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 한쪽 비워둔다면

photostory- 路

2014. 6. 14. 토. 백제의 시간속을 걷다

kyeong~ 2014. 6. 20. 01:35

 

 

여행이나 답사는 벼르고 별러서 가는 것 보다

우연한 기회에 극적으로 가는 것이 더 즐겁다

거기다가 함께 할 동행이 시원스럽게 이루어진다면

여행은 더 한층 열기를 오르게 한다.

 

인터넷 검색중에 '부소산성'이라는 단어를 접하고

그동안 백제 유적지에 관해 무관심했던 것을 떠올리고 급조된 동행과

부여에서 백제의 시간속을 걷기로 했다.

2014 .6.14.토. 맑음

.

.

.

 

 

부여

백제26대 성왕이 국가 증흥의 원대한 뜻을 품고

산수가 수려하며 생활여건이 풍요로운 사비(부여)로 도읍을 옮긴 후

123년간 국력 신장과 활발한 외교활동을 펼쳐 고대문화를 꽃피웠고

충효, 개척 정신을 뿌리내린 역사문화의 고장이다.

 

 

 사비천도의 단행


고대사회에서 왕도는 정치·경제·문화의 중심지였다.

          따라서 왕도를 옮기는 것은 내부적으로 큰 변화를 수반하기 마련이다.

 

웅진천도는 고구려 장수왕의 공격으로 수도 한성이 함락되고 왕이 피살된 긴급한 상황에서 이루어졌다.

그러나 사비천도는 통치체제를 정비하고 왕권을 확립하려고 한 성왕의 의도에 의해 단행되었기 때문에

 여기에는 정치적 목적이 일정하게 작용하였다.

 

그 배경은 두 가지로 살펴볼 수 있다.

하나는 웅진이 군사적인 측면에서는 방어에 유리한 입지조건을 어느 정도 충족시킬 수 있지만

지역이 협소하여 도성으로서의 기능과 왕도의 경제적 기반을 충족시키지 못하였다는 점이다.

다른 하나는 금강유역권을 기반으로 한 재지세력이 점차 왕권을 제약하는 정치세력으로 성장하였기 때문에

이를 견제하거나 제어할 필요가 있었다는 점이다.


성왕이 사비지역을 천도의 대상지로 삼은 것은 두 가지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

하나는 사비지역이 갖고 있는 지리적인 장점이다.

백마강과 부소산성으로 둘러싸인 사비지역은 방어에 유리하며, 강을 타고 바다로 나가는 것도 편리하였다.

다른 하나는 경제적인 측면에서 부여지역은 남쪽과 동쪽으로 벌판이 펼쳐져 있어서

농업생산력을 높일 수 있었다. 

 

성왕이 사비천도를 단행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성왕의 뛰어난 지식과 일을 처리하는 결단력이었다.

성왕의 결단력은 천도 결정에 가장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그러나 천도는 국왕의 결단력만으로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천도는 지배세력들의 역학관계에 변화를 가져오므로 반대하는 세력이 있게 마련이다.

때문에 천도를 반대하는 세력을 억제할 수 있는 천도지지 세력이 있어야 한다.

이 시기 성왕의 사비천도를 지지한 대표적인 세력이 사씨(沙氏)세력이다.

사씨세력은 사비지역을 기반으로 하였다.

사씨세력은 자신들의 기반이 있는 곳으로 천도하는 것이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는데 도움이 되는 것으로 판단하여 천도를 적극 지지하였던 것이다. 

성왕은 사씨세력의 도움을 받아 반대하는 귀족세력들을 제압하였던 것이다.

 

사비도성은 나성과 그 내부의 여러 시설로 이루어졌다.

사비도성 건설이 일단계로 완료된 시기는

사비도성을 구성하고 있는 중요 시설인 부소산성과 나성의 축조시기와 연관된다.

왕성 배후산성으로서의 기능을 했던 부소산성 성벽조사 과정에서 출토된 ‘大通’이 새겨진 기와는

 527~528년의 것으로 성왕 5~6년에 해당된다.

 

또 성벽 주변에서 확인된 주거지·우물 등의 유구와 각종 유물들은

사비나성이 능산리 왕릉군의 묘역을 조성하기 전에 축조되었을 가능성을 높게 한다.

따라서 성왕이 사비도성을 조영하기 시작한 시기는 늦어도 성왕 즉위 5~6년으로 볼 수 있으며,

16년(538)에 주요 시설이 일단 완공되자 마침내 천도를 하였던 것이다.

