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양도성 인왕산구간(인왕산구간:돈의문 터 ~ 창의문 4km)
이른 아침 집을 나서는데
밤새 내린 비로 아름다웠던 단풍잎이 모두 낙하하였네요
비에 젖어 잠시 머물러 있지만
북풍을 따라 어디론가 잊혀져갈 잎들...
순간의 아름다움이 발길을 멈추게 한다.
비가 오는 날은
사람이나..
낙하한 잎이나..
지금 그자리,
그 곳에 머물게 한다.
비를 맞으며 머물러 있는 저 잎들...
나도 가을비에 젖어 어디론가 떠나지도 못하고
흔들리지 못하고 그렇게 살아간다.
한 곳에 정착된 마음 때문에
한 때는 행복이 었고
한 때는 슬픔이 있었다.
붉은 것들 위에도 가을비는 내리고
아름다웠던 것들 위에도 가을비는 내리고...
그렇게 밤사이 비에 젖어 있었던 것들을 바라보며
오늘 예정한 트랙킹 한양도성 인왕산 구간으로 걸었다.
창의문
이곳에서 오른쪽 산위로 올라가면 북악산 구간
왼쪽 윤동주시비쪽으로 가면 인왕산 구간...
인왕산에서 백악산까지 연계해서 걸어도 좋겠다.
현판은 도성밖에서 안쪽으로 들어오면서 볼 수 있다.
창의문과 도성
오늘 저 도성을 따라 갈 것이다.
윤동주 시인의 언덕에서 바라본 윤동주문학관
윤동주문환관 내부
윤동주(尹東柱)
윤동주(尹東柱, 1917년 12월 30일 ~ 1945년 2월 16일)는 한국의 독립운동가, 시인, 작가이다. 아명은 윤해환(尹海煥), 본관은 파평(坡平)이다. 중화민국 지린 성 연변 용정에서 출생,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하였으며, 숭실중학교 때 처음 시작을 발표하였고, 1939년 연희전문 2학년 재학 중 소년(少年) 지에 시를 발표하며 정식으로 문단에 데뷔했다. 일본 유학 후 도시샤 대학 재학 중, 1943년 항일운동을 했다는 혐의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후쿠오카 형무소(福岡刑務所)에 투옥, 100여 편의 시를 남기고 27세의 나이에 옥중에서 요절하였다.
사인은 일본의 소금물 생체실험으로 인한 사망인 것으로 사료된다는 견해가 있고 또한 그의 사후 일본군에 의한 마루타, 생체실험설이 제기되었으나 불확실하다. 사후에 그의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출간되었다. 일본식 창씨개명은 히라누마 도슈(平沼東柱)이다.
일제 강점기 후반의 양심적 지식인의 한사람으로 인정받았으며, 그의 시는 일제와 조선총독부에 대한 비판과 자아성찰 등을 소재로 하였다. 그의 친구이자 사촌인 송몽규 역시 독립운동에 가담하려다가 체포되어 일제의 생체 실험 대상자로 분류되어 의문의 죽음을 맞는다. 1990년대 후반 이후 그의 창씨개명 '히라누마'가 알려져 논란이 일기도 했다. 송몽규는 고종 사촌이었고, 가수 윤형주는 6촌 재종형제간이기도 하다. (브리테니커 백과사전 발췌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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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종주 문학관 뒤 언덕...
시인의 언덕이다.
윤동주 문학관을 나와 시인의 언덕으로 올라가는데
버스에서 화재가 나는 바람에 온동네가 시끌시끌 하다
중국인 관광객을 태운 버스엔진에서 화재가 났다는데
뉴스에서 인명피해는 없다고 하니 다행이다.
시인 윤동주의 서시(序詩)가 씌여진 시비詩碑
성찰적 의지적 고백적 성격을 가지는 시로
별과 바람의 시각적 심상으로 절대 순결을 윤리적 지표로 하는 청년의 양심적 고백의 시
부끄러움 없는 간절한 삶을 주제로 한 시
1941년 11월 20일에 쓴 시
윤동주 / 서시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와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들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시비 옆에는 정선의 "장안연우"그림을 소개한 소개판이 서있다.
