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 한쪽 비워둔다면

photostory- 路

2014.11.7. 한양도성 트래킹 (백악길, 낙산길), 그리고 4대문과 4소문에 대해

kyeong~ 2014. 11. 22. 00:22

 

 

 

2014.11.7. 토요일, 흐림

일년내내 트랙킹을 한다고 여러곳을 다녔지만

정작 가까운 서울의 길을 걸어보진 않았다

년말이고 마무리하는 의미를 생각하며

생각 할 수 있는 시간이 넉넉한 한양도성길을 걷기로 했다

 

서울둘레길은 크게 내사산 한양도성길 6개코스(18.6km)와 

외곽산 서울둘레길8코스(157km)로 나뉜다.

 

성곽과  어우러진 가을의 색깔들

한 해가 간다고 쓸쓸함이 찾아들지만

곱디 고운 단풍이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쓸쓸하지 않게

어디론가 떠나고 싶도록 마음을 자꾸만 흔들어 놓는다

흔들리는 마음으로

이 가을! 어디라도 걷지 않으면 후회할 것 같은 생각이다.

 

오늘은 한양도성 백악길과 낙산길 이 두구간을 걷고

다른 빛 좋은 날

인왕산구간과 남산구간을 걸어  보기로 계획을 해보았다.

 

백악구간:창의문~혜화문 4.7km

낙산구간:혜화문~흥인지문  2.1km

 

흥인지문구간:흥인지문 ~ 장충체육관  1.8km

남산(목멱산)구간:장충체육관 ~ 백범광장, 4.2km

숭례문구간:백범광장 ~ 돈의문 터 1.8km

 

인왕산구간:돈의문 터 ~ 창의문  4km


한양도성길 안내:http://seoulcitywall.seoul.go.kr/front/kor/sub01/course.do

경복궁역 3번 출구에서 7022번 버스를 타고 창의문에서 하차를 한 다음

 

창의문에서 부터 백악길은 시작된다.

 

 

 

(백악길 안내도)

 

한양도성길 6구간 백악구간 4.7km, (서울 성곽길) 창의문에서 혜화문까지

백악구간 4.7km는 백악산을 넘어 혜화문에 이르는 구간이다.

이구간은 약 2시간 정도 소요되며 대체로 산길이다

백악(북악)산은 해발 342m로서 옛 한양의 주산으로 내사산에서 제일 높다

한양도성은 백악산을 기점으로 축조 되었으며

1968. 1.21.사태이후 40년간 출입이 통제 되었다가 2007년 개방 되었다.

 

창의문 안내소와 반대편 숙정문 말바위 안내소에서 서울성곽 탐방 출입 신고서를 작성하고

신분증 제시후 출입증을 목에 걸고서 통행을 해야 한다.

일부구간은 사진촬영이 통제 되고 2시간정도 화장실이 없다.

 

 

창의문 [彰義門]

조선시대 4소문 중의 하나.

                                                                                            북문 또는 자하문이라고도 한다.

 

1396년(태조 5) 도성을 쌓을 때 북서쪽에 세운 문으로, 돌로 쌓은 홍예(虹霓) 위에 정면 4칸, 측면 2칸 구조의 문루가 있다.

4대문 중 북대문인 숙청문이 항상 닫혀 있었으므로 경기도 양주 등 북쪽으로 통행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이 문을 거쳐서 왕래했다.

인조반정 때 능양군을 비롯한 의군(義軍)이 이 문을 부수고 들어가 반정을 성공시킨 유래가 있는 곳으로서,

누문 다락에는 인조반정 때의 공신의 명단을 적은 게판(揭板)이 있다. 1958년 보수하여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한양도성 6구간 백악길의 시작인 창의문에 도착하면

경찰복을 입은 동상하나가 멋지게 다가선다

이는, 최규식 동상

 

1968년 1월 21일.