 

이 사비도성은 방리제의 구조를 가졌다.

성왕이 방리제의 시가 구조를 가진 사비도성을 건설할 때 그 모델로서 주목된 것이 양나라 수도 건강성이다.

이 시기 백제는 남조 양나라와 빈번한 교류를 가졌기 때문에 양나라 수도의 모습에 대해 충분히 인지를 하고 있었다.

그래서 건강성을 모델로 하여 시가지를 만들고 왕궁과 관청을 비롯한 여러 건물들을 배치하였던 것이다.

왕궁 남쪽 시가의 중심부에 위치한 정림사가 양나라의 정림사를 모방한 것이라고 하는 점이 이를 말해준다.

 

 

 

부소산성 [扶蘇山城]

 

사적 제5호. 둘레 2,200m, 면적 약 74만㎡.

부여 서쪽을 반달 모양으로 휘어감으며 흐르는 백마강에 접해 있는 부소산의 산정을 중심으로 테뫼식 산성을 1차로 축조하고,

다시 그 주위에 포곡식 산성을 축조한 복합식 산성이다.

〈삼국사기〉백제본기에는 사비성(泗沘城)·소부리성(所夫里城)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곳은 538년(성왕 16) 웅진(熊津:지금의 공주)에서 사비(지금의 부여)로 천도하여 멸망할 때까지 123년 동안 국도를 수호한 중심산성이었다.

 대개 성왕의 천도를 전후해 쌓은 것으로 보인다.

다른 한편으로는 500년(동성왕 20)경 처음 테뫼식 산성을 축조하고,

성왕이 천도할 무렵 개축한 뒤 605년(무왕 6)경 완전한 성을 이룬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먼저 축조된 것으로 보이는 테뫼식 산성은 현재 군창(軍倉)터가 있는 곳으로

둘레 1,500m의 성벽을 등고선을 따라 거의 토축했는데,

일부 석축한 부분도 있다.

이 성 안에는 1915년 불에 탄 쌀이 발견된 군창 자리와 백제식 가람의 방형 건물터가 있으며,

유인원기공비(劉仁願紀功碑)도 이곳에 있다가 부여박물관으로 옮겨졌다.

 

지금은 영일루(迎日樓)와 반월루(半月樓)가 있다.

부소산에서 가장 높은 표고 106m 지점 사비루(泗沘樓) 부근에 약 700m 둘레의 테뫼식 산성이 있는데,

여기에는 사비루와 망루지(望樓址)가 남아 있다.

 

이 두 테뫼식 산성의 외곽선을 포곡식 산성이 연결하고 있어 백제의 독특한 산성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성내에는 동·서·남문지가 있으며, 북쪽 골짜기에 북문과 수구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밖에 고란사(皐蘭寺), 낙화암(落花巖), 서복사(西復寺) 터, 궁녀사(宮女祠) 등이 있다.

부소산성은 주위의 보조산성인 청산성·청마산성과 함께 도성을 방어하는 구실을 했으며,

평시에는 왕과 귀족들이 아름다운 경관을 즐기는 비원으로 활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구드래 공원에 주차를 하고

부소산성 내의 답사지를 대략적인 위치를 확인한다.

 

구드래

구드래라는 이름은 '큰 나라'라는 말이라는 설도 있으며

백제에서 왕이나 왕족을 칭하던 말인 '어라하'라는 말에 큰 이라는 뜻인 '구'가 결합하여 만들어 졌다는 설도 있다.

백제의 사비성의 나루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일본에서 백제를 부르는 말이 '구다라' 인데 이 구드래 나루의 이름에서 유래 했다는 설도 있다.

 

 

입장료는 2000원

구드래공원옆 부소산성 서문으로 입장.

 

부소산성은 국가사적 제 5호이다.

부소산성은 부소산에 쌓은 백제의 왕도 사비의 중심을 이룬 산성으로

테뫼식과 포곡식이 혼합된 백제의 독특한 복합식 산성이다.

 

옛 문화의 숨결이 있는 곳에 오면

소나무숲이 장관을 이루는데

자연 그대로의 아름다움이 부여산성 초입부터 눈길을 끈다.

 

산이라가기 보다 평지에 가까운 부소산의 사비길

 

 

부여하면 낙화암과 고란사...

그곳에 갔다오면 이미 부여를 다 알 것 같은

부여의 대표 명소 이정표를 만나자 반가워서 한컷 찍었다.

 

낙화암 근처 연리지

이연리지는 좀 특이해서 찍어 보았다.