이자리에서 장안 연우를 그렸다는데 많은 세월속에 풍경도 변했다.
정선의 "장안연우"
장안연우(長安烟雨)/영조17년(1741) 종이에 먹/39.8 * 30.0cm
<경교명승첩>간송미술관 소장
정선 [ 鄭敾 ] 1676(숙종 2)∼1759(영조 35). 조선 후기의 화가. 이칭별칭 자 원백(元伯), 호 겸재(謙齋), 겸초(兼艸), 난곡(蘭谷)
겸재 정선은 진경산수화풍(眞景山水畵風)의 창시자다. 진경산수화라는 것은 우리 국토의 자연환경을 소재로 하여 그 아름다움을 사생해 낸 그림을 말한다. 그렇다면 우리 산천의 아름다움은 늘 그렇게 있어 왔는데 어째서 겸재에 의해 그런 그림이 시작되었을까. 우리가 우리 자신을 보는 시각이 달라졌기 때문이었다.
진경시대의 절정기인 영조 17년(1741년) 봄에 겸재가 당시 세계적인 문화도시로 자부하던 서울을 그의 독특한 진경산수화법으로 그려 놓은 그림이 이 ‘장안연우’이다. 봄을 재촉하는 이슬비가 촉촉이 내리는 날, 서울 장안을 육상궁의 뒷산쯤에 해당하는 북악산 서쪽 기슭에 올라가 내려다본 정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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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왕제색도
인왕산구간은 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를 그렸던 구간이기도 하다.
여기서 우리 인왕재색도에 대해 알고가자.
1751년작.
국보 제216호. 종이 바탕에 수묵담채. 세로 79.2㎝, 가로 138.2㎝. 호암미술관 소장.
화면 오른쪽 상단에 씌어 있는 화제와 관지(款識)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정선이 75세인 1751년(영조 27) 윤 5월 하순에 비온 뒤의 인왕산 정경을 그린 것이다.
인왕산 아래에서 태어나 평생을 그 부근에서 살았던 정선이
비온 뒤 개고 있는 산의 모습을 화동 언덕(지금의 정독도서관)에서 바라보며 받은 인상과 감흥이 실감나게 표현되어 있다.
구도는 거대한 바위로 이루어진 암봉이 화면을 압도하듯 원경에 가득 배치되어 있어 대담하면서도 강렬한 느낌을 준다.
서서히 걷히는 안개 밖으로 돋보이는 산의 습곡은 짙고 옅은 먹색의 흑백대비로 표현했고,
크고 작은 수목들은 정선 특유의 활달한 편필(偏筆)로 묘사하여 변화를 주었으며,
특히 백색암봉의 양감을 강조하기 위해 구사된 묵찰법에 의한 힘찬 붓질은 화면에 무게감과 함께 활력을 불어넣어 준다.
이러한 기법은 그가 서울 근교의 실경들을 사생하면서 창안한 특징으로 이 그림에서 보다 완숙된 경지를 보여주며,
조선 후기 진경산수화가 도달한 최고의 수준을 보여주는 대표적 명품이다.
원래 화면 상단에 영의정 심환지(沈煥之)가 쓴 찬시가 있었으나
심씨의 후손이 제사용으로 쓰기 위해 절단해갔다고 한다.
어딜가나 참 이쁜 계절이다.
시인의 언덕을 벗어나 본격적인 도성구간인 인왕산을 향해 올랐다.
인왕산으로 오르는 길
가파른 언덕으로 오르다가
뒤돌아 본 모습
북악산이 보인다.
성광 왼쪽으로 청와대를 지키는 군부대가 자리하고 있어서
철조망이 있고 진입통제구간이다.
성곽의 세월을 보는듯하다
이끼긴 돌
현대 새로이 복원된 돌
넓은 돌
작은 돌...
역사속으로 걸어가는듯 하다.
틈없이 세월을 맞추어낸 ...
약간의 틈이라도 있었으면
긴 세월을 견뎌내지 못했으리라.
신구시대를 보는듯한 성곽
아래는 작은 돌로
위쪽 크고 모난 돌...