북한 124군 부대원 31명이 휴전선을 돌파하여 청와대로 쳐들어 왔다.
대통령 박정희의 목을 따고,청와대를 폭파하기 위한 것이 그들의 목표였다.

자하문까지 넘어온 그들은,
청와대 코앞에서 당시 종로 경찰서장이었던 최규식 총경의 검문을 받자,
즉각 그를 쏘아 죽였다.

 

 

한양도성길 백악길 구간은

출입신청서를 작성하여 신분증을 제시하면

출입중을 받아서 통과하는 구간이다.

 

이구간은 군인들이 통제를 하며

정해진 구간으로 다녀야 하고

사진 촬영이 제한이 되기도 한다.

 

시작부터 급경사다

백악산 정상까지 가파른 길을 30여분 올라야 한다.

 

성곽과 어우러진 갖가지 단풍들이 절정을 이룬다

메마르고 딱딱한 성곽길에

제철 맞은 단풍들이 어우러지니 걷는 내내 지루하지 않아서 좋다.

 

백악산 정상이 보인다

왼쪽으로 청와대와 경복궁이 있어서 사진촬영은 금지 된다.

 

멀리 북한산이 보이고

도심과 어우러진 단풍이 아름답다.

 

백악산(342m)  정상...

 

백악산에서 숙정문으로 가는 도성을 바라 보았다.

제한된 촬영이라..마음먹은대로 찍을수가 없다.

그래도 국가의 안보를 위해서 몰촬은 스스로 삼가했다.

 

 

1·21 사태 소나무

백악마루에서 청운대로 내려가는 길에 1·21 사태 소나무가 있다.

수령이 200년 정도 된 나무인데 15발의 총탄 자국이 남아 있다.

이 총탄 자국은 1968년 1월 21일, 청와대를 습격하려 침투한 북한 특수부대원들과 우리 군경이 교전한 흔적이다.

이곳에서 성 바깥을 바라보면 북한산과 백악 사이에 자리 잡은 평창동이 한눈에 들어온다.

평창동이라는 지명은 선혜청의 부속 창고인 평창(平倉)이 있었던 데에서 유래하였다.

 

 

이렇게 길고 긴 도성...

석수장이들의 힘과 노고가 느껴지는 길이다

 

 

백악 곡성으로 올라가는 길

 

백악 곡성에 바라본 백악산

 

백악 곡성

곡성(曲城)은 주요 지점이나 시설을 효과적으로 방어하기 위해 성벽의 일부분을 둥글게 돌출시킨 것을 말하는데

 인왕산과 백악에 하나씩 있다.

이 중 백악 곡성은 일반인에게 개방되어 있는데 도성을 둘러싼 서울의 산세가 가장 잘 보이는 곳으로 꼽힌다.

 

 

삼청각(三淸閣)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에 있는 전통 문화공연장으로, 1972년 건립되어 1970년~1980년 요정정치의 산실로 대표되었다.

여야 고위정치인의 회동과 1972년 남북적십자회담, 한일회담의 막후 협상장소로 이용하였던 곳으로,

제4공화국 유신시절 요정정치의 상징이었다.

 

1980년대에는 손님이 줄어들어 1990년대 중반 이름을 ‘예향’으로 바꾸고 일반음식점으로 전환하였으나,

경영난으로 1999년 12월에 문을 닫았다.

1999년 말 건물과 부지를 인수한 화엄건설(주)이 고급빌라를 짓기 위해 관할 성북구청에 건축허가를 신청하였으나

 문화재 보존여부에 대한 판단문제로 건축허가 결정이 유보되었다.

이후 2000년 5월 22일 서울특별시가 삼청각 부지와 건물을 도시계획시설상 문화시설로 지정하였으며,

리모델링 공사를 끝낸 후 2001년 10월 새로운 전통 문화공연장으로 문을 열었다.

새롭게 단장한 삼청각은 공연장, 한식당, 찻집, 객실 등으로 구성되어 있고 규모는 대지 5,884평, 연건평 1,331평이다.

