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곡사 [麻谷寺] 충청남도 공주시 사곡면 운암리 태화산 남쪽 기슭에 위치한 신라시대의 절.
대한불교조계종 제6교구 본사(本寺)로 현재 충청남도 70여 개 사찰을 관리하고 있다. 〈태화산마곡사사적입안 泰華山麻谷寺事蹟立案〉에 따르면 640년(신라 선덕여왕 9)에 중국 당나라에서 돌아온 자장(慈藏)율사가 통도사·월정사와 함께 창건한 절로 여러 차례 화재가 있었으나 고려 중기에 보조국사 지눌(知訥)에 의해 중건되었다고 한다.
절의 이름에 대해서는 2가지 설이 있는데, 자장이 절을 완공한 후 설법했을 때 사람들이 '삼'[麻]과 같이 빽빽하게 모여들었다고 해서 마곡사라 했다는 설과 신라 무선(無禪)대사가 당나라 마곡보철(麻谷普澈)선사에게 배웠기 때문에 스승을 사모하는 마음에서 마곡이라 했다는 설이 있다.
이 절은 고려 문종 이후 100여 년간 폐사되어 도둑떼의 소굴로 이용되었으나 1172년(명종 2)에 왕명을 받아 보조국사가 그의 제자인 수우(守愚)와 함께 왕으로부터 받은 전답 200결(160만 평)에 중창했다. 당시 사찰의 규모는 지금의 2배가 넘는 대가람이었으나 임진왜란 때 대부분 소실되었다. 그뒤 1650년(효종 1) 주지인 각순(覺淳)의 노력으로 어느 정도 옛 모습을 찾았으나 1782년(정조 6) 다시 큰 화재로 영산전과 대웅전을 제외한 1051여 칸의 건물이 소실되었다. 대광보전은 1788년(정조 12)에 재건되었고, 영산전과 대웅보전은 1842년(헌종 8)에 개수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또한 항일독립운동가 김구가 일본 헌병 중위를 죽이고 잠시 피신해 있었던 곳으로도 유명하다.
현재 이 절의 가람배치는 대웅보전(보물 제801호)·대광보전(보물 제802호)·5층석탑(보물 제799호)이 남북으로 일직선상에 배치된 특이한 형식이며 그 주변으로 영산전(보물 제800호)을 비롯하여 응진전·명부전·국사당·대향각·흥성루·해탈문·천왕문 등의 부속건물이 있다. 이밖에 중요문화재로 감지은니묘법연화경 권1(보물 제269호), 감지금니묘법연화경 권6(보물 제270호), 석가모니불괘불탱(보물 제1260호), 동제은입사향로(지방유형문화재 제20호), 동종(지방유형문화재 제62호)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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넓은 주차장에는 제법 많은 차량이 주차되어 있었다
주차량만 보더라도 마곡사의 유명세는 대단한 모양이다
주차를 하고 600미터쯤 걸어가면 된다.
가을하면 국화가 제철이었는데
화려한 색깔때문인지
요즘들어 어느 사찰에나 꽃무릇이 절집을 찾는 이들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대략20여분 걸어 가면서 환하게 웃는 꽃무릇도 보고....
길을 따라 함께 흐르는 마곡천의 물고기떼
길손을 반기듯 몰려드는 모습을 도 바라보면서 걷노라면
심심치 않은 산사의 길을 걸어갈 수 있어서 좋다
마곡사 안내도
대웅보전, 대광보전, 천왕문, 해탈문이 모두 일직선상에 놓여 있음을 알 수 있다.
태화산 마곡사 일주문
주차장에서 여기까지 걸어오는 동안
올 봄 석탄일에 달았던 연등인듯
오색등이 가을 바람에 흔들리고 있어서
사찰로 들어가는 길임을 안내해주는 듯 했다.
저기 보이는 극락교를 건너면 마곡사이다.
자~ 이제 마곡사에 당도하였습니다
세심교를 건너면 가장 먼저 해탈문을 만나게 됩니다.
