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인사'를 모르는 이가 있을까
'팔만대장경'을 모르는 이가 있을까
그렇지만 얼마나 아느냐고 물어온다면
얼만큼 대답을 할 수가 있을까
가야산 봉우리에서
제일봉 봉우리에서
"저기쯤 해인사가 있구나"...그렇게 바라보던 곳이다.
참으로 와보고 싶었던 곳이다
인천에서 멀고도 먼거리
아무리 멀어도 인연이 있었다면 진즉에 왔을 것이요
아무리 가까워도 인연이 없으면 멀리 있는 사찰에 불과하다.
올해는 행운이 많은 해이다
이 먼 곳까지 달려와
해인사 경내를 걷고
삼배를 할 수 있다니....
조용히 내리는 비의 걸음으로
마음을 고요히하고
팔만대장경과 해인사 이모저모를 보이는 만큼 살피고 왔다.
2014.6.21.토.흐림
陜川 海印寺 사적 504호
법보종찰 해인사 합천 가야산 남쪽 자락에 자리잡은 해인사는 불교의 불, 법, 승 3보 가운데 법보사찰이다. 불보사찰 통도사, 승보사찰 송광사와 함께 법보종찰인 해인사는 우리나라 3보 사찰중 하나 이다 삼보사찰이란 통도사는 부처님의 진신사리(眞身舍利)와 가사(袈娑)를 봉안한 불보(佛寶)사찰, 해인사는 부처님의 말씀(法)인 팔만대장경을 간직하고 있는 법보(法寶) 사찰, 송광사는 보조 국사(普照國師)이래 열여섯 명의 국사를 배출했기 때문에 승보(僧寶)사찰로 삼보사찰이라 한다. 해인사 장경각에는 팔만대장경이 보관돼 있다. 해인사는 14개의 암자와 75개의 말사를 거느린 거찰로 해인본사는 대적광전을 비롯, 승가대학, 심검당을 두고 있다. 해인사가 있는 가야산은 빼어난 산세로 조선팔경의 하나로 손꼽힐만큼 절경이다. 특히 매표소에서부터 이어지는 홍류동 계곡의 풍치가 뛰어나다. 세계문화유산 및 국보·보물 등 70여점의 유물이 산재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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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사는 신라시대에 그 도도한 화엄종의 정신적인 기반을 확충하고 선양한다는 기치 아래, 이른 바 화엄십찰華嚴十刹의 하나로 세워진 가람이다. 화엄종의 근본 경전인 화엄경은 4세기 무렵에 중앙아시아에서 성립된 대승 경전의 최고봉으로서, 그 본디 이름은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이며 동양문화의 정수라고 일컬어진다. 이 경전에 해인삼매海印三昧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해인사 이름은 바로 이 '해인삼매'에서 비롯되었다.
해인삼매는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한 없이 깊고 넓은 큰 바다에 비유하여, 거친 파도 곧 중생의 번뇌 망상이 비로소 멈출 때 우주의 갖가지 참된 모습이 그대로 물 속에(海)에 비치는(印) 경지를 말한다. 이렇게 여실如實한 세계가 바로 부처님의 깨달음의 모습이요 우리 중생의 본디 모습이니, 이것이 곧 해인삼매의 가르침이다. 그 제자인 이정理貞화상이 신라 제40대 임금 애장왕 3년에, 곧, 서기 802년 10월16일에 왕과 왕후의 도움으로 지 금의 대적광전에 자리에 창건하였다.
해인사는 한국불교의 성지이며 또한 세계문화유산 및 국보 보물 등 70여 점의 유물이 산재해 있다. 국내 최대 사찰로서 명산인 가야산 자락에 위치하여, 가야산을 뒤로하고 매화산을 앞에 두고 있어 그 웅장한 모습과 주변 경관이 어우러져 경의로울 뿐 아니라 송림과 산사가 어울어져 연출하는 설경을 보는 이로 하여금 신비경에 젖게 한다.
(해인사 홈페이지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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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보종찰가야산해인사"
해인사 입구 현판이다.
여기서 1km정도 홍류동 계곡을 끼고 오르면
해인사와 팔만대장경판전과 성보박물관을 만날 수있다.
