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 한쪽 비워둔다면

photostory-寺

2014.6.14.부여 정림사지

kyeong~ 2014. 6. 15. 22:19

 

 

부소산성을 잘 들러보고 멀지 않은 곳의 정림사지로 향했다

제법 따가운 유월의 햇빛을 졸졸 따라서 부여 중심부에 위치한 정림사지까지늘 걸어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일본에 사찰의 문화를 전한 백제의 유적을 한꺼번에 둘러보자니

피곤이 몰려오기도 했지만

늘 생각하는 마음...

언제 또 올수 있을까

어쩌면 안올지도 모를 곳일지도 몰라....

그래서 늘 한치라도 더 보려고 노력을 한다.

 

2014.6.14. 부여에서.

 

 

 

정림사지 박물관

부여 정림사지는 백제 도성건설과 함께 세워진 이후 백제 사비시대에 절정을 이루는

불교문화의 중심축의 중요한 유적지이며, 특히 일본 고대 사찰의 효시를 이룬 곳으로

정림사지 박물관은

-백제 고도 부여의 상징적 명소 건립

-백제의 불교문화와 정림사의 이해공간 조성

-문화를 매개로하는 관광자원 확충

-백제 불교문화교류의 실증제시를 목적으로 건립하였다.

 

 

박물관마당의 석탑

 

박물관 내부

부여 정림사지 扶餘 定林寺址

충남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 254

사적 301호

백제가 부여로 도읍을 옮긴 시기(538-660)의 중심 사찰이 있던 자리다.

발굴조사 때 강당터에서 나온 기와에서 ‘태평 8년 무진 정림사 대장당초(太平八年 戊辰 定林寺 大藏唐草)’라는 글이 발견되어,

고려 현종 19년(1028) 당시 정림사로 불렀음을 알 수 있다.

즉 고려시대에 백제사찰의 강당위에 다시 건물을 짓고 대장전이라 했던 것으로 보인다.

정림사의 주요 건물 배치는 중문, 오층석탑, 금당, 강당에 이르는 중심축선이 남북으로 일직선상에 놓이고,

건물을 복도로 감싸고 있는 배치를 하고 있다.

그러나 특이하게 가람 중심부를 둘러싼 복도의 형태가 정사각형이 아닌, 북쪽의 간격이 넓은 사다리꼴 평면으로 되어있다.

발굴조사에서 드러난 중문 앞의 연못이 정비되어 있고, 석불좌상을 보호하기 위한 건물은 1993년에 지어졌다.

백제 때에 세워진 5층석탑(국보 제9호)과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석불좌상(보물 제108호)이 남아 있다.

출토유물로는 백제와 고려시대의 장식기와를 비롯하여 백제 벼루, 토기와 흙으로 빚은 불상들이 있다.

 

강당-금당-석탑-중문-남문-연못에 이르기까지 일직선상에 놓여 있다.

강당은 복원 되었으나 금당지는 터만 발굴하였고 미복원상태이다.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 (扶餘 定林寺址 五層石塔)

국보  제9호,백제

지정일:1962.12.20

충청남도 부여군 중앙로 6-0 (부여읍)

 

부여 정림사터에 세워져 있는 석탑으로, 좁고 낮은 1단의 기단(基壇)위에 5층의 탑신(塔身)을 세운 모습이다.

신라와의 연합군으로 백제를 멸망시킨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백제를 정벌한 기념탑’이라는 뜻의 글귀를 이 탑에 남겨놓아,

한때는 ‘평제탑’이라고 잘못 불리어지는 수모를 겪기도 하였다.

기단은 각 면의 가운데와 모서리에 기둥돌을 끼워 놓았고, 탑신부의 각 층 몸돌에는 모서리마다 기둥을 세워놓았는데,

위아래가 좁고 가운데를 볼록하게 표현하는 목조건물의 배흘림기법을 이용하였다.

얇고 넓은 지붕돌은 처마의 네 귀퉁이에서 부드럽게 들려져 단아한 자태를 보여준다.