차분한 마음으로 마곡사 불전을 걸어 볼까요
해탈문 [
문득! 얼마나 이문을 드나들어야 해탈의 경지에 들까요
아니다...이문을 들어서 다시는 나오지 않을 만큼 마음을 닦다보면
해탈의 경지에 도달한다는 뜻일까요
평생 해탈하지 못할 중생인줄 알고 있지만
해탈의 경지에 대해 잠시 생각을 해봅니다.
머리도 몸에 비해 지나치게 커서 우스꽝스런 인왕금강역사 금강역사 한 쌍 중에 입을 벌리고 있으니이 인왕은 아금강역사
인왕금강역사 뒤로 자비와 덕을 상징하는 코끼를 타고 있는 보현동자의 모습 |
이 인왕은 입을 다물었으니 훔금강역사인 듯하다
사실 절 안에 있는 금강역사상은 무서운 것이 많은데
마곡사 금강역사는 코믹하다.
훔금강역사 뒤로 위엄와 용맹을 상징하는 사자를 타고 있는 문수동자의 모습 |
해탈문과 천왕문 사이에는
자라면서 볼 기회가 없었떤 수세미가
길게 늘어져 있다
가을에 오니 참 좋다
왠지 절간에 들더라도 풍요로움이 넘치는 느낌이다
천왕문 [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62호
천왕문에는 대개 사천왕상이 있다.
사천왕은 천상계 사천왕천의 동·서·남·북 네 곳을 관장한다고 믿었던 고대 인도의 신화적인 존재다.
사천왕은 수미산 기슭을 지키면서 그곳 중생들이 바른 가르침에 따라 올바르게 살아가고 있는지를 살피고,
그들을 바른 길로 인도한다는 천왕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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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방은 지국천(持國天)으로 손에 칼을 들고 있고, 서방은 광목천(廣目天)으로 탑을 들고 있으며,
남방은 증장천(增長天)으로 용을 붙잡고 있다.
또한 북방은 다문천(多聞天)으로 비파를 들고 있다. 이런 신앙은 『리그베다(Rigveda)』 등 인도의 옛 문헌에 나타나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극락교에서 내려다 보면 태화산을 흘러내려온 개울에 무거운 등껍질을 지고 살아가는 거북이가 노닐고 있다.
등에는 새끼거북을 태우고...
극락교을 지나면
마곡사 절집으로 들어가게 된다
세속을 버린 법계의 세계로.
절집 마당에 들어서자마자 눈에 들어는 마곡사 전경
천년고찰을 들어설때 전해져 오는 느낌은 스스로 마음이 맑아진다는데 있다
그저 스쳐가는 절집이 아닌
내가 여기를 먼 길을 돌아 여기에 온 것은
마음의 중심에 무겁게 앉은 돌을 내려 놓을때
그 돌은 이 사찰의 보이지 않는 탑하나 쌓아 놓고 가는 마음이 된다.
마곡사는 풍수지리상 '군왕지지터' 즉 임금이 나는 터라고 한다.
대광보전과(보물 802호)과 오층석탑(보물 799호)
탑은 고대 인도 산스크리트어인 스투파(Stupa)를 한자로 음역하면서 솔도파(率塔婆), 솔탑파(率塔婆)라 하다가
탑파(塔婆), 탑이라는 줄임말로 부르게 되었다.
스투파의 원래 뜻은 부처의 진신사리를 봉안하는 묘에서 비롯되었다.
절마당에 우뚝 서 있는 이 오층석탑은 탑 전체의 무게를 받쳐주는 기단 (基壇)을 2단으로 쌓고,
그 위로 5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후 머 리장식을 올린 모습이다.
탑신의 몸돌에는 부처, 보살 등을 조각 해 놓았고,
지붕돌은 네 귀퉁이마다 풍경을 달았던 흔적이 보이 는데,
현재는 5층 지붕돌에만 1개의 풍경이 남아 있다.
청동으 로 만들어진 꼭대기의 머리장식은 이 탑에서 가장 눈에 띄는 부 분으로, 중국 원나라의 라마탑과 그 모습이 비슷하다.