입장료 3000원, 주차료 4000원이다.
해인사 성보박물관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해인사에는 민족의 보배이자,
세계문화유산으로 인정받은 팔만대장경과 판전을 비롯하여 수많은 불교 관련유물뿐만 아니라
광해군 복식을 비롯한 다양한 유물들이 해인사, 그리고 산내 암자, 말사 등을 통해 전해지고 있다.
하지만 이처럼 중요하고 잘 보존되어야 할 문화재들이 그 동안 도난이나 훼손 등의 위험요인에 노출되어 있다.
이에 문화재의 안전과 보다 효율적인 관리와 보존, 연구를 위해
뜻있는 스님들께서 그 뜻을 같이하여
1997년부터 해인사 성보박물관 공사를 진행해, 2000년에 완공, 2002년 7월 5일 개관 이후 오늘에 이르고 있다.
입구의 작은 누각
박물관에서 해인사 일주문까지 오르는 길이 참 싱그럽다.
서서히 밀려오는 더위를 식혀주는 길이다.
이렇게 걷다보면 오른쪽에 성철스님 사리탑을 만나게 된다
여느탑과는 좀 다른 모양이다
맨위의 구모양은 완전한 깨달음과 참된 진리를 상징한다고 한다.
성철스님
1936년 해인사(海印寺)에서 동산(東山) 대종사(大宗師)에게 사미계(沙彌戒)를 받고 승려가 되었다.
1938년 운봉(雲峰)을 계사(戒師)로 보살계(菩薩戒) · 비구계(比丘戒)를 받았고서
불타(佛陀)답게 살자고 결사(結社)하는 등 새로운 선풍(禪風)을 고양(高揚)시켰다.
1967년 해인총림(海印叢林) 초대 방장(方丈)이 되었고
1981년 대한불교조계종 제7대 종정(宗正)에 취임하였다.
세속에 거의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해인사 안내도
해인사 고려 대장경 판전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임을 알리는 비석이다
일주문 맞은편에 있다
일주문
왼쪽 석주는 원표
오른쪽 석주는 당간지주
원표(元標)는
일주문 앞 석주가 하나 있다. 자세히 살펴보면 원표 (元標)라고 되어 있다.
원표란 글씨 밑에는 글자가 음각되어 있는데 '陜川郡 九里三十三町, 冶爐市 四里十三町'이란 글씨가 보인다.
원표란 해인사를 기점하여 거리를 적어 놓은 이정표이다.
석주 사면에 모두 돌아가면서 글씨가 있는데
金泉郡(거리표시 없음)
星州郡(거리표시 없음)
晋州郡 二十二里九町, 居昌郡 十二里十三町, 高靈郡 八里, 大邱府 十七里二十四町라 되어 있다.
여기서 1리(里)는 지금의 10리인 것 같다.
그리고 1정(町)은 360자로 약 109m이다.
이를 근거로 합천군 9리 33정은 약 40km정도가 계산이된다.
당간지주(幢竿支柱)
당간지주는 당간을 지탱하기 위하여 세운 기둥을 말한다.
당간은 사찰에서 기도나 법회등 의식이 있을 때 당(幢)을 달아 두는 기둥입니다.
이 당간을 사찰 앞에 세워 이곳이 불보살님이 임하는 성스러운 공간임을 알리는 동시에 위엄을 나타내 보이기도 합니다.
일주문앞에 대나무로 만든 큰 구조물이 있다
사람의 형태를 한 구조물안에
또다른 사람이 있다
밖으로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고
그속에는 또다른 내가 존재한다는 의미인것 같다.
일주문에서 봉황문으로 가는 길
참 고요하고 평안한 길이다.
일주문에서 봉황문으로 가는 길의 부처
부처를 보는 마음도 어디에서 보느냐에 따라
달리 보인다는 의미인가?
봉황문의 현판 '해인총림"
해인사 일주문을 지나고 커다란 나무가 도열한 숲길을 걷다 보면
해인총림(海印叢林)이라는 현판을 달고 있는 사천왕문을 지나게 된다.
이 사천왕문의 별칭은 봉황문으로 봉황(鳳凰)은 극락세계(極樂世界)로 안내하는 상상의 새를 말하며
이 문을 통과하면 이미 극락세계로 들어 왔다는 것을 뜻한다.