6채의 한옥이 있으며, 건물마다 원래의 이름을 그대로 살렸다.

월요일을 제외하고는 연중 전통공연이 열리고 혼례나 약혼식 장소로도 사용되며 운영은 세종문화회관이 맡고 있다.

 

 

멀리 백악팔각정이 보이고...

저기 팔각정은 창의문에서 뒷쪽 백사실로 걷다보면 만나게 된다.

 

숙정문(肅靖門) 사적 제10호

 

창의문에서 숙정문까지 2km

서울성곽을 이루는 사대문(四大門) 가운데 하나로, 도성의 북쪽 대문이다.

1396년(태조 5) 9월 도성의 나머지 삼대문과 사소문(四小門)이 준공될 때 함께 세워졌다.

원래 이름은 숙청문(肅淸門)으로, 도성 북쪽에 있는 대문이라 하여 북대문·북문 등으로도 부른다.

숙정문이 처음 기록에 등장하는 것은 1523년(중종 18)이며, 북정문(北靖門)이란 표현도 나오는데,

숙청문과 숙정문이 혼용되다가 뒤에 자연스럽게 숙정문으로 바뀐 것으로 추정된다.

 

도성 북문이지만, 서울성곽의 나머지 문과는 달리 사람의 출입이 거의 없는 험준한 산악지역에 위치해 실질적인 성문 기능은 하지 않았다.

1413년 풍수지리학자 최양선(崔揚善)이 지맥을 손상시킨다는 상소를 올린 뒤에는 문을 폐쇄하고 길에 소나무를 심어 통행을 금지하였다.

이후 숙청문은 음양오행 가운데 물을 상징하는 음(陰)에 해당하는 까닭에

나라에 가뭄이 들 때는 기우(祈雨)를 위해 열고, 비가 많이 내리면 닫았다고 한다.

 

1963년 1월 21일 서울성곽에 포함되어 사적 제10호로 지정되었다.

1968년 1·21 사태 이후 청와대 경비를 위해 일반인의 접근을 금지하다가,

2006년 4월부터 서쪽 성곽 0.5㎞, 북쪽의 진입로 0.6㎞ 구간과 함께 다시 일반에 개방하였다.

 

지금의 숙정문 목조 누각은 소실되었던 것을 1976년에 복원한 것이며, 현판의 글씨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쓴 것이다.

 

 

창의문에서 받았던 출입증은 숙정문에서 반납을 한다

 

 

백악산과 어우러진 성북동 마을

여기서 이렇게 내려다보니 참 아늑하다

가을이면 양옆으로 곱게 물든 산빛때문에

성북동 사람들은 착한 생각만 하고 살았을 것 같다.

 

 

백악산으로 향하는 도성을 다시 한번 돌아보며...

내려올때는 가파른 것을 몰랐는데

다시 돌아보니 경사가 급하다

산의 흐름을 따라 도성이 이어져 있다.

 

도시도

강줄기도

그리고 도성도

사람의 마음도

모두가 산의 마음을 따라 흘러가는 것 같다.

 

 

낙엽이 수북히 쌓인 길

저 길을 걸을때 마다 바스락 거리는 가을소리들...

 

성곽 너머 서울....

빼곡히 들어찬 빌딩들

집들이 참 많기도 하다.

 

성곽 저멀리는 현대식 빌딩

성광 이쪽은 옛날집들...

대조를 이룬다.

 

성곽과 조화를 이루는 단풍나무를 정신없이 보며

시간 가는 줄 모르겠다

저 붉은 잎들도 시간가는 줄 모르고 붉어 지겠지.

 

 

언젠가 성북동의 해설사가 전해주는 성북동 이야기를 듣고 싶다.

 

 

허름한 담을 따라 피는 담쟁이

한 폭의 수채화 같은 느낌이다.