길쭉한 감이 있어 안정감은 적으나 당당한 풍채로 버티고 서있다.
만들어진 시기는 머리장식의 독특한 모습으로 보아 원나라 의 영향을 받았던 고려 후기 즈음으로 여겨진다.
즉 고려 후기 당시 원나라와의 문화 교류가 활발히 이루어지면서 라마교 계통 의 문화도 고려에 들어오게 되는데
이 탑은 그 문화의 한 예라 고 할 수 있다.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탑 안의 보물들을 거의 도난당하였으나,
1972년 해체하여 수리하는 과정에서 동으로 만든 향로와 문고리가 발견되었다.
(충청남도 사이버 문화원 발췌)
대광보전 현판은 시문화 사절로 꼽히던 "표암 강세황(姜世晃 1712-1791)"의 글씨로
글씨는 약간 흘림체로 힘이 있고 유려하다.
대광보전(보물802호)의 측면모습
측면에 사천왕상의 벽화가 그려져 있다.
대광보전 삿자리
현재는 카펫일 깔려 있는데
카펫을 살짝 들어올리면 앉은뱅이가 짯따는 삿자리가 깔려 있다.
앉은뱅이의 소원을 통해 세상 모든 것의 소중함을 생각해봄이 좋을듯하다.
<앉은뱅이 업장 소멸한 대광보전 관한 이야기>
앉은뱅이, 그가 걸어 나오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는 부처님의 자비를 모든 살아있는 것들에 세세생생 회향하겠노라고 다짐했다.
그날은 그가 부처님께 공양 올릴 삿자리를 짜기 시작하면서 앉은뱅이로서의 삶을 거두고 걸을 수 있게만 된다면,
그 자비광명을 얻게만 된다면 이생을 넘어 세세생생 보시하는 삶을 살겠노라고 맹세하고
부처님께 의지하며 생활한지도 어느덧 100일째 되는 날이었다
그는 이미 자산이 너무도 주제 넘는 소원을 품었던 터라 더없이 부끄러움을 느끼고 있었다.
"내가 가진 업보가 그 얼마나 큰데 감히 부처님께 그런 소원을 빌다니!
얼마나 더 공덕을 쌓아야 그 동안 지은 억겁의 죄업을 다 씻을 수 있을 것인가,
슬프도다 슬프도다."
지난 100일 동안의 기도 끝에 깨달은 것은 첬재도 참회요, 둘째도 참회였다.
그러한 나날이 계속 될수록 그는 걷게 되는 것을 염원하기보다는 길가의 무심히 핀 들꽃이 소중하고 그것이 살았음을,
내가 살아있음을 느끼며 그 무엇에건 감사하게 되었다.
들꽃과 함께 호흡하고 나늘 느끼는 것 자체만으로도 그는 부처님께 감사했다.
그리고 마침내 삿자리가 완성되었다.
그는 부처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성치않은 다리를 끌고 부처님께 기어가 자신이 할 수 있는 가장 지극한 마음으로
절을 올리고 법당을 나왔다.
그런데 이것이 어찌된 일인가 그가 걸어나오고 있는 것이 아닌가?
자신도 전혀 의식하지 못한채 그는 어느새 걷고 있었다.
그는 그 파란 나늘과 푸른 숲, 무심히 흐르는 마곡천을 바라보며
부처님의 자비를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그는 다시 한 번 또 다짐했다. 이 같은 부처님의 자비를 하늘과 바람과 나무와 숲, 그리고 모든 살아있는 이들에게
회향하겠노라고, 그리하여 나누는 삶, 자비의 삶을 살겠노라고.
대광보전 비로자나불
마곡사는 충남 공주 태화산 기슭에 자리한 고찰로 선교양종대본산으로 현재는 조계종 제6교구본사다.
‘봄에는 마곡사, 가을에는 갑사’라 할 정도로 경관이 수려해 지금도 시인 묵객들이 많이 찾는다.
마곡사 대광보전은 비로자나불이 봉안된 화엄교학에 근거한 건축물이다.