봉황문의 사천왕상
봉황문에서 바라본 일주문
해동원종대가람(海東圓宗大伽藍)이란 현판이 붙은 해탈문(解脫門)
봉황문을 들어서면 해탈문이 있다
해탈문 아래 오른쪽 건물은 '국사단'이다.
해탈문은 속세와 부처님의 세상의 경계로 보면 된다.
우주의 모든 것은 하나라는 불교의 진리를 말해주는 것이다.
해탈문에서 바라본 봉황문
국사단(局司壇)
이 국사단(局司壇)은 본래 대비로전의 자리에 있던 것을 대비로전(大毘盧殿)을 지으면서 옮겨 온 곳이라 한다.
건물의 정면에는 국사단이라는 현판이 있고 좌측에는 지공증점지(指公曾點地)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指公曾點地’는 ‘지공이 점지한 곳’이라는 뜻인데
지공(指公)은 인도에서 온 고승으로 그의 제자가 고려말 나옹선사이고 나옹선사의 제자가 무학대사라 한다.
‘지공증점지(誌公曾点地)’라는 현판으로 국사단의 최초 건립연대는 알 수 없으나
1855년, 1899년, 1961년에 중수한 기록이 있으며 현 건물은 2007년 전면 해체 복원되었다.
일반적으로 건물은 전(殿)이나 각(閣) 등으로 표현하는데 이 건물만은 단(壇)이라고 표현한 것은
‘제사를 지내기 위하여 흙이나 돌을 쌓아 만든 터’라는 의미도 있지만
이 가람에서 국사단이 있는 장소의 중요성을 알리기 위함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우리의 전통신앙이 있는 듯 없는 듯 희미한 흔적처럼 모질게 남은 것이 절에서는 가람신을 모시는 곳이다.
국사단은 불교의 것이 아니라 순수 단군민족과 관련이 있는 신앙이라는 점에서 절 안에 두는 것이 불교의 신앙과 맞지 않는 부분이 있었을 것이고
그렇다고 빼버리기엔 사람의 마음을 잡아두는 가람신의 능력이 뛰어났을 것이다.
그래서 절 안이긴 하지만 외각 지대에 배치를 하였을 것이다.
이곳 안내표지에는 『국사단(局司壇)은 국사대신(局司大神)을 모신 단으로서
국사대신은 도량이 위치한 산국(山局)을 관장하는 산신과 토지가람신(土地伽藍神)을 가리킨다.
가야산신인 정견모주(正見母主-깨달음의 어머니)는 하늘의 신 이비가와의 사이에 두 아들을 두었다.
큰 아들 이진아시왕은 대가야국을, 작은 아들 수로왕은 금가가야국을 각각 건국하였다 한다.
국사대신은 인간세상을 손바닥 보듯이 하면서, 신비스런 현풍(玄風)을 떨쳐 해인사에 재앙을 없애고 복을 내린다.
가람을 수호하는 신을 모셨기 때문에 도량 입구에 배치되었다.』고 적어 두었다.
해탈문의 안쪽에서 찍은 모습
해탈문을 들어서자 '해인도'를 나타내는 형형색색의 등이 줄지어 있는데
탑돌이를 하며 부처의 세상을 새겨보는 곳이다.
해인사 범종각
종각에는 사물이라고 불리는 법기(法器)가 설치되어 있다
사물은 범종, 법고, 목어, 운판을 말하는데 이 범종각은
사찰의 경내에서 마당을 내려다 보았을때 오른쪽에 위치하고 있어
오른쪽을 체로 왼쪽을 용으로 말하는 화엄의 사상에 따라 설치된 것이다.
해탈문 정면에 보이는 건물은 '구광루'
불교용품을 파는 곳이다.
해인사 구광루다.
뜰에 해인도가 펼쳐져 있다.
구광루의 한쪽에는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셔놓은 곳이 있다
구광루는 해인사의 모든 건물 가운데에서 한가운데에 자리하고 있다.
구광루라는 이름은 화엄경의 내용에서 따온 것인데,
화엄경에는 부처님께서 아홉 곳에서 설법하시면서 그 때마다 설법하시기 전에 백호에서 광명을 놓으셨다는 이야기가 있다.