 

 

두개의 표지석

한개는 혜화문 준공표지석

(지금의 혜화문은 1994년 복원 된 것임)

 

오른쪽 또다른 한개는 홍화문터 표지석

혜화문(동소문, 홍화문)은 원래의 이름은 홍화문이었는데

창경궁이 건립될때 그 정문이 홍화문으로 지은뒤

문 이름이 같다고 하여 중종때 혜화문으로 개명한 것이다.

 

 

혜화문(惠化門)은

서울성곽의 사소문 중 하나로, 속칭 동소문(東小門)이라고도 했다.

15세기 초 서울의 북대문인 숙정문이 폐쇄되면서 혜화문을 북문으로 부르기도 했다.

원래 소문을 지키는 출직호군(出直護軍, 문을 지키는 병사)이 20명이고 대문은 30명이지만 혜화문은 출직호군이 30명이었다.

이 문은 1396년(태조 5년)에 완공되었는데, 당시는 홍화문(弘化門)이라고 했다.

1511년(중종 6년)에 창경궁의 정문인 홍화문발음이 같다 하여 혜화문으로 이름을 고쳤다.

1592년: 문루가 불탔으나, 1744년(영조 20년)에 재건했다.

일제 강점기 때인 1928년 문루가 헐리고, 1939년 석축과 홍예가 헐렸다.

1994년 복원했으나, 위치가 다른 곳이었고 모양도 엇비슷하게 지어진 것이다.

 

원래 홍예 틀 내부의 천장에는 이 있다.

그러나 이 문엔 봉황이 그려져 있다.

이 주변에 새가 많아 새들의 왕인 봉황을 이용해 막으려고 한 것으로 보인다.

 

예전의 광화문, 그리고 현재의 숙정문처럼 혜화문의 현판도 글씨 쓰는 방향이 잘못되었다.

.

.

.

이렇게 해서 백악길 4.7km구간을 모두 걷고

다음 구간인 낙산길을 이어서 걸었다

 

 

 

(낙산구간 안내도)

혜화문에서 흥인지문까지 2.3km

아이들 손잡고도 걸을만한 편한 길이다

성곽안에서 걷지 않아도 벤치에 앉아 깊어가는 가을날을 느껴보면 좋은 구간이다

 

 

(

절정을 이룬 노란색과

성곽에 물든 담쟁이의 잎이 어울려

가을의 중심에 있음을 실감나게 한다

이 딱딱한 도심도 어딜가나...곱고 고우니

가을엔 무슨 바람이든 바람도 날만 한다.

 

 

여기에서 성밖으로 걷는 길과

성안으로 걷는 길을 선택할 수 있다

 

성밖으로 걷기 시작햇다.

 

담을 넘는 저 붉은 것들

환장하겠다

가을만 되면 이렇게 설치는 가슴의 요동소리

이 소리가 들리는 자...모두 함께 걷고 싶다.

 

길을 보아도

하늘을 보아도

멀리 어느 산을 보아도

아무도 없어도 그냥 좋다

 

이 가을이 지나는 소리

가을이 남기는 색깔들....

내생에 이 아름다운 시절을 몇 번이나 만나고 사랑했을까

이 계절에 얼마나 행복해 하였던가

새삼...가을앞에서 삶의 의미를 새기게 된다.

 

 

 

 

말을 하지 않아도

무언으로 교감이 이루어지는 길

 

 

 

 

 

 

 

 

서울에 있는 4대문과 4소문을 다시 한 번 생각해보며 걸어보는 시간

 

이 곳은 서민들의 보금자리가 아기자기 붙어 있는 마을길

저렇게 장이 열린다는 플랭카드가 정겹게 느껴진다.

 

겨울채비를 하나보다

시래기도 말리고

무우말랭이도 보이고.

 

 

가을에 푹 빠져 정신없이 걷다보니

자동차가 빼곡한 동대문에 도착했다

한양도성길을 걷다가 세상밖으로 나온 느낌이다

꽃이 피면 다시 한번 걸어보는 것도 나름 운치있고

즐거운 걸음이 될 것같다.

