대리 자작나무 숲-사람은 언젠가는 백치가 되지 (0) | 2013.06.29 |
---|---|
골목투어-묵호 논골담길 (0) | 2013.03.18 |
2013.2.3.물로리에서 품걸리까지 (0) | 2013.02.05 |
골목투어(서울편1)-북촌 한옥마을 8경 (0) | 2013.01.04 |
대구 광역시 중구 골목투어 2코스 (0) | 2012.12.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