이쪽의 성곽의 돌은 좀 작은 편이다.
인왕산 치마바위
<치마바위 전설 한토막>
정상 바로 아래 경복궁이 내려다 보이는 곳에
병풍바위라는 넓은 바위가 있고 그 밑에 주름잡힌 치마가 연상되는
치마바위가 있으니 이 치마바위에는 애닯은 슬픈 전설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조선 제10대 임금이었던 연산군의 폭정으로 중종반정이 일어났다.
박원종, 성희안 등이 주축이 된 반정이 성공하여 진성대군이
조선 제11대 임금으로 즉위하였으니 이 분이 중종이다.
중종이 즉위하자 왕비가 된 분이 단경왕후이니
이 분은 바로 연산군의 추종자였던 신수근의 딸이었다.
신수근은 중종반정의 반대세력으로 반정과정에서 역적으로 참살되었으니
왕후는 역적의 딸인셈이다.
반정공신들이 가만히 있을리가 없었다.
왕비를 그대로 존속시킨다면 자신들의 처지가 위태롭다고 생각하였을 것이다.
그들은 사사로이는 왕비의 친정아버지를 죽인 장본인들이 아닌가.
아무래도 후환이 두렵고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역적의 딸을 왕비로 삼을 수 없다는 공신들의 끈질긴 요구가
날마다 계속되었다. 결국 중종도 어쩔 수 없이 왕후 신씨를 폐위시켜
인왕산 밑에 있는 사가로 내보낼 수밖에 없었다.
왕후로 책봉된 지 불과 7일 만의 일이었다.
그러나 중종과 폐비 신씨는
10여년을 두터운 정으로 함께 살아온 부부가 아니던가.
그들은 서로를 깊이 사랑하는 부부였기에 신하들의 강요에 못 이겨
헤어졌지만 그 정을 쉽게 지울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중종은 종종 경회루에 올라 폐비 신씨가 살고 있는
인왕산 쪽을 바라보곤 하였다는 것이다.
이 소문을 들은 폐비 신씨는 인왕산에 올라
병풍바위 밑에 있는 바위에 궁중에서 입던 치마를 걸쳐놓아
왕이 바라볼 수 있게 하였다고 한다. 거의 하루도 거르지 않고
아침에 치마를 펼쳐 놓았다가 저녁이 되면 거둬들이면서
서로간의 사랑의 정을 주고 받았다고 하니 얼마나 애달픈 사랑이야기인가.
이 때부터 이 바위에 치마바위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전한다.
한 나라의 주인이었던 왕으로서도 어쩔 수 없었던 슬픈 사랑의 이야기가
전설로 전해 내려오는 것이 인왕산 치마바위 이야기다.
그럴 듯한 이야기여서 치마바위 쪽에서 경복궁을 바라보니
경복궁의 경내와 경회루가 확실하게 보인다.
잠시 뒤돌아 북악산을 바라본다
그 아래 나라님의 대궐도 보이고... 정상에 오르는 길은 급한 경사의 계단이다 숨이 차오를 즈음 잠시 오른쪽으로 보면 일명 "기차바위"가 보인다. 홍제동에서 보면 기차처럼 보인다고 하여 기차바위라고 불리운단다. 잠시 쉬어 갈겸 조망 좋은 기차바위로 내려선다.
기차바위
기차바위에 올라앉은 해골 닮은 바위 이길로 주욱 내려가면 홍제동으로 내려가게 된다. 기차바위의 조망바위이다 정상부보다 여기서 풍경을 바라보는 사람이 많다 쉬는 사람도 더 많다 적당히 그늘도 있고 서울시내를 바라보기에 좋은 곳이다. 마주 보이는 곳은 인왕산 정상부이다.
기차바위에서 쉬었으니
이제 다시 쉬엄쉬엄 인왕산 정상부를 향해 오른다.
인왕산 정상
인왕산 [仁王山]
높이 338m.
산 전체에 화강암으로 된 암반이 노출되어 있으며, 기묘한 형상의 바위들이 곳곳에 솟아 있어 조선시대부터 명산으로 알려져왔다.