옛날에는 노전스님을 비롯한 큰스님들만이 법당에 출입할 수 있었다.
그래서 이 누각은 법당에 들어갈 수 없는 일반 대중들이 모여 예불하고 설법을 듣는 곳으로서 지은 것이다.
지금은 해인사의 사중 보물을 보관하는 보물 보관장으로 쓰이고 있는데,
귀중한 불교 문화재를 좀 더 잘 보관할 수 있는 박물관 시설의 마련이 필요하다.
왼쪽 노란보를 씌운 탁자위에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볼 수 있게 해놓았다.
해인사에 모시고 있는 부처님의 진신사리는 원래 함양의 '장수사'에 있던 것인데
전쟁으로 불이나자 스님과 신도들이 불길속에 뛰어들어 모시고 나온 것이다
구광루에서 바라본 '해인도'
해인도: 화엄경을 요약한 210자의 법성계 글자라고 하며,
해인도를 따라돌면 소원이 성취되고 사후에 까지 큰 공덕이 있다고 한다.
사후 업경대 앞에 설때 그 거울에 해인도가 나타나 살아 생전 지은 죄업이
거울속의 해인도의 미로를 따라 돌아나오게 되며,
그 과정에서 자신의 죄업이 법성계의 글자를 하나씩 만날때마다
사라져 결국은 소멸하게 된다고 한다
해인사 경내 굴뚝과 접시꽃이 참 아름다운 풍경이다.
구광루 오른편 건물 '보경당'
이건물은 근래에 불교회관으로 지어진 건물이다.
여러 큰 불사에 집회장과 법당으로 쓰이도록 지어졌는데
해인사의 다른 건물에 견주어 크게 지어진 감이 있으나
지하층도 크게 내어 여러모로 쓸모있게 지어진 건물이므로 불사때 유용하게 사용된다.
구광루 마당에는 종무소인 사운당이 있다
구광루 마당의 식수
구광루 계단을 올라 문을 통과하니
대적광전이 보이고 석탑과 석등의 모습이 있다.
대적광전 뒤로 건물이 세계문화유산인 장경판전이 보인다.
팔만대장경이 보관되어 있는 해인사는 통일신라 애장왕 3년(802)에 지어졌다.
중심 법당인 대적광전은 2층 건물로 비로전이라 불리다가,
조선 성종 19년(1488)에 다시 지으면서 대적광전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그 뒤 여러 차례의 화재가 있어 옛 모습을 찾아 볼 수 없고
지금의 건물은 순조 17년(1817)에 다시 지은 것을 1971년 대폭 수리한 것이다.
앞면 5칸·옆면 4칸 규모로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집이다.
내부에는 중앙의 비로자나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을 모시고 있다.
신라 애장왕 때 창건된 경남 합천 해인사의 대적광전에 있는 불상이다.
대적광전은 팔만대장경을 지니고 있는 법보사찰(法寶寺刹) 해인사의 중심법당이다.
불상은 원래 금당사(金塘寺)에 있었던 것이며 고종 1년(1897)에 현재 위치로 옮겨서 모시고 있다.
본존불은 머리에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붙여 놓았으며 이마 위에는 반달 모양이 표현되어 있다.
옷은 양 어깨에 걸쳐 입고 있으며, 넓게 파인 가슴에는 옷자락을 집어넣고 있고 양 다리에는 물결 모양의 옷주름이 표현되어 있다.
손은 왼손 검지를 오른손으로 감싸고 있는 모습으로 비로자나불이 취하는 일반적인 손모양이다.
본존의 왼쪽에는 지혜를 상징하는 문수보살이, 오른쪽에는 실천을 통한 자비를 상징하는 보현보살이 위치하고 있다.
자세가 장중하고 온화한 가운데서도 위엄이 갖추어진 조선 초기의 작품으로 보인다.
팔만대장경이 보관되어 있는 해인사는 통일신라 애장왕 3년(802)에 지어졌다.