불상이 불전 정면이 아닌 향좌측에서 향우측을 향해 서쪽에서 동쪽을 바라보고 있어
예배 뿐 아니라 설법을 하는 법당 기능에 충실한 구조임을 보인다.
대광보전 비로자나불
마곡사는 석가모니불을 모신 대웅보전과
진리를 상징하는 비로자나불을 모신 대광보전과 함께 2개의 주불전을 가지고 있다.
처음 지은 시기는 알 수 없으나 불에 타버렸던 것을 조선 순조 13년(1813)에 다시 지은 것이다.
마곡사 대광보전 후불벽화로 그려진 백의관음도
대광보전 외벽의 포벽에 그려진 백의관음도는 주의 깊게 살피지 않으면 찾아보기 힘들다.
천의자락을 휘날리며 맨발로 물결위에 서 있는 모습으로, 몸을 기울여 그림 오른쪽에 합장해 있는 남순동자를 굽어보고 있다.
후불벽에 그려진 백의관음도는 마곡사 벽화를 대표하는 작품이다.
고주 사이에 한지를 여러겹 발라 후불벽을 만들어 일반 화폭에 그려진 것처럼 세밀한 묘사를 보여준다.
섬세하게 그려진 암벽의 세밀한 물결과 명암표현, 굽이치는 물결과 포말 등은 화승의 노고를 짐작하게 한다.
대광보전 내부 벽화
대광보전 뒷편 대웅보전으로 올라가는 길
대웅보전으로 오르는 계단을 오르면 스님의 요사채 "대향각"
대웅보전(보물 801호)
아들을 점지해 준다는 대웅보전(보물801호)
싸리나무 기둥을 안고 돌면 아들을 낳는다는 대웅보전!
2층으로 된 대웅보전은 통층으로 전각의 내부에는 싸리나무 기둥이 4개가 있는데 여기에도 흥미로운 설과가 전해져 온다
내용인즉
"사람이 죽어서 저승의 염라대왕 앞에 가면 '그대는 마곡사 싸리나무기둥을 몇 번이나 돌았느냐' 고 묻는다고 한다.
그 이유는 돌수록 극락길이 가깝기 때문이다.
아예 돌지 않았다고 하면 지옥에 떨어지는 것이다. 이생에서 아들이 없는 사람에게는 마곡사의 싸리나무 기둥을 안고 돌면
아들을 낳는다고 일렀다고 한다. 이렇게 재미난 전설로 인해 지금도 이 싸리나무 기둥은 윤기가 나고 손때가 묻어 있다.
아들을 낳고 싶은 아낙이 많아서이기때문이다."
대웅전 혹은 대웅보전은 법화경에 석가모니 부처님을 큰 영우이라고 한데서 유래한 것으로
석가모니 부처님이 주석하시는 집이라는 뜻입니다.
마곡사 대웅보전은 보물801호로 1785년에서 1788년에 걸쳐 중수되었다.
석가모니 부처님을 중심으로 양옆에 약사여래부처님과 아미타부처님이 모셔져 있다.
이때의 부처님들은 공간적으로 과거 현재 미래의 삼세(三世)를 대표하는 삼세불이라고 부른다.
석가모니 부처님을 중심으로 양옆에 약사여래부처님과 아미타부처님이 모셔져 있다.
이때의 부처님들은 공간적으로 과거 현재 미래의 삼세(三世)를 대표하는 삼세불이라고 부른다.
대웅보전에서 바라본 풍경
고방, 심검당, 요사, 염화당이 보인다.
연화당
최근데 지은 요새채로 템플스테이, 백범 김구 선생 추모 다례재, 수리수리컨서트등의 행사를 하는 곳이다.
아랫층은 공양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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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화당의 현판
마곡사 심검당麻谷寺尋劍堂
1991년 12월 3일 충청남도유형문화재 제135호로 지정되었다.
마곡사에서 소유 및 관리하고 있다.
태화산(泰華山) 남쪽 기슭에 있는 사찰인 마곡사의 경내에 있는 요사(寮舍:스님들이 거처하는 집)와
그 남쪽에 자리하고 있는 창고 건물이다.