 

 

부여하면 낙화암이 가장 먼저 떠오릅니다.

부소산성 서문에서 가까이있는 낙화암입니다.

3000궁녀가 떨어진 곳이라하여 꽤 높고 넓은 바위일것이라 생각했는데

마침 견학을 온 학생군단이 들어서자

비좁다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어 빨리 벗어났다.

 

"꽃같은 미인들이 수없이 떨어진다

자개첩 금비녀는 내려지고

머리채는 흐트러지고

치맛자락은 소리치며 펄럭인다

옥패는 마주쳐 떨그렁거리고

풍덩실풍덩실 물소리가 난다"

-이병기 수필 인용-

 

 

낙화암 [落花巖]

나당연합군이 백제를 침략하자 백제의 3,000 궁녀가 백마강으로 떨어져 죽었다는 전설이 전하는 곳이다.

백제 멸망 이후 타사암을 미화하여 낙화암이라 부른 것으로 보인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백제고기에는 부여성 북쪽에 큰 바위가 있어 아래로 강물을 임하였는데

의자왕과 모든 후궁이 함께 화를 면치 못할 줄 알고 차라리 자살할지언정 남의 손에 죽지 않겠다 하고

서로 이끌고 와서 강에 투신하여 죽었다 하여 타사암(墮死巖)이라 하였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이는 사실과 다르다.

의자왕은 웅진성에서 항복한 후, 당에 압송된 후 병으로 죽었다.

3,000 궁녀도 부여성이 함락된 후 당의 군사들을 피해 도망치던 아녀자들이었다는 설이

설득력있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바위면에 '落花岩'이란 글씨가 새겨져 있으며, 바위 위에는 백화정(百花亭)이라는 정자가 있다.

(브리테니커 백과사전 인용)

 

 

백마강

슬픈 전설을 아는지 모르는지

백마강은 유유히 흐르고 있다.

 

백화정(百花亭)

백제 멸망 당시 절벽에서 떨어져 죽었다는 궁녀들의 원혼을 추모하기 위해 1929년에 지은 정자이다.

‘백화정’이란 이름은 중국의 시인인 소동파의 시에서 따온 것이다.

부소산성 북쪽 백마강변의 험준한 바위 위에 자리잡고 있다.

건물 구조는 육각형 평면을 가진 육모지붕으로 꾸몄다.

마루 바닥 주변에는 간단한 난간을 설치하였고,

천장에는 여러가지 연꽃무늬를 그려 놓았다. (문화재자료 108호)

 

 

백화정에서 다시 한번 부소산성을 돌아나가는 백마강을 바라보았다.

 

 

고란사(皐蘭寺)

고란사(皐蘭寺)는 충청남도 부여군, 부소산의 북쪽 백마강변에 있는 절이다.

1984년 5월 17일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98호로 지정되었다.

고란사 바로 위쪽으로 낙화암이 있다.

절 뒤의 바위틈에는 고란정이 있고,

그 위쪽 바위틈에는 고란초가 자라고 있다.

절의 연혁에 대해서는 백제 말기에 백제 말기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할 뿐, 자세한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일설에 의하면 이 절은 원래 백제의 왕들을 위한 정자였다고 하며,

또 궁중의 내불전이었다고도 전한다.

혹은 백제가 멸망할 때 낙화암에서 사라져간 궁녀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하여 고려 현종 19년(1028년)에 지은 사찰이라고도 한다.

 

법당 건물은 1797년(조선 정조 21년)에 은산의 숭각사에서 옮겨온 것이다.

상량문에 의하면 조선 정조 21년(1797년)에 중건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연화문을 새긴 초석을 놓고 원기둥을 세웠는데 기둥 위에는 조각 장식이 화려한 익공식 공포를 짜올렸다.

초석에 새견 연화문양은 고려시대의 기법으로 추정된다.

 

사찰의 주변 경관이 아름답고 낙화암에 얽힌 전설과 더불어 험준하며 기이한 바위, 고란초 등으로 유명하다.

 

고란사 극락보전

 

 

 

 

고란사 풍경

풍경이 물고기 모양을 하고 있는 것은

푸른 하늘이 물과 같이 보이고

밤에도 눈을 감지 않는 물고기처럼

넓은 우주를 향하여 헤엄을 치라는 뜻이라고 한다.

 

백마강가에 나즈막히 자리잡은 고란사

참 소박하다

부처의 마음이 흐르는 백마강

백마강의 물소리가 부처의 소리인가.