다음 행선지 창의문에서 인왕산을 거쳐 남산길....

그때는 어떤 색의 가을이 성곽길로 걸어가고 있을까

지금부터 기대가 된다.

2014.11.7.토요일

 

 

조선의 태조 이성계가 도읍을 정한 한양에는
4개의 대문과 4개의 소문(小門)이 있었다.

4개의 대문은
유교의 오상(五常)인 인의예지신(仁義禮知信)에 의해,
동쪽에 흥인지문(興仁之門), 서쪽에 돈의문(敦義門),
남쪽에 숭례문(崇禮門), 북쪽에 숙정문(肅靖門)을 두었다.
그리고 중앙에 해당되는 곳에 보신각을 두었다.

     

인의예지신(仁義禮知信), 서울의 4대문 4소문

 

조선의 태조 이성계가 도읍을 정한 한양에는
4개의 대문과 4개의 소문(小門)이 있었다.

4개의 대문은
유교의 오상(五常)인 인의예지신(仁義禮知信)에 의해,
동쪽에 흥인지문(興仁之門), 서쪽에 돈의문(敦義門),
남쪽에 숭례문(崇禮門), 북쪽에 숙정문(肅靖門)을 두었다.
그리고 중앙에 해당되는 곳에

보신각(普信閣)을 두어 도읍의 기본을 갖췄다.

 

그리고 각 대문들의 사이에,
편의를 위해 4개의 소문을 두었는데,
북문과 동문 사이에 동소문인 혜화문을,
동문과 남문 사이에 남소문인 광희문을,
남문과 서문 사이에 서소문인 소의문을,
서문과 북문 사이에 북소문인 창의문을 두었다.

 

 

 

<한양 도성의 4대문과 4소문의 위치>

(펌 그림)

 

 

한양도성을 트랙킹하면서 그동안 생각조차 않했던

서울의 4대문과 4소문에 대해 정리를 해보았다.

인터넷 검색을 통해서 거의 퍼온 글이지만

언젠가 시간을 넉넉히 가지고 사대문과 사소문에 대해 직접 견학을 해 볼 생각이다.

 

 

 

(펌글)

 

 

 

한양 도성의 4대문 

 

도성의 동대문인 흥인지문, 보물 제1호

다른 문의 이름들과는 다르게 이름이 네자인 것은
동쪽의 산인 타락산이 산의 지세가 약해
산의 기운을 돋우기 위해 '지(之)'자를 더했다고 한다.
(참고 사항 : 옛 한양을 안쪽에서 둘러싼 4개의 산을 內四山이라고 부른다.
동 : 타락산, 서 : 인왕산, 남 : 목멱산, 북 : 북악산이다.)
다른 4대문과는 다르게 성문에 옹성을 둔 것이 이러한 이유때문이라고 한다.

 

한양 도성의 서대문 돈의문(敦義門)

돈의문(敦義門)은 한양 도성의 서대문이다.
'의(義)'는 서쪽에 해당되므로 문의 이름에 '의(義)' 자가 붙었다.

한양 도성의 4대문들 중 가장 많은 수난사를 가진 문이다.
처음에는 돈의문이라고 이름지었는데
태종 13년(1413)에 풍수설을 받아들여 돈의문을 폐쇄하고
새로 문을 내고 이름을 서전문(西箭門)이라고 불렀다.

경희궁의 서쪽에 있었다고 한다. 

 그 뒤 세종 4년(1422) 도성을 새로 고칠 때
서전문을 헐어 버리고 지금의 서대문 마루턱에
새 문을 세웠는데 이름을 다시 돈의문으로 부르게 되었다.
세종 이후 돈의문이 새로 지은 문이라고 하여 새문, 혹은 신문(新門) 부르게 되었고,
지금의 '신문로'라는 지명도 여기에서 유래된 것이다.

1915년 일제의 도시계획에 의해 철거되어 지금은 찾아볼 수 없다.