심검당이란 지혜의 칼을 찾는 집이라는 의미에서 선실(禪室)이나 강당으로 사용되는 건물에 붙이는 이름이다.
심검당의 창건 연대는 잘 알 수 없으며,
1797년(조선 정조 21)에 중수된 기록이 사적입안에 나오고 전내(殿內)의 편액(篇額) 명문에 의하면
"함풍(咸豊) 6년(1856)에 중수하고 융희 3년(1909)에 기와를 다시 올렸다"라는 기록이 남아 있다.
심검당은 'ㄷ'자 평면에 자연석을 쌓아 한 벌의 기단(基壇)을 조성한 후
둥글넓적한 자연석을 그대로 놓은 주춧돌 위에 둥글고 네모난 기둥을 혼합하여 세웠다.
심검당의 배치는 마당을 가운데 두고 있는 'ㄷ'자 형인데 양쪽으로 날개처럼 방들이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한 쪽은 겹집이고 다른 한 쪽은 홑집 형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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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검당(尋劒堂) 충청남도 유형문화재135호
심검당은 대광보전 앞마당 5층 석탑의 동쪽에 자리하고 있는 'ㄷ자'형 평면의 요사이다.
승려들의 생활공간으로 대광보전의 노전(爐殿)이면서 대방(大房)의 역할을 하는 건물이다.
연하당 옆 스님들의 거처인 요사채
구월을 상징하는 꽃무릇
요사채의 담과 어우려져 곱다.
고방은 창고건물을 뜻하는데 마곡사의 고방은 ‘一’자형 평면이지만 심검당 동측에 위치하여 안마당을 막고 있어
심검당과 함께 보면 ‘口’자집 배치가 된다. 마치 규모가 큰 조선시대 양반집 같은 모습이다.
이 고방은 2층구조로, 아래층은 흙바닥이고 위층은 마루바닥으로 꾸몄다.
정면 4칸, 측면 1칸으로 홑처마 맞배지붕이다.
사괴석으로 기단을 만들고 초석은 자연석 덤벙주초이다. 아래층 기둥은 두리기둥을 세우고 상층은 네모기둥을 세웠다.
대개 중층건물은 위아래 기둥을 같은 모양으로 만드는데,
여기서는 아래 위층을 서로 다르게 만들었다. 아래층의 문은 심검당 안마당쪽으로 내고 벽은 흙을 바른 심벽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위층의 벽은 나무로 막은 판벽이다. 이 고방도 심검당과 같은 시기에 만든 것으로 보인다.
나무를 깎아 만든 계단
투박하지만 참 멋스런 모습이다.
화려한 마곡사 범종각
범종각 옆 오래된 나무와 뒷편 굴뚝을 그대로 살리기 위하여 범종각의 지붕모양을 저렇게 만든듯하다.
응진전(左)과 백범당(右)
응진전은 나한전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
나한은 아라한의 약칭으로 산스크리트어 아라한(arhan)에서 음역된 말이다.
본래의 뜻은 응공(應供), 응진(應眞)이다.
일반적으로 불전들은 엄숙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데 비해 응진전은 조금 다르다.
불전에 있는 개성이 강한 나한상 때문이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응진전 [應眞殿]내부
백범당(白凡堂)
마곡사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이며 독독립운동의 지도자이신 백범 김구(金九 1879 ~ 1949)선생이
1896년 명성황후시해에 대한 분노로 황해도 안악군 치하포나루에서 일본군 장교를 죽이고
인천형무소에서 옥살이를 하다가 탈옥하여
마곡사에 은거할 때 원종(圓宗)이라는 법명으로 잠시 출가하여 수도하였던 곳이다.
백범 김구선생은 1898년 마곡사를 떠난후, 근 50년만에 돌아와 대광보전 기둥에걸려있는주련의
"각래관세간 유여몽중사(却來觀世澗 猶如夢中事)돌아와 세상을 보니
마치 꿈 가운데 일 같구나"라는 능엄경에나오는 문구를 보고 감개무량하여
그 때를 생각하며한그루의 향나무를 심어 놓았는데, 지금도 백범당 옆에 푸르게 자라고 있다.