 

 

우보처 대세지보살       본존 아미타불       좌보처 관세음보살

법당내부 불상의 모습

 

 

고란사가 언제 창건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고 한다. 

       백제 제 17대 아신왕 때 창건되었다는 설도 있고, 낙화암에서 목숨을 던진

       백제 궁녀들의 원혼을 추모하기 위해 고려 초기에 창건하였다는 설도 있다.

 

       애통한 망국의 비운을 겪은 이 절은 백제왕실의 내불당(內佛堂)으로 고란사

       (高蘭寺)라 하였으나 그 뒤 벼랑에 희기한 고란초가 자생하여 고란사(皐蘭寺)라고 불리 웠다고 한다.

 

       이 절은 백제의 선조와 낙화암에서 몸을 던진 삼천궁녀의 넋을 기리기 위하여 

       고려 현종 19년 (1028)에 재창(再創)되어 인조 7년(1629), 정조21년,

       광무 4년(1900)에 각각 중창, 중수를 거듭하다가 1931년에 다시 짓고

       1960년에 보수단장했다고 한다

 

       고란사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6교구 마곡사 말사이다.

 

 

   

고란사 뒷면 벽화

 

 

   

고란사 요사채

고란사의 극락보전과 요사채는 일직선상에 놓여있다.

 

  

           

              無我無人觀自在            무안무인관자          

              勘破禪機摠是空           감파선기총시공

              法花香散淸凉地           법화향산청량지

              皓月光臨自在天           호월광림자재천

 

              아상 인상   없어야       자재함을   볼 것이요

              선기를       감파하니    모두가      공이로다.

              법화 향기   가득한       청량한      이 도량에

              맑고 밝은   달빛 아래   자재천이    임하시네.

 

 

 

     

               眞心寂靜渾無跡           진심적정혼무적

               非空匪色見如來           비공비색견여래

               悟來大道無多事           오래대도무다사

               妙相尊嚴倍有光           묘상존엄배유광 

 

               참된 마음   고요하니    온전히       자취없고

               공도 색도   아닌 곳에   여래를       볼 수 있네.

               대도를       깨달으니    번잡한 일   하나 없고

               묘한 상호   존엄하여    찬란한 빛   더한다네.

 

 

 고란사 주련

            

  

 

   
   

 

 

 고란사의 약수 고란정(皐蘭井)

고란정에서 솟아나오는 고란사 약수를 마시면 위장 등에 매우 좋고 또한 젊어진다고 한다.

의자왕은 고란사 약수를 즐겨 마셨는데 고란사 약수임을 증명하기 위해 고란초 잎을 띄워서 바쳤다고 한다.

고란정 약수를 마시면 한 모금 마실 때마다 3년씩 젊어진다고 하는 속설이 전해온다.

이 속설과 연관된 재미있는 설화를 소개한다.

 

"옛날 소부리의 한 마을에 금실 좋은 노부부가 살고 있었는데, 다 좋은데 자식이 없음이 걱정거리였다.

어느 날, 일산의 도사로부터 "고란사 약수물을 한 번 마시면 3년씩 젊어진다"라는 말을 들었다.

남편을 젊게 만들어 자식을 갖고 싶은 마음에, 다음날 아침 남편을 약수터로 보냈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밤이 늦도록 남편이 돌아오지 않아 약수터를 찾아 갔는데,

남편은 간 곳 없고 남편 옷을 입은 갓난아기가 울고 있었다.

 

그때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한 번에 3년씩 젊어지니까 다섯 번 정도만 마시고 오라"는 당부의 말을 하지 않았던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아이를 안고 돌아 온 할머니는 지극정성으로 아이를 키웠다.

그 아이가 자라 좌평 벼슬에 오르며 백제에 큰 공을 세웠다"라는 이야기가 전설로 내려온다.

 

 

 

 

고란초는 고사리와 비슷하게 생겼다.

중국, 타이완 등지에 분포하며 전국의 강가 절벽이나 산지의 그늘진 바위틈, 바닷가 숲속에서 자라는데

고란사(皐蘭寺) 절 뒤의 절벽에서 자라고 있는 것이 처음 발견되어 붙여진 이름이란다.

 

 

강가에 자리잡은 삼성각이 눈이간다

삼성각의 불상은 백마강을 내려다보고 있다

강물이 훤히 내려다보이도록 유리문을 달았다.

 

   

여름철 여기에 앉아만 있어도 부처가 되겠다

뉘라서 마음이 청정해지지 않겠는가...

