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야봉이 보이는 상무주암에서 반 넋이 나간 것처럼 풍경에 취하다 보니
문수암가는 길이 급해집니다.
십년을 산길을 걸어 간 이유는
아마도 이 칠암자길을 오르기 위한 수행이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문수암
두번이나 길을 잘못 들었다가 찾은 문수암
산 모퉁이 돌아 문수암이 보이는 순간
눈물이 났습니다.
저 좁은 산자락에 앉아
꽃이 피고 계절이 지나는 풍경을 보고 있는 문수암
내가 문수암 부처의 풍경이 될지라도...
기억되지 않는 풍경이 될지라도
나는 꼭 문수암 부처앞을 지나가고 싶었습니다.
문수암은 봉암결사의 주인공중의 한분이신 혜암스님이 상무주암에서 정진하시다가 그아래에 터를 닦아 만드셨다고 한다.
지금은 혜암스님의 상좌(행자)였던 도봉스님께서 기거하며 수행하고 계시는데
스승이신 혜암스님은 늘 "공부하다 죽어라"고 하셨다고 한다.
봉암결사 (鳳巖結社)란
1947년 가을에 성철, 청담, 자운, 보문, 우봉 스님이 문경의 봉암사에 모였다.
이들은 "부처님 당시의 수행가풍을 되살리자"고 결의했다.
성철 스님은 '부처님 법과 부처님 제자' 외에는 다 정리했다.
칠성탱화, 산신탱화 등 '비불교적 요소'는 모두 절에서 몰아냈다.
비단 가사와 장삼도 모아서 태워버렸다. 그리고 승복을 검소하게 바꾸었다.
스님에게 '삼배(옷)'를 올리는 것도 이때 생겼다.
'일일부작 일일불식(一日不作 一日不食)' 정신도 따랐다.
스님들이 직접 나무하고, 농사짓고, 밥하고, 물을 길었다.
소작료를 거부하고, 신도들의 보시도 받지 않았다.
한국불교 본래의 화두선풍(話頭禪風)을 재정립하는 계기를 만든 것이 바로 봉암결사였다.
꾸밈없이
언뜻보면 그냥 어느 산골의 작은 집같은 문수암
지리산의 차가운 겨울바람과 눈이 수없이 들이치고
문풍지는 한없이 떨었으리라...
그래도 보이는 곳마다 연초록 물결이 일렁일때
가장 연한 마음으로 이곳을 지나가오니....
내마음의 부처는 어쩌면 저 연초록 잎일런지도 모릅니다.
천인굴에서 나오는 석간수로 온몸의 열기를 식히고 떠나기 싫은 발걸음 옴겨봅니다.
삼불사
삼불사는 문수암에거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삼불사에는 공덕비가 여러개 있고
그뒤로 산식각이 소박하게 자리하고 있습니다.
삼불사에는 비구니 스님의 참선 도량입니다
오월이지만 제법 목이 타는 날씨
절간 마당에 들어서자마자 스님은
길손에게 식혜를 내어주어 목을 축이게 합니다.
문수암은 조선시대 창건한 절인데 정확한 기록은 없다.
개불알꽃(Lady's slipper) 또는 복주머니란
삼불사에 바라본 풍경
약수암 가는 길을 친절하게 적어 두었습니다.
약수암
삼불을 떠나 90분가량 긴 길을 내려가면 약수암이 나옵니다.
너덜길과 약간의 오르막길이 나오기도 하여 야간 지루한 길이 될 수도 있습니다.
○ 소재지 : 전북 남원시 산내면 입석리 산32
○ 약수암과 아미타목각탱(阿彌陀木刻幀)
실상사의 산내암자로 1724년(경종 4)에 천은스님이 처음으로 세웠고, 서영대사가 중수하였다.
1901년(광무 5)에 지월대사는 일당을 중수하였고, 1918년에 예암대유 스님이 개인 재산을 모아 보광전을 다시 세웠다.
1937년에는 함양의 불자 한정희의 시주금으로 중수하였으며, 1974년에 운영 비구니 스님이 두 번에 걸쳐 중수하였다.
경내에는 약수샘이 있어 항상 맑은 약수가 솟아나기 때문에 약수암이라 했다고 한다.
약수암에는 목조 팔작지붕으로 된 보광전과 목조 요사채가 있다.
보광전 안에는 정조 6년(1782년)에 만든 보물 제421호인 아미타목각탱화가 봉안되어 있다.
가로 183㎝, 세로 181㎝인 이 목각탱화는 불화의 내용을 부조 상으로 표현한 것으로 조각기법과 불화기법이 혼용된 것이다.