좁고 얕은 1단의 기단과 배흘림기법의 기둥표현, 얇고 넓은 지붕돌의 형태 등은 목조건물의 형식을 충실히 이행하면서도

 단순한 모방이 아닌 세련되고 창의적인 조형을 보여주며, 전체의 형태가 매우 장중하고 아름답다.


익산 미륵사지 석탑(국보 제11호)과 함께 2기만 남아있는 백제시대의 석탑이라는 점에서도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며,

세련되고 정제된 조형미를 통해 격조높은 기품을 풍기고 있는 아름다운 작품이다.

 

백제의 장인들은 기존의 목조가 가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석재를 택했습니다.

석탑을 표현함에 있어 목조탑을 재현하기에 그쳤으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석재의 가공적 용이함을 위해 규모를 축소하고 세부 형식을 간략화하였고,

 정림사지 석탑이 축조 되었습니다.
세부 구성형식이 정형화되지 못한 미륵사지 석탑에 반하여 정림사지 5층 석탑은 정돈된 형식미와 세련되고 완숙한 미를 보여줍니다.

또한 좁고 낮은 단층기단과 각층우주에 보이는 민흘림, 살짝 들린 옥개석 단부, 낙수면의 내림마루 등에서 목탑적인 기법을 볼 수 있지만

목조의 모방을 벗어나 창의적 변화를 시도하여 완벽한 구조미를 확립하였고,

우리나라 석탑의 시원양식으로서 그 의의가 큽니다.

<정림사지 박물관에서 내용 발췌>

 

정림사의 창건연대는 사비천도 이후부터 백제 멸망 전까지인 538~660년에 석탑으로 건립되었는지,

혹은 목탑 이후에 석탑이 건립되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탑의 양식으로 보아 미륵사지 석탑에서 진일보한 석탑으로서 전형적인 모습을 나타내고 있기 때문에

 미륵사지 석탑보다는 다소 늦게 건립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정림사지 박물관에서 내용 발췌>

 

 

 

 

 

<정림사지 박물관에서 내용 발췌>

 

정림사 강당과 금당지

 

 

 

   

부여 정림사지 석조여래좌상 (扶餘 定林寺址 石造如來坐像)

보물  제108호 ,백제

충남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 254번지

 

충청남도 부여의 정림사지에 남아 있는 석조불상으로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국보 제9호)와 남북으로 마주보고 있다.

정림사는 6세기 중엽에 처음 창건되어 백제 멸망 때까지 번창하였던 사찰로 고려시대에 다시 번창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 석불상은 고려 때의 번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지금의 머리와 보관은 제작 당시의 것이 아니라, 후대에 다시 만들어 얹은 것으로 보인다.

신체는 극심한 파괴와 마멸로 형체만 겨우 남아 있어 세부적인 양식과 수법을 알아보기 어렵지만,

어깨가 밋밋하게 내려와 왜소한 몸집을 보여준다.

 좁아진 어깨와 가슴으로 올라간 왼손의 표현으로 보아 왼손 검지 손가락을 오른손으로 감싸쥔 비로자나불을 형상화한 것으로 추정된다.

불상이 앉아 있는 대좌(臺座)는 상대·중대·하대로 이루어진 8각으로 불상보다 공들여 만든 흔적이 역력하다.

상대는 연꽃이 활작 핀 모양이며, 중대의 8각 받침돌은 각 면에 큼직한 눈모양을 새겼다.

하대에는 연꽃이 엎어진 모양과 안상을 3중으로 중첩되게 표현했다.

현재 불상이 자리잡고 있는 위치가 백제시대 정림사지의 강당 자리로

이곳에서 발견된 명문기와를 통해 이 작품은 고려시대에 절을 고쳐 지을때 세운 본존불로 추정된다.

 

 

오랫만에 맛보는 앵두

앵두가 참 굵다

눈치를 보지 않고 몇개를 따서 입에 넣는 행운을 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