중심 법당인 대적광전은 2층 건물로 비로전이라 불리다가,
조선 성종 19년(1488)에 다시 지으면서 대적광전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그 뒤 여러 차례의 화재가 있어 옛 모습을 찾아 볼 수 없고
지금의 건물은 순조 17년(1817)에 다시 지은 것을 1971년 대폭 수리한 것이다.
앞면 5칸·옆면 4칸 규모로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집이다.
내부에는 중앙의 비로자나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을 모시고 있다.
대적광전 오르는 계단과 소맷돌. 소맷돌은, 돌계단의 난간을 뜻하는 우리말이다.
잘생긴 용 두 마리가 오르는 승속들을 지켜줄 것이다.
이 돌 이름을 아십니까? 보통 서원의 대강당 앞과 사찰의 대법당 앞에서 많이 볼 수 있다.
밤에 관솔불을 피워 불을 밝히던 곳이고,
특히 여름에는 연기를 내게 하여 모기 같은 날것들을 멀리하는 데도 쓰였다고 한다.
정료석(庭燎石), 광명대(光明臺), 노주석(爐柱石)이라 하며 우리말로는 불우리라고 한다.
대적광전의 측면 모습
관음전
창건년도는 알 수 없으며 1818년에 중창되었으며 현재의
건물은 1992년에 완전복원한 것으로 윗층은 해인사 승가대학
교사로, 아랫층은 식당으로 사용되고 있다.
현 운동장에 있었다는 관음암에서 유래된 관음전이라는 명칭은
달리 지혜의 검을 찿는 곳 이라는 의미의 심검당으로 불리기도한다
출입이 금지된 요사채 '궁현당'
대적광전을 바라보며 왼쪽에 위치한 건물이다
어느 사찰을 가더라도
한번씩은 꼭 바라보게 되는 풍경
온세상에 부처의 맑은 소리를 바람결에 듣는 것 같이...
해인사삼층석탑(정중탑)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254
해인사의 대적광전 아래 서 있는 석탑으로, 넓은 뜰 한가운데에 자리잡고 있어 일명 ‘정중탑(庭中塔)’이라고도 불린다.
탑은 3층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리고 머리장식을 갖춘 모습이다.
원래 기단은 2층이었으나 1926년 수리시에 기단을 넓히고 한 층을 더 얹음으로써 통일신라 탑의 전형인 2층 기단의 모습을 깨뜨렸다.
위층 기단의 모서리와 가운데, 탑신부의 각 층 몸돌 모서리에는 기둥 모양을 새겨 놓았다.
지붕돌은 밑면에 5단씩의 받침을 두었고, 네 귀퉁이가 약간 위로 들려 있다.
또한 각 지붕돌에는 네 귀퉁이마다 바람에 흔들리는 작은 종이 매달려 있는데 이것은 후대에 와서 설치한 것이다.
꼭대기에는 노반(露盤:머리장식받침), 보륜(寶輪:수레바퀴모양 장식), 보주(寶珠:구슬모양 장식) 등이 차례로 올려져 머리장식을 하고 있다.
1926년 6월 탑의 수리할 때 위층 기단에서 아홉 개의 작은 불상이 발견되었는데 이 불상들은 수리후 다시 석탑 안에 넣어두었다.
탑은 원래 2층 기단이었다는 점과 5단의 지붕돌받침 등 통일신라 석탑의 기본형식을 충실히 따르고 있으나,
기단의 가운데기둥 조각을 하나만 두는 등 각 조각수법으로 보아 통일신라 후기의 것으로 추측된다.
해인사 석등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255호
해인사 대적광전 아래쪽의 3층 석탑 앞에 자리하고 있는 석등으로,
불교의식을 행할 때 불을 밝혀두는 기구이다. 등불을 밝혀두는 화사석(火舍石)을 중심으로,
아래에 3단의 받침을 두었고, 위로는 지붕돌과 머리장식을 얹었다. 높직한 4각 바닥돌은 한 면에 2개씩의 안상(眼象)을 새겼다.
그 위의 아래받침돌은 6㎝가량 층을 둔 다음 8잎의 연꽃무늬를 두었다.
가운데기둥은 후대에 와서 새로 만든 것으로 옛 모습을 찾을 수 없음이 안타깝다.
윗받침돌은 아래와 대칭되는 모습의 연꽃무늬를 새겼다.