 

                 <헐리기 전 돈의문의 모습>

 

한양 도성의 남대문인 숭례문(崇禮門), 국보 제1호

숭례문(崇禮門)은 한양 도성의 남대문이다.
'예(禮)'는 남쪽에 해당되므로 문의 이름에 '예(禮)' 자가 붙었다.

숭례문은 옛 한양 도성의 남대문이며 정문이기도 했다. 국보 제1호

현재 남아있는 우리나라 성문 건물로서는 가장 규모가 크다.
숭례문의 현판은 태종의 큰아들 양녕대군의 글씨로도 유명하다.
물론 세종의 셋째아들이자 조선의 명필로 이름을 떨쳤던 안평대군의 글씨라는 주장도 있다.

 

숭례문의 현판은 다른 대문들과는 달리 세로로 서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렇게 만든 이유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온다.
숭례문의 이름에 들어있는 '예(禮)'는 오행 중에서 '화(火)'에 해당되는데,
서울의 남쪽 관악산(서울의 외사산(外四山) 중 남산에 해당된다.)의 모습이 불꽃 모양이 아닌가?
거기에 가까이 있는 목멱산(남산의 옛 이름)에는 불에 잘 타는 나무(木)이 들어 있으니....
이에 관악산의 화기(火氣)를 막기 위해서 글씨를 세로로 길게 늘어뜨려 성문 밑을 막고 누르면
화기가 들어오지 못할 것이란 믿음 때문이었다고 한다.

얼마전 방화로 인해 우리 국민들을 가슴아프게 했던 일이 있어
이래저래 불과는 특별한 인연이 있는 대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임진왜란 때엔 이 현판을 잃어버린 일도 있었다.
몇년 뒤인 광해군시대 어느날 밤,
지금의 서울 청파동 한 도랑에서 서광이 비치기에 파보았더니
숭례문 현판이 있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숭례문이 국보 1호가 된 것에 대해서 여러 가지 이야기가 많았다.
'훈민정음'과 같은 자랑스런 문화재가 있음에도
성문을 국보 1호로 지정한 이유 때문이었다.

어떤 이들은 우리 나라의 국보가 처음 지정된 것이 일제 때인데,
일제가 과거 임진왜란 때 고니시 군이 한양에 처음 입성한 것이
숭례문이었기 때문에 이것을 1호로 지정했다는 설도 있으나,
옛 한양의 대문 중에서도 남대문인 숭례문이 정문이었기 때문일 것이라는 설이 더 힘을 얻고 있다.

 

석축의 양측에는 원래 성벽이 연결되어 있었으나
1908년 일본의 황태자가 조선을 방문할 때,
성문의 아래쪽을 지나치기 싫다고 하여, 길을 내기 위하여 헐어내 없어졌다.

 

 

한양 도성의 북대문인 숙정문(肅靖門)

숙정문(肅靖門)은 한양 도성의 북대문이다.
본래 북쪽에 해당되는 것은 '지(知)'인데,
'꾀 정(靖)'자를 사용하는 변화를 시도하였다.

숙정문은 숙청문(肅淸門)이라고도 불렸다고 한다.

도성의 북대문인 숙정문운 음기가 강한 북쪽에 있다고 해서 항상 닫아두었다고 전한다.

 

숙정문도 많은 사연을 가진 문이었다.

태조 4년(1395)에 처음 건립되었으나
태종 13년(1413)에 최양선이 주장한
'백악산 동령과 서령은 경복궁의 양팔에 해당하므로 여기에 문을 내어서는 안되다'는 의견에 따라
창의문(자하문)과 함께 폐쇄하고 길에 소나무를 심어 사람들의 통행을 금하였다고 한다.