마곡사는 통일신라시대에 창건되었으며, 구한말에는 독립운동가 김구와도 인연이 깊었던 사찰이다.
김구는 명성황후 시해에 가담 했던 일본인 장교를 죽인 후 인천형무소에서 옥살이를 하다가
탈 옥하여 이 절에 숨어서 승려로 지냈는데,
지금도 대광보전 앞쪽 에는 김구가 심었다는 향나무가 자라고 있다.
조사전 祖師殿
조사전에는 마곡사를 창건하신 지장율사를 비롯한마곡사 역대 조사들의 진영(眞影)을 모신곳으로
1370여년의유구한 역사를 지닌 마곡사에 주석하신 역대조사, 지장율사를 비롯한 고려시대 보국국사,
조선시대 선산, 사명, 영규대사, 그리고 근세 조계종의 선풍을 새롭게 일어킨 경허, 만공,
그리고 그 맥을 이은 제자들과 불화(佛畵)의 맥을 이은 금호스님등 열다섯분이 모셔져 있다.
<마곡사 조사전에 모셔져 있는 스님 영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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넉넉하지 않은 시간동안
극락교 안에 위치한 당우들을 살펴보고 자료를 찾아 정리를 해보았다.
사찰의 주련이나 그외 소소한 여러가지를 더 살펴보고 싶었지만
준비없이 찾아든 불자의 눈에 더 이상의 것을 볼 수는 없었다
늘 생각하는 것이지만 아는만치 보이는 것이 불가이리라...
'
'
'
이제 극락교 밖의 당우를 살펴보고자 한다.
극락교를 건너오면 가장 먼저 누에 들어오는 명부전이다
명부전은 지장전, 혹은 시왕전(十王殿)이라고도 부르는데, 주불은 지장보살이다.
다른 보살상은 화관으로 장식되어 있는데, 지장보살만은 승려의 모습을 하고 있다.
지장보살은 지옥에서 고통을 받는 중생들을 모두 구제하겠다고 한 보살이다.
왼손에 든 쇠지팡이로는 지옥문을 두드려 열고,
오른손의 구슬로는 어두운 세상을 광명으로 비추겠다는 의지를 나타내고 있다.
명부전은 일제강점기인 1939년에 건립되었으며, 현재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64호로 지정해 보호하고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마곡사 명부전은 역사적으로 오래된 건물은 아니지만 가람 배치 때에 반드시 갖춰야 하는 불전이라 할 수 있다.
일제강점기 때의 건축물이지만 건축의 양식적 특징은
조선 후기 소규모 다포식 팔작지붕으로, 당시 건축의 기술적 특징을 지니고 있다.
다른 보살상은 화관으로 장식되어 있는데, 지장보살만은 승려의 모습을 하고 있다.
지장보살은 지옥에서 고통을 받는 중생들을 모두 구제하겠다고 한 보살이다.
왼손에 든 쇠지팡이로는 지옥문을 두드려 열고,
오른손의 구슬로는 어두운 세상을 광명으로 비추겠다는 의지를 나타내고 있다.
매화당梅花堂
스님들이 거처하는 요사채이다.
명부전에 바라본 매화당
일반인들의 출입을 통제하고 있다.
영산전 靈山殿 보물800호
마곡사 영산전은 마곡사 안의 불전 중에서 가장 오래되었으며,
수행 가람의 중심 건물이다.
‘영산(靈山)’은 영축산(靈鷲山)의 준말로, 중인도 마가다국 왕사성 부근에 있는 산으로서 석가모니가 설법을 한 곳이다.
마곡사의 수행 가람 중에서도 가장 중심이 되는 영산전은 조선 후기에 중수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마곡사 영산전은 규모가 그리 작지 않으며, 보물 제800호로 지정되어 있다.