즉, 화면을 상단과 하단으로 나누어, 하단 중앙에는 본존불을 중심으로 4보살과 2비구를 배치하였다.
경내에는 항상 맑은 약수가 솟아나는 샘이 있어서 얌수암이라고 하였다고 합니다.
우거진 대숲을 빠져 나와
마지막 사찰 실상사로 갑니다.
실상사로 가는 길은 임도와 좁은 산 길, 두갈래가 있는데
그늘이 진 산길을 택합니다.
실상사
약수암에서 실상사로 가는 길...
부도군을 만납니다.
이곳에 모두 4기의 부도가 있습니다.
마지막 순례 실상사
천왕문을 들어섭니다.
천왕문을 들어서자 범종각의 노란리본의 물결이 가장먼저 눈에 띕니다.
세월의 눈물이 여기 실상사에도 나부끼고 있습니다.
대한불교조계종 제17교구 본사인 금산사의 말사이다.
〈실상사사적기 實相寺事蹟記〉에 의하면 828년(흥덕왕 3)에 홍척국사(洪陟國師)가
구산선문의 하나인 실상산문(實相山門)을 열면서 창건했다고 한다.
홍척은 도의(道義)와 함께 중국 당나라에 건너가 서당(西堂) 지장선사(智藏禪師)의 선법(禪法)을 받고 귀국하여
홍척은 실상사를 도의는 보림사(寶林寺)를 창건하여 선종을 전국에 전파시켰는데 이를 실상산파(實相山派)라고 한다.
그의 제자 수철(秀澈)대사와 편운(片雲)대사에 의해 절이 크게 중창되고 선풍을 떨쳤다.
창건 당시의 가람은 팔전팔방(八殿八房)으로 대웅전·약사전·장육전·명부전·극락전 등 팔전과 만화(萬化)·현묘(玄妙)·적연(寂然)·청심(淸心) 등 팔방이 있고
그외 불이문(不二門)·해탈문·천왕문(天王門)·만세루(萬歲樓)·종각 등의 당우가 대규모로 조영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1468년(세조 14) 화재로 대가람의 전각이 모두 전소된 뒤 200년 동안 폐허로 남아 있었으나
1681년(숙종 7) 벽암(碧巖)대사가 중수하고 300여 명의 승려들이 절의 중창을 상소하여 1700년(숙종 26)에 36동의 건물을 세웠다.
1882년(고종 19) 다시 소실되었으나 1884년 월송(月松) 등이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천년사찰, 호국사찰로 잘 알려진 실상사는
신라 흥덕왕(興德王) 3년(서기 828년) 증각대사 홍척(洪陟)이 당나라에 유학, 지장의 문하에서 선법(禪法)을 배운 뒤 귀국했다가
선정처(禪定處)를 찾아 2년동안 전국의 산을 다닌 끝에 현재의 자리에 발길을 멈추고 창건했다.
증각대사가 구산선종(九山禪宗) 가운데 최초로 그의 고향인 남원시 산내면 입석리에 절을 세운 것이다.
세조때(1468) 원인모를 화재로 전소됐다는 기록과 정유재란 때 왜구에 의해 전소됐다는 설이 동시에 전해지고 있다.
화재로 인해 실상사의 승려들은 숙종 5년(1680)까지 약 200년 동안 백장암에서 기거했으며
절에는 철불, 석탑, 석등 등만 남아 있었다 한다.
그러다가 숙종 때 300여 명의 수도승들과 함께 침허대사가 상소문을 올려 36채의 대가람을 중건했다.
또 순조 21년(1821) 의암대사가 두번째 중건을 했으며 고종 21년(1884)에 월송대사가 세번째 중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여기서 제3중창건을 하게 된 것은 고종 19년(1882) 어떤 사람들이 절터를 가로챌 목적으로 방화를 했기 때문이다.
또한 실상사는 6•25를 맞아서는 낮에는 국군, 밤에는 공비들이 점거하는 등 또 한차례의 수난을 겪게 됐는데 용케도 사찰만은 전화를 입지 않았다.
불상 뒤에는 아미타여래도가 있고, 불단 오른편에는 1981년에 만든 신중불화와 산신불화가 있다.
실상사의 주법당인 보광전은 1884년(고종 21)에 월송대사가 세운 것으로 정면 3칸, 측면 3칸의 건물이다.
건물 안에 모셔진 삼존상 중 본존불은 조선시대에 조성한 것이고,
좌우의 관음, 세지 두 보살은 원래 극락전에 아미타불과 함께 봉안되었던 것으로 월씨국(베트남)에서 모셔왔다고도 한다.