어느날 홀연히 이곳으로 흘러와

백마강을 벗삼는 부처가 되리라.

 

 

법당앞 키 큰 은행나무

고란사를 지키는 지킴이 같다

일주문이 없는 고란사

이 고란사에 저 은행나무가 큰 버팀목처럼 보인다.

 

고란사 범종각

이종소리는 30리까지 간다고 한다.

 

강가에 석축을 쌓아 고란사를 짓고

강물에 고란사 범종소리를 흘려 보냈으리라.

 

아담한 고란사를 둘러보고 다음 답사지를 향해 돌아나오는 길

석축에 자라는 풀한포기마져도 아름다운 곳이다.

 

 

고란사를 나와서 사자루로 향하는 길

뿌리까지 아름다운 소나무길

아무리 봐도 질리지 않는 소나무의 자태들이다.

 

 

사자루(泗沘樓)

부여 부소산성에서 가장 높은 위치에 자리잡고 있는 누각으로,

이곳은 달구경을 했다는 송월대가 있던 자리이다.

조선 순조 24년(1824)에 군수 심노승이 세운 것으로,

조선시대 임천의 관아 정문이었던 배산루를 1919년에 이곳으로 옮겨 짓고는 사비루라 이름하였다.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의 2층 누각으로 사방이 개방되어 있으며, 오른편 북쪽 칸에는 2층으로 오르는 계단을 만들었다.

지붕은 옆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건물 앞면에는 조선 후기 의친왕 이강이 쓴 ‘사비루’라는 현판이 걸려 있고,

백마강 쪽으로는 ‘백마장강’이라는 현판이 함께 걸려 있다.

사비루는 사방이 트여있는 높은 곳에 있어 부여의 주변 풍경을 즐길 수 있는 좋은 누각이다.

건물을 옮겨 세우기 위해 땅을 고를 때

‘정지원’이라는 이름을 새긴 백제시대 금동 석가여래 입상이 발견되어 더욱 주목받는 장소이다.

 

 

 

 

사자루 백마강쪽의 현판 '백마장강"

조선말기 명필인 "해강 김규진"이 썼다.

 
   

사자루에 쓰여있는 글귀들

 

100m조금 넘는 부소산성길

아담한 작은 산에 이리저리 길도 많고

문화재도 많다

눈에 띄는데로 찾아가는 길

이길은 태자골 숲길이라고 한다

백제의 왕자들 산책을 하였다는 길이다.

 

초여름부터 기승을 더하는 더위도 쉬었다가는 태자골 숲길

흙길을 따라 아무리 걸어도 피곤하지 않고 편한 길이다.

 

 

태자골 숲길을 걷다보니 테식 산성길이라는 이정표가 나온다

 

부소산성은 테뫼식(산봉우리를 중심으로 머리띠를 두르듯 성곽을 쌓는 것)과

포곡식(자연지형에 따라 산능선과 골짜기를 이용해 성을 쌓은 것)이 혼합된 독특한 형식을 하고 있다.

산성은 돌과 흙을 섞어 쌓은 토성이다.

부소산성이 있는 부소산은 세종실록지리지에 명칭이 처음 등장한다.

‘부소’는 백제시대 언어로 소나무라는 뜻을 갖고 있어 학자들은 ‘소나무가 많은 산’으로 뜻을 추정했다.

 

 

     

가도가도 질리지 않는 부소산성길

더위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길

누구라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걸어갈 수 있는 길

 

 

수혈건물지길

또는 수혈병영지

군사들의 군막이었던 곳이다.

1980 발굴당시 3개의 움집터가 발견되었으며

움집터중 유일하게 그 윤곽이 잘 보존되고 있다고 한다.

 

 

 

군창터

부소산성 내의 동남부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이곳 땅속에서

불에 탄 곡식이 발견됨으로써 군량을 비축해 두었던 창고터로 알려지게 되었다.
1981년과 1982년 두차례에 걸쳐 문화재 연구소에서 발굴조사를 실시한 결과

건물의 배치는 D자 모양으로 가운데 공간을 두고 동서남북에 창고를 지은 것으로 밝혀졌다.

조선시대 초기에는 이곳에 건물을 세워 백제시대부터 자리잡은 군창지를 다시 이용한 것으로 보인다.

 

기둥이 있었던 곳으로 추정되는 주춧돌

 

 

이곳저곳 보물처럼 들어있는 문화재를 찾아다니다가

이런 의자를 만나면 쉬어가지 않을 수 없다

그늘에 앉아 가방에 넣어서 온 간식과 물 한 모금 마시는 일

이 일이 가끔은 참 행복한 일이기도 하다.