영험한 기운이 응되어 잇는 영산전 "예가 어진 정승과 용맹스러운 장수를 만들어 낸다는 태화산 군왕대의 혈 자리라." 마곡사 영산전은 예로 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마곡사에서 가장 영험이 큰 전각으로, 특히 어진 정승과 용맹스러운 장수를 만들어 낸다는 군왕대의 모든 기운이 모여 있는 곳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나라의 큰일을 할 인재 배출을 원하는 많은 불자들이 부처님께 기도를 올리고 소원을 성취하고 있습니다. 영산전은 현재 남아있는 마곡사 건물중에 가장 오래된 것으로, 1650년 중수돼 현재 보물800호 지정되었습니다.
영산전에는 고려시대에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 목불 7구가 남아잇습니다. 사적입안의 기록에 따르면 영산전에는 세조이 친필인 방서도 전해 내려오고 있다고 합니다. 영산전은 본래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인도의 영축산에서 법화경을 설하시던 당시의 광경인 영산회상을 재현해 모신 곳으로, 석가모니 부처님과 10대 제자, 16나한 혹은 500나한을 모시기도 합니다. 그러나 유독 마곡사의 영산전에는 한 가운데에 과거칠불을, 그 주위에 1000분의 부처님을 모셨습니다. 과거칠불이란 석가모니 부처님 이전에 이 세상에 출현하였다고 하는 일곱 분의 부처님을 일컫습니다. <마곡사 홈페이지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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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루 興聖樓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마곡사에 진입하기 위해 세심교를 건너면 마곡사 해탈문을 만나기 전 왼쪽 축대 위에 마곡사 흥성루가 있다.
흥성루는 언제 처음 건립했는지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다만 건축 구조나 양식으로 보아 조선 말기나 일제강점기에 건립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규모는 일반 사찰의 진입 누각에 비해 매우 큰 편이다.
마곡사 영산전 앞에 큰 누각이 있다는 것은 마곡사 영산전 앞마당에서 사찰의 대규모 행사가 이루어졌으리라는 추측을 하게 만든다.
대규모 사찰 행사 때 마곡사 흥성루는 강당 기능을 했을 가능성도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마곡사 승방 수선사修禪社
절규모에 비해 아무런 덧칠을 하지않아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요사채이다
그래서 대개는 참선이나 수행과 비슷한 말로 쓰는 모양이다.
마치 개심사의 나무기둥처럼 마음에 와닿는 모습이다.
해탈문과 매화당
세심교를 건너면 가장 먼저 만나는 풍경이다
빠른 걸음으로 마곡사를 둘러보며 나오는 길 다시 한번 경내를 바라다 보았다.
돌아서 나올때면 뭔가 내가 도량이 부족하여
더 얻지못함이 아쉽고 더 많은 것이 있는데 빠뜨린것을 없을까
자꾸 뒤돌아보게 된다.
하지만....
한술에 다 얻으랴
언젠가 인연이 되어 또 온다면 그때는 더 많이 얻게 될리라....
마곡사 밖의 풍경
가장 쉬운 말로
걷기 쉬운 길에 무심히 전하는 불법.....
하루의 시간을 넉넉히 잡고 마곡사에 간다면
솔바람길을 따라 트랙킹도 할 수 있고
주변 암자와 마곡사를 둘러본다면 건강과 마음의 양식을 채우는데 튼튼한 하루가 될 것 같다.
마곡사 경내에 피어있는 가을 열매 이뻐서 한컷...
마곡사의 주요 당우을 모두 살펴보았고
주변 암자 백련암과 영은암은 따로 편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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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일찍 공주 영평사 답사를 마치고
나즈막한 가을 햇살을 따라 가까운 태화산 마곡사로 향했다
예전에 딱 한번 왔었는데
마곡사로 올라가는 길을 따라 시냇물이 흐르고
그 개울에는 잉어가 헤엄치고 다니던 기억만 났다
공주 인근의 조계종 사찰을 모두 거느리고 있는 마곡사
다시 한번 살펴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기억속에 마곡사는 어디로 가고
무궁무진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 마곡사의 깊이는
정신없이 내혼줄을 잡고 흔들었다.
함께 했던 일행이 불자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이유없이 동행해주는 것이 깊이 감사할 따름이었다.
2014.9.13. 토요일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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