 

원래 이 문은 높은 산 중턱에 있어
길이 매우 험하며 문을 나서면 북한산이 앞을 가로막아
동쪽으로 성북동 골짜기로 내려와 동소문(혜화문) 밖 경원가도로 나오는 길 이외에는 다른 길이 없어
서울에 들어오는 데에는 동소문(혜화문)을 거치는 것이 더욱 빠르고 편리하므로 이용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그러므로 이 문을 폐쇄하여도 아무런 지장이 없어서 영구히 닫아두었다.

 

다만 가뭄이 심할 때에 이 문을 열고 숭례문을 닫는 풍속이 있었다.
이것은 북은 음이고 남은 양인 까닭에
가뭄 때 양을 억제하고 음을 돋우는 음양오행사상에서 나온 것이다.

 

또한 숙정문을 열어놓으면 장안의 여자가 음란해지므로 항상 문을 닫았다는 속설도 전하는데,
그것은 숙청문이 여자의 방위인 북쪽에 있기 때문이다.(북쪽은 음의 기운이 강한 곳이다.)

 

숙정문은 다른 대문들과는 규모 면에 있어 그 크기가 현저히 작다.
항상 닫혀 있어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숙정문을 대신하여 창의문을 북문이라고 부르기도 했다고 한다.

1976년 대통령의 명으로 북악산 일대의 성곽을 복원할 때 함께 복원되었다.

 

 

한양 도성의 4소 

혜화문(惠化門)

혜화문(惠化門)은 한양 도성의 동소문이다.
본래의 이름은 '홍화문(弘化門)'이었다고 하는데,
창경궁이 세워지면서 동문의 이름을 '홍화문(弘化門)'이라고 짓는 바람에
중종 6년(1511)에 혜화문으로 이름이 바뀌게 되었다고 한다.

북대문인 숙정문이 항상 닫혀 있다보니
동소문인 혜화문이 북대문의 역할까지 맡아했으므로
많은 사람들이 통행하던 문이었다고 한다.

 

일제 강점기인 1928년에 도시 계획이라는 명목 아래 헐려 없어진 것을
1970년대 후반, 서울 도성 복원 사업 때 다시 복원되었다.

 

광희문(光熙門)

광희문은 한양 도성의 남소문이다.
수구문(水口門)이라고도 불렀으며,
도성에서 죽은 사람들의 운구 행렬이
이 문을 통해 성 밖으로 나갔다고 해서 시구문(屍柩門)이라고도 불렀다.
1915년에 자연 붕괴도어 아래 부분의 석물 부분만 남아있었는데,
1970년대 후반 현재와 같이 복원 되었다.

 

소의문(昭義門

소의문(昭義門)은 한양 도성의 서소문이다.
소덕문이라고도 불렸다고 한다.
지금의 서소문동 큰 길에 있었던 것으로 추측하고 있으며,
광희문(光熙門)과 함께 시신을 성 밖으로 운반하던 통로로 사용되었고,
궁궐에서 죄를 지은 사람들이 이 문을 통해 도성 밖으로 쫓겨났다고 한다.


1914년 일제의 도시계획에 의해 부근의 성곽과 함께 완전히 철거되었고
지금은 사진을 통해서만 그 모습을 대강 알 수 있을 뿐이다.

 

<한양 도성의 서소문이었던 소의문, 지금은 찾아볼 수 없다.>

 

 

창의문(彰義門)

창의문(彰義門)은 한양 도성의 북소문이다.
고양군, 양주군 방면으로 통하는 문이었으며,
'자하문(紫霞門)'이라고도 불렸다고 한다.
태종 16년(1416)에 이 길을 통행하면 왕조에 불리하다는 풍수지리설에 의해 문을 닫아 두었다가,
중종 원년(1506)에 다시 열었다고 한다.


인조반정(1623) 때는 세검정에서 모의했던 반정군들이
이 문을 부수고 궁안으로 들어가 광해군을 몰아내고 인조를 왕위에 앉혔다고 전한다.
창의문의 서쪽 벽에는 인조반정 때 공을 세운 공신들의 이름을 새긴 현판이 걸려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