산의 서쪽 기슭에 있는, 중이 장삼을 입은 듯한 선바위(서울특별시 민속자료 제4호)는
예로부터 이곳에서 소원을 빌면 그 소원이 잘 이루어졌다고 하여 유명하다.
일제강점기에 남산에 있던 무신당인 국사당을 선바위 옆으로 옮긴 뒤부터 무속신앙과 더욱 밀착되었으며,
주위에 많은 무신당이 생겨 지금도 굿이 성행하고 있다.
북악산을 주산으로 하는 서울의 성곽이 능선을 따라 동쪽으로는 자하문·명륜동·동대문으로 이어지고,
남쪽으로는 사직동·홍제동까지 이어진다.
군사적인 이유로 한때 출입이 통제되었으나,
지금은 사직공원·청원 아파트·무악재길 등에서 출발하여 성곽을 따라 정상에 이르는 등산로가 개방되어 있다.
경복궁은
좌청룡, 우백호로 낙산과 인왕산을 거느리고 있다.
그런데 풍수지리에 따르면 좌청룡은 장남을 상징하며,
우백호는 차남을 상징한다. 하지만 장남에 해당하는 좌청룡 낙산이 낮고,
차남에 해당하는 우백호 인왕산이 높고 험준한 까닭에
조선왕조는 적장자(정실부인이 낳은 맏아들) 세습이 드물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실제적으로 26번 있었던 왕위계승에서 적장자로 순탄하게 계승된 경우는 단 여섯 명에 불과하다.
그 여섯 명은 문종, 단종, 연산군, 인종, 현종, 숙종이다.
한양천도를 결정하고 도성을 지으며 무학대사가 인왕산을 주산으로 정할 것을 주장한 것도
이러한 백악주산론의 약점을 걱정했기 때문이란 말이 전한다.
만일 인왕산이 한양도성의 주산이 되었다면 좌청룡이 되는 백악이 우백호가 되는 남산보다 더 높기 때문에
조선왕조의 장자세습이 순탄할 수 있다는 논리이다. 역사에서 '가정이란 없다'고 하지만
이런 풍수지리설에 의한 해석을 접하고 있노라면 흥미롭다는 사실을 감출 수 없다.
인왕산 정상은
종로구와 서대문구의 경계라는 지적표가 있다
찍다보니 바로 찍지 못하고
거꾸로 찍었다...
실수~ ♡♡.
정상에서 다시 숭례문을 향하여 하산
왼쪽으로 보이는 "나라님의 집"
궁금해서 자꾸 바라보게 된다.
성곽 위에 얹는 "여장"
화강암으로 한양도성 축조시의 것으로 보인다.
장군바위 위...군부대까지
S자 도성을 조망하며 내려간다.
앞을 보다가 문득 뒤돌아보다가....
길고 긴 도성을 따라 걷는 일이 지루하지 않다.
범바위
범바위를 지나면 군부대가 있다
그 쪽은 진입이 금지되어 있어서 다시 도성을 따라 내려간다.
내려오가 다시 뒤돌아본 군부대 부근
왼쪽 장군바위 위에 군부대가 있고
가운데 모자바위..
군대군대 초소가 있다
청와대를 비롯한 중요한 시설물을 지키위해서다.
인왕산 구간은 1993년 문민정부가 들어서면 서 개방이 된 구간이다.
중간에 선바위와 국사당이 있는 저 구간을 통하여 내려오고 싶었지만
길을 몰라 그냥내려오고 말았다.
멀리서 줌인하여 찍었는데 다음에는 저 국사당을 가보고 싶다.