 

 

   

소나무사이로 난 테뫼식 산성길이 다시 돌아봐보 참 좋다

적당한 그늘과 적당한 빛과 적당한 우리들의 언어로 채운

부소산성 길...

이리저리 얽혀있는 길을 따라 걷다보면

풍경좋은 문화재가 또 나타나고

하루종일 숨박꼭질하는 기분이다.

 

 

 

뒤로는 소나무 숲

앞으로는 백마강

이 누각에 앉아 있으면

내가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되는 순간이다.

 

 

백마강이 반달모양으로 끼고도는  부소산의 남쪽 마루에 있는 누각

부여시가지를 한눈에 바라볼수 있는 전망대이다

1972년에 지은 2층누각으로 반월루 편액은 임자 정월 김종필 국무총리가 썼다.

 

 

반월루와 백마강

마음이 여유롭지 못한 사람은 이곳에 오지 말라

저 강의 흐름으로 세상을 보고

저 강의 흐름으로 세상을 살아간다면

아름답지 않은 삶이 어디있을까.

 

 

   

임자년 정월 김종필 국무총리가 쓴 편액 "반월루"

 

한 눈에 바라보이는 부여 시가지

 

궁녀사(宮女祠)

태자숲속길 초입에 있었던 궁녀사를 지나치는 바람에

다시 찾아 나섰다

사찰인줄 알았는데

삼천궁녀를 기리는 사당이다

 

 

궁녀사(宮女祠)

삼천궁녀들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1965년 세운 사당이다.

매년 10월 백제문화제때 제향을 올리고 있다고 하며, 무궁화나무로 주위를 감싸고 있다.

일설에는 삼천(三千)궁녀가 떨어진 것이 아니고,

삼천(三泉) 이라는 궁녀가 당나라 병사에게 능욕당하는 것을 피하여 떨어졌다고도 한다.

 

외삼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가니 3천 궁녀를 기리는 궁녀사(宮女祠)가 있다.

전국무총리 김종필이 쓴 이곳 현판은 왼쪽부터 글자를 새겼다.

삼천 궁녀를 대신한 삼천궁녀상이 있어야 하는데, 달랑 세명의 궁녀상만이 중앙에 자리 잡고 있다.

 

3천 궁녀를 기리는 궁녀사(宮女祠)

전국무총리 김종필이 쓴 이곳 현판은 왼쪽부터 글자를 새겼다.

 

사당안에는 삼천궁녀가 아닌

세명의 궁녀가 있다.

 

 

 

 

수령이 오래된 침엽수 한 그루가 궁녀사 담장옆 서있다

 

 

 

 

서복사지

백제시대의 부소산 서남쪽 기슭에 위치하고 있는 이 절터는 궁원에 속한 기원찰로 추정된다.

 

2시간가량을 예정하고 나선 부소산성길 답사가

4시간여를 돌아다녔다

서복사지는 지나는 길에 잠시 바라보았다.

 

충녕사(전몰자 위패를 모신사당

백제유적지에 생뚱맞은 사당

 

 

 

 

입구에 초등학생의 작품으로 보이는 포스터가 나열해 있어서 한컷 찍었다.

지금의 초등학생들은 몇일 남지 않은 6.25에 대해서 어떻게 이해하고 있을까 갑자기 궁금해져온다.

 

 

부여향교

 

 잠시 들러본 부여 향교

명륜당에서는 지금 공부하는 중이라고 한다.

조용히 마당만 살피고 돌아나왔다.

 

 

이렇게 해서 부소산성내의 문화재를 둘러보았다

처음 발걸음을 한 부여의 백제 유적지는

절경속에 어우러져 있어서

소풍을 온 기분이다

 

다만 집으로 돌아와 편집을 하는 과정에

"삼충사"를 지나쳐왔다는 것이 많이 아쉽다.

 

삼충사-백제말기 의자왕때 삼충신인 성충,흥수,계백의 영정과 위패를 모신 사당

 

 

 

부소산성 정문을 빠져 나오니 '백제의 집' 간판이 구미를 당긴다

점심식사시간을 지나친 시간이라

갑자기 급하게 허기가 올라온다 

 

 10000원짜리 연잎밥

밥도 맛있고 반찬도 맛있다

혹여 부여에 가면 맛집으로 들러볼만한 곳이다.

 

 

사비길에서 만난 풍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