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 한쪽 비워둔다면

photostory- 路

2014.11.29. 한양도성(숭례문구간)

kyeong~ 2014. 12. 2. 00:34

 

 

숭례문 구간(돈의문터~숭례문~남산 백범광장):1.8km

대략 1시간

 

 

 

창의문에서 시작하여 경교장과 돈의문까지는 성곽을 보며 걷는 길이라

누구나 찾기 쉽고 걸을만하다..

돈의문터에 도착하니 번잡한 시내길...

도성길 표지판이 눈이 잘 띄지 않아

지도를 보고, 행인에게 묻고...그렇게 정동길을 걸었다

 

 

돈의문터 왼쪽 육교아래를 빠져나가

다시 돈의문터 맞는편쪽으로 걸어 올라왔다

그리고 행인 알려주는데로 경향시문사앞을 지나..정동길을

조금더 걸어가면 "관립법어학교터"라는 표지석이 나온다.

 

관립법어학교터官立法語學校址

중구 정동길 18(정동 28) (서울지방국토 관리청 앞)

조선은 개항기에 서구열강과 외교. 통상관계를 맺게 되자,

세계 각국의 말과 문화를 알고,

외교관 혹은 통역관 양성을 위해 외국어 교육학교가 필요하게 되었다.

이곳은 1895년에 설치한 프랑스어를 교육하던 학교가 있던 곳

 

 

여기서부터 정동길 풍경

우리나이면  덕수궁 돌담길 추억 하나쯤 간직하고 있을 것이다.

정동길에 들어서니..10년전쯤 정동극장에서 보았던 난타도 생각나고

몇번이나 걸었던 덕수궁이 생각난다.

언제오더라도 추억은 영원한것...

이화(梨花)여자고등학교

  • 1886년 5월 31일 미국 북감리교 선교사 스크랜턴에 의해 세워졌으며,
  • 조선 최초의 여성 교육 기관이다.
  • 고종황제가 이화(梨花)라는 교명을 하사함. 이화, 즉 배나무 꽃이라는 이름은
  • 학생들이 배꽃처럼 화사하게 자라기를 바라는 뜻이 담겨 있다.
  •  

    덕수궁 돌담길...

     

    1897년에 준공된 서울특별시 중구 정동에 있는 감리교 교회당.
    사적 제256호. 일명 ‘벧엘예배당’으로 불리기도 한다.

     

    붉은 벽돌로 된 북미계통의 단순화된 교회 건물로, 최초의 현대식 신교(新敎) 교회건물이다.

     단층건물로서 당초의 평면은 성단(聖壇)부분에 익부(翼部)가 달린 십자형이었으나,

     1926년 증개축 때 익부 외벽에 맞추어 증축함으로써 현재는 삼랑식(三廊式) 구조를 하고 있다.

     

    1885년 한국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로 파송된 아펜젤러(Henry Gerhard Appenzeller) 목사가

     1885년 10월 11일 정동에 있는 자신의 한옥사택에서 한국인들과 처음으로 예배를 드림으로써 한국 감리교의 요람인 정동제일교회가 창립되었다.

     처음엔‘벧엘예배당’으로 명명한 한옥 예배당에서 예배를 보다가 교인수가 급성장하게 되자 5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예배당을 짓기로 하고

     1895년에 착공하여 1897년 12월 26일 예배당 봉헌식을 가졌다.

     붉은 벽돌로 만들어진 최초의 본격적인 서양식 교회당이다.

     

    설계는 일본 요코하마에서 서양식 교회당을 설계한 경험이 있는 일본인 요시자와(吉澤友太郞)가 설계했고 한국인 심의석이 시공하였다.

     

     

    미술관 입구에 있는 강렬한 장미 조형물

    최정화-장미빛 인생

     

     

    서울시립미술관

    예전 대법원청사의 건물 정면을 그대로 보존했다지요?

    외형을 보존하면서 개축을 했다고 한다.

    미술관답게 고풍스런 모습이 인상적이다.

    길고 긴 도성트랙킹중이라 내부구경은 못하고 그냥 지나쳤다.

     

    러시아 대사관을 지나고...