국사당(仁王山國師堂)
정식 명칭은 인왕산 국사당(仁王山國師堂). 한국 무속신앙에서 신을 모셔놓고 굿을 하는 데 편하도록 민가와 좀 떨어진 곳에 짓는 굿당 중 하나로, 중요민속문화재 제28호(1973년 7월 16일 지정)로 지정되어 있다. 인왕산 국사당의 건립연대는 확실치 않다. 다만 건축 양식이나, 진열하고 있는 무신도의 신격, 조선왕조실록에 남산의 산신을 목멱대왕에 봉했다는 기록이 나오고, 목멱신사(木覓神祠)에 관련된 기록이 있어 조선시대에 지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본래 국사당은 서울 남산 꼭대기(지금은 팔각정이 위치)에 지어진 건물이었다. 그러나 1925년 일본인들이 남산 기슭에 조선신궁(朝鮮神宮)을 지으면서 국사당이 자기들의 신사보다 높은 곳에 있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겨 이전을 강요하면서 결국 지금의 위치로 이전되었다. 이전 장소를 인왕산 기슭으로 택한 것은 태조 이성계와 무학대사가 그곳에서 기도하던 자리라고 전해지기 때문이다.
국사당은 무당개인이 운영하는 신당이 아니라 관리자인 당주(堂主)가 따로 소유하고 있으면서 무당의 요청이 있으면 유료로 빌려주는 굿당이며, 일반 개인도 절처럼 개인적으로 찾아와 참배하고 기도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근처 환경이 환경이니만큼 주변에 암자와 절, 교회가 잔뜩 섞여 있지만 역사적 상황 때문인지 이렇다 할 종교문제가 터지는 경우는 별로 없다. 국사당의 근처에는 선바위가 있고, 선바위에서는 독립 운동가들이 많이 투옥되었던 서대문형무소가 바로 보이는 위치에 있다. 과거 일제의 압제에 시달리던 독립 운동가들이 같혔던 서대문형무소와 일제의 압박에 밀려 옮긴 국사당의 묘한 조화는 많은 이들에게 강한 인상과 여운을 주고 있다. |
선바위(禪岩)
선바위(禪岩)는 서울특별시에 있으며 무속 신앙의 대상이 되는 바위이다. 선바위는 마치 중이 장삼을 입고 있는 것처럼 보이므로 '禪'자를 따서 이름하였다. 사람들은 석불님ㆍ관세음보살님, 또 이 두 개의 바위를 양주(兩主)라고 부르기도 한다. 임신을 원하는 부인들이 이 바위에 빌면 효험이 있다고 하여 정성을 드리는데 작은 돌을 붙이면 효험이 크다고 하여 돌을 문질러서 붙인 자국이 남아있다. 이를 붙임바위라고 한다. 선바위는 높이가 7∼8m, 가로 11m 내외, 앞뒤의 폭이 3m 내외로 두 개의 큰 바위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는 형상이다. 바위 아래에는 가로 약 10m, 높이 70∼80cm의 제단이 시멘트로 단장되어 있다.
선바위 전설
이 바위는 태조 이성계와 무학대사의 상이라는 전설과 이성계 부부의 상이라는 전설이 있다. 또 무학대사가 태조의 명을 받고 천도할 곳을 찾다가 현재의 서울을 찾아냈으나 국운이 500년밖에 유지 못 할 것을 알게 되자 이 선바위에서 천일기도를 하였다고 하며 그 뒤부터 이 바위가 유명하게 되었다고 한다.
또 태조가 도성을 쌓을 때 왕사(王師)인 무학대사와 문신인 정도전이 이 바위를 성 안으로 하느냐 성밖으로 하느냐로 크게 의견이 대립되었다. 태조는 결정을 미루고 돌아와 잠을 자는데 꿈에 4월인데도 눈이 쌓이고 있었다. 밖을 내다보니 낮에 회의하던 곳이 보이고 안쪽으로 들여쌓은 쪽의 눈이 녹아 버렸다. 태조는 이것이 하늘의 계시임을 알고 정도전의 주장대로 선바위를 성밖으로 두게하자 무학대사는 크게 한숨을 쉬면서 “이제 중들은 선비 책보따리나 짊어지고 다니는 신세가 되었다.”고 한탄하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한양도성(서울성곽)을 설성(雪城)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신앙의 대상으로서의 선바위
제일(祭日)은 개인별로 와서 치성을 드리기 때문에 일정하지 않다. 그러나 불교 신자들은 4월 초파일, 7월 칠석날 같은 경우는 많은 사람이 다녀간다고 하며, 영산제(靈山祭) 때에는 여러 스님과 신도들이 이곳에 와서 제를 지낸다고 한다. 제의(祭儀)는 개인치성을 드리고 사람들이 정화수ㆍ백설기ㆍ메ㆍ과실 등 저마다 간단한 제물을 준비해 와서 제단에 차려 놓고 절을 하며 기원한다. 절은 보통 3번하고 반절하며 방향을 돌려가며 절을 하기도 한다. 그리고 많이 할수록 좋다고 하며 108염주를 하나씩 돌려가며 절을 하기도 하고 3천번을 하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인등(引燈)은 개인의 기복(祈福)을 위해 선바위 관리사무소에서 원하는 사람에게 액수에 따라 반년이나 일년씩 켜준다. 인등은 옛날 등잔불 모양이며 위의 심지 부분에 작은 전등이 달려 있다. 선바위는 암석숭배(岩石崇拜)의 일종으로 이것이 전설화되고 또 불교와 무속신앙(巫俗信仰)이 밀착되면서 무속신앙의 중요지가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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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인왕산을 거의 내려온듯 하다
암릉 구간이 있고 계단이 많아서
낮은 산임에도 불구하고 발목이 시원치 않다.