8각 화사석은 4면에 4천왕상(四天王像)을 도드라지게 새기고, 나머지 4면에 창을 뚫었다.
지붕돌도 역시 8각으로, 경사면이 움푹하여 처마도 곡선처리 되었다.
꼭대기에는 몇개의 보주(寶珠:작은 공모양 장식)가 올려져 머리장식을 하고 있다.
바닥돌을 제외한 각 부분이 8각을 이루고 있는 전형적인 양식으로,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이다.
대적광전에서 바라본 경내
마주보이는 건물은 구광루이다.
오른쪽이 궁현당 왼쪽이 관음전
명부전
지장전이라고 하며
지옥 중생들을 모두 제도하기 전에는 성불하지 않게다는 큰 서원을 세운 지장보살님이 목조로 조성되어 주불로 모셔져 있고
그 좌우로 각각 도명(道明)보살과 시왕상(十王像)을 봉안하였다.
명부전 내부에는
기려도, 호렵도, 쌍록도, 주악비천도등의 벽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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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부전의 측면 모습
대적광전의 왼쪽에 있는 대비로전이다.
대비로전(大毘盧殿)
대비로전에는 약 1200년 전 (서기 9세기, 통일신라 후기) 해인사 창건시대에 조성한 두 분의 비로자나 부처님이 나란히 모셔져 있다.
두 분 부처님은 향나무로 조성되었으며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불상으로 확인되었다.
불상 내부에 쓰여진 묵서에 의하면 서기 883년 신라의 진성여왕과 김위홍(대각간 벼슬을 했으며
사후 혜성대왕으로 추존됨)이 사랑과 영생의 염원을 담아 두 분의 부처님을 조성한 것으로 추정된다.
부처님의 이름인 "비로자나"란 인도 범어로서 "태양" 또는 "광명" 등의 뜻을 가지고 있으며
불교에서 모든 부처님의 근원으로 존중하고 있다.
부처님의 자태에서 왼손의 집게손가락을 오른손으로 감싸쥐고 있는데 이는 비로자나불 특유의 손모양(手印 mudra)으로서
중생과 부처, 깨달음과 번뇌, 너와 나 등의 대립세계가 하나의 세계로 통합됨을 뜻한다.
대비로전은 국가적으로 소중히 보존해야 할 두 분 비로자나 부처님을 봉안하기 위해
노무현 대통령의 특별한 조치로 국가지원이 이루어지고 신도들의 정성이 모아져 2007년 11월 낙성한 법답이다.
이 시대 최고의 문화재를 조성한다는 차원에서 건물 부재 일체를 국내 적송을 사용하여 완성했다.
두 분의 비로자나 부처님
왼손 집게손가락을 오른손으로 잡고 있고, 이 모습이 비로자나 부처님의 특징이다.
왼쪽 비로자나 부처님 옆에는
국운이 융창하고 남북 통일 이 이루어지길 바란다(국운융창 남북통일 원성취; 國運隆昌南北統一願成就)고 써있고,
오른쪽 비로자나 부처님 옆에는 십만삼세일겁삼보자존전(十萬三世一劫三寶慈尊前)이라는 염원이 써있다.
궁현당사이로 출입이 금지된 요새채와 제일봉이 어우러진 모습
대적광전의 뜰에서 제일봉을 바라보며...
대적광전을 둘러보고 대장경 판전으로 가는 길
대적광던을 빠져 나와 대비로전앞을 지나면서 앞을 쳐다보면
노거수 한그루가 눈에 들어온다.
경상남도 기념물 제 215호 학사대(學士臺) 전나무.
이 전나무는 높이 약 30m, 둘레 5.1m 쯤 되는 수령이 1,000년 이상 된 고목이다.
나무의 줄기가 지상 10m 높이에서 두 개로 벌어져 있으며, 나뭇가지가 아래로 향해 뻗어 있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이곳은 고운 최치원 선생이 만년에 벼슬을 버리고 가야산에 은거할 때 찾았던 곳이다.