     

    러시아 대사관 인근 배재공원

     

     

    아펜젤러가 세운 배재학당이 있던 곳

    1895년 배재학당 대학부가 정동 현 배재공원 터에 설립되어 대학교육을 시작하지만,

     1910년 한일합병 이후 대학설립인가를 받지 못한다.

    결국 1925년 일제에 의해 '배재학당'은 폐지되고 배재고등보통학교라는 이름의 중등교육기관으로 변모한다.

     

    평안교회라는데

    뾰족한 지붕의 청동색이

    유럽의 오래된 건물을 보는듯하다

     

    1877(고종 14)∼1907. 조선 말기의 의병.

    충청남도 홍성 출신,

     일찍이 군문에 들어가 1902년 7월에 육군보병 참위(參尉)로 임관되었으며 시위대에서 복무하였다.

     1905년 군인구락부를 조직하고 구국운동을 전개하였다.

    1907년 8월 한국군의 강제해산령이 내리자 이에 불복,

     시위 제1연대 제1대대와 제2연대 제1대대가 합세하여 일본군과 경성에서 교전하던 중

    부상을 입고 체포당하기 직전 자결하였다.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아 저기 성벽이다..

    정동길에 들어서면서 성벽이 없어서

    길찾기가 힘들다

    행인에게 물어거 숭례문방향으로 걷고 있자니

    성벽이 보인다

    오늘 트랙킹의 길라잡이 도성....

    사라졌다가 만나니 무척이나 반갑다.

     

    남지터

    숭례문이 보이는 삼거리 인도에 남지터 표석이 있다.

    남지는 연못이다. 풍수지리상 관악산은 화기가 매우 강하단다.

    그래서 관악산 화기를 막기 위해 숭례문 앞에 인공 못을 만들었다. 그

    러나 도성 안에는 크고 작은 불이 일어났고 제 역할을 못한 남지는 메웠다가 다시 복원하기를 몇 차례 했다.

    이것 외에 남지가 복원되고 메워지는 데 따른 다양한 속설이 전해진다.

    남지를 복원하면 남인이 성한다고 하여 복원한 적도 있고,

    반대로 역적의 집터라고 연못으로 만든 적도 있단다.

     

    수선전도에서 남지

     

    숭례문 [崇禮門] 국보1호

     

     

    숭례문 [崇禮門]  

     

    남대문(南大門)이라고도 함.

    서울특별시 중구 남대문로4가에 위치한 조선 초기 한양의 성문.

     

    국보 제1호. 1396년(태조 5) 창건되어 1448년(세종 30) 개축했다.

    조선왕조가 도읍을 한양으로 정한 뒤, 정궁인 경복궁의 방향에 의해 남문인 숭례문이 정문이 되었다.

    풍수지리에 의해 편액도 다른 문들과는 달리 세로로 쓰여졌다.

    이는 서울 남쪽에 있는 조산(祖山)인 관악산이 북쪽의 조산인 북한산보다 높고 산의 모양도 불꽃이 일렁이는 듯하여

     관악산의 화기를 맞불로서 꺾기 위한 것이며, 오행에서 남쪽을 가리키는 예(禮)를 숭상한다는 의미를 담아 숭례문이라 이름했다.

    1934년 일본이 '남대문'으로 문화재 지정을 했으나 1996년에 역사 바로세우기 사업의 하나로

    일제가 지정한 문화재에 대한 재평가작업을 하면서 '숭례문'으로 명칭을 환원했다.

     

    앞면 5칸, 옆면 2칸의 2층 건물인 이 문은 화강석의 무지개문을 중앙에 둔 거대한 석축 위에 세워져 있으며,

    지붕은 우진각지붕으로 상하층 모두가 겹처마로 되어 있고 사래 끝에 토수(吐首)를 달았다.

    추녀마루에는 잡상(雜像)과 용두(龍頭)를 두고,

    양성한 용마루에는 취두(鷲頭)를 두었다.

    2층인 이 문의 구조는 위층의 4모서리 기둥이 아래층까지 내려와 견고하게 결구되었으며,

     위층 중앙에는 4개의 고주를 두었다.

    다포계 형식의 공포를 얹은 이 문의 위층은 외삼출목, 아래층은 외이출목으로 구성되어

    현재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다포계 목조건축물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조선 초기 건축에서 나타나는 특징을 잘 보여준다.