현재는 단청이 되어 있지 않아 소박한 모습으로 실상사를 찾는 사람들을 맞이하고 있다.
그렇지만 조선후기의 건축양식을 살필 수 있는 좋은 자료로써,
보광전 주변에는 83평을 추정케 하는 주춧돌이 남아 있어 굉장한 규모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1991년 동국대 박물관에 의한 보광전 주변 발굴에 의한 보광전 주변 발굴에서 이미 증명된 적이 있다.
전체적인 가람배치는 대웅전인 보광전(普光殿)을 중심으로
그 앞에 2개탑이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평지이탑식(平地二塔式)이며
현존하는 건물로는 보광전·약사전·극락전·명부전·칠성각 등이 남아 있다.
또한 이 절에는 많은 중요문화재가 있는데
백장암3층석탑(국보 제10호),
수철화상능가보월탑(보물 제33호),
수철화상능가보월탑비(보물 제34호),
실상사석등(보물 제35호), 실상사부도(보물 제36호),
실상사동서3층석탑 2기(보물 제37호),
실상사증각대사응료탑(보물 제38호),
실상사증각대사응료탑비(보물 제39호),
백장암석등(보물 제40호)·
실상사철조약사불좌상(보물 제41호)
·백장암청동은입사향로(보물 제420호)·
실상사약수암목각불탱(보물 제421호) 등이다
칠성각
칠성각 탱화
명부전
명부전은 갖가지 지옥의 장면을 그린 시왕(十王)의 그림이나 조각을 모신 전각으로 주존은 지장보살이다.
실상사의 명부전은 길선당(吉禪堂)의 옛터에 건립된 것으로 장육전(丈六殿) 동쪽에 있던 것으로
1821년(순조 21)에 의암대사가 옮겨 지은 것이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건물로 안에는
지장보살 삼존상, 시왕상 10구, 판관상 6구, 인왕상 2구가 있다. 지장보살상 뒤에는 1987년에 조성한 지장시왕도가 있다.
천년 세월을 보내오면서 호국사찰로 알려진 실상사에는 유독 일본, 즉 왜구와의 얽힌 설화가 많이 전해진다.
앞서 언급한 사찰의 전소원인을 정유재란 당시의 왜구에 의한 것으로 보고 있는 부분에서도 일본과 관련된 전설을 엿볼 수 있다.
또한 약사전의 약사여래불은 천왕봉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는데 천왕봉 너머에는 일본의 후지산이 일직선상으로 놓여져 있다 한다.
이 때문에 가람배치도 동쪽을 향해 대치형을 하고 옆으로 강이 흘러 대조적이다.
이 절에는 "일본이 흥하면 실상사가 망하고 일본이 망하면 실상사가 흥한다"는 구전이 있는데
이는 천왕봉 아래 법계사에서도 전해지고 있어 흥미를 끈다.
이를 증명하기라도 하듯 실상사 경내의 보광전 안에 있는 범종에 일본 열도의 지도가 그려져 있는데
스님들이 예불할 때마다 종에 그려진 일본열도를 두들겨 치고 있다.
이는 앞서 언급했듯 우리나라와 실상사가 흥하면 일본이 망한다는 구전에 의한 것으로 여겨진다.
스님들이 이 속설에 따라 범종의 일본지도를 많이 두드린 탓에
범종에 그려진 일본지도 중 훗카이도와 규슈지방만 제 모양으로 남아 있을 뿐 나머지 열도는 희미해져 가고 있다.
최근의 독도 영유권에 대한 일본의 망언이 있는 오늘날 한일관계를 두고 볼 때
보광전의 범종에 얽힌 사연이 갖는 의미는 우리에게 많은 점을 일깨워주기에 충분하다.
이 같은 전설과 구전들을 살펴볼 때 실상사는 일본에 대한 호국사찰이며 불교문화의 큰 도량임을 알 수 있다.
스님 요사채
출입금지...
이제....집으로 가야 합니다
그렇게 눈물나도록 좋은 풍경과
걸어도 걸어도 좋은 길
좁은 오솔길이 마냥 평온했던 것은
아무것도 기억하지 않고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던 마음때문이리라 생각합니다.
이제 집으로 가야 합니다.
이틀동안 비박짐을 지고 먼길을 걷고 걸었어도
이 곳을 떠나기 싫어집니다.
싫지만 .....
아름다운 꽃에도 영원히 머무는 바람은 없듯이
스쳐지나는 인연으로 생각하고 또 다른 길을 향하여 떠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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