학사대라는 이름은 고운 선생이 헌강왕 때 29세의 나이로 한림학사 벼슬을 하였는데
그 벼슬 이름을 따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고운 최치원 선생은 말년에 제자들 앞에서 이곳에 지팡이를 꽂으며
"내가 살아 있다면 이 지팡이도 또한 살아 있을 것이니 학문에 열중하라."는유언을 남기고
지금의 홍제암 뒤 진대밭골로 유유히 홀로 들어가신 전설로 유명하다.
그래서 이 전나무를 일러 고운 선생의 "지팡이 나무"라고 불리운다.
삼성 중의 한 분 나반존자를 모시는 독성각( 獨聖閣).
삼성이란 환인, 환웅, 단군(이 분이 산신령)을 이르기도 하고,
또 다른 쪽에서는 출산을 주관하는 산신(産神)이 음운 변화가 일어나 삼신(할매)이 되었다고 한다.
불교에서는 북두칠성을 모시던 도교의 전통에 일곱 여래를 모시는 칠성각,
혼자서 스승(석가모니) 없이 자기 힘으로 연기의 원리를 깨우쳤으며 말세 중생에 복을 내린다는 나반존자를 모시는 독성각,
그리고 산신령 할아버지(앞서 말했듯이 단군할아버지)를 모시는 산신각을 두고 우리 토착신앙과 타협을 했는데,
정식 법당이 아니기 때문에 전(殿)이라 하지 않고 각(閣)으로 한 단계 격을 낮춰 모시고 있다.
절을 찾는 속인들 상당수는 이 각에서 기도를 많이 하신다고 한다.
칠성각이나 독성각, 산신각에서는 불상이 아니라 이렇게 그림을 모신다.
응진전. 나한전과 함께 부처님을 모시지만 제자들의 신앙세계를 모시는 곳.
이렇게 해서 해인사의 전각들을 살펴보고
세계문화유산 대장경판전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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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만대장경판전은 별도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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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사 비석림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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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어시간동안 해인사를 들러보기에는
시간이 너무도 부족하다
짧은 시간에 무엇을 어떻게 돌아봐야할지
눈 앞에 있는 것이라 할지라도
마음의 깊이가 깊지 못하여 의미를 알지 못하겠다.
돌아가야 할 시간 이다
풀지못할 숙제를 남기는 것처럼 아쉬움이 자꾸 생긴다.
터벅터벅 해인사를 등지고 내려오는 길
참 많은 스님들이 거쳐가셨나보다
수많은 비석림이 있다
비석림 사이에 서 있는 길상탑
해인사 길상탑 (보물 1242호)
해인사 절 입구의 일주문에서 남쪽으로 약 50m 지점에 서 있는 탑으로, 일반적인 절의 건물 배치와는 무관하게 길가에 세워져 있다.
2단의 기단(基壇) 위로 3층의 탑신(塔身)을 세운 구조로,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석탑 양식을 갖추고 있다.
바닥돌 위에 아래층 기단을 받고, 윗면에 얇은 괴임을 새긴 후 위층 기단을 얹었다.
위층 기단은 하나의 돌로 짜여져 다른 탑에서 보기 힘든 독특한 모습이다.
탑신은 1층의 몸돌이 2·3층의 몸돌보다 크며, 지붕돌 밑면의 받침수는 각 층 모두 5단이다.
지붕돌의 처마는 반듯하다가 네 귀퉁이에서 뚜렷하게 치켜올려져 전체적으로 경쾌한 느낌을 준다.
꼭대기의 머리장식은 네모난 받침돌만 남고 모두 없어진 상태이며, 받침돌 윗면에 철주를 꽂았던 구멍이 뚫려 있다.
탑에서 나온 유물들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그 중 조그만 탑이 157개가 있으나,
소탑은 원래 99개, 77개를 두는 것이 원칙이므로 19개는 없어진 듯 하다.
탑에 대한 기록인 탑지(塔誌)는 4장인데, 통일신라 후기 대문장가인 최치원이 지은 것으로 유명하다.
이 글에는 신라 진성여왕 8년(895) 통일신라 후기의 혼란 속에 절의 보물을 지키려다
희생된 스님들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서 탑을 건립했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전체적으로 단아하면서도 소박한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통일신라 후기의 대표적인 소탑(小塔)으로,
탑지의 기록은 당시의 사회경제적 상황을 밝히는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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