     

    또 1962년 해체복원공사 때 발견된 상량문(上樑文)은 당시의 건축생산체계와 장인조직을 밝히는 데 귀중한 자료이다.

    2008년 2월 10일 방화사건으로 크게 훼손되어 2013년 4월까지 복구하였으며 이때 좌우 성곽도 함께 복구 하였다.

    현존하는 성문 중 규모가 가장 크며 조선 초기 다포계 양식을 대표하는 건물이다.

     

     

     

     

     

    서울 도심의 섬같은 숭례문...

    왜 저기에 들어가면 안된다고 생각하고 살았는지...

    섬같은 숭례문에 도성트랙킹을 하면서 들어가보았다.

     

    풍수지리에 의해 편액도 다른 문들과는 달리 세로로 쓰여졌다.

    이는 서울 남쪽에 있는 조산(祖山)인 관악산이 북쪽의 조산인 북한산보다 높고

    산의 모양도 불꽃이 일렁이는 듯하여

     관악산의 화기를 맞불로서 꺾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1층 출입문 천정의 청룡과 황룡 문양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는데

    나는 그동안 섬처럼 여겼다니...

    그러니까..섬은 스스로 만드는 것

    마음으로 섬을 만들고

    스스로 섬에 갇히고...

    또는 건널 갈 수 없다는 포기를 하고 마는 것.

     

     

    숭례문 측면모습

     

     

    수선전도 [首善全圖]

     

    수선전도목판 [首善全圖木板] 보물853호

    1840년대에 고산자 김정호(金正浩)가 제작한 것으로 추정되는 목판본 서울지도.

    세로 83cm, 가로 65cm. 상·중·하로 이루어진 지도의 판목(版木)이 고려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고,

    이 판목에서 찍은 목판본 지도는 국립중앙도서관 등 여러 곳에 소장되어 있다.

     수선이란 〈한서 漢書〉 〈유림전 儒林傳〉에 '으뜸 가는 선을 세움은 서울에서 비롯한다'는 뜻으로 쓰인 낱말로서,

     서울을 지칭하는 별호로 쓰였다.

    1824년에 건립된 경우궁(景祐宮)이 그려져 있고,

    창의문(彰義門) 밖 총융청이 총신영(總新營)으로 표기되어 있어 1830, 1840년대에 만든 지도로 추정되고 있다.

    북으로 도봉산·삼각산, 서와 남으로 한강, 동으로 중랑천까지 당시 한성부의 대부분 지역을 포괄했으나,

    특히 도성(都城) 안을 자세하게 그린 도성 중심의 지도이다.

    따라서 성밖과 성안의 지도 축척이 다르다.

    당시 서울의 도성과 북한산성·하천·도로·교량·동리·관아·궁실 등 주요시설이 매우 정교하고 정확하게 표시된 훌륭한 지도이며,

    판화와 판각 자료로서도 귀중하게 평가되고 있다.

     

     

     

    남대문을 빠져 나와 남산 방향으로  걸었다

    찾기 어려웠던 성곽은 다시 얼굴을 드러내고

    길잡이를 만난듯 반갑게 성곽을 따라 걷는다.

     

    왼쪽으로 sk건물과 힐튼호텔이 있다

     

    남산공원으로 접어들면 멀리 남산어린이회관과 남산타워가 눈에 들어왔다.

     

    도성 밖으로 ...

    우리나라 굴지의 빌딩이 서있다

     

    백범광장

     

     

     

     

     

     

    안중근 기념관 앞에는

    안중근의 필적을 새겨 놓은 비석들이 비림을 이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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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찾을 수도 없는 도성...

    불타고 새로 복원된 숭례문

    남지터...칠패시장터..등등..

    우리의 역사는

    무너지고 다시 일어서고

    그리고 새로운 역사를 향해

    도성은 서울을 지키고 있다.

    도성 한바퀴 돌고 나면

    조선왕조 오백년의 세월을 알 것 같은 구간이다.

    작년 5대궁궐을 답사하면서

    우리 역사에 대한 마력이 느껴졌었는데

    도성을 돌면서 또다시 그 굳건함과

    말없음과 변화를 배우고 있다.

    2014.11.29.토

     

    다음은 한양도성 남산구간으로 고고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