큰 잎이건 작은 잎이건
붉거나 노랗다
억새도 가을 바람에 어느새 힘없이 누웠다.
멀지 않아 찬바람이 불겠다.
이곳을 내려오니 잠시 성곽이 끊겨서
행인에게 물어보며 걸었다.
홍난파 가옥이 눈에 띈다
아담하고 작은 가옥에 담쟁이가 붉게 물들었고
옆에 감나무 한 그루가 지나가는 행인을 반기고 있다.
주말을 제외한 날은 입장이 가능하고 해설사의 해설도 들을수 있다.
일주일에 한번 홍남파의 자손중의 한사람이 피아노 연주도 한다고 함.
홍난파 가옥
6년간 말년을 보낸 집
도일계통 선교사의 주택으로 지어졌던 집
집앞 홍난파상은 kbs건물안에 있던 것을 이리로 옮겨 온 것이다라고 한다.
2004.9.4. 등록문화재90호로 지정
홍난파 [洪蘭坡] 1898. 4. 10 경기 화성~ 1941. 8. 30 서울. 작곡가, 바이올린 연주자. 본명은 영후(永厚). 홍순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마을 글방에서 한학을 배웠고 1910년 황성기독교청년회 중학부에 입학했다. 이때부터 바이올린을 구입하여 음악수업을 했다. 15세 되던 해에는 한국 최초의 음악전문교육기관인 조선정악전습소 서양악과에 입학하여 성악을 전공했고 졸업 후에는 다시 기악과에 입학하여 김인식에게서 바이올린을 배웠다. 졸업 후 조선정악전습소의 보조교사로 있었다.
1918년 일본에 유학하여 우에노[上野] 음악학교에 입학했다가 1919년 3·1운동에 참여하기 위해 학업을 중단하고 잠시 귀국했다. 3·1운동 후 일본으로 돌아가 복학을 신청했으나 받아주지 않자 좌절하고 다시 귀국했다. 그는 도쿄[東京] 유학시절 비록 일본에서 발간한 것이지만 〈삼광〉이라는 한국 최초의 음악잡지를 발간했다. 귀국 후 매일신문사에서 기자생활도 했으며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에 다니기도 했다.
1920년 4월 바이올린곡으로 작곡한 〈애수〉라는 곡의 악보를 그의 단편소설집 〈처녀혼〉의 끝에 실었는데, 1925년 김형준에게 노랫말을 부탁하여 지은 노래가 〈봉선화〉이다. 1922년 경상악우회 주관으로 만들어진 연악회(硏樂會)에서 음악 보급에 힘썼다. 1925년 한국 최초의 바이올린 독주회를 가졌으며 국내 최초의 음악잡지 〈음악계〉를 창간했다.
〈창조〉에 〈음악만필〉을 집필하기도 했다. 1926년 일본 도쿄 고등음악학원에 편입하면서 도쿄 교향악단(지금의 NHK 교향악단)의 제1바이올린 연주자로 입단했다. 1 929년 졸업 후 귀국하여 창작동요 100곡을 수록한 〈조선동요 100곡집〉 상권을 연악회를 통해 간행했다. 1931년 2월 조선음악가협회를 결성하고 상무이사를 역임했으며, 빅타레코드사의 고문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홍성유·이영세 등과 난파 트리오라는 한국 최초의 바이올린 3중주단을 조직하여 활동했다.
같은 해 7월 미국 시카고 셔우드 음악학교에서 공부했으며 1933년 귀국하여 이화여자전문학교 강사로 있으면서 〈조선동요 100곡집〉 하권을 펴냈다. 1936년 경성방송국 양악부 책임자로 취임하여 경성방송관현악단(지금의 KBS 관현악단)을 조직하고 지휘자로 활약했다. 1937년 한국 최초로 교향곡 연주를 지휘했는데, 곡은 모차르트 교향곡 제41번 C장조 〈주피터 교향곡〉이었다. 1938년 경성음악전문학교 교수로 취임했고 연악회를 통해서 〈음악만필〉을 간행했다. 조선음악협회의 평의원으로 있으면서 이광수 작사의 국민가요 〈희망의 아침〉을 작곡하기도 했다. 1941년 늑막염이 재발하여 경성요양원에서 죽었다.
1954년 난파기념사업회가 설립되어 〈조선동요 100곡집〉을 재간행, 1968년 수원 팔달공원에 〈고향의 봄〉 노래비 건립, 1969년 난파음악상이 제정되었다.
주요 작품으로 바이올린 곡 〈애수의 조선〉·〈로만스〉·〈여름밤의 별들〉·〈라단조 가보테〉·〈동양풍 무곡〉, 가곡 〈성불사의 밤〉· 〈사랑〉·〈금강에 살으리랐다〉, 동요 〈병아리〉·〈고향의 봄〉·〈개나리〉·〈할미꽃〉 등이 있다. 또한 〈음악일화〉·〈동서음악의 비교〉·〈조선문화 20년〉 등의 평론과 〈서울 계신 K형께〉·〈첫 무대의 기억〉·〈악단의 뒤에서〉 등의 수필, 〈최후의 악수〉·〈처녀혼〉 등의 소설도 썼다.
한때 홍난파가 흥사단가를 작곡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1996년 정부는 김세형에게 금관문화훈장을 추서하면서 그가 흥사단가를 작곡했다고 밝힘으로써 흥사단가의 작곡자는 홍난파가 아니라 김세형으로 확인되었다. 또한 홍난파의 대표곡인 〈봉선화〉를 비롯해 그가 작곡했다는 여러 곡들이 친일 행위와 관련이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면서 논란을 빚고 있어 그에 대한 평가는 아직까지 정립되지 않은 상태이다.
(브리테니커 백과사전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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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곽에 드리운 붉은 담쟁이가 이뻐서 셔터를 누르고....
잎이거나
사람이거나..
붉은 것은 모두 아람답다
홍남파 가옥옆 월암공원
도성옆에 고인돌..
세계유일의 성곽으로 둘러쌓인 도시를 만들기 위해
성곽을 복원 중이고 70프로단계까지 복원했다고 한다.
이 성곽 복원을 마무리 하는데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을 신청한 것이라고 한다.
복원중이던 성곽이 시상청 옛건물 때문에 또 멈추고 만다.
교육청옆 길을 따라 내려가면...
삼성병원내의 경교장을 만난다.
경교장[京橋莊] 서울특별시 종로구 평동에 위치한 김구(金九)의 개인 사저. 사적 제465호(2005. 6. 13 지정). 2001년 서울시 문화재로 지정되었다가 2005년 사적으로 승격되었다. 건축면적 396.69㎡, 연면적 945.45㎡. 이화장(梨花莊)·삼청장(三淸莊)과 함께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위한 활동 3대 명소의 하나로 불린다. 서대문경교장이라고도 한다.
광화문과 서대문 사이에 있던 동양극장 건너편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지금의 강북삼성병원 자리이다. 최창학 소유의 별장이었던 이 집은 1938년 완공 당시에는 죽첨장(竹添莊)이라 하였으나, 김구가 경교장이라 개칭하였다. 195년 11월 임시정부 국무위원들과 함께 귀국한 김구는 1949년 6월 26일 경교장 집무실에서 육군소위 안두희에게 암살되기까지 이곳에서 생활하면서 건국에 대한 활동 및 반탁, 통일운동을 이끌었다. 이후 타이완 대사관 관저, 국군의료진 주둔지, 남 베트남 대사관 관저 등으로 사용되다가, 1968년 고려병원(현 강북삼성병원)이 인수하였고 병원 부속 건물로 사용하다, 사적으로 지정된 후 내부 시설이 복원되었다.
경성공업전문학교(서울공업고등학교의 전신) 건축과를 졸업한 김세연이 설계했다. 1939년 고전주의풍으로 완공한 경교장은 지상 2층, 지하 1층, 연건평 264평 규모로, 좌우대칭형 2층 양옥으로 지어졌는데, 정면 중앙 1층에는 당시로서는 드물게 승·하차 시설을 갖춘 현관을 설치했으며, 당구실과 이발실을 둔 초호화 건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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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도성 인왕산구간 종착지 돈의문터에 도착하니
돈의문 표지석이 보이지 않는다
길옆 목재 담장에 돈의문터라고 적혀 있다.
이렇게 해서
창의문 에서 돈의문터까지 4km
2시간30분여시간동안 쉬엄쉬엄 걸었다.
돈의문(敦義門)은 조선의 수도인 한양의 4대문 중의 하나로 서쪽의 정문이다. 한양 도성 서쪽의 큰 문이라 하여 서대문(西大門)이라는 명칭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고, ‘새문’, ‘신문’(新門)이라고도 불렀다. 돈의문으로 가는 길에 위치한 중구 정동의 '신문로'나 '새문안길,' '새문안교회' 등의 이름은 돈의문의 다른 이름인 '신문', '새문' 에서 따온 말이다.
돈의문은 1396년(조선 태조 5년) 한양 도성의 제2차 축성 공사가 끝나고 8문이 완성되던 때 처음 세워졌다. ‘돈의문’이라는 이름은 유학의 덕목인 인의예지신 중 의(義)를 넣어 만든 이름이다. 1915년 일제에 의해 강제 철거되었다. 서대문구가 서대문에서 이름을 따왔지만, 지금은 행정구역 개편 때문에 중구 관할 지역에 속한다. 현재 서울 중구 정동 경향신문사 앞 정동사거리에 '돈의문 터' 라는 표지석이 있다. 복원서울특별시는 인근의 서대문 고가차도를 철거하고, 2013년까지 이 자리에 돈의문을 원형 그대로 복원을 예정하였다. 서울시는 새로 복원되는 돈의문과 경희궁 서울역사박물관, 경교장 (현 강북삼성병원 본관)과 서울성곽 등을 한 축으로 묶어 서울의 역사문화중심지로 개발할 방침이다 그러나, 현재 돈의문 복원은 예산 및 원형 복원 등의 문제가 겹쳐 2022년까지 중장기 과제로 미뤄진 상태다.
사대문:흥인지문(동대문), 돈의문(서대문),숭례문(남대문),숙정문(북대문) 사소문:혜화문(동소문), 소의문(서소문), 광희문(남소문), 창의문(북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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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내가 쉼없이 길을 걷는 이유는
길에서 이야기가 생긴다
길에서 이야기를 듣는다
몰랐던 이야기들을 듣노라면
세상이 넓어지는 느낌이고
이런 이야기로 인해 내가 모르는 것이 무궁무진하여
겸손함을 느끼게 한다.
지금 내가 보고 있는 것은 손바닥 만한 세상...
길을 나서보라..
큰 우주를 만나게 되리라.
하늘 같이 넓은 세상을 만나 수많은 이야기를 들으리라
내가 살고 있는 이야기를 소중히 하라
또 다른 이에게는 한순간 큰 우주가 될 삶이 될 수도 있다는 것...
오늘도 나는 길에서 쉼없이 이야기를 듣는다.
2014.11.29.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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